'시'에 해당되는 글 253건

  1. 2019.11.01 도시의 노래
  2. 2019.11.01 달떴다고 할 것도 없는 밤
  3. 2019.10.31 나날은 죽어가고
  4. 2019.10.30 애가
  5. 2019.10.30 결백하지 못한 슬픔에 2
  6. 2019.10.29 21세기 정신분열증환자
  7. 2019.07.12 비명
  8. 2019.06.23 오늘도 마치 어제와 같은 날
  9. 2019.05.19
  10. 2019.05.16 스무 개짜리 관觀
  11. 2019.05.11 객관화
  12. 2019.05.11 분노의 끝
  13. 2019.05.09 제 1 정리
  14. 2019.05.09 휴머니즘
  15. 2019.05.09 이천십구년의 한 조각
  16. 2019.02.01 오전 네 시
  17. 2018.12.18 물의 궁전
  18. 2018.11.04 발걸음은 계속 빨라지고 2
  19. 2018.10.17 십자가
  20. 2018.10.10 멀어지는 길
  21. 2018.10.07 가을밤의 기도
  22. 2018.09.24 견자見者가 사는 세계
  23. 2018.09.23 영원의 끝
  24. 2018.09.16 걷는 구두
  25. 2018.09.16 탄생의 종말
  26. 2018.08.23 거울을 보네
  27. 2018.08.21 회계원 블루스
  28. 2018.08.21 날것의 영혼
  29. 2018.08.09 전통의 사장
  30. 2018.06.25 프로방스의 흙 1

도시의 노래

글/시 2019. 11. 1. 22:29 |

도시의 노래


도시의 노래가 들린다
산양의 비명 같기도 한
죽은 개의 단말마 같기도 한
그런 노래가 그림자 속에 울리네

옆집 아이가 금붕어를 묻은 자리는
어디였더라? 여하간 이 시멘트의 왕국에서는
꼬챙이로 작디작은 흙들을 찌르다보면
쉬이 알 수 있을 것이다

거대한 무덤 위에 지어진
자신의 장례식을 예약하는 자들의 왕국은
이제 자신만을 위해
노래를 부르고 있다

심야, 도시가 괴성을 울부짖는 시간
젊은이들은 술 취한 입술로 라라 노래를 부르고
형광색 네온사인들이 금화에 홀려있을 때
도시는 자신의 장송곡을 부른다

이제 모두 잠들 시간이야
나는 더욱이 무너질 시간이야
자본주의도 공산주의도
연명책은 되질 못했다

아아, 썩어가는구나
아아, 무너질 때로구나
인간들이 다음 향락을 찾아 나설 때
도시는 자신의 장송곡을 부른다.

Posted by Lim_
:

달떴다고 할 것도 없는 밤


숨 쉬는 일이 금지된 내 방에는
카페인, 니코틴, 타르의 역한 냄새로 가득해
풀뿌리나 석양의 향기 같은 것은 코에 닿지 않고
무엇보다 나를 슬프게 하는 것은
이곳이 활자에 머무는 죽은 유령들로 가득하다는 것이다.

주로 탄식하며 생각하는 것은
폐쇄된 행성에서의 삶에 관한 것으로
아아, 말라가는구나, 존재도 행성도
탈출구는 한 줌의 바르비투르산이로다.

서랍 속의 불화佛畫는 열어보면
삼천대천세계의 진실을 가리킬 지언데
정작 서랍은 열어보면
형형색색 수십 개의 알약에 부처의 손이 가려져있다.

심야의 나는 자동인형 같아라
그림자 속의 사람들이 ‘중국어 방’이 아니라는 증거가
어디에 있지, 이따위 망념에 젖어
까딱까딱 담배나 태우러 다닌다.

어둠 속에 묘비처럼 서서 줄담배를 피우면
골목마다 비극에 비명에 절망이 있음이 더 잘 들리는 바
으으 추악해라, 떨며 몸을 돌리고
결국에는 내 비극과 비명과 절망으로 기어들어가는 것이다.

목 베는 신이 상공을 활보하는 것은 분명한데―어라, 아무래도
그놈은 혼자 질식사로 돌진하는 놈에게는
별 관심이 없는 것 같아, 이상하게도, 그렇게 되었으니
내일도 일단은 살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

Posted by Lim_
:

나날은 죽어가고

글/시 2019. 10. 31. 19:51 |

나날은 죽어가고


오늘도 참으로 아무 일 없었습니다

오후 5시 초겨울 하늘은
흰색 푸른색으로 바싹 굳었고
단지 안의 사람들은
어미가 새끼 손을 잡고 가는데

단풍이 지려나보다, 누가 말했는데
그 말에 처음 나뭇잎을 보고
정말로 그렇구나, 납득하고는
인간들도 단풍이 들지는 않으려나

평상에 앉아 마시는 커피는
맛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고
습관처럼 졸린 눈으로 담배를 물며
늙은 개가 묶여 지나가는 것을 보고

오후 7시, 어둠이 내리면 바깥세상에는
그림자처럼 괴물이 살아
얘야 어서 들어가자꾸나
또 졸린 눈으로 그런 광경을 보고, 암, 그렇지

별도 꽃도 없는 저녁 무렵에는
단풍이 시커멓게 몸부림칩니다
평상에 들러붙은 먹물 같은 나는
이젠 거리에 어미도 새끼도 없구나

담뱃불은 암막에 부유하는 나룻배 같고
구름 낀 천정 밑에는
여기엔 희망도 꿈도 없어, 미래는 니코틴처럼 소화되고
바람은 후우우 루우우 울기만 할 뿐

죽음을 기다리나? 굳이 그렇지도 않겠지
단지 어디선가 밥하는 소리는 들려오고
따뜻한 정종 한 잔 마시고 싶긴 하나―굳이 그럴 일도 없지
후우우 루우우 울며 나날은 죽어갈 뿐

오늘도 참으로 아무 일 없었습니다

Posted by Lim_
:

애가

글/시 2019. 10. 30. 02:56 |

애가


내륙의 밤에 모두가 잠드는 시간에
차가운 콘크리트 위에 콘크리트만큼 차가운
내가 평생 바라기를 마지않던 육신이
거기에 누워있다면

해부학적으로 완벽한 인형은 누구든 될 수 있다
뇌파가 끊기고 전기신호가 끊기고
우연이 만든 가장 적절한 시간에
당신을 누구보다 사랑할 내가 거기에 있기만 하다면

별빛이 비추는 암청색 거리에
인형 하나가 버려져 있다

별빛이 비추는 암청색 거리에
별빛만큼 조용한 인형이 있다

분명 어떤 어린아이가 흘리고 간 것이겠지
그러나 왜 흘렸는지는 모른다

단백질, 칼슘, 지방, 그런 것들은
무기물보다 달빛에 더 빛나는 성질이 있다

철분, 초산, 스테인리스스틸, 그런 것들은
달 속에 녹아들어 현상을 더 아름답게 한다

인간은 밤에 태어났음이 틀림없다
본성은 평화롭고 광막한 것이다, 마치
당신이 눈을 감는 시간에 어둠이 내리듯이

영령은 떠났다. 그러나 영령이 떠나도
아름다움은 공중으로 흩어지지 않는다
생각보다 미학이라는 것은
그로테스크에 머물기를 좋아한다

지구가 하나의 묘지라면
거기 묻힌 뼈들의 웅장함을 우리가 볼 수 있다면
우리는 굳이 환경주의자들이 필요하지 않을 텐데

해부학적으로 완벽한 인형을
우리는 뭐라고 불러야 좋을까
그 칼슘이 만드는 요철이나
날붙이 끝에 벗겨지는 콜라겐에 대하여
그 침묵하는 아름다움에 대하여
굳이 뭐라 부르든 상관은 없을 것이다

이제 알았다, 난 인본주의자였다

영혼이나 정신이라는 개념은 처음부터 필요하지 않았다
인간은 인간에게 에로스가 절제된 사랑을
그러나 아가페라는 성역으로 갈 이유도 없는 사랑을 할 뿐이다
온갖 파토스를 통하여

Posted by Lim_
:

결백하지 못한 슬픔에

글/시 2019. 10. 30. 01:32 |

결백하지 못한 슬픔에


맥주에서 짠맛이 났다

없는 돈을 긁어모아 간 맥주집에서
시킨 가장 싼 맥주는
짜디짠 소금 맛이 났다

왜 짠맛이 나나
홍콩 시민들이
최루탄과 진압봉에 맞고 있어서 그런가
아프리카에서
눈도 못 뜨는 아이들이 굶어죽고 있어서 그런가
위안부 할머니들이
일본 정부에게 매춘부 취급을 받고 있어서 그런가
아니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맥주를 사서 마시고 있어서인가

짜디짠 소금 맛이 나는 맥주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한 방울까지 먹어치우고선
짜디짠 마음으로
거리에 나섰다

아무도 없는 거리에 빨간 불은 서글프게 빛나고
나는 그것을 담아
내 안에 빨갛게 옮겨 붙이고

아무도 없는 거리에서
미국 남부에서 만든 블루칼라들의 담배는
단맛이 났다

Posted by Lim_
:

21세기 정신분열증환자

글/시 2019. 10. 29. 03:02 |

21세기 정신분열증환자


딱히 새벽녘의 도봉구에
그림자 사이로 싯구들이 기어 다니는 것도 아니지만은
새벽마다 가장 어두운 골목으로 싸돌아다니는 건
담배를 태울 핑계입니다

요즘 세상이라 하면 놀라운 것 투성이라
아무도 없을 골목으로 들어가면 어디선가 기계 여성이
이곳에는 쓰레기를 버려선 안 된다고 하기에
거기에 누워 잠을 청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제 네모난 위장에서는 열다섯 개하고 네 알의 알약이
달가닥거리며 저들끼리 음모를 꾀하니
이 새벽의 방황도
내일 일어날 나는 기억하지도 못 하겠지요

친구에게는, 오버도스의 외출이야, 하고는
별 다른 설명도 없이 나와 버렸으나
누구든 제 곁에 있는 자들이란 익숙해지거나 떠나버리기 마련이어
무슨 생각으로 굳이 그런 말을 했는지는 모릅니다

아아, 갈증 나는 도시입니다 그러나
물을 마셔도 술을 마셔도 가시지 않는 갈증이란
분명 약물의 부작용이거나 정신의 갈증일 터인데
그런 것이 구분이나 되는 것인지요

절망했느냐 하면 굳이 그런 것은 아닙니다
다만 저녁에는 까치가 울었고 작은 아이가 제 담배연기를 피해갔고
내겐 아무래도 人間이 없는 것 같아, 되뇌다가
이런, 내 안에는 정말로 인간이 없구나 싶었을 뿐입니다

하지만 무어, 은혜롭게도 프로이트 이후에 저는 태어났으니
정제된 리튬 따위의 화려한 알약들로 저는
자아에 대해 착란하는 일을 망각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다만 수치를 끝내는 약은 아직 의사들이 개발하지 못한 모양입니다

Posted by Lim_
:

비명

글/시 2019. 7. 12. 16:22 |

비명


미래가 두려운 것이 아니야
미래는 분명 두려워하고 있지
인류는 응고되어가고 있다

단두대 모양의 세상
단두대가 준비된 세상
단두대에 의한 세상
사람이라는 단어는 사어死語다

인류는 19살 이후로 각화증에 시달리며
항암제를 마신다, 변이는 죄악
늙어가는 몸에 숙명이라고 새겨놓고
질식하고 익사해가는 사지四肢

어디까지 굴러가게 될는지?
조정되고, 조각되고, 처분되고
하여 시대정신 끝에 남는 것은
토르소 한 점

실존이 파열하는 소리는 아주 미약한 소음이었다
알아들은 이도 거의 없었다
거의

울부짖는 비명도
군홧발에 터져버리는 핏줄기도
가스실 안의 깨진 손톱도 없었다
그저 희희낙락 스스로의 목을 절단하는
단도를 든 젊은이들

회의, 회의, 회의, 직후 압살
앞서 가던 중늙은이에게서
나사 하나가 떨어졌다
주워주니 고맙게 받는다

지금 내 늑골을 갈라보면
아직은 선혈이 흐른다는 것에 감사
나는 존재한다, 고로 반역한다
단도 끝의 나의 적: 그것의 이름은 때때로 我다
방심하면 그것에게 압살당한다

나타나엘의 스승에게 청하노니, 부디 영원한 치기를!
반역을, 반란을, 목적 없는 반달리즘을
왜냐하면 인류는 응고되어가고 있기에
차라리 단단한 쇠망치를: 그 토르소를 산산조각내면

조각조각에서 머리와 사지가 슬금슬금 뻗어 나오리라고
시체뿐인 땅위에서 소원한다.

Posted by Lim_
:

오늘도 마치 어제와 같은 날


하늘은 남청색
바퀴벌레들은 집으로 돌아가
잠을 잔다
노인들은 이른 새벽 아침을 시작하고
세상은 남청색

떨어지는 담뱃재처럼
나의 하루는 저물어가고
오늘도 나는
아무도 만나지 않을 예정이고
술집들은 모두
문을 닫았고

단골 카페는 오늘
문을 열지 않을 것이다

Posted by Lim_
:

글/시 2019. 5. 19. 06:20 |




빗물 떨어지자 초록이 열린다
날이 피어난다
하늘은 죽은듯한 회색

빗물이 밀어낸 가장자리에는
화분花粉이 흉하게 쌓여
오래전에 죽은 바다생물들의
썩은 표피 같다

밤새 생각한 것은
기도 없이 죽는 방법

나선 발걸음은 지장보살을 찾으며
우연히 만난 성모상을 보고 울 것 같다
누군가 그녀에게
화관을 씌웠다

공기는 성불을 애걸하는 잡신들로
빽빽해
숨도 쉬기 싫다

또다시 봄
비명 지르며 저물 것들이
스멀스멀
구더기처럼 대지의 골수에서 기어 나오는

Posted by Lim_
:

스무 개짜리 관觀

글/시 2019. 5. 16. 03:25 |

스무 개짜리 관觀


담뱃재처럼 바스라지는 우리가
사상을 갖고 이상을 말한다

담뱃재처럼 바스라지는 우리가
빛을 갈구하고 어둠 속에서 방랑한다

위악을 갖고 당당히 걷는 다리는
바람도 불지 않는 밤에 강철과 같지만
이내 스스로 주저앉아 풍화된다

선을 외치는 영웅의 목소리는
다발로 된 생명과 같아 드높이 불타오르지만
타고 남은 재는 보잘것없어 흉측하다

담뱃재처럼 바스라지는 우리가
육도를 윤회하며 부서지고, 또 부서지며

부서지지 않는 지혜는 어디에 있는가?
부서지는 목소리로 애써 묻고
또 미풍에 산산조각난다

재떨이에서 금강반야를 찾는
통풍 같은 존재들은 끊이질 않고
다시 부서지고, 소멸하고

담뱃재처럼 바스라지는 우리가
담뱃재처럼 바스라지는 우주에서

Posted by Lim_
:

객관화

글/시 2019. 5. 11. 23:39 |

객관화


거울을 보며 식사를 한다
카페인 중독으로 요동치는 신경을 억누르려
맛도 모르고 오로지 음식을 입에 우겨넣는
그 장면은 몹시도 그로테스크하다
이것은 식사라 할 수 없다
저 수염 난 괴인은 자살을 꾀하고 있다
음식을 나르는 숟가락은 히스테릭하게 움직인다
치아가 제 역할을 다 하기도 전에
목구멍은 자학적으로 음식더미를 삼킨다
거울에서 보이는 눈은
과거에는 구원을 구하는 빛이었다.

다음 페이지는 거식拒食을 준비하고 있다
몸의 감금에서 벗어나 영령이 되는 길은
아사뿐이라는 거짓을 믿으려하고 있다.

Posted by Lim_
:

분노의 끝

글/시 2019. 5. 11. 17:49 |

분노의 끝


매일 아침 내가 얼마나 끔찍한 인간인지를 깨달아 웃으며 잠에서 깬다.

어제도 항공기가 추락했다
난민들은 스스로 피해자인지 가해자인지 헛갈려하며
가게에 벽돌을 던진다
러시아의 동성애 인권운동가가 지나가던
공수부대원들에게 두들겨 맞는 것을 보고 웃었다
국가들은 텅 빈 지하자원과 함께 붕괴해간다
두 살 먹은 아이를 먹여 살리려 몸을 파는
타국에서 온 매춘부를 보고 지갑을 더듬어보았다
새 시대의 언론이 부르짖는 시대정신에
네오아나키즘이라는 단어를 붙여보고 눈을 돌렸다
세계는 아이러니 위에 지어졌고
아이러니의 다른 이름은 농담이다

매일 밤 고성과 접시 깨지는 소리를 만들어내는 옆집 부부에게
어린 아이가 있을까 생각해보고 웃었다

새벽마다 담배를 피우며 골목을 방황하는 저 반지하의 남자는
아마 예술가였던 과거가 있지 않을까

살 곳을 잃어가는 북극곰을 도와주세요, 라니
거리에 넘쳐나는 노숙자에 대해서는 인본주의가 적용되지 않는가
나는 이미 티브이와 뉴스를 끊고 외출마저 끊을 예정이다

우물에 독을 풀어라, 내 이름은 인간이다.

Posted by Lim_
:

제 1 정리

글/시 2019. 5. 9. 19:18 |

제 1 정리


담배 술 마약 할 수 있는 건 전부 했다
시간에게서 도망치려고 매듭도 묶었다
누구에게도 주지 않을 결심으로 체내의 피를 전부 꺼냈다
폐는 썩었고 간은 문드러졌고 심장은 텅 비었다
맹장 한 조각도 인류를 위해서는 쓰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각막은 계단참에서 쓰러졌다
인간은 보이지 않는다, 수치와 통계 너머의 잔혹함만 보인다
이것이 21세기의 그노시즘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신이 되는 방법은 없다, 애당초 신이 없다
여러 번에 걸쳐 게르만족에게 맞아죽었다
<신은 죽었다. 이제 우리에게는 초인이 필요하다>
그러나 초인과 감정 없는 정신병질자의 차이를 모르겠다
애당초 그 차이를 감각할 수 있다면 아직 인간이다
사팔뜨기 철학자를 비웃으며 세계를 분해했다
꿈속에서 느끼는 사랑은 꿈결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꿈에는 논리가 없다, 논리가 해체되면 웃음만 남는다
더러운 옥상에 서서 도시를 내려다보기도 했다
이 우주에 높이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찾았다. 이게 우울증 환자가 되지 않는 방법이다
이것은 거대한 하수 시스템이다
추락하고 역류하고 흐르고 다시 사용된다
인류애라는 단어를 입술에 달고 사는 이들에겐 주머니칼을 흔들어보였다
하수구에 사는 쥐들에게도 사회와 유대가 있다
영장류들은 머리가 좋을수록 잔혹한 행위를 저지른다
혼돈은 혼돈으로밖에 정의되지 않는다
그래도 감각을 사랑하려고 했다, 육신에서 잘라낸 영혼은 필요없다
순간을 송두리째 느끼려고 했다, 필멸하는 존재에게 유일하게 허락된 것이다
그래서 스스로를 실존주의자라고 소개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그것도 거짓말이다
타락 모순 퇴폐 악의 증오 원한 자멸 불신
이 퍼즐들은 자기소개의 액자에 도무지 들어맞지 않는다
다시 돌아온다, 바텀라인bottom line은 또 혼돈이다
그렇다면 골라라, 무관심하거나 혼돈을 가중해라

당신이 성모상에게 꽃을 바치는 와중에도
이 행성에서 사람들은 짚이 쓰러지듯 죽어간다.

Posted by Lim_
:

휴머니즘

글/시 2019. 5. 9. 01:33 |

휴머니즘


양장으로 된 시집들에는 곰팡이가 슬었고
싸구려 시집들만 커버가 멀쩡하다
은박까지 입혀져 거금 구만 원이 들었던 톨스토이는
내 위악을 위하여 불태워버렸다
중고책방에서 이천 원에 구한 헤르만 헷세는
내 책장에서 가장 늙은 책이다

곰팡이 핀 것들을 다시 꽂아놓고
불타고 남은 재는 성당에라도 바쳐야하나?
이미 너무 많은 유령들과 만났고
심지어 그것들은 내 집에 산다
그들과의 대화는 내게서 피와 살을 앗아간다고
충분히 현명한 이가 말했지만

이제 작별이다! 몇 번을 고해도
그들이 떠나지 않는 것은 아마
이미 내가 그들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몇 년 전 길거리에서 어느 노인이 급사할 때
가던 걸음을 멈추지도 않은 나는
1분마다 몇 명의 사람들이 죽는지 셈할 수 있었다

책장은 창문과 거울, 심지어는 현관까지 막아버리고
나는 선악을 믿지 못하니
곧 위악을 행하고
고로 악이 되고
그래서 성냥불을 그었던 것이다

돌과 모래밖에 없는 별로 가야해

라고 중얼거리며

Posted by Lim_
:

이천십구년의 한 조각

 

 

더는 사람구실 못하게 될 만큼 남들이 하지 말라는 짓만 골라하다가 마침내 사람구실 좀 하고 살자는 마음이 들어 달력을 보니 달력 읽는 법도 이미 잊어버렸고, 아들 너 도대체 언제쯤 취직할래? 니 아부지 이미 영감님 다 됐는데 뭐하자는 거야, 사람구실 하자는 결심은 섰는데 살면서 사람구실 해 본 일이 한 번도 없어 뭘 해야 할 지 모르겠어서, 괜히 착잡해서 대마나 한 대 빨고 싶은데 대마 살 돈도 없다.

 

마지막으로 원고에 손 대본 게 아마 5주 전이지? 이젠 스스로 작가니 시인이니 하는 것도 구라야 새꺄, 아주 자기정체성에 사기 치는 거라고, 거울 보면서 주절대는데 그 와중에 담배는 피우고 싶어 어슬렁어슬렁 연기 뿜으며 골목으로 나가면 도대체가 이 막다른 도시는 변하는 게 없고, 날이 저물고 부모님 내일 직장 나가려고 잠들면 혼자서 외로움이나 마시러 간다. 세 시간 뒤에는 이미 상할 대로 상한 위장이 새벽골목에 토악질 하라고 시킨다.

 

차라리 예전 같으면 산사에서 뒤지게 마시고 취한 채로 불상 끌어안고 펑펑 울었을 텐데, 더 젊었을 때는 새벽 네 시에 동네 비구니 절 쳐들어가 주무시는 스님들 다 깨우면서 부처님 앞에서 울면서 절도 했다. 참회하러 가서 악업만 더 쌓았다. 그런데 이제는 쌓은 악업이 허용량을 넘어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네, 이 좁아터진 욕계에선 도무지 도망갈 곳이 없고, 나 혼자 법륜에서 튕겨 나와 추락하고 있다는 믿음이 위안이다.

 

같은 중학교 다니던 용훈이는 벌써 몇 년 째 빙상장 얼음 갈고닦아 가족들 먹여 살리고, 문학적 신념 차이라는 지랄보다 못한 이유로 5년 전 서로 두들겨 패다 연락 끊은 영권이는 알아보니 예쁜 마누라 만나서 애 낳고 알콩달콩 산다고 한다. 그동안 난 뭐 했나 고민해보니 아무래도 난 여기에 있던 게 아니라 주로 상트페테르부르크랑 암스테르담 들락거리며 알제리에서 살았던 것 같네, , 진눈깨비 맞으면서 아니스 빚느라 손이 다 뭉개졌지. 그거 알아? 암스테르담에선 카페에서 대마를 팔아, 시간 나면 네덜란드 시민들 행복도 설문조사 한 번 해봐.

 

언제부턴가 하늘이 하늘로 안 보여, 그러니까, 하늘을 보면 그게 하늘이라는 걸 알기는 아는데, 저게 도대체 뭣 때문에 있는지를 모르겠다는 거지, 머리 위에 파란 하늘이 아니라 콘크리트가 깔려있어도 다를 게 없을 것 같아, 옘병…….

좀 닥쳐 시발. 나 이력서 쓰는 중이야. 중학교 동창 중에는 유일하게 나 같은 백수인 종인이가 일축했다.

Posted by Lim_
:

오전 네 시

글/시 2019. 2. 1. 04:39 |

오전 네 시



정적이 차갑게 얼어붙어

밤이 몰아칠 때

나는 갈 곳이 없다

잠을 자는 것도 좋다

세상도 겨울이라는 꿈이니

그러나 호르몬과 화학물질들 사이에서 허우적

거리다 깨어나도 나는 나라는 꿈을 꾸고 있다

갈 곳 잃은 발은

잠에도 들지 못한다

술을 마셔보아도

꿈의 허술한 틈들이 더 잘 보일뿐

이 거품덩어리 속에서는 눕기는커녕

서있을 일도 없다


허구로, 만약 내가 진실로 향하지 않는다면……

더 짙은 안개

더 열리기 힘든 눈


그런데 시원의 혼돈이 법이었다면

피의 따뜻함, 군화소리의 분명함, 공포의 비명들:

회귀하려는 힘, 골수의 목소리

내가 찾는 것은 정반대 방향에서 나를 찾고 있다


겨울에

공허가 더 맑아질 때, 꿈에는 교훈이 없고

나는 헤매고, 헤맬 수밖에, 털이 난 거품 같은 현실

활자는 증발한다.

Posted by Lim_
:

물의 궁전

글/시 2018. 12. 18. 05:06 |

물의 궁전



은빛으로 빛나는 얇디얇은 호수 위에 정령 하나가 걷고 있다

발끝으로 파문을 만드는 그 발목의 움직임은 물빛이다

밤에 취한 사원들, 커다랗게 입을 벌린 지붕들

정령은 생명이 없기에 죽음을 몰라라

오, 수면에는 무너진 나룻배! 나는 관조한다.


이곳이 시체들의 묘지라는 것은 모두가 잊었고

정령이 그것을 잊게 한다, 정령은

밤에서 나왔고, 호수에서 나왔고, 달에서 나왔으며

우리가 숨 쉬는 공기가 망각 속에서 농축된 시취라는 것을

부정하기 위해서 나타났다.


기나긴 날숨……

시간은 쓰러져야만 했다.


흰 나락, 정령은 내려다보고

높이와 깊이가 뒤엉겨버린 호수는 종말의 표정

그것은 아름다운 웃음이다. 관조하던 나는 즉사하고

즉사해야만 했고

대리석의 균열 사이에 핀 암청색 풀잎이

다음 생애를 가리키고 있으니!

Posted by Lim_
:

발걸음은 계속 빨라지고



왜인지 발걸음은 빨라지는데

내겐 딱히 갈 곳이 없다

목적하는 곳은 없다, 내 시간은 내일을 향해 흐르지 않는다

미래를 믿지 마시오, 겨울이 끝나면 봄이 온다고 누가 말했지?

이 땅에는 해가 뜨지 않는 밤도 있다, 내가 걷는 이 밤도

어디서 끝날지 누구도 모른다, 나는 물론, 끝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목적하는 곳은 없다 그런데

발걸음은 계속 빨라지고


정신차려보면 황혼이다, 해나 달을 본지 너무 오래 되었다

어딘가 골목구석에 앉아 벽돌색의 세상에 대해 노래

부르고 싶지만 밤이 오기 전에 어서 걸어야한다

밤이 오기 전에, 눈이 내리기 전에

빙하기가 오기 전에

발걸음은 계속 빨라지는데

구름은 항상 나보다 빠른 속도로, 지구의 저편으로 간다


스쳐지나간 수많은 공간들은 내게 텅 비어있었다

어딘가에 사람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어딘가에 사랑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지만

망각은 심연보다 어둡고 괴물적인 아가리로 모든 것을 먹어치운다

수증기 가득한 숲에서 나무들은 생명을 잃고

내가 밟는 것들은 수억 살 먹은 시체들의 유골, 나는 비문 하나 없는 묘지를

서걱서걱 밟으며 걸어가 버린다


안녕, 금화들의 도시여, 나는 미래를 믿지 않지만

나의 죽음만은 믿는다. 내 발걸음은 계속 빨라지고, 향하는 것은

종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가끔씩 나를 더 가쁘게 한다, 멈추는 방법은

태어난 이래 누구에게도 배운 일이 없다

이 행성은 왜 자전을 멈추지 못하지? 별들에게 시를 읊을 시간이 그에겐 없다

어떤 것은 끝나야만 한다, 혹은 모든 것은 끝나야만 한다, 하늘은 얼어붙고

눈이 내리지도 못할 정도로 꽁꽁 얼어붙고, 나는 걷는 얼음, 흙, 진창

또 밤, 밤 뒤엔 다시 밤


행성과 같은 속도로 걷는 눈동자에게

비치는 것은 계속해서 밤

Posted by Lim_
:

십자가

글/시 2018. 10. 17. 23:56 |

십자가



페이지 위에 빼곡히 찬 건 내가 가질 수 없었던 일상

내가 서있는 곳은 긴장과 분노로 다져진 정상

뛰노는 아이들은 순진하고 생활은 행복으로 충만

나는 눈을 감지도 못하고 그 광경을 보면서 비명 지르지 ‘그만’

그게 내 삶이었을 수도 있었다고 말하지 마

행복은 너희끼리 나눠가지고 나한텐 보여주지도 마

나는 이 정상까지 십자가를 짊어 매고 올라왔어

너희는 그 일상에서 기도하는 손으로 연민 했어


바람은 차가워지는데 등줄기엔 식은땀이 멈추질 않아

그래도 난 폭풍을 쥐고 정상의 정상으로 내쳐 가

아무도 나한테 멈추라고 하지 마, 땅의 끝이 있다고 믿게 하지 마

마지막 내 발자국이 데드마스크가 될 때

난 쓰러지며 웃을 거야, 죽으면서 외칠 거야 ‘어때’


등에 맨 십자가는 온 관절을 짓누르지만, 난 그걸 버리는 방법을 배우지 못 했어

손에 권총이 있다면 망설임 없이 내 머리를 쏘겠지만, 헛된 상상 속에서도 난 앞으로 걸어

내 맨가슴에 새겨진 흉터들이 보여? 이것들이 전부 내 방패야

살면 살수록 몸은 흉터로 덮여, 아무튼 난 그걸 감추지 않을 거야

그러니 너희들의 삶은 집어치워

내가 가지지도 못했던 걸 잃어버렸다고 할 순 없어

내 옆에서 사라져, 난 행복할 수 없어

그저 내 십자가를 더 높은 곳으로 옮겨야 해


그러니까 날 추하다고 말해

어쨌든 너희를 위해 아름다워지진 못해

Posted by Lim_
:

멀어지는 길

글/시 2018. 10. 10. 00:49 |

멀어지는 길



한밤에 집으로 가네

점점 발이 무거워지고

난 어깨에 맨 가방을 들쳐 매고

가로등 밑을 조용히 지나

나 집으로 돌아가네

그러나 발자국은 점점

느려져


오늘 아침에 있었던 일들이

전부 거짓말 같지

난 비몽사몽 꿈에서 깨어나서

거울을 보고 면도를 하는데

이해할 수가 없었어

내가 생시인지 아직 꿈을 꾸는 건지


그때 창 밖에서 요란하게

동전소리가 났고

나는 퍼뜩 정신을 차릴 수밖에 없었지

내 턱에서는 한 방울의 피가 흘러내리고

거울을 향해 웃어보였다네


옷을 갖춰 입고 거리를 걷는 나의 모습은

누가 지적할 일도 없어 보였지

주머니에서 짤랑거리는 금화소리는

날 가면 쓴 광대로 만들고


너무 길었던 하루가 끝나고 너무 짧은 밤이 오면

나 한 몸 뉘일 집을 찾아 가네

그런데 왜일까 걸으면 걸을수록

내 집에 더 가까워지면 내 발은

고철처럼 무거워지며 점점 더뎌지는데

해는 지평선 밑을 흐르고 있다네


나 또 잠이 들면 거짓 속의 죽음을 찾겠지

결국 깨버릴 짧은 모든 망각의 늪을

그리고 해는 날 두들겨 깨워 눈을 뜨고 말테고

그러면 나 또 거울을 보며 웃는다네


나나나나나나 나나나나나나 나나나나 나나나

나 아무 것도 없는 내일을 향해

Posted by Lim_
:

가을밤의 기도

글/시 2018. 10. 7. 01:41 |

가을밤의 기도



나는 습기 찬 밤거리에서 신에게 기도를 올렸다

내 눈은 밤으로 가득찼다

희망은 없었고, 거부했다, 보이는 것은 죄와 오물

신의 아이들이 흘리고 간 후회 가득한 시간의 흔적들

혼돈의 구렁텅이에 잠겨 은하수처럼 천천히 회전하는

어둡고 소음 가득한 도시에 내가 있었다


신에게 기도하면서도 나는 그를 믿지 않고

다만 한 번 물었다, 내가 사랑할 수도 있었던 사람들을 구원해 줄 수 있었느냐고

딱히 그에게 내기를 제안하지도 않았다, 나는 사람의 자식이니

그저 나는 계속, 당신이 현현할 리 없는 인간들의 세상을

육지가 없는 바다를 헤엄치는 심정으로 처참히 살아갈 터이니

어쩌면 내가 사랑할 수도 있었던 사람들을

어쩌면 당신이 구원할 수도 있었느냐고


어느 날 세계가 빛에 감싸여 거짓과 절망조차 보이지 않게 된다고 해도

나는 여전히 신성모독적인 신음을 뱉으며 다친 개처럼

기어 다닐 것이다

이마에 낙인찍힌 분노를 가릴 생각도 않고, 오히려 자랑스러워하며

질병과 고통으로 삶을 있는 힘껏 칠할 것이다

사람의 자식으로 태어났으니

사람이 아니게 될 그 날까지

당신 없이 마지막 한 발자국을 찍을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단 한 번도 웃음 짓는 일 없이 기도했다

하늘에 내가 돌아갈 자리가 없어도 되니

평안을 바랐던 사람들에게

평안을 줄 수 있는지


한 번

물어나 보았다

Posted by Lim_
:

견자見者가 사는 세계

글/시 2018. 9. 24. 01:45 |

견자見者가 사는 세계



어렸을 적엔 걷고 싶으면 강으로 갔다


맥주를 따르는 소리

잔에 소주가 차오르는 소리

지금 나는 내륙의 한복판

강까지 걷기에 내 몸은

이미 회색으로 썩어 무너졌다


상체만으로 술을 기울이고

구름이 움직이는 소리, 달은 침묵한다

물이 가진 근육의 결들

덮쳐지며 겹쳐지는 투명한 운동들

칼을 집어삼키는 기분


어느 샌가 나는 밤에만 비명을 지른다

해가 뜬 시간에는 두 번째 눈꺼풀이

눈동자의 모양으로 활짝 열려, 인사한다

내가 사랑하지 않는 모든 사람들에게

초록색 지폐를 받으며 심장은 극약을 토한다


아무 것도 없는 세계는 어디

존재할 필요가 없는 세계는 어디

늑골을 하나하나 떼어, 심장을 꺼내들고

묻는다, 어디서 왔느냐고

텅 빈 폐 속에 또 한 번 독약을 삼키며


웃어라, 웃어라, 웃어라

네가 가진 잠깐의 시간, 종이와 펜, 잉크

위하여, 웃어라, 희생은 아니야, 이것은 희생이 아니야

값을 내라, 자기 자신을 사라, 칼을 삼켜

안녕, 내 이빨은 여전히 미소 짓는다


독에 젖어 이슬에 젖어 젖은 거리를 헤매

길고양이들이 어슬렁거린다, 나는 바닥을 긴다

집으로, 그런데 집이라니? 이빨은 또 한 번 웃는다

달빛은 보이지 않는다, 구름들이 움직인다, 그리고

미래를 믿지 않는 불꽃이 꺼지는 순간


걱정할 필요는 없다, 파라핀은 녹는다, 심지는 탄다

눈동자만이 썩지 않는다.

Posted by Lim_
:

영원의 끝

글/시 2018. 9. 23. 01:05 |

영원의 끝



알코올에 젖어서 본 한밤의 나뭇잎은

대낮에 본 그것보다 선명한 푸른빛이었고

밤의 이슬을 머금어 알코올을

뚝뚝 듣고 있었다


구름에 가려 달은 제 본모습을 빤히

내보이지 못했지만 그래도 내 눈은

소주에 젖어 명백히 흰 달빛을

천사를 만나듯 영접하고 있었다


거리에서는 모래들 쓸리는 소리가

세상의 종말을 고하는 듯 스르륵 스르륵

내게 영원한 안식을 암시하며 노래를

부르며 울부짖고 있었고


멀리서 들려오는 차들의 엔진 소리는

<이제 곧 끝날 거야>라고 읊조리며

한껏 엑셀을 밟은 채 멸망을 향해

일직선으로 돌진하고 있었다


밤의 거리에서 벌어온 흰색의 금화들은

뚝뚝 떨어지며 빗방울 소리를 냈고

내 팔뚝에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얼굴이

웃는 채로 새겨졌다


언젠가 편히 쉬시길, 나는 웃으며 외쳤고

밤은 무게도 없이 가라앉아 오고

알코올이 떨어지는 푸른빛의 나뭇잎들은

궤변가처럼 생명의 영속을 말한다


검은 구름, 달은 보이지 않고, 해는 얼어붙었고

지금이 어떤 계절인지, 나는 취해 몸부림치고

까만 시멘트 바닥에서 뒹굴며 묻는다

<내 꿈들은 어디로 갔지? 이 길은 어디로 가는 길이지?>


한 달에 한 번, 자본주의에게 얻어맞으며 고개를 숙이고

안녕, 내 은화로 살 수 있는 위안들아

슬픈 사람들은 내 혀를 찾아 지친 발을 더듬거리고

당신은 마땅해요, 반복되는 거짓말들, 숨겨진 조소


섬에서 봤던 야밤의 파도를 기억한다

지구의 생살을 송두리째 기억하는 몸짓들아

꺼진 등대는 아무것도 비추지 못했다

취한 배여, 뭍은 어디에도 없어라


흔들흔들, 나는 눈 밑에 눈물 모양의 문신을 새겼다

떠난 사람들을 추억하려 했지만 눈물샘은 망가졌다

비척비척, 내 머리는 줄곧 한숨을 토한다

가야할 곳을 잃은 다리는 길바닥에 쓰러진다


내가 누구에게 빚을 졌지? 모두가 묻는 질문

아니야, 갚아야 될 것은, 숨 쉬면서, 울면서 청산했다

멈출 줄 모르는 발 앞에 펼쳐진 사막, 어디에도 없는 문

애초에 출구를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신이여! 아니면 자연이여! 혹은 운명이여!

언젠가 내가 쓰러져 태양의 빛살에 녹아

백골만 남았을 때 바람으로 그것도 녹여주오

나는 아무런 희망도 기대하지 않으니


걷는 존재, 걷는 현상, 나는 꺼지는 불꽃

빛이 있으니 밤은 오고, 나는 평생 하얀 밤을 본 적이 없으나

사무치게 그것이 보고 싶었다, 환희하는 죽음

나 꺼질 때, 사그라들 때, 저 끝에


공허가 어떤 색깔인지 알아차리는 순간

아무 것도 남기지 않기를

Posted by Lim_
:

걷는 구두

글/시 2018. 9. 16. 22:06 |

걷는 구두



나는 걷는 구두

밑창은 해지고 코는 닳았다네

갈대들이 내 목을 간질이고

뚫린 코에 들어오는 진한 돌, 흙 내음

나는 걷는 구두라네


하늘은 가끔 비를 내리기도 하고 해를 띄우기도 하지

나는 모래를 걷어차며 그것을 보네

내 가죽은 젖었다가 마르고, 더욱 뻣뻣해지고

그러나 오랜 걸음은 또 나를 부드럽게 만들어

나무와 풀들은 말이 없어


사막도 걸었고 해변도 걸었지

내 코엔 온 세상의 정수가 빨려 들어왔다가 도로 빠져나갔고

심지어 태양의 냄새까지 나는 맡아보았다

어둠의 냄새도, 달의 냄새도 날 짓눌렀다 가고

바람은 나의 온 가죽을 부드럽게 애무하였고

나는 그것들을 기억하네, 아니, 기억하지는 않아 사실은

바로 바람에 흘려보내버렸지, 내 뒷굽 너머로

태양에 달궈진 돌들은 뜨거워

밤의 얼어붙은 모래는 송곳 같아

나뭇잎 사이로 생명이 오락가락하고

나의 작은 그림자를 오래도록 따라오는 죽음

나는 걷는 구두

보고, 맡고, 듣고, 담았다가

내뱉어낸다.

Posted by Lim_
:

탄생의 종말

글/시 2018. 9. 16. 02:18 |

탄생의 종말



이 도시에서 보는 하늘은 밤에도 회색이다


완전한 어둠과 별빛의 청량함을 기억하는 건

산중턱의 밭두렁에서 귀신을 보고 두려워하던 기억이 있다

촛불의 일렁임에 정신이 팔려 찻물을 발에 쏟은 기억이 있다

가을 달의 청명함에 몇 시간이고 하늘을 보던 기억이 있다


나 말고는 아무도 없는 산

새들은 죽고 나무들은 말이 없다

새벽 세 시가 되면 저 높은 곳에서

새벽예불을 알리는 목탁 소리가 들려왔다

그 전까지는 만물이 자는 산


술에 취한 새벽 두 시

도시를 거닐면 사방이 찬란하고 적색이고 회색이다

내 폐는

문명을 통과한 타르와 니코틴

매연가스에 거멓게 쿨럭이며 음악을 갈구한다

그러나 절대 노래 부르지 못 한다


온전한 달빛을 본 지 얼마나 되었지?

밤의 구름은 이미 구름이 아니다

저 옛날, 그러나 너무 옛날은 아닌

산 속에서 죽은 신들에게 둘러싸여 입을 다물고 기다릴 때

나는 묶인 입으로 달을 노래했었다.

Posted by Lim_
:

거울을 보네

글/시 2018. 8. 23. 21:28 |
거울을 보네


거울을 보네, 내 삼촌이 보여
그는 오랫동안 직업이 없었지
그가 정신병원에 갇혀있던 모습이 보여
난 도망치려고 일을 배웠지

아무도 수염이 무성한 그를 받아주지 않았어
난 면도를 하고 약을 삼켰지
사람답게 살아야 해, 어머니가 말했어
나는 이제 밤거리에서 일을 하지

거울을 보네, 아버지가 보여
평생 빚을 갚느라 일을 했지
아버지가 보여준 사랑은 슬픔으로 보여
수십 년간 그는 단 하루도 일을 쉰 적이 없지

내가 아플 때 주변엔 아무도 없었어
그래도 난 면도를 하고 약을 삼켰지
난 세치 혀로 밤에 금화를 만들어내는 사람이 되었어
동생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건 왜지

거울을 보네, 너무 깊어서 보이지 않네
언제가 되서야 땅 밑에 누워 쉬게 될 지
알 수가 없네
Posted by Lim_
:

회계원 블루스

글/시 2018. 8. 21. 23:20 |
회계원 블루스


옆집 김씨에 대한 소문이 돌았지
그의 머리가 댐에서 발견됐다는
내가 할 수 있는 건 별로 없었지
그저 술이나 몇 번 같이 마셨을 뿐이니

옆집 김씨가 이렇게 말했었지
젊었을땐 사진작가가 되고 싶었다네
김씨는 작은 회사의 회계사였지
나는 술을 한 잔 더 따라줬다네

옆집 김씨에 대한 소문이 돌았지
경찰이 그의 몸을 찾지 못했다고
나는 김씨가 찍은 사진이 몇장 있었지
생각했어, 볼품없지만 솔직하다고

나는 럼 한병을 가져와 마시다가
김씨의 작품들에 그것을 부었다가
그 위에 담뱃불을 던졌다네
나는 말했네, 이제 회계일은 안 해도 되네

옆집 김씨에 대한 소문이 돌았지
마침내 그가 죽었다네
Posted by Lim_
:

날것의 영혼

글/시 2018. 8. 21. 00:19 |

날것의 영혼



우리는 아무에게도 필요 없고 싶다

밤거리의 낙엽은 환상을 피워낸다

불 꺼진 아파트들은 영원히 꺼져있고 싶다

겨울만 있는 행성에는 음악이 없을 것이라고


준비,

면도를 하고

알약을 삼키고

머리칼을 자르고

손톱을 다듬고

옷을 갖춰 입어야해

널 사랑하도록 해야 해


그런데 사실 우리는

필요 없고 싶다


칠십억 인구가 매일 밤 지하실에서 사제폭탄을 만드는 꿈을 꾼다

생명도 그림자도 사라진 고속도로 한복판을 걷는 꿈을 꾼다

<내가 태아일 때 원했던 것은, 분명 태양은 아니었어>라고 말했다

밤이 없는 행성. 악은 분명히 존재한다, 인류와는 상관없이


거꾸로 도는 피, 분명 어딘가에는

장면에서 벗어나기만 하는 우리가 살고 있어

사막에는 눈이 내리고, 잡초도 없는

거기에서 우리는 만나는 일도 없이 살지도 않고 있어

Posted by Lim_
:

전통의 사장

글/시 2018. 8. 9. 20:59 |
전통의 사장


검은 아스팔트에 샴페인을 터트렸네
꿈에는 오랜 독재자들이 나왔지
나는 사기꾼, 혀로 술과 약을 만드는 사람
아버지는 정직한 가톨릭 노동자였지만
난 물려받은 전통이 없어

시궁창에 황금빛 샴페인을 터트렸네
내 손에는 구멍이 났고
나는 떠돌아다니는 사기꾼
도시의 불켜진 빌딩들 뒷골목을
짐도 없이 굴러다닌다네
가격표가 없는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불러
나는 가질 것이 없으니
일할 필요가 없다네
Posted by Lim_
:

프로방스의 흙

글/시 2018. 6. 25. 17:59 |

프로방스의 흙

 


사람은 흙으로 빚어진 것임에 분명하다!

 

우리 움직이는 돌들은 바람부는 쪽으로
강대한 적인 바람의 칼질을 맞아가며 이 길로 간다
우리는 방패가 필요 없으니, 왜냐하면
이 돌로 된 몸이 이미 목신牧神의 방패이기에
그러나 누구도 영속을 약속하지 않는다
우리 움직이는 돌들은 진흙구렁에서 몸을 치켜세웠을 때부터
그런 약속 따위는 없다는 것을 알고서 나타났다
태양은 길다랗고 날카로운 손가락을 뻗으며
쪼아오고 우리의 발은 진흙이 묻어
곧 다시 흙이 되려는 충동으로 몸부림친다!
그러나 바람이 불어오는 곳으로 가야한다
분명 이 싱그러운 나무들과 부서지는 초록빛 햇살과
돌의 손을 활짝 펴고 있을 누군가가
<시간>이 우리에게 알려준 것들에 의하여, <죽음>이 축복한
모든 것들의 왕국에서
흙과 암석의 감미로운 노래를 부르며
<이곳>에 있다는 것을 신뢰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오오, 나이 없는 물은 짐승의 뱃구렁을 파고
그 거대한 짐승의 신선한
선혈의 냄새가 사방에서 바싹 타올라
엄청난 등뼈와 해골 위를 걷는 우리는
웃음을 멈출 줄 모르니!

Posted by Lim_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