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몽상

글/시 2018. 6. 13. 14:30 |

시간의 몽상

 


내 피부가 갈색이 되어가는 것을 나는 보았다
내 피는 끓어오르며 가장 원시의 고기를 달라고 굶주림의 외침을 지르기 시작했다
나는 진흙 속에서 구르며, 벌거벗고, 광적인 태양이 빛의 창들을 무자비하게 대지로 던져대는 것을 환희에 찬 눈으로 바라보았다. 나는 말할 수 없는 땅에 있었다.
간음이 간음이 아니고 퇴폐가 퇴폐가 아니며 나태가 나태가 아닌 시대를 나는 종횡무진했다. 나의 심장은 점점 어려져 심지어는 내가 태어나기도 한참 전으로 돌아갔다.
문뜩 손을 보자 먼 미래 내 가슴에 새겨져있던 수십 개의 흉터는 주먹으로 옮겨졌고 손바닥은 온통 굳은살이 배겨 촉감을 느끼기 어려웠다. 나는 승리했다고 춤을 추었다!
강한 턱과 무자비한 송곳니로 나는 낯선 혈거인간들을 내 식도로 꿀꺽 삼켰다
하늘에는 분명히 신이 없다! 거기에는 저주처럼 타오르는 붉은 구球만이 고고히 있다.

 

아니야! 내 입이 터져버렸다! 이젠 밤이 내리지 않는다!
선혈 대신 독주를 마시고 죽은 인간 대신 구운 고기를 먹으며 천둥번개 대신 음악이 들린다
나는 오히려 태아처럼 웅크렸다, 단 한 번도 눈물 흘린 일이 없었는데.
높은 수정의 궁들은 날 덮칠 듯이 쏘아본다

내 혈관이 텅 비어버렸다
공포로, 그런데 그 공포도 대지에서 느끼던 것과는 전혀 달라.
언어는 바보이다. 그것에 젓갈처럼 절여진 나는 머저리이다.
「너는 열망을 열망한다.」 커다란 조롱처럼 목소리가 들려온다!
어디로 가야 아무 의도 없이 피어나는 장미를 볼 수 있지? 이제는 모든 장미가 씨앗 때부터 <나는 장미가 되고 말 테다>라며 피어난다.

 

쏜살 같은 악덕들…… 나는 몽상가일까?

 

수정궁들은 점점 높아진다. 언젠가 달과 화성에 닿을 때까지.
나는 괴기한 악몽을 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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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춰진 작품

글/시 2018. 4. 23. 21:50 |

멈춰진 작품



형태 없는 멈춰진 작품. 그는 지난 2년 간 살아오지 않았다

문짝 없는 집에서 안락한 부랑자처럼 지내는 것은 마음 편한 일이었다.

수백 개 어쩌면 수천 개의 이름표도 붙어

있지 않은 서랍들. 무언가는 비었고 무언가는 너무 무겁고

무언가는 무엇이 들어 있었는지도 기억나지 않고

타자기는 어디에 숨겨놨더라, 아니, 굳이 숨겨둔 것은 아니었다…… 내가

너를 속였지, 드라마를 만들기 싫다는 치기에 거울이란 거울은 모조리 깨버렸다

그래도 드라마는 너의 두개골에 천공을 만들고 뇌수로 스며든다

깨뜨리려면 너의 눈동자를 깨뜨려야했다.

하지만 그것도 멈춰진 작품을 다시 한 번 멈추는 것만큼 허황된 일이다.


“시를 쓸 때만 분노와 증오에 앓는 시인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것은 시를 쓰지 않으면 물에 부푼 익사체처럼 평화로이 부유한답니다. 그러면 그것은 둥둥 떠다니며 어쩌면 행복이라는 기괴한 개념을 이해할 수도 있겠다고 뭉글뭉글 생각하죠. 그런데도 언젠가 그것은 자신의 비대해진 몸뚱이를 사시미로 도려내고 비계 속에 파묻혀있던 팔과 손가락의 뼈들을 발굴해요.”

뼈다귀들은 달그락거리며 펜이 들어있던 서랍

과 담배가 들어있던 서랍들을 뒤진다. 아드레날린 주사를 맞는 것처럼 덜커덩

거리다가 그 뼈들은 집안의 술병을 전부 창밖으로 내던진다: 알코올중독자의 자기파괴 과정은 술을 끊는 것에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멈춰진 작품은 그간 점점 더 무거워졌다. 아예 신경도 쓰지 않을 때,

그것은 부피는 변하지 않은 채 질량만 폭발적으로 상승해왔다 그래서

아 그래, 멈춰진 작품이 있었지, 하는 순간, 너는 그 무지막지한 질량으로 얻어맞는 거야,

네 두개골은 박살나고, 눈동자는 여기저기 흩어지고, 턱뼈는 어딘가로 도망가 버리지

시를 쓸 때만 분노와 증오에 앓는 시인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앓지 않는 동안

나는 문이라는 문은 전부 두드리고 다녔다. 흔들림이 멈추지를 않는 전철을 타고

서울이라는 좁아터진 숲의 빌딩이란 빌딩은 전부 옥상까지 올라가보았다

옥상에서 담배를 태우면서 천둥번개를 기다린다

아무도 만날 수 없었다.


익사체의 마음으로 사람들에게 말을 걸었다.

어디에도 사람 같은 것은 없었다.


그러니까 즉, 너는 너의 운명이니 천분이니 하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지. 그런데

물에 부푼 시체 같은 모습으로 너는 참 잘 해왔어 물론 몇 십 년에서 더러는 몇 백 년 간 계속 해왔던 퇴폐와 패배의 습관들을 완전히 버리진 못했겠지 그러나 아무튼 너는 시체답게…… 물렁물렁한 시체답게 잘도 두 발로 땅 위에 서있었단 말이야, 그런데 또 운명이니 천분이니 천명이니, 의사가 준 알록달록한 약물들과 다시 대화를 하지, 그러니까 말하기를, 그러니까 그쪽에서 말이야, 네가 자주 들락거렸던 단출한 조명의 흰색 꿈나라의 관리자들이, 매번 말하는 것이잖아, 영혼 속에 지네가 들끓는 병은 한 번 치료하는 것으로 끝나지가 않는다고, 그 지네들은 계속해서 알을 깐다고……

너무 많은 말들이 있기 전에 나는 언어의 목줄기를 송곳니로 물어뜯어야만 했다.


멈춰진 작품을 다시 펼쳐보자 남한에도 있었고 소련에도 있었고 독일에도 있었던 K씨는 돌연 야수 같은 울음소리를 내지르고 싶어졌다. 분명 서랍 어딘가에는 나이프가 있고, 노끈도 있고, 심지어는 펜까지 있을 것이 분명하니까. 옥상에서 사흘 나흘 기다리며 담배를 피워도 천둥번개는 이쪽으로 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니까. K씨의 덜그럭거리는 팔은 냉장고에서 소주병과 맥주병을 찾아 그것이 확실하게 가득 차있는지 흔들어 본 뒤에 그것으로 길가는 소시민들의 대가리를 깨부술 계획을 짜고 있다.


거울을 깨지 말 걸 그랬지. 너무 어린 치기였어.

하지만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또 깨버리고 말 걸. 심지어는 눈동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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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3월 6일부터 3월 18일까지

시 전시회 [존재비애: 인간존재의 선험적 공허에 대한 몰두와 노스탤지어]가 개최됩니다.


약도에 표시된 '아트갤러리 카페 어스피셔스'와 같은 건물 1층의 '하나빈 팩토리'에서 동시 진행하며, 12:00부터 20:00까지 오픈합니다. 월요일은 휴관합니다.


두루마리 형식으로 제작된 시들과 영상작품으로 만들어진 산문시등이 전시되며, 2017년 발표한 장편소설 [광기와 사랑]과 1층 하나빈 팩토리에서는 이번 전시회를 기념하여 발매한 프리미엄 더치커피도 한정 판매하고 있습니다.


첫 전시회라 부족한 부분이 많지만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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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위협하는

글/시 2018. 2. 2. 20:23 |

너를 위협하는



유리잔을 본다

그것은 테이블 위에 있다

그 물체는 언제나 깨지는 것을 전제로 하고

저기에 서있다


유리잔을 쥔다

수전증은 의학의 이성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뼈와 힘줄은 폭력성을

선험적으로 내재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아니 생각

은 비열하다 나는 비열한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비명이 심장에서 새어나올 것 같다


나는 유리잔을 공포스럽게 내려놓는다

유리잔의 존재로부터 도망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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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상

글/시 2018. 1. 3. 19:22 |

회상



열다섯의 다락방, 시린 겨울

보일러가 들어오지 않아 기뻤다

창문은 하얘

밖이 보이지 않는다

너무 어린 나이에 그는 너무 거대한 장편소설을 집필했다.


십 년 뒤 나는 이런 말을 들었다: 이미 죽은 시인들은 널 구해주지 못해

두들기는 문마다 부재중이었다.


망령처럼 스스로를 홀리며 살아온 십 년이 십일 년이 될 때

너무 늙은 소년은 너무 어린 성년이 되고 있었고

여행을 가고 싶다고 바랐고

그러나 어딜 가도 똑같은 풍경에

똑같은 골목, 막다른 길

당장 필요한 것이 한 줌의 지폐인지

또 한 장의 텅 빈 종이, 그러니까 즉

또 한 장의 공포인지

하릴없이 서있자 증오를 받는다.


술과 담배. 수면제와 자낙스. 눈앞에서 쏟아져 내리는 현실.

너를 마구 할퀴고 쥐어뜯으며 갈기갈기 찢는

아, 너구나. 울증 속에서 너는 너와 마주하고

손에는 술, 담배, 수면제와 자낙스.

입이 떨어지지 않아 내뱉어지지 않는 「굳바이」 한 마디


꿈속에서 열차를 오래 탔다. 나는 어려서부터 자동차건 버스건 열차건

바퀴 달린 것들은 하나같이 질색이었다.

마침내 내려 플랫폼에 토악질을 하고 뿌예진 눈동자를 치켜세웠다.

어딜 가든 낯선 고장이다. 「Home」 이라는 단어는

너무 장황해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그야말로 내 손으로 집필한

길고 장황한, 이해되지 않는

한 문장뿐인 나의 검은 책.


열다섯의 차가운 다락방에서 혼돈을 해소하려고 쓴 글귀들은

아직까지도 나를 더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여기 서서, 증오를 받는다.


낫과 망치를 들고 싶었던 앙상한 손에, 술과 자낙스.


“성자聖子가 되는 방법은 분명히 알고 있어. 명상과 수련 속에서 어렵사리 알아냈어. 그런데 문제는 그게 아니야. 항상 문제는 그런 문제가 아니야.” 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술집이 문을 닫기 전까지는 우리도 괜찮다. 약병이 바닥을 치기 전에는 우리도 바닥을 치지 않는다. 하늘에선 별들이 밤 위를 기어간다. 아주 느린 속도로. 그것이 십일 년 간 반복됐다. 별들은 흩어지며 형태가 불분명한 여럿의 빛이 되고, 우리는 부끄러워하며 우리 자신을 원망한다.


도스토예프스키나 고골이 살았던 소련은 우리가 알았던 소련과 다른 소련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열차 타는 것을 싫어하는 부류의 인간으로, 듣자하니 상트페테르부르크에는 항상 진눈깨비가 하얗게 쏟아지고 거꾸로 치솟는다지만

플랫폼을 여행의 목표로 삼는 나로서는.


깜깜한 겨울. 봄이 와도 죽을 수 없으므로 여름까지 살고, 그러나 너무 덥고 축축한 공기 속에서는 죽을 수 없으므로 가을까지 살고, 그러나 낙엽들 사이에 시체 한 구를 더하는 짓도 도무지 못할 짓이고, 또 깜깜한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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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음의 계절

글/시 2017. 12. 16. 11:37 |

무음의 계절



날던 새들은 모두 떨어져 죽었다

농장에는 검은 나무들

파편처럼 서있다

추위에 잠이 든 길고 축축한 짐승들은

깊고 깊은 땅 속으로 도망쳤다.


머리 위에는 천구天球가 아니라

곧 깨져 우수수 떨어져 내릴

살얼음이 얼었다.


지평선도 보이지 않는 땅

내 발밑에서는

서걱대는 발자국 소리만 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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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랑했던 유령들이여



그간 잡고 있던 유령들의 소매를 놓을 때가 되었나

나는 그들에게 나를 살게 해달라고

그들의 지혜를 빌려 내 육신과 영혼이

너무도 당연한 듯 흙더미로 무너져 내리는 것을 막으려고

십여 년간을 매달려왔다.


너무 오래 유령들의 옷소매를 붙잡고 있자

내 손도 반투명한 비물질이 되어가는 것을

나는 느꼈고

그러자 그 손으로 잡는 나의 펜 또한

유령처럼 비어가는 것을

나는 뒤늦게 보았다.


슬픔과 비참으로 쌓았던 벽은

살짝 건드리자, 허무하게 산산조각 나

이제는 내 발밑에 온갖 슬픔과 비참이 마구잡이로

굴러다닌다. 나는 그 땅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주저앉아, 그것들을

한때 나의 벽돌이었던 비명들을 쳐다보고 있다.


내가 잡고 있던 것들이 유령이었나? 아니면

오히려 내가 유령이었단 말인가? 그리하여

나의 육신의 무게를 느끼려고 한 발짝을 뗄 때

한 자루의 날카로운 창이 내 심장을 꿰뚫었다 그러자

붉은 피들이 흘렀는데


아아, 그래! 적어도 나의 심장은

아직도 살아서 피를 품고 있던 것이다

나는 나의 피를 긁어모아, 그것을 얼굴에 바르며

내가 살아있다는 것에 소리 없는 함성을 지르며


나의 왼쪽 눈에서는 한 방울의 눈물이

세계를 담고 떨어진다.


안녕, 나의 망령들이여, 안녕.

나는 정말로 당신들을 사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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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름날

글/시 2017. 9. 9. 10:55 |

보름날



오래된 패배의 습관들이

절망을 부르짖으며 늑골 안에서 헤엄치던 날

나는 너무 지쳐 주머니칼을 꺼낼 기력도 없었고

그리하여 참으로 몇 년 만에

눈물을 흘려보고자 결심했다


노을이 뒤덮은 산등성이에서

담뱃불은 그 노을처럼 새빨갛고

나는 준비를 하고 있었다. 눈물샘에서

그 투명하지만 맑지 못할 수액들을

끄집어낼 준비를


그러나 너무 많은 것을 잊어버리며 살아왔고

또 너무 많은 것을 잃어버리며 살아오는 와중

눈물을 흘리는 방법도 홀연히 잃어버렸고 잊어버렸던

것이다 나는 무기력하게 앉아 슬퍼하는데

해가 떨어지고 말았다


산속의 밤은 어둡고

담뱃불은 힘없이 꺼졌다

시간은 나를 스쳐지나가기만 하였구나


원망이 번들거리는 눈동자를 하늘로 향하자

아, 보름달이다. 어떤 밤보다도 청명한

나는 감사할 수밖에 없다

그 맑은 만월이

나를 대신 울어준 것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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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그에게 그 무엇도 물어서는 안 되리라



金은 자신이 언제부터 늪 속에 살았는지 떠올려보려 했다

그러나 기억은 너무 오랜 시간 때문에 흐려져 있었고

분명한 것은 아주 오래 전 김에게도 폐가 있어 지상에서 숨을 쉬었지만

이제는 아가미로 숨을 쉬는 것이 너무도 편안해졌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늪 속으로 가라앉아 살게 되었는지

그것이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를 않는다.


金에게는 언제부터인가 지느러미와 갈퀴가 생기어

늪 속에서 사는 것이 당연하다, 손가락과 발가락 사이에는 피막이 생겼고

김의 턱 아래에는 두 개의 아가미가 있다, 이제 김의

흉부 안에는 폐라는 기관이 없다 있을 이유가 없다

물론 늪 속의 삶이라고 해서 모든 것이 편안한 것은 아니다

이 질척거리는 웅덩이 속에도 세속의 모든 고통과 절망이

아주 느린 속도로 유영한다, 그러나 삶이란 어디서든 그런 것 아니던가?


다만 金은 아주 오랫동안 늪 속에서 살았을 뿐이다

개구리나 도롱뇽 따위를 잡아먹으며, 아주 오랫동안 살았을 뿐이다.


그러니 늪 밖으로 나가야한다는 그 막연하고 당혹스러운 발상이

어디에서 왔는지 金에게 물어서는 안 된다.


마치 다시 태어나는 듯, 늪의 수면 위로 고개를 쳐들었을 때

영겁의 시간 동안 쓸 일이 없던 두 눈이 태양에 의해 지져졌고

아가미는 숨을 쉬지 못해 金은 숨이 막히고 고통스러워 그야말로

죽는 것이 낫겠다고 비명을 질렀다 김은 입으로 울컥거리며 진흙을 토했고

너무 밝은 암흑 속에서 지느러미가 돋은 팔과 손으로 늪의 수면을 긁었다

질식하여 죽을 것 같은 중에 김은 점액으로 미끈거리는 나신을

전부 늪 위로 끄집어냈다.


이제 金은 그 어느 때보다 고통스럽다, 차라리 죽고 싶으나 그럴 수는 없다

숨을 쉬고 싶으면 다시 폐를 가슴 속에 지어야한다 아가미는 닫아야한다

거의 도마뱀의 꼬리처럼 변한 다리도 더 다부지게 만들어야한다

지져진 눈일지언정 다시 눈으로 무언가를 보게 되어야한다

김은 정말이지 다시 늪 속으로 돌아가고 싶다, 그 어떤 때보다 간절하게


그러나 金은 발을 흙에 디디고 천천히, 위태롭게, 그리고 절망적으로

휘청거리며 땅 위에 일어서려 한다, 다른 도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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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는 이 있어선 안 될 호소呼訴



달밤에달밤에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시로 쓸 수 없는 것을 시로 쓰고자 하니 아프고 아파

울 수도 없으니 약병은 바닥을 쳤다

달밤에 나는 사람이 되고 싶다


달밤에달밤에나는 바람이 되고 싶다 별이 되고프다

왔다 가는 선객先客들의 홀가분함이 불고

아직 울 수 있는 사람들이 떨어트린 눈물이 밤하늘을 가득 채운 것이니

나는 바람이 별이 되고픈데


아프게 궁금해 했다

펜은 언제 부러지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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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 절망

글/시 2017. 7. 30. 20:34 |

밝은 절망



멀리 보이는 도시의 불빛은 내가 어디에 와있는지를 실감케 한다.

구형으로 이 행성을 둘러싼 우주의 별빛은 내가 나로부터 얼마나 먼지 알게 한다.

불이 빛나는 시간은 밤뿐이다.


이 땅의 적막이 사실은 얼마나 시끄러운지

소리를 귀로 듣지 않는 사람들만이 알고 있겠지

한 가지 행운이라면

매일 어둠이 찾아온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수 없는 저주들 중 하나는

매일 어둠이 물러간다는 사실이다

사색에 잠겨 단도를 놓은 철학자도

태양의 폭력 아래에서는 다시

칼을 잡는다, 흐르지 않는 눈물로.


한 마리의 뱀이 되었으면! 그것도

한겨울의 땅 위를 방황하는 뱀이.

그 냉혈동물들은 알고 있다

눈에 비치는 것들은 송두리째 허상이며

벼린 칼끝 같은 냉기 속에

<느껴지는 것>들만이 질료를 가지고

텅 빈 우주 안에 묵묵히 실존한다는 것을.


사람이 영원한 태양을 갈구해 불을 지필 때부터

우리는 수천 년의 절망 속에 스스로 빠져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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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화羽化의 서곡

글/시 2017. 7. 26. 20:09 |

우화羽化의 서곡



증오의 눈을 부릅뜬 채 신과 맞대면하던 삶은 그 어찌도 편했는가!


만일 하늘이 수직으로 쏟아져내려오는 것이라면

나는 향일성의 저주가 되어 산산조각나리라고

내 젊은 피는 열망했었네, 그리고 정말 그러했으니!


그러나 세계는 하나의 의지가 아니었다. 나 역시

하나의 인물이 아니었다, 한때 악마 들린 손으로

펜을 쥔 채 종이 위를 종횡무진 하던 젊은이는 어디서 죽었는가?


나의 광기는 비명으로 짠 고치였네! 그것을 찢고 나오자

그간 안락하게 날 감싸던 수천 줄의 비명소리는 사방으로 퍼져

나 황망한 세계에 주인 없는 눈동자처럼 굴러 나왔네


수만 겹의 사막과 수억 단의 대양 위에서 토혈하고

그 울컥이며 나온 새까만 피들이 화들짝 놀란 벌레 떼처럼

모든 세계들로 바삐 도망가는 것을 보니, 이미 내 몸엔 피가 없어라


절뚝이는 걸음으로 찾은 못에서 온 혈관을 잉크로 채우고

깃발도 없이 돌진하려 했건만, 알고 보니 벽은 세계가 아니어라!

열 손가락 끝에서 방울방울 잉크가 흘렀다. 나침판은 계속 회전한다!


천상천하 어디에도 갈 곳이 없네, 나는 주저앉아

깔고 앉은 모래알 하나를 집어 들자

악마를 잃은 천재들이 그 안에서 수도 없이 몰락해가는구나!


너무 무수한 세계에서, 미학을 위하여! 아니! 전쟁을 위하여! 아니다!

그 무엇도 아니었다! 가슴을 열자 튀어나오는 것들은

지네들, 바퀴벌레들, 피처럼 붉은 루비, 그리고 멈춰진 작품들 등등……


구제를 원하는가? 그럼 부디 나의 반대편으로 가라!

나는 이곳에 세워진 저주받은 이정표다. 그것은 도망친다!

저쪽으로, 도무지 알 수 없는, 그러나 태어날 때부터 낙인찍힌 화살표처럼.


아! 아름다움이라는 눈동자가 감겼다. 나는 이제 거기에 못을 박는다.

사람들은 아직도 노래를 부르네, 사랑과 멸망의 노래, 가사가 하나 뿐인 노래

끝나지 않는 영혼의 백색 어둠, 그리고 잃어버린 열광, 그리고


불멸의 피. 피. 피. 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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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침엽수림

글/시 2017. 7. 23. 16:10 |

어느 침엽수림



1.

나는 침엽수림 속에서 살고 있는데 이곳은 햇빛이 비추지 않는다.


2.

이곳에서는 너무 빽빽하게 자란 나무들이 모든 빛을 가려

굳이 굴을 파고 살 필요가 없다. 그저 풀밭에

누우면 항시 밤인 이 숲은 전체가 나의 집이 된다.

그러나 나의 집이라고 해서 나만이 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동물들이 살기에는 나무와 나무들 간의

간격이 너무 좁아 이 숲에는 벌레들과,

방랑하는 제신들과 나만이 살고 있다. 다행이 나는

몸집이 작아 숲속을 자유로이 거닐 수 있다.

내가 밤눈이 발달한 것도 분명 이 숲에서 살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태어난 이후로 단 한 번도

태양빛을 본 기억이 없다. 그러나 나무들은 빛을

봐야만 하기 때문에 끝없이 키가 커진다. 차라리

한 그루의 나무라고 해도 좋을 만큼 다닥다닥 붙은

이 나무들은 서로 죽지 않기 위해 미친 듯이 키가 큰다

나는 이 숲의 정상이 어디인지, 또 이 숲이 어디까지

펼쳐져있는지는 모르나 경험에 따르면 나는 절대

숲의 바깥이나 꼭대기로 올라갈 수 없고 그럴 이유도 없다.

나무와 나무 사이로 사방에 길이 나 있지만

어느 각도로 보든 시야는 결국 또 다른 나무에 가려진다

그래서 이 숲에선 적의 공격에 방비해야한다는

의식조차 가려진다. 가끔 시야를 지나가는 영령들이나

희미한 빛을 내는 제신들은 그저 돌아다닐 뿐

내 삶에 아무런 방해도 주지 않는다. 나는 그저 그들로 인하여

이 숲이 침엽수로 만들어진 성소라는 것만을

어렴풋이 생각해볼 뿐이다. 나는 주로 벌레들을 잡아

먹으며 사는데 그들은 눈이 없다. 장님인 벌레들을

이빨 사이로 자근자근 씹는 일은 사실 그리 유쾌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달리 내가 무슨 양심이라도 가져야

한단 말인가. 가끔 비가 오면 나는

잎들의 향기를 한껏 머금은 채 떨어지는 그 물방울들을

성수 맞이하듯이 마신다. 빛이 비추지 않아 오늘과 내일의 경계조차

없는 숲이어 나는 도대체 내가 얼마간 여기에

살았는지 모르겠다. 그러니 분명 나는 죽지도 않을 것이라는

불멸에 대한 알 수 없는 확신이 내 머릿속에 있다.


3.

그 숲은 너무 크고 울창해 보고 있노라면

녹색의 바다를 보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이다.

그것은 분명 생명과 활기가 넘치는 땅일 터이지만

보이는 바로 완전히 어둠뿐인 그 수해樹海는

차라리 거대하고 봉인된 죽음으로만 보여서

나는 그 숲에 무언가가 살고 있으리라는 생각은 전혀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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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멸

글/시 2017. 7. 23. 16:09 |

점멸



공허의 수레바퀴 아래 서면

만물이 다 보일 듯 보이지 않을 듯하다

수레바퀴가 한 바퀴를 돌면 영혼이 니코틴에 젖은 듯

명백히 사물은 치명적인 빛깔을 내는데

또 한 바퀴를 돌면 세계는 가라앉고 소멸되어간다

마루에 앉은 나는 사라지는 세계에 겁을 먹어

덜컥 눈동자를 한 바퀴 돌리지만

뒤집어진 동공은 이미 나의 썩은 뼈를 보고 있다

공포에 숨이 막혀 목청을 틔우려 하면

이미 수레바퀴는 한 번 더 돌아, 세계는

거짓의 색으로 찬연히 빛난다. 그런데 그 거짓이야말로

진실의 그림자라서, 나는 늘상 보아오던 그

진실에, 너는 역시 그곳에서 수천만 년 모독의 시를

읊어왔구나 하고 은전 같은 세계에 슬퍼하는 것이다.


언젠가 빙하기가 오리라고 도시에 사는 나는 자신만만 주장해왔다

빙하기가 오면 공허의 수레바퀴에도 눈이 쌓여

그 운동의 소음이 끼익거리며 들릴 터이고

하늘도 땅도 지평선도 수평선도 눈빛으로 뭉쳐져

앞뒤로 뒤집히는 은전 같던 세계도 한 덩어리가 되리라고


그는 계속 외치고 있다: 빙하기가 오리라고

그러나 나는 산중에 앉아 어제만 해도 향일성의 열광으로 태양을 보던

해바라기가 오늘은 죽어 땅으로 고개 숙인 것을 관찰하고 있으니

도시의 그에 대해 내가 느끼는 바는 도무지 말로 하기 힘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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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덕의 성자聖子

글/시 2017. 7. 18. 23:40 |

악덕의 성자聖子



1.

 내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K의 이야기는 틀림없이 많은 독자들을 나로부터 떠나게 할 것이다. 아카시아 꽃이 필 때부터 12월의 눈보라까지 K는 늘 악인이었으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더욱 안타까운 일은 내가 K를 그다지 악인으로는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의 천성은 헤엄을 멈추면 죽는 상어처럼 처절하고 잔인하였다. 그런데 그의 이야기를 하는 내가 그에게 동질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피 냄새를 맡으면 피가 흐르는 곳으로 갈 수 밖에 없는 것이 <우리>들의 희미한 별이 내려준 잔인성이 아닌가 싶다. 대양은 난폭할 때도 고요할 때도 있지만 어쩐 일인지 대양에 사는 것들은 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난폭하기만 하다. K는 신이 자신에게 악인의 낙인을 찍기라도 한 듯 송곳니를 드러내고 불경한 주먹을 쥔 채 평생을 살았으며 인간의 자비를 믿는 독자들은 몹시도 그를 증오하리라.


2.

내 삶은 독물과 지네 따위의 해충들이 무릎까지 넘쳐흐르는 끔찍하고 흥청거리는 사육제였다. 가끔 그 독충들은 내 늑골을 열고 나의 심장 속에 둥지를 틀기도 하였다.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 누가 삶을 마음대로 갈아치운단 말인가?

내 삶을 독충들의 둥지라고 단언하는 것을 오만이라고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러나 나의 혀는 이미 독두꺼비의 혀처럼 늘어나버렸고 내 타고난 혐오로 인하여 당신들을 소름끼치게 싫어하게 되었으니 아무래도 좋은 일이다.

처음 그 독물과 해충들의 즙을 흠뻑 마셨을 때, 내 살은 아직 여리고 내 눈동자는 회색으로 영롱했었다. 그러나 곧 불거진 뼈들이 살과 근육을 뚫고 위협적으로 튀어나왔으며, 내 어렸던 눈동자는 독을 가진 파충류의 눈동자가 되어버렸다. 그 이후로 나는 눈물을 흘리는 방법을 잊어버렸고 슬픔을 배출하는 것과 가장 비슷한 일은 내 피부를 째어 검은 피를 흘리는 것이었다.

사랑스러운 어머니는 나의 입맞춤에 숨을 거뒀다. 끔찍한 독이 그녀의 피부 속으로, 혈관 속으로 들어가 버린 것이다. 나는 환희하며 적도의 샤먼 같은 춤을 추었다.

그 뒤로 모든 아름다움들이 일제히 눈꺼풀을 열었다. 그녀들은 품에 안으면 하나같이 안구가 없는 눈구멍과 힘없이 열린 입으로 새까만 독을 뚝뚝 흘리며 무너졌다. 그래서 나는 미학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다.

아름다움들을 독차지한 기쁨으로 나의 삶은 한 점의 두려움도 없게 되었도다! 나는 죽음이 내 육신에 별 관심이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자신의 작품을 전시하는 예술가 같은 마음으로 나는 온 마을의 그늘에서 살았다. 밤이 오면 희멀건 빛이 비추는 창문으로 다가가 병에 걸린 아이들을 구경하고 건강한 아이들에게는 유혹의 손길을 던졌다.

독과 해충의 즙이 내 가죽 안에 있는 모든 것을 태워버린 것이 분명하다! 나는 걸어 다니는 소라껍질이었고 짚으로 만든 허수아비였으며 그 안에 있는 것은 형태 없는 저주였다. 그런데 그것은 그리도 치명적인 자유였고 터져 흐르는 기쁨이었다.

나는 햇볕이 비추는 낮에는 그늘 밑에서 망가진 수레바퀴처럼 홀로 산다. 그러면 아무도 나를 눈치 채지 못한다. 그러나 밤이 내리면 나는 내 나라가 도래했다고 사방팔방으로 굴러나간다. 나는 주로 밤에 길을 잃은 어린아이들을 먹고 산다. 아이들은 연하고 부드러워 그 무엇보다도 악덕에 물들기 쉽기 때문이다. 내가 먹은 아이들이 곧 날카로운 비수를 쥐고 부모살해를 저지를 것이라는 강한 확신이 나를 즐겁게 한다. 나는 내 나라에서 부족함이 없이 산다.

가끔 어두운 십자로에는 나의 그림자들이 여기저기 흩어져있다. 나는 굳이 그것을 주워 모으지는 않는다. 내게는 이미 별 필요가 없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 흩어진 그림자들도 나름의 나이기에 그들이 하는 일 역시 매우 흥미롭다. 그들은 매번 불경한 노래를 중얼대며 방랑자가 오는 것을 꿈꾸고 있다.

어둠 속 공허에 앉아있을 때 이따금 나의 아버지가 내게 속삭인다. 오랫동안 그가 누구인가를 고민했고 나는 마침내 그 답을 찾은 것이다. 그는 저 하늘에 있는 영령들의 유일한 주인이었고, 틀림없이 그가 나를 이러하게 낳은 것이다.


3.

고해실의 문이 굳게 잠겼는데 그것은 분명 주님의 짓이다, 라고

그는 자신만만하게 웃는 얼굴로 주장했다 나는 그에게

모든 것을 물을 수 있었지만 그것이 아무 의미도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 또한 손에 불을 쥐고 있다. 그러나 그 불은 그의 형제가 쥐었던 불

과는 전혀 다른 색깔을 하고 있기에

나는 불안한 마음으로 그가 과연 죽기나 하는 것인가 하고 다시금 고뇌에 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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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의 행성에서 보내는 어떤 휴가



방랑과 방탕의 때여 안녕, 그러나 그들은

내게 작별인사도 하지 않고 연기처럼 사라져

내가 느낄 수 있는 것은 어디선가 무언가가 타는 냄새뿐이다.


인간들은 많은 피를 흘렸고 또 더 많은 피를 갈구했다

삐걱거리는 육신으로 삽을 들고 땅을 파면

샘솟는 지하수인 듯 선혈이 쿨럭거리며 뿜어져 나온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나는 진짜 태양을 찾아 헤맸다

수채화 같은 산중에서 독처럼 센 술을 마시고

담배를 입에서 뗄 줄 모르며 널브러져 잠들었다.


오, 전란의, 뒤집어진 군홧발 소리가 들려온다

사람들은 다시 한 번 악신惡神을 만들어 섬길 것이다

쥐들은 도망치고 산짐승들은 더 깊은 굴로 몸을 숨겼다.


내 가엾은 선조들의 피에 섞인 원한은

오직 나만을 나병환자 피하듯이 피해갔다

나는 돌연변이였으며 영원히 돌연변이이리라.


버석거리는 땅 위에서 다시 총성이 울린다면―과연 그것은 울리고야 말겠지만

나는 어디에도 없는 태양 밑의 어디에도 없는 해변으로 갈 것이다

세계가 멸망할 때까지가 역마살 들린 자의 평화인 것을 어찌 설명하랴?


그러나 내가 전연 친애하지 않는 사람들이여, 나는 질책하는 것도

환멸에 떨다 떠나는 것도 아니다. 그대들이 보기에 내가 이방인인 만큼

나도 이 모든 문명과 민족들에 대해 이방인이다.


인간들의 몸속에서 숨어있던 악령들이 늑골을 열어젖히고 빠져나와

그들의 발자국을 대지에 찍는 것이 훤히 보인다.


나는 언제까지나 방랑에 대해서조차 방랑자이리라.


나는 오늘 밤에도 산중에 앉아 불길에 휩싸인 행성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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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체코인이 심어두고 간



긴 고독 속에 침묵을 지키며 살다보면

카프카의 오드라덱이 쳐다보는 듯하다

그 서걱서걱한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고

나는 허상으로 가득 찬 공허 속에 오로지 혼자다.


닫힌 방에 가만히 앉아

어떤 본 일 없는 단란한 가정을 꿈꾸거나―혹은

제신諸神들이 뛰노는 숲을

영원히 오지 않을 이야기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꿈꾸고 있으면


오드라덱인지 망가진 실패인지 여하간에 그것이

소름끼치게 비웃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나는 꿈을 끊고 버리고 떠나야 하리라

이 육신도 마음도 피었다 꺼지는 불꽃이니


고독은 옳지만 고독에 몸부림치는 마음은 옳지 않다.


실상 이것은 축복의 기회다! 내가

허구에 현혹되지 않고 공허의 한복판에 꼿꼿이

앉아 아무것도 기다리지 않는 것은 분명한 기회다

그러나 나는 헛된 열병에 부푼 몸을 허우적거리고 있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늙은이의 일이고

나는 항상 찬란한 파국을 꿈꿔왔으니 삶에 공포는 없다

그러나 언뜻 무거워 보이는 이 육신의 마음이

자꾸만 한 세계 바깥으로 손을 뻗으려는 것이 내게는 큰 고통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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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사가 예정된 환희

글/시 2017. 7. 7. 15:18 |

익사가 예정된 환희



한 모금의 물을 위해 너무 많은 피가 흘렀다.


별조차 찾아오지 않는 어두운 대양에서

나는 뭍도 찾지 않고 헤엄쳐왔다

허파로 흘러들어간 바닷물들은 불길이 되어

내장을 태웠다


파도에 닳아 뼈가 튀어나온 내 팔다리는

그럼에도 수영을 멈출 줄 몰랐고

나는 기침을 뱉으며 새까만 바다를

직선으로 헤매고 또 헤맸다


너무 어두워 수평선은커녕

내가 잠긴 바다도 보이지를 않았다

검은 하늘과 검은 대양은 하나 되어

나는 공포의 공허를 헤엄치는 것 같았다


그러나 파도는 집요하게 내 뼈를 깎고

피 냄새를 맡고 몰려온 바닷고기들이

나의 살점들을 뜯었다 점점 나는

헤엄치는 백골이 되어갔다


어디에도 눈동자 같은 것은 없었다

달과 별은 뜨지 않고 물고기들은

너무 오래 심해에서 살아 눈이 없었다

나는 감겨진 세상에 있었다


태어난 이래 아무것도 먹지 못해 기뻤다

자신이 왜 수영을 하는지는 모르겠으나

근육과 뼈가 파도의 이빨에 뜯겨져나감이 기뻤다

뭍이 없어 기뻤고 빛이 없어 기뻤다


지느러미도 아가미도 없이 헤엄치다 죽어 닳아가는 것이

기뻤다 어디에서 와서 이 폭풍우치는 지옥을 건너는 것인가

알 수 없어 기뻤다


불길에 허파가 화끈거려 용암 같은 기침이 터져 나오고

순간순간 힘이 빠져 가라앉다가 비참한 소생의 숨을

가쁘게 들이마시고 다시 팔다리를 휘젓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음이

기뻐 환희에 미쳐버릴 것 같았다


세계의 맨 얼굴을 보지 못하고 두 다리로 서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이 환희를 모를 것이라고

나는 익사의 고통에 눈물 흘리며 소리쳤다

세계라는 저주와 맞대면 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우울증에 썩어갈 것이라고


우리들의 실존은 해류의 한 조각 정도다.


나는 단 한 번도 살려달라고 한 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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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고양이가 울기를 멈춘 시간



새벽 다섯 시

태양보다 빨리 하늘은 밝아오는데

새는 운다.

나는 울지 못한다.


골목에선 흙과 물방울의 냄새만 피어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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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아이

글/시 2017. 6. 15. 05:38 |

세계의 아이



그것은 한 줌의 화약이었고 불어오는 폭풍이었고

땅 밑에서 솟아오르는 지진이었고 터져 흐르는 용암이었다가

마침내는 한 사람의 인간이었다


새벽 네 시의 흰색과 검은색의 구둣발들 사이에서

군청색으로 휩쓰는 어둠이었고 침묵하고 있는 재앙이었다

더러는 재앙이기를 갈망하는 움찔거리는 심장이었다


심연 속에 아무렇게나 버려진 사물들 같은 세상에서

그는 거대한 조소를 믿었고 그것을 경멸하며 또한 그것이

우리에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선지자였다


짐승들은 무의식의 기쁨을 포효했고 마천루들은

굽어 내려다보는 콘크리트의 눈동자였고 그러나 다만

인간만이 직선과 기하학을 찾아 말라가고 있었다


총탄이 활개를 치는 전쟁터에서 그는 홀로 도끼만을 들었고

죽음은 약속이라도 한 듯 그를 비껴갔다 그는

살과 뼈와 피와 새끼손가락을 걸었고 그래서 절대 총을 들지 않았다


마침내 한 줌의 화약으로 돌아가 부스러지며

철모 밑에 깊게 묻힌 그것은 가끔씩 천공에서 울리는 목소리를

들으며 언젠가 잔악하게 폭발할 것을 그저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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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발심 나름의

글/시 2017. 5. 30. 20:57 |

초발심 나름의



어드메냐 이름 없는 사람들 있거나 아니 있거나 했던 기억도 못할 언덕빼기

허리 숙여 신발끈 단단히 매고 나는 간다 하고 옷깃 털었던 곳이 어드메냐

여하간에 발길 가벼운 절름발이마냥 봇짐도 없이 나는 가기로 했다

동행자는 몇 명의 존귀한 유령들이었으나 나는 산 사람이라 대화할 생각이 없다

가기로 했으니 가야지, 그러니 이제 천만 리를 넘어 내 난 마을에 다시 온다손 하여도

이 마을은 모르는 마을인 것이다 이 마을사람들도 낯모르는 이들인 것이다

가다 가다 지치고 배가 곯아 풀섶에 푹 앉아도 동행 영가들 고수레만 던지고 나는 또 간다

신발끈 묶은 뒤로 그 언덕빼기 뒤로 한 이후 가기만 하는 것이다

만나 악수한 사람도 곧 작별인사 할 사람이고 작별인사 한 사람도 곧 만나 악수할

그런 사람들일 길로 나는 간다 그 외 할 일이라고는 내 양식 송두리째 고수레 던져

발걸음 점점 높아지고 가벼워지다 외롭고 쓸쓸허이 웃으면서 휘적휘적 공중을 걷는 일이다

그릴 사람들이 있으면 있는 대로 떠날 사람들이 있으면 있는 대로

그러니 더욱 가고 또 갈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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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성

글/시 2017. 5. 21. 21:16 |

반성



햇살이 산사를 몹시 빛나며 흐르게 하는가 싶었더니

순식간에 밤이 내렸다

초여름의 개구리 우는 소리와 창문을 두드리는 바람소리가

새까만 산사에 울리는데

나는 높고 외롭다 더러는

곧 높고 외로울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곳으로 털레털레 오기 전 손수 도끼를 들어

내 발목과 손에 난 두꺼운 줄기들과 잔가지들

전부 쩔꺽쩔꺽 끊어버렸다고 나는 그리 생각했었다 그런데

마침 날개미들의 번식철, 산사 곳곳에

커다란 검은 반점 같은 수개미들 시체가 산처럼 쌓인 걸 보니

심장에서 뻗은 잔가지들은 그대로였는가


슬픔은 이미 걷어내었는데도 향 연기처럼

슬그머니 피어오르는 절망에 나는 뒤척거린다

뒤척거리면 이때다 하고 수마睡魔가 내게 이빨자국을

깊고 흉한 이빨자국을 내니 이것이 가장 큰 불편이다

잠에서 깨어야 눈을 뜬다는 사실은

세 살배기도 아는 일일지언데!


게다가 외로움이 달겨들라치면 앞도 안 보고 눈을 감던

내 도시에서의 오랜 나쁜 습관이 또한 방해다

외로움이 난장을 까는 일은 주로 대낮의 지하실에서 있으니

나는 십 수년간을 밤에만 살아왔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러한 나쁜 습관도 내 쓸쓸함에 몹시 불편하다


그래도 오늘은 눈을 떠야겠지―하며 몇몇

내게 치명적인 싯구와 영혼의 강령들을 피부 위에 새기니

북으로 간 시인에게 내가 배운 것처럼

필시 높고 외롭고 쓸쓸해져야 하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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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초현실주의자의 마네킹



나는생각하는방법을잃어버린것같다내머릿속에선모든일들이자동기술법으로쓰여진문장처럼활자로연속하여떠올랐다가아무런논의도이루지못하고흩어져버린다


그는 총 18알하고도 두 알이 더해진 알약들을 삼키고 기다렸다. 기다리는 동안 그는 자신의 머릿속에 담겨진 수천 권의 책들과 그 문장들의 혼합된 덩어리를 굽어보았다. 그러나 아무것도 발견해낼 수 없다고 생각한 순간 그는 계시를 받듯이 단 <하나>의 거대한 혼돈을 보았다. 구겨진 이불 사이에서 유기된 시체처럼 썩어가던 그의 정신은 갑자기 경련하듯이 꿈틀댔다. 그는 분명 무언가를 보았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그것은 위대한 것이었으리라는 믿음이 전류처럼 흘렀다. 그러나 천둥번개는 강렬한 소음과 함께 나타났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 없어지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본 것을 정리하기 위하여 노자와 니체 등 어줍지 않은 지식들을 자와 컴퍼스처럼 이용하려고 했으나 이미 너무도 노화된 그의 정신은 제대로 움직여주지를 않았다. 그는 분노에 차서 소리쳤다. 「동물이란!」 그것은 일종의 동경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영원히 녹슬지 않는 무의식으로 가득 찬 기계들의 삶이여! 그는 넘어진 컵에서 쏟아지는 물처럼 벌컥거리며 움직였고 핏발 선 눈은 사납게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그러나 그라는 <인간>은 인간의 존재조건으로 말미암아 너무 녹슬어버렸고 손가락 하나 까딱하는 일에도 젖 먹던 힘까지 쥐어 짜내야할 판이었다. 그러니 생각이라는 것을 정리하는 일은 오죽했으랴! 이미 활자조차 이루지 못하는 그의 정신은 관념적인 이미지만으로 고장 난 신호등처럼 점멸을 반복하고 있었다. 어쩌면 이 모든 정신의 사업들이 단 한 푼의 가치도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회의가 파도처럼 휩쓸려왔다. 실재로 그는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의 가족들은 어디에 있고 그의 친구였던 자들은 어디로 가버렸는가? 마지막으로 책을 읽었던 것은 언제이며 마지막으로 누군가와 제대로 된 대화를 성립할 수 있었던 건 언제인가? 그는 스스로 망각 속에 있었고 그로 인해 아이러니하게도 흡사 영원과 비슷한 것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 비참하다고 말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말도 늘어져버린 녹음테이프처럼 분열된 음절들을 기괴한 소음으로 반복하는 것뿐이었다. <나는 비참……비참……비참하……비……비참……> 구두점을 찍으면 모든 것이 끝날지도 모른다는 희망 비슷한 것도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는 절대로 그럴 수 없었다. 그것은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의식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필멸자이면서 영원과 닮아 비참했다. 아니면 슬플 수도 있었나? 글쎄, 그가 비참하다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도 서술자인 내가 그렇게 말하기 때문이다. 그는 절대 스스로 문장을 끝맺을 수 없다. 그는 가래가 끓는 것 같은 이상한 소리를 내면서 어둠 속에서 움찔거렸다. 그의 젊음과 청춘은 어디에 낭비되어버렸는지? 영화필름 사이에서 한 컷만을 칼로 잘라낸 것 같은 이 장면은 아무것도 제시하지 않고 있었다. 그저 축축한 퇴폐와 절망의 색깔을 한껏 담은 채 완벽하게 정지되어있었다. 이 장면에는 스토리도 결말도 없었다. 저 썩은 나뭇가지 같은 남자를 보라! 저것은 도무지 주인공이 될 수 없다. 이것은 오발탄처럼 잘못 날려진, 아무런 교훈도 의미도 줄 수 없는 잉여의 장면, 곧 누군가가 주워 쓰레기통에 던질 뿐, 그 누구도 주시하지 않는 잘못 만들어진 장면이었다. 그가 계시처럼 느낀 강렬한 이미지도―그러니까 그 혼돈이라고 칭해진 것 말이다― 사실은 시간도 측정할 수 없는 어지러운 일생동안 계속해서 느끼고 잊어버리고, 느끼고 잊어버린 저주 같은 것이었다. 지금 그는 입을 반쯤 벌리고 신음소리를 내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신음소리는 나올 리가 없다. 약 20분 전 삼킨 18알 하고도 두 알이 더해진 약 때문에, 그는 이제 존재를 잃어가고 있었고 건드리면 마치 바늘로 찌른 물 풍선처럼 펑 하고 터질 것만 같았다.

 그는 <또 다시> 구겨진 이불 사이로 쓰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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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없는

글/시 2017. 5. 14. 21:42 |

참을 수 없는



도시가 밤인 것이 중요한 게 아니다

지갑에 지폐 한 장 없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껴안을 어깨가 없는 것이 허전한 게 아니다

눈물이 나오지 않는 것이 슬픈 게 아니다


오늘 교수직을 은퇴한 늙은이를 한 명 만났다

그는 자신의 군장교 시절부터 시작하여

한 학교의 교장이었던 것, 어느 대학의

교수였던 것, 당당히 쌓아올린 자신의 지식들을

수집한 우표를 자랑하는 어린아이처럼 늘어놓았다


나는 그의 늙어가는 얼굴이 고목의 껍질 같다는

그런 생각에만 정신이 팔려있었다

그의 장황한 자부심과 친절한 대접이 끝난 뒤

거리로 나오니 밤이었다 별도 보이지 않는


나의 미래를 점쳐보려 했으나 별도 없었고

별이 있다 한들 별 도리도 없었다

끔찍하게 담배가 피우고 싶었으나

니코틴이 주는 위안을 물리칠 만큼 나는

어쩌면 절망해있었다


더욱 깊숙이 담배를 끊어야할 때가 온 것 같다고

나는 중얼거리고, 이제는 알코올 등 온갖

신경물질들이 주는 퇴폐적 위안도

나의 고독을 방해한다는 것을 분명히 하며,

은밀하게 등을 꼿꼿이 폈다


그러나 여러분, 오해는 마시라

나는 더 낮은 곳으로 걸어가기 위한 준비를

단단하게 시작한 것이다

더 단순하고―발 디딜 뭍도 없는

이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존재가 시작되는

공허의 밑바닥으로


그러나 그것은 결단 내릴 것도 없는

숙명 같은 전락이다: 늙을 줄 모르는 영혼을 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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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음은 늘 짧았다

글/시 2017. 5. 9. 02:48 |

젊음은 늘 짧았다



정오의 용암 같은 태양빛 아래 술통 위에 앉아있을 때, 나는 <천재>라는 말을 믿고 있었다. 그러나 악마가 나의 눈꺼풀을 찢어 결코 눈 감을 수 없게 되었다.

어느 노련한 통장이가 불길로 굽힌 판자들로 단단히 형태 지어진 술통을 나는 거칠게 걷어찼다. 주황빛 광장에 둔탁한 소리가 터지고 밤이 내렸다.

나는 모든 것을 볼 수밖에 없었다. 젊었던 내 피들은 부글부글 끓더니 정수리를 통해 증발해버렸다. 이제 늙고 거뭇거뭇한 심장으로 나는 야밤의 빛살들을 보았다.

아름다움은 모든 곳에 있었으나 그림자와 거짓이, 그리고 혐오가 그것들을 더 단단하게 만들었다. 광부처럼 나는 곡괭이를 쳐들었다. 「이 마을엔 나밖에 없는 모양이야. 아니 이 마을뿐만이 아니라……」 깨져가는 흙벽 사이에서는 선혈이 꿀럭거리며 기침처럼 쏟아져 나왔다.

아! 달빛은 인간을 미치게 한다지. 내 곡괭이는 달빛에 세게 맞아 부러졌다. 나는 떨어진 보석들을 주워 모았으나 그것들은 이내 꿈틀거리는 역겨운 벌레가 되어 나의 손바닥 가죽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오열嗚咽을 위한 계절만이 끝없이 계속되었다. 내 곡괭이는 처참히 부러졌다.


벚꽃이 피면 쌍뜨뻬테르부르크로 걸어서 가자. 그곳에는 꽃잎이 날리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눈감을 도리를 잃어버린 내 눈은 시뻘겋게 핏발이 서 광견병에 걸린 개의 눈 같았다. 나도 분명 공수병에 걸린 것이겠지. 그렇지 않다면 물 흐르는 소리가 이렇게 두려울 리 없다. 그 소리는 내 뇌수에 이 행성의 나이를 삽입한다.

절망의 손이라도 잡고 싶었는데, 생각해보니 그는 나의 오랜 친구였고, 내가 그를 떠나게 만들었다. 곡괭이도 부러진 마당에 나는 분노의 함성을 지르며 손도끼로 나의 양손을 끊으려 했으나, 오, 나는 내가 사랑했던 이들을, 언젠가는 이 손으로 묻어야 해…… 그러고 나면 대지는 더 이상 나의 편이 아니게 되겠지.

길이 아닌 곳만을 찾아 걸어온 다리는 너무 지쳐있었다.

너무 오래 비명을 참아 입가에서는 피로 된 거품이 들끓었다.

<천재>라는 말을 불신하게 된 이후 처음으로, 나는 다시금 펜을 찾고자 했다.


열광! 열망! 갈구! 그러나 그것은 너의 말이다. 내 영혼은 침체의 바닥을 핥아보았다. 그리도 찬란한 너의 머리를 언젠가 금강반야의 도끼가 부숴버리고야 말 것이다. 왜냐하면 너는 그리도 아름다워서, 처참하게 피 흘리며 죽어야만 하기에.

언젠가부터 해가 뜨지 않았다

그러나 좋은 일이다. 지금 나의 육신은 햇빛을 받는다면, 만약 그렇다면 산산조각으로 깨지며 굉음을 단말마로 삼고 말테니. 아니, 차라리 그렇게 하라. 차라리 날 수류탄처럼 터지게 하라.

북쪽으로 가는 길은 멀기도 하지. 그러나 그곳에선 영원한 먹구름 아래 진눈깨비만이 시간도 잊은 듯 나릴 것이다. 만약에 내 기억이 맞다면, 어느 가난한 이와 푹푹 나리는 눈과 아름다운 나타샤와 흰 당나귀의 재들이 거기에 묻혔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기도 따위를 올리러 가는 것이 아닌걸. 죽음이 하는 일들에 침을 뱉었으니 나는 차라리 신도 여신도 없어서 살고 또 사는 것인걸.


땅 밑은 온통 피바다와 잿가루. 오늘도 쌍뜨뻬떼르부르크에서는 잿가루가 푹푹 나리리라. 거기선 내 영혼도 얼어붙어 지금보다는 조금이라도 무거워지겠지. 손에 든 펜으로 나는 내 몸에 시구를 새긴다. 종이에 쓴 것들은 불타고 만다. 그러나 이 몸도 불타고 말 것인데, 아니 나는 그런 일에는 관심이 없다.

고되서 앉았다. 풀섶에 털퍽 앉았다. 밤벌레들 산만하고 하늘엔 달만 고고히 떴다. 나는 이제 <천재>가 무슨 말인지에 대해 전혀 종잡을 수가 없었는데, 그것이 오히려 마음 가뿐한 일이었다.

진눈깨비와 재가 흩날리는 공백의 도시까지 앞으로 몇 달, 혹은 몇 년 남았을까. 목적지가 정해진 방랑에 나는 늘 혼자였다. 누구라도 나타나 입을 열라치면 나는 그놈의 모가지를 비틀어버릴 셈이었건만, 아무도 없었다. 하하. 여기가 어디로 가는 골목인지는 모르겠으나 날씨는 점점 춥다.


바다에서 도망치려면 뭍으로 가야지. 바다가 보이지 않는 내륙의 내륙으로 가야지. 북녘의 땅에 무엇이 있든

나는 점점 여위어간다.

나는 굳이 나를 그냥 내버려두라고 하소연할 필요도 없음에, 즐거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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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자, 피안의 숲으로 가자



어딘가에 풀과 나무가 사는 모양이다

이 회색 도시의 한복판에서도 새벽

시멘트 바닥 위에 서있으면 그들의 냄새가 난다

밤이슬을 머금은 풀잎들의


그들은 밤에만 피어나는 것일까? 아마도

그럴 것이다. 이 깊은 동심원 속에서는 해가 뜨면

무자비한 구둣발들이 사방을 짓밟고

활보하니까


코로 들어오는 농밀한 새벽냄새에

난 떨며 오열할 것 같다, 숨어 지내던 그들이

다시 한 번 온 세상에서 인류를 대신하는 것을

나는 꿈꾸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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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한 죽음

글/시 2017. 4. 26. 02:55 |

완전한 죽음



나 눈을 감으면 화톳불로 태워주오

남은 재들 부디 북아프리카의

뜨거운 사막에 뿌려주오

일생 가슴에 담아왔던 눈물들

열파 속에서 사라지도록


사막의 모래가 된 나를 위해 울지마오

용암처럼 퍼붓는 태양과

소금기둥으로 만든 우상들 사이에서 나는 영겁을

이 행성의 유구한 나이와 함께 휘날릴 테니


그대 내 죽음을 열광의 땅에 뿌리고 왔다고

그들에게 전해주오

다부진 갈색 피부의 사람들 사이로

나는 모래바람 되어 피부마다 흠집을 내고

영원한 열기 속에 신도 인간도 아니게 되리다


불꽃이 들끓는 태양이 내 영혼이 되고

시시각각 모습을 바꾸는 모래언덕이 내 육신이 되어

나 말 그대로 땅 끝의 황금빛 용광로에서

극한을 찾아 몸부림치며 걸어온 처절한 여행객들에게

가장 활기 넘치는 화끈거리는 죽음을 선사하리니


나 눈을 감으면 화톳불로 태워

재가 된 내 몸 가장 말라붙은 대지 위에

가장 뜨거운 태양 아래 뿌려주오

소금과 모래가 된 나를 위해 울지마오

나 안식 따위는 없는 땅에서 영구히 기뻐하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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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의 그림자는 말이 없다



어디로 가려는가 하고 그들은

물었다

「나는 시냇물 한 모금이면 되오.」 사내는

침묵을 지키고자하는 절망적인 노력 끝에

한숨처럼 내뱉었다 그들은

언어가 아닌 것을 믿지 않는 이들이었기에


무엇이 되려는가 하고 그들은 물었다

수척한 얼굴의 사내는

눈동자를 길게 떴다 그리고

자신의 몸에 걸친 낡은 옷가지를 내려다보았다

실밥이 터지고 헤진 그 옷들은

분명 대답을 대신하는 것이었다


황혼이 벽돌담 위에 깔리고

시계의 시침은 조용한 광란을 가리켰다

「나는 무척이나 피곤해,

담배를 피우게 해주시오.」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사내는 호주머니에서 꺼낸 담배를 물었다

라이터의 불꽃을 그는 성령聖靈 보듯이 보았다


하늘이 내려앉는 것을 보니

곧 저 거대한 돔도 무너질 모양이야, 사내가

연기와 함께 중얼거리고, 거의 개의 눈처럼

동의를 구걸하는 눈빛으로 그들을 보았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것이라고는 꿈에도 몰랐다


비참한 고독이 그의 심장에 뭉게뭉게 피어오르는구나!

염소의 눈을 가진, 대중들과 마주할 때만

느낄 수 있는 그 처절한 고독이 그를 무너뜨리는구나

오래전에 그의 영혼이 떨어졌듯이

담뱃재가 나긋이 떨어졌다


한 소절의 노래가 듣고 싶다, 종달새의

인간이 만든 화음이라고는 전혀 없는 지저귐이 듣고 싶다

풀잎이 피어나는 소리가 듣고 싶다, 구름의

쇳빛 발자국 소리를 듣고 싶다. 사내의 얼굴은

점점 수척해지고 하얗게 말라

마침내는 사라질 것 같다.


「저 친구는 좋은 사람이야. 하지만

동시에 꽤나 이상한 친구지.」 연기를 뿜어내며 골목

사이로 괴물처럼 발걸음을 내딛는

사내의 등을 보고 그들은 서로 속삭였다 그들은

고개를 끄덕이고, 가죽장정이 된 손안의 책을

더 단단히 붙잡았다.


오늘 밤에야말로 시계가 멈추지는 않으려나?

이상한 사내에게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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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의 비극

글/시 2017. 4. 20. 23:55 |

봄의 비극



증오도 눈물에 젖어 희멀겋게 변한

초봄, 밤 벚꽃의 암담한 신비 아래에서

보름달이 떨어트린 술로 들어찬 술잔

단숨에 마셔버리려 했지만 목이 메어

벚나무 밑에 웅크린

어디로도 떠나지 못하는 인간, 인간.


그는 잠자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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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에게

글/시 2017. 4. 4. 01:01 |

여러분에게



여러분, 나는 갈색의 여인들과 그 육신의 향취에 대해 쓰고 있었다

나의 타자기는 소음을 멈출 기색이 없는 것 같았고 나의

중추신경에서는 천둥과 지진이 영원히 울릴 것 같았다 그런데

순간 무시무시한 공포가 엄습해왔다 달도 별도 가로등의 노란

불빛조차도 보이지 않는 내 어두컴컴한 방에서 나는 타자기에 대하여

활자들이 찍히는 순백색 종이에 대하여 사마귀의 손처럼 까딱거리는

내 손가락들에 대하여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이 벌어지는 1평도 되지 않는

내 광증의 둥지에 대하여 나는 공포 때문에 숨을 멈췄고

이 둥지의 모든 공기가 점액질처럼 변해 내 전신을 짓눌러댔다


여러분, 나는 나의 모든 살과 근육이 실종되는 것을 보았다

나에게는 딱딱하고 덜그럭거리는 뼈들만이 남아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 같아 보였다 그러니 갈색의 여인이니 그 유방의 내음이니 육신의 쾌락

과 살결에 묻은 태양의 조각들이 도대체 무슨 의미를 가진단 말인가 나는

말라가고 있었다! 분명히 말하건대, 나는 말라가고 있었다 게다가

곧 완전히 마를 것이 분명했다 이 속세에서 할 일을 모두 마치면

나는 그저 스러지거나 속세가 아닌 곳으로 구두도 신지 않고 가려고 했다

그러나 그러한 믿음도 한낱 꿈이어라! 나는 두려움에 떨며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당장이라도 손톱이 길게 자라날 것 같았다


여러분, 눈물 흘리는 방법을 잊어버린 나를 저주하라 저주해주시기를 바란다

나는 내가 공허를 쓰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쩌면

이 밤이 지나고 수면제의 독이 혈관을 흘러 몸은 지푸라기처럼 쓰러져

다음 날 햇살 속에서 일어나 오늘의 이러한 고뇌와 공포를 모조리 보류

시켜버린다고 해도…… 비명 같은 밤은 또 올 것이고 또 올 것이며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다. 결코, 결코! 아아, 내가 멀뚱히 서있는 이 벼랑은

나는 달릴 수 있다, 벼랑을 따라 달릴 수 있지만 나는 결코 추락하지 않는다

그런데 도대체 끝에는 무엇이 있는지, <끝>이라는 개념조차 기독교도들이

만들어낸 허상은 아닌지 나는 의문하면서도, 여러분, 나는

이런 것들 때문에 온갖 패악을 벌여왔다


여러분, 나는 죄악을 찬미했다. 그러면서도 내 마음은 인류애로 썩어가고 있었다

나는 밤의 대양에게 노래했다 아노미, 아노미, 모든 사물들의 윤곽과

질량이 녹아버리는 붉은 광장에서 땅바닥을 기었다 내 심장의 문을 열고

그곳에서 양심을 꺼내 태웠다 진눈깨비가 내리면 일 년간 해가 지지도 뜨지도

않는 환각을 보았다 아, <그렇다면당신에게는인간의천칭이필요하다> 씨, 나는

꿈속에서 네 목을 졸랐다 그것은 사탕수수 줄기마냥 뚝뚝 소리를 내면서 떨어졌다

이제 나는 더 이상 도와달라고 하지도 않으련다, 그러나, 여러분, 나를 도와주오

아니야, 아니야! 나는 의무와 사명으로 밧줄을 만들고 관념으로 올가미를 묶었다

하지만 아직은 안 돼. 안 돼, 안 돼…… 빛도 어둠도 광명도 퇴폐도 아닌 것을

나는 아직 완성하지 않았고 여러분께…… 그렇다, 여러분께, 나는 아직 드리지 못했다

이 세상 모든 절망과 너무 오래 미친 듯이 무언가를 보느라 터지고 갈라진

눈동자도, 나는 아직 드리지 못했고, 아, 그러나 염병할!


여러분, 내가 허무주의자가 될 수 없는 것은 나의 비극이다

부디 나를 저주하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잠드시길, 나는

비명 속에서 또 영겁을 외치다 모래성처럼 우수수 무너져버릴 것이다.

그러니까 이 밤,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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