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일기.

기록/생각 2014. 9. 4. 18:54 |

어제 뭉크전 보러 서초동까지 갔다가 비를 피해 찻집으로 들어갔다. 들어갈때부터 뭔가 예감이 좋지 않았다. 무엇이 좋지 않았냐 하면 입구부터 흘러나오는 클래식 음악과 빈공간에 여유롭게 채워넣은 조각들이 예감이 좋지 않았다. 난 친구와 함께 어정어정 들어가서 의자에 앉으려는데 유니폼 입은 점원이 생글생글 웃으며 '이쪽에 앉으시지요'하는 것이었다. 나는 친구에게 속삭였다. '야, 우리 좆됐어.' 그리고 어정어정 점원이 소개한 자리에 앉으려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 차분한 공기는 사람들 차나 마시라고 있는 것이 아닌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쪽팔림 무릅쓰고 점원에게 다가가 메뉴판이나 한번 보자고 하였다. 커피 한 잔에 육천오백 원이었다. 시바. 나는 친구 셔츠 잡아당기며 찻집 밖으로 도망쳤다. 시바. 자본주의가 날 울게 만든다. 누나 나는 맑스나 배우러 가야할까봐요. 사람들이 육천오백 원짜리 커피 때문에 날 빨갱이라고 부르더라도 별 도리가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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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부러진 집에서

글/시 2014. 9. 3. 16:59 |
구부러진 집에서


내가 사는 집은 구부러진 집이다
정신이 멀쩡할 때에는 집에 들어올 수 없다
알코올과 니코틴으로 눈동자가 돌아버렸을 때에만
이 집에 들어올 수 있다 그래야만
이 집이 가진 경계선과 면적들이 멀쩡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현관문에 열쇠를 꽂고 돌릴 때에도
남들이 하듯이 똑바로 찔러넣어서는 안 된다
잘못된 위치에 꽂아야만 문이 열린다.

이 집은 구부러져 있기 때문에
소시민들이 쓰는 보통 가구로는 채워 넣을 수 없다
그래서 나는 밤마다 밖으로 나가
다 썩어가는 나무 등걸과
한번 쓰였다가 버려진 못들을 주워 모아
텁텁한 냄새가 나는, 이미 만들어질 때부터 망가진
그런 가구들을 만들어 집에 채워 넣었다.

이 집에 들어오는 햇빛은
구부러진 창문을 통과하는 순간부터
거울에 비치는 달빛이 되어버린다. 그래서 이곳에서는
절대로 아침을 맞이할 수 없다. 아침이라는 것은
죽은 태양의 허묘(墟墓)다.
이곳에서는 그림자 진 사물들만이 진실이 된다.
망가진 책장에 꽂힌 책들은 펼쳐보면
문자가 아니라 죽은 시인들의 발광이 소리가 되어
내 입으로 쏟아져 들어온다. 여기서 독서는 늘 광란이다.

나는 아직도 방문을 나설 때마다
어깨나 머리를 어딘가에 부딪친다 사방이 변색된 핏자국이다
언젠가 내 몸속의 피가 전부 이 구부러진 집에 바쳐질 때
나는 이 집의 일부가 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딱히 그 날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저 나는
다른 집에서는 살 수가 없는 탓이다.

지나가던 아이들이 창문을 두드렸다. 아저씨는 왜 여기에 사나요.
나는 창문을 열고 말한다. 너희 어머니가 이 집 주변에는
오지 말라고 했을 텐데.
맞아요. 이 집에는 구부러진 인간이 산다고 했어요.
그리고 우리 마을 목사님께서
이 집은 마귀가 지은 집이라고 했어요.
내가 묻는다. 마귀가 뭔데?
사람을 나쁜 길로 홀리는 괴물이요.
이 집은 마귀가 지은 집이 아니야. 만약 마귀가 보고 싶다면
마을 중앙에 계신 판사님을 찾아가 보거라.
아이들이 말한다. 거기엔 저번 주에 교수형 당한 사람들이 걸려있어서
가고 싶지 않아요.
내가 말한다. 누가 교수 당했다고?
몇 명의 시인들과 예술가들이었어요. 그들은 죄를 지었대요.
그들도 구부러진 집에서 살았다면
그런 꼴을 당하지 않았을 텐데. 안타깝구나. 그리고 난 창문을
닫았다.

<탕겐! 내 이름은 안드레아스 탕겐이야!> 나는 중얼거리면서
다리가 두 개 밖에 없는 의자에 앉았다.
나는 배가 고팠지만 눈이 붉은 쥐들이 내 음식을 모두 가져가버려서
먹을 수가 없었다. 나는 이 집에 살기 시작한 이래로
단 한 번도 식사를 한 기억이 없다.
탕겐, 내 이름은 안드레아스 탕겐.

그런데 도대체 내 이름이 무엇이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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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가깝고 먼 여인

글/시 2014. 9. 2. 12:12 |
가장 가깝고 먼 여인


그녀는 내게 번역일을 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하였다
그녀는 늘 내게 술을 마실 때는 안주도 함께 먹으라고 하였다
그녀는 내게 제발 진통제를 몰아서 먹지 말라고 하였다
그녀는 언제나 내게 담배를 그만 끊으라고 하였다
그녀는 내게 하루에 두 끼 이상은 식사를 하라고 애원하였다
그녀는 내게 약은 정시에 정량을 맞춰 먹으라고 부탁하였다
그녀는 내게 신문에 칼럼이라도 써보는 것은 어떠냐고 물었다
그녀는 내게 새벽에 정처 없이 몇 시간이고 혼자 걷는 것은 그만두라고 하였다
그녀는 내게 언제까지 아파할 것이냐고 다그쳤다
그녀는 내게 토할 때까지 술 마시는 것은 그만두라고 외쳤다
그녀는 내게 시인 같은 것은 그만 둘 수 없느냐고 물었다.

행복으로 가는 길은 어디에 있지요? 나는
그녀가 더 이상 그녀가 아니게 된 뒤에도
곰팡이 핀 나의 소굴에 홀로 웅크리고 있을 때면 여전히
그녀의 잔소리가 들린다. 그녀의 눈물도 기억한다
그 원망이 방울져 흐르는 모습을
빠르고 날카로운 눈물이 그녀의 볼을 베는 모습을
내가 욕설과 함께 던진 유리잔이 사금파리가 되어
그녀 발바닥에 박혀 송골송골 피가 맺히는 장면을

아픔을 그만 두는 방법은 뭘까? 그런 것은 모른다
그녀가 울 때마다 내 심장에도 쩍쩍 금이 갔다 그러나
내 심장은 그녀의 눈물샘과 달라서 피는커녕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내 심장에 그어진 금에서는
그저 가솔린 냄새만 풍겨댔다 에틴알코올이 섞인

이맘때면 나는 대체로 나의 곰팡이 핀 소굴에서
옆으로 누워 태양이 떨어지는 시기만 셈해보고 있다 그리고
거리에 미광 흐르는 어둠이 깔리면 나는 밖으로 나간다
오늘도 나는 마신 술을 나무 둥치에 죄다 토해놓고
시뻘겋게 달아오른 눈동자로 담배에 불을 붙인다
그녀 이름은 이제 기억나지 않는데 오로지 그
잔소리하던 서글픈 목소리만 기억난다.
Posted by Lim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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