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인일기

글/시 2014. 9. 14. 14:41 |
폐인일기


잠도 못 자는 새벽이라서 나는 시를 써야겠다.
잠을 자려면 못 자는 것도 아니다만은
내 일이라는 것이 새벽에 깨있는 대신
한 달 술값을 받는 일인지라 어쩔 수가 없다.
게다가 편두통이 뇌수 옆구리를 펜촉으로다가
푹푹 찔러대는 와중에 싸구려 인스턴트 커피를
네 잔 하고도 한 잔을 더 마셨으니
누가 자라고 해도 못 잘 것은 아마도 뻔하다
그것은 죄 내 탓이다. 생각해보면
내게 벌어진 모든 악운들이 다 내 탓인 것이다.
예를 들자면 출근하는 날 깨자마자 머리는
누가 망치로 후두려까는 듯이 아프고
물만 마셔도 구역질이 나오고 일어서면
어지럽고 누워있으면 연기 섞인 기침이 나오고
그것은 내가 어제
오늘 출근해야하는 줄 알면서도
내가 술 마시자고 전화하면 만사 다 제끼고
찾아오는 앤드류 브레들리…… 시바 걔 성이 뭐더라,
아무튼 풀 네임이 기억 안 나는 알코올 중독 양키 친구랑
둘이서 소주잔 기울이다가
<나 안 취했어 시바야>라는 대사를 영어로 궁구하다가
마침내는 겁나 시끄러운 바에 가서
럼주까지 마셔댄 탓인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예로는 다음 날 아침부터 나갈 일이 있어
새벽 두 시 전에는 잠들어야 하는데
작심하고 글 좀 써보겠다고 편의점에 가서
한 캔에 커피 일곱 잔의 카페인에 필적하는
에너지 음료(이거 두 캔만 마시면 멀쩡하던 사람도 정신분열증 환자가 된다. 퍽도 편리하다.)를 사다가 마시고 카페인의 가호 하에
시 한 편 완성하고 뿌듯해하며 자리에 누웠는데
아침 여섯 시까지 잠을 못 자서, 폐인 꼴로 외출하여
정작 중요한 일로 만난 사람 앞에서 꾸벅꾸벅 졸던 것도
생각해보면 죄다 내 탓인 것이다. 한 마디로 나는 병신이다.
병신! 생각해보면 나는 내 친구들을 수도 없이
그들을 병신이라고 불렀다. 그들은 딱히 부정도 하지 않았는데
내가 추측하기에 그것은 그들이 내 동료이기 때문이다
고로 나와 내 친구들은 모두 병신이며
서로를 병신이라고 불러대는데 가끔 술 들어간 채로
<이 중에 누가 가장 병신인가>를 투표하면
백이면 백 내가 당선된다. 압도적이다.
말하자면 나와 내 친구들이 모이면 모두가 병신인 가운데
나 홀로 병신의 중심에 있다. 그런데 내가 언제까지고
어른이 되지 못해, 팅커벨이 바닷물에 잠수하다가 익사해서
요정의 가루가 없어 하늘을 날기는커녕
흙탕물에서 빌빌거리는, 한 보름 정도 면도 못 한
피터팬인 와중에 내 친구들은 어른이 되어간다. 그 놈들은
두 다리로 똑바로 서는 방법을 몰래몰래 찾아다니고 있고
언제까지고 절름발이로 사는 것은 원하지 않는 듯싶다. 쓰벌.
위에서 언급한 앤드류 뭐시기 같은 경우에는 이미 어른이다
당장이라도 재활센터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가야 할 정도로 상태 후진 놈이
영어 교사하면서 돈은 존나게 잘 번다. 아마 조만간
결혼도 할 듯싶다. 자기 술값뿐만 아니라
애인 술값까지 벌게 되면 드디어 어른인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애인들에게 술을 사주기는커녕
오히려 얻어먹고 삥 뜯고 다녔으니
안치환의 <위하여> 틀어놓고 방구석에서
빌린 돈으로 산 소주 혼자 들이키며
푸른곰팡이를 벗 삼아 취중진담 하고 앉았으니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짧은 것은
어머니 자궁 박차고 나올 때부터 그러하였습니다. 안치환 씨.
아무튼 그리하여 나는 오늘도 빌빌댄다.
술값 벌려고 새벽에 잠 안자고 깨어있는 지금도
나는 좆나 빌빌댄다. 사방이 시꺼먼 철로 밑을
담뱃불만 쳐다보고 휘청휘청 걸어 다니는데
들리는 풍문으로는 조만간 담뱃값이 오른다고 한다.
이천 원이나 올려서 한 갑에 사천오백 원으로 만들어
폐암과 병과 죽음과 고독과 절망과 자학과 가난을
평생 직업으로 삼고 사는 사람들 모가지를 졸라댈
예정이라고 한다. 씨부럴.
Posted by Lim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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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서울

글/시 2014. 9. 8. 09:37 |
여기는 서울


오늘은 퇴근도 일찍 했건만
왜 이리 발치에는 울증이
푹푹 쌓이고 아침에 퇴근하는 내 몸은
비몽사몽하여 피곤마저 초월하여
지상을 걷는 것인지 구름 위를 거꾸로
걷는 것인지 어깨 위에서 덜렁거리는 내 머리는
아무리 어깨를 꼿꼿이 펴고 있어도
바닥도 없는 늪에 천천히 잠겨가는 기분이다
사실은 기분만 그런 것이 아니라 내 귀와 코와
입으로 태초부터 썩어온
시간이라는 뻘이 기어들어오고 있다.

백석 시인은 가난하여도 나타샤를 사랑하고
나타샤를 기다리면 나타샤가 안 올 리 없었다는데
가난한 나는 기다리는 사람도 없고
날 기다려주는 사람도 없고 그런 것은 일체
기대조차 하지 않으리라고 소주잔에 눈물 빠트리고
술 퍼먹다가 우는 것이 쪽팔려서 소주를 얼굴에 부어대고
그리하여 만취한 내가 거리로 나와서
집으로 돌아가려니 지갑에는 천 원 짜리 한 장 없고
사실 천 원이 아니라 만 원이 있어도 내 가난뱅이 근성으로는
절대 저 주황색 택시를 탈 일이 없다는 말이다 그리하여
백석 시인이 나타샤와 흰 당나귀 타고 갈 때
나는 흔들리는 지하철을 흔들리는 발걸음으로 잡아타고
뻔히 아는 사실로는 지하철은 절대 응앙응앙 우는 법이 없다.

오늘은 퇴근도 일찍 했건만
아침 댓바람부터 혜화동 구석진 곳에 문 열고 있는 술집
Bar 우드스탁의 존 레논 닮은 사장님한테 맡겨둔 글랜피딕 십오 년짜리만
자꾸 생각나고 지금 나는 술도 마시지 않았는데
눈앞이 부예 만물이 다 두어 개 씩으로 나뉘어 보이고
줄담배로 썩어가는 내 허파는 야 인마 힘을 내라
조금만 더 피우면 이제 돌이킬 수도 없을 것이다, 하고
미필적 고의로 내 폐암을 앙망하는 것이다
지랄, 폐암에 대해서는 내가 잘 알지 못한다만
암이 영어로 캔설이라는 것은 알고
한자로 내 이름이 폐인이라는 것은 안다.
고로 나는 잠 때문에 만취한 상태로
휘청휘청 담배 피우고서 자러 갈 것이다. 이 아침 댓바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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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사 중(壞死 中)

글/시 2014. 9. 6. 01:42 |
괴사 중(壞死 中)


세존께서 오시려면 수십만 년도 더 남았단다.
나는 그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내 썩은 몸뚱이로는
도무지 그분을 맞이할 수가 없는 탓이다.
앙굴리말라는 차라리 미치기라도 하였지, 미친다는 것은
죄의식도 자문도 버리고 광란한다는 것으로
오히려 수행길 들려면 어떻게든 미쳐야하는 것이다.
바야흐로 정신병원 대기실에 앉아있으면
온갖 병자들의 온갖 병증이 공기를 통해 전염되는
그리하여 진료실 문 열고 들어갈 때쯤이면
어엿한 미치광이가 될 수 있는 편리한 시대다.

아흔아홉 개의 손가락만 모으면 세존께서
내 앞에 오시지 않을까 싶어 밤새 술 마시며
칼인지 펜인지를 숫돌에 존나게 갈았다.
이빨 사이에 욕지거리 물고 갈았다.
그것은 오래전에 이미 수십 번이나 피맛을 보았다.
내 좁디좁은 가슴에서 심장이 발악하며
바깥으로 뛰쳐나가려 할 때마다 나는 출구나마 만들어보려고
복장뼈를 부수고 늑골을 여는 방법에 골몰하였다.
그러나 칼날인지 펜촉인지는 주로 살점만을 뚝뚝 열어제끼고
핏줄기 묻은 채로 방치되었다. 그래서 시방 내가 갈고 있는
이 칼인지 펜인지도 남의 손가락을 절단하기는커녕
아, 쓰바, 석가세존 만나도 할 말이 없으니
불문학으로 꽉꽉 들어찬 책장에 끼워 넣고
나는 잠이나 잘 듯 싶다.
한여름에 동면이나 할 듯싶다.

한여름인데도 내 난도질당한 영혼은 간질 환자처럼 발광이다.
춥고 시려서 돌아가시겠으니 당장이라도 악업 쌓고
지옥 유황불꽃에 따뜻해지자고 발광이다.
Posted by Lim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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