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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4.04.03 그땐 그랬지라는 말 하지 맙시다

그땐 그랬지라는 말 하지 맙시다


 그곳이 네 번째 술집이었을 것이다
 정신 따위는 남아있지 않았고
 문을 열자 딸랑거리는 종소리가 났고
 손님은 죄다 흑인이었다
 대충 열 명 정도

 더 있었을 수도 있고.

 바테이블에 앉아 럼주를 시켰다
 바텐더도 흑인이었다
 직후 흑인 남녀가 내 옆자리에 앉았고
 술을 시켰다

 바텐더는 남녀에게 술을 가져다주었는데
 내 술은 없었다

 이봐요
 내 술은?
 아, 금방
 가져올게요

 곧
 옆자리 남녀에게 두 번째 잔이 서빙되었다
 여전히 내 술은
 없고.

 미쳤던 게지.

 자리에서 일어나 나는
 야 이 애미랑 씹질할 깜둥이 새끼들아
 라고
 그네들 말로 외쳤다

 뭔 일이 있었는지 잘 기억은 안 나는데 아무튼 나는 가게 뒤쪽 쓰레기장에 누워있었고
 어디가 아프지는 않았다

 달도 별도 없는 밤하늘 멀뚱멀뚱 쳐다보다가
 술이나 먹으러 가기로 했다
 술기운 떨어진다고 몸에서 싸이렌 울리더라.

 좁아터진 골목 거리
 네온싸인 켜있고 술집이면 그냥
 그냥 직입
 직입 했는데

 들어오지 마세요
 예?
 술 안 팝니다
 예?
 출입금지라고 저번 주에 분명히 말했습니다
 술 안 팔아요?
 들어오면 경찰 부를 테니 빨리 나가세요
 그럼 뭐
 별 수 없지
 말 잘 듣는 모범 시민은 야간버스 타고 집에나 가야지

 아침도 지나고, 정오
 하여간에 만사에
 도움이 안 되는 고깃덩어리, 온몸이 더럽게
 빌어먹게 아프고
 얼굴은 왜 이래
 강판에다 간 것 마냥

 히,
 희,
 희희,

 집안은 썰렁하고
 부엌에는 아침이 차려져 있고
 밥 집어먹다 창문을 보면
 어제처럼, 엊그제처럼, 늘상 그랬던
 것처럼
 구두들은 결연히 전진한다

 몸은 변기를 붙잡고 뭔지도 잘 모를
 어떤
 중요한, 부수적인, 무거운, 한없이 가벼운
 것을……

 에이씨
 몰라 숙취 때문에 오바이트 했다.

 이게 아마
 5년 전인가 6년 전인가
 백 년 전인가
 억겁 전인가
 내 기억이 맞기는 한가

 어쨌거나
 그 동네 아직도 딸랑딸랑
 현관 종소리 딸랑딸랑
 끝이 없다던데

 출입금지자 목록에 내 모습 올려놓은
 그 절박하던 사장들은
 어쩌면 나만큼
 어쩌면 나보다 더
 절박하게
 무언가를 찾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지 않고서야
 왜 거기다 둥지를 틀겠어
 하기사 거기
 끝 간 데 없이 헤매다 보면
 뭐 반짝거리는 게 많기는 하다

 그래,
 빛나는 건 아니고
 반짝거리는 거

 두들겨 맞을 때 안구 속에서 번쩍이는
 섬광 같은
 대충 그런 거

 그 술집도 이젠
 없다, 없을 것이다
 없겠지
 아마.

Posted by Lim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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