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입상立像

글/시 2016. 12. 24. 05:53 |

검은 입상立像



밤 같지도 않은 밤이 밤이라고 속삭거린다.


새벽거리 북풍에 휘날리며 신문지들

인간들 마구 뒹굴고 날아간다 네온이 발하는 광선은

신문지의 윤곽, 불 꺼진 아스팔트의 검은 윤곽,

술 취한 대학생들 이상한 색깔의 머리칼 윤곽을 만든다.

나는 어두운 지하철역 앞에 한참을 서있었다.

「가짜 프롤레타리아, 그러나 프롤레타리아보다도

빈궁한……」 나는 네온사인의 바깥에 있다.

바람은 엉망진창으로 분다. 이 도시에서는

동서남북을 분간할 도리가 없다 그리하여

바람은 이쪽에서도 불었다가 저쪽에서도 불며

이 찬 바람에 나는 지금이 겨울밤이라고 생각했지만

하늘은 이상한 보라색이었다 나는 입을 다물고

두 손을 호주머니에 쑤셔 넣고 한참을 서있었다.

혀가 바싹 마르는 것이 지독하게 술이 마시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무언가를 기다리는 기분으로

취객들이 지나가는 거리의 변방에서

내가 기다리는 무언가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술을 마셔버리면 나는 돌아갈 곳이 없다

나의 영혼은 알코올이 주사되면 집을 잃어버린다

집? 아니, 내가 돌아갈 수나 있을까 나는 도대체

언제 발걸음을 떼야할지도 모르겠는데

순간 나는 하늘이 칠흑 같지 않다는 것에 화가 났고 또한

별들이 내려오지 않는 것에 화가 났다

차들은 소음을 뿌리고 헤드라이트를 번쩍이며 검은 포도를 달렸다

「너는 이미 서명을……그러니까, 네 피로 사인을 했어

언제였는가 하면, 탯줄이 끊어지던 순간에.」 피로 된 무산계급

무산계급의 피

나는 돌연했고 이질적이었고 전혀 계측되지 않은 것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모두와 같은 것이었고 다소 녹이 슬었을 뿐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번개도 치지 않는 겨울의 새벽은 더럽게 춥다

밤 같지도 않은 더럽고 대기에 쩍쩍 금이 가는 것 같은 새벽

나는 너무 피곤해서 고함도 지를 수가 없다

나는 너무 피곤해서 고함도 지를 수 없다.

Posted by Lim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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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인간非人間의 신화神話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헛된 삶에

오로지 이것만이 헛되지 않다고 한다면

그것은 인간에 대한 비극이다. 그 가정이 말하는 바는

인간은 인간이 아니게 되려는 노력에서만

빛깔 없는 보상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니

강단의 강사처럼 집게손가락을 들며, 예를 들어,

로마 황제가 그노시즘 교리를 이단으로 잘라낸 뒤 이천년

행성의 절반을 뒤덮은 십자가는

정통 교리로 인정받은 적그리스도들의 표식이 되었다.


저 춥고 딱딱한 독방에서 쇠구슬이 달린 말꼬리 채찍으로

자기 등을 내려치는 가톨릭 수도자들은

감히 입을 벌리지도 못하면서 직관하고 있다: 신성神性은

반인성反人性이야

붓다가 매에게 자기 팔뚝 살을 잘라줄 때나

모하메드가 아무리 봐도 광증으로 보이는 가브리엘에게서

도망치는 짓을 멈추었을 때나……

잘들 보시오. 타의로 살해당하거나 사형당하는 이들은

모두 세인트-상트-샌-산타-산이 되어버리지, 누구의

의도와도 상관없이.

그러니 내가 살아온 시린 삶에

유일하게 의미가 있었다면


나의 이 길고 비참한 비명은 처음부터 파멸이 설계되어있었다.

언어가 될 수 없는 것을 언어화시키려는

펜Pen으로서의 자해

마지막 살점을 도려내면 이제 이 해골은

중력의 법칙에 의하여 우수수 무너져버리겠지.

그러나 나는 인간이었던 활자가 되는 것이다.

천상으로도 지하로도 가지 않는

잉크로 만들어진 영혼


곧 이 추운 방에서 나는 의자위에 웅크리고 앉아

수라 같은 머릿속으로 동사凍死를 상상하고 있다

부서지는 언어들의 조각조각 사이에서

내가 찾을 마지막 방점을 주시하고 있다

그런데


아니, 아니야 여러분

내 생각엔 아직 다 안 끝났어.


헤.

Posted by Lim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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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신앙

글/시 2016. 12. 6. 04:01 |

태양신앙



남쪽 섬에서 심야의 바다를 볼 때 나는 딱히

내 고향의 해변을 떠올리지 않았다

내가 태어났던 항구도시는 이제 더 이상 배를 띄우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고향에 갔었을 때 들렸던 것은

파도소리가 아닌 구름 너머의 수도 없는 제트엔진 소리뿐이었다.


내륙지방의 사막에서는 온 사방이 석유냄새 뿐이어서

거기서는 선인장에 꽃조차 피어나지 않았다

내 웃음소리는 마르고 갈라졌었다

나는 내 동료의 어깨를 잡고 울었다

침조차 말라버린 목 안에서 쇳소리 같은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어느 땅에서든, 어느 해변에서든

심지어는 대양의 한복판에도……

언젠가는 태양이 내려오겠지

내 나라 사람들은 그것을 <해님>이라고도 부르지만

아니야, 그 항구성의 불꽃에는 분명히 인격도 신격도 없다.

그 흰색 불의 구球는 생명과 멸망을 동시에 담고

언젠가 이 행성을 통째로 불태워 구원하러 내려오리라.


그 전까지는 차라리 암스테르담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라도 가자

진눈깨비와 미로 같은 운하들, 그리고 영원할 것 같은 안개와

그리고 영원할 것 같은 백야白夜에…… 내 영혼을

적시고 찢어발기고 고문하는, 비생명非生命의 대명사 같은

그런 땅으로 가자.


그만, 나는 더 이상 당신들에게 거짓만을 말하며 살고 싶지 않아

나의 양심이 있어야 할 장소에 버티고 서있는

그 동공洞空의 축축한 허공에는 온통 흉터가 새겨졌다.

「이미 모조리 죽었지만, 차라리 목신牧神들이 여호와보다 오래 살았어.」

그래, 그러니까 하는 말이야. 그러니 이제 곧 태양이 내려오겠지.

난 분명히 본 적이 있어. 빽빽한 침엽수의 밀림에서

사람의 얼굴을 하고 서있는 그림자 같은 짐승을 본 일이 있어.

그러니까 그게, 내 의식이 산산이 해체되기 전의 일이었지, 이런 망할…….


나는 부서져가고 있다. 내가 나를 부숴가고 있다.

내 방 바닥에는 온통 나의 부품들이 떨어져있다.

나사와 못들이 굴러다니고 땜질된 납판들이 여기저기

쌓인 채 새벽부터 다음 새벽까지 찰그랑찰그랑 소리를 낸다

시끄러워서 잠을 잘 수가 없어, 그러나 이 방을 나가면

나는 잠은커녕 눈을 감을 수도 없어

찰그랑찰그랑……. 난 저주 받았다는 기분으로 평생을 살아왔다.


그러니 그저 기다려야지, 태양이 내려올 때까지

그저 기다려야지, 전후의 황야에 고도는 아직까지도 찾아오지 않았지만

아직도 세계 곳곳에서 이상한 표정의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가

쇳빛 입술로 먹먹히 기다리고 있지만, 태양은

태양은 내려올 것이다.

모든 저주의 끈들과 절망의 대양을 불태워버리러

태양은 필히 내려와야만 한다.

Posted by Lim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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