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의 노래

글/시 2016. 11. 19. 01:53 |

괴물의 노래



방금 내 아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어

세 살배기 아들도 함께 죽었다는군

철창 밖으로 멀리서 희미하게 보이는

네온의 불빛들을 보니

그 어떤 고통도 내게 닿지 못하리라.


소등시간이 지난 지가 오래임에도

나는 잠들지 않았어, 누구처럼 무시무시한 고함을

천공에 쳐대지도, 가슴이 찢어짐에 입을 틀어막고

조각조각난 피부 사이로 눈물을 흘리지도 않았지

난 차가운 벽에 기대앉아 어둠을 보았네.


실상 그것이 나의 거울이나 마찬가지임을

보초를 서는 간수는 알기나 할까.

내가 이 좁은 감방으로 들어오기를 마음먹은

그날부터 이미 내 몸과 마음

허공의 어둠을 담는 빈 껍데기였지.


나는 재해가 되었었어…… 사람들은

내게 마음이 있으리라고는 추측조차 두려워했지

사람이 사람의 마음을 잃어버리게 되면

그것은 사람이 아닌 걸까? 글쎄,

시멘트 바닥의 냉기가 지난날들을 떠올리게 하는군.


나의 아내였던 여자는 결혼 전

고결한 마음에 맑은 눈동자를 가진 처녀였었지

그녀는 벌집처럼 구멍이 난 내 마음을

채워주겠노라고 내 손을 잡았지, 하! 하!

그때도 나는 이렇게 웃었던 것 같아.


아들이 태어났을 때 나는 그 붉은 원숭이 같은

핏덩이의 생명체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어

지나치게 울어대는 바람에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지만

아내가 보고 있었기에 난 그녀에게 웃음을 지었지

난 무엇을 시험해보려고 했던 것일까…….


지난날 하니 죽은 부모의 얼굴도 그리게 되는군

그런데 도무지 이목구비가 그려지지 않아

달걀귀신 같은 한 쌍의 노인 둘만

유령처럼 내 머릿속을 떠도는군. 그들이 어떻게 생겼었더라.

아하, 도끼를 휘둘렀을 때를 떠올렸어. 그때의

그들의 눈동자는 잊을 수가 없지.


간수의 말로는 과적차량이 아내의 경차를

코끼리가 짓밟은 것마냥 무참히 뭉개버렸다더군

무어,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죽지. 특히 인간들이

바퀴에 엔진을 달고 나서부터는 말이야.

죽음을 저울질하려는 사람의 본성이

내게는 기괴하게만 느껴져.


오늘도 분명 어딘가에서 내 가족 외에도

수많은 이들이 불합리하게 죽었겠지, 생각해보면

모든 죽음이 불합리하다면 불합리한 죽음 따위도 없는 거야

나는 감방 한 쪽에 붙은 철제 변기를 쳐다보며

나 자신의 살과 피와 뼈를 셈해보고 있네.


나는 목적 없는 재앙이었다네. 왜 그랬냐고?

천둥이 왜 치고, 태풍이 왜 마을을 휩쓸겠어?

아들의 돌잔치 때 녀석을 안고

그 녀석이 나를 보며 웃고, 내 얼굴에 손을 댈 때

이미 모든 실험이 끝났었던 거야.


난 첫애에게 아빠라는 말을 들어보기도 전에

모든 무의미를 끝낼 작정을 하고 있었지.

젠장, 어머니와 아버지가 썰어놓은 고기가 됐을 때 말이야

그때 난 정말로 홀가분해, 쾌재를 불렀지…….

미안해요. 내가 미안함을 못 느낀다는 것에 대해서―미안해요.


철창 너머로 보이는 풍경은 정말로 까맣고 멀어서

사람들이 날 쳐다보던 그 눈동자 같군

속죄할 것이 없어서 죄스러운 느낌이야, 그러니까

모조리 쓴웃음을 짓게 만드는 농담이지.

참으로 이상한 세계에 이상한 삶이었어.


이러나저러나 난 곧 초록색 길을 걷게 되겠지

그러나 여러분, 부디 들어주시길,

사실은 우리 모두 그 길을 걷고 있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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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의 의견

글/에세이 2016. 11. 17. 02:22 |

폭력의 의견



 폭력의 역사는 생물의 역사다. 폭력, 전쟁, 투쟁, 다툼, 그리고 비교적 근대적 개념인 테러리즘까지, 인간언어는 상황과 그 사이즈에 따라 수많은 단어들을 만들어냈지만, 이 논고에서 내가 논하고자 하는 것은 그 모든 행위가 본질적으로 동일하며, 또한 그 행위의 중추에는 어떤 의미가 존재하는 지에 대한 것이다. 이 논고 전체를 통과할 하나의 메타포를 우선 서술하고자 한다. 여기에 인간A와 인간B가 있다. 더 구체적으로는 개인A와 개인B, 혹은 개체A와 개체B라고 할 수 있다. A에게는 한 정의 단단하고 묵직한 금속성의 총기가 있다. 그 멋들어진 무기에는 한 발의 총탄이 장전되어있다. B의 무장상태에 대해서는 논할 것이 없다. 본 메타포에서 B가 무장을 하고 있든 안 하고 있든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A는 B의 머리를 향해 한 발의 총탄을 발사한다. 이 상황에서, A가 느끼는 복합적인 감정, 분노, 증오, 체념, 연민과 광기 따위는 부차적인 것이다. 내가 집중하고자 하는 것은 발사된 한 발의 총탄이다. 이 총탄은 완벽한 직선궤도를 그리고 있고 결과적으로 B의 두개골을 파괴, 그를 사망에 이르게 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내가 폭력에 대한 정의를 재수립하고자 할 때, 그 발사된 총알은 단순한 살인무기나 살인방편이 아닌, A의 의견Opinion의 상징Symbol이다. 애초에 A가 방아쇠를 당기기로 결심한 순간부터 A의 행위는 일종의 일방적 커뮤니케이션, 언어화 될 수 있는, 즉 사회적으로 분석되고 파악될 수 있는 소통행위의 단면이다. A가 방아쇠를 당긴 것은 이런 의미를 가진다: <나는 당신이 죽어야한다는 의견을 이 금속성 수단을 통해 피력한다.> 발사된 총탄은 살해의 심벌이 아니라 의견피력의 수단이다. 그것이 실체와 질량을 가졌고 시각적으로 더 강렬하다는 일차원적인 껍질을 깨고 보면, 사실상 그것은 <언어>의 일종이다. 총탄이 언어의 일종이라는 것은 곧바로 그 총탄이 정보의 덩어리라는 사실과 직결된다. 그것은 질량을 가진 정보다. 그 정보들의 중추에는 욕망이 있다. 사실 모든 의견의 중추에는 욕망이 있다. 이 경우 욕망은 B의 죽음에 대한 욕망이다. 안녕하십니까, 나는 당신을 죽일 것입니다. 당신이 죽기를 원합니다. 부디 죽어주시겠습니까? 아, 물음표는 제외하도록 하자. 일방통행의 커뮤니케이션에서 질문이 내재된 경우는 거의 없다. 물론 그 이후에는 외부로부터 질문이 파생되기는 하겠지만, 우리들이 폭력이라고 이름 지은 언어에는 질문이 내재되기가 쉽지 않다. 애당초 폭력이라는 의견피력은 동시에 타자에 대한 의문을 말소시키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더 나아가자면, A의 <의견피력>은 B에게 강제적 동일성을 심어놓는다. 간단히 하자면 A가 B에 대한 존재말소의 의견을 피력하며 금속성 방편을 사용했기 때문에 B 또한 결과적으로 A의 의견과 동질화 되는 <존재말소의 결과>를 낳는 것이다. 나는 폭력이라는 것을 상대의 의견을 자신의 의견과 동질화시키는 가장 능동적 행위라고 구두점을 찍는다.

 여기가 시작점이다. 폭력을 단순히 인간행위의 현상으로만 보지 않고, 그것을 언어와 의견으로서 이해하는 것. 행위 자체가 가지는 정보를 보다 원론적으로 파헤치는 것. 그리고 이러한, 개념의 재정의가 지금 필요한 이유는, 폭력이 단순히 폭력이기만 한 인식구조는 이미 구시대의 유물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정보화와 국제화의 과도기에 들어선 인류사회에선 이미 모든 개념들의 정의가 요동치고 있다. 어쩌면 50년 쯤 뒤, 우리는 우리가 갖고 있는 사전들을 전부 소각하고 완전히 새로운 언어지침을 창조해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일단은 지금 논의하고 있는 개념에 대해 집중하자.

 내가 폭력행위를 정보와 일방통행의 의견피력으로 생각한 이후, 나는 곧바로 <테러리즘>이라는 기묘한 단어에게 접근했다. 현재 국립국어원의 테러리즘에 대한 정의는 이렇다: <정치적인 목적을 위하여 조직적ㆍ집단적으로 행하는 폭력 행위. 또는 그것을 이용하여 정치적인 목적을 이루려는 사상이나 주의> 그러나 내 입장에서 이러한 정의는 이미 페인트칠이 조각조각 떨어지기 시작한 오두막과 같다. 나는 현대사회에서 테러리즘이 가지는 포괄적 스펙트럼을 표현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정의를 만들었다. <물리적 세계에 변화를 줌으로서 사회 시스템 내의 집단, 혹은 집단들의 사고 병렬화Think Parallelization를 꾀하는 일.> 이렇게 정의를 수립하고 나면 테러리즘과 일반 폭력 사이의 차이점은 단 한 가지밖에 남지 않게 된다. 상황적 사이즈Size의 차이. 테러리즘이 사회구성원들의 일부 혹은 다수에 대한 사고의 병렬화를 꾀한다는 점. 국립국어원의 기존의 정의에서 보여 지는 <목적을 이루려는 사상이나 주의>는 역시 위에서 서술한 A의 B에 대한 의견피력과 상통하는 부분이다. 그 목적이 정치적인 것이든 사사로운 것이든, 폭력을 이용하여 목적을 달성하려는 행위는 공격적 <언어>의 일종이라는 점에 대해 나는 이미 시사한 바 있다. 그런데 나의 논고 안에서 개인의 단순 폭력과 테러리즘을 구별 짓는 것은 테러리즘의 그 목적이라는 것이, <행위 이후에 올 파급력에 대한 기대=그 폭력행위로 인하여 특정 혹은 불특정 다수의 인물들의 사고가 병렬화 될 것이라는 기대>라는 점이다. 이러한 파급력은 피해자 집단이나 가해자 집단 중 한 곳에만 작용하는 것이 아니다. 각각 다른 성질의 의지가 행위와 관련된 모든 집단의 의식<들>에 동일인자를 부여하고, 결과적으로 집단들이 각각 다른 형태의 집단의식을 소유, 말하자면 집단구성원들의 (소규모나 혹은 대규모의)동일화를 유발시키고, 즉 사고의 병렬화를 실행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점은 <물리적 세계에 변화를 주는> 행위를 실행했을 때, 실상 테러리스트로 명명될 수 있는 실행자들조차 그 특정행위와 관련된 인간그룹에 어떠한 사고 병렬화가 발생할지 거의 예측할 수 없다는 점이다. 물론 그들은 특정 영향력을 기대한다. 기대하지 않는다면 행동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나는 이미 위에서 기술한 바 있다. <정보화와 국제화의 과도기에 들어선 인류사회>라는 조건을 말이다. 이와 같은 조건은 국제사회와 인간 집단의식의 움직임을 본질적으로 예측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다. 지나치게 다각화된 내부인자들과 외부인자들로 인하여 인간의식의 움직임은 집단의식과 더불어 해석이 불가능한 완전한 아노미Anomie 상태에 가깝다.

 쉬운 예로 현재 이 행성에서 어느 사회주의 테러조직에 속한 테러리스트가 개인주의와 자본주의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미국 대사관에 자폭테러를 시행한다고 상정했을 때, 분명 그 테러리스트의 심리는 너무도 단순해 파악하기에 어려움이 없다. 그는 사회주의 정부의 수립을 목표로 자신과 자신이 속한 조직의 결의를 보여주기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버리며 인명피해와 경제적 손실을 유발하고, 그 피해로써 자본주의 국제사회의 중추국가인 미국을 위협하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자본주의자들이 갖게 될 불안과 공포를 <기대>한다. 그런데 실제로는, 그 자폭테러에 대한 정보를 접한 사람들의 의식은 테러범의 기대와는 거의 상관이 없는 방향으로 움직인다. 우선 자신들의 대사관이 파괴되었다는 이유만으로 대규모의 미국국민들은 테러를 자행한 사회주의 테러조직에 대한 증오와 분노를 공유할 것이다. 게다가 이 증오는 명백히 적敵이 지정된 증오다. 단순한 분노의 공유를 넘어서서, 구체화 가능한 적이 명시된 증오는 그 분노를 공유한 사람들의 집단결속력을 더욱 강하게 만든다. 역사상 수많은 전쟁이 당시 관련자들에게 주었던 영향력을 살펴보면, 하나의 적을 목표로 한 집단은 마치 집단 자체가 의지가 있는 것처럼, 다수의 인간이 하나의 생명체처럼 행동한다. 구시대에도 이러한 개인의 집단화가 빈번했던 것에 더해, 현대처럼 온갖 출처가 분명하거나 혹은 분명하지 않은 정보들이 사방에 떨어져있는 상황에서 집단 내의 세포Cell처럼 움직이는 각각의 개인들은 모두가 동시에 정보수집과 정보에 대한 필터 역할을 수행한다. 그리고 그 필터링 되거나 생물 그대로인 정보들은 가능한 모든 커뮤니케이션 방편에 의해 집단 자체로 융화되고, 즉 집단을 구성하는 모든 개인들의 사고가 병렬화되어 결과적으로 서버Server가 부재하는 허브Hub들만이 상호연결 된 하나의 의지Will가 출현하는 것이다.

 게다가 이런 집단의식의 출현은 피해국가에서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테러를 저지른 조직 내에서는 자폭테러 실행범에 대한 우상화나 영웅화가 발생하기 충분한 조건이 이미 갖춰져 있을 것이고, 곧이어 실행범은 테러조직의 집단의식 속에서 사회주의 체제 수립을 위한 투쟁의 순교자라는 데이터로서 각인될 것이다. 이 상황에서 아이러니하게도 <영웅>은 미국국민이 증오하게 된 <적>과 거의 동일한 정보작용을 한다. 테러조직의 영웅은 그 테러조직 내에서 자동적으로 정보가 가감되거나 수정되어, 조직의 각 인자를 하나로 묶는 강력한 구심점의 역할을 수행한다. 그런데 여기서 직시해야할 것은 그 구심점이라는 것이, 실체나 질량이 존재하지 않는 단순한 정보덩어리인데다가 그 <정보덩어리>의 오리지널인 자폭테러 실행범과는 다소 동떨어진 <정보적-가상적 초상肖像>이라는 것이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자폭테러범의 존재는 행위를 실행하는 순간부터 그 어느 개인의 의도와도 관계없이 집단사상을 위해 날조된다. 딱히 어떤 집단적 카리스마나 사상가에 의해 이 날조가 시행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 중요하다. 그가 자켓 안에 플라스틱 폭탄을 차고 대사관으로 침입하기 이전부터 그와, 그의 조직과, 그의 조직원들과, 그 모든 개별인자를 통괄하는 <집단>이라는 존재방식에는 실행범의 사망과 동시에 이미 오리지널이 없어진 인격의 잔재Data를 집단의 통치지침을 위하여 날조할 모든 조건이 갖추어져있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아무도 그 죽은 실행범에 대한 정보조작을 가하지 않지만 정보조작은 이미 집단에 내재되어있던 조건에 의하여 조직통치를 위한 가장 효율적인 방식으로 자동적으로 시행된다. 그 조건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바로 그 테러조직을 구성하는 모든 조직원들이 가지고 있는 사고의 동일인자다. 하나의 집단으로 구성될 때 뿌리를 박은 사상적 동일성은 그들 모두를 기초적인 차원에서 연결시킨다. 이때까지만 해도 <사고의 병렬화>라는 유별난 개념이 사용될 필요성은 없지만, 그것은 잠재적 연결회로로서 항상 은밀히 작동한다. 포텐셜을 실체화시킬 이벤트만 발생한다면 그것은 집단 전체에 대하여 대규모로 활성화된다. 영웅의 등장-죽음. 그렇다, 이러한 집단에서 영웅이라는 개념은 영웅화될 가능성이 있는 개인의 죽음과 동시에 등장한다. 그가 죽기 때문에 영웅이라는 개념이 등장하는 것이고 그의 사망 자체(오리지널의 말소)가 영웅화의 필수조건인 것이다. 즉 집단의 영웅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존재한다. 이로서 비실재하는 우상-즉 영웅이 집단의 구심점으로서 현상화되고 모든 집단구성원들은 강제로 그 영웅이라는 능동적 정보에 접속된다. 이때 벌어지는 일이, 위에서 서술한 미국국민들의 상황과 동일한 <사고의 병렬화>이고, 집단 자체의 의지가 발현하며 조직구성원들은 그 의지Will의 구성물에 지나지 않게 된다. 어떻게 보면 그들은 집단의식이라는 소프트웨어를 작동시키기 위한 기반 하드웨어 혹은 그 부속품으로 전락하는 것이다.

 단 한 번의 테러로 인하여 이런 형식의 집단의식의 구체화, 집단 내 구성원들의 사고 병렬화는 이미 정보적으로 연결되어있는 전 세계 모든 곳에서 일어난다. 미국 대사관의 피습이라는 정치적 단어들의 조합과 전혀 관련이 없어 보이는 곳에서도 사람들은 정보의 전달이 평등화된 현대사회에서 각기 의지적 집단을 형성하고 개인들의 <상위 소프트웨어>라고 할 만한 것의 부속품화가 가속화된다. 피해자의 유족들은 유족들대로 증오와 슬픔을 공유할 것이고 도덕가들은 국제적 통치체계를 재구성할 윤리관에 대한 논설을 공유할 것이다. 다른 종류의 과격한 정치적 집단들은 사회주의자들의 행동력에 경계를 공유할 것이고 아나키스트들이나 도덕의 비실재를 주장하는 일종의 니체이스트들은 그들이 이미 공유하고 있던 세계관에 사회적 샘플을 하나 더 올려놓음으로서 서로간의 물리적 거리에 상관없이 전보다 더 강하게 동일화될 것이다. 단 한 번의 테러행위가 불러일으키는 이러한 파급력에 대한 추측이 내가 현시대에 테러리즘이라는 개념이 재정의 되어야한다고 말하는 주장의 골자다. 실상 내가 위에서 늘어놓은 몇 개의 예들은 정말로 <몇 개의 예> 밖에 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현대의 정보화 사회에서는 모든 행동들이 모든 허브Hub들에게 동시에 정보로서 <발사>된다는 것이다. 이 행성 자체가 이미 네트워크의 끈으로 각각 모든 개인Individual들이 연결되어있는, 보이지 않는 리좀Rhyzome 구조의 망으로 덮여있다고 나는 말한다. 나는 모든 예를 말할 수는 없다. 애당초 하나의 행위에서 파급되는 모든 집단의식의 변화를 전부 추측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게다가 무의미하다. 그러나 이러한 추측의 예 뒤에 나는 처음에 말했던 테러리즘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다시 가져올 수 있다: <물리적 세계에 변화를 줌으로서 사회 시스템 내의 집단, 혹은 집단들의 사고 병렬화Think Parallelization를 꾀하는 일.> 이미 여러분의 사고 속에서는 하나의 유령 같은 개념이 생성되기 시작했을 것이다. <테러리즘>이라는 단어가 위와 같은 식으로 개념화되기 시작한 사회에서 이미 Individual이라는 것은 더 이상 구시대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인간이 이미 모든 개체성을 잃었다고까지는 주장하지 않는다. 말하고자하는 것은 지금과 같은 모든 정치, 사상, 정보, 행위의 과도기에 우리 인간사회는―<인간>들의 사회와 <인간사회>라는 개체적 뜻을 동시에 가진다― 모든 개인들이 개체성을 잃기 위한 조건을 자동적으로 수집하며 정착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논의의 시작점으로 돌아가 보자. 지금까지 내가 서술한 바에 의하면, 지금 우리는 과연 단순 폭력과 테러리즘이라는 개념을 굳이 분리시켜 놓아야만 하는가에 대하여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사실상 최초의 메타포인 A의 B에 대한 살해행위도 규모가 소규모일 뿐이지 의견을 강제하여 특정된 상황에 속한 이들(최소 2명 이상의)의 사고현상Think Phenomenon을 동일화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그리고 기존의 테러리즘을 정의하던 <정치적 목적>, <사상>, <주의> 따위의 단어들도 원론적으로 분석해 들어가면 이것은 실상 인간의 사고능력에 기반하여 개인이 가지는 신념이나 사고방식 따위를 광역적으로 만들어놓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테러리즘이라는 단어의 특정화가 필요하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위에서도 몇 번이고 말한 <현대사회의 정보적, 국제적 과도기>라는 조건 때문이다. 인류역사의 시초에 개인들이 집단을 이루고, 그 집단들이 더 큰 집단인 사회를 이루고, 계속 집단들의 집단화가 가속되어 국가, 연방, 국가사상의 공유, 세계 따위의 개념을 형성하여 지금에 이르러서는 일반개인이라는 것이 기반 하드웨어 이상의 의미를 가지기 어려워졌을 때, 우리는 단순히 어떤 하나의 꽉 쥔 주먹이 누군가의 턱을 치는 것과 완전히 사고가 병렬화된 국가집단이 새로운 종류의 의지, 혹은 생물처럼 활동하며 중추신경이 없는 능동성을 가지는, 말하자면 정보-의식생명이라고 칭할 수 있는 보이지 않는 존재로서 행동하는 것이 서로 <다르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게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지금 이 논고는 최초에 가장 극단적인 의견피력 수단인 폭력에서 시작하여 인간이라는 생물이 본성적으로 소속된 집단 내에서 사고를 공유하도록 설계되었고, 그것이 시간의 흐름과 정보기술의 발달로 인하여 인간개인의 Individualism까지 위협하는 사고 병렬화와 그의 산물인 <새로운 의지New Will 혹은 새로운 생물New Organism>의 탄생까지 유도하고 말았다고 말하고 있다.

 세계는 점점 가속화하여 발전한다. 그리고 내가 이 논고에서 논한 부분에 포커스를 맞추자면, 언젠가 세계는 <세계>라는 Organism이 되어버리고 인간은 그 Organism을 구성하는 각각의 세포-기반 하드웨어 이상의 의미를 가지지는 못하게 될 것이다. 정보가 정보에 의하여 가감되고 수정되며, 각각의 Cell은 정보 수집과 상위 소프트웨어를 보조하는 역할밖에 못하게 될 때, <인류>라는 개념은 인간집단을 포괄하여 말하는 종류의 개념이 아닌, <인류> 자체가 하나의 Individual로서 인지되게 될 것이다. 내가 몇 번이나 강조하고 있는 <사고 병렬화>는 지금 이 시각에도 세계 곳곳에서 산발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어쩌면 이것은 인간 진화의 한 과정일지도 모른다. 개인이 집단이 되고, 집단이 국가가 되고, 국가가 세계가 되고, 마침내 세계 자체가 하나의 개별성을 얻게 되는, 그리하여 인간의식이란 것이 집단의식이라는 새로운 생물로서 승화되는 그러한 종류의 진화 말이다. 여기에는 더 이상의 독재자도 파시스트도 없지만 인간육신을 이루는 모든 세포가 뇌와 중추신경만을 위해 행동하는 것처럼, <의지>에 의한 독재가 이 정보생명 안에서 발생하리라는 것을 나는 추측할 수 있다.

 나는 이러한 추측을 디스토피아적이라고 말해야할지 아닐지도 솔직히 모르겠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런 인간의 집단화, 병렬화, 개인의 세포화는 이미 인간본성의 뿌리에 조건을 형성해두고 있었다. 우리는 이 점에 대해서 더 파고들어야 할 필요가 있다. <인류>라는 단어가 과연 무엇을 지칭하는 개념으로 변화하게 될지, 다른 시대도 아닌 이 <모든 것의 과도기>에 우리는 사고해보아야 한다. 그리고 어느 정도는 관망해보자. 지금 현재에, 이 전 인류가 통괄되어있는 네트워크가 어떤 양상으로 행동하는지, 우리는 사색적으로 관망할 필요도 있다.



끝.

Posted by Lim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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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희망

글/시 2016. 11. 11. 00:38 |

죽음희망



누군가 나에게 말해 달라.

너는 더 이상 글을 쓸 수 없

다고, 덜덜 떠는 신경쇠약에 걸린 너의 손은 아직도 흰

종이 위에 펜을 쥐고 날고 싶지만, 그렇지만 너의

동기도 근거도 의무도 이제는 없다고.


아무래도 정신이 온전치 않아. 몇 번을 외쳐도 혼잣말이다

저 자는 정신이 온전치 않아, 하고 사람들의 입

에서 터져 나오는 경멸의 어투도 내 안에서 나의 혼잣

말이 되어버린다. 사흘 전까지만 해도 붙잡고 있던 내 논문에는

악필로 갈긴 수정사항이 본문보다 많아졌다. 그 뒤

내 온전치 않은 정신이 멈췄다.


작가들이 도대체 어떻게 절필을 하는 건지, 아직도 모르겠어

아니 절필이란 대체 뭐지? 그것은 자살과 동의어다! 아아

기자회견을 열어놓고 수

십 개의 카메라 앞에서 목을 매다는 이상스러움……

그렇다면 나는 차라리 아사하겠어, 나의 <체면> 때문에!

전부 지독한 농담이다. 스스로 살을 파먹는 농담.


그러니 제발 누군가 말해줬으면. 신성이 담긴 강력한 목소리로

너는 더 이상 없다, 라고! 부디 내 목에 도끼를

단 한 번의 힘찬 휘두름으로 내리쳐달라고. 그러나

그러나 아무도 그러지 않는다. 실상은

아무도 그러한 권한도 의지도 갖지 않는다.

절필도 자살도 공상적 낭만주의의 배설물이다.


<그렇다면 끝까지 살라는 말이야? 치욕과 수치와 절망을 그러쥐고, 더는 두뇌가 작동하지 않을 때까지, 이미 바닥난 재능에 좌절하면서, 그러면서도 계속 허망한 펜을 놀리고, 노트 위에 진실성 없는 말들을 뿌리고, 자조하며, 혐오하며, 눈물 흘리고 소리치면서 몸부림치라고? 더는 위대함도 무엇도 없음에도 자연의 법칙이라는 것이 내 목을 그을 때까지?>

그렇다. 애당초 넌 행복하라고 태어난 것이 아니니까.

그렇다. 넌 고통 받고 점점 무의미해지기 위해서 존재를 인정받았다.

<염병할……. 그래도 언젠가 내 머리가 당나귀대가리가 된다면, 그때는 나도 죽겠지.>

그 정도는 바라도 좋아.


그런데 어떠한 희망이 있다. 점점 굽어가는 나의 어깨의 윤곽에서,

이것은 단순히 조금 오래 가는 슬럼프에 지나지 않는다고 곧 돋을 듯한

날개가 중얼중얼. 거짓말인지 기만인지 혹은 정말로 그러

한지 내가 알 게 뭐람. 결국에는 자살도 꿈인 것을, 끝이라는 것도

결코 내가 원하는 형태로는 오지 않을 것을, 나는 차가운 바람이 불면

길바닥에서 급사할 것이다. 그때까지 나는 글을 쓰면서 희열하다가

글을 쓰면서 고통 받고, 글을 못 써 광란하다가

글을 못 써 울부짖고, 기타등등, 기타등등…… 가난이 내게

걸쳐준 거적때기를 걸치고, 그것을 방패삼아, 삶이라는 저주에 침을 뱉고

악마가 내게 오면 나는 담배 한 까치에 전 세계를 팔아버리겠지.


그러나 어찌 되건 나는 죽지 못할 것이다

계속 성냥을 긁으며

불타는 세상의 환각을 보고

감격하여 눈물 흘리고

다음날 아침이면 습기 찬 지하실에서

혼란스러운 머리로 눈을 뜬다.

Posted by Lim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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