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에게

글/시 2017. 4. 4. 01:01 |

여러분에게



여러분, 나는 갈색의 여인들과 그 육신의 향취에 대해 쓰고 있었다

나의 타자기는 소음을 멈출 기색이 없는 것 같았고 나의

중추신경에서는 천둥과 지진이 영원히 울릴 것 같았다 그런데

순간 무시무시한 공포가 엄습해왔다 달도 별도 가로등의 노란

불빛조차도 보이지 않는 내 어두컴컴한 방에서 나는 타자기에 대하여

활자들이 찍히는 순백색 종이에 대하여 사마귀의 손처럼 까딱거리는

내 손가락들에 대하여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이 벌어지는 1평도 되지 않는

내 광증의 둥지에 대하여 나는 공포 때문에 숨을 멈췄고

이 둥지의 모든 공기가 점액질처럼 변해 내 전신을 짓눌러댔다


여러분, 나는 나의 모든 살과 근육이 실종되는 것을 보았다

나에게는 딱딱하고 덜그럭거리는 뼈들만이 남아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 같아 보였다 그러니 갈색의 여인이니 그 유방의 내음이니 육신의 쾌락

과 살결에 묻은 태양의 조각들이 도대체 무슨 의미를 가진단 말인가 나는

말라가고 있었다! 분명히 말하건대, 나는 말라가고 있었다 게다가

곧 완전히 마를 것이 분명했다 이 속세에서 할 일을 모두 마치면

나는 그저 스러지거나 속세가 아닌 곳으로 구두도 신지 않고 가려고 했다

그러나 그러한 믿음도 한낱 꿈이어라! 나는 두려움에 떨며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당장이라도 손톱이 길게 자라날 것 같았다


여러분, 눈물 흘리는 방법을 잊어버린 나를 저주하라 저주해주시기를 바란다

나는 내가 공허를 쓰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쩌면

이 밤이 지나고 수면제의 독이 혈관을 흘러 몸은 지푸라기처럼 쓰러져

다음 날 햇살 속에서 일어나 오늘의 이러한 고뇌와 공포를 모조리 보류

시켜버린다고 해도…… 비명 같은 밤은 또 올 것이고 또 올 것이며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다. 결코, 결코! 아아, 내가 멀뚱히 서있는 이 벼랑은

나는 달릴 수 있다, 벼랑을 따라 달릴 수 있지만 나는 결코 추락하지 않는다

그런데 도대체 끝에는 무엇이 있는지, <끝>이라는 개념조차 기독교도들이

만들어낸 허상은 아닌지 나는 의문하면서도, 여러분, 나는

이런 것들 때문에 온갖 패악을 벌여왔다


여러분, 나는 죄악을 찬미했다. 그러면서도 내 마음은 인류애로 썩어가고 있었다

나는 밤의 대양에게 노래했다 아노미, 아노미, 모든 사물들의 윤곽과

질량이 녹아버리는 붉은 광장에서 땅바닥을 기었다 내 심장의 문을 열고

그곳에서 양심을 꺼내 태웠다 진눈깨비가 내리면 일 년간 해가 지지도 뜨지도

않는 환각을 보았다 아, <그렇다면당신에게는인간의천칭이필요하다> 씨, 나는

꿈속에서 네 목을 졸랐다 그것은 사탕수수 줄기마냥 뚝뚝 소리를 내면서 떨어졌다

이제 나는 더 이상 도와달라고 하지도 않으련다, 그러나, 여러분, 나를 도와주오

아니야, 아니야! 나는 의무와 사명으로 밧줄을 만들고 관념으로 올가미를 묶었다

하지만 아직은 안 돼. 안 돼, 안 돼…… 빛도 어둠도 광명도 퇴폐도 아닌 것을

나는 아직 완성하지 않았고 여러분께…… 그렇다, 여러분께, 나는 아직 드리지 못했다

이 세상 모든 절망과 너무 오래 미친 듯이 무언가를 보느라 터지고 갈라진

눈동자도, 나는 아직 드리지 못했고, 아, 그러나 염병할!


여러분, 내가 허무주의자가 될 수 없는 것은 나의 비극이다

부디 나를 저주하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잠드시길, 나는

비명 속에서 또 영겁을 외치다 모래성처럼 우수수 무너져버릴 것이다.

그러니까 이 밤,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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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스토피아의 반군

글/시 2017. 3. 25. 23:28 |

디스토피아의 반군



당신 들고 있는 수정의 벽돌을 내려놓아라

눈이 먼 지성인들은 허공에 채찍소리를 내고

온 행성이 마치 피라미드를 세우는 듯

탐욕스런 노예들은 제 발로 피땀 흘린다


당신들 승리를 탐하고 승리를 믿는 이들이여

그 정신은 절망보다도 값어치가 떨어진다

그 수정의 벽을 세우지 마라, 내 눈에

셸리의 종달새가 떨어트린 조소가 흐른다


멋들어진 모자와 코안경을 쓴 노예들은

수정의 벽돌을 옮기며 서방에서, 북방에서 온

노래들을 군가처럼 합창한다

이곳엔 이미 풀도 나무도 노래하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는지?


나 강철로 손잡이가 붙은 지팡이를 들고

휘둘러 그 수정의 벽과 기둥들을 깨리라

이 번쩍거리는 광휘들이 거짓과 기만의 비극이라는 것을

그 코안경 너머로도 보지 못하는가?


나는 그저 전후戰後의 광야에서 목청 높여

울부짖는 고독한 짐승이고 싶었다! 그 함성이고 싶었다

아무도 듣는 이 없는

비참한 고함소리이고 싶었다


당신들이 짓는 그 거대한 궁궐 꼭대기에서

얼굴 없는 한 남자 춤추듯이 햇빛을 쬐고 있다―아니!

그는 빛의 천공을 송두리째 집어삼키려고 이를 드러내고 있다!

옳아, 지금 보니 당신들, 모두 흡혈귀의 피부를 가졌지만

피 대신 다른 것을, 모든 것의 근저에 있는

대양의 심연과 같은 거대한 것을 폭식하는구나


여기서도 나는 절망을 새긴 얼굴로

부서진 천칭 위에 화끈한 적도의 냄새와 진눈깨비 내리는

밤의 운하를 올려놓고서, 분노라고 써 갈겨진 지팡이 들었다

필요하다면 망치인들 못 들것 있으랴


철마는 증기를 뿜어내며 레일 위를 폭주한다

나는 레일 위에 선 눈이 붉은 들개여라

빛이 꺼지면 내 그림자에 대한 공포도 꺼진다는 것을

알게 된 그날부터 나는 무의식의 짐승이었다


두려움에서마저 선혈의 감미로움을 맛볼 수 있게 되자

나는 인간이 아닌 눈으로 당신들을 보는 기분이었다

당신들 그 수정궁을 무너뜨려라

나는 지팡이의 강철 손잡이에

분노와 진실, 불꽃의 소리 터져 흐르는 원시의 진실을 담고

너에게 간다, 너

결국에는 스스로 수정의 조각상이 되려하는

활자와 의사들에게서 태어난

얼굴 없는 너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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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의 화재

글/시 2017. 3. 16. 21:56 |

숲의 화재



나무들이 거대한 기둥을 세운

태초의 사원과 그 깊은 정령들의 냄새에

우리는 불을 놓았노라


늙은 사원은 광기처럼 불타고

정령의 눈, 코, 길쭉한 웃음

따위를 가진 짐승들은

자유롭게 타 죽어갔다


오! 내 옆, 보이지 않는 동행의

싱싱한 어깨를 나는 껴안으며

그의 공포에 기름을 발랐다


사람이여, 부디 내가 누구인지 묻지를 말라

나는 매듭지어진 고리와 같아

언젠가 풀릴 매듭이며, 어쩌면

이미 풀렸을 지도 모르이


불길은 새로 지어지는 사원처럼 드높이 쌓인다

재와 신록의 냄새가 난다! 나는

동행에게 묻는다: 무슨 냄새가 나느냐고

<불꽃>! 윤기가 도는 입술을 그는 떨었다


아하, 나는 웃었다. 정령들의 탄 재가

소용돌이치며 불꽃의 저편―천상으로

거인의 날개를 편다

파아란 노목들 관념이 되어

이제 내 심장에 잎사귀 핀다


동행이여! 불꽃에, 광란의 화재를 끌어안고 큰 숨을 쉬라

콸콸 쏟아지는 성화의 열기와

새하얀 죽음이

영령처럼 네 폐를 채우리라.

Posted by Lim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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