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작을 쓰자. 걸작을 써라. 나는 소설가다. 소설가는 걸작을 쓰지 못하면 소설가가 아니다. 그건 쓰레기거나 혹은 생활무능력자다. 우리는 눈을 세 개씩 갖고 있지 않은가. 세번째 시야에 집착해서 미치지 못한 광인이야말로 진정으로 정신병자다. 분열자다. 펜 끝에서 잉크가 배어나오는 것처럼 나도 위 내부에서부터 피를 흘린다. 나는 글을 쓸 수 밖에 없다. 음악을 하지 않는 시드 비셔스를 도대체 누가 봐줄 것이란 말인가. 공포다. 그가 잡고 있던 베이스는 공포다. 아무 것도 아닌 자살자가 되는 것에 대한 공포. 걸작, 걸작! 걸작이라는 것이 사실 환상이어도 좋다. 환상에 홀린 꼴이라도 좋다. 소설가는 환상조차 작품으로 만들어낼 수 있으니까.

약으로 인해 경련하는 내 동공을, 내 초점을 안정시킬 약을.
약으로 인해 충혈된 내 뇌를, 앞을 보지 못하는 내 영혼을 깨울 약을.
약으로 인해 경련하는 내 동공을, 내 초점을 안정시킬 약을.
약으로 인해 충혈된 내 뇌를, 앞을 보지 못하는 내 영혼을 깨울 약을.

말 그대로다. 살기에는 너무 타락했고 죽기에는 너무 어리다.

Posted by Lim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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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에 가는 게 좋지 않을까?
병원에 가면 나아지지 않을까?
그 때 봤던 강물처럼, 안심하고 있는 사람들의 냄새 말이다.
병원 대기실에는 없다.
사람을 만나야하지 않을까?
병원에 가야 하는 게 아닐까?
그들이 내 심장에 달린 판막을 분리해낼 수 있을까?
난 지금껏 만났던 의사들과는 다른 의사를 만날 수 있을까?
애당초 이게 병이기나 한 것일까?

Posted by Lim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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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무대 위에 있는 배우가 아니다.
병원에 가는 게 좋지 않을까?

그는 태어나서, 살다가, 죽었다.

가면을 쓰지 않았다고 증명하기 위한 가면을 쓴 사람, 신물나는 인간상이다.
다자이의 글은 끊임없이 '솔직함 뒤에 숨는 것'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얘기하고 있다기 보다는 자기혐오를 하고 있다.
차라리 자기혐오라도 하는 것이 어떤가.
병원에 가는 건 어떨까?
알고 있었던가.
갑자기 닥쳐오는 초점 없는 현실, 그런 역할을 맡은 인간이라는 것이 있다.
초점 없는 사팔뜨기, 우습다.
나는 운다.
나는 글을 써야한다.
멍청한 변명.
무대인격.
그렇지, 이게 현실이다. 사팔뜨기, 멍청한 변명, 무대인격.
나는 현실을 끌어안지 않는다.
나는 현실이 아니라 진짜를 원한다.
연극을 하고 있는 거야.
상황이라니, 상황이라니.
무대를 박살내고 관람석에 불을 지르고 싶은 건 나뿐인가?
왜 기대를 했지?
역겨운 자조가 섞인 입꼬리를 찢어내면 그 안에 제대로 된 것이 들어있을 것이라고,
그렇게 기대했던 것 같다. 하여간에 나는 사람 보는 눈이 없다.
거짓으로 만들어진 솔직함을 내세우는 것조차 어설프다.
나는 다자이의 글과 고뇌와 자살을 사랑한다.
혐오합니다.
아무 것도 없었기 때문에 그만 뒀다.
조악한 얼굴 가죽.

우울증이라고, 병원에라도 가는 건 어떤가.
'그렇게 하지 말라'고 얘기하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알았다.
넌 아무 것도 아니다. 심지어 쓰레기조차 아니다.
틀림없이 주먹질을 할 때조차 축 처진 눈매와 입꼬리로,
자기 자신도 웃기지 못하는 농담을 하는 표정으로 드라마를 찍고 있었을 것이다.
명백한 가짜다. 아무 것도 아닌 것 말이다.
말을 하지 않는 건 어떤가?

Posted by Lim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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