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인의 둥지

글/소설 2019. 5. 5. 16:54 |

악인의 둥지


 벽 밖의 냉기가 거실까지 침범하던 날. 옷과 코트를 갖춰 입고, 분명 밖은 하얀 아침햇살로 가득할 날에, 내 다리는 현관 앞에서 무너졌다. 움직여야한다고 생각했지만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더 이상 열심히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어머니와 아버지에 대한 생각을 한 것 같았고 소리 없는 구토처럼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나무로 된 현관바닥은 차가웠고, 손을 뻗으면 닿을 현관문이 100m는 멀리 있는 것처럼 보였다. 27살. 어른이 될 수는 없었지만 스스로의 목숨을 책임져야한다고 목이 졸린 나이. 청바지를 뚫고 들어오는 냉기를 온 다리로 느끼며, 어디로 가야할지 알 수 없다고 느꼈다.
 겁에 질린 손으로 핸드폰의 전원을 끄고, 힘이 풀린 다리를 밀며 곰팡이 냄새로 가득한 방으로 기어간다. 폐부와 심장이 찢어지는 것 같았고 할 수만 있다면 정말로 찢고 싶었다. 울면서 엎드려, 되뇌었다. 내 집은 어디? 내가 누워 잠들 수 있는 자리는 어디에 있지?
 서랍을 뒤져 나온 것은 9알의 파란색 수면제.
 이 모든 게 꿈이라면, 정말로 악몽 같은 꿈이고, 깨어나고 싶지만, 깨어나는 방법은 모른다.

 꿈속의 꿈. 일요일의 할인마트에서 길을 잃은 아이. 다른 꿈. 아버지와 농구경기장에 가서 인파에 겁을 먹은 아이. 약간 시간을 뛰어넘어서, 훔친 술에 취해 도장 파는 칼로 가슴 가죽을 찢고 있는 이상한 아이. 주변엔 낯선 인파뿐. 나무막대기처럼 뻣뻣하게 경직된 근육과 끓어올라 흘러내리는 뇌수. 훔친 술을 한 모금 더. 끔찍한 맛이지만 정신을 잃는 것이야말로 유일하게 제정신으로 있을 수 있는 방법이다. 왜. 왜. 왜. 그러나 대답해줄 자가 아무도 없다는 것은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다. 하늘은 절대 올려다보지 않는다. 거기에는 아무도 없고, 또한 죄악으로 가득한 지상과 연결된 환각적인 그라데이션에 불과하니까.

 눈물을 흘리며 잠에서 깼다. 현실이라는 또 다른 꿈. 시야가 부옇다. 얇은 이불 위에 엉망으로 구겨진 몸체. 코트를 입은 채로 잠에 들었던 것 같다. 주머니를 뒤져 담뱃갑을 찾고, 한 개비를 입에 물자 손끝에 입에서 흘러나온 하얀 거품이 묻는다. 손가락 관절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불을 붙이는 데 고생을 했다.
 연기를 뻐끔거리며, 흐린 눈으로 생각했다. 누군가 내 심장을, 내 심장을, 내 심장을 뜯어내서, 끌어안아줘. 담배연기는 좁은 방 안으로 퍼져가고, 냄새가 배고, 이곳을 악몽의 둥지로 만든다. 니코틴과 침이 섞인 액체를 입가로 흘린다. 언제부터 잘못되었을까?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던 걸까? 답이 나올 리가 없는 스스로에 대한 책망을, 답을 찾을 생각도 없이 하고 있다. 이대로 죽어버린다면, 아니지, 죽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세상에는 사후세계에 대한 터무니없이 많은 가설들이 있다. 공허로 돌아가, 완전히 사라질 수 있다면. 마치 태어나기 이전에 내가 없었던 것처럼. 자살하지 않는 것은 무섭기 때문이야. 어쩌면 내게 영혼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공포. 천국이든 지옥이든, 내가 나로 영원히 지속될지도 모른다는 위협. 그것이 내게는 너무나도 무섭다.
 나는 존재하고 싶지 않아.

 위액과 수면제와 침이 섞인 자국 위에 13개비의 구겨진 담배꽁초. 누군가 마구 현관문을 두드렸었다. 성난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던 것 같기도 하다. 밖은 낮인가? 지하에 지어진 내 집에는 창문이 없다. 누군가가 주먹으로 마구 현관문을 쳐댈 때 눈을 감지도 못하고 숨을 참고 있었다. 그냥 돌아가. 네가 찾는 사람은 없어. 이제 그런 사람은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아. 그래, 그 추운 아침에 현관에서 주저앉아버렸을 때, 사실 나는 전부 무너진 것이다. 나라는 형상과 흔적이 전부 무너져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러니까 전화하지 마. 찾아오지 마. 이젠 인간으로 있는 것도 무리니까. 누운 채로 토했다. 거품 낀 위액이 흘러나오고, 눈물도 강제로 밀려나오고. 이불 위에서 움직이지 않은 채로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겠다. 배에서 굉장한 소리가 나면서 위장이 아프다.
 그러나 밥을 먹을 수는 없어. 생존하기 위한 모든 노력을 그만둬야한다. 생존하기 위한 노력? 노력하지 않는 건 쉬운 일이다. 그러나 며칠만 굶으면 생명력이 나를 제치고 행동하기 시작한다는 것을 나는 경험으로 알고 있다. 그때부터는 생존하지 않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웃음이 새어나왔다. 나는 나의 주인이 아니다. 배가 부르고 목이 마르지 않으면 자신이 자신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이성이나 인격 같은 것은 듣기에나 아름다운 겉치레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존재의 주인은 오로지 생존하려고만 하는 처절한 본능이다. 경험으로 알고 있다. 나는 나의 주인이 아니다.
 하지만 이번엔 내가 이길 거야.
 이번에야말로 아무것도 아니게 될 거야.
 그러면 살기위해 발버둥 치면서 동시에 외로움에 목을 졸라매는 일도 없게 되겠지.

 <인간>의 책무는 영웅이 되는 것이다. 오른손의 손톱 세 개가 빠졌다. 정의롭고 정직하고 어렵고 좁은 길로 가는 것. 오른쪽 이마부터 광대뼈까지 온통 가죽이 벗겨져 피투성이가 됐다. 행복하지 않더라도, 보상이 없더라도 <인간>은 어렵고 좁은 길을 헤치고 가야한다. 얼굴 반쪽이 불이 붙은 것처럼 뜨겁고 아프다.
 배고픔을 잊으려고 스스로를 할퀴다보니 멈출 수 없게 됐다. 피나는 통증이 잠시라도 흐려지면 발이 제멋대로 부엌을 향해 뛰려고 한다. 오른쪽 시야가 붉다. 문뜩 탈수 증상이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이불은 온통 피로 축축하다. 탈수가 아니라 빈혈인가? 누운 자리에서 상체를 들어 앉았다. 며칠 만에 두뇌가 허공에 떴다. 세반고리관이 갑작스러운 변화에 적응하지 못해 극심한 어지러움을 느끼고, 욕지기가 나온다. 하지만 이미 위장은 텅 비어서 약간의 위액 거품만 혓바닥 끝으로 밀려나올 뿐이다. 두 팔로 상체를 지지하고 주저앉아 있었다. 곧 이마에서 흘러나온 피가 바닥에 고여 똑똑하고 듣기 시작했다. 시야는 여전히 혼란. 상하좌우를 구분할 수 없고, 윤곽이 그려지지 않은 이상한 곡선들만 눈 안에 가득하다. 그러니까 생각도 제대로 할 수 없다. 뭣 때문에 이러고 있었더라? 나는 뭐지? 아, 온몸이 피와 체액으로 끈적끈적하다. 샤워가 하고 싶어.
 샤워가 하고 싶어. 일어서려고 노력해봤다. 균형을 잡기 힘들어서 허리를 펴기도 전에 몇 번이고 넘어졌다. 한 번은 벽에 이마를 찧어서 온몸에 전기가 흐르는 것 같은 통증에 기절할 뻔 했다. 왜인지는 몰라도 얼른 씻고 거울을 보자는 욕심이 있었다. 원래는 거울 따위 일부러 피해 다니는데, 이제는 내가 얼마나 스스로를 무너트렸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그러나 도저히 설 수가 없었다. 피와 토사물과 담배꽁초의 진창 속에서 치매 걸린 노새처럼 버둥거리다가, 결국 포기하고 기기 시작했다. 다리로 몸뚱어리를 밀면서, 문턱을 넘어, 냉기가 새하얗게 반짝이는 거실로, 그 위에 내 피를 덧칠하고, 그러나 아주 깜깜한 거실, 창문이 없어서 다행이야, 만약 누군가가 아스팔트 위에 납작 엎드려 내 자멸의 둥지를 훔쳐볼 수 있었다면, 그런 가능성만으로도 나는 이런 상황까지 도달하지 못했을 것이다. 관객은 나 한 명으로도 충분하다. 아니, 나 한 명만 있어야한다. 아무도 내 알량한 연극무대를 보게 할 수 없다. 만일 관객석에서 당신들이 내 괴상한 연기를 보고 있다면, 난 즉시 무대를 취소하고 정상적인 각본을 짜올 테니까. 그러니까 관객은 비난도 비판도 그렇다고 호응을 해주지도 않는 목각 같은 나 한 사람으로 충분하다. 마침내 화장실 문 앞에 죽어가는 구더기처럼 웅크려있는 이 관객은, 애당초 이 무대를 보고 싶다는 생각도 없었고, 거친 채찍 같은 운명에 등 떠밀려 억지로 배우의 눈구멍 속에 앉게 된 것이니까.

 사촌 언니가 울고 있다. 아니, 곡을 하고 있다. 사촌 오빠는 어떻게든 그녀를 진정시키려고 진땀을 빼고 있고, 저쪽에는 영정사진, 내가 그리 좋아하지는 않았던 큰어머니, 영정사진 안에서조차 그녀는 매사에 화가 난 표정이다. 곡소리가 점점 새되어지고 히스테릭한 비명소리로 바뀌어간다. 상황 자체를 이해할 수 없다. 내가 전혀 소속되어있지도 않고 이해되지도 않는 장면에서 나는 끔찍한 지루함을 느꼈다. 2년 전 나의 어머니가 죽었을 때와 거의 비슷한 감정. 차이점은 내가 어머니를 사랑했었다는 것이다. 사랑? 그래, 프로이트와 비트겐슈타인 이후로 우리는 일상적인 단어 하나 능란하게 쓸 수 없게 되었지. 나는 여전히 동상처럼 서서 사촌 언니가 자지러지는 장면을 관망하고 있다. 무엇이 슬픈 걸까? 아니, 더 정확한 질문은 무엇이 못마땅한 것일까? 인간의 유한성? 상실이 반복되기만 할 뿐인 인생? 언젠가는 오고야 마는, 가을수확을 하듯이 낫을 들고 찾아오는 운명? 글쎄, 아마 사촌 언니의 <감정>은 그런 것과는 별 상관이 없겠지. 논리가 매듭지어지지 않는다. 장례식장의 시간이 무한하게 늘어지는 것 같은 감각에 입맛을 다시고, 아빠를 찾으러 간다.
 걷기에 적합한 몸. 뛰어도 부담이 느껴지지 않는 젊고 활기찬 몸. 검은 단화에 검은 양말에 검은 스커트에 흰 블라우스 위에 검은 웃옷을 입고 장례식장의 야외를 종횡무진. 잘은 몰라도 아빠는 큰아버지와 함께 있을 것이다.
 화장실 건물 뒤. 거의 회색으로 변하기 시작한 머리칼을 가진 익숙한 중년남자. 그리고 그 앞에 이미 완전히 백발인 노년의 남자가 벤치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다. 두 사람은 대화를 나누지 않는다. 아마 대화를 나누지 않아도 괜찮은 것일 테지. 담배연기 자욱한 그 좁은 길목은 두 사람의 침묵을 위한 것이었다. 마치 벽이 둘러쳐진 듯, 그 안으로 비집고 들어갈 수 있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중년남자의 얼굴은 아빠의 얼굴이었지만 그 표정은 아빠의 표정이 아니었고, 또한 그 표정은 2년 전에 본 기억이 있었던 것이었다. 흐린 눈을 가진 백발의 노인은, 아빠와 한없이 닮은 그 노인은 한 손에 담배를 들고 공허를 응시하고 있었다. 아마도 거기에 슬픔 같은 것은 없었다. 그냥 막연히, 공허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그 안개로 장막이 쳐진 것 같은 광경을 마냥 지켜보고 있었다.
 다급한 구두소리가 들려왔고, 누군가, 아마도 친척 중 한 사람이겠지, 그가 노인에게로 가 숨을 고르며 말했다. “……가 실신했어요.” 나도, 아빠도, 큰아버지도 표정 하나 바뀌지 않았다. 애당초 무슨 다른 소식이 있겠는가? 다만 나는 노인이 담배연기를 더 길게 뿜어내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는 재떨이에 꽁초를 비비더니, 두 손을 깍지 끼고 눈꺼풀을 껌뻑였다.
 그리고 아빠는 내가 그들의 주변에 있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차리고, 나를 쳐다보더니, 마치 <아빠처럼> 미소를 지었다.

 뜨거운 물이 타일 바닥에 웅크린 내 몸 위로 쏟아져 내린다. 물. 이 물이 내 죄악까지 씻겨냈으면 좋겠어. 가능하다면 내 영혼도 씻겨나가, 하수구로 빨려 들어가고, 그대로 영원히 찾을 수 없게 된다면. 갖가지 도피적인 망상들. 그러나 현실에서 씻겨 지는 것은 피부에 들러붙은 위액과 피와 담뱃재뿐이다. 주황색 조명이 비추는 화장실. 균일하게 물줄기가 떨어져 흩어지는 소리. 나는 눈을 감고 있다. 아주 완벽하게 유리되고, 폐쇄되고, 의미와 가치를 벗어난 주황색 공간. 내 피부를 거친 물은 주황색 혹은 분홍색이 되어 하수구로 흘러 들어간다. 상처가 또 열려, 피와 진물이 배어나오고, 불에 타는 것 같아. 오른손을 보자 내가 검지와 중지와 새끼손가락의 손톱을 잃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흉하고 벌겋게 벌어진, 열린, 원래는 닫혀있어야 할 살이 움찔거리며 진액을 토한다. “하하하.” 누가 웃었지? 누가 웃었어? 아, 내가 웃었군. 거울을 봐야겠어.
 시야는 여전히 붉고 흔들린다. 온수를 맞으며 비척비척 타일바닥 위에서 일어서려고 노력한다. 벽을 짚으면 손가락 끝이 너무 아파. 그러나 어쩔 수 없다. 여기서 넘어져서 머리라도 바닥에 박으면 그대로 죽는다. 물론 모든 시나리오의 결말은 죽는 것이지만, 아직 페이지가 남았을 것이다. 기승전결 같은 정석적인 것은 바라지도 않아. 그저 아직 페이지가 남았고, 결말은 가깝기는 해도 눈앞에 있지는 않다.
 세면대 위에 붙은 높이 1m 가량의 거울. 가까스로 서서 보자 틀어놓은 온수 때문에 거울에 온통 김이 끼었다. 불확실한 반사. 검고 하얀 어떤 유령 같은 것이 거기에 깃들어있다. 닦아야할까? 닦지 않아도 충분히 보이는 것 같은데. 그러니까, 내가 봐야할 것이, 충분히 보이는 것 같은데. 불확실함. 불길함. 고장 난 메트로놈 소리가 이미지화 된 것 같은, 섬뜩한 소음공해. 그 희뿌연 거울을 마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중국산 담배를 피운 것처럼 흉부가 죄어온다. 주황색, 주황색, 주황색 속에, 어떤 낙하 중인 것, 어떤 불분명한 형태. 정확히 알 수 없는 것은 불길함과 공포를 유발한다. 다시 말해서 모든 것은―자기 자신을 포함해― 불길하고 공포스럽다. 야밤에 갑자기 문밖에서 들려오는 정체를 알 수 없는 폭발음 같이. 혹은, 혹은 도시 한복판에서 너무나도 바쁜 군중 떼에 둘러싸여있을 때, 그 모든 사건들의 중첩에 대해서 어느 정도 이해해버렸을 때 같이.
 아, 제기랄, 이마의 열린 상처가 너무 아파.

 그런데 나 자신을 증명하는 길이 무가치하고 사악하게 되는 것밖에 없다면요?
 왜 그렇게 생각하죠?
 보세요, 시대는 절대성을 잃었어요. 정확히는 그런 건 원래 없었죠. 다만 사람들을 안심시키기 위해서 원시부터 중세까지 작동하던 안전장치였는데, 그게……
 작동을 멈췄군요.
 맞아요. 선생님, 만약에 기계부품이, 자신이 오로지 기계를 작동시키기 위해 존재하는 부품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부정하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요?
 말씀해보세요.
 기계의 작동을 방해해야 해요. 기계를 부숴야 해요. 자신이 속한 기계를 망가트리는 부품이 있다면, 그건 더 이상 기계부품이 아니죠.

 여긴 막다른 길이야. 여긴 막다른 길이야. 여긴 막다른 길이야.
 여긴 막다른 길이야.
 그 창백한 젊은 여자는 탁자에 놓인 커피 잔을 보면서 말했다. 커피 잔은 커피로 가득 차있었다. 여자는 사물의 모든 존재방식이 끔찍하게 무섭다고 느꼈다. 그녀는 도무지 커피 잔을 쥘 수가 없었다. 쥘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그 유리로 된 대상은 너무도 취약해서, 손가락을 가져다 대는 순간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파열음을 내면서 터져버릴 것 같았다. 아니 그럴 것이 분명했다. 그녀는 아주 조심스럽게 눈동자를 굴렸다. 눈동자 역시 너무 빠르게 움직였다가는, 그 시선의 움직임에 의해서, 이 나약한 세상이 거꾸로 뒤집어져 모조리 쏟아져 내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목소리의 치명성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 옆자리에 앉은 두 명의 여자는 무언가 담소를 나누면서 간헐적으로 새된 웃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 <웃음소리>가 들릴 때마다 젊은 여자는 천 개의 바늘이, 감정을 가진 바늘이 뇌수로 침입하는 것을 느꼈다. 그럴 때마다 화들짝 놀라 자빠질 지경이었지만 경련과도 같은 그런 행동을 했다가는 온몸의 살가죽이 우수수 떨어질 것이었다. 그녀는 카페에 들어온 것을, 애당초 신선한 공기를 찾아 밖으로 나온 것을 진심으로 후회하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카페의 라디오에서는 발라드싱어가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감정이 실린 목소리는 위험하다. 여자는 완전히 공포에 질렸고, 이내 천천히, 아주 천천히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지갑 안에 부적처럼 모셔둔 발륨 봉지를 엄지와 검지로 조심스레 집었다. 내 뉴런들이 욕을 하고 있어.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고 완전히 길을 잃었을 때, 길을 잃었다는 사실 자체를 잊어버리는 건 방법이 아니라고, 소리를 치고 있다. 그러나 다른 도리가 없었다. 여자는 봉지 안의 발륨제제를 하나하나 꺼내 커피 잔 앞에 늘어놓았다. 그리고 그 하얀-하얗고 강력하고 조그마한 고체들을 손끝으로 움직여 정사각형 모양을 만들었다. 공포와 혼란으로 뒤죽박죽이 된 의식은 그 정사각형을 주시하라고 명령했다. 커피가 식어가고 발라드싱어는 서정적인 음색으로 폭력을 울부짖는다. 삼켜야해. 삼켜야해. 사물의 본질에 노출되어있는 것은 인간존재의 가장 끔찍한 고통이다. 그리고 그 사물들은 사방팔방에 즐비하다. 말 그대로, 그것들은 어디에나 있다. 안전장치가 작동하지 않게 될 때를 기다리며, 태초부터 숨겨온 칼날을 은밀히 조준하고 있다. 정사각형을 이루고 있던 타원형의 제제들을 여자는 신중하게 하나하나 왼손으로 옮긴다. 그리고 삼킨다.
 15분. 구원을 위한 15분. 어떤 구원? 도피는 아니고? 그러나 도대체 차이점이 뭐란 말인가? 발라드싱어가 더 이상 자살을 종용하지 않을 때까지 기다리고, 옆 자리의 웃음소리가 추악한 고문기구가 아니게 될 때까지 기다리고, 유리잔이 보다 견고해질 때까지 기다리고, 그리고 두 손을 뻗는다. 여전히 취약한 세상. 그러나 아까보다는 깨지기 어려워졌다. 사약사발을 들듯이 조심스럽게 양손으로 커피 잔을 들어 올려 죄악의 엑기스를 삼키듯이 들이킨다.
 이제 잔의 커피는 절반.
 절반의 막다른 길.

 거울의 김을 손바닥으로 지운다. 주황색 조명 아래 객관이 규정한 내 모습이 한 줄기씩 드러난다. 검은 머리의, 얼굴 반쪽이 피투성이인, 저 눈, 저 눈을 좀 봐, 건강-건강한 사람들은 절대 저런 눈을 하지 않지. 왜 동공이 닫혀있지? 너는 지금 따뜻한 물로 온몸을 씻으며 안락해야할 텐데. 저 동공은 새까맣게 닫혀있다. 노이즈. 안전장치. 노이즈. 생각하지 말 것. 사고는 자멸의 지름길이다. 그리고 우리의 본능은 우리가 생각하지 말아야할 때 시끄러운 잡음을 뇌하수체에서 분비한다. 경고다. 생-각하지마. 계속해서 거울을 지워간다. 담배 때문에 잿빛으로 변한 입술이 웃고 있다. 그야 그렇겠지. 절망의 다음 단계는 웃음이다. 정확히는, 절망이 어떤 것인지 이해하면 사람은 웃게 된다. “히히.” 거울 속의 웃고 있는 잿빛 입술이 우스워서 웃었다. 마주 댄 거울처럼, 계속해서 서로를 반사하는 농담. 결국 이 모든 것은 영원의 망각 속에서 바스러져갈 먼지에 불과하고, 그것을 깨닫게 되면, 이 우주 자체가 허황된 농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고통도, 불행도, 비참도, 부조리도, 미치광이의 농담이다. 아가트! 아가트! 내가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은 당신뿐이야, 아가트. 그녀의 이름은 에브였다. 하하하. 하하하하.
 손을 좀 더 움직인다. 창백하고 빈약한 젖가슴 한 쌍과, 그 사이에 그어진 수 없이 많은, 오래되고 불거진 직선의 흉터들이 보인다. 오십 개, 혹은 육십 개? 그것들은 흰색이다. 흉터는 처음 벌어졌을 때 피를 흘리며 붉은 색으로 보이지만, 곧 갈색이 되고, 딱지가 떨어지고 불거져 나오며 살보다 흰 지독한 백색이 된다. 저 아래에 심장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시꺼멓고 쪼그라든 심장을 꺼내서 내 사랑을 다 해 끌어안아주려고 했는데, 칼로 가죽을 찢는 건 너무 아팠고, 칼날이 복장뼈를 긁는 소리는 너무 시끄러웠어. 아아, 몸에 갇힌 가엾은 영령들아. 사실 심장을 꺼낸다고 한들, 분명 심장의 더 안쪽에서는 누군가가 울고 있겠지. 고로 이것도 거짓말쟁이의 농담이다. 우리가 <어딘가>에 있다는 것. 우리는 어디에도 없어. 만약에 우리가 있다면, 천지사방에 흩어진 암스테르담의 안개 같은 비참함이 우리다.

 괴물이 되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이렇게 말하기만 하면 된다: 나는 괴물이 아니야.

 쌍뜨뻬쩨르부르크에서는 설날이 되면 2주 동안 해가 뜨지 않는다. 그러면 사람들은 친척모두가 모여 2주 내내 보드카를 마시고 담배를 피우고 잠을 자는 것을 반복한다. 밖에는 나갈 수 없다. 얼어 죽으니까. 담배연기와 너부러진 술병과 너부러진 사람들 사이에서 인생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고 러시아에서 온 남자친구는 말했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인생은 보드카 잔 위에 앉은 녹색요정 같은 거라고.

 이 컵은 매우 현명하군. 검은색인 것을 보면 알 수 있어. 검은색은 견고하지. 잘 깨지지 않아. 그래서 나도 내 방의 벽지를 전부 검은색으로 칠했었지. 그래야 망령들이 벽을 통과해 들어오지 못하니까.
 옆방에 있던 사람이 한 말이다.

 누군가가 아주 중요한 말을 했다. 당신의 행동과 말들을 매우 주의 깊게 관찰하면 당신이 믿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거라고. 온몸에서 투명하거나 혹은 붉은 물이 뚝뚝 떨어지는 채로 욕실 밖으로 나간다. 깜깜하지만 몇 년이나 살아온 집이다. 부엌으로 가는 길은 머리가 기억하고 있다. 어둠 속에서 더듬거리며 식칼 옆에 놓인 과도를 집어 든다. 다시 욕실로. 주황빛 조명 아래 스테인리스 제 과도가 둔하게 번쩍인다. 거울에는 알몸의 앙상한, 피투성이 여자가 칼을 들고 있다. “나는 게으르고.” 잿빛 입술이 말한다. “나약하고, 아, 난잡한 환경 속에서만 살아왔지.” 칼끝으로 손톱이 나간 손가락 끝을 빙글빙글 파낸다. “그러면서도 남들에게 원망을 사는 게 죽기보다 무서웠어.” 다리가 무너진 건 그것 때문이다. “내 이름은……” 손가락 끝에서 피가 방울방울 떨어진다. 통증 때문에 눈이 충혈 되어간다. 칼날을 이마에 댄다. “내 이름이 뭐였더라.” 칼을 쥔 손에 힘을 넣어 얼굴 가죽을 벗기듯이 이마에서부터 광대뼈로 천천히 도려낸다. 하하하. “내 이름이 뭐였냐고.” 웃으면서 묻는다. 칼날은 이미 볼을 찢고 있다. “아니야, 그런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 나는 죽었어. 사실은 아주 여러 번 죽었지.” 반대쪽 볼. 턱관절. 위로, 광대뼈. “마스크가 필요해.” 그리고 새 이름. 아니야, 어쩌면 필요 없을지도. 절취선을 자르듯이 이마 옆쪽을 깊이 베고, 반대쪽의 선과 이어지도록 하고. “아무도 내 이름을 모르는 곳에서 한 번 행복했던 적이 있어.” 이마부터 광대뼈를 따라 볼과 입술까지 가죽이 잘려 피가 비 오듯이 내린다. 3년 전에 혼자 충동적으로 떠났던 여행. 켄터키의 깡촌, 비오는 공동묘지의 한복판에 누워 쿠키를 먹고 있었다. 아무도 내 이름을 모르는 곳. 쿠키에서는 마리화나의 냄새가 났다. 반죽에 말린 대마 잎을 갈아 넣은 초콜릿 쿠키. “모두 죽는다. 시체들 사이에서, 내가 반드시 죽을 것이라는 위안과.” 손가락을 얼굴가죽의 터진 틈 사이로 우겨넣는다. 그리고 통째로 뜯어낸다. 순간 욕실이 검은색 섬광과 새빨간 잔상으로 시끄럽게 발작한다. “아아아.” 이제 내 오른손은 뜯어진 내 얼굴 가죽을 쥐고 있다. “마스크. 새 마스크. 하하.” 대마 쿠키나 대마 브라우니는 피우는 것과 달라서 정신에 작용하기까지 약 20분이 걸린다. 그 뒤에는 모든 근심과 걱정거리들이 녹아 사라진다. 나는 계속 쿠키를 깨작거리며 비를 맞았다. 해가 지고, 다시 해가 떠오를 때까지. 추위도 통증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거울을 봐. 하악 위로는 전부 피부가 벗겨진, 박물관에 전시된 인체 모형 같은 얼굴. 피가, 혈액이 거울까지 튀었다. 피가 눈으로 스며들어 모든 게 다 빨간색으로 보인다. 유일하게 멀쩡한 하악의 아랫입술이 웃으려고 애를 쓰고 있다. 주의 깊게 본다.
 내가 믿는 게 뭐지?
 얼굴 가죽이 진액으로 끈적거린다. 조심스럽게, 거울에 붙인다.
 아주 훌륭한 농담이야.

 엄마, 제발, 나는 정말로 노력했어요. 학교에 나보다 점수가 높은 애가 한 명 있다는 건 내 잘못이 아니에요. 선생님도 내 점수를 칭찬했어요. 제발, 엄마, 화내지 마세요. 제발 방에 가두지마세요. 문제집을 다 풀 때까지 화장실도 못 가게 할 거잖아요. 저번에도 의자에 오줌을 싸고 한참을 울었어요. 제발.

 플래시백이 점점 잦아든다. 거울에 비친 괴물을 오래 보고 있을수록, 과거는 허상이 된다. 나는 여러 번 죽었다가 완전히 죽었다. 거울에 들러붙은 내 얼굴가죽 한복판에 칼을 박아 넣는다. 쨍 소리가 나며 거울이 깨진다. “카-흐-아-아-하.” 헐벗은 얼굴근육이 괴상한 웃음소리를 낸다. 피투성이 세면대. 안락한 기분. 안전한 기분. 얼굴 전체에서 느껴지는 통증이 우습다. 세면대에 칼을 던진다. 쨍그랑.

 내 광기가 나이와 함께 충분히 자랐을 무렵 아버지는 날 정신병동에 집어넣었다. 잘 된 일이었다. 나는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 커다란 비밀을 숨기고 있고, 내가 정신병동에 있는 한, 아버지는 날 심문할 수 없다. 거기서 많은 친구들을 만났다. 사실은, 그들이 내가 처음 사귀는 친구들이었다. 밤마다 어느 병실에서 숨이 넘어가는 비명소리가 들렸지만 어느 때보다 잘 잤다. 룸메이트는 정상적인 회화가 가능했지만 간호사들이 조금만 눈길을 돌리면 어떻게든 날카로운 물건을 구해 손목과 팔뚝을 그었다. 그녀는 아주 친절한 젊은 여자였다. 어느 늙은 노파는 매일 아침 내게 만나서 반갑다며 자기소개를 했다. 그녀는 망각의 축복을 받은 자였다. 나에게는 그저 모든 것이 편안했다. 그곳에서는 자기 자신을 책임질 필요가 없었다. 내가 지시에 순종적이었기 때문에 간호사와 의사는 내게 살갑게 대해주었다.
 다만 내가 매일 세 번씩 먹는 약은 병동의 어느 누구보다 많은 양이었다.

 담배를 피우려고 했는데 윗입술이 없으니 고생스러웠다. 담배를 입에 고정할 수가 없었다. 연기를 빨아들이는 것도 불가능했다. 곧 포기하고, 더러운 이불에 또 내 피를 묻혔다. 켄터키에서의 하룻밤이 떠올랐다. 그만큼 편안하고 안락했다.
 다 잘 되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신에게 정신병동 입원기록이 있다면 이미 이 사회에서 당신의 역할은 모두 끝났다는 뜻이다. 제대로 된 직장을 구할 수도, 제정신인 친구를 곁에 둘 수도 없다. 그저 책임자가 의료기록 같은 건 신경 쓸 생각도 없는 아르바이트 정도나 가능하다. 그러나 그것도 오래가지 못한다. 제정신은 사람들은 귀신같이 타인의 이상한 면을 찾아내기 때문이다. 정신질환자들은 치료받기 위해 정신병동으로 가지만, 퇴원하는 사람들이 전부 나았다는 뜻은 아니다. 병원과 사회는 서로 다른 바로미터를 갖고 있다. 인생에서 한 번 추락하면 다시 기어 올라올 방법은 없다. 퇴원할 때도 우리는 이미 똑같은 비극적 결말로 향하고 있다.

 나는 새해가 싫었어. 너무 싫었어. 그 냄새, 그 분위기, 모든 게 잘못되었다는 느낌이었어.
 그래서 한국으로 온 거야?
 그래, 도망친 거야.
 그리고 날 만났고.
 그렇지, 도망치고, 널 만났어. 그리고 네 덕분에 깨달았지.
 뭘?
 어느 누구도, 절대로 도망칠 수 없다는 것을.

 이제 빛이 보고 싶어. 겨울의 맑은 하늘도 보고 싶고. 나는 이미 죽었으니, 망령처럼 거리로 나설 거야. 빛이 나를 태울 거야. 난 이름도 생명도 없는 존재로서, 불타올라, 재가 될 거야. 이곳은 내 둥지지만, 사라질 때는 둥지 밖에서 사라져야 해. 이제 나는 세계를 사랑해. 물론 여전히 증오하지만, 증오하는 만큼 사랑해. 왜냐하면 이제 난 정말로 아무도 아니니까.

 현관문을 연다. 아주 오랫동안 잠궈 놓았던 기분이다. 며칠인지 몇 주인지는 모른다. 바라 건데 밖이 정오이기를. 해가 하늘 꼭대기에서 만물을 향해 쬐어 내리고 있기를. 현관을 지나 지상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오른다. 시야는 붉고 흐리다. 눈꺼풀마저 떼어내서 눈도 깜빡일 수 없다. 그러나 지상에 알몸으로 피투성이로 섰을 때, 영원한 종말을 의미하는 무지막지하고 폭력적인 빛이 내 무방비한 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웅웅거리는 이명 사이로 공포와 혐오의 비명 같은 것들이 들렸다. 태양이 저기 있다. 태양은 분명히 나를 내리쬐고 있다. 온전치 못한 오감 속에서 내가 느낀 것은 한없는 가벼움이었다. 이것이 마지막 페이지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피인지 눈물인지 알 수 없는 것이 드러난 얼굴근육을 타고 흘러 따가웠다.
 나는 그림자로 빚어졌으니
 이제 나는 빛으로 지워지는 것이다.
 굳바이,
 내가 이겼어.


끝.

Posted by Lim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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