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에 해당되는 글 308건

  1. 2011.10.03 홀로 사는 집 2
  2. 2011.09.28 번식
  3. 2011.09.05 익사자들 2
  4. 2011.08.23 2011년 8월 23일 화요일. 1
  5. 2011.03.22 질식 혹은 죄와 악
  6. 2011.02.05 빛깔 없는 희망에 대하여. 1
  7. 2010.07.19 죽음과 자유. 그리고 범죄적 의식에 대하여.
  8. 2010.07.09 어느 병자의 하루

홀로 사는 집

글/소설 2011. 10. 3. 01:52 |
2011/10/01 완성.

1. 적당한 길이의 단편소설. 이야기의 흐름보다는 장면 장면의 뉘앙스에 신경을 쓰느라 스토리텔링의 부분에 있어서는 부족한 점이 있을지도 모른다.
2. <익사자들>에서부터 연결되는 주제의식을 갖고 쓴 것. 삶의 인간이 죽음을-동시에 생명을- 대하는 태도에 대한 삼부작을 쓰려고 했고, 이것은 그 중 두번째 소설이다.
3. 나름대로 만족한다. 최근에는 창작의욕이 높아져서 기분이 나쁘지 않다. 퇴고하는 것을 귀찮아하지 말아야 할텐데.

 
Posted by Lim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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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식

글/소설 2011. 9. 28. 21:22 |
2011/09/28 완성.
1. 오늘 지하철을 타고 집에 오던 도중 생각난 것을 그대로 썼다. 과거의 내가 된 기분.
2. 이제까지 써왔던 것들과 소재가 너무 중복된다는 의견이 있다. 확실히 옳은 말이다.
3. 어쩐지 불안하다.

Posted by Lim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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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사자들

글/소설 2011. 9. 5. 20:08 |
2011/09/04 완성.
1. 최초의 중편소설. 어느정도 만족한다. 그러나 계속 만족하지는 못하리라. 벌써 일종의 후회 같은 것이 뇌리에 밀물처럼 밀려들어오고 있다. 어서 다음 소설을 구상하고, 지금보다 더 높은 완성도로 그것을 이뤄내야하리라는 욕망. 더 완벽한 단순함. 더 풍부한 표현. 더 내밀한 깊이. 더 진중한 주제. 섬광처럼 빛나는 아름다움에 대한 끊임없는 갈망. 그리고 언젠가는 그것을 내 손에서 탄생시킬 수 있으리라는 근거 없는 믿음. 오직 이것만이 살 길이다.

 
Posted by Lim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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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 썼다.
 4개월이 좀 넘는 시간을 들여서 A4용지 51페이지, 200자 원고지 456 매 분량의 초고 완성. 이제 다듬고 깎아내는 작업만 남았다. 제목은 아직 고민중이다. 가제를 붙여놓기는 했는데 완벽하게 마음에 들지는 않는다. 하지만 머릿속에 떠돌아다니는 다른 단어의 조합들도 마찬가지로 내용에 비하여 조잡하게만 느껴진다. 수정을 마치고 나면 공모전이나 출판사 따위를 좀 돌아다녀 보아야겠다. 이것이 내 개인의 역사에 있어서 어떤 작품이 될지 아직은 그저 불투명하기만 하다. 약간의 기대만 있을 뿐. 하기사 언제나 그랬다. 무엇이 과정이고 무엇이 결과일지 현재로서는 전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블로그에 게재하는 것은 발표 과정이 일단락 된 뒤에 생각해봐야겠다. 우선은 지금의 탈력감과 만족감을 충분히 만끽한 뒤에 말이다.
Posted by Lim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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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식 혹은 죄와 악

글/소설 2011. 3. 22. 19:20 |
2011/3/22 완성.
1. 내가 뭘 쓰려고 했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리고 내가 뭘 써놓은 건지도 파악이 안 된다. 만약 자신의 글이 쓰던 와중에 제멋대로 살아움직이며 깽판을 놓는 것을 보고 싶지 않다면 같은 글에 6개월 이상 붙어있지 말아야만 할 것이다.
2. 언제쯤에야 스스로 만족할만한 소설을 쓸 수 있을까? 감정을 좀 더 미니멀리즘하게 깎아내야한다. 나는 아직도 너무 과도한 충동의 덩어리다. 오늘 뿐만이 아니라 내일도 만족할 수 있을 글을 쓴다는 것이 가장 어렵다.
3. 수정할 곳이 분명히 있긴 있는데 될대로 되라는 기분이 되어버려서 도무지 손을 못 대겠다. 수정을 해야할지 말아야할지 고민하면서 곤란해하고 있느니 차라리 어서 이후에 쓸 소설의 구상에 들어가는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4. 혹은 조금 더 시간이 지난 뒤에 다시 읽어보면 무언가가 보일지도 모른다.

Posted by Lim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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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공해도 실패해도 인생은 계속되며 내일은 또 온다. 시간은 오직 미래만을 향하여 향일성 식물처럼 뻗어나가고, 그 절대적인 굴레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시간의 흐름으로부터 죽음으로 투신하는 것 하나 뿐이다. 나는 어떤가? 세계의 온갖 우중충하고 날카로운 색깔들 사이에서 나는 늘 죽음을, 즉 해방을, 마음 편한 포기를 꿈꿔왔다. 포기라는 것은 정말로 매력적인 것이다. 퇴폐주의자가 태양을 향해 눈을 향하지 않는 것처럼, 포기는 늪처럼 끈적끈적하고 깊은 안심을 사람에게 선물해준다. 고뇌하지 않게 되는 것. 그것이야말로 고통 받는 사람에게는 무엇보다도 달콤하게 생각되는 독주인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 점을 누구보다 정확하게 알고 있다. 내 정신은 너무도 쉽게 상처입고 예민해지기 때문이다.
 굉장히 오랜 시간동안 나는 포기와 부정의 경계선에 서서 양극점에 두 다리를 걸치고 있었다. 어떤 때에 내 영혼은 모든 의식들을 내버린 채 삶을 포기하기를 원했고, 또 어떤 때에는 누구보다 명철하게 눈을 뜨고 가시나무 사이에 궁극적인 질문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기를 원했다. 나는 경계선 상에서 유난히도 모순의 감정에 휩쓸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모든 인간적인 희망들이 부정당하고 내가 안락하게 눈감을 수 있는 자리마저도 세상의 적의 넘치는 손아귀에 빼앗겨버린 지금, 나는 더 이상 그 경계선 위에서 쭈뼛거리고 있을 수만은 없게 되었다. 퍽이나 잔혹하게도, 실패는 내게서 포기의 가능성마저도 앗아가 버렸다. 그것은 내 선천적인 반항아적 기질과 깊은 관계가 있다. 다행스럽게도 아직 나는 발을 빼앗겨도 앞으로 기어갈 의지─어쩌면 아집에 지나지 않는 감정일지도 모르지만─ 정도는 갖고 있는 것이다.
 사실 지금까지 나는 내 정신의 밑동이 이미 오래전에 썩어 없어졌을 것이라고 믿어왔다. 그래서 언제고간에 무엇인가가 나를 밀친다면, 아무런 저항도 못하고 몸체 째로 뒤로 넘어져 절망의 바닥에 닿아 산산조각이 나 버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의외롭게도 내게는 다리와 발이 남아있었던 것이다. 오히려 나는 나를 밀친 무심한 의도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 내 두개골과 가슴 속은 반항의 감정으로 하얗게 되었다. 그것은 병든 증오와는 별개의 것이었다. 이상한 이야기지만 그 반항은 참으로 상쾌하고 선명했다. 마치 어느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을 걸작을 구상하며 캔버스를 마주하고 있는 화가의 눈동자에서 번뜩이는 순백의 광기처럼, 그것은 온통 메마른 고통으로 가득하기는 했지만 병질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렇게 나는 미래에 관여하지 않는 생명을 본 것이다.
 나는 실패했다. 그것은 분명 내가 선택할 수도 있었던 수많은 가능성들을 지워버렸지만, 오히려 다른 여지들이 사라지고 살아있는 인간이 고를 수 있는 가장 본질적인 두 가지 선택만이 남게 되자 나는 내가 죽을 수 없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자발적 죽음은─적어도 내 상황에선─ 관념의 부르주아적 상태에서만 발생할 수 있는 선택이었던 것이다. 온갖 요란한 불꽃과 눈가림과 혼란을 위한 장막들이 걷어내진, 극도로 가난한 세계에서는 삶밖에 남아있는 것이 없다. 오직 삶 뿐만으로 고독하게 존재하는 삶. 아무것도 없는 사막에 홀로 돋아난 인간존재. 그 이외의 것들은 전부 부수적인 의식에 지나지 않는다. 식물은 자살하는 방법을 모르는 것이다.
 나는 내가 자살할 수 있을 때까지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사랑하는 것과 내가 열망하는 것. 태양을 향해 천공으로 향하는 해바라기처럼,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삶을 집어삼키며 그것들을 향해 기는 것밖에 없다. 여전히 나의 세계에는 고통이 해변가의 모래알처럼 흘러넘치고 나는 손톱만한 희망마저 거부할 정도로 헐벗었지만 중요한 것은 내가 <그렇게 하는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고통은 차라리 그 필연성의 증명이나 다름없다.
 나는 산다. 살 것이다. 사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 나는 죽을 수 있을 때까지 살 것이고, 시선 저 끝에서 태양처럼 번쩍이며 섬광을 발하는 그것을 향해 뼈와 근육으로 된 가지를 뻗을 것이다. 이것은 긍정도 아니고 선택도 아니며 희망은 더더욱 아니다. 이것은 부정이자 반항인 동시에 실존에 구속당한 인간조건이 만들어낸 유일한 결과이며, <그것> 이외의 모든 것이 목이 잘렸다는 점에서는 절망과도 그다지 다를 것이 없다. 아무튼지 분명한 것은, 또 한 번의 내일이 오면 나는 기염을 토하며 그것을 깨물어 삼키듯이 살아 내리라는 사실이다.
Posted by Lim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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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래, 보라. 어디에 진리가 있으며 어디에 길이 있는가? 신념과 미덕과 믿음과 소명으로 이루어진 황금으로 된 길은 어디에 있었는가? 우리들의 발이 향해야할 곳을 찾아 헤매고 있다면 우선 우리 자신이 어떤 땅에서, 어느 하늘 아래에서 태어났는지를 알아야한다. 우리의 정신을 뿌옇게 가리고 있는 희망이라는 이름의 안개를 걷어내야 한다. 오, 희망은 실재할지도 모른다. 물론이다. 그러나 그것은 현재가 되지 않는 미래를 가리키는 단어이고, 우리들이 스스로를 위해 머리위에 걸어놓은 당나귀의 당근 같은 것이다. 우리가 만들어내고 스스로에게 부여한 관념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말도록 하자! 그것은 세계에서 온 것이 아니다.
 반복하건데 우선 우리가 태어난 세계를 명철한 눈으로 주시해야한다. 관찰해야하는 것은 우리가 태어난 이 세계다. 이 땅에서 피어나는 현상이며 사라지는 생명이자 떠오르는 시간들이다. 어느 굉장한 허무주의자가 지어놓은 거대한 관념의 체제가 아니다. 현상의 너머에 존재한다는 플라톤의 이데아계도 아니다. 태양의 하얀 빛살과 대지를 뒤덮은 콘크리트빛 인공 구조물, 인간의 누리끼리한 가죽과 나뭇잎의 초록빛깔에 눈을 두어야한다. 우리와 함께 태어난 형제의 눈 안쪽에 담겨 있는 새까만 맹목성과 필멸의 운명을 있는 그대로 맛봐야한다. 매일 같이 자라는 손톱을 보라. 그것은 손가락의 관절 안쪽에서부터 밀려나와 점점 길어지고, 우리는 하얗게 밀려난 부분들을 깎아내어 버린다. 세포는 늙고 죽어 피부위에 시체가 산처럼 쌓인다. 세계는 생명과 죽음으로만 이루어져있다.
 만약 당신이 인간의 소관을 벗어난 영역과 희망사항이나 다름없는 은총에 대해 말할 셈이라면 당장 입을 다물도록 하라. 당신은 인간이며 우리들도 인간이다. 그것은 정신이 자의식을 가지기 시작한 날부터 단 한 번도 변한 적이 없는 사실이다. 우리는 인간의 시각과 인간의 촉각밖에 알지 못하며 인간의 언어로 인간의 영혼을 논하는 인간의 철학을 한다. 상정된 초현상은 흥미를 끌 수 있을지는 모르나 진실에 대한 인간의 탐구에 답을 내주지는 못한다. 진실! 무엇을 진실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태어나자마자 우리에게 휘둘러진 단 하나의 실마리이자 화살표가 그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유일한 진실은 죽음이고 필멸이다. 유한한 존재인 우리가 자신만만하게 말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진실이 바로 죽음이다.
 내가 허무주의자라고 부르는 이들이 비웃음을 한껏 머금은 채 소리를 지르는 것이 들린다! 「하-하! 당신은 표면적인 것밖에 보지 못하는 편협한 자로군! 사물에는 현상보다 깊은 본질적 의미가 있으며 삶과 죽음 또한 표상적인 것일 뿐, 그 속에는 마땅히 영원이라는 축복이 있다네!」 뭐라고? 도대체 그들이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가? 현상보다 깊은 본질, 의미, 심지어 영원과 축복이라니! 그들이 내게 ‘표면적인 것밖에 보지 못’한다고 손가락질할 때 나는 그야말로 경악을 금치 못한다. 우리가 <삶> 이외의 삶을 살아본 적이 있거나 이 <세상>이 아닌 세상과 만난 적이 있거나 <영원>한 존재였던 적이 있던가? 우리가 죽음 너머를 내다보거나 논리초월적 논리를 증명하거나 영원의 무게를 재는데 성공했던 적이 있던가? 세상은 곧 세상이며 삶은 곧 삶이고 죽음은 곧 죽음이다. 존재란 <고작> 그만큼의 존재다. 물론 죽음 뒤의 세계가 있을 수도 있다. 영혼이 영원을 살아갈 수도 있다. 어느 절대성이 우리에게 존재의 소명과 삶의 의미를 부여해주었을 수도 있다. 우리는 그런 것들이 <없다>고 단언하지 못한다. 단언할 만큼 오만할 줄을 모른다. 왜냐하면 몇 번이나 말했듯이 우리는 유한한 존재이고 모순과 오류로 살아가는 정신이며 죽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설령 그런 것들이 실재한다고 하더라도 우리에게, <삶의 인간>인 우리에게는―적어도 우리가 살아있고, 또 인간인 이상―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죽기 때문이다.

2.
 왜냐하면 우리가 죽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은 <삶>에 한정된다. 죽음은 존재의 종언이고 모든 가치와 의미들이 절멸하는 장소다. <나>를 구성하는 것은 뇌와 척수와 호르몬과 정신과 영혼과 그 외 우리가 아직 알지 못하는, 혹은 앞으로도 알지 못할 온갖 화학적이고 물리학적인 동시에 추상적이며 영적인 요소들이다. 죽음은 그것들을 전부 종말로 밀어 넣거나, 최소한 그 중 일부라도 <나>에게서 떼어내 썩어 없어지게 만든다. 죽음이 모든 것의 끝은 아닐지언정 적어도 <나>의 끝인 것만은 의심할 바가 없다. 그리고 <나>의 끝은 동시에 모든 것의 끝이다.
 우리들의 단 하나뿐인 세계에서는 아무것도 심판받지 못하며, 그 무엇도 취향 이외의 것으로는 판단되지 않는다. <인간의 세상>을 구성하는 모든 관념들을 부정해야 비로소 우리는 세상을 긍정한다. 이 황폐한 대지에는 애초부터 신념도 미덕도 믿음도 소명도 없었다. 이곳에는 그 어떠한 길도 없고 우리는 광막한 사막 한 가운데에 난데없이 떨어져 내린 것이다. 말하자면 신은 부정당했다. 그것은 곧 모든 사물들에게 의미를 내려주는 절대적인 가치의 척도가 부정당했다는 뜻이다. 신은 필멸이라는 자연의 법칙에 의해 <우리의 정신 속>에서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절대성은 이미 허구의 단어가 된지 오래다.
 고로 이 땅에는 법이 없다. 규칙도 질서도 도덕도 없다. 모든 것에 대한 <최후의 심판>이란 삶의 인간에게는 나약한 존재를 향해 으르렁거리는 공갈협박에 불과한 것이다. 우리들을 옭아매는 것은 왜곡된 합리주의에서 태어난 암묵적 협의뿐이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을 위한 합리주의가 근거라고 말하기도 낯 뜨거울 만큼 너무도 이율배반적이고 시대와 상황에 따라 파도처럼 출렁인다. 그것의 뿌리는 터무니없이 빈약하다. 심지어 그 <암묵적 협의>라는 것은 어떤 돌발적인 소수자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편의도 제공하지 못하고 오히려 고통과 억압이 되기만 하는 경우도 많은 것이다.
 그러나 기만적 형법에 대한 그들의 숭배를 비난하는 것은 이쯤에서 그치도록 하자. 우리는 결론으로 넘어가야한다.

3.
 그래, 보라. 어디에 진리가 있으며 어디에 길이 있는가? 없다. 어디에도 없고 아무것도 없다. 우리는 죽음을 보증으로 두고 완전한 정신의 자유에 눈이 뜨였다. 자유란 비인간적인 것이다. 그것은 명철한 것이지만 아름답지는 않다. 그것을 씹어 삼키는 순간 모든 <희망의 노예>들이 우리를 향해 돌팔매질을 시작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도로 내려놓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도로 토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세계의 맹목성과 허무와 그리고 사멸을 인지하고 있다. 모든 것이 죽는다면 그 어떤 행위도 구속당하지 않는다. 언제 구둣발 소리와 함께 찾아올지 모르는 사형집행자 앞에서 우리는 완벽하게 개인이며 눈을 뜬 의식이다. 그 순간 우리의 의식은 희망의 노예들이 말하는, 소위 <범죄자의 의식>이 된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우리는 단지 실존의 눈앞을 가리고 있는 독안개와 역겨운 기만들을 걷어내고 싶었을 뿐이다. 사막 위에는 법률도 표지판도 없다. 그저 작열하는 태양과 끝없이 펼쳐진 모래밭뿐이다. 우리는 태양 아래서 외롭고 공허하며, 치명적으로 자유롭고 열광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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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병자의 하루

글/소설 2010. 7. 9. 21:59 |
2010/06/28 완성.
1. 수정의 여지가 많다. 특히 전~중반부. 그러나 한동안은 건드릴 의욕이 나지 않을 것 같다.
2. 오래전부터 내 소설은 조작된 고백록의 성격을 가지는 경우가 잦다.
이런 경향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지금으로서는 판단이 서지 않는다.
3. 어쩌면 <전락>의 패러디 수준밖에 되지 않는 글인 것은 아닐까? 이미 작품 내에서도 그 점을 고백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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