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거기에 없고 여기에도 없고 어딘가에는 있을 것이지만 그곳이 어딘지 지금의 나로서는 전혀 모른다


내가 걸어 돌아온 모퉁이에는
발자국도 남지 않았다
마른 바람이
낙엽마저 지우고
그곳은 빈 웅덩이.

우두커니 선 나의 그림자는
억새처럼 길게 드리운
나무의 그림자를
무뚝뚝이 강간하고 있다.

새까만 쟁반에 얼음 같이 뜬
달만이
동공도 없는 눈동자로
나의 범행을 지켜보고 있을 뿐.

나는 거세당한 강간범
나는 바짝 말랐고
죽은 나무의 껍질처럼
바람에 나뒹굴고 있다

나는 발자국도 없는
눈 뜬 유령.

나는 돌아가지 않는다
어디로도
계속 여기서
홀로 그림자를
사랑한다

가끔 거울이 나타나고 나는 그 거울에서
이상한 표정을 본다 거기에는
무엇인가가 없다

왜냐하면 나는 길을 잃어버렸기 때문이고
길은 나를 잃어버렸고
그리고 너도 잃어버렸다.
Posted by Lim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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