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초현실주의자의 마네킹
글/시 2017. 5. 15. 01:24 |어느 초현실주의자의 마네킹
나는생각하는방법을잃어버린것같다내머릿속에선모든일들이자동기술법으로쓰여진문장처럼활자로연속하여떠올랐다가아무런논의도이루지못하고흩어져버린다
그는 총 18알하고도 두 알이 더해진 알약들을 삼키고 기다렸다. 기다리는 동안 그는 자신의 머릿속에 담겨진 수천 권의 책들과 그 문장들의 혼합된 덩어리를 굽어보았다. 그러나 아무것도 발견해낼 수 없다고 생각한 순간 그는 계시를 받듯이 단 <하나>의 거대한 혼돈을 보았다. 구겨진 이불 사이에서 유기된 시체처럼 썩어가던 그의 정신은 갑자기 경련하듯이 꿈틀댔다. 그는 분명 무언가를 보았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그것은 위대한 것이었으리라는 믿음이 전류처럼 흘렀다. 그러나 천둥번개는 강렬한 소음과 함께 나타났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 없어지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본 것을 정리하기 위하여 노자와 니체 등 어줍지 않은 지식들을 자와 컴퍼스처럼 이용하려고 했으나 이미 너무도 노화된 그의 정신은 제대로 움직여주지를 않았다. 그는 분노에 차서 소리쳤다. 「동물이란!」 그것은 일종의 동경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영원히 녹슬지 않는 무의식으로 가득 찬 기계들의 삶이여! 그는 넘어진 컵에서 쏟아지는 물처럼 벌컥거리며 움직였고 핏발 선 눈은 사납게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그러나 그라는 <인간>은 인간의 존재조건으로 말미암아 너무 녹슬어버렸고 손가락 하나 까딱하는 일에도 젖 먹던 힘까지 쥐어 짜내야할 판이었다. 그러니 생각이라는 것을 정리하는 일은 오죽했으랴! 이미 활자조차 이루지 못하는 그의 정신은 관념적인 이미지만으로 고장 난 신호등처럼 점멸을 반복하고 있었다. 어쩌면 이 모든 정신의 사업들이 단 한 푼의 가치도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회의가 파도처럼 휩쓸려왔다. 실재로 그는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의 가족들은 어디에 있고 그의 친구였던 자들은 어디로 가버렸는가? 마지막으로 책을 읽었던 것은 언제이며 마지막으로 누군가와 제대로 된 대화를 성립할 수 있었던 건 언제인가? 그는 스스로 망각 속에 있었고 그로 인해 아이러니하게도 흡사 영원과 비슷한 것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 비참하다고 말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말도 늘어져버린 녹음테이프처럼 분열된 음절들을 기괴한 소음으로 반복하는 것뿐이었다. <나는 비참……비참……비참하……비……비참……> 구두점을 찍으면 모든 것이 끝날지도 모른다는 희망 비슷한 것도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는 절대로 그럴 수 없었다. 그것은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의식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필멸자이면서 영원과 닮아 비참했다. 아니면 슬플 수도 있었나? 글쎄, 그가 비참하다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도 서술자인 내가 그렇게 말하기 때문이다. 그는 절대 스스로 문장을 끝맺을 수 없다. 그는 가래가 끓는 것 같은 이상한 소리를 내면서 어둠 속에서 움찔거렸다. 그의 젊음과 청춘은 어디에 낭비되어버렸는지? 영화필름 사이에서 한 컷만을 칼로 잘라낸 것 같은 이 장면은 아무것도 제시하지 않고 있었다. 그저 축축한 퇴폐와 절망의 색깔을 한껏 담은 채 완벽하게 정지되어있었다. 이 장면에는 스토리도 결말도 없었다. 저 썩은 나뭇가지 같은 남자를 보라! 저것은 도무지 주인공이 될 수 없다. 이것은 오발탄처럼 잘못 날려진, 아무런 교훈도 의미도 줄 수 없는 잉여의 장면, 곧 누군가가 주워 쓰레기통에 던질 뿐, 그 누구도 주시하지 않는 잘못 만들어진 장면이었다. 그가 계시처럼 느낀 강렬한 이미지도―그러니까 그 혼돈이라고 칭해진 것 말이다― 사실은 시간도 측정할 수 없는 어지러운 일생동안 계속해서 느끼고 잊어버리고, 느끼고 잊어버린 저주 같은 것이었다. 지금 그는 입을 반쯤 벌리고 신음소리를 내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신음소리는 나올 리가 없다. 약 20분 전 삼킨 18알 하고도 두 알이 더해진 약 때문에, 그는 이제 존재를 잃어가고 있었고 건드리면 마치 바늘로 찌른 물 풍선처럼 펑 하고 터질 것만 같았다.
그는 <또 다시> 구겨진 이불 사이로 쓰러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