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차로 앞에서
과거에, 삶을 살아가려면 목적은 없더라도 동기 정도는 있어야한다는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무슨 생각으로 그런 글을 썼는지는 이제 기억나지 않지만, 어렴풋한 감각으로 그때는 동기 같은 것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삶의 발현이란 참 어이없이, 의지도 없이 벌어지는 일입니다. 나의 어떤 것이 세상과 육신을 원해서 벌어진 일인지 알아차릴 새도 없이 생겨나는 일입니다. 그렇게 세상에 떨어지고 헤매고 헤매기만 하다가, 어라, 발자국을 지울 새도 없이 스러져버리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동기를 찾을 시간도 빡빡한 것이 사실입니다.
처음 얘기로 되돌아가자면, 동기는 사실 무엇이 되었든 주변에서 가치판단도 해주지 않습니다. 만약 해주더라도 별 의미가 없습니다. 말 그대로 자신의 삶의 동기이니까요. 남이 뭐라고 하건 귓가에 다가오지도 않습니다. 그야말로 한 발짝 한 발짝 수미산과 같은 무게를 짊어지고 걸어 나가게 하는 유일한 원동력인데, 누가 그것은 올바르지가 않다 합당하지가 않다 하는 소리를 들을 여유도 없는 것입니다. 제 경우에는 살면서 수집해온 불행과 고통을 아름답게 꾸며 여기저기 집어던지는 짓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유쾌한 얼굴을 하고서는, 길가는 사람 면전에 고통을 집어던지는 취미 고약한 짓이 삶의 동기가 아니었던가 싶습니다. 참으로 만년에나 돌이켜볼 수치스러운 삶을 일찍도 알아차리게 되었군요. 사람들과 유대를 갖거나 혹은 불행의 굴레를 해결할 방법도 낯선 일이라, 내가 해결하지 못한 존재의 공허함을 그럴듯한 언어로 묶어 온 세상 사람들이 다 함께 나처럼 바닥도 없는 나락에 추락하게 되어라, 저주 같은 말이나 백지에 새기고 있었습니다.
저번 달이었나요. 살아가지도 못하겠고 그러나 죽어버릴 이유도 못 찾겠는, 제철을 넘겨버린 벌레 같은 마음으로 산사에서 기거할 때, 남동생이 찾아왔었지요. 열 살 가까이 나는 나이차 때문인지 평생 참 예뻐한 아이입니다. 그러고 보니 이제는 아이라고도 부를 수도 없군요. 아무튼 배추밭 옆에서 평생 변한 일 없는 미소를 지으며 터벅터벅, 형, 하며 내게로 다가왔습니다.
무슨 표정을 지어야하지. 아무래도 웃는 게 좋을 것 같다. 그런 생각을 한 것이야말로 이제 심장도 혈액도 죄다 어디다 빠트리고 온 증거로구나. 나는 그냥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입술을 일그러트렸습니다.
이 아이의 형은 도대체 어디로 갔는지.
응, 너무 혼란스러워 기억이라고도 못 할 기억만 있는 어린 시절은 그래도 외롭지 않았다. 가끔가다 단어로도 정의하지 못할 유령 같은 것들이 대낮에 지나다녔고, 태양은 소리가 나지 않았고, 중이염을 앓는 귀는 어머니의 목소리도 제대로 듣지 못했다.
세상의 혼돈이라는 파도가 피부 안쪽으로 밀려들어오던 시절이었다. 외롭지 않았다.
밤엔 자고 낮엔 일을 한다는 것이 참 성스럽다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사람의 정신을 단단하게 두들기는 대장장이 같은 일입니다. 뜨겁게 달궈 망치로 두들기는 정신에는 우울이라는 잡균들이 들러붙지도 못하는 모양입니다. 그렇게 되면 규칙성 있고 사소한 일상들이 강인한 삶의 연속성이 됩니다.
겨울에도 푸르른 침엽수를 보다가 어처구니없는 순정으로 절망에 무릎 꿇는, 그런 이상한 인간이 동경하고 마는 연속성입니다. 애당초 동기도 목적도 필요 없었던 것입니다. 사람이 죽지 않는 일에 필요한 것은, 미래를 가늠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내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과거를 생각하며
밤거리 그림자로 웅성거리고
생명의 기척은 없다, 나는
앙상한 몸을 비척대며
위악스럽게 걷고
그러니까 종말을 망상하는 것이다
가로수의 그림자에도 놀라며
내가 인간에게 저질렀던, 저지를 수
있었던 수치들에 놀라는 것이다
사람답게 살지 못했던
죄스럽기만 했던
패악뿐인 삶이었던
그런 것들을 너무 일찍 알아차린 것이다
연신 줄담배를 물어도 풀릴 리 없는
죄악의 실타래는 내 숨까지 옭아매
앞으로 한 발짝 떼는 일조차
더 깊은 죄악일 듯 싶어 공포스러운 것이다
그래서, 이 멸망한 밤에
종말이 오지는 않으려나, 어린아이 같은
죄를 뒤집어쓴 어린아이 같은
꿈꿀 수도 없는 꿈을 꾸는 것이다
그러나 또 해가 뜨고
그때까지는, 그림자들에게 사죄하고
또 수레바퀴는 돌아가고
갇힌 나는 창문을 두려워하며
햇빛 찬란한 겨울에 죽음을 그려보고
거기에 꽃이나 피지는 않을까 생각하는 것이다.
불가해
가만히 생각해보면 불가해한 세상이다. 아니, 세상까지도 아니다. 나 자신도 불가해한 것이다. 불가해한 내가 세상을 관측하니 세상도 물론 불가해보이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불가해를 불가해하게 만드는 중심에는 자아인지 하는 것이 있다. 일종의 안경 같은 것이다. 모든 것을 더 복잡하고 어렵게 보도록 만드는 안경.
뇌를 소유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커피 다섯 잔째에 나온 발상이다. 카페인이 뇌세포를 활성화시키니 무엇이든 간에 이해하고 납득하려고 하는 바보 같은 경향성이 생긴다. 정리를 좀 해보자. 내가 세상을 난해하게 이해하든 아예 관심을 갖지 않든, 별 관계도 없이 이 겨울날에도 광화문 거리에서는 사람들이 ‘이렇게 나라를 만들자’, ‘저렇게 정책을 바꾸자’하며 숭고한 의지로 플랜카드를 들고 서로를 패죽이고 있다. 이해하려고 하는 순간 난제가 된다. 공산주의는 패망했고 자본주의는 한계점이고, 민주주의라는 깃발을 따라가는데 어느 순간 미로 한복판이다. 그 깃발을 따라가는 사람들도 생각은 가지각색이어 깃발보다 먼저 돌진하는 놈이 있는가 하면 한쪽에서는 곡괭이로 미로 벽을 부수고 있다. 아예 자리를 틀어잡고 앉아 마냥 죽음을 기다리기도 한다. 이것은 그냥 하나의 예인데, 나의 빈약한 통찰로는 이 미묘한 그룹 하나조차 다 어우르지 못한다. 애당초 어우르려고 하는 사고 자체가 하나의 편집증이다. 내가 그들을 각개 이해하여 마치 커다란 카오스이론 같이 된 것을 파악한다 한들 뭘 하겠느냔 말이다. 나의 생활은 그 광화문 거리 근처에 있지도 않다. 그저 오후 한 시쯤 느릿느릿 일어나서 커피를 다섯 잔이나 들이붓다가, 나의 묵직한 책장 앞에서 넋이 나가있는 것이 나의 생활이다. 그러다가 발광하는 뇌세포가 갈 곳을 잃으면 참으로 쓰잘데기 없이 헨리 데이비드 소로와 피츠제럴드 중 누가 더 삶 같은 삶을 살았나 결론도 없는 문제를 망상하는 것이다.
도대체 왜 생각하고 판별하려고 하는 것인가 말이다. 나의 마음 깊숙한 곳을 들여다보면 애초에 나는 그런 것에 별 관심도 없다. 이것도 신기한 일이다. 진심으로 생각하자면 매사에 관심이 없는 내가, 무슨 습관이나 된 것처럼 이것저것 괜히 사고하려고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신문기사를 보면서 거기서 나를 중상모략하려는 어느 종교단체의 암호를 알아내려는 노력만큼이나 무의미하다. 아까 자아에 대한 얘기를 했는데, 自我라는 한자구성이 무색할 정도로 이놈은 내게 연결된 주제에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발악하고 요동치는 성질이 있다. 무언가를 파악하고 규정지으려는 성격이 있는 이놈은 사실 자세히 살펴보면 내게 별 도움이 되는 일을 하지도 않는다. 자고로 내게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내 마음이 고요하고 파도치지 않게 만드는 것이어야 한다. 너무 오랫동안 고통 속에서만 살아온 바, 고통이란 즉 마음이 별의별 문제에 좌충우돌하고 난리를 피우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 자아란 것이 아무래도 뇌에 있는 것 같으니, 뇌를 소유하지 말아야한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뇌를 통과한 것들은 무엇이건 불가해하다. 왜냐하면 대상이 개념화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두가 알고 있듯이, 개념이란 것은 회의하고 회의하다보면 도대체 그 실체를 알 수가 없다. 분명 이렇게 복잡할 리가 없는데, 말했다시피 자아가 난제를 새겨 넣는다. 그리하여 그 어지러움에 분노하게 되고 마는 것이다. 복잡한 사람들이 복잡한 단체를 만들어 복잡한 행위를 하고 복잡한 결과를 내는 것을 보고 있는 복잡한 나에게 화가 나는 것이다. 젠장, 사실 나만 복잡하지 않으면 전부 소멸하는 일들이다.
쓰레기통을 보면서 쓰레기통이라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다보니 이것이 태초부터 쓰레기통이라고 규정지어져 있던 것은 아니니까 정말로 쓰레기통은 무엇인가하고 생각하는 쓰레기통보다 잘날 것도 없는 나는 도대체 어디서 발생하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