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퍼하는 나는 슬픔 자체가 슬픈 존재인가
글/소설 2020. 1. 2. 22:25 |슬퍼하는 나는 슬픔 자체가 슬픈 존재인가
최씨는 쉽게 슬퍼한다. 오늘 아침에는 교복 차림의 소년소녀들을 보고 슬퍼했다. 그들이 발랄했기 때문에, 그리고 곧 그들의 젊음이 탁하게 흩어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젊음이라는 것의 덧없음에 대해 사유해보기도 전에 가로수를 보고 슬퍼했다. 그것이 도시계획에 의해 규칙적인 거리를 두고 일정하게 서있기 때문이었다. 인위성과 무위자연에 대해 저울질을 해보기도 전에 하늘에 구름이 너무 많아서 슬퍼했다. 이쯤 되니 최씨는 자신이 왜 슬퍼하는지도 알 수가 없어서 슬펐다. 그러나 딱히 논증할 것도 없었다. 슬픔은 기억나지도 않는 아주 오래 전부터 최씨의 뇌에 총알파편처럼 박혀있었고, 딱히 해결된 일도 없었다.
그러나 최씨는 누군가에게 자신의 슬픔에 대해 말한 일이 없다. 애당초 서술이 불가능하다. 운명이려니 싶어서 괴로운 것이었다. 자신의 운명을 타인에게 해설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세상과 존재에 대한 엄청난 통찰이 있으면 모를까, 애초에 그런 통찰력이 있다면 슬프지도 않지 않을까. 이런 슬픔은 일종의 장애가 아닌가 싶었다. 도무지 해결되지 않는 정신의 장애 같은 것 말이다.
퇴근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날씨가 추웠다. 바람이 칼날처럼 매섭게 불었다. 물론 어쩐지 슬픈 심상이 되었다. 겨울의 초입은 세계의 냄새 자체가 슬픈 뉘앙스를 풍긴다. 생명이 절멸한 것 같은 냄새가 난다. 그런데 최씨는 그런 발상으로 들어가자마자, 그렇다면 여름의 냄새는 슬프지 않은가, 단연 슬프다. 그 생명이 부풀어 터져 오르다가 부패하는 냄새도 슬프다. 하지만 겨울의 이 무기물로 공기가 가득 찬 것 같은 냄새도 슬프다. 그렇게 중얼거리며 슬퍼했다. 행성 자체가 슬픔으로 가득 찬 것 같다고 조용히 슬퍼했다.
골목으로 들어서 최씨는 담배를 물었다. 담배를 피울 때는 슬픔이 조금 옅어지는 것 같았다. 폐에 독을 밀어 넣을 때는 슬프지 않다니, 그렇다면 생존자체가 슬픈 것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자 자신의 삶의 구조가 슬픈 것 같았다. 그러나 별 도리가 없었고, 너무나 오래된, 망각되지 않는 심상이고, 최씨는 결국 담배를 피우며 어두운 골목으로 터덜터덜 들어갔다.
그런데 그날은 어쩐지 담배가 오래 타는 날이었다. 집의 현관 밖에 서서 여전히 남은 담배를 태우고 있자니 온갖 쓰잘데 없는 망상이 피어올랐다. 생각해보면 내 연배의 동료들은 이미 다들 결혼을 하고 아이도 있거나 하다. 나는 평생을 혼자 살아왔구나. 그것도 늘상 슬퍼하기만 하면서. 빨갛게 타는 불똥이 시야에서, 숨을 들이쉴 때마다 더욱 빨갛게 탔다. 집에 들어가도 물론 혼자다. 혼자 살기에 최적화된 공간에서 나는 혼자 슬퍼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벽지가 하얗다면 흰색에 대해 슬퍼하면서. 왜 흰색 벽지가 만들어지고, 사람들은 그것을 소비하는가에 대해 슬퍼하면서 말이다. 최씨는 담배를 뻐끔대며 시야가 어그러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눈물이 난 것도 뭣도 아니었고, 분명한 것은 최씨의 정신 자체가 슬픔으로 구부러지는 것이었다. 최씨는 가족이라는 개념에 대한 생각을 멈추지 않았다. 아버지는 얼마 전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늙은 채로 홀로 살고 있다. 그런데 그때 깨달은 것은,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느꼈던 슬픔이 하늘이 파란색이어서 느꼈던 슬픔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이었다. 어머니가 노인이 된 채 혼자 사는 현실도, 들고양이가 새벽에 울어서 느꼈던 슬픔과 다를 것 없었다. 담배는 이미 다 탔다. 최씨는 교묘한 어지러움을 느꼈다. 평생 슬퍼하기만 하면서 살아왔으나, 어쩌면 말이다, 나는 사실 살며 단 한 번도 제대로 슬퍼한 적이 없는 것은 아닐까. 그럼 나의 삶을 이토록 지배해왔던 심상은 무엇이었을까.
다 탄 꽁초를 입에 멍하니 문 채 최씨는 한참을 현관 앞에 서있었다. 집으로 들어갈 마음도 어딘가로 뒷걸음질 칠 마음도 없었다. 어느 방향으로 몸을 움직여야할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최씨는 한참을 서있었다.
계절은 여전히 겨울의 초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