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도 거대했던 착각
심장이 멈출 만큼 커피를 마셔댔습니다. 카페인에 깊게 잠기면 어둠은 평소보다 더욱 어둡게 보이는 것입니다. 당장이라도 눈이 돌아가 쓰러질 것 같지만 도무지 쓰러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아, 그러네요. 이것이 제가 살아온 방식이었습니다. 당장이라도 무릎이 터져 넘어질 것 같지만 악으로 오기로 서있었던 것입니다. 처음으로 죽음을 생각했던 것은 언제일까요? 어쩐지 태어날 적부터 저의 후뇌에 죽음이 머슴처럼 빗자루를 쓸고 있기는 했습니다만, 정확하게 죽고자 했던 것은 13살 무렵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때 저는 거리에 있었지요. 집도 절도 없이 거리에서 마냥 걷고만 있었습니다. 한강의 어느 철교 밑 굴다리에 앉았을 때, 그때 저는 생각하고만 것입니다. 죽음이 가장 쉬운 방법이라고 말입니다. 때는 지옥 같은 여름이었지요. 한강의 물결조차 찌는 듯한 더위에 숨이 죽어 아무 소리도 빛깔도 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납덩어리 같은 배낭을 잠시 내려놓으며, 아하, 이와 같이 순식간에 편해질 것이로구나, 그랬던 것입니다. 세상에서 소음이 사라지고, 걷거나 뛰는 시민들의 모습은 유령이나 다름없어 보였습니다. 그때 왜 단박에 죽지 못했는지 그 이유는 도무지 기억나지 않습니다만, 14살이 되어 어렴풋이 이해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어떤 경로로 손에 넣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번역자의 실력이 엉망이었던 것인지 아니면 심지어 중역이었던 것인지, 그런 카뮈의 <이방인>을 읽게 되었습니다. 그로서 저는 13살의 어린 제가 단숨에 죽지 않았던 이유를 설명 받은 것입니다. 죽음은 혼돈에 의해 움직이는 운명이 자애롭게―그러나 가득한 악의로!― 부여하지 않으면 이쪽에서 붙잡을 수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구나, 아무것도 없더라도 살아가고야 마는구나. 그러면서 제 책장은 20세기 유럽이 되어갔습니다. 그것을 제가 자살하지 않는 방편으로 삼으면서 말입니다. 살아가야한다, 살아가야한다, 비록 고통과 악의뿐일지라도, 신도 법칙도 없는 세상에서 저는 피를 토할 듯이 세상에 몸뚱어리를 던졌던 것입니다. 아, 그러나, 그런 삶은 인간이 취할 것이 아니었습니다. 제 영혼에서 도덕이니 규칙이니 하는 것이 도시 위에 쬐는 햇살처럼 순식간에 녹아 사라져갔습니다. 건물과 골목의 그림자 사이로 산산이 흩어져버렸습니다. 저는 이미 인간도 무엇도 아니고, 감각의 덩어리가 되어 부조리와 혼란 속에서 유영하고 있었습니다. 스스로 세상의 악의가 되었던 것입니다! 다가오는 미풍에도 온몸이 박살날 만큼 유약해져서는, 그러나 결코 손톱과 송곳니를 감추지 않는 증오의 현신처럼 살아왔던 것입니다.
그것이 10년이고 15년이고 계속 되었습니다. 믿을 것은 참으로 아무것도 없었던 것입니다. 아무것도 믿지 않은 채 10년이고 15년이고 살았던 것입니다. 그야말로 죽지도 않고. 그러나 ‘억’하는 소리가 나기 직전에, ‘억’하는 소리를 만들기도 직전에, 15년 간 눈치 채지 못했던 삶의 허점을 발견한 것은 도대체 무슨 운명이었을까요? 아무것도 없다면, 미학도 감각도 결코 절대성을 갖지 못한다면, 그런 전제를 가지고서는, 도무지 살아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아무것도 없이 살아간다니, 도대체 죽지 않을 이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제 15년을 지탱해준 것은 사실상 삶의 방식이 아니라 악의와 증오, 그리고 스스로 의미 없는 혼돈이 되려는 몸부림이었던 것입니다. 정신을 차려보니 산중이었습니다. 이 모든 죽음과의 뒤엉긴 춤사위 끝에도 어딘가에 영혼은 남아있었습니다…….
제가 쉬이 절대성이라는 단어를 말할 수는 없을 일입니다. 그런 것은 언어로 하기에는 너무도 불가사의하고 미묘합니다. 그러나 알고 보니 세상도 자아도 너무도 거대한 착각이었고, 우리는 폭풍우 속에서 절규하며 죽으려하는 파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바람이 그치면 파도는 어차피 가라앉을 텐데요. 정말로, 그럴 터인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