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봉오리 속의 지혜

글/시 2019. 12. 17. 22:37 |

꽃봉오리 속의 지혜


꽃봉오리 안에 쓰러지듯이
이 꽃의 색깔을 나는 모르는구나
이곳은 너무 어둡고 답답한 동시에
사실은 평생을 여기서 살아왔다

꽃봉오리 안에도 꽃들은 있어
가지각색으로 빛나는 욕망들
그것의 본질도 모르고
하나씩 따 내 입안에 넣는다

이런 것들은 모조리 후회로 밖에는
남지 않아……

한때 상습 자살미수자가
<부끄러운 생을 살아왔습니다>라고, 그렇게
그렇게 말했지, 그 자는 분명
자신이 수치에 발버둥 칠 것을 알고도 꽃을 먹었으리

필요한 것은 분명히 지혜다
꽃을 먹든, 먹지 않든……중요한 것은
후회하지 않는 지혜인 것이다
당연하게도 지금, 꽃을 먹기를 멈춘 나에게도

꽃의 본질을 알고, 먹거나 먹지 않고
그렇다면 그것은 위대함으로 이어지겠지
후회하거나 수치스러워하는 것은
실상 다 무지의 결과이니

그렇다면 그때, 어느 때가 됐든, 어떤 색깔로 피든
내가 쓰러져있는 꽃봉오리도 산산조각으로 피어날까

Posted by Lim_
:

글/시 2019. 12. 14. 23:09 |




어리석단 말이다, 인간은, 나는……

평생을 희론으로 살아온 나는
어디로 가려고 했나, 어디로?
한 주먹의 이 알약들은
어디로 가느냔 말이다, 어디로

해가 뜨지도 않는 땅이다
그러나 태양도 달도 물리치고
패배하는 일 없이, 오로지 나는
영혼의 수액만을 찾아 마시려고 했다

오로지 온화하게 웃으며
화내지 않고 슬퍼하지 않고
내 가죽을 전부 벗기는 일이 있어도
결코 즐거워하는 일도 없이, 그러나

어리석단 말이다, 인간은, 나는

뇌수에 갇힌 내 무언가
나침반도 없이 절규하고, 통곡하고
무언가 날 마주하고 있어, 무언가
아주 새까만 장막 같은 것

빛은 어디에서 오는가? 이 모든
내 환영들을 송두리째 파괴할
그런 빛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리고
죽음조차 기만이 되었다

가지고, 탐하고, 사랑하고
그런 것은 이제 됐다, 이 겨울
아름다움조차 무언가를 방해하고
나는 비존재에의 열망에 허덕이고

空으로, 空으로, 무조건
마치 돌진하는 창병처럼, 단숨에!
그러나 무언가가 날카롭게 조소하고 있어
두개골 속에서, 감옥의 간수처럼

왜 감각하지?……

어리석단 말이다, 나는, 나는……

Posted by Lim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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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도 거대했던 착각


 심장이 멈출 만큼 커피를 마셔댔습니다. 카페인에 깊게 잠기면 어둠은 평소보다 더욱 어둡게 보이는 것입니다. 당장이라도 눈이 돌아가 쓰러질 것 같지만 도무지 쓰러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아, 그러네요. 이것이 제가 살아온 방식이었습니다. 당장이라도 무릎이 터져 넘어질 것 같지만 악으로 오기로 서있었던 것입니다. 처음으로 죽음을 생각했던 것은 언제일까요? 어쩐지 태어날 적부터 저의 후뇌에 죽음이 머슴처럼 빗자루를 쓸고 있기는 했습니다만, 정확하게 죽고자 했던 것은 13살 무렵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때 저는 거리에 있었지요. 집도 절도 없이 거리에서 마냥 걷고만 있었습니다. 한강의 어느 철교 밑 굴다리에 앉았을 때, 그때 저는 생각하고만 것입니다. 죽음이 가장 쉬운 방법이라고 말입니다. 때는 지옥 같은 여름이었지요. 한강의 물결조차 찌는 듯한 더위에 숨이 죽어 아무 소리도 빛깔도 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납덩어리 같은 배낭을 잠시 내려놓으며, 아하, 이와 같이 순식간에 편해질 것이로구나, 그랬던 것입니다. 세상에서 소음이 사라지고, 걷거나 뛰는 시민들의 모습은 유령이나 다름없어 보였습니다. 그때 왜 단박에 죽지 못했는지 그 이유는 도무지 기억나지 않습니다만, 14살이 되어 어렴풋이 이해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어떤 경로로 손에 넣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번역자의 실력이 엉망이었던 것인지 아니면 심지어 중역이었던 것인지, 그런 카뮈의 <이방인>을 읽게 되었습니다. 그로서 저는 13살의 어린 제가 단숨에 죽지 않았던 이유를 설명 받은 것입니다. 죽음은 혼돈에 의해 움직이는 운명이 자애롭게―그러나 가득한 악의로!― 부여하지 않으면 이쪽에서 붙잡을 수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구나, 아무것도 없더라도 살아가고야 마는구나. 그러면서 제 책장은 20세기 유럽이 되어갔습니다. 그것을 제가 자살하지 않는 방편으로 삼으면서 말입니다. 살아가야한다, 살아가야한다, 비록 고통과 악의뿐일지라도, 신도 법칙도 없는 세상에서 저는 피를 토할 듯이 세상에 몸뚱어리를 던졌던 것입니다. 아, 그러나, 그런 삶은 인간이 취할 것이 아니었습니다. 제 영혼에서 도덕이니 규칙이니 하는 것이 도시 위에 쬐는 햇살처럼 순식간에 녹아 사라져갔습니다. 건물과 골목의 그림자 사이로 산산이 흩어져버렸습니다. 저는 이미 인간도 무엇도 아니고, 감각의 덩어리가 되어 부조리와 혼란 속에서 유영하고 있었습니다. 스스로 세상의 악의가 되었던 것입니다! 다가오는 미풍에도 온몸이 박살날 만큼 유약해져서는, 그러나 결코 손톱과 송곳니를 감추지 않는 증오의 현신처럼 살아왔던 것입니다.
 그것이 10년이고 15년이고 계속 되었습니다. 믿을 것은 참으로 아무것도 없었던 것입니다. 아무것도 믿지 않은 채 10년이고 15년이고 살았던 것입니다. 그야말로 죽지도 않고. 그러나 ‘억’하는 소리가 나기 직전에, ‘억’하는 소리를 만들기도 직전에, 15년 간 눈치 채지 못했던 삶의 허점을 발견한 것은 도대체 무슨 운명이었을까요? 아무것도 없다면, 미학도 감각도 결코 절대성을 갖지 못한다면, 그런 전제를 가지고서는, 도무지 살아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아무것도 없이 살아간다니, 도대체 죽지 않을 이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제 15년을 지탱해준 것은 사실상 삶의 방식이 아니라 악의와 증오, 그리고 스스로 의미 없는 혼돈이 되려는 몸부림이었던 것입니다. 정신을 차려보니 산중이었습니다. 이 모든 죽음과의 뒤엉긴 춤사위 끝에도 어딘가에 영혼은 남아있었습니다…….
 제가 쉬이 절대성이라는 단어를 말할 수는 없을 일입니다. 그런 것은 언어로 하기에는 너무도 불가사의하고 미묘합니다. 그러나 알고 보니 세상도 자아도 너무도 거대한 착각이었고, 우리는 폭풍우 속에서 절규하며 죽으려하는 파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바람이 그치면 파도는 어차피 가라앉을 텐데요. 정말로, 그럴 터인데요.

Posted by Lim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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