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409

기록/생각 2020. 4. 9. 19:28 |

20200409


 그런데 호의를 바라고 있는가? 가족들에겐 미안하다고 생각한다. 그들에겐 선택여부가 없었다. 그들은 나에게 호의를 가지도록 설계되어있었다. 세상에게 배신당하고 지치길 반복하다 결국 도망치듯이 그들에게로 돌아가면, 그들은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날 받아주었다. 그들에겐 분명 불안도 있었을 것이다. 세계 어디를 가도 결국 상처와 외로움만 짊어지고 돌아오는 내가, 그들이 사라지고 난 뒤 과연 생존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그런 불안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난 미래를 생각해보는 능력을 잃었다. 밤새 몸이 차갑게 식은 채 이불에서 일어나, 어쩐지 이상하게 뛰고 있는 심장을 더듬어보다가, 내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깨닫고 호흡곤란에 괴로워하는 아침이 반복되면 미래에 대해 생각해볼 능력을 잃는다.
 그런데 유대를 바라고 있는가? 어쩌면 36.5도짜리 발열기만 있으면 해결될 문제인 것은 아닌가? 아아, 모르겠다. 의사는 내 발작적인 고독에 로라제팜을 증량 처방했다. 15년간 나는 약으로 살아왔다. 약으로 살아왔다는 표현은 조금 이상하다. 병원에 가서 내 인간조건을 사왔다고 하는 편이 오히려 적합하다. 외로움을 명목으로 길 가는 누군가의 심장을 꺼내 먹거나, 스스로의 얼굴 가죽을 실리콘 마스크처럼 벗겨내지 않기 위해, 나는 15년간 신경정신과 대기실의 공기에 너무도 익숙해져왔다. 손목에 붕대를 한 여고생들이 휘적휘적 걸어 다니고, 웅크린 채 자기 자신과만 대화를 하는 사람들이 앉아있는 현실에서 떨어져나간 공간.
 방금 약 봉투에서 약을 꺼내다 커다랗게 슬퍼했다. 기름종이로 밀봉해놓은 봉투를 뜯고 한줌의 약을 꺼내는데, 뜯겨나간 기름종이가 팔랑팔랑 바닥으로 떨어졌다. 말이 안 나오는 슬픔에 중력을 저주했다. 그런데 도대체 왜? 공중에서 춤을 추며 추락하는 그 종이 쪼가리를 보고 나는 무엇을 연상했나? 내가 정신분석가도 아니고, 알 도리가 없다. 그저 그 현상이 너무 슬펐고, 절망해서, 중력에 악의를 느끼며, 각막이 바싹 마르는 것을 느꼈다. 더 이상 살아봤자 무어 기대할 일도 없겠다. 그런 생각을 했다.
 집밖에 나가면 자주 보이는 고양이가 있다. 흰색과 검은색 얼룩무늬 고양이인데, 어쩐지 걷는 자세가 이상하다. 우연찮게 가까운 곳에 있기에 관찰해보았다. 왼쪽 앞다리 관절이 완전히 접혀서 발등으로 걷고 있다. 아마 곧 죽겠지. 마침 옆에 있던 동생은 안타까워했다. 내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다른 고양이들보다 고통스럽게 살다 죽겠지. 불구 고양이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고, 사실은 뭔가를 해줄 의욕도 없다.
 막다른 골목.
 결국에는 잠을 자러 가는 것이다. 수면은 중요한 도구다. 자는 동안에는 내가 존재한다는 것을 까먹게 되니까 말이다. 모든 고통과 불행이 다 존재에서 나온다. 그것을 까먹는다는 것은 안심되는 일이다. 그러나 깨고 보면 나의 뇌하수체에서 분비하는 것들이 바로 지옥의 설계도다. 다시 잠들고 싶어 몸부림치고, 그러나 다시 존재를 시작해야한다.
 일생을 가을모기처럼 살았는데
 겨울이 온다고 죽는 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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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자신이 살아있다는 사실이 거추장스럽다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가 기다리고 있는 고도의 정체가, 평등한 죽음이라면 좋을 텐데. 그렇게 생각하자 어쩐지 정말 그런 것 같았고, 사뮈엘 베케트의 얼굴표정이 바뀌었다.

 “얼굴 좀 펴. 언제까지 기가 죽어 있으려고.” 아버지는 자러가며 A에게 그렇게 말했다. A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각도에 따라서는 웃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는 표정을 지었다. A는 아버지의 발언에 대해 아무런 의견이 없었다. 다만 그 음색에서 자신의 아들을 걱정하는 감정이 나타났기에, 괜히 울 것 같은 심상이 되었다. 뭔가 할 말이 있지 않으려나 싶었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아무 것도 할 말이 없었다. 사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지 않나, 하고 A는 생각했다. A가 우울과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인생을 허비하고 있을 때, 누군가 걱정해주며 어깨에 가볍게 손을 올리는 정도로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지 않나.
 열어놓은 창문을 통해 바깥에서는 왜인지 휘발유 냄새가 났다. 그것은 주유소마다 붙어있는 변변찮고 낡은 편의점의 야간조명을 떠올리게 했다. A는 인적도 차도 없는 거리의 그러한 야간조명을 볼 때마다 자신의 정서에 장애가 있다는 것을 실감하곤 했다. 그래서 그는 창문 앞에 서서, 초봄의 서늘한 바람이 끌고 온 휘발유 냄새를 맡으며, 오늘 밤에는 죽자고 결심했다.

 널 도와주려는 사람들은, 결국엔 모두 널 증오하게 돼. 응, 네가 더 잘 알지.

 한 2년 전이었을 겁니다. 직장인인 친구가 어떤 여자에게 반했는데, 그 여자가 중증의 기분장애를 갖고 있었다는 끔찍한 상황이 발생한 것은. 저는 몇 번이고 친구를 설득했습니다. 네가 정신과 의사가 아니면 그런 사람들과는 아예 접촉도 하지 말라고 말입니다. 기분장애나 정서장애를 앓고 있는 사람과 유대관계가 되는 건 손잡고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친구는 그 여자를 도와주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거의 조소하다시피 부정했습니다. 그녀가 의존이라는 이름으로 네 영혼에까지 독을 퍼트릴 것이라고 했습니다.
 3개월이나 지났을까요. 친구는 정신이 흉터투성이가 되어서 비로소 포기했습니다. 뭐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는 정상적인 인간관계를 맺을 줄 모릅니다. 자신의 고통에 골몰해서 현실이 도무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누가 우릴 도와주겠다고 다가오면, 항상 익사하기 직전인 우리는 그들의 등과 어깨를 짓밟고 수면 위로 가쁜 호흡을 하러 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를 도와주러 온 사람들은, 상처받고 우리를 증오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봐, 아카시아 꽃이 피었네, 벌써 봄이야. 어떻게든 또 1년, 살아야겠네.
 꽃들에게 피지 말아달라고 부탁할 수는 없을까.

 A는 골목 구석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다. 사실 담배 같은 걸 살 돈은 없지만, 얼마 전 어머니가 돈을 주기에, 어리석은 곳에 돈을 쓰기 전에 전부 담배로 바꿔버렸다. 그 담배를 피우면서 자신이 사는 음습한 동네를 둘러보고 있다. 몇 달 전인가 동네에 어울리지 않는 신축 멘션이 지어졌다. A는 그 건물을 볼 때마다 어리둥절해하곤 한다. 사방이 붉은 벽돌로 지은 오래되고 지저분한 빌라뿐인 동네에 검은색과 흰색으로 세련되게 지어진 건물이 신기한 것이다. 누군가 들어와서 살긴 살겠지. 보다 돈이 좀 있는 가정이 들어와서, 보다 돈이 좀 있는 다툼과 원망을 건물에다 새겨놓겠지.
 가족들은 전부 자고 있다. A는 새벽마다 담배를 피우면서 골목을 돌아다니는 것이 일과다. 다만 사람들과 마주치는 것은 무섭기 때문에 인적 없는 곳만 골라 다닌다. 술에 취한 젊은이들과 길에서 마주치는 것이 최악의 상황이다. 그들의 발랄하고 활기찬 생명을 목도하게 되면, A는 당연한 듯이 숨쉬기가 힘들어지고 머릿속이 엉망진창이 돼 그대로 굳어버린다. 그러면 젊은이들은 A를 향해 이상한 눈길을 보내고, 그제야 A는 도망친다. 그리고 곱씹는 것이다. 고작 그런 걸로 패닉에 빠지다니, 멍청하게, 그 젊은이들은 날 정신병자라고 생각했겠지…….
 모멸감이 극에 달할 때 즈음이면 집으로 돌아간다. 계단을 한발 한발 올라가면서, 이런 일을 다시 당하느니 차라리 죽어버리자, 중얼댄다. 그러나 아까도 휘발유 냄새 덕분에 자살을 결심했었는데, 이런 결심은 계속 쌓이기만 하는구나. 자학의 마음은 하루하루 깊어진다.
 A는 정신을 마비시키는 약을 한 움큼 삼키고 잔다. 다시 밤이 올 때까지, 강제로 정신병동에 입원당하는 등의 악몽을 꾸며 잔다.

 계속 구르는 바퀴 같은 삶이기에, 이걸 멈추거나 탈출할 방법은 없나, 하염없이 주춤거리고, 결국 생각하는 것은 바퀴를 부수는 일. 바퀴를 부수는 걸 꿈꾸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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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인킬러

기록/생각 2020. 3. 23. 18:34 |

페인킬러


 글쓰기는 항상 나의 진통제였다. 타인의 삶을 살아본 일은 없지만, 같은 또래의 친구들과 함께 자라면서 느낀 것은 내가 너무도 고통스러워한다는 것이었다. 비슷한 상황에 처해도 나는 남들보다 더 커다란 고통을 느꼈던 것 같다. 그것은 대체적으로 고통과 전혀 상관없다고 여겨지는 대상이나 상황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나의 삶이란 노을을 보면서 행성의 운행을 저주하고 새벽녘에 자살을 바라는 식으로 반복되었다. 한강 다리의 난간에 붙은 자살방지문구들은 내게 더 없는 분노와 절망을 안겨주었다. 내게 세상은 고통과 슬픔으로만 가득 찬 악의적인 연극무대였다.
 그러니 무언가 필요했던 것이다. 무슨 음식을 입에 넣어도 모래를 씹는 것 같고 숨만 쉬어도 폐부가 난도질당하는 것 같은 삶에, 당장 이 모든 것을 끝내지 않기 위한 방편이 필요했다. 왜 삶을 지속해야하는 지는 잘 모른다. 다만 나는 내게 깃든 생명이 내 관리 하에 있는 것이 아니기에, 이것이 억지로라도 나의 인생을 지속시키려한다는 사실만은 안다. 어느 끔찍하게 절망스러웠던 15살의 밤에 자리에 누워, 어둠에게 내가 자살하지 않아야 할 이유를 세 시간이나 지껄이던 것이 내 혀가 아니라 생명력의 혀였다는 것을 아직도 기억한다. 왜 살아야하는 지는 모른다. 다만 살아가도록 설계되었다.
 그러니 더욱 진통제는 필요했다. 독서에 미쳐 살던 10대에 읽었던 문학작품들의 대부분이 어느 누구도 행복한 결말을 성취하지 못하는 내용이었던 것을 기억한다. 그런데 그것이 오히려 위안이 되었다. 기계장치에서 내려온 신 따위는 그 어디에도 없고, 인간은 부조리와 비극에 처참하게 압도당한다. 세계는 혼란스럽고 무작위하다. 그런 이야기들을 하는 책들이 내 마음을 가라앉혀주었다. 왜였을까? 아마도 그런 세계관이야말로 이미 나의 세계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행복 따위를 결코 기대하지 않는 것이 나 자신의 정신을 방어하는 방법이었을 법하다. 아직도 행복한 환경에서 건강한 정서로 자라는 아이들을 보면 증오와 절망을 동시에 느낀다. 그것은 내가 아는 세계에 포함되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왜 글을 쓰게 되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처음부터 나의 이야기들은 구원도 희망도 없는 이야기들이었다. 10년 넘게, 나는 아주 불쾌한 글들을 써왔다. 원리적으로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사람들이 보고 싶지 않아하는 세상의 불행과 비극, 존재의 존재성 자체로 인해 발생하는 고통, 잘못 태어나버린 인간들…… 그런 것들이 주로 나의 소재였다. 특히 인간사회에서 아무도 바라지 않고 배척할 뿐인 괴물성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들에 대하여, 아무에게도 그 생명을 축복받지 못하지만 거의 악의적으로 생존하고 있는 존재들이 있다는 것을 독자들에게 강조하곤 했다. 천부인권이라는 것은 계약조건에 맞는 인간에게나 내려지는 것이 아니냐고 분노하고 소리 질렀다. 항상 타인에게서 거부당하거나 기괴한 인물로 인식되던 내 경험이 더욱 그렇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확실히 진통제로서의 효과가 있었다. 호흡곤란이나 심인성 흉통이 올 때마다 나는 신경안정제보다 먼저 글쓰기를 찾았다. 당장이라도 경동맥을 뜯어내버리고 싶다는 충동도 글을 쓰고 있다 보면 잦아들었다. 그것이 10년 15년, 그러다보니 어쩐지 나는 글을 <잘> 쓰게 되었다. 많은 독서량으로 마구잡이로 쌓아둔 작문 지식들이 십년 넘게 괴팍한 글들을 쓰는 동안 정리된 것이다. 그런데 그러자 이젠 다른 문제가 생겼다. 글을 <잘> 써야 한다는 문제였다. 나 자신의 진통을 위해서 신경계를 마약성 진통제로 융단폭격 하는 것 같은 글은 세련되거나 그럴싸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제 나는 <좋은> 글을 써야한다. 물론 이것은 좋은 일이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마침내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은 것과 같다. 독자의 정신 상태를 불쾌하게 만드는 글들은 이미 충분히 써버렸다. 나는 지금 오랫동안 손에 익은 도구는 들었지만 난데없이 사막 한 복판에 버려진 기분이다. 무엇이 좋은 글일지, 그 누가 알겠는가. 다만 경험으로 알게 된 것인데, 증오와 절망에서 솟아난 글들은 오로지 증오와 절망을 전달할 뿐이다. 최근 과거에 읽었던 문학작품들을 다시 읽어보았다. 아무리 끔찍하고 혼란스러운 내용에 처절한 결말을 담은 글들이라 해도, 공통점이 있었다. 그것은 타당한 인류애였다.
 인간에 대한 사랑이 보이지 않는 책은, 단 한 권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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