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정리

기록/생각 2020. 2. 26. 00:16 |

마음정리

 

 

오늘은 중학교 동창을 만났다. 애당초 내가 외로움에 취해 중학교 동창들 전부에게 연락을 걸어 간신히 만든 약속이었다. 요즘 시끄러운 전염병 때문에 사람도 없는 길거리를 담배 뻑뻑 피우며 지나가, 역전에서 동창과 만났다. 어느새 동창이 어른의 눈을 하고 있구나, 하고 느꼈다. 중학생 때는 눈이 좀 더 맑은 갈색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네가 회사에 자리 잡은 게 몇 년 째지? 3년이 넘었다고. 그래, 이렇게 되는 법이구나. 그러나 유감일 것도 없었다.

 

이봐, 결국엔 시대를 타느냐 마느냐 하는 거야. ? 누가 했던 말이야?

 

중학교를 졸업하고 난 고등학교에 가지 않았다. 중학교도 온갖 폭력사건이나 사고의 중심에 있었기 때문에 졸업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한 가지 예로 지금도 중학생 시절 동창들을 만나면, 그들이 재미있는 옛날 얘기랍시고 꺼내드는 것이 내가 수업 중에 선생에게 의자를 집어 던졌던 사건이다. 그런데 난 머릿속에 그 기억이 전혀 없다. 동창들이 하나 같이 그 얘기를 꺼내는 것을 보면 분명 일어났었던 사건인 것 같은데, 나에게는 전혀 기억이 없는 것이다. 아무튼 그런 식이었다. 내 학창시절이라는 것은. 부수고, 때리고, 책상을 뒤엎고, 증오하고……. 그렇기에 당시 내 주치의는 고등학교 진학을 말렸었던 것이겠지. 그때부터 친구들과 전혀 다른 인생의 궤를 돌기 시작했다. 한 여름 마포대교 밑에서의 삶은 끔찍했다.

 

무슨 이렇다 할 일이 있었던 건 아니에요. 사람이 너무 일찍 실패하는 데에 이유 같은 건 없는 모양인가 봅니다. 딱히 목숨이 아까운 것도 아니지만, 저녁에 한강에서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하면, 이렇게 끝나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도대체 왜 뜬금없이 캘리포니아에 있었지? 지금도 이유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웨스트우드에서 가장 싼 다인용 숙소를 잡고, 거의 먹지도 않으며, 아무 연고도 없는 타국에서 멍하니 살았다. 식사는 3일에 한 번 했던 것 같다. 가까운 마트에서 파는 냉동 부리토는 맛이 아주 끔찍해서, 거기서 사귄 친구에게 빌린 중국산 고추양념을 퍼붓듯이 해야 겨우 목을 넘어갔다. 낮에는 주로 로비(호텔 등의 로비를 생각하면 로비라고 할 수도 없는 공간이었지만)에서 멍하니 앉아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장발의 브라질 남자가 내게 인사를 걸어왔다. 얼굴에는 그 어떤 악의도 보이지 않았다. 아니, 사실 인간이 가져야할 가장 기초적인 악의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가 내민 파이프를 그렇게 쉽게 피웠던 것 같다.

 

너는 항상 행복해보여, 파블리시오.

나는 3분마다 이걸 피우니까. 자유로워지는 데 필요한 건 돈이나 권력이 아니야…….

그럼 우리 다 같이 웃자고. 옆방의 세르비아 친구들도 데려와. 다 같이 연기처럼 웃어보자고.

 

그러나 지나가보니 모두 환상. 시간은 손가락 사이를 지나가는 개울물처럼 스쳐갔다. 귀국한지 2개월이 지났을 때에 느닷없이 코트 주머니 속에서 나온 마른 식물 줄기는 정신을 멍하게 만들었다. 이것 때문에 내 온 인생이 감금될 수도 있었어. 고작 3시간의 해방 때문에. 웃음이 나왔다.

중학교 동창은 어느새 어른이 되어있었다. 술이 들어갈수록 방언처럼 터지는 그의 말마디들은 더 이상 옛날의 그것과는 같지 않았다. 그의 어머니가 얼마 전 중병에 걸렸다가 회복했다는 얘기를 하곤 했다. 그때부터 가족을 위해 일하고 살아가는 것 같다는 얘기를 했다. 나는 얼마 전 아버지가 녹내장에 걸렸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의 나를 회상했다. 아버지에게 안대가 어울릴까 하는 생각이나 하고 있었다. 실소가 흘러나왔다.

 

그런데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거야? ? 시간조차 망상인데. 남은 것은 결국 시간도 초월한 괴로움뿐이지 않느냐 말이야.

차라리 죽어도 괜찮다면…….

 

동창은 지하철로 걸어 들어가는 마당에, 내가 전과 다름없이 여전해서 기쁘다고 말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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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의 기억

글/소설 2020. 2. 4. 19:53 |

동생의 기억


 형 주변에 항상 신기한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을 기억한다. 늘 악기 케이스를 등에 매고 다니는 사람무리라든가, 볼 때 마다 줄담배를 물고 있는 더벅머리를 한 남자들이라든가 말이다. 형과 나는 십년을 훌쩍 넘기는 나이차가 있어서, 형은 동생이라기보다 조카쯤 되는 아이를 데리고 다니는 기분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분명 형이 나를 같은 핏줄로서 아낀다는 것은 당시의 어렸던 나도 느낄 수 있었다. 당시 형의 직업이 도대체 무엇이었는지는 지금도 알 수 없다. 일정하게 출퇴근을 하는 것도 아니었고 한량처럼 부모님에게 돈을 꾸지도 않았다. 다만 일주일에 몇 번인가 집에 돌아오지 않는 밤이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으레 대낮에 집 앞의 평상에서 담배를 피우다가, 당시 여덟 살이나 됐을까 싶은 내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낸다. 지폐 몇 장을 내밀면서, 담배 하나랑 너 먹을 과자 사와라, 하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내 어린 시절의 군것질 값은 전부 아버지나 어머니가 아닌 형이 내주었다.
 이따금, 주로 여름이었던 것 같은데, 산보하기 좋은 저녁이면 형은 나를 데리고 신정동에서 크게 원을 그리며 돌아다녔다. 노을 때문에 벽돌담들의 그림자가 길어진 골목에서 왼손은 호주머니에 넣고, 언제나처럼 담배를 피우며 형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지 알 수 없는 그 얼굴로 느릿느릿 걸었다. 너무 느려서 내가 답답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골목을 걷다보면 꼭 어느 집의 지하실로 들어가는데, 지하실에는 조악한 드럼세트나 낡은 앰프 같은 것들 주변에 때가 탄 매트리스가 깔려있다. 형의 친구들 중 몇몇은 저녁마다 그곳에 둘러앉아, 도대체 연주하는 걸 본 적도 없는 통기타들을 벽에 세워두고 막사발에 소주를 마시며 늘 뭔가에 대한 논쟁을 펼치는 것이다. 나와 형이 지하실에 들어가면 다들 반기곤 했다. 그들은 내 친척이라도 된 것처럼 나를 예뻐했는데, 내가 그 아저씨뻘의 형들과 장난을 치는 사이 형은 술자리에 끼어 꼭 두어 잔씩만 마시면서 친구들과 무슨 얘기인가를 했다. 무슨 얘기였는지는 들은 바가 없다. 그저 어린 마음에 우리 형이니까 뭐든 간에 중요한 얘기겠지, 했을 뿐이다.
 그 뒤에는 지하실을 나와 또 걷고, 공원이나 공터에서 다른 친구무리들과 비슷한 일을 반복한다. 형은 신정동 어딜 가도 항상 친구가 있었다. 어딜 가나 친구들이 형을 반기고, 나는 그런 형의 어린 동생이라는 이유만으로 귀여움을 샀다. 산보는 언제나 집근처의 대포집에서 끝났다. 마지막으로 들르는 그 대포집에는 형의 친구가 아니라 아버지가 있었고, 얼큰히 취한 아버지가, 막내가 왔구나, 이제 집으로 갈까, 하면 나는 아버지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며 아버지가 마신 것을 계산하는 형을 뒤돌아봤다.
 출근도 하지 않고 매일 평상 위에서 담배만 피우며 앉아있던 형이 도대체 무슨 수로 항상 푼돈이나마 있었는지, 어렴풋이 짐작이 가는 바가 있다. 그러나 직장을 짐작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형이 무얼 하던 사람이었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당시에도 여기저기 떨어져있던 힌트들을, 이제 어른이 되어서야 짜맞춰보는 것이다. 내가 열 살이 되던 날, 헌병이 들이닥쳐 형을 데려갔고, 그 뒤로 동네에서 형뿐만이 아니라 형의 친구 몇 명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 전날 밤에는 드물게 형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거실의 수화기 너머에서 뭐라고 하는지는 알 방도가 없으나, 잠결에 열린 문틈으로 나는 형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 사상전파라고, 편집 담당이 가장 죄가 크니까, 나만 도망가지 않으면 되겠지.
 그 뒤로 형을 본 일은 없다. 형을 잡아간 헌병들은 그런 사람이 있었다는 것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니 무슨 죄목으로 잡아갔는지도 알 수가 없다.
 그리고 수년 뒤에 뭣 때문에 언론이 통제되니 신문이 검열되었다느니 큰일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형은 여전히 존재한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 사람은 나의 짧았던 10년 속에만, 말이 없고 발걸음이 조용하던, 나이 많은 형으로 기억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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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살이

기록/생각 2020. 2. 3. 17:57 |

겨울살이


 아무래도 슬퍼하는 것이 내 평생의 과업인가 싶다. 돌이켜보자면 쓸쓸하면서 약간은 가슴이 아픈 이러한 심상에서 나는 일생 벗어나본 일이 없는 것이다.
 오늘은 카페에 가는 길에 아파트 창문에 걸린 현수막을 보았다. 사설 어린이집의 현수막이었는데, 그 어린이집 이름은 꿈쟁이 어린이집이었다. 물론 작명가는 아무 생각이 없었겠지. 그러나 과연 어린아이들은 미래에 대한 꿈을 꾸는 것인가. 그 꿈은 언제까지 날개가 돋아 있다가 수억 차례의 절망과 싸우거나 뜯어 먹히거나 하는 것인가. 아이들이 무구한 희망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싫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내가 이미 꿈도 미래를 기대하는 기력도 과거에 놓고 온 산송장이라고 생각하는 것만 같다. 그리고 2월의 겨울바람은 코트 안으로 마구 침입해 들어왔기에, 나는 진흙을 입에 문 것 같은 기분이 되어 카페에 가는 것을 그만두고, 캔커피나 하나 사서 집으로 돌아갔다.
 슬픔과 우울은 항상 이런 식으로 기척도 예고도 없이 잠입해 들어온다. 뱀이 되고 싶구나. 땅 위에 발자국을 남기지 않는 뱀처럼 살아가고 싶다. 게다가 그 냉혈동물이라면 세상만사에 괴로워하며 마른 침을 삼키는 이상한 존재가 되지도 않겠지. 생각해보면 어떻게 슬퍼하든 광란하든 살아간다는 것은 발자국을 남길 수밖에 없기 때문에 슬픈 것일 터다. 분명 내가 만나왔던 사람들의 마음에 이상하고 불쾌한 흔적을 남겨놨기 때문에.

 망각을 죄로 아는 종족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에, 발밑의 행성이 거대한 무덤이라는 것을 기억해서, 죽지 못한다.

 담배꽁초를 버릴 때, 필터가 썩지 않는다는 것이 슬퍼. 내가 죽고 나서 몇 백 년이 흐르더라도, 누군가가 필터를 보고 생각할 거란 말이야. 담배 같은 것에게 의지하던 놈이 있었구나.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술버릇이 하나 있습니다. 술에 취했을 때만 아름다운 꽃봉오리 같은 인간애가 가슴에서 피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버지에게는 그리 거추장스러운 일이 아니었겠지요. 그는 원래부터 사람을 사랑하며 성실하게 살아가는 사람이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밤의 길거리에 노란색 가로등이 켜지는 것만 봐도 억울함에 눈물을 흘리는 나는, 이것이 마치 꽃잎에도 가시가 돋은 괴기스러운 장미 같습니다. 혼자 술잔을 몇 차례 비우면 비틀거리며 불 꺼진 안방으로 가, 그림자 밑에서 자고 있는 가족들을 바라봅니다. 그러면 나는 그들에 대한 애정이 갑자기 내 안에 피어나는 것에 당황하여 스스로의 이마를 쓰다듬으며, 죽어버릴까, 사랑 같은 건 모르겠으나 저들의 사랑에 기생하여 살고 있는 나 같은 놈은, 하는 것입니다.

 어느 가게 앞에 앉아있는데 아이가 하나 지나갔다. 겨울이라서 두꺼운 옷으로 몸을 꽁꽁 싸매고 있었다. 혼자 거리를 나다닐만한 나이가 아니었다. 왜 혼자 뛰어다니지, 했는데 뒤쪽을 보니 마찬가지로 두꺼운 옷을 입은 젊은 어머니가 따라오고 있었다. 아이가 아무리 뛰어다녀도 서로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아이가 마구 뛰어다니다가, 갑자기 하늘로 휙 증발해버리지 않을까 하는 불안을 가진 것은 세 사람 중 나밖에 없었다.
 나는 안도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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