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애
세상이 겨울안개 가득 먹어서 도무지 눈앞이 보이질 않습니다. 안개는 구름과 같으나 저의 온몸을 덮고 감각기관조차 성하지 않게 만듭니다. 눈이 내립니다. 눈이 내릴 때면 늘 하늘을 보곤 합니다. 하늘이라는 것도 도대체 보이지를 않는 것입니다. 여름철 대낮의 하늘을 상상해보십시오. 그 푸르름은 도대체 어디에서 왔는지, 그러나 겨울이 되면 푸름조차 잿빛으로 잠을 자는 것입니다. 사방팔방이 잿빛이어서, 아무도 없는 자리에서 담배를 하나 태우는 것입니다. 담배를 피우다 연기가 잘못된 관으로 스며들어가면 구역질을 하다가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어찌 됐든 우리는 살아가야하지 않겠습니까. 눈이 내리든 내리지 않든 그것을 머리 위에 가득 쌓으며 그래도 할 일을 하러 갑니다. 어둠이 내릴 때까지……. 사람들은 행복을 찾고 즐거움을 찾으며 저 멀고먼 도시에서 쾌락을 계산하고 있겠지요. 그러나 잿빛 눈이 내리는 이 자리에서 멀고먼 도시를 한 번 생각해보고 나면, 그들은 밑바닥에 닿을 리 없는 절벽으로 희희낙락 돌진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산에서 그들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에게 인류애가 없다는 이유로 눈물도 없는 울음을 지을 것 같습니다. 그들을 사랑할 수 있었더라면 더할 나위 없었겠지요. 그러나 75억 인류가 단숨에 사라지든 서울 사람들이 단박에 절명하든 제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으로 글을 쓴다는 것도 아이러니와 고통이지요.
그래요, 저는 알고 있습니다. 온갖 부조리와 불행에도 불구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이만이 위대한 작품을 쓸 수 있습니다. 생각해보자면 저는 출발점에서부터 잘못된 방향으로 마구 뛰었던 것입니다. 도무지 사람을 사랑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늘이 잿빛이면 잿빛인대로 침잠하고 그저 앉아만 있었습니다. 잿빛 하늘 아래 순진무구한 자가 죽음을 맞는 것을 반개한 눈동자로 바라보고만 있었습니다. 아아, 사랑이라니, 왜 그것이 제게 없었을까요. 서정이라느니, 고백이라느니……. 그런 것을 진심으로 내어 사람들에게, ‘아, 그렇습니다, 당신들을 사랑하지 않고서는 배길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었더라면, 저는 그 오랜 시간을 텍스트의 미궁 속에서 헤매지도 않았겠지요. 그러나 저는 지금도 묻는 것입니다. 도대체 왜? 도대체 무슨 이유로 당신들이 존재할 정당성이 있단 말입니까? 인간의 몸을 하고 인간의 영혼으로 혼자서 중얼중얼 모독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래도, 하나의 희망은 있기 마련인 것입니다. 온 세상 인류가 모두 절멸해도 저는 저의 어린 남동생만은 살아있기를 바라기에, 이것에 힌트가 있는 것입니다. 같은 유전자를 가진 활발한 그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에, 저는 당신들을 사랑할지도 모를 실낱 같은 희망을 품고는 하는 것입니다.
예, 솔직하게 말하자면, 제가 당신들을 사랑하고자 하는 것은 당신들을 사랑함으로서 위대한 작품을 써낼지도 모른다는 희망 때문입니다. 아니, 그것은 희망조차 아닙니다. 경험주의적으로 생각해볼 법도 합니다. 지금까지 생을 살며 단 한 번도 당신들, 인류를 사랑해본 일이 없었기에, 제가 써왔던 작품들은 모독과 증오의 결정이었지요. 그러나 만약 하나의 힌트로 말미암아 당신들 인류를 사랑할 수 있게 된다면, 저는 도스토옙스키처럼 위대한 작품을 쓸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비난하거나 지적하는 것을 전부 받아들일 각오가 되어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저는 아직까지도 인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몸과 인간의 영혼을 가지고도 저는 도무지 인간이 되지 못했습니다. 길을 가다 쓰러진 노인을 보고도 저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습니다. 동정이요, 공감이요, 물론 말하자면, 저는 몇 번이고 걸인들에게 밥을 사주었으나, 이미 죽음이 확정된 이들에게는 아무것도 주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것이 인류에게 그대로 적용되었습니다. 당신들은 이미 자신의 죽음을 결정했으니, 내가 상관할 바는 어디에도 없다. 그러나 생각하고 생각할수록 사랑해야만 하는 것이었습니다. 불합리해도, 부조리해도, 스스로를 죽음으로 몰아넣고 있더라도, 인간의 보편성을 사랑해야만 하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저 또한 인간이 되어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길가에서 쓰러진 노인은 심장이 마비되어 죽어가고, 하늘은 잿빛이었기에, 그렇기에. 그래서 한참을 잿빛 하늘을 보곤 했습니다. 잿빛 눈이 떨어져 내리는, 잿빛 하늘을 말입니다. 그리고 언젠가 인간을 모두 사랑할 수 있으리라는 원을 가지고, 지금은 이렇게 어둠 속에서 잿빛 담배연기를 피워내고 있습니다.
겨울안개
밤이 겨울안개로 가득 차면
나는 희희낙락하여 오로지
해가 결코 뜨지 않을 줄로만 안다
시각은 쓸모가 없고, 더욱이
내딛는 발도 절벽 끄트머리를 걷는 듯
내 오감은 불확실의 포로가 된다
그런데 왜 이리도 기쁜 것인지
어디선가 위협적으로 산짐승 울고
이런 밤에, 나는 밟혀 죽은 독사를 기억한다
어둠과 안개가 먹어치운 다리를
쭉쭉 내뻗고, 한 발짝만 잘못 딛었다간
그래, 그 독사처럼 길을 잃고
단숨에 죽어버릴 것이다
보이는 것은 없고, 안개 위엔 먹구름
나는 무슨 이유에선지 희희낙락한다
소리도 모조리 죽었어, 나는 이제
혼돈과 비실재 속에서 방황한다
내가 볼 수 없을 때 세계가 어떻게
요동치고 진동하며 천변만화하는지
보이지 않기 때문에 결코 알 도리는 없다
그러므로 나는 멍청한 다리를 쭉 뻗고!
땅 밑으로의 추락사를 바라는가?
아니면 차라리 내 영혼이 추락사할 것인가?
아니야, 물론 그렇기도 하지만
사실 나는 세계가 형체 없어지는 일에 기쁜 것이다
고로 나도 형체 따위는 없고
겨울안개 속에서 내 몸뚱어리는
안의비설신의도 안개에 두들겨 맞아 죽었다
그러므로, 그런 고로
축축한 어둠 속에서 비실재하는 다리만 쭉쭉 뻗는다.
암막 같은 희망
새까만 하늘의 별들은
빛나는지 빛나지 않는지
고라니들은 모습 숨긴 채 뛰어다니고
인간의 힘은 언제나 불행이었다
자신의 불행이든 타인의 불행이든
사람은 비극에서야 어지러이
빛을 품는데
그러나 도대체 어째서?
저 멀리 도시에서는 분명
오늘밤도 그 비극에 취한 걸음들이
길가에 떨어진 동전을 줍듯
삶의 파편들을 주워 모으고 있겠지
그러나 그것은 몹시도 슬프고
나 역시 그 속에 있었고
어둠은 물러날 줄을 모르고
모두가 그 안에서 맴돌고
그러다가도 너의 창백한 팔을 보고
나는 산길을 올랐던 것이다
그러면 너는 온화한 웃음을 보이고
나는 아무도 모르게 담배를 피웠던 것이다
그러나 동전 줍듯이 모아 만든 빛들도
시간에 따라 흩어져버리고 마는 것이다
절벽 위에서 죽음을 결심했던 마음도
한낱 망념으로 화해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지금 나는 그때 그 산에 있지 않고
여전히 수풀 속에서 연기를 뿜지만
너와 함께 있지는 않은 것이다
너의 창백한 팔도 어디론가, 가버렸고
불행을 곱씹다가 홀연히
빛을 찾아 나서야겠다고
먹먹한 마음으로, 인간마저 떨치려고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