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광란과 두 사람

글/시 2014. 10. 8. 04:23 |
밤의 광란과 두 사람


괴로운 과거를 돌이키는 것은
그만 둬, 네 현재를 더 괴롭게 만들 뿐이야, 라고
늙은 어른이 말했다. 그는 아내와 함께
몇 명의 아이들을 갖고 있고, 직장에서 빠짐없이
일하는 것은 아버지가 되어버린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고 당연한 것이라고 중얼거렸다.
늙은 소년은 그의 말을 듣고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과거고
언제부터가 현재이며 미래는 어느 방향에서 오는지
잊어버린 지가 너무 오래됐어요. 생각해보니
전에 만났던 심리치료사가 우리는 당신을
결코 고칠 수 없으니 다른 병원을 찾아보라고
친절한 혀로 말했던 기억이 나는군요. 하지만 나는
머리가 좋습니다. 주로 늙은 어른들과 만나면서
그들의 표정과 낡은 치아 사이로 흘러내리는 타액을
한참이나 연구했었죠.

현대 약학의 노예가 되지 않으려면 네 정신을 개조해야해
너는 슬픔을 떨칠 때 어떤 방법을 쓰지? 늙은 어른이 물었다.
주로 신경안정제와 항우울제, 그리고 알코올입니다.
그때 늙은 소년은 사무실 벽을 재빠르게 기어가는
한 마리의 바퀴벌레를 주시하고 있었다. 십 년 전에는
달랐어요. 그때는 약이나 술을 먹지 않았죠. 그때 저는
우는 방법도 모르는 멍청한 아이였기 때문에
슬픔을 해소하는 방법이 실재하리라는 상상조차도 하지 못했답니다.
사실 슬픔이나 고통이 무엇인지도 몰랐어요. 왜냐하면
그들은 제가 기억하는 가장 깊은 기억 속에서조차도
내 살점과 내장의 일부인 듯 친근하고 항상 당연하게도 뼈를 아프게
만들었거든요. 정말이지 뼈가 썩어 들어가는 것처럼 아팠어요.

네가 기억하는 가장 행복했던 시절을 떠올려봐. 늙은 어른은
마치 늙은 어른처럼 말했다.
늙은 소년은 입을 벌린 채 한동안 멍하니 허공을 쳐다
보았다. 그의 손은 향정신성 약물의 금단증상 때문에
폭발하기 직전의 자동차 엔진처럼 자꾸만 벌컥벌컥 쏟아졌다.
사랑이라고 부를 수 없는 사랑을 했었어요. 늙은 소년이
머뭇거리면서 내뱉었다. 왜냐하면 망가지고 부서진 인간은
망가지고 부서진 인간밖에 사랑할 수 없거든요. 아십니까?
그러므로 제가 겪었던 절망과 희열들은 사랑
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그것은 슬픈 경외였죠. 그는 유난히 형용사를 좋아한다.

시인이라고 해서 꼭 시인처럼 말할 필요는 없어.
물론입니다. 늙은 소년이 고개를 끄덕였다. 밖에서는
창문 밖에서는, 어둠이 엎어지고 구르며
상처 입은 무릎을 이끌고 절뚝절뚝 걷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이런 대화를 하고 있죠? 늙은
소년이 갸우뚱거리며 물었다.
글쎄, 사실 난 네 행복에 별 관심이 없어. 넌
나보다 먼저 사라질 테고, 난 너보다 먼저 죽을 거야.
아마도.
사실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굳이 악수를 해야 할 이유
따위는 어디에도 없어요. 다만 나는 당신이
인간이라는 점이 다소 기쁘군요. 나는 혼자 있을
때면 주로 내가 만들어낸 신들을 찬양하는 기도를
중얼거립니다. 그들은 대부분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고
결정적으로 광기로부터 자유롭지 못합니다.

신이 광기에게 휘둘리는 장면을 상상해보세요.
그것이 가능하다면 우리들의 인생은
보다 쉬울 것이고 보다 안심할 수 있는,
지진으로 땅이 갈라지고 하늘에서 불붙은 메뚜기 떼
가 떨어져도 공포를 느끼지 않는,
공포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것이 될 것입니다. 늙은 소년이
꿈을 꾸듯이 말했다. 늙은 어른은 생각했다.
이 소년이 병들어있다고 생각하는 어른들은
몇 명이나 될까?

늙은 소년. 지상낙원이라는 단어는 퍽 멋져요.
늙은 어른. 그래, 많은 학생들이 그 단어 때문에 미쳤었지.
열차가 달리기 시작하는군요.
맞아, 새벽이 끝나가니까.

늙은 소년은 계속 새파랗게 쏟아지는 자신의 한쪽 손을
다른 한쪽 손으로 부여잡으면서 작게 외쳤다.
그럼 이제 잠을 잘 수 있겠군요.

날씨는 점점 추워진다.
Posted by Lim_
:

월석(月石)

글/시 2014. 10. 4. 05:12 |
월석(月石)


바닥을 바라보면 어둠뿐이다.
이 땅에는 달이 내리지 않는다.
사내는 불행으로 기운 구두를 신고 걸었다. 달이 지지 않고
뜨는 땅을 찾아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붉은 건물들의 벽으로 빗방울이 떨어져 터져댔고
조각조각 난 시체들은 바닥에서 검게 번들거렸다.
그는 활과 화살을 가진 몇 명의 사람들을 만났다.
그들은 자신들을 기다리는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무얼 기다리고 있습니까? 사내는 모자를 벗으며
정중하게 물었다. 우리는 태양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화살촉을 흔들어보였다.

사내는 그들의 얼굴이 희고 핏기가 없다는 사실에
몇 가지 의문과 수긍을 떠올리며 길을 걸었다.
도둑고양이들이 비를 피해 자동차 밑이나
담을 등진 곳에서 웅크리고 있었다. 그들 중 하나는
얼마 전에 음식물 쓰레기봉투에 담겨진 채 버려진
동족의 시체를 보았다. 그것은 이 행성 곳곳에서
항상 벌어지는 일의 일부분에 불과했으므로
야행성의 노란 눈들은 침묵하며 껌뻑거릴 뿐이었다.
분명 달이 뜨는 곳에서는 비극도 달빛을 받겠지.
사내가 젖은 손으로 젖은 돌들을 주웠다.

더 이상 지구의 냄새가 나지 않았다.
사내는 파란 핏줄이 하얗게 보이는 어둠 속에 서서
호주머니에 넣어뒀던 돌들의 냄새를 맡았다.
그것에서는 스무 살이 되자마자 잠들어버린 채
아직도 깨지 않는 이들이 짓밟아왔던 것들의 냄새가
값비싼 종이로 만들어진 책처럼 읽혀졌다. 희극. 희망.
그는 그것을 산과 계곡을 향해 던져댔다.
자연이 무슨 일을 하는지 나는 모르겠다. 원리라는 것은
사람들이 눈동자에 개편된 영혼을 빛낼 때부터
희미하고 물컹거리며 자주 흩어지는 것으로 변했다.
사내는 아직도 비가 내리는 땅 어딘가에서
모래를 그러쥐며, 허구의 존재들이 입김을 불어대는
대기의 아래 바닥에서 실체를 잃은 숫자들을 센다.

지평선 너머에서는 달이 뜨겠지.
Posted by Lim_
:


불치병에 걸린 자를 동정하는 것은 그만


<착한 사람>처럼 행동하는 병에 걸렸다.
난 더 이상 지나가는 노파의
지팡이를 빼앗아 그녀를 두들겨 패지 못한다.
그것이 순수라고 말했던 시절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이제
순수라는 단어를 나 자신에게 사용할 만큼
순진하지 못하다. 어린 시절에 나는
학교 창고에서 발견한
새끼 생쥐들이 바글거리는 둥지에
불을 질렀었다. 아이들은 비명을 질렀다.
나는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였고
그것들은 털도 나지 않은 한갓 생쥐였다.
어머니가 나를 도취시켰다. 야생의.

착한 사람처럼 행동하는 병에 걸렸다.
내 청바지는 무릎 부분이
갈기갈기 찢겨있다. 몇 년 전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술을 처먹고
갑자기 친구의 얼굴이 보고 싶어서
그가 일하는 구멍가게로 냅다 달렸다.
나는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다. 얼굴부터 떨어졌다.
얼굴 오른쪽이 전부 찢겨나갔고
바지도 찢어져있었다. 나는 얼굴에서 피를
뚝뚝 흘리며 웃으면서 구멍가게로 들어갔다.
친구가 날 쳐다보았다. 마침 물건을 사던 손님이
내게 반창고를 주었다. 나는 눈에서
소주를 흘렸다.
반창고는 상처의 십분의 일도 가리지 못했다.

착한 사람처럼 행동하는 병에 걸렸다.
나는 이를 뽑고 머리카락을 잘랐다.
위장에서부터 올라오는 악취는
무슨 짓을 해도 사라지지 않지만
나는 잇몸에 피가 날 정도로 이를 닦는다.
사람들 앞에서는 입을 닫는다.
온갖 장기와 뇌와 영혼에서 스미어 나오는 악취를
그들에게 들킬까봐. 나는 이를 닦는다.
사람들에게 인사를 한다. 처음 보는 노파에게도
시답지 않은 잡담을 건넨다.
그러나 멀찍이서 할뿐이다. 나는
착한 사람처럼 행동하는 병에 걸렸으니까.
가까운 곳에서는
나의 악취를 들키고 만다.

착한 사람처럼 행동하는 병에 걸렸다.
나는 자주 웃는다. 과거에 어머니는
날더러 웃는 연습을 하라면서
입에 볼펜을 물려주었다.
나는 며칠 만에 그 짓을 포기했지만
덕분에 지금 나는 잘 웃는다.
내 흉부에는 수십 개의 흉터가 있지만
옷을 입으면 보이지 않는다. 나는 잘 웃는다.
나는 옷을 세탁하고 머리를 감는다.
남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 담배를 피운다.
술을 마셔도 길가에 주차된 자동차들의
창문을 깨지 않는다.

착한 사람처럼 행동하는 병에 걸리는 것은
생각보다 쉽고
생각보다 아프고
생각보다 쓸쓸하다.
버스가 도로를 달리고 전동차가
사람들을 싣고 철로를 달려도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부서져가고 있다.

Posted by Lim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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