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익사자들>, <홀로 사는 집>의 연장선상에 있는 소설. 완성한 지 몇 달이나 지난 뒤라서 글의 완성도에 대해서는 이렇다 저렇다 얘기하기가 힘들다.
2. 기행문의 형식을 하고 있지만 완전히 관념과 상상으로만 만들어진 소설. 까뮈적 상징성을 갖고 있는 배경을 깔아놓은 것 까지는 괜찮았는데 그 위에 글을 짓는 방식이 다소 서툴렀다.
태양 아래서
빛이 부서지고, 도시가 깨어나고 있었다. 창가 너머 멀리에서 사람의 목소리 같은 것이 들려왔다. 웅성거리는 발소리들. 벌써부터 태양빛이 밤새 차갑게 식어버린 공기를 달구고 있었다. 아침 햇빛이 침대 가에 다다르자 남자는 눈을 떴다. 그는 처음 태어난 사람처럼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여전히 숨통이 갑갑했다. 배를 타고 대양을 건너는 동안 얻은 질병이 아직도 그의 폐부에 남아 숨 쉬는 것을 고통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남자는 웬만하면 그 고통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는 이미 완전히 잠에서 깨었음에도 불구하고 잠시 동안 침대 위에 그대로 누워있었다. 그의 눈에 흙으로 된 천장과 벽이 비쳤다. 빛이 그것들을 황토색으로 빛나게 하고 있었다. 창밖에서는 규칙적으로 철썩이는 소리가 나지막하게 들려왔다.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두 눈을 문질렀다. 첫 번째 아침이었다. 그는 머리맡에 걸어두었던 수건을 집어 들고 방 밖으로 나섰다. 묵은 나무의 냄새가 나는 객실의 좁은 문을 열고 나오자 벽은 물론 바닥까지 돌과 흙으로 만들어진 기다란 복도가 나타났다. 마치 동굴의 벽을 도려낸 듯이 뚫려있는, 유리창도 달리지 않은 창문들로는 햇살이 방울져 흐르고 있는 초록빛 나뭇잎이 보였다. 그리고 사람들이 얇은 신발로 밟고 다니는 거리의 모습이 나뭇잎들의 사이사이로 흩어진 퍼즐조각처럼 드러나 있었다. 갑자기 날 것 그대로의 빛과 마주치게 된 남자는 눈이 부셔서 미간을 찡그렸다. 그는 천천히 빛에 익숙해지면서 수건을 쥔 채 복도의 한쪽 끝으로 걸어갔다. 그곳에는 화장실 겸 세면실이 공용으로 설치되어 있었는데, 그저 문으로 분리시켜두었을 뿐 황톳빛 벽은 복도의 그것과 다를 것이 없었다. 처음 건물에 들어섰을 적부터 계속 남자는 자신이 토굴 안에 들어와 있는 것 같다고 느꼈다. 그것은 사실 그럴싸한 감상이었다. 그 건물은 밖에서 보면 여기저기 구멍이 뚫린, 흙으로 빚어 만든 하나의 거대한 도자기나 다름없어 보였다. 어떤 커다란 손이 땅에서 흙을 긁어모아 건물을 만든 것처럼, 그것은 이음매나 억지로 접붙인 흔적도 없이 대지 위에 불쑥 솟아올라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속에 있으면 인간이 만든 인위적인 건축물 안에 속해있다는 느낌은 들지 않고, 천연의, 주변을 흐르던 수맥이 우연히 뚫어놓은 자연 동굴 속에 있는 것 같은 느낌만 드는 것이었다.
남자는 세면대를 찾아 수도꼭지를 틀었다. 미지근한 물이 뿜어져 나오며 그의 손을 적셨다. 생전 처음 맛보는 타지의 물줄기가 그의 손에 느껴졌다. 남자는 자신이 이국에 와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두 손을 그릇 모양으로 모아 물을 담고 세수를 하기 시작했다. 세수를 마치고 고개를 쳐들자 기침이 터져 나왔다. 가슴이 좀 먹히는 듯이 아팠다. 그는 수건으로 손과 얼굴을 닦았다. 거울을 보고 싶었지만 거울이 보이지 않았다. 별 수 없이 남자는 손대중으로 머리를 다듬고 화장실 밖으로 나왔다. 방으로 돌아가, 수건이 마를 수 있도록 침대의 머리맡에 그것을 펼쳐서 걸어놓고 그는 다시 복도로 나와 계단을 따라 내려갔다. 계단도 단조로운 색깔의 흙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두 개의 층을 내려가자 로비가 나왔다. 카운터에는 어젯밤에도 자리를 지키고 있던 마른 사내가 턱을 괴고 앉아있었다. 사내는 인기척을 듣고 계단을 내려온 남자 쪽으로 눈을 굴렸다. 그들은 고개도 까딱이지 않고, 무표정으로 인사했다. 로비는 창문이 없어서 어두웠다. 천장에 전등이 달려―달려있다기보다는 차라리 흙으로 된 천장에 박혀있다고 하는 것이 더 어울리는 표현이지만―있었지만 아침인지라 켜있지 않았다. 그늘진 흙과 돌들. 약간의 선선함이 감도는 모래냄새가 공기 중을 떠돌고 있었다. 남자는 그 냄새에 잠시 멈춰 있다가 다시 걸었다. 그는 살짝 열려있는 상태인 현관으로 향했다.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서자 거리의 모습이 눈앞에 들이닥치듯이 나타났다. 하늘에서는 햇빛이 직선으로 쏟아지고 있었고, 바람은 덥고 건조했다. 길거리를 누비는 사람들은 통이 넓고 소매가 긴 옷을 입고 있었다. 그들은 대부분 머리에 햇빛을 가릴 모자를 쓰고 있었으며 얼굴은 갈색으로 탔고 표정은 무뚝뚝했다. 마치 나무로 깎아 만든 커다란 인형들 같았다. 그 거리에서 흰 피부를 가진 사람은 남자 자신뿐이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대로변을 차지한 다른 건물들 역시 남자가 나온 여관처럼 황토색이었고 자연물처럼 솟아나있었다. 도시 전체가 흙으로 빚어진 왕국 같았다. 남자는 숨을 들이쉬었다. 대기 중의 태양빛의 농도가 너무 진해서 그야말로 녹은 황금을 들이마시는 것 같았다. 녹아내린 황금이 흐르는 대기. 단조롭고 건조한 모래로 쌓아올린 대지. 나무장승 같은 사람들. 하늘에서는 하얀 광선이 눈이 부시도록 엄청나게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과연 이 땅이 이렇게나 많은 빛들을 받아내고도 터지지 않고 버틸 수 있을지 걱정이 될 정도로.
그때 누군가가 등 뒤에서 남자의 어깨를 잡았다. 고개를 돌려보니 거리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갈색 피부인, 체격이 다부지고 눈매가 웃는 모양인 중년의 남자였다. 그는 어젯밤 트럭으로 남자를 이 도시까지 태워다 준 운전수였다. 그는 남자가 온 나라의 말을 할 줄 알았고, 차 안에서 남자와 몇 마디 이야기를 하기도 했었다. 「뭐 해요? 아침부터.」 그가 말했다. 「아침, 아침인데도 이렇게 뜨겁군요.」 남자가 그를 쳐다보면서 대답했다. 「그래도 선선한 편이지. 아직 해가 덜 떴으니까.」 그렇게 말하면서 운전수는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을 터트렸다. 「당신네 나라는 이렇게 뜨겁지 않은 모양이지?」 「네, 내가 자란 곳은 태양과 멀죠.」 아주 멀어요. 남자가 중얼거렸다. 「나는 차고 어두운 땅에서 왔습니다.」 운전수는 고개를 끄떡거렸다. 그리고 말했다. 「나는 오후쯤에 집으로 돌아갈 건데, 여기서 멀지 않아요. 만약 통역이 필요하다면 그리로 오쇼. 내가 어딘지 알려줄 테니까.」 남자는 알았다면서 말했다. 「고맙군요. 하지만 괜찮아요. 나도 이 나라 말은 어느 정도 공부했으니까.」 「그래, 그렇군.」 운전수는 또 고개를 끄덕였다.
전날 밤 운전수와 남자는 차로 사막을 건너왔다. 뼈가 시리도록 차갑고 어두운 사막이었다. 밤새 남자는 차창으로 바깥 풍경을 보고 있었다. 그런 광경은 태어나서 처음 보는 것이었다. 상념마저 송두리째 먹어치우는 완전한 고독.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과 그 속에 뚫린 구멍인 듯 교교한 달덩어리. 인간의 냄새라고는 털끝만큼도 나지 않는 그 풍경은 세상 끝의 폐허인 것처럼 보이면서 동시에 모든 것의 탄생 이전에 깔려있는 잔잔하고 깊은 호수처럼도 보였다. 모든 것이 공허를 담고서 벌벌 떨고 있었다. 남자는 그때 자신이 극단의 세계에 와 있다는 것을 피부로 느꼈다. 한량없이 내리쬐는 존재의 외침. 그 엄청난 파도 속에서 간신히 정신을 유지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은 털털거리는 트럭의 엔진소리 뿐이었다.
여관 앞에서, 얼마간 대화를 나누다가 그들은 헤어졌다. 운전수는 볼일이 있다면서 거리의 인파 사이로 사라졌다. 남자에게는 할 일이 없었다. 그는 몹시 한가했다. 사실 그는 무턱대고 본국을 떠난 것이었다. 아무런 계획도 예정도 없었다. 갑자기 광기에 휘둘린 것처럼 그는 모두 다 그만두고 배를 탔다. 그리고 한 점의 망설임도 없이 돌과 모래의 땅으로 향한 것이었다. 그래서 막상 도착하자 할 일이 없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그가 권태나 지겨움을 느끼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 땅의 태양빛은 도무지 그러한 감정을 느낄 수 없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었다. 눈앞이 막막할 정도의 빛은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남자를 알 수 없는 충만감으로 넘치게 만들고 있었다. 빛은 그의 영혼 밑바닥까지 쬐고 있었다. 존재가 투명하게 꿰뚫리고 그 속의 바닥없는 허무와 고통까지 벌거벗겨진 채 드러나는 것 같았다. 아아, 하고 남자는 마음속으로 탄식하며 발을 내딛었다. 그는 갈색 피부의 사람들 사이에 섞여 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태양이 하늘 꼭대기에 다다랐다. 남자는 한참이나 걷고 있었다. 온몸이 땀으로 번질번질했고 피부고 몸속이고 할 것 없이 화끈거렸다. 어느새 그는 바다 앞에 서있었다. 돌로 된 해변이었다. 파도가 바위 위로 내려치고 있었다. 불같은 하늘 아래 청록색 바다가 끊임없이 펼쳐져있었다. 몇 척의 배가 보였다. 주변에는 어부들이 검게 그을린 근육을 드러낸 채 일하고 있었다. 그 사이에서 남자는 열 때문에 반쯤 혼이 나간 상태였다. 그는 바지 자락을 걷고 파도로 깎인 바위 아래로 내려갔다. 구두를 벗고 바닷물 속에 발을 집어넣자 우둘투둘한 자갈들이 밟혔다. 바닷물은 대지의 열을 받아 따뜻했다. 그는 바위그늘 밑에 앉았다. 한손에는 가죽구두 한 짝을 쥐고 있었다. 이런 나라에 가죽구두는 어울리지 않았다. 남자는 돌아가면 시장에서 샌들을 하나 사야겠노라고 생각했다. 그는 한참 동안 그늘에서 열을 식히고 있었다. 등 뒤로는 사람들의 부산한 발소리가 멀찍이서 들려왔고 앞에서는 규칙적인 파도소리가 깊고 아득하게 밀려오고 있었다. 이곳은 영혼을 소독하는 장소 같았다. 불볕 같은 더위. 팽팽한 힘줄을 세차게 해변으로 내리치는 파도. 그의 생명을 모두 불살라버릴 듯한 태양. 남자가 태어난 나라의 스산하고 습기 찬 공기가 이제 와서는 모조리 거짓말 같았다. 그는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소금기 섞인 더운 공기가 가슴 가득히 들이찼다. 그는 또 한 번 가슴의 통증을 느꼈다. 수천 개의 바늘로 폐부를 찔러대는 것 같은 고통. 남자는 그것을 일종의 대가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파도로 흔들리는 배 위에서 며칠 밤낮을 앓는 동안 그가 생각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그것뿐이었다. 고통. 주어진 운명을 거부하려는 자에 대한 신의 분노. 그는 고열과 가쁜 기침 속에서 내내 주먹을 불끈 쥐고 있었다. 배의 흔들림에 따라 죽음이 눈앞에서 어른거릴 때마다 남자는 더욱 더 거부했다. 나는 수면 위로 나가노라. 죽음이여, 나는 네가 발도 못 댈 땅으로 간다. 그리고 남자의 가슴에는 영영 사라지지 않을 통증이 남았다.
태양빛이 죽일 듯이 달려드는 대지의 한복판에 놓인 요새인 양 바위그늘은 안전했다. 몸을 온통 뒤덮은 땀도 바닷바람에 식어가고 있었다. 더위 속에서 돌연 스쳐지나가는 한기가 느껴졌다. 남자는 연기처럼 피어오르는 졸음을 느꼈다. 태양의 땅. 바다의 앞마당. 그늘 밑에서, 그는 이 거대한 공기의 틈바구니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다. 잠결에 남자는 생각했다. 드디어 해방되었노라고.
눈을 떴을 때는 태양이 노을빛으로 변해있었다. 너무 오래 바닷물 속에 담가두었던 발은 쭈글쭈글해졌고 몹시 찼다. 그는 일어나서 기지개를 켰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몸이 피곤했다. 마치 하루 종일 달리기라도 한 듯이. 한 손에 가죽구두를 쥐고서 맨발로 바위 위로 걸어 올라갔다. 낮보다 적어진 사람들이 거리를 거닐고 있었고, 고기잡이를 하던 배들은 항구에 들어와 있었다. 가게를 지키는 늙은 상인들은 색깔 없는 눈으로 허공을 멀거니 지켜보고 있었다. 남자는 여전히 맨발이었다. 그는 열기가 흐르는 땅바닥을 걸었다. 모래와 자갈의 두드러진 형태가 발바닥에 느껴졌다. 불쑥 솟아난 돌들 때문에 발이 아프기도 했다. 그러나 남자는 여전히 신발을 신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는 땅에서 태어난 사람처럼 길을 걸었다. 짙어진 노을빛이 거리를 짓뭉개고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그 무게 때문에 지친 것처럼 보였다. 나뭇조각 같은 그들의 표정 속에 미세하게 새겨진 주름과 오래된 존재의 피로가 보였다. 남자는 지나치는 사람들의 모든 표정을 하나하나 눈에 담고 있었다. 이곳에서는 모든 것이 명백하다. 그는 생각했다. 남자가 원래 살던 나라에서는 사람들의 얼굴 위에 뿌연 안개가 끼어있었다. 일 년 내내 그 안개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것은 모든 사람들을 익사자처럼 보이게 만들었고, 사람들은 그 속에서 웃고 있었다. 그러나 이곳은 건조한 나라이고, 낮이고 밤이고 안개 따위는 끼지 않았다.
시장에 들어섰다. 사람들이 온갖 것들을 사거나 팔고 있었다. 남자는 맨발로 지저분한 거리를 걸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자락과 소매가 긴 옷을 입은 여자들이 식재료 따위를 사기 위해 시장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모두가 갈색 피부에 검은 머리를 하고 있었다. 가끔 행인들 중 유독 특이한 색을 하고 있는 남자에게 눈길을 향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같이 무표정한 눈으로 남자를 쳐다보다가, 곧 아무렇지도 않게 고개를 돌리고 남자 따위는 이미 완전히 잊어버린 듯이 자기 할 일에 집중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관심 자체가 무관심에 가까운 것이었다. 목석같은 사람들이었다. 남자는 그 사이를 걸어 다녔다.
얼마 안 가 남자는 옷가게를 하나 발견했다. 다른 가게들과 마찬가지로 흙으로 지어진 건물이 거리 쪽을 향해 완전히 트여있었고, 그 안쪽 벽에 옷가지들이 일견 무질서하게 걸려있었다. 나무로 만든 선반에는 신발들도 놓여있었다. 나무나 가죽으로 만든 샌들이 대부분이었다. 남자는 멈춰 서서 그것들을 훑어보았다. 가게 안쪽에 앉아있는 주인이 턱을 괴고 눈동자만을 굴려 남자를 지켜보고 있었다.
「신어 봐도 되겠습니까?」 남자가 가죽샌들 하나를 집어 들고 그들의 언어로 말했다. 상인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구두를 바닥에 내려놓고 샌들 몇 개를 하나씩 신어보았다. 그리고 그는 크기가 맞는 것을 하나 골라 상인에게로 가져갔다. 「얼마입니까?」 상인은 가격을 말하더니 남자가 바닥에 둔 구두를 잠시 눈여겨보았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저건 이제 안 신을 거요?」 「네. 왜 그러시죠?」 「얼마쯤 신었소?」 남자는 상인이 무엇 때문에 그런 것들을 묻는지 몰랐지만 순순히 대답해주었다. 「일 년하고도 반년쯤 신었죠.」 그러자 상인은 손을 내밀며 말했다. 「한 번 봐도 되겠소?」 남자는 구두를 들어 올려 상인에게 주었다. 상인은 그것을 들고서 가죽의 질이나 굽의 닳은 정도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가끔 이런 신발을 찾는 손님들이 있는데.」 상인은 책상 위에 그 구두를 올려놓으면서 계속 말했다. 「공급량이 부족하거든. 이거 팔지 않겠소?」 남자는 상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팔아도 상관없는 물건이었다. 여관까지 들고 가봤자 짐밖에 되지 않을 것이었다. 차라리 버려도 좋은 물건인데 사준다는 사람이 있으니 잘된 일이었다. 「그럼 그렇게 하시죠.」 남자가 희미하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리고서 남자는 지갑을 꺼내 샌들의 값을 지불했다. 상인은 그것을 받더니 지폐 몇 장을 세어 남자에게 되돌려주었다. 「구두 값이오.」 남자는 웃었다. 「물건을 샀는데 오히려 돈을 받았군.」 상인도 덩달아 그 나무껍질 같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그런 건 아니지. 당신은 샌들 값을 내었으니까. 외국인 양반.」 그의 웃는 얼굴은 찌그러지고 빛이 바랜 알루미늄 캔을 생각나게 했다. 남자는 발에 묻은 모래를 털고 방금 산 샌들을 신었다.
옷가게 밖으로 나와 남자는 걸어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시장을 나오자 거리를 걷는 사람들의 수가 적어졌다. 그는 여관으로 가는 길을 찾고 있었다. 어느덧 하늘은 짙은 붉은색에게 완전히 점령당해 있었다. 간혹 푸른 구름이 보였다. 하늘의 동쪽 가장자리는 이미 어두운 보랏빛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빛의 선명함이 죽어가는 시간. 거리는 색깔의 무게 밑에 눌려있었다. 주택가를 가로질러 걸었다. 이 나라 특유의 향신료 냄새와 음식 만드는 냄새, 그리고 시큼한 인간 냄새가 풍겼다. 건물들의 안쪽에서는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소리가 들렸다. 골목골목으로 삶이 거닐고 있었다.
그는 곧 여관을 찾았으나 아직 시간은 밤이 아니었다. 지금은 그 좁고 퀴퀴한 방으로 들어가 누워있고 싶지 않았다. 방 안에서는 자는 것밖에 할 일이 없었다. 그는 나라를 뛰쳐나올 때 책 따위는 단 한 권도 가지고 나오지 않았다. 지금 방에 들어가 봤자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멍하니 창문 밖만 내다보다가 밤이 되면 잠드는 일 뿐일 것이다. 남자는 여관 주변의 거리를 조금 어슬렁거렸다. 어딘가 갈 곳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늘이 점점 어두워지고, 길가에 행인들의 숫자가 줄어들자 드디어 불을 밝히는 점포들이 있었다. 카페와 선술집들. 노란 조명 아래 모여드는 사람들. 남자도 그들의 드문드문한 행렬 속에 속해 어느 선술집으로 걸어 들어갔다. 카페테라스를 거쳐 점포 안으로 들어가자 눅진한 알코올 냄새와 부산스러운 소음이 얼굴을 향해 확 끼쳐왔다. 남자는 사람들 속에서 조금 머뭇거리다가 바텐더 맞은편으로 가 앉았다. 그리고 뭐든 좋으니 너무 독하지 않은 것을 달라고 주문했다. 기다리는 동안 남자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테이블을 둘러싸고 삼삼오오 모여앉아 술을 마시고 대화를 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피로를 취기로 씻어내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었다. 마치 어느 원시부족의 신과도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그들의 갈색 얼굴이 새롭게 보였다. 인간의 모습을 하고 감정을 흘리는 순간의 신들. 술을 마시고, 일터에서 있었던 일들을 짧고 담담한 어조로 이야기하고, 가끔 거대한 짐승처럼 웃는다. 태양의 조각이 남아있는 그들의 피부. 선술집의 조명 아래서 번들거리는 다부진 근육. 남자는 자신의 하얗고 마른 몸이 조금 부끄럽게 느껴졌다.
남자의 잔이 나오자 그는 그것을 홀짝였다. 오래된 나무의 향기가 나는 투명한 리큐어였다. 배를 탄 후 처음으로 마시는 술이었다. 오랜만에 알코올과 만나자 뇌에 전류가 흐르는 것 같았다. 술을 한 모금 머금고 그는 자기도 모르게 머리를 흔들었다. 사람 냄새가 나는 후끈한 공기가 얼굴을 스쳤다. 그는 느릿느릿 술을 마시면서 주변에 앉은 사람들을 흘겨보았다. 대부분 떠들고 있었고, 집중하지 않으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남자는 굳이 집중하려고 하지 않았다. 자신이 모르는 언어가 불안과 두려움의 형상으로 주변에서 얼씬거리는 것을 그는 그저 받아들였다. 완전한 이방인의 심정. 게다가 그는 취기 때문에 조금 대범해져 있었다. 술은 이 나라만큼이나 메마르고 화끈거리는 맛이 있었다. 방울져 떨어지는 태양을 마시는 느낌이었다.
밤이 점점 깊어갔다. 사람들의 목소리는 알코올에 달아오르고, 점점 더 유쾌하고 높은 톤으로 바뀌어갔다. 그다지 밝지 않은 노란 조명이 남자 주변을 감싸고 있었다. 누군가 새로운 사람이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빈자리를 찾더니 남자의 옆으로 와 앉았다. 키가 작고 명랑한 눈을 가진 남자였다. 그는 바텐더에게 주문을 하고, 남자와 눈이 마주치자 눈짓으로 인사를 건네 왔다. 남자도 인사를 받았다. 키 작은 남자는 바텐더에게 잔을 받더니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외국인이시군! 우리말 할 줄 아시오? 어디서 오셨소?」 남자는 잠시 입을 다물고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그들 말로 대답했다. 「조금이오. 바다 건너에서 왔습니다.」 키 작은 남자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왜 이런 나라에 오셨지? 볼 것도 없을 텐데.」 「사막이 보고 싶었거든요.」 「사막이라!」 키 작은 남자가 자신의 잔을 기울이고서 말했다. 「나는 외국에 나가본 적이 없어요. 나는 목수인데, 어려서부터 목공장에 다니면서 일을 배웠지. 평생 나무만 만지면서 살았소. 바다 너머에 뭐가 있는지 생각해본 적도 없고.」 말하다가 그는 웃었다. 「목수일 말고 다른 일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지.」 남자는 그 키 작은 남자의 웃음을 보고 그가 퍽 명랑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도 대낮에는 남자가 거리에서 만났던 사람들과 다름없이 사막의 우상처럼 무뚝뚝한 갈색 얼굴로 말없이 일에 열중하고 있을 것인데, 밤이 되자 모든 사람들이 더없이 육체적이고 솔직한 인간으로 보이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여러분이 넘칠 듯한 영혼의 풍요와 축복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남자가 아무도 듣지 못하게 중얼거렸다. 이토록 뜨거운 나라에서. 이토록 뜨거운 나라에서.
「내가 태어난 나라에서는 바다도 보이지 않아요.」 남자가 말했다. 「강은 많았지만 바다는 멀었습니다. 땅으로만 둘러싸인 곳이었죠.」 「우린 늘 바다를 끼고서 사는데.」 키 작은 남자가 대답을 겸하여 말했다. 「네. 나는 이곳이 정말 좋은 나라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남자의 병든 폐가 돌연 욱신거렸다. 그는 애써 통증을 무시하고 이어서 말했다. 「햇빛 밑에 인생이 전부 드러나 보이지요.」 남자가 짐짓 진지한 얼굴을 만들어 말하자 키 작은 남자는 싱긋 웃어보였다. 「그래, 그래서 여기엔 뭐 때문에 오신 거요? 관광?」 「관광이라.」 키 작은 남자의 질문에 남자가 중얼거렸다. 그렇다. 왜 여기에 왔는가? 「나는 고향에서 사업을 했었습니다.」 그는 사실 도망 온 것이었다. 「그런데…… 그만뒀지요. 전부 팔아버리고 배를 탔습니다.」 그는 그 추운 땅에서 죽어버리는 것이 두려웠다. 「나는 진력이 났어요.」 그 습기 찬 공기 속에서 계속 살아가는 것도 두려웠다. 「나는 사막이 보고 싶었습니다.」 남자는 안개에 가려지지 않은 태양이 보고 싶었다. 「바다도 보고 싶었고 말입니다.」 그는 생명을 느끼고 싶었다. 「삶과 만나고 싶었어요.」 남자의 눈은 초점이 없었다. 그는 술잔을 들어 들이켰다.
「하지만 이곳에 그렇게 대단한 것은 없는데.」 키 작은 남자가 말했다. 「네.」 남자는 동의했다. 「대단할 거 없죠.」 그렇게 말하면서 그는 웃음을 지었다. 말끔한 웃음이었다. 「내일은 수영을 하러 가야겠어요.」 술잔을 내려놓으면서 남자가 말했다.
그러나 다음날 남자는 수영을 하러 가지 않았다. 그는 아침이 밝았을 때 약간의 두통을 느끼며 여관방의 침대 위에서 눈을 감고 있었다.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두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입안에 여전히 리큐어의 향긋한 맛이 감돌고 있었다. 남자는 여전히 눈을 뜨지 않았다. 눈을 뜨지 않아도 아침의 태양빛이 눈꺼풀을 꿰뚫고 안구에 쏟아지고 있었다. 메마르고 세찬 빛이여. 그는 일어나고 싶지 않았다. 아직도 머릿속을 맴돌고 있는 알코올의 잔향과 무한히 남은 자유 때문이었다. 그의 얼굴을 쓰다듬는 손은 남자의 얼굴표면에서 몇 개의 주름을 짚어냈다. 가죽 깊이 새겨진 주름들을 남자의 손은 훑어나갔다. 남자는 아직 늙은이라고 불리울 나이는 아니었다. 그러나 분명히 젊지는 않았다. 그는 지나간 청춘을 생각했다. 청춘. 도대체 자신의 청춘을 온전히 쾌락과 사랑에 바칠 수 있는 운 좋은 젊은이가 이 세상에 얼마나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오히려 금욕주의와 고뇌에 사로잡혀 가슴의 깊숙한 곳에 감금시켜버리는 것이 청춘이다. 그리고 그 감금된 청춘마저 사라지고 나면 더 이상 젊지 않게 된 사람들은 생각하는 것이다. 그것이 내 입술을 적실 마지막 달콤한 물이었는데. 죽음에서 피어난 이 세상 그 어떤 술보다 독한 희망이라는 이름의 독주였는데.
남자의 청춘은 춥고 안개 낀 그의 조국에 매여 있었다. 태양빛도 쬐지 않고 사방에 솟은 산맥의 그늘이 드리운 깊은 땅에 붙잡혀 있었다. 그는 그 땅에서 일을 했고 돈을 벌었다. 그는 아주 재능 있는 장사꾼이었다. 그렇다, 그는 재능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그 재능이야말로 자신의 모든 것이리라고 생각했다. 그랬던 것이다. 남자는 온 열정을 다하여 돈을 벌고 물건을 팔아치우고 거래를 성사시켰다. 그의 모든 청춘을 소비해서. 그 추운 나라에서 남자의 재능은 무엇보다도 어울리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한 치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청춘이여, 그것은 소유하는 것이 아니었다.
남자는 수영을 하러 가고 싶었다. 바다로 가서 완전힌 맨몸뚱아리로 파도와 부딪히고 고래의 힘줄처럼 묵직하게 휘몰아치는 해류 위에서 헤엄치고 싶었다. 그러나 그의 메마른 팔다리, 하얀 피부, 단 한 번도 헤엄쳐본 적 없는 육신이 욕망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그는 배 위에서도 병마와 싸우느라 거품이 부글거리는 파도와 마주선 적이 없지 않던가. 그러나 나는 해방되었다! 남자가 돌연 내뱉었다. 그래, 그는 태양의 땅으로 왔다. 대서양과 사막을 건너 그는 태양과 바다의 번쩍 뜨인 눈앞에 도달했다. 그리고 삶을 모조리 태워버리는 것이다. 어느 누구에게나, 주어진 것은 오직 짧디 짧은 현재 뿐이라고 남자는 몇 번이나 되뇌었다.
그때 누군가가 방문을 두드렸다. 남자는 눈을 떴다. 문을 열자 운전수가 있었다. 「안녕하시오.」 남자의 얼굴을 보고 그가 웃음 지어보이며 인사를 건넸다. 「좋은 아침입니다.」 「네, 좋은 아침입니다.」 이렇게 일찍부터 무슨 일이시죠? 남자가 물었다. 운전수는 사막 한복판에 있는 오아시스 마을에 갈 일이 있다고 했다. 사람 몇과 물건을 싣고 차로 가는데, 남자가 대낮의 사막은 본적이 없으니 같이 가면 어떻겠냐는 것이었다. 여행객의 가이드 역을 자처하는 것을 즐기는 성격 같았다. 남자는 잠시 옷자락을 만지작거리더니 곧 좋다고 했다. 볼 수 있는 것은 전부 다 봐두고 싶었다. 운전수의 제안은 환영할만한 것이었다. 남자는 언제쯤에 출발하느냐고 물었다. 운전수는 손목시계를 보더니 두 시간 후에 차를 몰고 여관 앞으로 오겠다고 말했다.
운전수는 돌아갔다. 남자는 방문을 닫고 침대 위에 주저앉았다. 뭐라고 꼬집어 말할 수 없는 감정이 남자의 울렁이는 심장을 지배하고 있었다. 출렁거리는 갑판 위에 누워있는 기분이었다. 빛을, 좀 더 강하고 세찬 빛을. 남자는 마음의 껍질과 축축한 살점을 전부 불태워버리고 정신의 새하얀 알갱이만 남겨놓을 정도로 강렬한 빛을 원했다. 이 빛의 고장까지 와서도 남자의 정신은 더 강한 빛에 목말라 있었다. 그의 인간성을 지워버릴 만큼 강하고 자비 없는 빛에 남자는 자신의 온 존재를 내맡기고 싶었다. 충족되지 않는 비참한 욕망이 그의 가슴에 가득했다. 이것은 일종의 숙명 같은 것인가? 태양이 없는 토지에서 태어난 나는 일상의 공기에서도 외국의 하늘 아래서도 만족하지 못하고 언제까지나 빛을 찾아 헤매야만 하는 것인가? 내 마음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강하게 주장하고 있는, 어떤 초월적인 빛으로 말미암아 산산이 파열하고 싶어 하는 이 감정은 무엇인가? 과연 어떤 빛이 그 욕망을 채워줄 수 있단 말인가? 차라리 내가 바싹 마른 볏짚이었더라면! 남자의 정신은 횡설수설하며 지껄였다. 그는 갑갑했다. 사막을. 사막을 보면 나아질 것인가? 구름 한 점 없는 하얀 하늘과, 소금과, 돌과 태양빛의 한 가운데로 기어나가면 조금이라도 이 갈망이 충족될 것인가 말이다. 남자는 가만히 앉아서 기다렸다. 그는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이제 막 아침으로부터 벗어나고 있는 도시는 조용했다.
세 시간 뒤 남자는 운전수의 차에 몸을 싣고 있었다. 차는 일정한 소음을 내며 아무것도 없는 사막 위를 홀로 달리고 있었다. 차 안에는 시트에 몸을 파묻고 있는 남자와 운전수 외에도 사내 하나와 여자 둘이 타고 있었다. 그들은 바구니와 상자들 사이에 앉아 무표정한 갈색 얼굴로 손때 묻은 차창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렇다. 그들은 창문 밖의 풍경을 내다보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아무것도 바라보지 않으려고 하는데 그저 시야에 그것이 놓여있다는 듯이 차창에 눈을 박고 있었다. 이 지역 사람들 특유의 그러한 무관심에는 이미 익숙해져있었기 때문에 남자는 이제 와서 그들의 태도를 신기한 눈동자로 쳐다본다던가 하는 일은 하지 않았다. 차창 밖의 풍경은 이상할 정도로 단조롭고 노골적이었다. 그곳에는 돌과 태양밖에 없었다. 그 틈바구니에 끼인 지평선은 열기로 일그러져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태양빛과 바위로 만들어진 하나의 거대한 초현실적 그러데이션이 창문을 차지하고 있었다. 열기 또한 굉장했다. 차는 그야말로 불꽃의 한복판을 달리고 있는 것 같았다. 차 안의 공기는 후끈하게 달아올라 있었고 그 더위 때문에 공기의 부피가 유난히 더 잘 느껴졌다. 숨을 쉴 때마다 뜨겁고 부드러운 덩어리를 흡입하는 것 같았다. 다들 말이 없었다. 사막의 엄청난 침묵이 차 안까지 스며들어 있었다.
남자는 운전수 옆 조수석에 앉아 입을 꾹 다물고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벌써 얼마나 달렸을까? 계속해서 똑같은 풍경만 연속되고 있었다. 달궈진 돌멩이들이 버석거리며 부서지는 황갈색 사막. 내리쬐는 햇빛 때문에 오히려 새하얗게 보이는 백열화된 하늘. 남자의 머릿속도 하얗게 비어있었다. 그는 그저 돌과 바위들이 시야를 스치며 지나가는 것을 더위 때문에 몽롱한 눈으로 보고 있었다. 밤에 봤던 것만큼이나 사막은 고요했다. 한참이나 말이 없던 운전수가 문뜩 입을 열어 곧 도착할 것이라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남자는 눈썹도 까딱하지 않은 채 가슴 속의 쓰라린 통증을 느끼고 있었다. 가끔 생각하건데, 만약 지옥이 그가 생각하는 것만큼이나 뜨겁고 끊임없는 열광으로 가득한―그렇다. 차라리 환희로 보일 정도로 지독한 고통으로의 열광 말이다.― 곳이라면 남자는 기꺼이 그곳으로 떨어지고 싶었다. 고요와 열기를 머금은 공기가 그의 가슴을 짓누르고 있었다. 병(病)! 생명의 뒷면. 기쁨으로 거울놀이를 할 때 홀연히 나타나는 유령 같은 것. 진실의 잘려진 단면…… 그것은 죽음의 냄새 같은 것이라서, 고통과 더불어 삶을 더욱 분명하게 느낄 수 있게 해주었다. 통증이야말로 살아있다는 증명이 아니던가. 그리하여 불만족과 갈망의 표현인 남자의 병은 그가 어떤 빛을 열렬히 구하고 있다는 것을 자각할 수 있게 만들었다. 그는 그저 바깥을 내다보고 있었다. 뒷자리에서는 가끔씩 달칵거리는 인기척이 들려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시야 끝자락에서 번쩍거리는 무언가가 보이기 시작했다. 석영을 투과한 것 같은 희멀건 빛이 사막 저편에서 빛나고 있었다. 온통 돌무더기뿐인 땅에서 그 빛은 이질적이고 돌연스러운 것이었다. 그들이 타고 있는 차는 빛을 향해 직진해갔다. 어느 정도 가까이 다가가자 그 빛이 오아시스의 샘 표면에서 흩어진 햇살들이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보석조각을 흩뿌려놓은 것처럼 번뜩거리는 빛 덩어리들 주변에는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다. 층이 낮은 건물들이 샘을 중심으로 옹기종기 모여 있었고, 키 큰 종려나무가 길 곳곳에 뿌리를 뻗고 있었다. 꽤나 규모가 큰 마을이었다. 주택지역 바깥으로는 밭과 과수원이 둥글게 펼쳐져 있었다. 사람들은 그곳에서 땀 흘리며 일하고 있었다. 아무런 장애물도 없는 그 사막의 복판에는 마치 태양이 통째로 쏟아지는 것처럼 빛이 내리쬐었다. 햇빛 아래 무엇 하나 가릴 수 없는 땅. 이곳에서 태양과 과실나무들을 갖고 태어난 사람들은 자신이 행복하다는 사실도 모르는 채 행복하리라. 남자는 자칫하면 자기연민까지 느낄 것 같았다. 이래서는 안 된다. 그는 마음을 다잡았다. 그가 이곳에 온 것은 감상에 빠지기 위함이 아니었다. 남자는 장막들을 전부 걷어내고, 그가 찾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내기 위하여 배를 탄 것이 아니었던가. 그는 빛을 찾으러 온 것이었다.
운전수는 어느 벽돌건물 앞에 차를 세웠다. 뒷자리에 타고 있던 세 사람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문을 열고 짐들을 내리기 시작했다. 운전수도 트럭 뒤로 가서 물건을 내렸다. 남자는 혼자 앉아있기가 멋쩍어 짐을 내리는 것을 도왔다. 그간 내내 무표정하던 흑인 여자가 남자를 향해 웃어보였다. 그러나 그 웃음도 거짓말이었다는 듯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리는 것이었다. 남자는 그런 것이려니 하고 생각했다.
짐을 다 옮겼을 즈음에 건물에서 잘 차려입은 중늙은이 하나가 내려왔다. 그는 운전수의 손을 잡고 인사를 하더니 무어라고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세 사람은 그들의 이야기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남자는 눈이 부셔서 손으로 이마에 그늘을 만들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얇은 천으로 된 후드를 뒤집어 쓴 사람들이 길을 거닐고 있었다. 과연 이곳은 햇빛에 대한 방패가 필요했다. 머릿속까지 햇빛이 송곳처럼 찔러 들어오는 것 같았다. 눈을 감아도 눈꺼풀을 뚫고 들어오는 볕 때문에 사방이 하얗게만 보였다.
운전수는 대화를 마치고 남자에게로 걸어왔다. 세 사람의 흑인은 각자 바구니와 짐을 들고 중늙은이를 따라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일을 하러 온 거요.」 운전수가 말했다. 「도시에 있던 오래된 공장 몇 개가 망했거든.」 「여기엔 새 일자리가 있나요?」 남자가 물었다. 「이 마을엔 농장이 많으니까. 일손은 많을수록 좋지.」 운전수의 말에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곧 다시 차에 올라탔다. 운전수는 저녁까지 시간이 빈다고 말했다. 다섯 시간 정도 여유가 있었다. 그들은 흙빛 거리를 달리다가 길가의 어느 카페 앞에 차를 세우고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가게는 그늘이 지고 바람이 잘 통해서 서늘했다. 운전수와 남자는 테이블을 하나 잡고 점원에게 차를 주문했다. 「아직 이르지만.」 운전수가 말했다. 「술 한 잔 쯤 해도 좋아요. 나는 운전을 해야 하니까 못 마시지만.」 이곳은 아니스 술이 맛있다고 운전수가 알려주었다. 그러나 남자는 술을 마실 기분이 아니었다. 그는 사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탁하고 불투명한 색깔의 차가 두잔 나왔다. 단맛이 강한 음료였다. 너무 익어 술이 된 과실을 마시는 것 같았다.
활짝 열린 가게 현관으로는 거리가 내다보였다. 땅바닥에 반사된 빛들이 번쩍이면서 가게 안쪽으로 날아들고 있었다. 거리는 뜨거운 만큼이나 조용했다. 이 땅은 어딜 가든 항상 고요와 침묵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쨍쨍한 햇볕만이 귓가에 맴돌고 잉잉거렸다. 사람들은 말이 없었고 인기척도 내지 않은 채 걸어 다녔다. 이곳에서는 모든 것이 곧 스러질 모래알처럼 자기 존재에 대해 겸손했다. 절대적인 것은 태양뿐이었다. 태양만이 존재의 한계에 대한 준엄한 법률처럼 머리 위에서 쉴 새 없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남자의 가슴은 형언할 수 없는 감동으로 벅차올랐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자신이 빈손으로 태어나 빈손으로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투명한 영혼. 삶과 죽음에 대한 더할 나위 없이 순수한 통찰. 천혜의 자연이여. 신이 없는 땅에야말로 사실은 신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넘쳐흐르는 하얀 빛이 남자의 머릿속을 휘저어놓았다. 그는 감격 속에서 굉장한 졸음을 느꼈다. 그것은 일종의 안심과도 같은 것이었다. 남자는 의자에 앉은 채로 대번에 잠이 들었다.
아, 삶이여. 청춘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는 이곳에서 생명을 느낄 수 있었다. 타들어가는 불꽃처럼 소진되어가는, 그리고 빛을 발하는 그것을 남자는 마치 눈으로 본 듯이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잠에서 깨었을 때 거리는 붉게 물들어있었다. 잠깐 존 것 같았는데 꽤 시간이 지나있었다. 남자는 옆자리로 시선을 향했다. 운전수가 없었다. 그는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나지막한 한숨을 뱉었다. 테이블 위에는 마시다 만 차가 미지근하게 식어있었다. 남자는 찻잔을 들어서 단숨에 들이켰다. 열기가 없는 탓인지 더 달고 걸게 느껴졌다. 그는 테이블 위에 지폐 몇 장을 올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노을빛이 비치는 현관으로 나서자 약간 달큰한 담배연기 냄새가 풍겼다. 거리 쪽으로 뻗은 테라스에서 운전수가 벽에 등을 기대고 궐련을 피우고 있었다. 「일어나셨소?」 운전수는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남자는 자신이 잠든 줄도 몰랐노라고, 깨우지 그랬느냐고 말했다. 「아니, 괜찮아요.」 그는 다 타고 남은 담배꽁초를 길 쪽으로 내던졌다. 빨간 불꽃을 튀기며 모래바닥에 꽁초가 떨어졌다. 「마침 시간도 맞으니 가볼까.」 운전수가 혼잣말처럼 내뱉으며 트럭으로 향했다. 남자도 그를 따라 차에 올라탔다. 그들은 왔던 길을 그대로 돌아갔다. 거리에는 전보다 사람이 많았다. 일을 정리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처럼 보였다. 모두들 양손이 무거웠다. 수많은 발걸음 소리가 거리를 메우고 있었다. 그 인파 사이를 뚫고 지나가느라 차는 속도가 느렸다. 주변 사람들은 모두 걷고 있는데 혼자 차에 올라앉아 있어서인지 남자는 이상한 기분이었다. 자신도 차에서 내려 그들 사이에서 함께 걷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남자는 이 마을에서 돌아갈 곳이 없었다. 그는 가만히 시트에 앉아 차창 밖의 지나가는 사람들 얼굴만 말없이 보고 있었다.
차는 오후에 흑인 세 사람을 내려주었던 벽돌건물 앞에 도착했다. 운전수는 남자에게 잠깐 기다리라고 말한 뒤에 차에서 내렸다. 그는 건물 안으로 들어가더니 곧 일꾼 몇 사람과 함께 나와 트럭 짐칸에 짐을 싣기 시작했다. 남자는 고개를 뒤로 돌려서 그 광경을 잠시 바라보다가 다시 정면으로 시선을 향한 채 턱을 괴고 있었다.
짐을 다 싣고 일꾼들은 건물로 돌아갔다. 운전수는 운전석으로 돌아와 차 문을 닫았다. 「이제 또 사막을 건너야지. 가다보면 금세 해가 질 거요.」 운전수가 말했다. 얼어붙은 듯 미동도 않는, 밤의 차가운 사막은 남자가 이 땅에 와서 맨 처음 본 것이었다. 그들은 출발했다.
운전수의 말대로 해는 금방 졌다. 하늘의 색깔은 점점 붉어지더니 마침내 보라색으로 변하고 어느새 그 속에서 별까지 빛나고 있었다. 오아시스 마을은 등 뒤편으로 계속 멀어져 이미 그 끝자락도 보이지 않았다. 땅 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이 나라에 왔을 때 처음 본 것을 남자는 다시 보고 있었다. 하늘에는 이상하게 생각될 정도로 깨끗한 달이 떠있었다. 트럭은 달빛과 라이트의 불빛에만 의지해 사막 위를 달리고 있었다. 전에도 그랬듯이, 남자와 운전수는 모두 말이 없었다. 밤의 사막에 드리운 거대한 고요가 그들 사이에 스며들어와 알게 모르게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이곳에서는 말을 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광대함에 압도당하는 느낌. 이 불모의 땅. 이 모든 존재의 내면의 상징. 기막힌 침묵…… 얼마쯤 시간이 지났을까. 차는 계속 달리고 있었고 사막은 한없이 펼쳐져 있었다. 그 사이에서 남자는 갑자기, 그리고 힘겹게 입을 열었다.
「나는 내가 생명을 이해하지 못하고 죽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남자의 갑작스런 말에 운전수는 뭐라고 대답해야할지 알 수 없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남자는 상관하지 않고 말을 계속했다. 「내 조상들은 그들의 조국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내 나라에서 태어난 것입니다. 내 조상들이 그러했듯이 나도 그 추운 땅에서 늙고 시들어 죽을 것이라고, 뚜렷하게 생각하고 있던 것은 아니지만 거의 본능적으로 그렇게 느끼며 지금까지 살아왔었습니다.」 운전수는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나는 나의 병 때문에, 가슴앓이를 할 때마다 내 생명의 바로 곁에 자리 잡고 있는 죽음을 느낍니다. 모두가 죽음을 향해 한 발짝씩 내딛고 있는 것은 내 나라에서나 이곳에서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내가 태양 밑에서 만난 이 무뚝뚝한 사람들은……」 남자는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그는 무어라고 말해야 좋을지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운전수도 조용했다. 남자의 침묵에 동의하는 것 같았다.
차는 계속 달렸고 한참동안이나 그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남자가 문뜩,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맹렬하게, 짧고 맥락 없는 말마디를 던졌다. 「……불타듯이 살고, 불타듯이 사라져가고……」 그토록이나 열렬하게, 그토록이나 열정적으로, 그토록이나 빠르게. 생명을 소진하는 사람들. 마른 나뭇가지처럼 죽어버리는 사람들. 태양의 자손들.
그리고 남자는 입을 다물었다. 정적이 흘렀다. 얼마 뒤에, 이번에는 운전수가 침묵을 깨며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마지막으로 수영을 즐겨본 지가 한참이나 되었군.」 그리고 남자를 향해 말했다. 「당신도 내일 바다에 가지 않겠소?」 운전수의 제의에 남자는 묵묵히 앞만 바라보다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