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오늘 지하철을 타고 집에 오던 도중 생각난 것을 그대로 썼다. 과거의 내가 된 기분.
2. 이제까지 써왔던 것들과 소재가 너무 중복된다는 의견이 있다. 확실히 옳은 말이다.
3. 어쩐지 불안하다.
번식
내 방 서랍에는 오래된 권총이 한 자루 놓여있다. 나는 매일 밤 그것을 꺼내 쓰다듬고, 분해하여 닦고 기름칠 한 뒤에 다시 조립한다. 탄창을 꺼내 탄환을 하나씩 끄집어낸다. 그리고 그것들을 책상 위에 일렬로 세워놓는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여덟… 나는 두어 번 정도 그것들의 개수를 확인한 뒤에 다시 탄창에 집어넣는다. 그리고 그것을 권총 몸체에 끼워 넣은 뒤, 쇠로 된 것 특유의 묵직하고 차가운 질감을 느껴보기 위하여 볼에 가져다 대고 한참을 그러고 있는다. 이것이 내가 매일 밤마다 하는 일과이다.
평일이 아침이 되면 회사에 나간다. 나는 제약회사의 총무부에서 일한다. 하는 일들은 오직 서류, 서류들과 관련된 일 뿐이다. 서류를 작성하고, 서류를 정리하고, 서류를 묶고, 서류를 분리하고, 이걸 제품부에, 거래처에 팩스를 보내, 창고에서 용지를 더 가져와, 이걸 이백 부 복사해. 나는 하루의 절반을 종이들과 지낸다. 내게 있어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하는 활자의 나열들. 그러나 회사는 이것들을 필요로 하고, 또 이것을 위해 일할 수 있는 사람을 필요로 한다. 나는 묵묵히 일한다. 가끔 상사가 내게 왜 그렇게 굼뜨냐고 질책을 하기도 한다. 사실이다. 나는 굼뜨고 둔하다. 하지만 그것은 전부 약 때문이다. 내 본성이 아니다.
약. 나는 매주 목요일 점심시간마다 병원에 간다. 의사를 만나기 위해서다. 의사는 내게 일주일간의 일들을 묻고, 어디가 아프지는 않았는지, 잠은 잘 자는지 물어본다. 나는 솔직하게 대답하고, 그러면 의사는 돈을 받고 일주일치 약을 준다. 「중요한 건 분열증이 재발하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네. 그건 누구보다 제가 제일 잘 알고 있습니다.
나는 아침저녁으로 약을 먹는다. 회사에서 항상 졸음이 쏟아지고 행동이 둔해지는 이유는 아침에 먹는 약 때문이다. 내가 먹는 약은 독하다. 내 감각과 정신을 마비시키고 아무것도 느낄 수 없게 만든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나는 너무나도 예민한 감각을 타고 났기 때문이다. 이것은 필시 저주이리라.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일이 끝나면 전철로 귀가한다. 퇴근시간의 전철에는 사람들이 바글바글하다. 다들 지치고 어딘가 성난 표정으로 손잡이를 붙잡고선 무거운 몸으로 어서 목적지에 도착하기를 바란다. 어서 집에 가서 쉴 수 있었으면. 어서 이 하루가 끝나기만 한다면. 모두들 끝을 바라고 있다. 저녁이 되면 나는 약간 약기운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그래서 사람들의 표정을 아주 예리하게 관찰할 수 있게 된다. 딱딱하게 굳은 사람들의 표정으로부터 나는 조용한 분노를 느낀다. 매일 있는 일이다. 목적지에 도착하면 피곤한 눈을 껌뻑이며 집까지 걸어간다. 나의 좁고 어두컴컴한 집. 나는 몸을 씻고 저녁을 먹은 뒤 서랍에서 총을 꺼낸다. 그리고 책상에 앉아 위에서 말했던 것처럼 분해와 조립을 반복한다. 총탄이 하나. 총탄이 둘. 질릴 때까지 그 짓을 반복한 뒤에 나는 저녁 약을 먹는다. 수면진정제와 항불안제, 항우울제, 항분열제가 뒤섞인 알약 더미. 그것이 식도를 타고 넘어가면 나는 약기운이 돌기를 기다린다. 이불 위에 쓰러진다. 그리고 기억을 잃는다.
아침은 늘 힘들다. 눈을 뜨기도 힘들고, 정신을 차리기도 힘들다. 어젯밤 내가 어떻게 잠들었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한다. 나는 비몽사몽간에 빈속에 아침 약을 털어 넣고 씻는다. 옷을 입고 밖으로 나간다. 아침식사는 거른다. 늘 그래왔다. 빈속에 약을 넣으면 속이 쓰리고 금방 약기운이 독하게 오르지만 별 수 없다. 나는 반쯤 정신을 놓은 채로 전철을 타고 출근한다. 사람들의 얼굴표정 따위나 살필 여유는 없다. 꿈속에서 전철을 타는 기분이다. 푹신푹신하고 무색무취한 차량 속에 서서, 꿈이 끝나기를 기다린다. 구름으로 된 인형들. 난기류 속에서 덜컹거리는 차체. 의식 너머로. 의식 너머로. 그리고 현실. 나는 지하철역을 빠져나와 회사 건물로 들어간다. 그날도 종이 속에 파묻혀 일을 한다.
그 다음 날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그러나 그날 아침에는 깜빡하고 약을 먹는 것을 잊어버렸다. 조금 늦게 일어나기도 했고, 졸리고 바빠서 정신이 없었다. 나는 아침 약을 집에 놓고 온 채로 출근했다.
오전은 그럭저럭 버틸 만 했다. 전날 저녁에 먹은 약 덕분이리라. 그러나 되돌아오는 감각. 송곳의 끝처럼 찔러 들어오는 공기와 냄새. 사람들의 시선들. 나는 의식하기 시작한다. 사람들의 정신을. 나는 사람들의 정신이 그들의 눈과 코와 입으로 뿜어져 나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것들은 칼날로 된 구름처럼 뭉게뭉게 피어올라 사방을 꽉 메운다.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참았다. 그날 상사는 유난히 더 잔소리를 해댔다. 정신을 어디에 팔고 있는 거냐면서. 내 정신은 지금 난도질당하고 있답니다. 당신들의 영혼 때문에. 그러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뇌수가 강간당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머릿속에서 나는 상사의 명패로 끊임없이 그의 머리통을 후려갈기고 있었다.
어떻게 퇴근시간이 되었다. 나는 제일 먼저 문을 박차고 나왔다. 그날 업무는 거의 망친 거나 다름없었지만 그 따위 일은 안중에도 없었다. 얼른 집에 가서 약을 먹어야지. 약을. 약을. 약을 먹고 안정을 되찾아야지. 적의와 공격성으로만 가득한 세상으로부터 벗어나야지. 나는 전철을 탔다. 사람들이 가득 있었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들의 찌푸린 얼굴. 사나운 눈매. 비열한 입 꼬리. 나를 쳐다보는 썩은 영혼들. 아아, 내가 당신들을 전부 다 죽여 버릴 수만 있다면. 살점 하나 안남기고 조각조각 내서 죽여 버릴 수 있다면. 나는 잔뜩 힘이 들어간 손으로 철봉을 잡았다. 가슴이 미친 듯이 뛰었다. 두근두근. 내가 여기서 뭘 하는 거람. 고작 약 몇 알, 그 몇 알 때문에 이 꼴이라니. 나는 얼마나 망가져 있는 걸까? 어서 집에 가고 싶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약을 먹고 자고 싶다. 등 뒤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필시 나를 미친놈이라고 속닥거리고 있는 것이리라고 생각했다. 가슴이 더더욱 뛰었다. 나는 눈을 감고 이건 전부 다 정신분열증에 동반되는 피해망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세상은 멀쩡해. 망가진 건 나야. 세상은 멀쩡해. 아무도 나를 흉보지 않아.
그런데 나는 왜 이런 것들을 느끼지?
그런데 왜 나는 이런 것들을 느낀단 말인가? 내가 망가져서? 내가 돌아버렸으니까? 단지 그것뿐인가? 나는 고작 내 마음이 만들어 낸 허상 때문에 이렇게 고통 받고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 것인가? 뭔가 이상하다. 나는 이렇게나 명증한 정신을 가졌고 사물을 똑똑히 분간할 수 있는데 내가 미쳤다고? 망상증 환자라고? 정말로? 나는 의구심이 솟구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의사가 나를 속인 것은 아닐까? 어쩌면 내가 보고 있는 세계야말로 진실이고, 약은 진실을 가리는 장막이었던 것은 아닐까. 내가 내 감각을 믿지 못한다면 도대체 무얼 믿을 수 있겠느냔 말이다.
나는 그날 저녁 약을 먹지 않았다. 잠드는 데에는 엄청난 노력이 필요했다. 나는 계속 뒤척거렸고 머릿속에서 폭발적으로 떠오르는 온갖 생각 때문에 눈을 감을 수도 없었으며 그런 상념들은 새벽까지 계속 이어졌다. 나는 힘들게 잠들었다.
다음 날 나는 늦게 일어났다. 일어나자마자 느낀 것은 흉부가 미치도록 아프고 구역질이 난다는 것이었다. 갈퀴로 가슴 속을 긁어내고 있는 것 같았다. 숨통이 죄여서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나는 이불 위에서 몸을 말고 고통스럽게 짧은 숨을 내쉬었다. 몇 시간을 계속 그러고 있었다. 도무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내 머릿속은 분노와 원망으로 가득 찼다. 고통 때문이었다. 죽여 버릴 테다. 나는 허공에 대고 중얼거렸다. 전부 다 죽여 버릴 거야. 그날 나는 직장에 나가지 못했다.
그 다음 날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밤새 잠도 자지 못하고 집안을 돌아다니며 벽에 머리를 박고, 증오에 찬 괴성을 지르며 접시들을 깨트리고, 울고 신음하며 웅크리고 있었다. 가슴의 통증은 사라지지 않았고 가슴팍에는 새빨갛게 핏방울이 맺힌 손톱자국들이 남아있었다. 나는 계속 울면서 화냈다. 그 날도 그렇게 흘렀다. 전화벨이 한 번인가 두 번 울렸지만 받지 않았다. 내 우는 목소리를 아무에게도 들려주고 싶지 않았다.
겨우 잠들고 깨어났을 때 가슴의 통증은 어느 정도 가라앉아 있었지만 나는 몹시 겁에 질려 있었다. 손발이 벌벌 떨려서 뭔가를 제대로 쥐지도 못했고 매일 보던 내 방의 가구들 때문에 흠칫거리며 놀랐다. 숨통은 여전히 뭔가에 죄인 듯 답답했다. 그리고 화가 나 있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곰팡이 핀 흔적이 남아있는 흰 벽들이 나를 비웃고 있었다. 정신 나간 것처럼 마구 키득거리고 있었다. 나는 갑갑해서 밖으로 나가고 싶었지만 바깥세상이 더 없이 위험하고 무섭게 느껴졌다. 그때 나는 권총을 떠올렸다. 약을 먹지 않은 그날 아침부터, 며칠 간 권총을 꺼내보지도 않고 있었다. 나는 서랍을 열고 그것을 꺼냈다. 그리고 코트 주머니에 넣은 뒤 한결 안심된 마음으로 밖으로 나섰다.
늦은 오전. 길에는 아무도 없었다. 다들 직장이나 학교에 있겠지. 골목길은 한산하고 조용했다. 종종거리며 길을 거니는 들고양이들이 몇 마리 보였다. 나는 아무 이유도 없이 그것들의 목을 비틀어 죽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것들을 쫓아갔지만 눈치 빠르게 도망가는 바람에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 화가 나서 길가의 벽에 대고 화풀이를 했다. 아무 것도 해결되지 않았다. 나는 집으로 돌아갔다.
다음 날 아침 나는 밤을 새서 새빨개진 눈으로 양복을 입었다. 서류 가방에 권총을 집어넣었다. 세수를 하고 머리를 빗었다. 이 세상 어느 누구보다도 사회화 된 깔끔한 모습으로 바깥으로 나섰다. 나는 회사로 가는 전철을 탔다.
달리는 전철 안. 출근하는 직장인들과 등산복을 입은 노인들. 그리고 교복 차림의 학생들. 나는 그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가만히 살펴보았다. 구역질이 밀려 올라왔다. 빌어먹을 늙은이들. 빌어먹을 욕구불만의 덩어리들. 나는 백발이 성성한 어느 노파 앞에 가서 섰다. 그녀는 어리둥절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가방을 열고 권총을 꺼내 노파의 미간을 쏘았다.
총성.
사방으로 튀기는 살점과 핏덩어리들.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그저 놀란, 휘둥그레 한 사람들의 시선. 어, 이게 무슨 일이지? 그들이 넋 놓고 있는 사이에 나는 세 사람을 더 쐈다. 주저앉는 고깃덩어리들. 마치 자신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듯이 오만상을 다 찌푸리고 당당하게 서있던 인간들이 순식간에 고기가 담긴 가죽주머니로 변화해간다. 한 발 더. 한 발 더. 한 발 더. 몇 명이 더 쓰러진다. 비명소리가 전차 안에 울려 퍼진다. 겁에 질린 사람들이 옆 차량으로 마구 뛰어간다. 짓밟히고 짓밟는 사람들. 나는 구두와 정장의 덩어리들을 향해 미친 듯이 총을 쏜다. 비명소리. 괴성. 총성. 화약 냄새. 나는 끊임없이 쏜다. 부순다. 죽인다. 내 가슴 속의 답답함이 방아쇠를 한 번 당길 때마다 조금씩 풀려간다. 어느새 눈물이 한 방울 흘렀다.
총알이 다 떨어지고, 나는 서류가방에서 탄창을 새로 꺼내 끼운다, 또 쏜다. 또 한 발. 또 한 구의 시체. 아수라장. 시체. 시체. 시체. 도망가던 늙은이의 머리통이 박살난다. 그 나이를 먹고서도 살고는 싶은 모양이지. 피투성이로 쓰러진 어느 여학생의 얼굴을 짓밟으며 도망치는 사람들을 쫓는다. 더 죽여. 다 죽여 버리겠어. 너희가 만든 세상이니까 너희가 처리해.
탄창을 한 번 더 갈아 끼운다. 이미 수십 명은 넘게 죽었다. 마지막 객차에 도착해서 남아있던 사람들을 전부 쏴 죽인다. 차량 끝에 어느 여자가 한 명 있다. 그녀는 열 살 즈음 되어 보이는 어린아이를 안고서 벌벌 떨고 있다. 나는 여자의 머리에 총을 쏜다. 피가 튄다. 여자의 두개골이 부서진다. 열 살짜리 꼬맹이는 넋 놓은 표정이다.
죽고서도 여자의 팔은 아이를 감싸고 있다. 무얼 지키려고? 미래? 우리들의 미래는 이미 오래 전에 과거에게 목이 졸려 죽었다. 남은 것은 천천히 썩어가는 시체 뿐. 우리를 구원할 방법은? 없다. 파괴당하는 수밖에. 파괴와 폭력만이 우리에게 남은 마지막 수단이다.
한 발 더. 이미 죽어있는 여자의 몸에 총알을 더 박아 넣는다.
우리는 구원 받지 못할 것이다. 부숴야 할 것 밖에 남은 것이 없다.
한 발 더.
의사선생, 당신이 틀렸어. 내가 옳았다고. 이게 세상의 진면목이야.
나는 아이에게로 다가간다. 그 녀석은 울지도 않고 정신을 놓고 있다. 나는 아이의 하얗고 작은 손에 묵직한 권총을 쥐어 준다.
「자, 꼬마야.」
아이는 손에 힘을 넣지 못해서 자꾸만 권총을 떨어트린다. 나는 억지로 그 손에 총을 쥐게 한다. 똑바로 들어.
「이제 네 차례야.」
녀석은 여전히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지도 못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남은 건 너밖에 없어. 정신을 차려. 이제부터 네가 할 일에 집중해.
「장전은 되어있어. 그냥 방아쇠를 당기기만 하면 돼. 여기에.」
나는 총구에 내 머리를 들이민다. 미간에 뜨겁게 달궈진 쇠의 감촉이 느껴진다.
「나는 네 엄마를 죽였어. 이제 네가 날 죽일 거야.」
내가 하는 말 정신 차리고 들어.
「명심해, 우리는 누구든지 죽일 수 있어. 뭐든지 부술 수 있고, 전부 다 불태워 버릴 수 있어.」
그때까지 넋을 놓고 있던 아이의 얼굴이 일그러지기 시작한다. 울려는 것 같다. 그 녀석은 이제 자기 힘으로 권총을 들고 있다.
「쏴.」
녀석이 양손 검지로 방아쇠를 당긴다. 뇌수와 함께 내 언어체계가 산산조각 나기 직전에 내가 가까스로 중얼거린다.
잘했어.
내 최초의 아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