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두 시, 이상한 탄생



매끈하게 압착된 질 좋은 종이를 나는 몇 번이나 쓰다듬는다. 책상 위에는 잉크가 거의 다 닳은 볼펜, 그리고 그 뒤에는 수정액이 필요가 없는 오피스 문서 프로그램이 스크린에 떠있다. 왜 볼펜을 쥐고 종잇장을 난도질 할 때는 나의 영혼이 하얗게 터질까. 푸른곰팡이가 핀 타자기를 두드릴 때 나는 공허한 망상에 빠진다. 빗소리 나지만 비는 오지 않는다. 축축한 여름밤, 새까만 창문은 사고의 방벽이다. 바깥으로부터 오는 것을 막는 것이 아니라 내 방 가득히 찬 분열과 모순의 사고들을 흙으로 만든 방패처럼 지키고 있다. 나의 필기는 폭력이다. 잉크로 그어놓은 나의 문장들을 보면, 그것들은 당장이라도 종이로부터 뛰쳐나갈 듯 들썩거리며 고통이 담긴 조소로 입술을 찢는다. 내 방에는 공간이 없다. 죽은 이들의 시체와 그에 대한 존경으로, 내 방은 빽빽이 들어차 고대의 피들이 무릎까지 차오른 듯하다. 단 하루라도 해가 뜨지 않는다면 좋을 것을. 창밖에는 아무도 없다. 나는 약에 몹시 취해 나의 손가락은 취객처럼 비틀거린다. 이것 봐, 자네 자신조차도 자네의 미학을 개념화하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어느 날 할아버지는 술집에서 배갈인줄로만 알고 빙초산을 한 병 들이마셨다. 고통스럽고 취해있는 할아버지를, 아버지는 업고 달렸다. 아버지, 매일 같이 당신을 찾으러 대폿집을 돌아다니는 것은 즐거운 일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선한 아버지, 당신이 영혼의 자유에 목을 매고 미소와 함께 무너져버리는 것을, 나는 먼 미래에서 보았습니다. 더러는 그것이 영혼의 자유가 아닌 영혼의 부유였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낯선 사내는 닫힌 방문 안에서 타자기를 두들기고 눈물을 삼키다가 흉터처럼 깊은 선을 잉크로 종이에 새긴다. 시간은 기억에 맡겨졌다. 그리고 기억은 사생아의 출신에 의해 꿈틀거리는 진흙탕이 되었다. 광기의 문! 모든 애매모호한 과거들이 그 뒤에 갇혔다.


내가 태어난 혈액은 짐승과 소시민의 피였다. 그러나 나는 돌연변이였다. 나는 아무런 근거도 없이 돌연히 태어나고 말았다. 나는 도덕과 윤리를 이해하지 못했고 사회 통념과 법률은 나를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내게 빠져버린 조각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의 조각이었으리라. 어머니, 당신의 손을 잡아도 될 까요. 너무나 약하고 작아져버린 당신은 이제 두렵지도 않고 안쓰러울 뿐입니다. 내가 증오했던 사랑하는 어머니. 더 이상 당신을 탓하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겠지요. 그러나 밖은 바람도 불지 않는다. 나는 줄곧 사생아의 기분을 느끼며 살았고 줄곧 사생아였다. 삶을 앞에 두고도 웃는 사람들 사이에 낯선 사내는 아름다움이 무엇이었냐며 자문한다. 허나 사내는 펜을 쥐거나 타자기를 두드리기만 할 뿐, 별을 보지 못한 지도 오래 되었다. 사방 가득하던 밤 벚꽃들은 모두 하늘로 날아가 버려, 벚나무는 까맣고 깡마른 노파의 손처럼, 그저 그림자를 움켜쥐고 정적 속에 침묵한다. 안녕, 삶들이여. 안녕, 떨어져버린 꽃잎들이여. 안녕, 너무 빠르게 늙어버린 내 영혼이여. 안녕. 그래도 나는 휴머니스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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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살 위의 정신

글/시 2016. 6. 11. 03:21 |

학살 위의 정신



하늘은 잿빛

그 많던 비둘기들은 모두 자취를 감췄다

새벽의 거리엔 습기가 서리고

하늘로 빨려 들어가 사라져버린 것들에 대해

남자는 추억한다

집 잃은 흰색 개들도

이젠 어딘가에 뼈 밖에 남지 않았으리


오래 전 어린아이가 하나 죽었다.

혹은 최근일지도 모른다

그때 그 아이를 껴안고 눈물 흘리지는 못했을지언정

그 작고 더럽혀진 손이라도 잡아줘야 했을 텐데, 라고

남자는 생각한다, 공포에 질린 채

소름끼치게 뜨고 있던 눈이라도 감겨줘야 했을 것을


장례식은 그 누구의

발도 닿지 않은 대학로의 어느 어두운 골목에서

천천히, 지루하게 진행되었다

새까만 그림자에 모자를 푹 눌러 쓴

검은색 조문객들은 모두 진탕 취해있었다

이봐, 그 아이에게 가족이 있었던가?

나이 많은 형이 하나 있었어, 그러나

지금은 보이질 않는군, 하며 그들은 수군거렸다


동이 트자 조문객들은 사라져버렸다

연기처럼, 혹은 안개처럼 그러나

죽은 아이가 담긴 관은 아스팔트

위에 방치되어 있다가, 어느 친절한 행인에 의해

우표가 붙어 남자에게로 배송되었다


새벽 거리 남자는 줄담배를 태운다

폐가 미치도록 아파…… 그러면서 남자는 웃는다.

어린아이가 죽지 않는 것은 죽는

것보다 더 커다란 비극이고

하늘은 잿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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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 모든 절망을 당신께



그는 담배꽁초를 보지도 않고 내다버린다

저 그림자 뒤의 세월들도 그렇게 내다버려졌으리라

눈길조차 받지 못하고, 검은

나무 그림자에 묻히는 쓰레기처럼

시간이 흐르고 빗방울이 떨어지면

그의 세월도 담배 필터도 물에 불어 그늘

밑에서 비밀스럽게 비대해지리라.


석양이 지기 시작하면 남자는 골목 사이로

천천히 사라진다. 내 눈은 그를 좇다가

결국 눈물처럼 내가 쥔 오래된 시집의 한쪽 한쪽마다

책갈피가 되어 꽂힌다. 나는 중얼거린다,

여보게, 너는 도대체 언제부터 감명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연구하기 위해서

차가운 몸뚱어리가 된 작가들의 책을 읽기 시작했나?

그 차가운 계절에는 도대체 얼마나 되는

책갈피들이 무수히 책장 사이에 꽂혔는지


아직 태양이 떨어지기 전에, 남자가 섰던 자리에

나는 서서 내 그림자를 돌아보았다 그 치명적인

공간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더러는 보이지 않았을 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나는 금성이 떠오를 무렵에야 길거리에 선 채

기억해냈다. 한 때는 깃발과 창을 높이 쳐들고

세계에게 분노의 목소리로 강론을 하는 것이 필연

이었고 의무였던 때가 있었지

그런데 지금은 모든 잎들이 지고

고엽이 굴러다닐 뿐인 정적의 차도―그 재물들의 사상 위에

정신은 버려지고 혁명은 물론이거니와

반란도 유물이 되었다


내일도 저녁 아홉 시가 되면 병동의 문이 잠길 것이고

나는 불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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