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역(誤譯)을 위하여

글/시 2016. 5. 18. 04:35 |

오역(誤譯)을 위하여



1.

나 아직도 꿈을 꾸매

나태에 꿀을 뿌려 벌레들이 갉아먹게 하고

새벽이 가장 짙은 시간에 잃어버린 것들이 몇인가

셈을 하네.


내가 사죄해야할 것이 있으니,

나 신(神)과의 약속을 저버렸네.

아직도 내 목 잘라가지 않는 것에

가장 고통 받는 것은 나 자신이니.


너무 많은 영혼들이 내 추래한 육신에

비좁게 들어차있네.

고로 그것은 자꾸만 나를 가볍게 만들어

나는 전봇대에 묶인 헬륨풍선과 같네.


판사도 검사도 없는 세상은

오히려 정의라는 망치로 사람들의 두부를 깨부수던

그때보다도 숨이 턱턱 막혀

나의 작은 아나키, 내 심장을 파먹는 역병과 같네.


욕망이 없다는 것이 결국에는

가장 비극적인 인간상이라는 걸 깨닫고

나 삶 아니면 죽음에라도 탐닉하려 했건만

이미 모든 게 늦어, 나 모든 이들의 눈에 보이는

환영처럼 되어버렸네.


봄의 창문에 기대 해가 천천히 떠오르는 것을

길가의 아지랑이로 추측하며 나는

그것이 진실임을 알았어.

아지랑이만이 진실임을.


울려라, 태양으로 만든 징아

나 단 한 번만이라도 이 세계의

진짜 소리를 듣고 싶으니, 울려라.

공허 속에 뛰노는 환영인 나를 열파로 태워버려라.


리볼버에서 터져 나온 화약 냄새를 맡았을 때

잠깐이지만 나는 희열을 느꼈어

내가 생명력을 갖고 있다는 착각에

나는 고함치고 싶을 정도로 희열을 느꼈어.


묵직한 총신의 금속성 반동이 내 손에 닿을 때

나는 내가 손을 갖고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고

아무것도 조준하지 않고 초원을 향해 여섯 발을 발사했을 때

상상과는 너무 달랐던 그 화약 냄새에

나는 새삼 깨달았어.


오로지 전쟁만이 날 존재자로 만드는

수단이자 목적이라고.



2.

나는 폭력과 피가 근절된 모던한 도시로 돌아왔지.

사람들은 탄피 대신 금화를 떨어뜨리고

화약 냄새 대신 네온과 메탄가스의 냄새가 나고

탄환 대신 성애를 분출해.


죽은 코요테의 뼈를 내려다보며 석양을 기다리던 곳에서

서류를 전산망에 입력하는 밤의 사무실로 돌아오자

지독한 혼란이 내 뇌를 짓이겼어

그런데도 이곳에서는 여전히, 사람들은 예수를 모시지.


「신은 죽었다. 이제 우리는 초인을 필요로 한다.」

그렇게 말하고 백년. 하고도 16년.


모든 것이 애매하고 중첩된 이 시대에

우리는 입을 꿰매버리는 수밖에 없었지.

지금도 사람들은 눈을 감은 채

또 한 명의 히틀러, 또 한 명의 스탈린을 바라.


아! 그래, 의식적으로 도덕을 믿지 말도록 하자.

수단은 누가 되든 상관이 없어, 오로지

인간들의 영혼이 전쟁상태에 돌입하기만 한다면

우리는 부활할 거야.

진정한 의미의 부활.


신이 아직도 내 목에 낫을 가져다대지 않았으니

나는 이것을 계시로 알고 계시로 삼겠다.

더 고통 받으라고, 더 비참하라고, 더 울부짖으라고,

더 나 자신의 무력한 정신을 저주하며 무엇이든 써내려가라고.


이 시대정신에 필요한 것은 파괴고

붕괴이며

타락과

퇴폐와

소각이다.


루브르 미술관이 불태워질 때

우리의 영혼은 부활할 거야.


가장 아름다운 것들이 가장 추한 것이 되고

가장 추한 것들이 가장 아름다운 것이 될 때

우리의 영혼은 부활할 거야.

역설적이게도, 미래를 위하여.



3.

이 이야기의 논점은

사실 우리는 이미 죽어있다는 것.

이 이야기의 교훈은

사실 우리는 점점 더 자신을 죽이고 있다는 것.


무정부상태라는 것도 사실은 정책의 하나에 불과하고

나는 아직도 꿈을 꾼다.

텍스트로 기술 가능한 모든 것들은 실상 허구이매

그래서 우리는 텍스트를 초월하는 것을 텍스트로 만들려 했다.


인류가 언어를 발명했던 시점부터

전 인류의 정신분열증은 이미 발병하기 시작했었다.

뇌내의 강렬한 환각을 언어로 표현하지 못할 때

나는 가슴을 쥐어뜯으며 비명소리를 냈다.

손톱이 만들어놓은 작은 입에서 핏방울이 흐르면

칼리굴라처럼 슬퍼했다.


내가 과연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을 때는

너무나도 날고기가 먹고 싶었다.

이윽고 감정의 수원지에 연결된 파이프가 터진 것을 보고

뼈가 아프도록 술을 마셨다.


나는 아직도 이상한 꿈을 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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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가장 혐오했던 것은 어쩌면 나의 거울일지도 모른다



눈물을 흘릴 때 가슴에 칼을 긋는 것은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지.

80만 원짜리 러닝머신 위에서 뛰거나

어느 밤 옥상 위에서 노래를 부르거나

혹은 충분할 만큼 눈물이 나올 수가 없기에.


자신의 피부 위에 핏방울이 송골송골 맺히는 것을

그것을 눈물의 또 다른 형태라고 이해하는 것은

연인을 껴안아도 가슴 속에 공허한 바람이 불고

가족의 손을 잡아도 온기가 느껴지지 않고

줄담배를 피워도 영혼의 아픔이 잦아들지 않기 때문이지.


대낮에 소주에 흠뻑 취해

축축한 장판 위에 나동그라져 있는 것은

그 순간만이 아프지 않기 때문이지.

사실은 내가 술을 먹는 것이 아니라

내가 현실에게 술을 먹이는 것이야.

어쩌면 그럴 때 나는 세상의 비극 속에서 가장 아름답지.


술에 취해 정신을 잃으면 나의 눈물샘에서

에틸알코올 한 방울이 덧없이 떨어지는데

어쩌면 그 장면은 세상에서 가장 역겨울지도 모르지.

숙취 때문에 쪼개질 것 같은 머리로

한 새벽에 신경안정제와 발리움을 찾아 서랍을 뒤지는

그 장면보다 더욱 더.


아주 오랫동안 이성에 의존해 입을 열려고 했지.

그랬더니 그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어.

그래서 나는 이 가슴에 공허와 광기를 키웠지.

너무 지쳤었기에.


기껏 꿰매놓은 가슴의 흉터를 다시 찢는 것은

아무래도 그 안에 무언가가 있는 것 같기 때문이야.

어쩌면 그 붉은 피는 나의 피가 아니라

내 늑골 속에 사는 짐승의 눈물이 아닐까?

꿈틀대는 거대한 기생충의 체액이 아닐까?

동굴 안에 혈거짐승이 살고 있는 것처럼

내 공허 속에 무언가가 살고 있어.


오, 아버지. 어찌 저를 버리지 않으시나이까.

자의적으로 절벽에서 굴러 떨어져

발목이 부러진 채,

나를 못 박을 십자가를 누군가가 가져와주기만을 바라는

나를.


안녕, 여러분. 나는 직장동료를 만나면 웃으며 인사하지.

최근 별 일 없지? 안부를 묻고

그러나 나는 바위에게도 웃으며 인사하고 안부를 물어.

그리고 백일몽 같은 낮이 지나가고

내 영혼이 고요히 우는 새벽 밤이 되면

나는 얼굴 없는 고무인형이 되어

펜을 쥔 채 죽음을 기다리지.


만일 당신이 새벽 세 시에 우리 집 문을 열고 들어온다면

당신은 망가진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있는

인형 같은 이상한 물체를 보게 될 거야……

그것은 코도 없고 입도 없는데

섬뜩하게 눈을 뜨고 축 늘어져있겠지.


놀라지 마. 그것은,

필사적으로 살아남기 위한 발버둥의 잔해인

소위 「인간」이라고 불리우는 것이니까.

Posted by Lim_
:

H. 노바크와 모든 문명에게 바침



1.

나는 말레이 여자 마라를 상상한다.

적도에 세워져 무너진 도시를 상상한다.

해안에 따개비 무리처럼 낮고 빼곡하게

흙으로 지어진 마을들은 아주 조용히 먼지가 되었다.

무너지는 것은 높은 것들이다.


창촉 같은 태양빛이 무작위하게 내려쬐어

높은 건물들은 갈라지고 추락했다.


말레이 여자 마라는

무너져 인동덩굴과 온갖 이끼류로 뒤덮인

거대한 건물들의 폐허 밑에서

표범 토오와 함께 잠들어있다.


2.

문득 나는 일본에서 보았던

아주 촘촘하게 숲을 이룬 침엽수림에 대해 생각한다.

이제 나는 데이비드 소로우가 감자를 심던

작은 텃밭과 오두막을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최저한의 문명도

내게는 아직 달갑지 않다.


3.

나는 너를 상상한다.

청계천 주변 무너진 은행가를 뛰어다니는 노루를

직접 만든 올가미 그물로 잡고

땅 밑에 파묻힌 교보문고와 영풍문고 본점에서 끄집어낸

책들로 불을 피워 노루고기를 익히는 너를.


광화문에 있는 녹슨 이순신 장군 동상에는

햇빛을 잘 받으라고 내장이 제거된 생선들이

주렁주렁 매달려있다.

여름이 끝나기 직전 멧돼지 가죽을 입은 여자들이

충무공을 타고 올라 말린 생선을 모아올 것이다.


어느 순간 적도의 숲에서는 불이 난다.

내가 사랑했던 시에서 말한 것처럼

불길은 광기처럼 타오른다.

나무들이 죄 재가 되고 나면 그것은 양분이 되어

새로운 나무와 풀들을 키울 것이다.

너는 마라와 함께 그것을 본다.


너는 대나무로 깎은 창을 쥐고

갈색으로 변한 의정부 시내의 이성계 동상 옆에서

앉은 채로 낮잠을 잔다.

가끔 야생마들이 갈라진 국도 위를 뛰어가고

성형외과와 아로마테라피 샾의 광고간판으로 번쩍이던

드높은 빌딩들은 허리가 꺾여 영장류들의 집이 되었다.


바다가 보고 싶으면 너는 가을 전에 준비를 한다.

말린 고기들을 돌로 만든 바늘로 꿰어

허리에 감고

고라니 가죽을 덧댄 웃옷으로 바닷바람에 대비한다.

이젠 아무도 없는 주한미군 캠프에서

어렵사리 잭나이프 하나를 찾아내

칼날을 무두질한 돼지가죽으로 감싸고 서쪽으로 걷는다.


네가 서쪽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유일한 증거는

밤하늘의 별이다.

너는 너무나 당연하게도 그것을 알고 있다.


네가 해안에 도착했을 때

너는 이렇게 생각한다. 「여기가 아마도 인천일 거야.」

해안가의 도시들은 이미 쓸려나가

곱고 빛나는 모래가 되어 네 발밑에서 굴러다닌다.

작은 게들이 바쁘게 돌아다니고 구멍이 송송 난 해변에서

수평선을 보면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주 오래전에 가라앉은 유조선이

새까만 석유에 둘러싸여 선체 앞부분만을 수면 위로 내놓고 있다.


여긴 아직도 가솔린 냄새가 나고

깃털에 석유가 들러붙은 채 말라죽은 새들의 시체가

해변 곳곳에 널려있는 것을 너는 본다.

너는 매년 한 번씩 이곳에 온다. 그것은 너를 기쁘게 한다.

그리고 너는 매년 한 번씩 여의도로 가

풀썩 주저앉은, 한때는 황금색이었지만

지금은 암녹색과 녹슨 철근의 색으로 변한 마천루를 본다.


넌 갈대줄기로 화살을 만들고

어린 대나무로 활을 만들고

강북구에서 창을 던져 사향노루를 잡고

간석기로 늑대 가죽을 무두질해 옷을 해 입는다.

너에게는 표범 가죽으로 만든 옷도 있었지만

그걸 입으면 토오가 앞발을 휘두르며 위협하기에

흙속에 묻으라는 마라의 조언을 따랐다.


밤이면 너는 서점에서 발굴한 책들을 태워

모닥불을 피우고

나이프를 쥔 채 그 옆에서 잠든다.

사위는 새까맣고 어디선가 동물 울음소리가 들린다.

밤바람에 나뭇잎들이 바스락거리고

올빼미와 소쩍새 우는 소리가 난다.


그런 너를

나는 상상한다.

Posted by Lim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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