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개인은 무엇에 의하여 현존하는가, 그리고 세계와 개인 사이에는 선험적으로 무엇이 실재하는가.
1.
인간은 매일 아침, 잠에서 깨어날 때마다 세계의 일부분을 차지하거나 혹은 상으로 그리면서 꿈에서 헤어 나온다. 가장 단순한 차원에서 생각했을 때 세계의 현존(혹은 그렇다고 생각하는 마음)을 인식하는데 큰 역할을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시각이다. 인간은 세계를 <본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단순한 직관에 의하여 이 행성의 수많은 사람들은 세계가 원래 존재하는 것이라고, <그대로> 존재하고 존재했으며 존재해갈 어떤 절대성의 개념이라고 착각해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깊은 고찰이 없는 저차원의 오감만을 의지하여 어렴풋이 품고 있는, 생각조차 아닌 부유하는 관념에 불과하다. 우리는 <본다>는 것에 대한 더 격렬한 사유를 필요로 한다.
맨 처음의 봄-보임을 생각해보자. 개인이 최초로 눈을 떴을 때, 개인은 세계를 <본다>. 그런데 사실은 그 세계라는 것은 그 전부터 존재하던 것이 아니라, 개인이 눈을 뜨는 순간 탄생하는 것이다. 관측되지 않는 사물은 관측 당할 때까지 실재하지 않는다. 개인이 눈을 떴을 때 세계가 탄생하고, 그리고 <개인이 눈을 뜬>다는 것은 즉 그 순간 개인 또한 탄생한다는 뜻이다. 관측되지 않는 사물이 존재하지 않듯이 감각하지 않는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영아 발달학의 영역에서 생각해보아도, 신생아들은 자신의 감각을 규정지을 능력이 없어 자신이 <자신>인지조차 모르는 채로 한동안을 그저 어리둥절한 채로, 스스로 불확정성의 영역에 붙잡힌 채 존재하지도 존재하지 않지도 않는다고 한다. 즉 개인의 탄생과 세계의 탄생은 동시에, 마치 전자와 양전자가 동시에 태어나듯이 쌍으로 탄생해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이미 시작부터 세계의 절대성을 부정하는 문장을 들이밀었다. 이 개념을 순차적으로 설명하기에는 너무 근원과 결과가 뒤엉키어 복잡한 문제였음을 이해해주시기 바란다. 여하간, 세계가 절대적이지 않은 이유는 개인과 세계의 <동시존재>성에 근거한다. 개인은 탄생하는 순간 세계를 목격한다. 목격한다는 것은, 단순히 생물학에서 얘기하듯 시신경이 빛의 반사가 만들어낸 상을 해석하는 것만의 의미가 아니다. 20세기의 현상학자가 <멀리서 소유하다>라고 말했듯이, 세계와 동시에 탄생한 개인의 세계에 대한 목격은 말 그대로 세계에 대한 <소유>다. 개인의 탄생이 세계의 탄생을 만들어내고 세계의 탄생이 개인의 탄생을 만들어냈듯이 그들은 서로를 근거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개인은 세계를 목격할 때 단순히 시각작용으로만 세계를 보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목격하는 순간 세계의 <상(狀)>을 내면에 품는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소유라는 단어를 사용했던 것이다. 여기서 굉장히 미묘한 작용이 일어나는데, 개인과 불가분한 세계와의 관계는 서로를 포괄하면서 동시에 서로를 마주보는 이중적인 상태를 낳고 만다. <마주본다>는 것은 시각이 있는 둘 이상의 개체가 서로를 인식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내가 개인과 세계가 마주본다고 말한 만큼, 세계 또한 시각을 가진다는 뜻이 된다. 그런데 그 시각을 가진다는 것은 세계가 의지가 있다는 식의 신비주의적 의미가 아닌, 좀 더 복잡미묘한 세계라는 개념의 <이중적 현존>에 근거를 둔다. 여기서 개인의 내면에 품어진 세계의 상을 다시 상기할 필요가 있다. 세계는 개인의 <안>과 <밖>에 동시에 존재한다. 그리고 그들은 양자얽힘 현상으로 관계 지어진 입자들처럼 서로에 대한 포텐셜을 가지고 있다. 실제로 시각이라고 할 만한 것을 가진 세계는 개인의 <안>에 있는 세계다. 그것은 이미 개인이라는 인간정신작용의 영향력 내에 있기 때문에, 개인과 어느 정도 동화되어 <밖>을 내다볼 능력을 가진다. 즉 이미 세계의 상을 품은 개인이 <밖>의 세계를 인지할 때 <안>의 세계 또한 <밖>의 세계를 인지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이러한 이중적 현존에, 안과 밖에 있는 각각의 세계가 <다르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애당초 쌍으로 발생한 개인과 세계라는 그 샴쌍둥이 같은 관계에서, 개인이 관측하는 세계만이 세계일 때 개인의 내부에 있는 세계의 상은 관측에 의한 인지이며, 그렇기 때문에 내부의 세계가 유동적이라고 한들 밖과 안의 각각의 세계는 의미적으로 동일한 세계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개인과 세계는 서로를 포괄하고, 서로를 소유하며, 서로를 인지하고, 서로를 관측한다. 그리하여 이 행성에는 약 70억 개의 세계가 존재한다.
그런데 여기서 가장 인간적인 의혹이 생겨난다. 개인의 정신작용이 개인 내부의 세계를 유동시킬 수 있다면, 그리고 내부의 세계와 외부의 세계가 의미적으로 동일하다면, 도대체 어째서 이 행성의 그 수많은 사람들은 <세계로 인하여 고통 받는가>? 제일 먼저 내가 말할 것은, 인간은 기본적으로 망쳐져-미쳐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차라리 산산조각으로 분열되어있다(즉 통일되어있지 않다)고 말하는 게 더 의미적으로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가장 본질적인 영역에서, 인간은 자신이 누구인지 전혀 알지 못한다. 이름은 남이 붙여준 것이고, 생김새나 목소리는 유전정보에 의해 구축된 일종의 건축물일 뿐이고, 심지어는 성격이나 개성조차도 의식이 발생한 후에 후천적으로 쌓아올린 <외부의>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게다가 인간은 단세포 생물처럼 단 하나의 생명만으로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수억 수조 개의 세포들이 거듭거듭 죽고 태어나면서 몸을 유지시키고 뇌수는 좌뇌와 우뇌를 분리하기만 해도 각자의 의식이 있는 것처럼 따로따로 행동한다. 차라리 정신작용만이라면 문제는 더 쉬울지도 모르나 정신은 마음이라는 작동 메커니즘조차 해석이 불가능한 무언가와 연결되어있으며 어떤 학파들은 영혼이나 무의식의 존재까지 부르짖는다. 인간이 <자신이 무엇>인지를 알고자 할 때 실증주의적 과학이나 분석학적 서양철학은 도무지 도움이 되는 일이 없다. 단지 사막의 신자들은 그것을 성령(聖靈)이라고 하고 붓다의 제자들은 불성(佛聖)-자성(自性)이라고 하며 프로이트 학파 정신의학자들은 그것을 리비도나 이드 따위라고 하고 융 학파 정신의학자들은 집단무의식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단순히 객관의 눈을 갖고 인간을 보면 그것은 도무지 이해될 수 없는 다면적이고 다원적인 혼란과 혼돈의 덩어리 그 자체다! 단적인 사실로는 인간은 자신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경우가 허다하다. 물론 많은 수행자들이 <자신>의 위대한 통일로 가는 구도의 길을 걷고 있다지만, 그들도 마구잡이로 태어났을 때는 마구잡이인 인간이었다. 그래서 나는 <인간은 기본적으로 망쳐져-미쳐있다>고 판사가 나무망치를 두들기듯 <말해버린>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분명 세계를 탄생시키는 것은 개인이고 동시에 개인을 탄생시키는 것은 세계라고 말했지만, 그 <개인>이라는 것이 무슨 한 알의 다이아몬드처럼 견고하고 명확한 것이 아닌 것이 문제인 것이다. 인간은 태생적으로 미쳐있다! 온갖 차원에서 온갖 방법으로 산산조각 분열되어있다! 이런 상황에서 스스로 죽이기도 하는 생물이 스스로 고통 받을 세계로 안의 세계와 밖의 세계를 유도하는 것이 무엇이 이상하단 말인가? 그러하여 이쯤 되면, 의혹의 눈으로 유심히 <세계>를 노려보고 있던 한 의식적 인간의 입에서 이런 말마디가 나오게 된다: 「이런! 너는 <분명히> 나의 적(敵)이다!」
맙소사! 그렇게 말해버렸다! 자신을 포괄하고 있는, 극단적으로 말해서 자기 자신이기도 한 <세계>를 <적>이라고 단언해버렸다! 그는 이제 자신의 쌍둥이 형제나 다름없는 세계를 향해 단도를 치켜들 준비마저 하고 있다. 그런데, 의외로 이것은 사실 세계-개인의 탄생의 최초부터 어느 정도 예견된 일이었다.
2.
대상이 주체가 되고 주체가 대상이 되고 그 주체와 대상이라는 것들이 서로를 포괄하면서 동시에 마주보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나는 이야기의 첫머리에 의도적으로 생략한 부분이 있었다. 세계와 개인이 서로 동일하게 탄생할 때, 사실은 그 둘만 태어난 것이 아니었다. 개인이 눈을 뜨고 세계와 개인이 뒤섞여 하나가 되면서 동시에 서로를 멀리서 마주보고 소유할 때, <부조리라는 인식> 또한 은근슬쩍 태어났었던 것이다.
처음에 그것은 인간의식의 수준에 영향을 받는 지라 아주 미약한 영향력 밖에 가지지 못했다. 존재의 저변에서 그림자처럼 때때로 꿈틀거릴 뿐인 왜소한 것이었다. 최초의 시기에는 그저 가끔씩 마주치게 되는 <이상함>이라는 느낌에 어리둥절하게 만들 뿐이었다. 그러나 의식이 높아지고 관념이 체계화되고 인지의 정도가 넓어지자, 그 <부조리라는 인식>은 점점 더 엄청난 위력을 가지게 된다. 나는 위에서 분명히 인간의 기본적 미쳐있음에 대해 말한 바 있다. 그리고 그것이 개인의 <정신의식>과는 합치되지 않는 <세계>를 생성하도록 유도한다고 말했다. 그렇기 때문에 애초부터 개인과 세계는 서로가 불가분의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못마땅한 감정>이 개인의 <어떠한 정신적 믿음>에 의해 발생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여기서 대다수의 인간들은 자신이 세계의 원점이자 소유자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점도 한 몫을 한다. 그래서 발생하고 마는 것이 <부조리라는 인식>인 것이다. 함께 태어나 쌍둥이보다도 더욱 가깝고 절대 갈라질 수 없는 두 개념이, 탄생의 첫 만남부터 불똥 튀는 서로에의 갈등을 이미 품고 있는 상황이다. 시간이 갈수록 갈등은 과격해지고 격렬해지며 벽돌로 벽돌을 가는 것처럼 온갖 소음과 열기를 뿜어낸다. <부조리라는 인식>은 점점 커져가고, 마침내 인간의 반항적 광기가 <개인의 현존>과 동일한 위치에 서게 되었을 때, 위에서 말하였듯이, 개인은 말하고 마는 것이다. 「너는 내 적이다.」
이로서 개인-부조리-세계의 트라이앵글이 완성된다. 그런데 그 트라이앵글이란 사실 밀집된 하나의 진흙탕이기도 하다. 혹은 그저 어떠한 문장도 완결 짓지 않는 독립된 방점이다. 더러는 한 인간의 요약본 그 자체다. 대체로 이러한 관계는 <죽음>까지 연결된다. 이미 뿌리가 같은 세 그루의 나무인 탓에, 셋 중 한 그루만 시들어도 나머지 두 그루까지 전부 죽어버린다. 개인이 피로와 탈력에 지쳐버리든, 부조리가 패배주의와 허무주의에 밀려나 절벽으로 굴러 떨어지든, 세계가 어떠한 방식으로 황폐화 되든……. 사실 그 셋은 하나의 본질 밖에 갖고 있지 못하다.
이것이 너무 니체적인 결론이라고, 시대착오적 세계인식이라고 말하는 호사가들이 없기를 바란다. 나는 그저, 지금 내가 진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주었으면 한다. 내가 말하는 것은 현상이다. 그것도 가장 <태생적인> 현상이자 <시작점>의 현상이다. 나는 애당초 이 짧은 논고를 결론이라고 조차 생각하지 않는다. 이것은 <대체적으로> 인간의식의 첫걸음을 지배하나, 가던 길을 바꾸기만 하면 또 달라져버릴 결과다. 첫 번째 파트에서 나는 세계와 개인의 불가분한 서로에 대한 의지, 또 그로인한 <동시존재>를 말했고, 두 번째 파트는 어째서 많은 철학가들이 결국에는 투쟁에의 의지와 반항하는 존재로서의 형상으로 거의 선험적 방점을 찍게 되는 지에 대한 내 나름의 해석이었다. 나도 아직 길을 가는 중이다. 그러나 나는 길을 가면서도 부릅뜬 눈으로 몇 줄기의 다른 길들을 유심히 관찰하고 있다. 내가 아직 결론이 되지 못했는데, 어떻게 결론을 낼 수 있겠는가?
2016/7/26 납운당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