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하는 후배가 부탁한 글.
제목조차 내가 정한 게 아니다. 그가 제시한 네 개의 낱말을 순서만 맞췄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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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정체성, 비극, 긍정, 광기
부조리 철학에서 이 우주를 구성하는 것은 크게 세 가지이다. 그것은 인간, 세계, 그리고 부조리다. 여기서 말하는 부조리란 군대에서 이등병이 자살하는 등의, 사회인들이 텔레비전 너머에서 욕설을 내뱉게 만드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설명컨대 인간은 탄생과 동시에 하나의 개인으로서 존재한다. 그리고 인간이 개인이 되는 순간 세계는 인지되어 탄생한다. 그 세계는 개인의 밑이나 그림자 뒤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치 적군이나 원수처럼 개인의 눈동자를 마주보며 거대한 크기로 위협한다. 그러한 시선의 마찰에 불똥이 튀는 순간에 부조리라는 것이 탄생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개인-부조리-세계의 관계는 철저하게 필수적이며 필연적인 것이고 약간의 조정이나 타협은 가능하지만 인간의 영혼이 사멸하는 순간까지 멈추지 않고 존재한다.
서술을 약간 이르게 시작했다. 그러나 위에서 말한 것들은 근대에 출판된 철학논고들만 읽어도 알 수 있는 부조리 철학의 가장 기본적인 사실에 불과하기에, 굳이 기다란 문장을 만들지는 않았다. 중요한 점은 여기서 시작된다. 인간이 <개인>이 된다는 것은 즉 인간이 자기 자신을 유일한 개체로서 인지한다는 뜻이다. 이것은 아이덴티티라고도 자아정체성이라고도 어떤 특정인의 페르소나의 집합이라고도 설명할 수 있다. 태어난 뒤 막 눈을 뜬 갓난애의 투명한 눈동자가 자신을 포함하고 있는―그러나 자신과는 <다른> 오브젝트를, 즉 세계를 관찰하는 순간 인간은 세계라는 무지막지한 혼돈의 기계에서 떨어져 나와 개별적인 존재로서 자신을 차별화하게 된다.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다는 것은 그리도 쉬우면서 동시에 엄청난 것이다. 인간의 오감 중 하나만 있다면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 세계를 <감지>하고 그것이 <내가 아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것은 개인의 발생이며 동시에 개인-세계라는 통렬한 마주봄의 시작이다. 사실상 인간이 자신의 영혼에 충실하기만 한다면 굳이 발 벗고 나서 자아라는 것을 찾을 일조차도 없는 것이다. 당장 앉아있는 의자의 팔걸이를 손으로 쓰다듬기만 해도 당신은 당신이 세계에서 떨어져 나온 별개의 존재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살아가는 일 하나 하나가 전부 세계에 대한 마찰행위인 것이다. 그 세계에 만족 하는가 불만족 하는가 하는 사고의 영역까지 가지 않더라도, 인간의 존재는 이미 세계를 <적>으로 삼도록 설계되어있다. 왜냐하면 세계는 <내>가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서 탄생하는 것이 앞으로 평생 인간의 영혼을 떨리게 만들 부조리이다. 정리하자면 인간이 개인이 될 때 세계는 인지되어 개인의 적이 되고 그 끝없는 마찰로 말미암아 부조리가 탄생한다.
사실은 이 처절한 삼자관계가 이미 인간개인의 정체성의 기본이다. 특질이나 개성 같은 것들은 그 위에 건축되는 것이다. <나는 나이다>, <너는 내가 아니다>. 이것만으로 개인은 이미 존재(인지)한다. 그리고 인간이 사고를 시작했을 때, 마찰은 거의 극적으로 속도가 빨라진다. 인간의 기본정신은 논리와 로고스(이것을 신이라고도 부른다)를 탐구하고 추구하는 것으로 청사진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세계는 전혀 논리정연하지 않거나 혹은 인간의 지각능력으로는 전혀 논리정연하게 작동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제3세계에서는 아직도 아이들이 먹지 못해 죽어가고 농장에서는 생물들이 경제동물이라는 이름으로 상품화되고 세상 곳곳에서 아무 의미 없는 전쟁과 학살들이 터진다. 태양은 식어가고 인류의 정신은 열화 되어가고 근거를 알 수 없는 범죄들이 사회를 잠식해간다. 아, 이 시점에서 당신은 <그래도 이 우주는 논리와 수학을 기반으로 탄생하지 않았는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물론 물리학적인 시점에서 보면 세계는 극도로 논리적이고 수학적이다. 그리고 그 극도로 논리적이고 수학적인 학문이 말하기를, 뭐가 어찌 되었든 이 우주는 열역학 제 2법칙으로 말미암아 결국 엔트로피 수치가 최대치가 되어 굳어버릴 것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결말도 인간의 논리에게 수긍할만한가? 바꿔 말하자면, 인간에게 이 세계는 극단적으로 철저하고 논리적으로 무자비하고 무의미하고 무작위한 것이다. 불행과 불안은 비처럼 사람을 가리지 않고 무작위하게 쏟아져 내린다. 모든 일들은 잠입자가 설치한 폭탄처럼 아무렇게나 터져대고 막을 방법도 없다.
그러나 보통, 이 사회에 살아가는 일반인들은 이러한 사실을, 자신이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세계와 마찰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아차리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들의 기질로 말미암아 그들의 세계와 그들 자신 사이에서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부조리가 그리 대단치 않기 때문이다. 그저 어떤 비극이나 죽음에 몇 번 탄식하고 말 뿐, 일반적으로 그들의 영혼은 부조리와 분노와 고통으로 난도질당해 울부짖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우리는 많은 예시들을 갖고 있다. 굳이 내가 근대 예술가들이나 철학가들의 이름을 논하는 것을 용서해주시기 바란다. 근대 최고의 지성이었음에도 미쳐 격리병동에서 자신의 배설물을 먹던 프리드리히 니체. 100년의 시간을 앞서간 초현실주의 시인이었으며 역사상 가장 천재적인 정신분열병자였던 로트레아몽 백작. 스스로를 인류사회와 격리시키고 미학추구에만 일생을 바치다 정신병동으로 걸어 들어간 빈센트 반 고흐. 프랑스 문단을 뒤집어엎은 작품을 쓰고 고작 21살에 절필을 선언, 아프리카에서 외다리로 죽은 시인 아르튀르 랭보. 신동이라 불렸지만 탄생 십구 년 만에 사망한 소설가 레몽 라디게. 나열하자면 끝이 없을 것이다. 개인이 세상과 마찰한다는 것은 단순 문장으로 설명하기엔 너무나도 큰 영혼의 소모가 필요하다. 병사(病死)로 죽은 것마저 정신의 극적인 피로로 해석하는 것을 비약으로 볼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을 만큼, 그리고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창조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 만큼 세상과 삶의 불똥 튀는 마찰은 영혼에 기괴한 흉터를 남긴다. 그리고 이것으로 나는 광기라는 것을 설명하려 한다.
만일 인간에게 충분한 시야만 있다면 개인은 내가 말한 세상의 무자비, 무의미, 무가치, 무작위, 그리고 잔혹함을 눈 안에 모두 담을 수 있다. 그리고 그 시점에서 갈라지는 것이다. 수긍할 것인가 반항할 것인가를 말이다. 사실 이것은 선택이 아니다. 사람이 타고난 선험적 기질에 의해 결정된다고 보는 편이 옳다. 알베르 카뮈의 평생의 작품 주제이자 동시에 그의 저작 제목이기도한 ‘반항하는 인간’은 만들어지기 전에 이미 태어난다. 긴말이 필요 없이 수긍할 자는 수긍하고 반항할 자는 반항하는 것이다. 게다가 그자가 창조적 특성을 갖고 있다면, 그는 이미 세계에 대항할 한 자루의 짧지만 예리한 검을 쥐고 있는 것이다. 긴 서술에 들어가기 전에, 수긍하는 자들이 어떤 인생을 사는가를 설명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눈을 감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 건강한 일이다! 자신이 부술 수도 변화시킬 수도 없는 세계와 나 사이의 부조리를, 인정하고 눈을 감아버리는 것은 정말이지 그의 정신건강에는 옳은 일이다. 그들은 그저 살아갈 것이다. 한 때 보았던 혼돈과 광기의 아가리를 기억 밑바닥에 묻어버리려 애를 쓰며 <아무것도 아니게 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편안히 잠들 것이다. 사람을 믿고 신을 믿고 법칙을 믿으며, 세계의 부품으로 되돌아갈 것이다.
그러나 날 때부터 눈동자에 번뜩이는 살의를 품고 있는 자들이 있다. 그들의 지성은 세계를 분쇄하기 위한 것이고 그들의 창조성은 새로운 세계로의 추구를 위한 것이며 그들의 육체는 오로지 익사하기 직전까지 절망적인 헤엄을 계속하기 위한 향일성의 것이다. 그들은 도저히 눈을 감을 수가 없다. 눈앞에 뚜렷이 보이는 세계라는 사랑스러운 적(敵)에게 예리한 단도를 조준할 수밖에 없다. 마찰은 깊고 빨라지고 튀는 불꽃이 반항인의 심장을 지진다. 사방에서 옥죄어오는 부조리라는 현상을 그는 촉각만으로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그는 처절하게 깨닫는 것이다. 자신이 언젠가 죽어 없어질 것이라는 것을. 분명하게도 그는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그런데 그럼에도 그는 허무주의나 염세주의로 빠져들 수 없다. 이미 너무 멀리 왔고,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그의 단도에는 녹이 슬지 않는다. 이제 죽음은 이미 그의 관심사가 아니다. 오로지 삶만이 그의 존재의 주제다. 그리고 삶이란 곧 전쟁이 된다. 오로지 나와 세계라는, 마치 다윗과 골리앗을 방불케 하는 불리하고 패배가 확실한 전쟁이 말이다. 옳아, 승리란 없다. 인간은 죽는다. 세계는 남는다. 이 전투의 끝에는 그저 패배밖에 없다. 그것을 쭈뼛거리며 털이 일어서는 피부로 알고 있음에도 반항인은 전투태세를 풀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만이 그가 할 수 있는, 필멸자의 최선이기 때문이다. 행복도 안정도 안심도 사랑도 희망도 다 목을 그어버리고 마침내 자기 자신이 쓰러질 때까지 전투는 끝나지 않는다. 위버멘쉬(Uebermensch). 그런데 문제는, 인간에게는 죽음 외에도 한계가 한 가지 더 있다는 것이다…….
이 세계 도처에 존재하는 광기의 아가리는 너무도 크고 흉폭하다. 그에 비해 인간의 영혼은 한정적이고 쉽게 상처 입는다. 아무리 위대한 정신의 소유자일지라도, 들끓는 적개심과 혼돈의 한복판에서 평생을 싸우다보면 영혼은 흉터투성이가 되고 닳을 대로 닳아버린다. 자기의문과 회의, 그러나 돌이킬 수 없는 발걸음, 이제껏 손에 묻히고 마셔왔던 나와 너의 피. 아무리 찌르고 베어도 기만하듯이 내려다보는 거대한 세계. 피폐해진 몸과 마음. 문뜩 손을 보니, 자신에게 있는 것이라고는 굳은 피와 한 자루의 단도밖에 없다. 세상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둔감한 인간들은 도대체 그가 무엇과 싸우고 있는지도 모르고, 이해하지도 못한다. 오직 나에게만 보이는 괴물. 세계, 세상, 부조리, 게다가 인류집단, 그들의 문화. 구원도 도움도 없이 이어져온 이 싸움은 도저히 영웅주의적인 것이 아니다. 이것은 평생을 건 자기파괴다……. 아, 그가 잠깐 떨더니 무릎을 꿇는다. 마침내 그는 패배하고야 말았나? 아니야! 그건 아니야. 왜냐하면 그가 다시 일어섰으니까.
긍정.
이 세계 그 무엇보다도 궤멸적이고 기괴한 긍정. 사람들의 수긍과는 180도 다른 곳에 떨어진 긍정. 다시 일어선 그 반항인의 얼굴은 더 이상 진지한 분노도 고통도 새겨져있지 않다. 그는 웃고 있다! 우주만물이 그저 질 나쁜 농담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허무주의도 아니고, 염세주의도 아니고, 실존주의도 아니야. 이건 ~ism조차 아니야. 더 이상 그의 정신 속에는 비극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비극이란 잘 설계된 블랙 코미디다. 어린 학생들 수백 명이 건물 속에서 불타 죽어도, 독재자와 군벌이 무고한 사람들을 가스실로 밀어 넣고 약소부족을 학살해도, 유조선이 폭발해 태평양이 시꺼멓게 변해도. 이것은 죄다 배꼽을 쥐게 하는 농담거리다. 지금까지 고통과 절망으로 흉이 져있던 그의 영혼이, 이제는 고통과 절망을 이해하지 못한다. 사고의 선(Line)이 방향을 바꾸고 뒤틀려버렸다. 모든 일들이 너무 명증하게 와 닿은 결과, 모든 일들이 아무 것도 아니게 되었다. 이제 그는 고통스럽지도 않고 절망스럽지도 않다. 광기가 치유제가 되었다. 이제 절대로, 그 무엇도 그를 상처 입힐 수 없다. 세상만사가 음담패설 같은 웃기는 일이고, 중요하거나 특별한 것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 사람들은 그더러 왜 모든 일에 조소만 하느냐고 하지만, 사실 그건 조소조차 아니다. 당신은 특별하고 소중한 사람이 아닙니다. 당신은 존재조차 아닙니다. 당신은 잠깐 부풀었다 터져버리는 거품방울이고, 파라핀 속에서 연소되는 불꽃같은 현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는 지구라는 거대한 쓰레기통에 버려진, 금세 썩어 부패하고 불이 잘 붙는 가연성 쓰레기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세상만사 심각할 일이 있나.
이리하여 언젠가 태어나 투사가 되었던 개인이라는 <존재>는 광인이라는 <현상>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