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음의 계절
날던 새들은 모두 떨어져 죽었다
농장에는 검은 나무들
파편처럼 서있다
추위에 잠이 든 길고 축축한 짐승들은
깊고 깊은 땅 속으로 도망쳤다.
머리 위에는 천구天球가 아니라
곧 깨져 우수수 떨어져 내릴
살얼음이 얼었다.
지평선도 보이지 않는 땅
내 발밑에서는
서걱대는 발자국 소리만 썰린다.
무음의 계절
날던 새들은 모두 떨어져 죽었다
농장에는 검은 나무들
파편처럼 서있다
추위에 잠이 든 길고 축축한 짐승들은
깊고 깊은 땅 속으로 도망쳤다.
머리 위에는 천구天球가 아니라
곧 깨져 우수수 떨어져 내릴
살얼음이 얼었다.
지평선도 보이지 않는 땅
내 발밑에서는
서걱대는 발자국 소리만 썰린다.
2017/10/22 완성.
1. 나는 글을 쓴다.
2. 나는 일을 한다.
그는 그곳에 있었다
시간은 오후 9시. K는 공원의 벤치에 앉아있었다. 밤이 이르게 오는 계절이라 해는 이미 졌지만 공원은 흰색과 주황색의 빛으로 찬연이 빛나고 있었다. 가로등들이 마치 사람이 만든 보름달 같다고, K는 생각했다. 사람들이 이제 달을 원하는 만큼 만들 수 있게 되었구나. 필라멘트에서 뻗어 나오는 빛살들은 희고 둔한 유리알을 거쳐 파도에 부딪치는 달빛처럼 어지러이, 그러나 둔중한 무게를 가지고 공원을 환히 밝히고 있었다. K는 일부러 골라잡은, 공원에서 가장 어두운 구석에 앉아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눈동자로 공원 전체를 살피고 있었다. 아직 너무 늦은 시간이 아니었기 때문인지 어린 아이들이 자전거를 타며 놀고, 부모들은 서로 어깨를 기대고 벤치에 앉아 자녀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멀리서 들려오는 자동차의 엔진소리 사이사이로 아이들의 흥분되고 기쁜 비명이나 새된 소리가 끼어들었고, 그들의 재잘대는 목소리가 밝은 밤공기에 섞여 몽환적으로 들렸다. 그런데 K의 눈동자는 정말이지 위태로웠다. 그것은 곧 진흙이 되어 후두두 떨어질 듯 보였고 눈꺼풀은 납으로 만든 듯 무거웠다. 그의 왼손은 이미 반쯤 비워진 보드카 병을 붙잡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뼈가 불거지고 앙상한 다섯 손가락은 단지 술병을 잡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마치 그를 익사에서 구해줄 어떤 듬직한 선원의 손을 붙잡고 있는 것처럼 필사적으로, 절대로 놓지 않겠다는 헐떡이는 목소리가 귀에 울릴 듯이 처절하게 그 술병을 쥐고 있었다. 분명히 그는 이 명랑한 공원에 어울리지 않았다. 도시인들이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아이들과 함께 손을 잡고 나와, 자신들의 보물이라도 되는 듯 그것들이 뛰고 달리며 노는 것을 쳐다보고, 반려자와 머리를 기댄 채 앉아있는 그 저녁 9시의 공원에 K는 조금도 뒤섞이는 색깔이 아니었다. 그는 가끔 오른손으로 자신의 기다랗고 새까만 머리칼을 잡아당기며, 당장이라도 눈물을 흘릴 듯 두 눈을 손바닥으로 눌렀다가, 그의 머릿속에 있는 것들을 포기하려는 것처럼 보드카를 입에 부어넣곤 했다. 그렇기에 분명 비애도 몽환도 없을 이 밝은 공원이 K에게는 술기운과 함께 융화되어 어떤 거대한 비극의 전조처럼 보이는 것이었다. 저 수많은 인간의 달들 또한, 그것은 그저 가로등일 뿐인데! K에게는 혈거짐승이 동굴 속에서 올려다보는 달과 별처럼 처참하게 보이는 것이다. K는 다시 보드카를 한 모금 식도 너머로 넘겼다. 그 독한 알코올의 향기는 K에게 분명히 어떤 노스탤지어를 상기시키고 있었다. 상기시킨다는 말은 옳지 않은가? 왜냐하면 그는 그 노스탤지어를 단 한 번도 잊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고로 그 알코올의 향은 K에게 과거에 대한 열망을 더욱 강조하고, 심지어는 망각을 거쳐 그 과거로 끌고 가려는 악의적인 손아귀처럼 위험했다.
공원의 저편에서 작은 개들이 짖거나 뛰놀았다. 개의 주인들은 자신의 애완견의 목줄을 잡고 천천히 산책을 하거나, 더러는 그것들이 절대 인간에게 해를 끼치지 않을 것을 믿고 아예 목줄을 풀어놓고 있었다. 주인과 함께라면 항상 기쁨으로만 가득한 그 짐승들은 혀를 내밀고 주인의 주변을 돌아다니고 있었고, 자주 만날 수 없는 동족들과 그들만의 소통을 하곤 했다. 크고 점잖은 늙은 개들은 주인 옆에 가만히 앉아, 마치 현인처럼 평온한 마음으로 공원을 관망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광경이 K에게는 슬픔으로 오는 것이었다. K는 무의미하게 한쪽 눈을 감았다 떴다 하며 그 개들이 보이는 풍경이 사라지는 것인가 사라지지 않는 것인가 궁금해 했다. <저것들은 절대 배신이라는 것을 모르지> 그 생각을 하며 K는 한 덩어리의 비참한 숨이 입으로 터져 나오려는 것을 느꼈다. 아주 어렸을 적, 더운 여름날 할아버지가 키우던 개를 잡았던 장면이 잘못 현상된 사진처럼 K의 머릿속에 떠올랐다가 번개처럼 사라졌다. 그는 도대체 왜 공원의 가장 어두운 구석에서 온 세상의 비극을 모두 짊어지고 있는가? K는 목이 말랐다. 그는 다시 한 모금을 마시려고 술병을 들었는데, 그의 앞으로 뭔가가 지나갔다.
그것은 어둠 속에서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밝은 흰색이었다. K는 술을 마시려다 말고 그 흰색을 보았다. 그것은 바로 길고양이였다. 바싹 마르고, 온몸이 창백한 흰털로 뒤덮인 고양이였다. 그것은 지나가다 K의 눈길을 느꼈는지 그와 눈을 마주쳤는데, 어둠 속에서 빛나는 그것의 노란 안광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여름의 끝물에 이제 막 시들어가는 해바라기의 색깔을 연상케 했다. 한쪽 앞발을 들고 그대로 멈춘 흰 고양이는 한참동안 K의 눈동자를 쳐다보았다. K 역시 술병을 들다 만 상태로 굳어있었다. 30초가 지났을까, 고양이는 그 종족 특유의 무심함을 보이며 고개를 돌리고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K는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 창백하게 아름다운 흰 고양이가 왼쪽 뒷발이 없어 세발로만 절뚝거리며 움직인다는 것을 말이다. 그것을 보고 K는 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의 술 취한 눈동자가 불구 고양이에게 뭔가를 덧씌워 보고 있었다. 그 창백한 흰털 역시 분명히 본 일이 있는 것이었다. K의 웃음소리에 고양이는 놀라 절뚝거리며 도망쳤고, 그는 자제하지 못하고 한참을 웃었다. 마침내 웃음이 잦아들었을 때 K는 술병을 입에 대고 미친 사람처럼 남은 보드카를 전부 들이켰다. 그리고 그는 술병을 떨어트리며 벤치에 더 깊이, 무너지듯이 몸을 묻고 고개를 힘없이 뒤로 젖혔다. 납덩어리 같은 눈꺼풀이 저절로 내려오며 눈이 감겼는데, 그러자 K의 왼쪽 눈에서 눈물 같은 것이 한 방울 흘러나왔다.
K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었다. 많은 노문학에서 읽고 상상한 것처럼 그곳에서는 낮밤을 가리지 않고 항상 회색의 진눈깨비가 흩날렸다. 모든 건물의 기와와 거리는 축축하고 흰색으로 젖어있었고, 숨을 쉬기만 해도 폐 속에 눈이 쌓였다. 도시의 공기를 온통 점령한 그 진눈깨비 탓에 시야는 짧고 좁았으며, 그 한가운데 서있는 K는 자신이 고체로 된 안개에 단단히 붙잡혀있는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런데 그 엄청난 수분에도 불구하고 이 거리는 세상 그 어느 곳보다도 건조한 질감을 갖고 있었다. 내륙의 내륙, 또 그 안쪽에 있는 흐린 도시는 K가 가본 그 어느 거리보다도 건조해서 그의 머릿속을, 게다가 가슴까지도 눈이 쌓인 황야처럼 아무런 소리도, 색깔도 느껴지지 않게 만드는 것이었다. K는 자신이 북아프리카의 사막에 있었을 때를 떠올렸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거리에 비하면 그 사막은 그야말로 폭력의 고장이었다. 아무런 필터도 거치지 않고 영혼으로 직입해 들어오는 황금색의 태양이나, 햇빛에 쪼개지며 쩍쩍거리는 소리를 내는 뜨거운 모래와 바위들, 그 어떤 풀이나 나무도 자라지 않지만 코를 통해 폐와 심장으로 흘러내리는 그 엄청난 생명의 열기. 그 사막에서 땀방울들이 피부를 흘러내리는 것을 느끼며 K는 자신의 죽음을 눈앞에서 보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북아프리카에서 배를 타고 도망칠 때 그리도 끔찍한 열병을 앓았던 것이다. 그런데 진눈깨비 흩날리는 상트페테르부르크는 그 희멀건 고체의 안개들로 인하여 K로 하여금 자기 자신의 존재조차 느끼지 못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는 별 의미 없이 자신이 끌고 온 검은색의 트렁크를 뒤돌아보았다. 이걸 왜 가지고 왔지? 이 거리에서는 코트와 귀까지 덮이는 모자만 있으면 다른 것은 아무것도 필요 없었다. 여기는 생명조차 필요 없는 고장이다. 거리 저편에서는 기장이 발목까지 내려오는 회색 코트를 입고 검은 모자를 눌러쓴 7~8살 쯤 되어 보이는 아이가 건물에 등을 기댄 채 멀거니 서있었다. 분명 어디서 주웠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부랑자의 시체로부터 벗겨낸 코트가 틀림없었다. 아무리 봐도 성인용일 그 코트는 기장도 소매도 너무 길어 아이의 손은 보이지 않았고 소년의 온몸을 회색으로 뒤덮어 코트가 아니라 그 아이를 둘러싼 거대한 누더기처럼 보였다. K는 길을 잘못 든 사람처럼 어리둥절하게 거리 한복판에 서있었다. 그는 분명 자신이 왜 러시아에 왔는지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는 지금이 낮인지 밤인지도 분간할 수가 없었다. 분명히 사위는 새까맣게 어두웠지만, 이 나라에 도착한 후 K는 단 한 번도 밤을 본 일이 없는 것 같았다. 해는 보이지 않았지만 하늘은 항상 창백한 흰빛이었고 사람의 영혼까지 얼려버릴 것 같은 추위만이 진눈깨비의 바람을 타고 사방에 휘몰아쳤다. K는 아직도 그 소년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이젠 어떤 그림자 같은 남자가 소년에게 다가가 뭐라고 말을 하고 있었다. 뭐라고 하는 지는 전혀 들리지 않았지만 그의 입술이 웅얼대듯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소년은 입도 뻥끗하지 않은 채 남자를 올려다보고 있었는데, 곧 그 소년은 소매를 걷어 올리더니 눈처럼 하얗지만 재처럼 회색인 앙상한 손을 내미는 것이었다. 그러자 그림자 같은 남자는 그 작은 손에 구겨진 지폐를 올려놓았다. 소년은 돈을 주머니에 넣고서는, 다른 한 손으로 무언가를 꺼내 남자에게 건넸다. 그것은 무언가를 싸서 접어놓은 갈색의 더러운 종이였다. 종이봉투를 받은 남자는 뒤돌아서서 자신이 왔던 길로 걸어갔고, 마치 유령인 것처럼 그대로 진눈깨비 사이에서 사라져버렸다. 소년은 사라져가는 남자의 등을 잠시 보고 있더니 한쪽 주머니에서 연초를 꺼내 입에 물고, 성냥을 긁어 불을 붙이더니 깊고 조용하게 연기를 뿜는 것이었다.
그 광경을 K는 바닥에 붙박인 듯 움직이지도 않고, 꽉 다문 입과 무심한 눈동자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 그림자 같은 남자가 안개 속으로 사라진 것처럼, K 또한 자신이 이 진눈깨비와 안개의 고장에서 연기가 되어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마치 존재가 흐려지고 넘실거리는 현상이 되어가는 저주를 받은 것 같았다. 이미 트렁크의 손잡이를 붙잡고 있는 자신의 손 또한 창백한 안개로 변해 잘 보이지 않았다. K는 마음을 다잡는 듯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건조한, 그러나 엄청난 수분이 폐로 들이닥쳤다. K는 온몸이 얼어붙는 것 같은 냉기를 몸 안쪽에서부터 느끼면서 폐렴환자처럼 기침을 토했다. 그러자 몸이 흔들리면서 다시 K는 자신이 K가 되는 감각을 느꼈다. 그는 발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뒤쪽에서는 트렁크의 작은 바퀴가 돌덩이 위를 구르는 소리가 지속적으로 들렸다. K는 안주머니에서 작은 종이를 꺼내 펼쳤다. 거기에는 조악한 약도가 그려져 있었는데, 아무튼 K는 그것을 눈앞 아주 가까이 두고 보면서 길을 찾았다. 한 발자국을 내딛을 때마다 바로 전만 해도 전혀 보이지 않던 인기척들이 진눈깨비 사이에서 존재를 드러냈다가, 또 한 발자국을 내딛으면 거짓말처럼 사라지곤 했다. 거리의 상점들은 불이 켜져 있는 것인지 아닌지도 분간할 수 없었으며, 가끔 보이는 간판들조차 그것들의 네온사인이 이미 가게를 닫았는데도 아무 의미 없이 켜져 있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장사를 하는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유령의 거리>라는 문장이 K의 머릿속에서 천천히, 그러나 여럿이서 유영하고 있었다. 이십 분을 걸었을까. K는 어느 낡고 작은 콘크리트 건물의 현관 앞에 서있었다. 빛이 바래 뭐라고 쓰여 있는지도 알 수 없는 간판에는 K의 약도에 갈겨진 것과 비슷한 문자가 희미하게 보였다. K는 트렁크를 들고 현관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1층의 좁은 카운터에는 머리가 하얗게 샌 늙은 여자가 잡지를 읽으며 반쯤 조는 것처럼 앉아있었다. 심지어 시체처럼 보이기도, 혹은 밀랍으로 만든 인형인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그녀는 가끔씩 자신이 인간이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손끝으로 코안경을 만지작거리곤 했다. K의 구둣발 소리에 그녀는 화들짝 잠이 깬 듯 고개를 들었고, 회색 코트 차림의 뻣뻣하게 서있는 낯선 방문객을 십 초 정도 가만히 쳐다보았다. “Добро пожаловать.” 늙은 여자의 입술 사이에서 희미한 발음이 새어나왔다. K는 그녀가 무엇이라고 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카운터로 다가가 손바닥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Two nights, three days.” 그는 두 개의 손가락을 폈다가 그 뒤에는 세 개의 손가락을 펴며 말했다. 늙은 여자는 알아들었다는 듯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160 рублей.” 여자는 말하면서 왼손으로 한 개의 손가락을 펴고 접더니 양손으로 여섯 개의 손가락을 폈다. K는 대충 알아들은 듯 지갑을 꺼내 160 루블을 카운터 위에 놓았다. 늙은 여자는 그것을 집어 카운터 안쪽의 서랍에 넣더니 열쇠 하나를 꺼내 내밀며 말했다. “второй этаж. комната 204.” 그녀는 천장을 가리키더니 카운터 위에 손가락으로 숫자 204를 그렸다. K는 열쇠를 받아들고 아무 대답도 없이 계단 쪽으로 트렁크를 끌고 갔다. 그가 트렁크를 짊어 매고 계단을 오르는 와중 갑자기 카운터 쪽에서 낮은 외침소리가 들려왔다. “Вам нужна девушка?” 늙은 여자의 목소리였다. K는 러시아어를 이해하지 못했기에 무어라는지 전혀 알 수 없었지만, 별 얘기 아닐 것이라는 짐작으로, 자신이 아는 몇 안 되는 러시아어로 <Спасибо.>라고 웅얼거리듯이, 그러나 카운터까지 들리도록 내뱉었다. 그리고 계속 트렁크를 짊어 맨 채 2층까지 천천히 걸어 올라갔다.
객실 204호의 문을 찾아 열쇠를 돌리고 열자 좁고 창백한 방이 나타났다. 기다란 직사각형의 그 방에는 낡은 침대 하나와 그와 마주한 둥근 탁자, 의자가 놓여있었으며, 탁자가 놓인 쪽의 옆에는 가스통이 연결된 레인지, 긴 벽 한편에는 나무로 된 옷장과 캐비닛이 하나 있을 뿐이었다. 도배도 되지 않은 콘크리트 벽 한가운데에는 굉장히 뜬금없이 지문과 얼룩 투성이의 거울이 하나 걸려있었다. <화장실과 세면대는 복도 어딘가에 공용으로 있는 모양이군.> K는 생각했다. 그리고 그는 끌고 온 트렁크를 밀어내듯이 거울 밑에 두고 모자도 벗지 않은 채 침대에 앉았다. 녹슨 스프링이 끼익거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처음에는 방 자체가 너무 창백해 알아차리지 못했는데, 두리번거리자 탁자와 침대 사이의 좁은 벽의 다소 높다 싶은 위치에 창문이 하나 뚫려있었다. 방안을 온통 희멀겋게 만드는 핏기 없는 빛은 그곳으로부터 들어오고 있었다. 창문으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푸른 하늘도 황금색의 태양도 없이 오로지 백색과 회색으로 뒤덮인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건조한 하늘만이, 밤인지 아닌지도 알 수 없는 그것이 창문으로 쏟아져내려오고 있었다. 창문에도 얼룩이 많아 명확히 밖을 볼 수 없었지만 지금도 진눈깨비가 계속 흩날리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방안은 완전한 정적이었다. 만약 소리에도 색깔이 있다면, 이 여관방의 소리는 완벽히 무색이었다. K는 얼굴을 쓸어내리듯이 모자를 벗어 무릎에 올려놓았다. 좁은 방의 낡은 침대 위에서, 그는 가만히 앉아, 그 정적과 비현실적인 공간 속에서, 자신이 오롯이 혼자라는 기분을 강하게 느꼈다. K는 이 도시의 하늘만큼이나 흐려진 눈동자로 별 의미도 없이 중얼거렸다. “Спасибо.” 그 말마디는 창백한 공간 속에서 잠깐 흔들리더니 연기처럼 증발해버렸다. 그는 한참을 그대로 앉아있었다. 만약 누가 본다면 그가 앉은 채로 죽은 것이리라 생각할 만큼 미동도 하지 않고서 말이다. 그러다가 그는 왼손에 찬 시계를 보았는데, 러시아에 도착했을 때 현지시각으로 맞춰둔 시계는 7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이 오전인지 오후인지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하늘은 여전히 회색이고 백색이고 해는 보이지 않았지만 밤도 낮도 아니었다. “뭘 좀 마셔야겠어.” K가 중얼댔다. 그리고 그는 안주머니에 지갑이 있는지를 확인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방에서 나와 문을 잠그고 계단을 내려갔다.
1층으로 내려가자 카운터에는 여전히 그 늙은 여자가 잡지를 읽고 있었다. 아니면 자고 있었나? 모를 일이다. 그런데 아무튼 K가 구두소리를 내며 1층으로 내려와 여관 밖으로 나가려고 하자 그 늙은 여자가 외치는 것이었다. “Сэр, сэр.” K는 물론 알아듣지 못했지만 아마도 자기를 부르는 것이리라 생각해 그녀에게로 고개를 향했다. 그러자 여자는 열 손가락을 펴 보이며 말했다. “Десять. Десять часов.” K는 어리둥절해 그저 가만히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마도 10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늙은 여자는 K가 이해를 하든 못하든 계속 말하는 것이었다. “Она придет сюда десять часов.” 그러면서 그녀는 계속 열 손가락을 펴고 있다가, 자신이 생각하기에 K가 충분히 이해했을 것이라는 듯 손을 내리는 것이었다. K는 여전히 저 노년의 여자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으나 별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자신이 뭔가 실수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달리 방도가 없었기에, K는 그대로 술집을 찾으러 밖으로 나가버렸다.
거리는 여전히 안개와 진눈깨비의 진창이었다. 백색의 탁한 하늘은 끊임없이 작은 눈송이들을 쏟아내고 있었다. K는 보이지도 않는 하늘을 잠시 쳐다보다가 호주머니에 손을 넣고 무작정 걸었다. 어디에 술집이 있는지도 몰랐고 시야는 여전히 좁고 짧았다. 그보다 K는 현재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물가조차 제대로 몰랐다. 그러나 그는 무엇이든 알코올이 든 것을 마시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것만 같은 기분에 발걸음만 재촉하고 있었다. 딱히 무언가에 절망한 것도, 진눈깨비만 계속 흩날리는 이 회색 도시에 압박감을 느끼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어찌되었든 그는 술과 걸음이 필요했다. 얼어붙은 안개 때문에 이 드넓은 도시 안에 살아있는 것이라고는 K 자신 밖에 없는 것 같았다. 울퉁불퉁한 돌이 깔린 바닥은 얼음으로 미끌미끌 거렸다. 그의 닳은 구두창은 계속해서 넘어질 듯 말 듯 위태롭게 얼음 위를 디디고 있었다. 그때 K는 어디에선가 작고 날카로운 소리가 지속적으로 들리는 것을 알아차렸다. 진눈깨비와 안개 때문에 지금까지 K는 그 어떤 소리도 자신의 귀로 들어올 수 없었음을, 귓바퀴에 닿기도 전에 젖은 솜처럼 무너져버렸었다는 것을 퍼뜩 깨달았다. 그는 자리에 멈춰 서서 어디로부터 그 소음이 오는지를 탐색했다. 그것은 빼어 들은 은장도처럼 얇고 날카로운 소리였다. 그리고 자세히 듣고 있으니 그 소음은 어떤 멜로디와 리듬을 갖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것은 음악이었다. 음원으로부터의 거리 때문인지 아니면 이 내륙의 기후 때문인지 그것은 한없이 소음에 가깝게 들렸지만, 분명 음악이었다. K는 홀린 듯이 그 소리를 쫓아갔다. 오 분인가를 걸었을까, K는 모두 검고 칙칙한 코트를 걸친 한 무리의 사람들을 찾을 수 있었다. 그들은 어느 벽을 중심으로 반원을 그리고 있었는데, 그 중심에는 벽을 등진 한 사람의 바이올리니스트가 있었다. 그는 특별한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거리에서 바이올린을 켜고 있었다. 반원을 만드는 사람들은 차갑게 젖은 바닥에 주저앉아있거나 더러는 구부정한 허리로 서있었는데, 모두가 창백한 얼굴을 하고 무표정하게 연주자의 연주를 듣고 있었다. 바이올리니스트가 연주하는 것이 어떤 곡인지 K는 알 수 없었지만, 그것은 몹시 빠르고 날카롭고, 끝없이 음정이 바뀌는 공격적인 곡이었다. 그런데도 그 연주는 어째서인지 무척 슬프게 들렸다. 바이올리니스트는 키가 크고 새까만 코트를 입은 남자처럼 보였는데, 확신할 수 없는 이유는 그가 가슴께까지 오는 길고 구불구불한 검은 머리칼을 갖고 있었으며, 또 바이올린을 연주하기 위해 악기 쪽으로 얼굴을 향하고 있었기 때문에 머리에 가려 얼굴이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이었다. 소매 끝으로 보이는 연주자의 회색의 앙상한 손은 활을 몹시 역동적으로 움직이고 있었지만 그에 비해 그의 몸체는 약간의 제스처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거의 동상처럼 무뚝뚝하게 우뚝 솟아있었다. K는 뒤늦게 연주자의 발 앞에 바이올린의 케이스가 펼쳐져있는 것을 보았는데 그 안에는 단 네 닢의 코페이카 동전들만이 처량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때 연주자의 바이올린이 길고 높은 소리를 내며 마침 하나의 곡을 마쳤다. K는 관객들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그들은 곡이 끝났는데도 박수나 환호성은커녕, 약간의 움직임도 없이 여전히 창백하고 무뚝뚝한 얼굴로, 아마도 가난과 추위가 박아놓은 깊고 불행한 주름이 가득한 얼굴로, 그런데 형언할 수 없는 슬픔이 가득 차 당장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 같은 눈동자로 연주자를 빤히 쳐다보고만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연주자 또한 그것이 당연하다는 듯 현에서 활을 떼더니,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을 혼잣말을 하는 것처럼 중얼거렸다. “Следующая песня <Дьявольское усмешка>.” 여전히 연주자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 뒤 활이 흔들리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음의 폭포가 쏟아져 나왔다. 웅장하고 거칠지만 어린 여자아이의 새된 비명 같은 소리가 K를 압도시켰다. 순간적으로 그는 자신이 상트페테르부르크라는 차갑고 건조한 내륙도시에 있다는 것을 잊을 지경이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슬픔이었다. 말하자면 이 대륙이나, 도시나, 건물들이나, 사람들의 생김생김, 그리고 연주자의 보이지 않는 얼굴과 무표정한 슬픈 관객들도, 모든 것이 다 비극이고 슬픔이었다. 바이올린이 토해내는 극한의 고음과 비명소리 또한 눈물조차 흘릴 수 없는 슬픔이었다. 그때 K는 자기도 모르게 다시 관객들을 돌아봤다. 말도 통하지 않는 이 나라에서 처음으로 어떤 공감 같은 것을 원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를 일이었고, K의 눈동자가 발견한 것은 어떤 반사광이었는데, 관객들의 가장 뒤편에 구부정하게 선 채 뒷짐을 지고 있던 아주 나이가 많아 보이는, 검은 모자를 깊이 눌러쓴 노인의 눈동자에서 한 방울의 빛나는 눈물이 흘러내린 것이었다. 그 눈물의 반사광이 K를 놀라게 만들었다. 그 자신도 왜 놀랐는지는 정확히 알지 못했다. 아무튼 쏟아지는 음의 입자들 사이에서 그 지독하게 늙은 노인은 딱 한 방울의 눈물만을 흘렸다. 사실상 관객 모두가 울고 있다고 해도 놀랄 일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들 모두가 불행과 슬픔이 엉클어진 눈동자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로지 그 노인만이 눈물을 흘렸고, 그로 인해서 K는 무지막지한 힘으로 한 대 얻어맞은 듯, 거의 폭력적으로 다시 현실에 추락했다. K는 또 한 번 이 도시의 모든 것이 자신으로부터 유리되어있는 것을 강력하게 느꼈다. 이젠 그 장발 바이올리니스트의 음악조차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니 그것은 분명 들려왔다. 그러나 더 이상 전과 같지 않았다. 그것은 다시 소음이 되어버렸다. K는 심한 탈진을 느꼈다. 그때 곡이 끝났고, 이번에는 몇 명의 관객들이 바이올린 케이스에 코페이카 동전을 던져 넣었다. 연주자는 여전히 보이지 않는 얼굴을 조금 숙여보였다. K는 입안에서 지독한 쓴맛이 도는 것을 느꼈다. 그는 입 안쪽의 살을 이로 깨물면서 지갑을 꺼내, 100 루블 지폐를 손에 쥔 채 관객들을 가르고 연주자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 케이스 안에 그것을 떨어트렸다. 머리카락에 가려 여전히 보이지 않았지만 K는 그 바이올리니스트의 눈이 자신의 손을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장막 같은 검은 머리칼 사이에서 작은 속삭임이 흘러나왔다. “Спасибо, сэр.” K는 잠시 멈춰 있다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 장소를 떠났다. 그때 K는 왜 죄책감 같은 것을 느꼈을까? 자리를 떠나는 K의 뒤편에서 점점 멀어지는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Следующая песня…… <Паганини Каприс № 24 в минор>…….”
K는 자신이 술집을 찾고 있다는 사실도 잊어버린 채 멍하니 거리를 걷고 있었다. 그는 습관처럼 시계를 보았다. 시침은 8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은빛이고 회색인 칙칙한 하얀 하늘을 둘러보았다. 지평선 한 쪽에 작은 구 하나가 떠있었는데 그것은 달인 것 같기도 했고 심하게 빛바랜 태양인 것 같기도 했다. K가 몸을 돌려 반대쪽 지평선을 보자 그곳에도 하나의 구가 있었다. 그것 역시 태양인지 달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낮도 밤도 아니었다. 애당초 낮이나 밤이라는 개념이 필요하기나 한 땅인지도 알 수 없었다. K는 마른 숨을 들이쉬었다. 진눈깨비와 얼음, 냉기와 무채색의 공기들. 그는 순간적으로 자신이 왜 여기에 있는지를 완전히 잊어버렸다. 단순히 자신의 위치에 대한 목적성을 잊은 것뿐만이 아니라, K라는 인간이 <왜 여기에> 있는지를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이 황량하고 별 이유도 없이 넓은 거리에, 그리고 사방으로 가지를 치고 있는 골목들 사이사이에 오로지 K 한 사람만이 뜬금없이 떨어져있는 것 같았다. 그때 강한 바람이 돌바닥에 부딪치며 불어왔다. 이들이 후두둑 떨어져나갈 것 같은 냉기에 K는 화들짝 정신을 차리며 옷자락을 여몄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한참이나 무아지경으로 알지도 못하는 거리를 걸어왔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K는 멈춰 서서 코트를 더 단단히 여몄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는데, 어떤 콘크리트로 만든 상자 같은 건물의 뽀얗게 먼지가 쌓인 회색 유리창 안에서 거의 보이지도 않을 네온사인이 깜빡거리는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너무 오래 되어서 점멸을 반복하며 천천히 꺼져가고 있었는데, 전광이 그리는 키릴문자를 읽을 수는 없었지만 그것이 문자 뒤에 술병을 하나 초록색으로 그리고 있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아마도 이곳은 술집이리라, 그렇게 생각하며 K는 건물로 다가가 도무지 상점 같지도 않아 보이는, 아무런 표식도 없는 현관을 열어젖혔다.
문을 열자마자 건조하게 마른 곰팡이 냄새와 찐득하게 눌어붙은 알코올의 냄새, 그리고 썩은 기름 냄새가 온몸에 끼쳤다. 그 냄새에 K는 자기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느 나라의 어느 땅을 가든 이러한 퇴폐와 가난의 냄새는 항상 K를 안도하게 했다. 물이라곤 한 방울도 나지 않는 적도의 사막에 소금기둥으로 지은 건물이든, 사방이 젖어있는 남미의 목조건물이든, 심지어는 이 인간의 나라 같지도 않은 대륙의 한복판이든, 가난하고 불행한 남자들이 하나 둘 씩 모여 가끔씩 취한 팔로 술병을 넘어트리곤 하는 술집이라면 어디든 비슷한 냄새가 났다. 그 냄새 앞에서 우두커니 서있는 K를 술집 안에 모여 있는 십여 명 쯤 되는 남자들이 무관심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들은 둘씩 혹은 혼자 테이블이나 바테이블 앞에 앉아있었고, 술집 안에는 난로가 켜져 있었으나 춥고 어두웠다. 음악 따위는 없었다. K가 문을 닫으며 한 걸음을 들어오자 남자들은 이 공간에는 아무 변화도 없었으며 그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듯 다시 자신의 술잔으로 눈길을 돌렸다. 몇 명인가가 서로 대화를 주고받고 있었으나 너무 작고 낮은 소리라서 인간의 말처럼 들리지도 않았다.
K는 구둣발 소리를 내며 바Bar로 다가갔다. 그는 모자를 벗어 테이블 위에 두면서 철제 의자 위에 앉았다. 그러자 바텐더인지 급사인지 알 수 없는, 턱수염을 짧게 기른 남자가 바테이블 너머로 천천히 다가와 말했다. “Добро пожаловать, сэр.” 여전히 무슨 말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어느새 익숙해진 발음과 억양에 K는 입을 닫은 채 고개를 끄떡거리고 말했다. “Vodka.” 그러자 남자는 미묘하게 다른 발성으로 <Водка.>라고 반복하더니 뒤편에서 투명한 유리병을 꺼냈다. 유리병에는 키릴문자로 무어라고 로고가 찍혀있었는데, 사실 그것은 로고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단순하고 아무런 디자인도 되어있지 않은 단순한 인쇄물에 지나지 않았다. 아무튼 남자는 술병을 테이블 위에 놓고 바 안쪽에서 유리잔을 꺼내 마른 수건으로 닦더니 컵받침도 뭣도 없이 냅다 K 앞에 내려놓는 것이었다. 그리고 옆에 두었던 술병의 내용물을 잔에 따르는데 잔의 절반 정도를 채우고 다시 마개를 닫아 내려놓았다. 술을 따르면서 흩어진 알코올성의 투명한 물방울들이 니스 칠도 제대로 되지 않은 목조 바테이블 위에 점점이 얼룩을 만들었다.
K는 잔속의 그 맑지만 어쩐지 끈적거려 보이는 투명한 액체를 내려다보다가 코에 대고 냄새를 맡았다. 싸구려 보드카 특유의 역한 알코올과 오크나무의 냄새가 났다. 그는 잔을 들어 보드카에 윗입술을 담갔다가 단숨에 절반을 삼켜버렸다. 철수세미가 식도를 긁고 내려가는 느낌이 든 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K는 그 타격이 몸속의 열기로 변할 때까지 잠깐을 기다렸다가 나머지를 전부 마셔버렸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기후 때문에, 안개와 진눈깨비와 새하얀 하늘 때문에 계속 흐리멍덩한 채였던 K의 존재성이 화들짝 깨어나며 한층 단단해지는 것 같았다. 그는 정수리로 치솟는 알코올의 열기 때문에 좌우로 고개를 흔들다가 몹시 의식적으로 눈을 깜빡거렸다. 이제 K는 술집의 구석구석과 거기에 앉아 잔을 기울이는 사람들을 더 자세하고 구체적으로 볼 수 있었다. 현관 밖의 거리도 온통 진눈깨비가 흩날려 깨닫지 못한 것이었지만 술집 안의 공간은 가라앉지도 떠오르지도 못하는 작은 먼지와 티끌들로 안개처럼 자욱했다. 취객들은 그 먼지투성이 공기를 마시며 동시에 독한 술로 식도를 씻어내고 있었다. 그런데 모든 공간에, 그림자가 지고 빛이 비추지 않는 모든 구석에 슬픔들이 작은 요정들처럼 쭈그리고 앉아있었다. 열 명이 될까 말까 한 손님들의 얼굴은 모조리 슬픔에 지워져 눈도 코도 입도 없는 달걀귀신 같아 보였다. 그 창백한 마스크에는 오로지 기계적으로 잔을 들이키는 칙칙하고 앙상한 손아귀만이 오고가고, 보일 리 없는 표정은 <나는 여기에 존재하지 않습니다.>라고 분명하지만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고 있었다. K는 다시 자신의 잔으로 고개를 돌리고 급사를 불러 빈 잔을 검지로 톡톡 건드리며 말했다. “Once more.” 급사는 영어를 알아듣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즉시 이전의 병을 가져와 다시 반잔을 따랐다.
거의 오일이 둥둥 떠다니는 것 같은 값싼 보드카가 유리잔에 차올랐다. 이 춥고 황량한 도시에서 K는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 그는 무언가를 찾으려고, 혹은 발견하게 될 것을 기대하면서 이 나라에 온 것도 아니었다. K는 백야의 한가운데서 늙고 가난한 이들에게 둘러싸여 <Водка>라는 익숙히도 수상한 액체를 마시고 있다. 차가운 공기로 꽉 찬 술집에는 단 하나뿐인 난로도 아무 의미가 없었다. K는 자신이 술을 마시든 마시지 않든 이 공간에서는 그저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존재가 생명력을 잃어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짙은 슬픔이 어두운 바닥을 기어 다니고 있었고 K는 그에 반항하듯이 잔을 들이켜 댔다. 벌써 그는 세 잔인가 네 잔을 마셨다. 정확하지는 않다. 다만 그의 정신은 벌써 우유거품처럼 물렁물렁하고 덧없는 것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삶이란 위치에 따라서도 정말 공허해질 수 있지.> 그는 중얼거렸다. 이 하얗고, 내륙의 회색도시에서 취하는 것은 그의 고향 땅에서 취하는 것과는 명백히 달랐다. 잔을 들이키면 들이킬수록 그는 편안해지기는커녕 점점 불안해졌다. 그 불안은 이상한 것이었다. 마치 철근 콘크리트 건물 꼭대기에 서서 수십 미터 아래를 내려다보며, 언제 떨어질지를 셈하는 것 같은 기괴한 불안이었다. 어느새 K의 손이 수전증에 걸린 듯 떨고 있었다. 그는 떨리는 오른손을 왼손으로 움켜쥐며 급사를 불렀다. “저기…… I mean, Can I buy some cigarette?” “Sigareta?” 급사는 이상한 발음으로 되물었다. “타바코. Tobacco.” “Ах! Табак.” 급사는 알아들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테이블 밑으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담뱃갑으로 보이는 굉장히 간단한 로고가 찍힌 흰색 갑과 성냥 한 갑을 꺼내는 것이었다. “десять рублей.” 분명 들어본 적이 있는 단어의 조합이었다. K는 여관 주인이 손가락 열 개를 펴 보이며 <десять>이라고 했던 것을 기억했다. 그는 지갑을 꺼내 테이블 위에 10 루블을 올려놓았다. 급사는 고개를 끄떡이며 지폐를 쥐어 자신 쪽의 테이블 밑에 넣었다. 여관의 숙박비를 생각해보았을 때 10 루블의 담뱃값이라는 것이 바가지를 쓴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사실 지금에 와서 그런 건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다. 그는 놀랄 정도로 아무런 문양도 없는 종이상자를 열어 한 개비를 꺼냈는데, 그것은 필터조차 없는, 그저 말린 담뱃잎을 얇은 종이로 싸놓은 것에 불과했다. K는 담배를 입에 물고 성냥을 긁어 불을 붙였다. 독한 타르 연기가 폐로 내리꽂혔다. 그러자 눈앞이 번쩍거리며 이 구석진 술집의 밝은 곳과 어두운 곳이 명백히 보였는데, 계속 구석에 있던 작고 슬픈 요정들은 이제 탁한 백색으로 보였다. 니코틴이 뇌를 흔들어놓자 K는 자신의 마음 밑바닥보다도 아래에 있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어둡고 차가운 거대한 공허에서 비통이 수많은 다리를 흔들어대며 심장의 수면 위로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K는 연기를 뿜으며 손에 불붙은 담배를 쥐고 키들거리는 것인지 기침인지 알 수 없는 작은 소리를 흘렸다. 그는 뚫어질 듯이 거의 다 비워진 술잔을 노려보고 있었고, 곧바로 나머지를 전부 마셔버렸다. K는 급사를 불러 손가락으로 빈 잔을 두들겼다. 급사는 전과 똑같이 아무런 표정도 없는 얼굴로 K의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K의 얼굴에서도 점점 표정이 사라지고 있었다. 이 기묘한 증류주에 취하면 취할수록 그는 자신의 영혼이 연기처럼 흩어지고, 다른 테이블에 앉아있는 처참한 현지인들과 같은 종류의 비극 속으로 말려들어가는 느낌을 받았다. 그는 왜 이 광활하지만 황량하고 심지어는 인기척도 없는 거대한 도시의 한구석에서 굳이 술집에 들어왔을까. 갑자기 K는 북아프리카에서 흑인들의 틈바구니에 끼어 마시던, 녹은 황금 같던 아니스 주가 사무치게 그리웠다. <이 나라의 술은 너무 추워.>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다시 담배연기를 뿜더니 오기를 부리는 것처럼, 새로 채워진 잔을 송두리째 마셔버렸다.
그가 언제 술집을 나온 걸까? 어느새 K는 취한 채로 흔들거리며 거리에 서있었고, 호주머니에 쑤셔 넣은 손에는 담뱃갑과 성냥갑의 감촉이 느껴졌다. 그는 자신이 얼마나 마셨는지도 기억하지 못했고 얼마를 내고 술집을 어떻게 나왔는지도 기억하지 못했다. 그는 완전히 취해 비척거리며 사방이 다 똑같아 보이는 어두운 회색 거리를 걷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분명히 여관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K의 이성은 이 미로 같은 도시에서 어디로 가야할지 전혀 알지 못했지만 알코올에 적셔진 그의 무의식은 어디에 여관이 있는지 확실히 알고 있었다. 그는 가끔 눈동자로 들어와 충돌하는 진눈깨비 때문에 눈을 비비며, 흔들흔들 걷고 있었다. 하늘은 여전히 하얀색, 그가 얼마나 오래 술집에 있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거리에는 여전히 사람이 없었다. 사람들은 모두 이 도시 어딘가의 어두운 구석에 숨어있다는 인상을 K는 받았다. 그는 계속 걷다가 뿌연 시야 저편에서 무언가를 발견했는데, 그것은 흰색인 것 같기도 하고 검은색인 것 같기도 했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자 그것은 온몸의 표면에 은색의 진눈깨비를 뒤집어쓴 하나의 사람이었다. 그것은 벽에 등을 기댄 채 다리를 쭉 뻗고 너부러져 있었는데 미동도 하지 않았고 살아있는지 아닌지도 알 수 없었다. 깊이 눌러쓴 모자와 코트는 모두 검은색으로 그 자의 온몸을 둘러싸고 있었지만 그 위에 들러붙은 눈 결정들이 번쩍여 마치 은색으로 칠해놓은 검은 바위처럼, 희부연 공기 속에서 빛나고 있었다. 그것은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분간할 수 없었으나 그런 것은 그 누구도 중요하게 여기는 문제가 아니었다. 거리에는 K와 <그것> 둘뿐이었다. K는 은빛으로 빛나는 그 검은 코트 덩어리를 한참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나 그는 아무 생각도 하고 있지 않았다. K의 머릿속은 보드카에 녹아 점액질이 되어버린 것처럼 축축하고 끈적거렸다. 그는 흔들거리는 눈동자로 <그것>을 30초인가 쳐다보더니, 자신과는 아무 상관없는 일이라는 듯 다시 비척거리며 걸어가 버렸다.
술기운이 알려주는 대로 여관건물을 찾아 들어가 K는 미묘한 동작으로, 여전히 잠을 자는 것인지 아닌지 모를 여주인에게 시선도 주지 않은 채 경례를 보내고 계단을 올랐다. 직각의 계단을 나선을 그리며 오르는 K의 모습은 참으로 그가 <이 나라>에 녹아들었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었다. 204번 방의 현관문에 이마를 박은 채 K는 한참을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이건 담배고, 이건 성냥갑이고, 이건 지갑…… 아, 그래, 열쇠는 안주머니에 있었지. 마침내 문을 열고 쏟아지듯이 방 안으로 들어간 K는 모자와 코트부터 벗어 나무 테이블 위에 던져놓았다. 그는 넥타이와 조끼를 벗을 생각도 못하고 우선 구두와 양말부터 벗어던진 채 곰팡이 냄새가 나는 침대에 쓰러졌다. 이 나라에서는 참 황량한 냄새가 나는군. 이 도시에서는…… K는 침대에 얼굴을 처박은 채로 뭐라고 중얼거렸다. 5분인가를 그러고 있었다. 그는 몹시 취했지만 잠이 올 것 같지 않았고, 눈을 감고 있지만 여전히 눈꺼풀 안에서는 진눈깨비가 쏟아지는 광경이 훤히 보였다. 창문에서는 어둡고 하얀 <색깔>이 빛도 안개도 아닌 2차원적인 모습으로 방안을 향해 기어들어오고 있었다. <커튼을 쳐야겠어.> 여전히 침대보에 얼굴을 박은 채 K가 생각했다. 그는 힘이 들어가지 않는 몸을 억지로 일으켜 세워 창문에 커튼을 쳤는데, 그때 현관 쪽에서 나는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너무 술에 취한 K가 문을 닫는 것도 잊어버려 환히 열린 현관에는 한 여인이 서있었다. 아니 여인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앳되고 어려 보였다. 그녀는 회색 털모자와 값이 나갈 것 같아 보이는 모피코트를 입고 있었으나 신발을 보자 그 낡고 색이 바래버린 구두는 털모자와 모피코트 또한 그저 <비싸 보일뿐>인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What can I help you." K는 꼬인 혀로 물었다. “Сэр, я……” 소녀는 무언가를 설명하려고 했지만 K는 그녀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그녀를 향해 취한 발걸음을 옮겼다. 이제 그는 아주 가까이서 소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160cm쯤 되는 키, 유난히 하얀 얼굴에 비통이 담긴 밤색 눈동자, 아무리 봐도 18살 이상으로는 보이지 않는 얼굴 윤곽 등. 그러나 그녀는 아름다웠다. K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와서 처음으로 <아름다워 보이는> 사람을 찾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 밤색 눈동자에 담긴 비극과 슬픔도, 그것은 물론 강력한 비관이지만 소녀의 젊은 피가 그 비관마저 희망과도 비슷한 것으로 만들어버리고 있었다. K의 눈동자가 붉어졌다. 이곳도 역시 사람이 사는 곳이다. 사람이 사는 곳이라면 정말로 어딘가에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What is your name." K가 천천히 물었다. 그녀가 영어를 이해하는지 어떤지는 몰랐지만 적어도 뜻은 통할 것이라고 그의 취한 머리가 결론을 내렸다. “……Анна.” “안나.” K는 되뇌었다. <아 그래, 이제야 알겠군.> K가 머릿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는 손목시계를 봤는데 시간은 딱 10시 정각이었다. K가 이 여관에 들어와 체크인하고 트렁크를 든 채 계단을 오를 때, 여주인이 외쳤던 문장 말이다. 그때 K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으면서 감사하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술집을 찾아 여관을 나갈 때 여주인은 숫자 10, 10시가 어쩌고저쩌고 하며 무언가를 설명하려고 했다. 그리고 지금 이 안나라는 소녀의 눈동자를 보자 그는 모든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 눈동자는 분명히 평범한 소녀의 눈동자가 아니었고, K는 고향 땅에서도 북아프리카의 해변도시에서도 그런 눈동자를 몇 번이나 봐왔었다. 특히 해가 지고 나서, 구석진 유흥가의 네온사인과 붉은 불빛 속에서 말이다. 스스로도 알지 못하는 비극과 비통으로 영혼이 함몰된 눈동자들. 그러나 그런 눈동자를 가진 여자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상 마네킹처럼 웃고 있었다.
K는 무표정한 얼굴로, 안나에게 안으로 들어오라고 손짓을 하며 작은 나무 의자를 내주었다. 그녀는 다소 겁먹은 표정으로, 그러나 순순히 나무 의자에 앉았고, K는 현관문을 닫으면서 바지 주머니에 있던 담배를 꺼냈다. 그리고 그는 닫힌 현관문에 등을 기대고 선 채 성냥을 긁어 담배에 불을 붙였다. 정신을 좀 차려야했다. 그는 독한 연기를 내뿜으면서 별다른 움직임도 없이, 그저 가만히 의자에 앉아있는 안나라는 소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10초 정도 지났을까. K는 별 생각 없이 안나를 향해 열린 담뱃갑을 내밀었다. 그녀는 선뜻 움직이지는 못했으나 결국 담배 한 개비를 얇고 하얀 손가락으로 꺼냈다. 그녀가 담배를 입에 물 때 K는 성냥을 하나 긁어 불을 붙여주었다. 안나의 눈동자는 미세하게 겁에 질려있었다. 그러나 그 공포가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K로서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그녀가 담배연기를 빨아들이고 몸을 조금 떨며 내뱉을 때, 단숨에 그녀가 안도하고 있다는 것을 K는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연기를 피우며 말없이 서로의 눈동자를 쳐다보고 있었다. 안나는 K의 검고 단단한 눈동자를, K는 안나의 밤색 깊은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그러다가 K는 담배를 입에 문 채 걸음을 옮겨 방의 캐비닛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 안에는 사기 재떨이와 굉장히 조촐하고 멋없는 티세트가 들어있었다. K는 그것들을 전부 꺼내 테이블 위에 놓고, 가스레인지 위에 있던 양철 주전자를 들고 방을 나가버렸다.
분명 당황하고 있을 안나를 내버려두고 K는 복도로 나왔다. 그녀는 싸구려 여관방 안에서 멍하니 앉아있을 것이다. 그녀가 사는 나라의 어디에서든 볼 수 있는 싸고 좁은 여관방. 테이블 밑에는 회색 코트와 모자가 엉망으로 너부러져 있고 침대 맡에는 검은색 구두 한 쌍과 뒤집어진 양말이 아무렇게나 떨어져있을 그 방에서. 분명 방 안에서는 K가 마신 보드카의 냄새가 역하게 나겠지. 그러나 K는 화장실을 찾아 양철 주전자를 들고 비틀비틀 걸을 뿐이었다. 공용 화장실을 찾아 수도꼭지를 열자 흰 물이 흘러나왔다. 그는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았다. 30초 쯤 지나자 물은 투명한 색을 띄기 시작했다. 그러자 K는 양철 주전자에 물을 담았다. 양철 주전자에 물이 가득 담기자 K는 다시 방으로 되돌아왔다. 그는 물이 담긴 주전자를 가스레인지 위에 놓고, 가스통에 연결된 레버를 연 뒤 성냥을 긁어 가스가 새는 소리를 내고 있는 레인지 위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K는 안나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연신 담배를 피우며 주전자를 달구고 있는 불꽃만을 바라볼 뿐이었다. 전등도 켜져 있지 않고 창문에 커튼까지 친 방안에서 광원이랄 것은 가스레인지의 불꽃과, K와 안나가 피우고 있는 담뱃불뿐이었다.
주전자 안에서 물 끓는 소리가 들리자 K는 가스레버를 잠그고 주전자를 테이블로 가져왔다. 그리고 조잡한 문양이 그려진 차 주전자를 열자 거기에는 밀봉된, 정말 소량의 찻잎이 들어있었고, 그 찻잎과 뜨거운 물로 K는 천천히 차를 끓이기 시작했다. 안나는 이미 다 태운 담배꽁초를 재떨이에 놓고 입을 다문 채 K가 하는 일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컵받침도 없이 K는 자신과 안나 앞에 찻잔을 하나씩 놓았고 곧 차를 따랐다. 이제 K는 안나와 마주앉아 있었으며, 컵을 들어 냄새를 맡더니 한 모금을 마셨다. 홍차였다. “맛이 없군.” K가 중얼거렸다. 그것은 진실이었다. 그 홍차라고 할 수도 없는 차는 정말로 맛이 없었다. 그런데 안나를 보자 그녀는 찻잔에 손을 뻗을 엄두도 못 내고 있었다. 그녀는 무엇에 대해 당혹스러워하는 것인가? K는 달리 아무 말도 없이 그저 눈길을 내린 채 그 맛없는 홍차를 계속 마셨다. 그런데 그 어두운 방안에서, 오로지 커튼을 비쳐 들어오는 흰색 미광만이 시야를 확보해주는 방안에서 안나는 조용히 일어나더니, 모자와 코트를 벗는 것이었다. 그녀는 코트 안에 거의 비쳐 보일 듯한 네글리제만을 입고 있었다. 그녀는 아마도 일을 해야 한다고만 생각한 것이겠지! 흰색의 미광 속에서 그녀의 몸은 정말로 앙상하고 창백했다. 피부 밖으로 모든 골격과 늑골 밑에 진 그림자 따위를 확인할 수 있었으며, 제대로 먹지 못한 탓인지 젖가슴마저도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럼에도 K는 그녀가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이 황량한 도시에서 그녀만이 유일하게 어떤 온기 같은 것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K는 계속 차를 마셨다. 안나는 분명히 아름다웠지만 K에게는 전혀 그녀를 탐할 생각이 없었다. 게다가 그는 진탕 취한 채였고, 그렇지 않더라도 K는 도대체 언제 마지막으로 여인에게 정욕을 느꼈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것이다. 그는 스스로 생각하기에, 말도 안 되게 오랜 시간을 홀로만 살아온 것 같았다. <언제나 어떤 처절한 갈구는 있었지만, 그것은 에로스가 아니었던 것 같다.> K는 머릿속으로 중얼댔다. K는 찻잔을 비운 뒤 일어나 아무렇지도 않게 안나를 스쳐지나가 코트를 손에 들었다. 그리고 코트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마치 보란 듯이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서는, 그대로 침대 위에 쓰러져 순식간에 잠에 들어버렸다. 안나는 잠든 K를 그녀의 그 깊고 불가해한 눈동자로 다만 바라보고 있었다.
K가 심한 두통과 함께 잠에서 깨었을 때 제일 먼저 본 것은 눈을 감은 채 자고 있는 안나의 얼굴이었다. 그 창백한 얼굴로, 안나는 미간을 약간 찡그린 채 K의 바로 옆에서 이불을 덮고 자고 있었다. 이 아가씨는 왜 돌아가지 않은 걸까. 술기운 때문에 중간 중간 이가 빠진 기억 속에서 K는 그녀의 앞에서 거의 모욕적으로 지갑을 테이블에 놓았던 것을 기억했다. 러시아어를 할 줄도 모르는 멍청하고 취한 이방인의 두툼한 지갑을, 매춘부라면 누구나 그저 가지고 돌아갔을 것이다. K는 이불을 덮은 채 침대 위에 앉았다. 테이블 위의 지갑은 누가 건드린 자취조차 없었다. 안나라는 소녀는 네글리제 차림으로 바로 옆에서 조용히 자고 있었고, K는 자신이 넥타이와 조끼를 벗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것들은 깨끗하게 개어져 침대 끝에 걸려있었다. K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안나가 깨지 않도록 조용히 바지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커튼 너머로 희미하게 보이는 창문은 여전히 흰 밤이었다. 하얀 연기가 어두운 방 안에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K는 재떨이가 있는 테이블로 가기 위해 누워있는 안나를 건너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침대가 흔들렸고, 그녀는 가만히 눈을 떴다. 이미 테이블 앞에 도착한 K는 사기 재떨이에 재를 털면서 잠에서 깬 안나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천천히 이불 밖으로 다리를 빼면서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때 K는 안나가 거의 반나체 차림으로도 아무것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넌 아직 어린데.” K는 중얼거렸다. 그리고 안나가 대륙 끝에 있는 작은 반도의 언어를 이해할 리도 만무했다. 넌 아직 어린데. K는 다시 중얼댔다. 그런데 안나는 뭐라고 입을 여는 것이었다. “Мы хорошо провели ночь.” 그렇게 말을 마치면서 소녀는 배시시 웃어보였다. 그것은 마네킹 같은 웃음도 아니었고 억지로 일그러뜨린 웃음도 아니었지만, 순수한 슬픔이 입 꼬리에 흠뻑 젖은 형언할 수 없는 감각적인 웃음이었다. K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계속 담배를 피웠다. 그리고 꽁초만 남았을 때 재떨이에 담배꽁초를 지지고, 아직도 10개비 가량 남아있는 담뱃갑을 성냥갑과 함께 안나에게 던졌다. 침대에 떨어진 두 개의 상자를 안나는 집어 한 개비의 담배를 물었다. 그리고 불을 붙일 때, 어제 마시다 남은 홍차를 찻잔에 따르고 있던 K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 도시, 이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너와 만나서 정말 다행이야. 사람이 사는 곳에는 사람이 있지. 아무리 흰 어둠과 가난과 진눈깨비와 안개가…… 시민들의 생명력을 앗아간다고 하더라도. 사람이 사는 곳에는 사람의 눈동자를 가진 자가 있어야지…….” 그리고 그는 차갑게 식은, 더럽게 맛이 없는 홍차를 목구멍을 씻어내듯 단번에 마셔버렸다. 그리고 그는 테이블 위의 지갑을 집어 안나에게 건넸다. “나로서는 얼마를 당신에게 지불해야할지 모르겠군.” 안나는 지갑은 받지 않은 채 K의 눈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다가 지갑을 받아, 몇 장인가의 루블 지폐를 꺼내고 자신의 코트 주머니 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그녀는 비칠비칠 일어나, 털 코트와 모자를 착용하고 다 탄 담배꽁초를 재떨이에 넣으며 천천히 현관으로 걸어갔다. 이제 K는 의자에 앉아 현관 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현관문을 열기 직전, 안나는 말했다. “Спасибо……. I…… I will come here…… today evening……." 러시아 억양이 잔뜩 들어간 어설픈 영어로, 그녀는 말했고, K는 아무 대답도 없이 한 개비의 담배를 또 꺼내 물었다. 그녀는 조용히 문을 닫으며 계단 밑으로 사라졌다.
K가 공원 벤치에서 눈을 뜨자 이미 아침이었다. 계절에 어울리지 않는 차가운 공기가 그를 뒤덮고 있었고 공원의 잔디들은 이슬을 머금고 있었다. 벤치에 쓰러져 자고 있던 K는 몸을 일으켰다. 바닥에는 텅 빈 보드카 병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노스탤지어, 타지에 대한 그리움, 어쩌면 그것은 타지가 아닌, 그곳에서 만난 단 하나의 온기에 대한 그리움. 알코올은 여전히 두개골 속을 웅웅 울리게 만들고 있었고, 잠을 깨려 얼굴을 쓸어내리자 눈가에서 말라붙은 눈물이 후두두 떨어졌다. K는 하늘을 보았다. 파란 하늘에 황금빛 구름들이 흘러 다니고, 동쪽 저 끝에서 이미 태양이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그는 비틀대며 벤치에서 일어났다. 아주 슬프고 아련한 꿈을 꾼 것 같았다. K에게 과거란 엉망으로 뒤섞인 반죽 같아서, 북아프리카에서의 일도, 러시아 대륙에서의 일도, 이미 모조리 섞여 구별하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그 뒤섞인 기억들은 분명히 K에게 중요한 무언가를 여태까지도 주장하고 있었다. 사람은 가끔 폐인이 될 수도 있지. 그러나 바닥을 딛는다면 다시 걸어야 하는 거야. K가 두통과 함께 혼잣말처럼 내뱉었다. 그는 빈 보드카 병을 쥐고 공원 쓰레기통에 던져 넣은 뒤, 부은 두 눈을 비비더니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집에 가야겠어.” K는 터벅터벅 발걸음을 옮겼다. 동쪽 하늘은 점점 밝아왔다. 북아프리카의 아침처럼, 바다 위의 배에서 열병을 앓을 때처럼, 심지어는 태양과 달이 분간조차 되지 않던 러시아에서처럼. 고향 땅에서 그는 아무런 기대도 희망도 갖지 않고 다만 터벅터벅 걸었다. 입안으로 자기도 모르게 <Спасибо.>라고 중얼대며, 밝아오는 하늘 아래를 걸었다.
끝.
내가 사랑했던 유령들이여
그간 잡고 있던 유령들의 소매를 놓을 때가 되었나
나는 그들에게 나를 살게 해달라고
그들의 지혜를 빌려 내 육신과 영혼이
너무도 당연한 듯 흙더미로 무너져 내리는 것을 막으려고
십여 년간을 매달려왔다.
너무 오래 유령들의 옷소매를 붙잡고 있자
내 손도 반투명한 비물질이 되어가는 것을
나는 느꼈고
그러자 그 손으로 잡는 나의 펜 또한
유령처럼 비어가는 것을
나는 뒤늦게 보았다.
슬픔과 비참으로 쌓았던 벽은
살짝 건드리자, 허무하게 산산조각 나
이제는 내 발밑에 온갖 슬픔과 비참이 마구잡이로
굴러다닌다. 나는 그 땅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주저앉아, 그것들을
한때 나의 벽돌이었던 비명들을 쳐다보고 있다.
내가 잡고 있던 것들이 유령이었나? 아니면
오히려 내가 유령이었단 말인가? 그리하여
나의 육신의 무게를 느끼려고 한 발짝을 뗄 때
한 자루의 날카로운 창이 내 심장을 꿰뚫었다 그러자
붉은 피들이 흘렀는데
아아, 그래! 적어도 나의 심장은
아직도 살아서 피를 품고 있던 것이다
나는 나의 피를 긁어모아, 그것을 얼굴에 바르며
내가 살아있다는 것에 소리 없는 함성을 지르며
나의 왼쪽 눈에서는 한 방울의 눈물이
세계를 담고 떨어진다.
안녕, 나의 망령들이여, 안녕.
나는 정말로 당신들을 사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