밝은 절망

글/시 2017. 7. 30. 20:34 |

밝은 절망



멀리 보이는 도시의 불빛은 내가 어디에 와있는지를 실감케 한다.

구형으로 이 행성을 둘러싼 우주의 별빛은 내가 나로부터 얼마나 먼지 알게 한다.

불이 빛나는 시간은 밤뿐이다.


이 땅의 적막이 사실은 얼마나 시끄러운지

소리를 귀로 듣지 않는 사람들만이 알고 있겠지

한 가지 행운이라면

매일 어둠이 찾아온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수 없는 저주들 중 하나는

매일 어둠이 물러간다는 사실이다

사색에 잠겨 단도를 놓은 철학자도

태양의 폭력 아래에서는 다시

칼을 잡는다, 흐르지 않는 눈물로.


한 마리의 뱀이 되었으면! 그것도

한겨울의 땅 위를 방황하는 뱀이.

그 냉혈동물들은 알고 있다

눈에 비치는 것들은 송두리째 허상이며

벼린 칼끝 같은 냉기 속에

<느껴지는 것>들만이 질료를 가지고

텅 빈 우주 안에 묵묵히 실존한다는 것을.


사람이 영원한 태양을 갈구해 불을 지필 때부터

우리는 수천 년의 절망 속에 스스로 빠져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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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화羽化의 서곡

글/시 2017. 7. 26. 20:09 |

우화羽化의 서곡



증오의 눈을 부릅뜬 채 신과 맞대면하던 삶은 그 어찌도 편했는가!


만일 하늘이 수직으로 쏟아져내려오는 것이라면

나는 향일성의 저주가 되어 산산조각나리라고

내 젊은 피는 열망했었네, 그리고 정말 그러했으니!


그러나 세계는 하나의 의지가 아니었다. 나 역시

하나의 인물이 아니었다, 한때 악마 들린 손으로

펜을 쥔 채 종이 위를 종횡무진 하던 젊은이는 어디서 죽었는가?


나의 광기는 비명으로 짠 고치였네! 그것을 찢고 나오자

그간 안락하게 날 감싸던 수천 줄의 비명소리는 사방으로 퍼져

나 황망한 세계에 주인 없는 눈동자처럼 굴러 나왔네


수만 겹의 사막과 수억 단의 대양 위에서 토혈하고

그 울컥이며 나온 새까만 피들이 화들짝 놀란 벌레 떼처럼

모든 세계들로 바삐 도망가는 것을 보니, 이미 내 몸엔 피가 없어라


절뚝이는 걸음으로 찾은 못에서 온 혈관을 잉크로 채우고

깃발도 없이 돌진하려 했건만, 알고 보니 벽은 세계가 아니어라!

열 손가락 끝에서 방울방울 잉크가 흘렀다. 나침판은 계속 회전한다!


천상천하 어디에도 갈 곳이 없네, 나는 주저앉아

깔고 앉은 모래알 하나를 집어 들자

악마를 잃은 천재들이 그 안에서 수도 없이 몰락해가는구나!


너무 무수한 세계에서, 미학을 위하여! 아니! 전쟁을 위하여! 아니다!

그 무엇도 아니었다! 가슴을 열자 튀어나오는 것들은

지네들, 바퀴벌레들, 피처럼 붉은 루비, 그리고 멈춰진 작품들 등등……


구제를 원하는가? 그럼 부디 나의 반대편으로 가라!

나는 이곳에 세워진 저주받은 이정표다. 그것은 도망친다!

저쪽으로, 도무지 알 수 없는, 그러나 태어날 때부터 낙인찍힌 화살표처럼.


아! 아름다움이라는 눈동자가 감겼다. 나는 이제 거기에 못을 박는다.

사람들은 아직도 노래를 부르네, 사랑과 멸망의 노래, 가사가 하나 뿐인 노래

끝나지 않는 영혼의 백색 어둠, 그리고 잃어버린 열광, 그리고


불멸의 피. 피. 피. 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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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침엽수림

글/시 2017. 7. 23. 16:10 |

어느 침엽수림



1.

나는 침엽수림 속에서 살고 있는데 이곳은 햇빛이 비추지 않는다.


2.

이곳에서는 너무 빽빽하게 자란 나무들이 모든 빛을 가려

굳이 굴을 파고 살 필요가 없다. 그저 풀밭에

누우면 항시 밤인 이 숲은 전체가 나의 집이 된다.

그러나 나의 집이라고 해서 나만이 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동물들이 살기에는 나무와 나무들 간의

간격이 너무 좁아 이 숲에는 벌레들과,

방랑하는 제신들과 나만이 살고 있다. 다행이 나는

몸집이 작아 숲속을 자유로이 거닐 수 있다.

내가 밤눈이 발달한 것도 분명 이 숲에서 살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태어난 이후로 단 한 번도

태양빛을 본 기억이 없다. 그러나 나무들은 빛을

봐야만 하기 때문에 끝없이 키가 커진다. 차라리

한 그루의 나무라고 해도 좋을 만큼 다닥다닥 붙은

이 나무들은 서로 죽지 않기 위해 미친 듯이 키가 큰다

나는 이 숲의 정상이 어디인지, 또 이 숲이 어디까지

펼쳐져있는지는 모르나 경험에 따르면 나는 절대

숲의 바깥이나 꼭대기로 올라갈 수 없고 그럴 이유도 없다.

나무와 나무 사이로 사방에 길이 나 있지만

어느 각도로 보든 시야는 결국 또 다른 나무에 가려진다

그래서 이 숲에선 적의 공격에 방비해야한다는

의식조차 가려진다. 가끔 시야를 지나가는 영령들이나

희미한 빛을 내는 제신들은 그저 돌아다닐 뿐

내 삶에 아무런 방해도 주지 않는다. 나는 그저 그들로 인하여

이 숲이 침엽수로 만들어진 성소라는 것만을

어렴풋이 생각해볼 뿐이다. 나는 주로 벌레들을 잡아

먹으며 사는데 그들은 눈이 없다. 장님인 벌레들을

이빨 사이로 자근자근 씹는 일은 사실 그리 유쾌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달리 내가 무슨 양심이라도 가져야

한단 말인가. 가끔 비가 오면 나는

잎들의 향기를 한껏 머금은 채 떨어지는 그 물방울들을

성수 맞이하듯이 마신다. 빛이 비추지 않아 오늘과 내일의 경계조차

없는 숲이어 나는 도대체 내가 얼마간 여기에

살았는지 모르겠다. 그러니 분명 나는 죽지도 않을 것이라는

불멸에 대한 알 수 없는 확신이 내 머릿속에 있다.


3.

그 숲은 너무 크고 울창해 보고 있노라면

녹색의 바다를 보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이다.

그것은 분명 생명과 활기가 넘치는 땅일 터이지만

보이는 바로 완전히 어둠뿐인 그 수해樹海는

차라리 거대하고 봉인된 죽음으로만 보여서

나는 그 숲에 무언가가 살고 있으리라는 생각은 전혀 할 수 없다.

Posted by Lim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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