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춰진 작품
형태 없는 멈춰진 작품. 그는 지난 2년 간 살아오지 않았다
문짝 없는 집에서 안락한 부랑자처럼 지내는 것은 마음 편한 일이었다.
수백 개 어쩌면 수천 개의 이름표도 붙어
있지 않은 서랍들. 무언가는 비었고 무언가는 너무 무겁고
무언가는 무엇이 들어 있었는지도 기억나지 않고
타자기는 어디에 숨겨놨더라, 아니, 굳이 숨겨둔 것은 아니었다…… 내가
너를 속였지, 드라마를 만들기 싫다는 치기에 거울이란 거울은 모조리 깨버렸다
그래도 드라마는 너의 두개골에 천공을 만들고 뇌수로 스며든다
깨뜨리려면 너의 눈동자를 깨뜨려야했다.
하지만 그것도 멈춰진 작품을 다시 한 번 멈추는 것만큼 허황된 일이다.
“시를 쓸 때만 분노와 증오에 앓는 시인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것은 시를 쓰지 않으면 물에 부푼 익사체처럼 평화로이 부유한답니다. 그러면 그것은 둥둥 떠다니며 어쩌면 행복이라는 기괴한 개념을 이해할 수도 있겠다고 뭉글뭉글 생각하죠. 그런데도 언젠가 그것은 자신의 비대해진 몸뚱이를 사시미로 도려내고 비계 속에 파묻혀있던 팔과 손가락의 뼈들을 발굴해요.”
뼈다귀들은 달그락거리며 펜이 들어있던 서랍
과 담배가 들어있던 서랍들을 뒤진다. 아드레날린 주사를 맞는 것처럼 덜커덩
거리다가 그 뼈들은 집안의 술병을 전부 창밖으로 내던진다: 알코올중독자의 자기파괴 과정은 술을 끊는 것에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멈춰진 작품은 그간 점점 더 무거워졌다. 아예 신경도 쓰지 않을 때,
그것은 부피는 변하지 않은 채 질량만 폭발적으로 상승해왔다 그래서
아 그래, 멈춰진 작품이 있었지, 하는 순간, 너는 그 무지막지한 질량으로 얻어맞는 거야,
네 두개골은 박살나고, 눈동자는 여기저기 흩어지고, 턱뼈는 어딘가로 도망가 버리지
시를 쓸 때만 분노와 증오에 앓는 시인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앓지 않는 동안
나는 문이라는 문은 전부 두드리고 다녔다. 흔들림이 멈추지를 않는 전철을 타고
서울이라는 좁아터진 숲의 빌딩이란 빌딩은 전부 옥상까지 올라가보았다
옥상에서 담배를 태우면서 천둥번개를 기다린다
아무도 만날 수 없었다.
익사체의 마음으로 사람들에게 말을 걸었다.
어디에도 사람 같은 것은 없었다.
그러니까 즉, 너는 너의 운명이니 천분이니 하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지. 그런데
물에 부푼 시체 같은 모습으로 너는 참 잘 해왔어 물론 몇 십 년에서 더러는 몇 백 년 간 계속 해왔던 퇴폐와 패배의 습관들을 완전히 버리진 못했겠지 그러나 아무튼 너는 시체답게…… 물렁물렁한 시체답게 잘도 두 발로 땅 위에 서있었단 말이야, 그런데 또 운명이니 천분이니 천명이니, 의사가 준 알록달록한 약물들과 다시 대화를 하지, 그러니까 말하기를, 그러니까 그쪽에서 말이야, 네가 자주 들락거렸던 단출한 조명의 흰색 꿈나라의 관리자들이, 매번 말하는 것이잖아, 영혼 속에 지네가 들끓는 병은 한 번 치료하는 것으로 끝나지가 않는다고, 그 지네들은 계속해서 알을 깐다고……
너무 많은 말들이 있기 전에 나는 언어의 목줄기를 송곳니로 물어뜯어야만 했다.
멈춰진 작품을 다시 펼쳐보자 남한에도 있었고 소련에도 있었고 독일에도 있었던 K씨는 돌연 야수 같은 울음소리를 내지르고 싶어졌다. 분명 서랍 어딘가에는 나이프가 있고, 노끈도 있고, 심지어는 펜까지 있을 것이 분명하니까. 옥상에서 사흘 나흘 기다리며 담배를 피워도 천둥번개는 이쪽으로 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니까. K씨의 덜그럭거리는 팔은 냉장고에서 소주병과 맥주병을 찾아 그것이 확실하게 가득 차있는지 흔들어 본 뒤에 그것으로 길가는 소시민들의 대가리를 깨부술 계획을 짜고 있다.
거울을 깨지 말 걸 그랬지. 너무 어린 치기였어.
하지만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또 깨버리고 말 걸. 심지어는 눈동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