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자見者가 사는 세계

글/시 2018. 9. 24. 01:45 |

견자見者가 사는 세계



어렸을 적엔 걷고 싶으면 강으로 갔다


맥주를 따르는 소리

잔에 소주가 차오르는 소리

지금 나는 내륙의 한복판

강까지 걷기에 내 몸은

이미 회색으로 썩어 무너졌다


상체만으로 술을 기울이고

구름이 움직이는 소리, 달은 침묵한다

물이 가진 근육의 결들

덮쳐지며 겹쳐지는 투명한 운동들

칼을 집어삼키는 기분


어느 샌가 나는 밤에만 비명을 지른다

해가 뜬 시간에는 두 번째 눈꺼풀이

눈동자의 모양으로 활짝 열려, 인사한다

내가 사랑하지 않는 모든 사람들에게

초록색 지폐를 받으며 심장은 극약을 토한다


아무 것도 없는 세계는 어디

존재할 필요가 없는 세계는 어디

늑골을 하나하나 떼어, 심장을 꺼내들고

묻는다, 어디서 왔느냐고

텅 빈 폐 속에 또 한 번 독약을 삼키며


웃어라, 웃어라, 웃어라

네가 가진 잠깐의 시간, 종이와 펜, 잉크

위하여, 웃어라, 희생은 아니야, 이것은 희생이 아니야

값을 내라, 자기 자신을 사라, 칼을 삼켜

안녕, 내 이빨은 여전히 미소 짓는다


독에 젖어 이슬에 젖어 젖은 거리를 헤매

길고양이들이 어슬렁거린다, 나는 바닥을 긴다

집으로, 그런데 집이라니? 이빨은 또 한 번 웃는다

달빛은 보이지 않는다, 구름들이 움직인다, 그리고

미래를 믿지 않는 불꽃이 꺼지는 순간


걱정할 필요는 없다, 파라핀은 녹는다, 심지는 탄다

눈동자만이 썩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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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의 끝

글/시 2018. 9. 23. 01:05 |

영원의 끝



알코올에 젖어서 본 한밤의 나뭇잎은

대낮에 본 그것보다 선명한 푸른빛이었고

밤의 이슬을 머금어 알코올을

뚝뚝 듣고 있었다


구름에 가려 달은 제 본모습을 빤히

내보이지 못했지만 그래도 내 눈은

소주에 젖어 명백히 흰 달빛을

천사를 만나듯 영접하고 있었다


거리에서는 모래들 쓸리는 소리가

세상의 종말을 고하는 듯 스르륵 스르륵

내게 영원한 안식을 암시하며 노래를

부르며 울부짖고 있었고


멀리서 들려오는 차들의 엔진 소리는

<이제 곧 끝날 거야>라고 읊조리며

한껏 엑셀을 밟은 채 멸망을 향해

일직선으로 돌진하고 있었다


밤의 거리에서 벌어온 흰색의 금화들은

뚝뚝 떨어지며 빗방울 소리를 냈고

내 팔뚝에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얼굴이

웃는 채로 새겨졌다


언젠가 편히 쉬시길, 나는 웃으며 외쳤고

밤은 무게도 없이 가라앉아 오고

알코올이 떨어지는 푸른빛의 나뭇잎들은

궤변가처럼 생명의 영속을 말한다


검은 구름, 달은 보이지 않고, 해는 얼어붙었고

지금이 어떤 계절인지, 나는 취해 몸부림치고

까만 시멘트 바닥에서 뒹굴며 묻는다

<내 꿈들은 어디로 갔지? 이 길은 어디로 가는 길이지?>


한 달에 한 번, 자본주의에게 얻어맞으며 고개를 숙이고

안녕, 내 은화로 살 수 있는 위안들아

슬픈 사람들은 내 혀를 찾아 지친 발을 더듬거리고

당신은 마땅해요, 반복되는 거짓말들, 숨겨진 조소


섬에서 봤던 야밤의 파도를 기억한다

지구의 생살을 송두리째 기억하는 몸짓들아

꺼진 등대는 아무것도 비추지 못했다

취한 배여, 뭍은 어디에도 없어라


흔들흔들, 나는 눈 밑에 눈물 모양의 문신을 새겼다

떠난 사람들을 추억하려 했지만 눈물샘은 망가졌다

비척비척, 내 머리는 줄곧 한숨을 토한다

가야할 곳을 잃은 다리는 길바닥에 쓰러진다


내가 누구에게 빚을 졌지? 모두가 묻는 질문

아니야, 갚아야 될 것은, 숨 쉬면서, 울면서 청산했다

멈출 줄 모르는 발 앞에 펼쳐진 사막, 어디에도 없는 문

애초에 출구를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신이여! 아니면 자연이여! 혹은 운명이여!

언젠가 내가 쓰러져 태양의 빛살에 녹아

백골만 남았을 때 바람으로 그것도 녹여주오

나는 아무런 희망도 기대하지 않으니


걷는 존재, 걷는 현상, 나는 꺼지는 불꽃

빛이 있으니 밤은 오고, 나는 평생 하얀 밤을 본 적이 없으나

사무치게 그것이 보고 싶었다, 환희하는 죽음

나 꺼질 때, 사그라들 때, 저 끝에


공허가 어떤 색깔인지 알아차리는 순간

아무 것도 남기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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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는 구두

글/시 2018. 9. 16. 22:06 |

걷는 구두



나는 걷는 구두

밑창은 해지고 코는 닳았다네

갈대들이 내 목을 간질이고

뚫린 코에 들어오는 진한 돌, 흙 내음

나는 걷는 구두라네


하늘은 가끔 비를 내리기도 하고 해를 띄우기도 하지

나는 모래를 걷어차며 그것을 보네

내 가죽은 젖었다가 마르고, 더욱 뻣뻣해지고

그러나 오랜 걸음은 또 나를 부드럽게 만들어

나무와 풀들은 말이 없어


사막도 걸었고 해변도 걸었지

내 코엔 온 세상의 정수가 빨려 들어왔다가 도로 빠져나갔고

심지어 태양의 냄새까지 나는 맡아보았다

어둠의 냄새도, 달의 냄새도 날 짓눌렀다 가고

바람은 나의 온 가죽을 부드럽게 애무하였고

나는 그것들을 기억하네, 아니, 기억하지는 않아 사실은

바로 바람에 흘려보내버렸지, 내 뒷굽 너머로

태양에 달궈진 돌들은 뜨거워

밤의 얼어붙은 모래는 송곳 같아

나뭇잎 사이로 생명이 오락가락하고

나의 작은 그림자를 오래도록 따라오는 죽음

나는 걷는 구두

보고, 맡고, 듣고, 담았다가

내뱉어낸다.

Posted by Lim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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