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글/시 2018. 10. 17. 23:56 |

십자가



페이지 위에 빼곡히 찬 건 내가 가질 수 없었던 일상

내가 서있는 곳은 긴장과 분노로 다져진 정상

뛰노는 아이들은 순진하고 생활은 행복으로 충만

나는 눈을 감지도 못하고 그 광경을 보면서 비명 지르지 ‘그만’

그게 내 삶이었을 수도 있었다고 말하지 마

행복은 너희끼리 나눠가지고 나한텐 보여주지도 마

나는 이 정상까지 십자가를 짊어 매고 올라왔어

너희는 그 일상에서 기도하는 손으로 연민 했어


바람은 차가워지는데 등줄기엔 식은땀이 멈추질 않아

그래도 난 폭풍을 쥐고 정상의 정상으로 내쳐 가

아무도 나한테 멈추라고 하지 마, 땅의 끝이 있다고 믿게 하지 마

마지막 내 발자국이 데드마스크가 될 때

난 쓰러지며 웃을 거야, 죽으면서 외칠 거야 ‘어때’


등에 맨 십자가는 온 관절을 짓누르지만, 난 그걸 버리는 방법을 배우지 못 했어

손에 권총이 있다면 망설임 없이 내 머리를 쏘겠지만, 헛된 상상 속에서도 난 앞으로 걸어

내 맨가슴에 새겨진 흉터들이 보여? 이것들이 전부 내 방패야

살면 살수록 몸은 흉터로 덮여, 아무튼 난 그걸 감추지 않을 거야

그러니 너희들의 삶은 집어치워

내가 가지지도 못했던 걸 잃어버렸다고 할 순 없어

내 옆에서 사라져, 난 행복할 수 없어

그저 내 십자가를 더 높은 곳으로 옮겨야 해


그러니까 날 추하다고 말해

어쨌든 너희를 위해 아름다워지진 못해

Posted by Lim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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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어지는 길

글/시 2018. 10. 10. 00:49 |

멀어지는 길



한밤에 집으로 가네

점점 발이 무거워지고

난 어깨에 맨 가방을 들쳐 매고

가로등 밑을 조용히 지나

나 집으로 돌아가네

그러나 발자국은 점점

느려져


오늘 아침에 있었던 일들이

전부 거짓말 같지

난 비몽사몽 꿈에서 깨어나서

거울을 보고 면도를 하는데

이해할 수가 없었어

내가 생시인지 아직 꿈을 꾸는 건지


그때 창 밖에서 요란하게

동전소리가 났고

나는 퍼뜩 정신을 차릴 수밖에 없었지

내 턱에서는 한 방울의 피가 흘러내리고

거울을 향해 웃어보였다네


옷을 갖춰 입고 거리를 걷는 나의 모습은

누가 지적할 일도 없어 보였지

주머니에서 짤랑거리는 금화소리는

날 가면 쓴 광대로 만들고


너무 길었던 하루가 끝나고 너무 짧은 밤이 오면

나 한 몸 뉘일 집을 찾아 가네

그런데 왜일까 걸으면 걸을수록

내 집에 더 가까워지면 내 발은

고철처럼 무거워지며 점점 더뎌지는데

해는 지평선 밑을 흐르고 있다네


나 또 잠이 들면 거짓 속의 죽음을 찾겠지

결국 깨버릴 짧은 모든 망각의 늪을

그리고 해는 날 두들겨 깨워 눈을 뜨고 말테고

그러면 나 또 거울을 보며 웃는다네


나나나나나나 나나나나나나 나나나나 나나나

나 아무 것도 없는 내일을 향해

Posted by Lim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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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밤의 기도

글/시 2018. 10. 7. 01:41 |

가을밤의 기도



나는 습기 찬 밤거리에서 신에게 기도를 올렸다

내 눈은 밤으로 가득찼다

희망은 없었고, 거부했다, 보이는 것은 죄와 오물

신의 아이들이 흘리고 간 후회 가득한 시간의 흔적들

혼돈의 구렁텅이에 잠겨 은하수처럼 천천히 회전하는

어둡고 소음 가득한 도시에 내가 있었다


신에게 기도하면서도 나는 그를 믿지 않고

다만 한 번 물었다, 내가 사랑할 수도 있었던 사람들을 구원해 줄 수 있었느냐고

딱히 그에게 내기를 제안하지도 않았다, 나는 사람의 자식이니

그저 나는 계속, 당신이 현현할 리 없는 인간들의 세상을

육지가 없는 바다를 헤엄치는 심정으로 처참히 살아갈 터이니

어쩌면 내가 사랑할 수도 있었던 사람들을

어쩌면 당신이 구원할 수도 있었느냐고


어느 날 세계가 빛에 감싸여 거짓과 절망조차 보이지 않게 된다고 해도

나는 여전히 신성모독적인 신음을 뱉으며 다친 개처럼

기어 다닐 것이다

이마에 낙인찍힌 분노를 가릴 생각도 않고, 오히려 자랑스러워하며

질병과 고통으로 삶을 있는 힘껏 칠할 것이다

사람의 자식으로 태어났으니

사람이 아니게 될 그 날까지

당신 없이 마지막 한 발자국을 찍을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단 한 번도 웃음 짓는 일 없이 기도했다

하늘에 내가 돌아갈 자리가 없어도 되니

평안을 바랐던 사람들에게

평안을 줄 수 있는지


한 번

물어나 보았다

Posted by Lim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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