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네 시

글/시 2019. 2. 1. 04:39 |

오전 네 시



정적이 차갑게 얼어붙어

밤이 몰아칠 때

나는 갈 곳이 없다

잠을 자는 것도 좋다

세상도 겨울이라는 꿈이니

그러나 호르몬과 화학물질들 사이에서 허우적

거리다 깨어나도 나는 나라는 꿈을 꾸고 있다

갈 곳 잃은 발은

잠에도 들지 못한다

술을 마셔보아도

꿈의 허술한 틈들이 더 잘 보일뿐

이 거품덩어리 속에서는 눕기는커녕

서있을 일도 없다


허구로, 만약 내가 진실로 향하지 않는다면……

더 짙은 안개

더 열리기 힘든 눈


그런데 시원의 혼돈이 법이었다면

피의 따뜻함, 군화소리의 분명함, 공포의 비명들:

회귀하려는 힘, 골수의 목소리

내가 찾는 것은 정반대 방향에서 나를 찾고 있다


겨울에

공허가 더 맑아질 때, 꿈에는 교훈이 없고

나는 헤매고, 헤맬 수밖에, 털이 난 거품 같은 현실

활자는 증발한다.

Posted by Lim_
:

물의 궁전

글/시 2018. 12. 18. 05:06 |

물의 궁전



은빛으로 빛나는 얇디얇은 호수 위에 정령 하나가 걷고 있다

발끝으로 파문을 만드는 그 발목의 움직임은 물빛이다

밤에 취한 사원들, 커다랗게 입을 벌린 지붕들

정령은 생명이 없기에 죽음을 몰라라

오, 수면에는 무너진 나룻배! 나는 관조한다.


이곳이 시체들의 묘지라는 것은 모두가 잊었고

정령이 그것을 잊게 한다, 정령은

밤에서 나왔고, 호수에서 나왔고, 달에서 나왔으며

우리가 숨 쉬는 공기가 망각 속에서 농축된 시취라는 것을

부정하기 위해서 나타났다.


기나긴 날숨……

시간은 쓰러져야만 했다.


흰 나락, 정령은 내려다보고

높이와 깊이가 뒤엉겨버린 호수는 종말의 표정

그것은 아름다운 웃음이다. 관조하던 나는 즉사하고

즉사해야만 했고

대리석의 균열 사이에 핀 암청색 풀잎이

다음 생애를 가리키고 있으니!

Posted by Lim_
:

발걸음은 계속 빨라지고



왜인지 발걸음은 빨라지는데

내겐 딱히 갈 곳이 없다

목적하는 곳은 없다, 내 시간은 내일을 향해 흐르지 않는다

미래를 믿지 마시오, 겨울이 끝나면 봄이 온다고 누가 말했지?

이 땅에는 해가 뜨지 않는 밤도 있다, 내가 걷는 이 밤도

어디서 끝날지 누구도 모른다, 나는 물론, 끝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목적하는 곳은 없다 그런데

발걸음은 계속 빨라지고


정신차려보면 황혼이다, 해나 달을 본지 너무 오래 되었다

어딘가 골목구석에 앉아 벽돌색의 세상에 대해 노래

부르고 싶지만 밤이 오기 전에 어서 걸어야한다

밤이 오기 전에, 눈이 내리기 전에

빙하기가 오기 전에

발걸음은 계속 빨라지는데

구름은 항상 나보다 빠른 속도로, 지구의 저편으로 간다


스쳐지나간 수많은 공간들은 내게 텅 비어있었다

어딘가에 사람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어딘가에 사랑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지만

망각은 심연보다 어둡고 괴물적인 아가리로 모든 것을 먹어치운다

수증기 가득한 숲에서 나무들은 생명을 잃고

내가 밟는 것들은 수억 살 먹은 시체들의 유골, 나는 비문 하나 없는 묘지를

서걱서걱 밟으며 걸어가 버린다


안녕, 금화들의 도시여, 나는 미래를 믿지 않지만

나의 죽음만은 믿는다. 내 발걸음은 계속 빨라지고, 향하는 것은

종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가끔씩 나를 더 가쁘게 한다, 멈추는 방법은

태어난 이래 누구에게도 배운 일이 없다

이 행성은 왜 자전을 멈추지 못하지? 별들에게 시를 읊을 시간이 그에겐 없다

어떤 것은 끝나야만 한다, 혹은 모든 것은 끝나야만 한다, 하늘은 얼어붙고

눈이 내리지도 못할 정도로 꽁꽁 얼어붙고, 나는 걷는 얼음, 흙, 진창

또 밤, 밤 뒤엔 다시 밤


행성과 같은 속도로 걷는 눈동자에게

비치는 것은 계속해서 밤

Posted by Lim_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