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초에 걸렸던 결핵

글/시 2019. 11. 14. 07:18 |

연초에 걸렸던 결핵


마음 둘 곳도 없고
갈 곳도 없네
소나무 가지에 담배연기는 뿜어지고
어둠은 결국 밝을 것이라

매일 아침 태양이 뜨는 걸
저주하던 시기가 있었지
화를 냈던가?
내 몸이 화에 들떴지

죽어야만 할 것 같아……
사람들은 실망하고
나는 수치에 몸부림치고
빚을 갚을 마음은 애당초 없으니

온몸의 피를 길게 빼내면
가을바람 휘몰아치는 창밖에
빛살은 내려오고
나는 갇힌 창안에 누워있겠지

왜 떠도느냐고
괴로우니까다
왜 떠도는 것에 괴로워하냐고
괴로우니까다

연초에 걸렸던 결핵이
다시금 그리운 밤이다.

Posted by Lim_
:

짐승의 노래

글/시 2019. 11. 11. 07:59 |

짐승의 노래


산중에 가을비 내리고
담배연기는 커피의 맛
쓰고 떫어, 혀에 들러붙어
분에 안 맞는 사치의 뒷맛 같구나

내 코트에는 빗방울들
껌처럼 눌어붙지
해는 구름이 가렸고,
나뭇잎이 가렸고, 내 마음이 가렸다

신기한 일이지, 담뱃불은
비 내려도 빨갛게 탄다
다만 떨어진 담뱃재
진흙으로 돌아가 회색반점이 된다

입에서 나는 커피와 담뱃진 냄새에
나는 입을 감추고
황급히 몸을 감추고
아무도 찾지 않는 내 둥지로 향한다

질질 끄는 발걸음을
가을비는 붙잡고 늘어지고
질끈 묶은 머리는 비에 번들거리며
나는 도망치는 산짐승 같아라

어리석고, 수치스러운 모습으로만 살아왔으니
짐승으로 돌아가는 것은 당연한 바
유아아아 괴상한 울음을 짖으며
지혜로워질 수 있는 날을 망상한다

가을비, 끈덕지게 쏟아붓고
내 코트는 짙은 적색이 되었지
입에 문 담배는 재만 남았네
유아아아, 둥지마저 버리고 싶어라

Posted by Lim_
:

전학의 추억

기록/생각 2019. 11. 8. 13:33 |

전학의 추억


 그런 기억이 있습니다. 10살 때였을까요. 저는 가족들을 따라 의정부로 이사가 처음으로 아파트 단지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저에게 아파트 단지라는 것은 그야말로 혼돈으로, 똑같이 생긴 건물들이 수도 없이 서있는 미로나 마찬가지였던 것입니다. 처음에는 별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만, 문제가 된 것은 전학수속을 마친 뒤였습니다. 그 동네에서 처음 등교하는 학교로 가, 수업을 마치고 보니 이것이 참으로 혼란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아파트 단지까지 가는 길은 분명히 기억하는데, 단지 안의 어떤 건물이 나의 집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별 도리가 없어 하교하기 전 담임선생님께 사정을 설명하니, 그녀는 아무래도 제 신상기록을 뒤져본 모양입니다만, 아무튼 간에 같은 아파트에 사는 반 친구를 찾아낸 것입니다. 그 아이는 10살치고도 유난히 키가 작고 어머니가 정성스레 땋아준 것으로 보이는 양갈래 머리를 하고 있었는데, 이것 참 그녀는 그 작은 체구에 놀라운 성질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또박또박 말하는 말투며 주변 일에 흔들리지 않는 무관심한 성정하며, 저는 그 어린 나이에도 나와 같은 나이의 어린애가 그런 성격이라는 점에 놀라워했던 것 같습니다. 여하간 선생님이 알려준 동과 호의 숫자를 되뇌며 제 앞에서 따박따박 걷기 시작하는 작은 여자애를 따라 걸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당시에도 선생님과 그녀가 나를 자기 집도 기억하지 못하는 바보로 안 것은 아닐까 걱정스러웠던 것 같습니다. 때는 아마도 봄이었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초록색 나뭇잎 사이로 흘러내리는 그리 덥지도 않은 황금빛 광선들이 유난히 기억에 남기 때문입니다.
 그 시절의 기억이라는 것들은 하나같이 시각에 집중되어있습니다. 당시에는 소리를 잘 듣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바로 옆에서 자동차가 지나가도 저 멀리 지평선 너머에서 엔진이 울리는 것 같은 아련한 소리만 들릴 뿐이었으니까요. 하여 도로의 회색이 되어가는 콜타르라든가, 거의 칠이 벗겨진 횡단보도의 흰 줄이라든가, 그 위에서 아른거리는 태양의 흔적들 따위만 저의 어린 시절에는 가득한 것입니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인데, 당시 저는 귓속에 점액이 차는 병을 앓고 있었다고 어머니로부터 들었습니다. 그리 중요한 일은 아니지요. 그저 그런 이유가 있었구나 싶었을 뿐입니다. 여하간 제 앞에는 머리를 양쪽으로 땋아 정수리에서 뒤통수를 지나는 직선의 선으로 두피가 보이는 작은 아이가 놀라울 만치 곧은 자세로 거리를 걷고, 저는 그것에 감탄하면서 마르고 흰 팔다리를 휘적거리며 따라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가끔 흘러내리는 안경을 추켜올리면서, 그때도 저는 몹시 시력이 나빴습니다. 아무래도 너무 이른 나이부터 독서에 열중해 밤에도 성치 않은 불을 켜놓고 책을 읽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하여 돌이켜보면 우스운 장면인 것입니다. 그녀의 이름도 뭣도 기억나지는 않지만 몸짓이 똑바르고 당당한, 저보다 한참 키가 작은 여자아이를, 나이에 비해 뇌수만 비대해져 창백하고 비쩍 마른 키 큰 남자아이가 주춤주춤 따라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야말로 코미디의 한 장면 같습니다만, 어린아이의 의식이라는 것은 그렇게까지 발달하지 않아 희극이나 비극을 구분할 필요를 갖지 못하는 것입니다.
 마침내 아파트 단지 안에 들어가, 삼백 몇 동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만, 그 건물 안에서 소녀는 엘리베이터 앞에 멈추더니, 감탄스럽게도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엘리베이터를 타야 해. 넌 2층이야.>하고 말입니다. 그 목소리는 조용하고 상냥했지만 마치 군인의 강령처럼 완벽했습니다. 생각해보니 단지까지 오는 동안 그녀가 뭔가 말했던 것 같기도 합니다만, 아니, 말했을 리가 없겠지요. 그런 소녀가 길을 가는 와중에 사사로운 잡담을 했다는 기억은 없습니다. 하여 처음으로 소녀의 목소리를 똑바로 듣고, 이 작은 아이에 대해 놀라워하면서, 사마귀처럼 긴 사지를 가진 저는 털벅털벅 2층으로 올라갔던 것입니다. 그런 모험을 마치고 드디어 집으로 들어가자 어머니가 <왔니>하며 무관심하게 반겨주고, 저는 여전히 그 소녀의 놀라운 성질에 대해 감탄하며 벙 찐 표정으로 멍하니 현관에 서있었더랬다는 이야기입니다.

Posted by Lim_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