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무주의자들의 무덤을 밟아야만 한다


달이 뜨지 않은 밤이면 산은
더욱 괴기스러운 모습으로 침묵한다.
나무와 풀잎들 사이사이로 어둠을 머금고
가끔 동굴 속에서 으르렁거리는 밤 짐승처럼
배를 깔고 누워 포식성의
고요를
마치 위협인양
취약한 인간의 영혼 앞에 펼쳐 보인다.

나의 동족들아, 같은 피를 마시고 자란
비대하고 결핍된 영혼의 조각들을 가진
같은 어머니 죽음의 치맛자락을 기억하는
동족들아, 너는 분명히
잔혹하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의 저 새까만 침묵을
본 일이 있다.
그리고 너의 마음 한편에는 이상한 분노가
말하자면 오히려 억울함 같은 것이 외친다.
「늙은 자연이여, 이 행성 위에서 당신은 어째서 그리도
우리 나약한 인간들을 향해 적개심 아닌 적개심을,
차라리 공포스러운 장엄함으로 우리의 영혼에
망치질을 하고야 마는가?」

그는 침묵한다! 우리는 그가 입을 여는 것을
단 한 번도 본 일이 없다.
우리가 그와 마주할 때마다 그는
어떤 때는 구부러진 손으로 어둠을 쥐고
어떤 때는 우리의 시각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태고부터 변한 것이 없는 심원한 암흑을
파도소리에 섞어 보낼 뿐이다.

차가운 내륙지방에서 서리만을 먹으면서 자란 인간에게
새까만 밤바다에서 등대 하나에만 의지하여 <길>을 찾으라 한다면
그는 분명히, 차라리 단도를 하나 들어 자신의 목을
찌를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치졸한 에고가
구름 낀 밤중의 산과
은밀하게 그르렁거리는 밤바다를 마주할 때
인간은 자신이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는 치명적인 진실에 영혼이 말라
더 이상 지혜 있는 동물로서의 손과 발도 잃어버리고
도망칠 생각도 못한 채 그 자리에 쓰러져버리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의 동족이여,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끝 간 데 없이 펼쳐져 지평선과 하늘마저 뒤섞인
이 황무지 위에서 너희들은 왜 말라버리지 않는가?
공포로 떨리는 비명을 하루 종일 질러대면서
왜 아직도 낮에는 태양을 삼킬 듯이 천공을 향해 입을 벌리고
밤에는 달빛에 맞아 칼자국이 나면서
모래를 그러쥐며 기느냔 말이다.

「우리의 공포는 정당하다.」 그런 말을 하는 너의 얼굴을 내가 보았는데
너에게는 이미 눈동자가 없었다. 푹 파인 구렁 두 개가 있을 뿐이었다.
나는 너희들이 영원을 믿는다고 생각하고
반쯤은 화가 나고 반쯤은 눈물이 날 것 같은 기분으로
네 멱살을 잡아, 들어 올리면서 외쳤다.
「네 아버지가 불타서 모래가 된 것을 기억하라.」
그랬더니 너는 웃는 것처럼 울고, 우는 것처럼
웃으면서 말했다: 「내 관이 비어있어도 나는 괜찮다.」

그런데 이 모든 촌극을 아무 말 없이 지켜보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저쪽에 솟은 모래로 된 산이었다. 그 산은
감정 하나 담기지 않은―그렇기 때문에 우리를 미쳐버리게 하는
그 눈동자로 우리들의 추태를 구름보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우리는 이성을 잃어버릴 뻔 했도다! 내가 말하기를
많은 초월적인 것들은 우리 눈에 거의 절대성으로 비쳐 보인다.
그러면 우리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우리의 초라한 존재성 때문에
우리들은 견딜 수 없는 침묵 속에서
집을 잃고 햇볕 아래 놓인 달팽이처럼 말라비틀어지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돌아버리지 않기 위해, 눈동자 없는 나의 동족이
그대로 산산조각 나서 모래와 재로 변해버리는 것을 막기 위해
그의 칼을 빼앗아서
나의 한쪽 눈알을 도려낸 뒤 그 눈알을 내 동족의 오른쪽 눈구멍에
쑤셔 넣었다.
그리고 나는 피 흘리면서
나의 동족은 내 도려내진 눈에서 흐르는 피를 받아먹으면서
그 모래로 된 거대한 산을 보았다.
그것은 여전히 아무 표정도 없었다.
Posted by Lim_
:
유교적 예법과 합리주의, 그리고 보리심


 글을 시작하기 전에, 우선 내가 이 글을 쓰기 위해서 많은 양의 진정제와 신경 안정제를 위 속에 털어 넣었다는 사실을 밝힌다.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부터 시작하려는 글의 주제에 대하여 나는 이십 년도 넘는 기간 동안 괴물 같은 분노와 증오만을 씹어대면서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분노만으로는 당신의 심장 속 문으로 걸어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증오로 물든 인간의 주장이란 논설이 아닌 차라리 폭력, 그것도 독자의 영혼에 칼을 들이대면서 외쳐대는 폭력인 것이다. 물론 그것만으로 충분했던 시기도 있었다. 당신의 정수리 한복판에 날붙이를 박아 넣을 때마다 뿜어져 나오는 정신의 진액이 내 갈증을 해갈해주었고, 그것만으로 만족했던 시기도 있었다. 그러나 계몽주의나 사회참여문학 같은 이데올로기들은 접어두더라도, 나는 이제 나의 분노들을 문 안에 넣고 자물쇠를 잠가버린 것이다. 항상 증오 때문에 핏발 선 눈동자로 사물을 볼 수는 없다. 내가 앞으로도 계속 글을 쓰기로 길을 정한 이상, 나는 당신들의 얼굴에서 역겨움과 조소, 구역질만을 보고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어쩌면 가끔 잠가둔 문이 열리고 이미 내 인격의 일부나 다름없는 그 지옥 같은 감정들이 튀어나올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나중의 일이다. 나는 내가 아는 것들에 대해서 이야기해야한다.
 지금 이 나라 안에 살고 있는, 어느 정도 나이를 먹고 연식이 생긴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을 것이다. 이 사회에서 인간과 인간들의 위치를 결정하는 것은 바로 <예(禮)>라는 것을 말이다. 예절 중에서도 특히 유교적 예법은 우리 사회 가장 깊숙한 곳까지 침투해 사람들의 정신, 그 뿌리 부근에 박혀있다. 아침에 일어나서 밥을 먹고 일을 하고 잠자리에 들 때까지, 그 유교적 예법이라는 것은 단 한 시도 당신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이것은 우리들의 머릿속에 너무 깊이 뿌리를 내려서 이제는 차라리 초자아(Super-ego)의 일부나 다름없다. 그리고 심지어 우리들은 그 예법의 정당성에 대해서 의심조차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 생활의 거의 전부가 그것으로부터 발생한 것이기 때문이다. 길을 걸으면서도 우리는 반대편에서 노인이 걸어오면 지래 겁을 먹는다. 왜냐하면 <반드시> 우리가 길을 비키고 고개를 숙여야하기 때문이다. 술자리에서 넥타이를 풀고 잔을 부딪치면서도 우리는 긴장하고 있어야한다. 겁도 없이 어른보다 잔을 위로 들고 건배를 했다가는 나중에 무슨 해코지를 당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은 퍽도 이상한 일이다. 한민족이라는 민족이 언제부터 이렇게 유교의 지배를 받게 되었는지 생각해보면, 그것은 그리 오래된 일도 아니다. 고작해야 조선시대와 함께 시작된 유교적 문명은 당신들의 민족이 과거에 선택했던 다른 사상적 문명의 유구함을 생각해보면 굉장히 짧고, 또 공허한 것이기 때문이다. 유교라는 것은 끝없는 전쟁으로 피폐하던 당시의 중국에서 통치 이데올로기로서 발생한 것이다. 그리고 모두가 알다시피, 통치 이데올로기라는 것은 위정자들이 우민들을 보다 손쉽게 조종하기 위해 만들어낸 <식(式)>이다. 애당초부터 그들에게 진리나, 사물 혹은 존재의 본질에 대한 탐구심은 없다. 그들이 만들어낸 <-ism>은 사실 사상조차 아닌 것이다. 사상이 사상이 되기 위해서는 우선은 존재에 대한 고찰과 성찰, 그리고 세계를 향한 깊이 있는 통찰이 있어야한다. 그리고 또 무엇보다 중요한 요소는, 바로 <정직>이다. 존재로서의 정직. 인간으로서의 정직. 인식하고 관찰하는 자로서의 정직. 그리고 표현하는 자로서의 정직 말이다. 설령 그 누군가가 아무리 그로테스크하고 잔혹한 사상을 부르짖더라도, 그것이 정직하다면 그 부르짖음에는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시 중국 왕조, 그리고 조선 왕조, 지금에 와서는 우리들의 사회에까지 적용되고 있는 그 유교라는 것에서는 도무지 인간 본연에 대한 통찰이나 정직성을 찾아볼 수가 없다. 그들이 말한 것은 오직 하나다. 그들-즉 더욱 위에 서고 싶은 자들이 인가를 내린 가면만을 뒤집어쓰라는 것이다. 그들이 말하는 예절이라는 것도 굉장한 우스갯소리다. 그 예절의 이름으로 존중받아야할 사람이 된 이들은, 스스로가 타인들보다 우월하다는 주장에 대한 근거가 <피>와 <시간> 밖에 없는 것이다. 왕을 받들어 모셔야하는 이유는 그가 왕가에서 태어났기 때문이고, 어른 앞에서 엎드려야하는 이유는 그가 당신보다 더 많은 시간을 먹어치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유교교리의 얄팍함은, 마치 파시스트처럼 꽉 막힌 사고의 폐쇄성에 있다. 그들은 새로운 발상은 그것이 무엇이든 자라나기도 전에 목을 잘라버린다. 그들은 의문이나 반발 따위는 꿈도 꿀 수 없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목적이다. 그리고 조선왕조 500년. 그들은 역사 속에서 공중분해 되었다.
 그러나 국가가 분쇄되어도 그간 민생들에게 주입되어온 통치 이데올로기는 사라지지 않은 모양이다. 식민지시대와 근대를 거쳐, 그럭저럭 숨통이 트인 현대에 와서도 유교적 사고방식은 여전히 당신들의 미간 한복판에 독을 품은 화살촉처럼 박혀있다. 물론 많은 변화가 있었다. 서방세계의 문물과 문화가 한반도를 뒤덮었고, 젊은이들은 몇 번이나 전투경찰들에게 화염병을 던지며 목소리를 내고 싶어 했다. 그에 힘입어 우리가 사는 국가는 서양에서 온 <합리주의>라는 것을 사회에 적용했다. 몇 계몽주의자들은 더 이상의 허례허식을 붕괴시키기 위해 사람들 앞에서 연설을 하기도 했고 글을 쓰기도 했고 악기를 연주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번 굳게 닫힌 인간들의 사고방식은 쉽게 열릴 수가 없는 법이다. 지금 우리들의 사회는, 늙은 유교적 예법이라는 기반 위에 서양적 합리주의로 페인트칠을 한 것일 뿐인 괴상망측한 모양새가 되었다. 법정 안에서 매일 같이 벌어지는 일들을 관찰해보면 이러한 사실을 더 명확하게 알 수 있다. 그들의 두꺼운 법전이 말하고 있는 것은 분명 합리주의와 자연법에 기초한 사회윤리인데, 그 사회윤리는 한 꺼풀만 벗겨보면 조선왕조 시대의 유교적 교리를 말하고 있고, 심지어 법봉을 내리치는 판사가 내린 판결의 근거는 <오래 전부터 우리의 초자아가 되어버린 유교적 교리에 비추어봤을 때 저 범죄자는 얼마나 싹수가 없는가>에 기반하고 있다. 더 나아가 패륜범죄라도 접하게 되면 상황은 더욱 볼만하다. 검사나 판사들은 이미 오래된 분노로 가득하고, 언론은 <극악무도한 패륜아>라는 문장을 어렵지 않게 사용하며, 그 범죄자에 대한 처벌은 이미 <처벌>이 아니라 <복수>나 다름없다. 도대체 패륜이라는 것이 무슨 뜻인가? 그 범죄자는 다른 범죄자들과 하등 다를 것이 없는 <그냥 범죄자>란 말이다. 이럴 거면 차라리, 마치 어머니의 장례식장에서 밀크커피를 마셨다는 이유로 사형당한 뫼르소처럼, 그 범죄자가 식사시간에 어른들보다 먼저 밥숟갈을 떴다는 죄목도 추가하란 말이다.
 이쯤에서 잠깐 사과를 해야 할 것 같다. 나는 분명히 분노로 이 글을 쓰지는 않겠다고 다짐했었는데 글을 진행하다보니 어느새 혈관 속에서 피가 끓고 있었던 모양이다. 마음을 다잡고 계속하도록 하자.
 예절의 본질에 대해서 생각해보도록 하자. 그것은 유교적 교리에 있지도 인간들 사이의 거리에 있지도 않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진정한 예절이란 식이나 법 따위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무아, 자비심, 보리심에 진정한 예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거기에는 특별한 규정 같은 것이 없다. 그러나 소위 깨달았다고 하는 스승들의 행위에는 분명히 모든 인간들에 대한 존중과 사랑이 있다. 통치 이데올로기나 철학적 사유에서 나온 규정들보다 더 확실하고 자연스러우며 유연한 것이 거기에는 있다. 모든 인간들을 자비로 바라보고, 타인과 나 사이의 경계가 사라져 한 몸처럼 되고 나면 인간이 자신의 몸을 존중하듯이 타인도 자연스럽게 존중하게 된다. 상대가 불편하면 자신이 불편한 것과 다름없으니 그를 편하게 해주고, 상대가 고통이나 슬픔을 느낀다면 자신이 그런 감각을 느끼는 것처럼 그것들을 해소해주려고 노력한다. 이 사회에 필요한 것은 다른 누군가를 규제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욕망을 먼저 규제하는 것이다. 모든 이들을 자신의 신체일부처럼 여긴다면 그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 걸고 매달려있는 예법이라는 거추장스러운 것이 도대체 왜 필요하겠는가? 나는 부디 당신들이 자유로워지기를 바란다. 처음 태어났을 때부터 갖고 있던 <존재로서의 자유>라는 것을, 부디 다시 발견하기를 바란다. 이 사회에서 너무 오래 살아왔기에 스스로도 눈치 채지 못하고 발목에 족쇄를 달아 스스로 노예가 된 사람들이, 모든 인간은 처음부터 그 누구의, 그 무엇의 노예도 아니었다는 사실을 정신의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느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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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나약함을 정의내릴 수 있는가

 ■ 항상 사회에 남아 그들이 군대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것을 관망하고 있는 나로서는, 군대에서 그들이 배워온 것, 그리고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규격화된 정신을 가지게 된 것에 대해서 수많은 생각을 할 수밖에 없다. 어떤 친구들은 내게 <피터 팬>이라는 별명을 붙였다. 그들이 보기에 나는 온몸, 온정신을 다하여 어른이 되는 것을 거부하는 유별난 청년으로 보이는 모양이다. 아, 그들의 통찰을 너무 안일한 것이라고 비난할 자신감이 나에게는 없다. 그리고 군대라는 2년간의 사회인이 되기 위한 스파르타식 교육을 마치고 돌아온 그들에게, 내가 다소 가엾은 인간으로 보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대하여, 나는 반박할 의지조차 없다. 그렇다, 사실 나는 아직도 이 세상의 온갖 것들에 반항하며 소모적 투쟁을 치르고 있다. 이 사회를 지탱하는 이들이 철썩 같이 믿고 있는 유교적 예법, 조직사회의 규율, 부조리에 대해 아무런 감정도 갖지 않는 삶, 과잉된 합리성과 실존적 인간조건에 대한 회피. 내가 어머니의 살점과 분리되었을 적부터 나의 심장 속에 살고 있는 그 피투성이의 야수는, 분노와 증오라는 이빨로 아직까지 나의 가슴을 물어뜯고 있다. 그러나 이제 막 어른이 되어가고 있는 나의 친구들은 나의 흉터를 이해하지 못하며, 거기서 흘러나오는 찐득찐득한 피를 객기라고마저 칭한다. 나는 그들을 탓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반박의 말조차 꺼내지 않는다. 이런 위험한 전쟁 중에 입으로 내뱉는 말들은, 언어라는 것이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서 굉장히 피상적인 것밖에는 표현할 수 없다는 진실에 힘입어, 나 자신의 어리석음을 증명하는 것밖에는 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나는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 순순히 털어놓겠다. 내가 발견한 어른이 되지 않는 방법은, 그 누구에게도 애정이나 신뢰를 주지 않는 것이었다. 나는 사람들과, 심지어 내 절친한 친구들과도 정신적으로 깊은 관계를 맺지 않는다. 만일 나의 오래된 고독이 머리를 내밀거나 상대가 나에게 어떠한 종류의 매력을 느껴, 내가 그어놓은 선이 침범 당하려하는 기색만 보여도 나는 불안 때문에 뒤죽박죽이 된 눈동자로 멀리 도망친다. 나의 가장 절친한 친구조차도 내게는 그저 목의 갈증을 교우관계에서 해갈하기 위한 한 순간의 쾌락을 위한 마네킹이고, 내일 그가 차에 치여 죽는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의 장례식조차 가지 않을 것이다. 말하건대 나는 모든 인간관계에서 공포를 느낀다. 내 심장을 시꺼멓게 물들인 것들은 분노와 증오, 불신과 비밀스러운 조소다. 누군가를 짊어지고 그 무게를 감당한다는 책임으로부터 영원히 도망치고 있는 나는, 어쩌면 정말로 <피터 팬>, 팅커벨이 없어 날지 못하는 피터 팬일지도 모르는 것이다.
 이쯤 되면 이 산문은 이미 나 자신에 대한, 나 자신을 향한 고해나 마찬가지다. 스스로도 아직 확신하지 못하는 것이지만, 내게 있어 문학이란-예술이란 어떤 위대함이나 고결함도 없는 단순히 비겁한 도주로인 것일지도 모른다. 추악함과 퇴폐 속에서 자유와 미학을 찾겠다고 제 발로 세상의 밑바닥까지 내려간 것은, 밝은 세계에서 얼굴을 들고 다니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오로지 문학과 미학에 온 생애를 바치겠다고 다른 그 무엇도 짊어지거나 손을 마주잡지 않은 이유는, 인간으로서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내게는 너무도 힘든 일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인간을 사랑하기를 그만두겠다고 내 고독의 목에 쇠사슬을 감아놓은 것은, 내게 사랑스러운 존재가 생긴다는 것을 감당하기에 나는 너무 취약한 영혼을 가지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쯤에서 나는 자조 섞인 목소리로 말한다. 독자여, 도대체 무슨 영광을 얻겠다고 당신은 내가 나 자신이 불량품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글을 읽고 있는가? 이것은 패배주의와 퇴폐주의에 빠진, 보는 것만으로도 구역질이 날법한 인간의 고백록이 아닌가. 그리고 이런 글을 쓰는 내가 사실은 그 어떤 종류의 도움도 거절한다는 것을, 무엇보다도 당신이 가장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내가 어른이 되기를 거부하는 이유가 어른이 되어 짊어져야할 책임들이 두려운 것인지, 아니면 여전히 이 세상의 긍정할 수 없는 수만 가지 부조리들과 짐승 같은 싸움을 벌여야하는 것 때문인지 분간할 수도 없다. 어쩌면 둘 중 하나일 것이고, 어쩌면 두 가지가 혼재하고 있을 수도 있겠지.
 아, 그런데 심지어 나는 더 이상 스스로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 방법까지 발견해버렸다! 그것은 이 인생을 살아가는 방법들 가운데 무엇보다도 간단하고 손쉬운 방법이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 당신의 본성 속에 숨어있는 광기의 문을 찾는 것이다. 그리고 그 흉측스러운 문을 열고, 당신의 고민, 고통, 슬픔, 기쁨, 절망과 희열까지 모조리 다 그 문 안에 처넣어버리고 문을 걸어 잠그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당신은 더 이상 고통 받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한다. 광기의 문 속에서 온갖 감정과 현상들은 진흙탕처럼 뒤섞이고 부글부글 끓다가, 결국 내놓는 것은 당신을 포함한 이 세상 전부가 수준 낮은 농담이라는 결론이다. 그렇게 되면 무슨 일에도 웃을 수 있고, 그 무엇도 당신을 상처주지 못한다……. 심지어 당신의 오만가지 괴로운 과거들도 더는 명확하게 보이지 않을 것이다. 과거가 없는 인간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당신은 당신 스스로가 어떤 분명한 존재가 아니라, 그저 가스가 떨어지면 사라지는 라이터 불꽃이라는 사실을 너무도 자연스럽게 믿어버린다.
 이것은 조언이 아니다. 나는 누군가에게 조언을 하기에는 너무 낮은 위치에 있는 인간이다. 나는 스스로 절벽 밑바닥에 떨어져서, 기어 올라가려는 노력을 하기는커녕 그 밑바닥에서 오히려 더 깊은 구멍을 파고 있는 인간이다. 심지어 나는 가끔 나의 늙은 분노가 이끄는 대로 들고 있던 삽을 휘둘러 사람들의 목을 벤다. 나는 아직 내 본성 어딘가에 자비심과 찬란한 무언가가 있을 것이라고 너무도 작은 목소리로 외치고 있는 희망, 그 희망의 입에마저 재갈을 물려버렸다. 이제 내게 절망과 비참은 나의 인격이나 다름없게 되어버렸다.
 그러나, 아, 선량한 독자들이여. 지금 하늘에는 너무나도 밝고 고요한 달이 떠있다. 담배연기와 이유를 알 수 없는 우울 속에서 그 달빛과 마주하자 내 눈에서는 이미 말라버린 줄 알았던 눈물이 흘러나올 뻔했다. 나도 슬픔을 느낀다. 어른이 되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는 나임에도, 이런 밤이면 나의 나약함과 스스로 만들어낸 비참이 눈동자 앞에서 흔들거린다. 완전히 미쳐버린 광인들이여, 부디 그 광증 밖으로 나오지 말라. 광기와 이성의 경계선에서 세상을 본다는 것은 심장이 수천 조각으로 썰리는 것 같은 고통을 당신에게 선사할 것이다. 부디 괴물로 살아가다가 죽음을 맞기를 바란다. 그것이 당신들의 평화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말의 전부다. 그리고 그들과는 정반대의 극점에 있는 어른들, 선량한 사회의 소시민들이여. 고흐가 말했듯이 철학과 사색은 당신을 비극적인 죽음으로 몰고 갈 것이다. 부디 그대들의 사랑스러운 가정과 안전한 직장에 몸을 담는 것을 그만두지 말라. 존재에 대한 고민은 다른 불쌍한 사람들에게 맡겨버려라. 철학자들의 논문을 불태우고 그대들의 일상을 지키는 일에만 골몰하라.
 스님께서는 내게, 모든 이들의 자성 속에 부처가 있다고 하셨다. 그의 말씀대로라면 이렇게 엉망진창으로 망가진 나조차도 본성 속에서 자비와 평온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사실 나는 그의 말을 믿고 싶다. 그러나 너무 오래전부터 나는 희망의 입에 재갈을 물려놓았다. 나는 그 성직자의 자비심 넘치는 말에도 심장을 칼로 난도질당하는 것 같은 고통만이 느껴졌다.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거렸다. 모른다. 언젠가 이 분노와 증오가 사라진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그때 나는 그의 가르침을 믿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 당신은 그의 가르침을 믿을 수 있기를 바란다. 사실 나는 얼굴도 모르는 당신을 한없이 증오하지만, 동시에 당신이 내가 있는 이 끔찍한 구렁텅이에 빠지지 않기를 바라기도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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