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마음 없이 태어나고 싶었다. 나는 마음 같은 것은 바란 일도 없다. 잠깐의 짐승으로도 좋았다. 잠깐의 짐승이라면 더 바랄 것도 없다. 마치 태풍이나 지진처럼. 나에게 무슨 이름이 붙여지든 신경도 쓰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마음 없이 태어나고 싶었다. 의지도 없는 천재지변이었더라면 불만도 모르고 흩어져 사라졌을 것이다. 나는 마음 없이 태어나고 싶었다. 철창까지 걸어 들어가는 길이 너무 멀다. 내 정수리에 영혼의 눈을 달아둔 덕분에 이 짓도 그만 둘수가 없다. 뼈와 살점과 함께 웃으면서 터지는 폭발물이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죽음이 어머니라는 것을 발견할 눈동자가 없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나는 미치지도 않았을 것이다. 광기라는 개념이 부여되지 않는 현상이라면 좋았을 것이다. 나는 마음 없이 태어나고 싶었다. 모든 것이 너무 거추장스럽고 무겁다. 나는 마음 없이 태어나고 싶었다. 또 내일이 온다. 또 생명이 연장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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굽어진 높이에 대한 노래

 어느 날 남자가 방에서, 그러니까 철학자들의 논문과 몽상가들의 일기가 즐비하게 널려있는 그의 방에서 깨어났을 때, 그는 갑자기 자신이 계시를 받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방의 천장에는 지금까지처럼 벽지와 벌레의 시체가 쌓여있는 형광등이 아닌, 구형의 우주가 불경하고 혼란스러운 혼잣말을 외면서 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심장에 단도가 박힌 것처럼 찬탄했다. 그의 방에 쌓인 서적들만큼이나 수가 많은 그의 가면들이 일제히 입을 닫은 것이었다. 그리고 대양을 헤엄치는 한 마리의 위대한 고래처럼 묵직한 진실이―그것을 진리라고 불러도 오만한 일이 아니다!― 그의 영혼 속에서 근엄하고 단조로운 노래 가락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매일 아침 그렇듯이 그는 머리를 한 대 얻어맞아 졸도했다가 더러운 진창에서 깨어난 기분이었는데, 그것이야말로 그가 받은 계시의 중요성을 뒷받침하는 감각이었다. <보라! 이 세상은 거대한 구렁일지어다. 구렁 밑바닥에서 보는 밤하늘에는 신의 핏방울 같은 별들이 수학을 만들고 그들의 완전한 질서를 초월적인 목소리로 노래한다……. 그런데 우리들은 칼을 쥐고 태어난 형제들이어라. 말하건대 초인(Übermensch)은 이 전쟁에서 영원히 승리할 수 없다는 운명에 승리한 자일지어다. 그는 날 적부터 갖고 있던 뾰족한 단도로 독생자의 심장을 찔러버렸다! 모든 우상이 죽어버렸다. 모든 신들의 목은 낫에 베여 뎅그렁 뎅그렁 소리를 내면서 떨어져버렸다. 그런데 저 불경한 우주 한복판에서 끔찍스러운 웃음소리로 숨넘어갈 듯 웃고 있는 저 의지는 무엇인가?> 그는 벌떡 일어나서 자신의 발치를 내려다보더니 다시 천장에서 회전하고 있는 구형의 우주를 보았다. 그리고 그는 경외하는 눈동자로 외쳤다: 권태의 왕이여! 그대가 거기에 있다는 것을 나는 알 수 있다. 왜냐하면 내가 잠들어 있을 때, 그대가 그대의 독이 묻은 손가락으로 내 영혼의 머리를 건드렸기 때문이다. 그 독은 살점을 파먹는 나병균처럼 순식간에 나의 영혼을 점령해버렸다. 그리하여 내 혈관 속에는 그대의 신적인 독액이 돌았다. 덕분에 내 정신은 빼내어진 토끼의 눈알처럼 맑고 투명해졌다. 그래서 나는 결국 그대의 무시무시한 이름을 알아버리고 만 것이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그는 마치 신들린 무당처럼 책상으로 뛰어가더니 노트를 펼치고 그곳에 비밀스럽게 방금 알아낸 <권태의 왕의 이름>을 적었다. 이렇게 해두자! 그리고 어느 누구에게도 이 노트를 보여주지 말도록 하자. 왜냐하면 이것은 무시무시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자의 이름이 이것이라는 사실은 너무나도 무서운 사실이라서 만일 순한 양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주면 그 양들의 뇌는 수천 조각으로 깨져버리고 말 것이다. 그래서 그는 노트를 덮고 책상서랍 가장 깊은 곳에 넣었다. 그의 눈동자는 마치 방금 천사를 죽인 인간의 것처럼 초조함으로 번뜩이고 있었다. 그 천사의 피는 이상한 색깔이었다! 그는 갑자기 화가 나서 손에 쥐고 있던 만년필을 집어던지더니, 자신의 육체를 저주하기 시작했다. <오, 이 기적이여! 이루 말할 수 없는 호르몬의 화학작용으로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는 육신이여! 그대는 기적적이도다! 그리고 그대는 저주일지어다. 모든 인간들이 열 개의 손가락과 두 개의 눈을 갖고 있다는 진실은 인간존재의 진보를 속박해버렸다. 내가 방금 이루어낸 발견을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다는 것은 도대체 무슨 아이러니란 말인가? 나 또한 인간의 몸에서 태어났다. 나도 열 개의 손가락과 두 개의 눈을 갖고 있는 필멸하는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내 영혼은 그의 손가락이 내 머리에 독을 묻힌 순간 수천 개의 머리를 갖고 만 개의 눈동자를 갖고 있는 메두사처럼 되어버렸다. 보라, 지금 몇 개의 목들이 답답한 육신을 견디지 못하고 내 입을 통해 밖으로 나오려고 한다……. 이제 내 육신과 영혼은 도무지 짝이 맞지 않는다. 내가 토한 토사물에서는 괴물들이 태어나 기어 다니며 인간들에게 저주받은 복음을 전파할 것이다. 심지어 이제 나는 그러한 사실에 슬픔조차 느끼지 못한다!> 천상의 빛이 닿지 않는 곳으로 굴러 떨어진 그는 광포한 비명을 지르면서 자신의 방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그가 방문을 닫을 때 땅이 무너지는 소리가 났고, 회전하는 구체의 우주는 방 안에 갇혀버렸다. 진리를 본 대가가 이런 것이라면 이 세계는 그야말로 조악한 농담과 같다! 손가락 끝으로 개미를 눌러죽이며 노는 어린아이의 작은 마당처럼, 이 마당은 개미들에게 결코 행운만은 아닌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여, 그대의 다섯 손가락으로 쥘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그것뿐이다. 불경스러운 피리소리가 울려 퍼지는 천상을 그대는 그저 경외하고 존경하며 두 손을 모아 기도할 수밖에! 그리고 저 권태의 왕에게 어떠한 종류의 믿음이라도 있을 것이라고, 그대는 절대로 기대하지 못할 것이다.
 남자가 더럽고 좁은 거리로 뛰쳐나갔을 때 하늘은 밤이었다. 그는 쫓겨 다니는 사람처럼 불안하고 견딜 수 없는 심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는데 그곳에는 공을 가지고 노는 한 귀여운 어린아이가 있었다. 갑자기 지독한 생각이 남자의 머리를 번갯불처럼 스쳐지나가고 그는 주먹을 쥐며 웃었다. 내가 무슨 짓을 하든지 나도 인간이라는 한계를 벗어나지는 못할 것이다! 그는 자신의 머리털을 정리하더니 아이에게로 다가가 말했다.
 얘야, 즐거우냐?
 예.
 그렇다면 너에게는 분명히 훌륭한 부모님이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니?
 맞아요.
 그리고 네 부모님은 그들이 자신들의 부모님으로부터 태어났다고 너에게 가르쳤을 것이다. 그래서 너는 인간이 어떻게 생명을 보존해가는 지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너는 지금 공을 가지고 놀고 있는 네 아동기가 전광석화처럼 지나가고 언젠가는 일종의 흉터로 네게 남을 것이라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은총을 받았어요.
 너는 마치 신부처럼 이야기한다! 그런데 내가 너의 갈색 눈동자를 보니, 네가 모든 이들이 갖고 있는 막연한 불안을 품고 있다는 사실이 빤히 보인다. 그리하여 너도 나와 똑같은 인간인 것이다! 너의 살은 아직 부드럽고 약하며 근육은 실낱같다. 그리고 너의 영혼은 무구하지만 아직 악(惡)에 익숙하지 않아 앞으로 수많은 칼과 창들이 네 영혼에 박힐 것이다.
 그것은 무서워요.
 그렇다면 나는 너에게 축복을 내리는 기분으로 말해주겠다. 너는 신의 이름을 알아야 한다! 너의 부모의 부모의 부모의 부모를 낳은 왕의 이름을 알아야 한다. 이것은 굉장한 비밀이지만, 너는 어린아이의 순진한 영혼을 갖고 있기 때문에 나는 너에게 그 이름을 알려줄 것이다.
 그리고 남자는 아이의 귀에 대고 그 이름을 속삭였다. 그랬더니 아이의 얼굴은 새파랗게 변하고 딸꾹질을 하는가 싶더니 그는 들고 있던 공을 놓쳐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하얗게 질린 갈색 눈동자로 외마디 비명을 지르려다가 입을 막고, 길 저편으로 도망쳐버렸다. 도망쳐버렸다! 자, 달려라, 도망쳐라. 너는 이제 사흘 밤을 앓다가 일어서서 너의 부모에게, 친구에게 가서 그 이름을 말할 것이다. 너의 손톱은 갈퀴가 될 것이고 송곳니는 나이프처럼 날카로워질 것이다. 자, 달려라, 도망쳐라. 나는 이 더러운 골목거리에 서서 네가 도망치는 것을 보고 있다. 나의 목구멍에서는 사악한 웃음이 솟아나오고 눈에서는 내가 이종(異種)으로 변해버렸다는 사실에 대한 눈물이 흘러나온다. 그는 웃고 울면서 골목거리에 서 있다가 주머니에서 면도칼을 꺼내더니 자신의 혀를 끊어버렸다. 그때 달빛이 찬란하게 번뜩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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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녀가 마지막이었다. 그녀가 마지막이었다. 분명 그녀가 마지막이었으리라. 내가 고독이라는 독액을 내 팔뚝의 굵은 동맥에 주사하고 있는 것은 영원히 이어질 일이다. 나는 어제 갑작스럽게-니코틴이 나의 정신을 맑게 했기 때문이리라- 신의 이름을 알아냈다. 나는 그 이름을 발설하지 않을 것이다. 그 비밀스럽고 끔찍한 이름은 나의 노트에 아무도 모르게 적혀있다. 지난 반년간 단 한 번도 자해를 한 적이 없다. 그러나 나의 가슴에 난 수도 없는 흉측한 흉터들은 아직도 가끔 피와 진물을 흘린다. 내 서랍에 잠들어있는 단도는 언제나 날카롭게 날이 서있다. 나는 그것을 쥐지 않아도 된다. 그것을 손에 쥐지 않아도 그 날붙이는 밤새 서랍에서 기어나와 나의 심장에 흠집을 낸다. 꿈 속에서는 모든 것이 다 쉬웠었지. 내일이 오리라는 것을 믿지 않아도 되었었지. 나는 어둠 속에서 난동을 부린다. 내가 다시는 누군가를 사랑할 수 없으리라는 파멸적인 믿음에 빠져서. 그때 나는 태초의 인간이나 마찬가지였다. 수십 년간 쌓여온 벽이 Pink의 결말처럼 가차없이 부서졌었다. 그러나 운명은 항상 비극이다. 나는 비명지르면서 뒷걸음질쳤다. 그녀의 초록색 눈동자와 마주친 것만으로 부서졌던 드높은 벽은, 내가 한 걸음씩 뒷걸음질을 칠때마다 보다 높고, 보다 두껍고, 보다 단단한 형태로 땅속에서 솟아올랐다. 이제 나는 수십 겹의 장갑을 낀 손으로만 인간을 만진다. 감히 말하건데, 그녀 앞에서 나는 어린애였노라. 수십 년의 절망과 고통으로 말미암아 나는 내가 어른이 되었다고 믿었었다. 그러나 최초의 인간 앞에서 그러한 상처들은 차라리 축복으로 보였었다! 그래, 모든 운명은 파멸을 종용한다. 그녀와의 만남조차도 내가 더 깊은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을 위한 무대장치였던 것이다. 이제 태양의 빛은 더욱 작게 보인다. 자신이 행복하다고 믿는 사람들의 가슴에 나는 나의 길다랗고 신성모독적인 손톱을 박아넣고 싶다. 그리고 온갖 환상들이 외쳐대는 환희에 대하여-나는 그것을 더 이상 믿지 않는다. 나는 저주, 저주, 저주한다. 아주 조금 어른이 되었을 뿐인데도 세계는 전보다 더 두터운 갑옷을 차려입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밤하늘에서 어둠을 뜯어내어 내 옷을 해입었다. 내 마음 속에서 날뛰던 사랑이라는 이름의 정열이 이제는 기억나지 않는다. 내게 남은 것은 얼음처럼 차갑고 불꽃처럼 일렁이는 증오와, 자신의 손목에 박아넣기 전에 망설임과 공포 때문에 떨리는 단도 뿐이다. 나의 야망은 자신이 인간이라고 믿는 모든 이들의 파멸이다. 나는 빌딩이 무너지고 사람들이 불타 죽는 것을 보고 싶다. 더 이상 신이 재앙을 내리지 않는 세계에서 망치와 칼을 들어야하는 것은 오로지 인간일지어다. 어쩌면 나는 계시를 받은 것일지도 모른다. 아주 길고 끈질기게 나의 영혼을 점령해온 계시를 말이다. 그들이 믿는 규율의 붕괴 속에서 나는 최고의 환희를 맛볼 것이다. 어떠한 윤리도 도덕도 없는 세계에서 나는 인간이 절대로 인간을 사랑할 수 없다는 새로운 법칙에 오르가즘을 느낄 것이다. 나는 내 손톱이 갈퀴였고 내 송곳니가 나이프와 같았던 그 과거를-그 무구한 과거를 기억해내려고 한다. 나는 아직도 고독이라는 고통에 몸을 떨지만 그것을 원망하지는 않는다. 부정조차 하지 않는다! 나는 고통받는 것으로 인하여 존재한다. 나는 고통을 나눠주는 것으로 존재한다. 언젠가 내 어깨에는 날개가 솟겠지. 해골로 된 왕이여, 그대는 틀림없이 웃고 있을 것이다. 하늘 꼭대기까지 날아올랐다가 갑자기 추락하는 순간에야말로 인생이 정신 속에서 꽃을 피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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