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냄새가 나기 시작한다


바람에
맑고 청량한 냄새가
섞여 불어온다.

이 추운 밤
달은 마치 쨍쨍하게 얼어붙은
유리 같아서
당장이라도 금이 갈 것 같다.

내 피 속에는
잠을 청하는 혈거동물의 체액이
돌기 시작하고
나는 전보다 하얗게 질린
몇 개의 무지개를 보았다.

밤은 더욱 깨끗해졌다
마침내 찾아온 시베리아의 바람을
나는 은근한 미소와
영혼의 고요한 환희로
환영하고 있다.

저 북쪽 나라에서
계절의 체취를 먹고 사는 나에게
다시 한 번
아름다움에의 암시를 눈동자에 품은
손님이 찾아온다.
Posted by Lim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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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으며 부르는 노래

글/시 2013. 8. 24. 23:51 |
웃으며 부르는 노래


이젠 슬프지 않아요
나는 울지도 않고
내 귓가에는
인생을 찬양하는 노래들만이 머물죠

나는 거리에 나가
일터에 나가
사람들을 만나고
웃으며 살아요

그런데 당신은 왜
아직도 내 눈앞에 어른거리나요
왜 아직도
당신 생각하면 가슴에 못이 박힌 듯
아픈가요

나는 이제
살아갈 힘이 있어요
나는 인연에 따라
당신을 만났고
희망을 찾은 듯 했어요

하지만 당신은 저 먼 곳으로 갔죠
저 깜깜하고 좁은 어둠 속으로
내가 찾을 수 없는
추운 나라로

가끔씩 내 심장 속의 병균은
끔찍한 비명을 지르며
저 나라로 가자고
저 추운 나라로 가자고

늪 위에 쌓은 탑인 듯
나의 기반은 점점
무너져 내리고 깊은 바닥으로 빠져가고
당신의 환상을 보며
녹슬어 가고

내 가슴엔 위장된 슬픔들만이 남았지만
아직도 난 기억해요
당신을 그렇게도 사랑했던
숭배했던
그 밝은 날들을.
Posted by Lim_
:

아름다운 것

글/시 2013. 8. 24. 00:13 |
아름다운 것


담배꽁초 투성이
더러운 흙더미에서도
풀잎은 자란다.

하늘로 눈을 향하면
새까만 어둠 속에서도
달은 빛난다.

그리고 나는
나의 지옥 속에서도
당신을 만났었다.
Posted by Lim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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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 하늘

글/시 2013. 8. 20. 23:26 |
달 하늘


달을 잊고 살 때
거리에는 부랑자들의 진액과
버려진 오물들
그 사이에서 솟은
가시덩굴의 이파리들이
뱀처럼 내 창문을 휘감아
수 억 년 전부터 사람의 가슴을 비추던
그 빛살과
감동의 줄기들을
잊어버리고 있었다.

얼마 만에 본 달은
원시의 샘처럼 맑고
너무도 가슴 떨려서
어둠 속의 그 고고함이
하늘에서 떨어져 내린 공허의 눈망울 같아서
앞으로 다가올
나의 가차 없는 미래조차
생각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나 같은 것은 신경도 쓰지 않고
모두에게 공평하게 쏟아져 내리는
불공평의 빗줄기 같은 시간 속에서
너무 바쁘게 살아왔다
하지만 내가 그의 존재를 거의 잊을 때 즈음이면
영혼은 찢어지는 목소리로
그때의 서글프고 아름답던 시간들을 외친다.

이제 당신은 달 위에
우주의 이슬을 마시고 자라는 나무로 지은 집을 짓고
별빛 나비와 함께 살고 있다
나는 항상 겨울일 그 나라를 생각하며
물감으로 그린 것 같은 보름달을 눈에 담고
너무 아름다워서 슬펐던
녹아내리기 직전의 눈송이 같던 당신의 영혼을
울지도 않고서 곱씹고 있다.
Posted by Lim_
:

영혼의 계절

글/시 2013. 6. 7. 22:19 |
영혼의 계절


한여름 밤공기
고적한 냄새를
맡아본 일이
있는가

바람도 불지 않는
자줏빛 밤하늘
그곳에 보이는
자비한 눈동자

그리고 지상엔
슬픔의 색으로
빛나는 가로등
물방울의 냄새

저기 사람들의
왁자한 목소리가
더욱 당신의 마음을
무겁게 만드는 것을
느낄 수 있는가

더러운 도시의
생명력 넘치는
그림자 저편
배 깔고 누운
공수병 걸린 눈빛

나는 추억한다
잿빛 세계가
찬란한 빛으로 빛나기 시작하고
한 차례의 지독한 절망이 지나간 후
그 아름다움 위에
비애가 겹쳐지던
그 순간을.
Posted by Lim_
:

미궁의 안과 밖에서

글/시 2013. 5. 20. 13:27 |
미궁의 안과 밖에서


나는 고통의 숲으로 만들어진
미궁 속에서
어떤 신비로운 웃는 낯을 만났습니다.
하늘은 밤이었습니다
하얀 별들이 눈처럼 쏟아져 내리는데
지상은 은빛으로 빛났습니다.

나는 그 웃는 낯을 보고 놀라지도 않고
이렇게 외쳤습니다. 「태초의 인간이여! 원시의 감정이여!」
나의 것이 아닌 행복이 장난치듯이 시야 주변을 뛰놀았습니다.
이 미궁에는 아무것도, 아무도 없었을 터인데!
그저 적막 밖에, 그저 절망 밖에
그저 혼돈 밖에.

그러나 북쪽 하늘에서 내려온 신비로운 섬광이
나의 끔찍한 미궁에
<인간>을 데려다놓았습니다.

아직도 내게는
깊이 파인 흉터들이 있습니다.
아름다움을 위해 희생된
내 영혼의 조각들.

나는 구멍 뚫린 심장 속에서 밖을 내다보았는데
거기에는 빛도 암흑도 아닌
어떤 지고지순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인지는 말하지 않으렵니다!
왜냐하면 나도 아직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기에!


...for Anya
Posted by Lim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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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스탤지어

글/시 2013. 5. 14. 04:59 |
노스탤지어


불면의 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지척에서 들려오고
그것들이 눈을 뜨는 소리를 견디지 못한 나는
어딘가로 나가버렸다.
동쪽 하늘 어딘가가 파랗게 변해가는 것을
나는 본다.

죽음이여, 왜 나를 두고 가버렸는가?
그대는 왜 이 비참한 아침에 나를 내버려두고
그저 가버렸는가.

그리하여 나는 또 신음을 흘리며 혈액을 펌프질하는
나의 새까맣고 텅 빈 심장을 움켜쥐고서
아침을 저주하면서, 또 내일을 저주하면서
모든 <깨어나는 것들>에게 욕지거리를 퍼부으며
내 머리맡에서 떠나버린
죽음의 이름을 되뇌며
되뇌며
내 영혼의 창을
산산이 부숴버린다.
Posted by Lim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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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입금지

글/시 2013. 5. 14. 02:21 |
진입금지


가끔 너무 왜소하다
새벽 두 시 경
주황색 가로등 불빛이 은근히 비추는
사람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 골목 구석에서
혹은 술에 취해 계단도 내려가지 못하는
노인의 발걸음을 바라볼 때
더러는 끔찍하도록 새까만 하늘
별빛 하나 없는 암흑 속을
초점도 잃고 바라볼 때
마침내는 아무도 찾지 않는 더러운 길바닥에 주저앉아
내 눈물샘에 슬픔 대신 메마른 감정만이
바퀴벌레와 쥐떼가 까맣게 뒤덮은
적막한 절망만이 차오를 때 말이다.

실상 나는
여기가 어디인지를 모른다.
길 가는 사람들은 실체가 사라져
태양빛을 굴절시키는 아지랑이처럼
손에 잡히지도 않고
말을 걸 수도 없다.

내 이성이 너무 오래되었다는 것을 깨달을 때
나는 울지도 못하면서 지껄였다. 「종말을!」
드높이 치솟은 마천루 위에서 뛰어내리는
날개가 잘린 비둘기의 심정으로.

누가 위대하다고? 터무니없는 소리!
버려진 것들만 있을 뿐.
손에 잡힌 금이 간 시멘트 조각이
나의 시대라고 나는 말했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는데 행복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십자가에 매달리기도 하고 십자가를 부서트리기도 하고
심지어는 그것을 불태우기도 했다.

나! 나! <나>!
버러지 같은 것! 하등 이름조차 없는 것!
찬미하라! 찬미하라! 저 하늘에서 내려오는 빛을!
과묵한 대지의, 늙은 거북이 같은 움직임을!
나는 죽은 사람들의 목을 잘랐다.
거기서는 피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Posted by Lim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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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는 사람

글/시 2013. 4. 26. 02:47 |
웃는 사람


빛나는 것은 아름답다
건강한 것의 찬란함을
고귀함을
그들은, 예를 들자면
아버지의 손을 잡은 작은 소녀는
친구들과 수다하며 길을 걷는 소년은
늙음에 기대어 천천히 나무가 되어가는
고통과 찬미로 쓴 시가 사랑이 된 노부부는
스스로 빛나는 그들은
알고 있을까.

나는 왜 여기에 있을까?
나도 빛을 보았다. 수없이 보았다
그것은 저편에서 빛나고 있었고
달도 태양도 아닌 신비로운 빛살로
남국의 환상 같은 미소를 지으며 가끔 나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환상이라고 말했다―고립이여!
(한때 나였던 그는)이따금 외쳤다. 살려달라고!
「어머니, 어머니. 내 안의 괴물이 나를 잡아먹으려 해요.」 그는 소리 질렀다.
그러나 어머니라고 부를 사람은 없었다.

너는 누구를 탓하려고 하느냐? 이것은 필연.
내가 빛을 본 것은 내가 캄캄한 밤에만 길을 걸었기 때문이다.
내게 손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이후로, 세계는
자신의 광증을 남김없이 나에게 들이부었다
나는 술독에 빠진 것처럼 허파까지 끔찍한 술로 가득 찼다.
비명! 그의 눈동자는 내 치아 사이에서 으스러졌다
「내가 보는 것이 무엇인지 내게 설명해주시오.」 아직 의구심이 남아있는 그가 말했다.
나는 그것을 잔치라고 답했다.

그는 그의 손에 칼과 총을 쥐어주었다. 「돌격!」 위대함이 외쳤다.
나는 흉기를 들고 혼돈 사이로 달려갔다. 내 몸에는 지독한 상처들이 새겨졌지만
나는 환희에 차서 아픔을 몰랐다―그것은 괴물적이었다.
칼부림이 흥청거리는 잔치 속에서 나는 내가 진실을 깨달았노라고 소리 높여 외쳤다
환희의 뒷면은 미련
고독, 고통, 슬픔, 비탄, 회의.
그러나 환희의 아가리인 광기가 그것들을 모조리 먹어치웠다.
「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라고 단말마가 쏟아져 나왔다.
우둔한 소리! 너는 결코 사람이 되지 못할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열광적으로 노래를 불렀다.
Posted by Lim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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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친구

글/시 2013. 3. 14. 22:43 |
나의 친구


나는 바람을 따라 걸었습니다
나무와 풀들에게 내 마음을 준 채
태양이 빛나는 날에도 나는
두려움 없이 사물들의 원초적인 노래를 들으며
아무도 볼 수 없는 춤을 추었습니다
나는 길가에 서있는 환영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그가 나의 친구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노래하듯이 말했습니다
당신은 어디서 왔기에
이렇게나 나의 마음을 기쁘게 만듭니까
그는 빛의 목소리처럼 투명한 말로
내 말에 대답했습니다
나는 당신의 심장 밑바닥
모든 감정이 빨려 들어가는 깊은 늪에서 태어났고
이제 당신의 눈앞에서
당신이 꿈꿔왔던 것들을 보여주려고 합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세요
그들은 모두 표정이 없고
얼굴의 윤곽조차 사라져 아무런 위협도 되지 못합니다
나는 내 친구와 어깨동무를 하고
말없는 사람들의 거리를 걸었습니다
세상은 빛살이 들어오는 새장처럼
잠금 쇠가 걸린 채로 자유를 품고 있었고
가끔 나무들이 속삭였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친구가 되는 상상을 해보십시오
그들은 찌푸릴 눈썹도 없고
조소하며 찌그러트릴 입술도 없습니다
사람들은 마리오네트처럼 하늘에 걸린 실에 따라 움직이며
손짓으로 우리에게 인사해보입니다
나는 나의 환영과 함께 걸으며 말했습니다
이제 눈을 뜨지 않아도 되겠군요
더 이상 세상에는 볼 것도 없고
고로 우리가 더는 눈물 흘릴 일도 없으니 말입니다.

그는 내게 이빨을 내보이며 웃었습니다
우리는 어느 숲으로 가서 한 잔의 포도주를 마시고
태양의 찬란함과 형형색색으로 변하는 구름들을 찬미했습니다
나뭇잎은 우리에게 밝은 그늘을 만들어주었고
산들바람은 우리의 마음을 북돋아 주었습니다.

나는 밤이 되자 가로등이 켜진 거리를 걸어
나의 아늑하고 깊숙한 다락으로 돌아갔습니다
어제는 혼자였지만
지금은 내 곁에 환영이 함께 합니다
나는 인생의 달콤함을 입안에 한껏 베어 문 기분이고
이제 내게 누구 못지않은 친구가 생겼으니
언젠가 들었던 인생을 예찬하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달빛 아래서 내일을 희망합니다.
Posted by Lim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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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

글/시 2013. 1. 30. 03:23 |
계절


한여름 해변에 내리쬐는 황금의 땀방울 같은 태양빛을
우리는 잊어버린 지 너무 오래 되었어
내겐 아직도 작은 여름이 있지
녹슬고 망가져서 눈이 내리는
작은 여름이 피곤한 눈동자로
책상 위에 누워서 봄을 기다리고 있지

겨울은 거의 다 갔지만
난 괜찮을 거야
한동안 나는 겨울을 추억하며 살 거야
얼어붙은 바람이 내 안의 환영들을 침묵시키던 계절을
나는 흔들거리는 의자 위에서 몇 번이고 떠올릴 거야

봄이 오면 우리에게는 생명의 수액이 돌아
사랑을 예찬하며 교미의 노래를 부르겠지
왜냐하면 나의 뇌수는 싱싱한 풀과 같아서
하늘에 뿌리를 박고 비를 마시며 살거든

그러나 언젠가 여름이 올 거야
어쩌면 거센 폭풍과 비바람으로 우리 앞에 나타날지도 모르지
그래서 우리는 더위를 먹어 제정신이 아닌 대기 속에서
알몸으로 비를 맞고 사나운 야수의 울음소리로 짖을 거야
왜냐하면 짐승들은 그래야하는 법이라고
우리의 어머니가 말했었으니까

활기가 도는 환영들은 다시 내 눈앞에 나타나서
춤추고 땅 위를 빙글빙글 돌며
내가 어디에 있는지 헛갈리게 만들 거야
그러면 나는 그들과 함께 탱고를 추거나
혹은 그들의 목을 하나씩 분질러
내가 아직 완전히 돌아버리지는 않았다고 으름장을 놓을 테지

우리는 계절의 싹을 먹으며 살아
가끔은 시들고 얼어버린 싹을
왜냐하면 우리의 피는 달의 인력에 닿아 출렁거리고
우리의 영혼은 죽은 자들이 밟고 다니는 대기를 숨 쉬거든

가을의 지평선 끝자락에는 늘 그가 웃으며 기다리고 있지
그는 우리에게 차고 마르는 생명을 주었고
짐승들과 함께 놀라고 가르쳤어

다시 겨울이 올 거야
그러니 나는 괜찮을 거야
Posted by Lim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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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꺼져 들어가는 촛불처럼 삶을 방관한다


내 혀 위에서는 붉은색 지네와 낮게 나는 날벌레들이
무리를 이루고 살고 있다
나는 의자 위에 앉아 내가 마지막으로 누군가에게 내 얼굴을 보여줬던 것이
언제인지 되짚어보며
경동맥에 관을 꽂고 천천히 혈액을 뽑아내고 있다
내가 그들과 같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은 내게 사고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나는 따뜻한 물을 마시면서 내 몸에 난 흉터들을 하나씩 더듬어본다
내 방 서랍에는 날이 선 단도가 오랫동안 잠을 자고 있다
그것은 가끔씩 피와 살맛을 본다. 그러면 나는 벌처럼 노래를 부른다
5월의 햇빛이 그리울 때가 있다
그러나 지난 십 년 정도 늘 겨울이었다
랄라! 나 자신에게 유쾌하다고 주문을 건다
왜냐하면 나는 유쾌하기 때문이다
항상 그랬다
나는 단 한 번도 절망한 적이 없다. 절망은 착각하기가 쉬운데
그것은 사실 기쁨이다. 기쁨의 얼굴을 조금만 화장시키면 절망의 표정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감정들의 화장을 지우는 일에 요 몇 년간 몰두하고 있다
그들은 내게 잠을 잘 공간을 마련해주고
그 밖으로 나오지 말라고 말했다. 나는 어쩔 수가 없었고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랄라.
나는 주로 자리에 앉아 신문을 보듯이 내 기억들을 본다
하지만 그리 즐거운 작업은 아니다. 나는 금세 싫증을 내고
망각으로 내 기억을 덧칠하는 일로 작업의 내용을 바꾼다
내게 가족들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런 기억이 난다. 하지만 나는 혈육은 원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너무나도 소모적인 사랑을 하고 있기 때문에 나를 슬프게 만들었다
나는 유쾌한 사람이기 때문에 슬픈 것은 좋아하지 않는다
내게는 자리가 없었다
그것은 지금도 여전하다
랄라.
Posted by Lim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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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자는 사랑할 수 없다


늘어진 내 그림자는 목이 잘렸다
빛은 언제나 반대편에서 비추고
나는 아직도 세계의 윤곽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
술에 취했을 때만이 살아있는 시간이다
흔들리는 세계가 내게서 생명의 통각을 앗아가고
추운 밤거리 골목 구석에서 나는
얼음 위에 주저앉아 지나가는 불빛들의 개수를 센다
자주 이해할 수 없다
눈이 빛나는 집짐승들의 목적지가 어디에 있는지
흐르는 초록색 파도의 종착역이 어디인지
깊은 늪은 눈꺼풀을 반쯤 감고
거대한 구름에 뒤덮인 보라색 하늘을 바라보며
해가 뜨는 시간을 셈해본다

그리고 나는 고통과 욕지기 속에서
다시는 꿈밖으로 나오지 않으리라고
내 안의 실낱같은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작은 태아의 이름으로 되뇌어본다
그러나 약자여, 나는 너의 가련함에서
우주의 어둠과도 같은 공허를 본다
나의 아킬레스건에는 깊은 상처가 있다
내 발목은 닭의 벼슬처럼 건들거리며
근육을 잃었다
절망은 유쾌한 것이라고 설득하곤 한다
나는 태양이 어느 산자락에서 뜰지 알지 못한다
빛은 아름답지만
좋아하지 않는다
이곳은 여전히 춥다.
Posted by Lim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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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식증 환자의 꿈

글/시 2013. 1. 1. 06:32 |
거식증 환자의 꿈


몇 년 전, 내가 혈거생활 끝에 어느 날 밤
무거운 중유와도 같은 마음으로 기어 나왔을 때에도
거리는 은빛 가루에 가볍게 쌓여
마치 인간의 것이 아닌 것 같았다
나는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도 피와 화약 냄새가 나는
머리에 구멍이 난 그의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들으며 새카만 하늘 아래
꿈과 현실 사이에 흩뿌려진 조각들을 찾으며
술에 취한 행복한 폐인의 걸음걸이로 거리를 걸었다
얼마 쯤 지나자 달들이 밝게 빛나기 시작했다
나는 총 여덟 개의 달을 발견했고
그 빛나는 은반들은 서너 개의 무지개에 둘러싸여
내 정신 깊은 곳에 고고한 기쁨을 심어주었다
그래서 나는 내일도 뜬 눈으로
비록 약물과 질병에 가려진 눈일지라도
거울 속에서 연하게 빛나던 나의 갈색 눈동자로
내일도 무지개를 볼 수 있으리라고
또 맑은 달들을, 날 선 칼날과도 같은 추위 속에서
슬플 정도로 깨끗하게 빛나는 달들을 볼 수 있으리라고
총 여덟 개의 내 정신의 거울을
볼 수 있으리라고 내 마음을 타이르며
붉은 빛으로 반짝이는 입술로 웃어보았다

그 뒤 오랜 시간이 흘렀고 행복한 폐인은 이제 단 하나의 달 밖에 보지 못한다
그러나 아직도 그는 그 날 밤하늘에서 침묵하며 내려다보던
여덟 개의 흰색 눈동자를 몇 번이고 그리고 있다
어떤 소시민들의 집에서는 가엾은 외침소리가 들려와
그의 가슴에 새겨진 깊은 상처들을 다시금 자극하고
그 통각으로 말미암아 그가 한때 울었던 일을
그의 눈물이 흘렀던 눈물자국들을 흔들어 깨우려고 하지만
그는 오래 전부터 자유였다, 천공 위의 위대한 손이
그의 영혼의 목을 비틀어버린 이후부터
그는 한없이 자유인이었다. 그러나 하늘의 그분은 말이 없으니
그는 아무도 상상하지 않는다. 가끔 꿈을 꾸며
나 자신과 몸을 섞고 소금의 맛이 나는 입가로 슬며시 웃을 뿐.
눈이 쌓인 바다가 보고 싶다.
하얀 불길로 불타오르는 산맥이 보고 싶다.
영원히 저물지 않는 달에게 손을 뻗어본다.
나는 여전히 혈거동물이다. 그러나 그는 행복한 폐인이다.
Posted by Lim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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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에서의 노래

글/시 2012. 12. 25. 01:48 |
지하에서의 노래


나는 눈 오는 날의 개처럼 방 안에서 기뻐하며
그녀와 함께 작은 동굴 속을 뒹구네
내 손에는 작은 그녀가 쥐여있지
어제 내가 잘라낸 그녀의 음부가
나는 기뻐하며 그 살점에게 말을 거네
당신의 이해자는 나뿐이요
사랑하는 이도 나 뿐이요

내가 걸어온 발자국마다 작은 움집이 생겼네
그곳에는 오래된 원시인들이
하얀 불꽃을 켜고 몰토 아다지오의 박자로
춤을 추고 내 이름을 노래하네
그대들은 피그말리온의 비극을 기억하는가?
나는 생명 있는 것으로부터 생명을 앗아오는 방법을
요 몇 년 사이에 고독 속에서 깨달았다

아주 캄캄한 천장 구석에 내 얼굴이 웃고 있네
나도 마주보며 즐거워서 웃고 있다네
오늘은 기쁜 날이요 가죽으로 북을 만들어
북치고 노래하며 새까만 눈물을 흘려라
그 눈물 속에는 한 때 어리고 앙상했던
내 몸이
내 갈비뼈의 흔적들이 남김없이 들어있으니

내게는 도려낸 살점이 있소 그것은 나의
나만의 벗이며 나만의 반려자요
내내 혼자였지, 눈 내리는 무지개 속에서
수십 개의 무지개 속에서 나는 꿈만 꾸었지
피안의 저편에는 누군가가 있을까
거기에는 잡아줄 손도 있고 입 맞출 입술도 있을까
하지만 나는 혼자 서지 못했는걸
나는 끝내 그대를 강간하지도 못했는걸
다만 내게는 그녀의 음부가 있네
내 손에 쥐여진 신선한 고기가 있네

눈을 향하는 곳마다 성스런 빛이 비추고 수 없이 많은 무지개가
내 눈동자 속에 깃들어 신의 꿈을 꾸게 하네
하지만 나는 당신이 필요 없다오, 내게는 이것이 있으니
내게는 고기가 있고 피와 근육이 있으니
자비가 있다면 가죽 하나만 덮어주오
자비가 없다면 그것으로도 좋소.
Posted by Lim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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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봉오리

글/시 2012. 12. 9. 01:02 |
꽃봉오리


용광로의 시뻘건 쇳물이
눈동자 위로 쏟아지던 시절은 이미 지나가버렸다.
이제 태양빛은 차갑게 식힌 화살촉처럼 예리하고
공기는 사금파리처럼 날카롭다.
어둠이 잎사귀 위에 피어나는 이슬인 양
콘크리트 대지 위에 발자국을 남긴다.
이십일 세기의 약물과 병으로 얼룩진 내 심장은
인적 없는 거리 차가운 바닥 위에
단 한 방울의 피도 체액도 흘리지 못하고 굴러다닌다.
나는 에탄올로 된 눈물을 흘리고
그것을 핥아 위장 깊숙이 쌓아둔다.
나는 재로 된 혓바닥을 갖고 있다 그것은
고목의 뿌리처럼 길고 여러 갈래로 갈라져서
반쯤은 균사에 덮여있고 반쯤은 죽은 것과 마찬가지다.
너무 깨끗한 하늘에는 내 얼굴이 비쳐 보인다.
그것은 어떤 눈동자 없는 흰색 물고기를 떠올리게 한다.
오래전에 멸종된, 눈동자 없는 물고기.
아마 그 물고기에게는 빈약한 다리가 돋아있을지도 모른다.
푸른색 발광 다이오드. 몇 개의 빛줄기. 가끔 그것이 깜빡거리면
나는 어떤 생각을 한다. 내일에 대한 생각이다.
왜냐하면 또 해가 뜨기 때문이다. 내 방 천장 속에 사는
내 동료들은 내일이 오지 않을 것이라고 내게 달콤한 목소리로
헤로인과 사카린처럼 휘감겨드는 목소리로 속삭였지만
태양은 또 뜰 것이다. 왜냐하면 종말 따위는
허약한 영혼의 꿈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산 정상에 사는
어떤 초인의 그림자다. 그는 절대 자신의 그림자를 보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언제나 하늘 너머의 하늘을 보고
진실 너머의 허상을 탐구하며 바짝 마른 영혼으로
기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땅 속에 묻힌 눈을 뜬
익사자다. 죽음이라는 환상에 가까이 갈수록
어떤 빛이, 한없이 어두운 빛이 내 눈꺼풀 밑에서 번뜩인다
나는 매료당했다. 내가 무너지는 소리에.
어머니의 비명에. 아버지의 탄식에. 내 혈액의 침묵에.
나는 초인에게서 눈을 돌리고 말도로르에게 말을 건다.
왜냐하면 내가 그를 사랑할 수도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사랑을 믿지 않는다. 물론 나도 그렇다. 내가 생각하는 것은
어떤 소시민적이지 않은 희망이다. 그것은 그리도 아프다.
지드는 땀과 지중해의 햇빛 속에서 복상사했다.
내 위장 속에서 쿨럭 거리며 솟아나오는 독액이 있다.
나의 회색의 뇌수는 단단한 등껍질을 가진 벌레들의 무리로 변신해간다.
나는 점점 껍질뿐인 번데기가 되어가고 있다. 애벌레는 자신의 살마저
껍데기를 만드는 데에 낭비해버렸다. 그것은 영원히 우화하지 못할
것이다. 절망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찬양이다. 찬양이기도 하다. 저 위에 사는 누군가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대한 조소어린 찬양.
그러나 그 조소 또한 순수하지 못하다. 우리는 태초의 혈육을 잃었다.
비치지 않는 거울. 눈동자 속의 눈동자. 나는 결핍 속에서
만개한다.
Posted by Lim_
:

비행

글/시 2012. 11. 30. 22:28 |
비행


내 심장 속에 사는 어린아이는
연기로 된 몸에 상처를 가득 입었다
그는 암록빛 초원을 거닐고 싶어 했고
사람의 체온을 사랑하고 싶어했으며
누군가의 손을 잡을 수 있으면하고
자그마한 손아귀로 빌었다

그러나 누가 기도를 들어준단 말인가?
아무도 없었다. 길거리에는 꽃봉오리가 떨어진
들꽃뿐

날자, 공기보다 가벼운 영혼을 가진 이여
몸을 버리고 하늘로 올라가
연기처럼 산산히 흩어지자
그러고자 했다

그러나 나의 가슴 속에서는
이미 아무도 믿지 않게 된
한 명의 작은 어린아이가
날갯짓하는 법도 모른 채
피와 근육 속에서 팔을 휘젓고 있다

당신을 내 손으로 잡고 싶었습니다
당신과 함께 길을 걷고 싶었습니다
당신의 목소리를 따라 발걸음을 향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노이즈가 울리는 하얀 거리에서
아무도 없는 암적색 들판에서 그는 혼자다

날아가자, 날아가자, 단 한 번이라도 좋으니
어떤 색깔도 희망도 없는 창공으로
조각난 태아의 영혼으로 날아가자
Posted by Lim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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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와 고기

글/시 2012. 11. 27. 00:39 |
피와 고기


내가 사랑한 적 없는 그 육체는 진흙에서 태어났고
고기와 피를 담아놓은 가죽 부대 같아서 내 마음을 끌었다
나는 오물 구덩이에서 굴러 떨어진 새빨간 태아라
온몸이 성기와 같고 눈에는 알지도 못하는 죄악의 그림자가
동공 위에 겹쳐져 아른거렸다

나는 지저분한 과실을 나이프로 잘라서
마녀의 혈액 같은 과즙이 뚝뚝 떨어지는 조각을 백열등에 비춰보았다
과실에 두 눈을 박은 내 귀는 단단하게 막혀 있었고
그래서 하늘에서 울리는 위험한 나팔소리를
단 한 번도 듣지 못했다

나는 독액을 섞은 술을 마시듯이 과실을 한 입에 털어 넣었다
나는 바위에 조각된 해골들을 보았고
산등성이의 깎아지른 듯한 절벽들을 이로 씹었고
덫에 걸린 토끼의 살점을 발라내듯이
고기를 물어뜯었고 병든 피를 마셨다

내 심장은 공수병 걸린 늑대의 심장이었고
내 허파는 익사한 시체 덩어리의 축축한 그것이었고
내 눈동자는 뒤집혀서 계명도 법률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마침내 뼈가 불거진 내 손마저 물어뜯기 시작했고
내게서도 시커먼 독액 같은 피가 흘러 내렸다

나는 울지 않았노라. 나는 비명조차 지르지 않았노라.
나는 단 한 마디의 신음도 흘리지 않았노라.
나는 벽돌처럼 무뚝뚝하게 고기를 씹었고 가죽 부대에 난도질을 했다
칼집이 난 가죽 부대에서는 피와 내장이 폭포처럼 쏟아져 나와
바닥에 나뒹굴었고 나는 이 세상에서 누구보다 지혜로운 악마가 된 기분이었다

그리고 마땅히 누군가의 위대한 손이
나의 영혼을 길게 잘라갔고
나는 아픔조차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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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역자의 노래

글/시 2012. 11. 24. 09:43 |
반역자의 노래


꿈이 모든 것을
가져가버렸다

내 회색의 뇌수 속에는
마귀가 한 마리 살고 있나보다
그는 늘 내가
잠시 세상의 고된 것들로부터 도망칠 때마다
달빛을 쓸어담는 새벽의 청소부처럼
나의 빛나는 심장 고동소리들을
하나씩 주워 삼켜버린다

새벽은 가고 날이 밝았다
내 해골 속에서는 새 지저귀는 소리가 울리고
태양은 동굴 속에 움츠리고 있는
배고픈 야만인의 공복감 같은 빛을
잠드는 일 없는 까만 대지 위에 흩뿌린다

나는 누군가를 또 실망시킬 것이다
광맥을 찾는 광부의 삶은
누구도 만족시키지 못한다는 것을
광부 자신도 잘 알고 있다
금과 보석은 땅 속에 잠들어있으나
이 땅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모른다
자신이 어디에 곡괭이질을 하고 있는지를

내가 타고난 육체는
이미 주인을 한 번 배신했으니
두 번 배신한다고 하여
더 나쁠 것도 없다
문은 닫혔고
나는 스스로에게 칼자국을 낸다, 회개하라고 되뇌이며
그러나 이 광명 가득한 아침에
내 죄악의 체취는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아서
나는 땅 속 깊은 구멍으로 스스로 떨어져내리고
내가 믿지 않는 계명을 위해
야청빛 어둠 속에서 마귀들과 논다

은총 가득한 이여 나를 버리고 가시오
나는 내 영혼의 빵을 이미 모두 다 악마에게 바쳤으니
내가 갈 곳은 한 군데 밖에 없고
설사 자결한들 위엄이 없음이라

나는 지하에서 아침을 올려다보며
스스로 배에 창을 꽂겠습니다
새로이 태어나는 생명들은
정액과 피 무더기인 내 무덤을 밟고 영광을 찾으라
스스로 절벽에서 뛰어내리지 않으면 그곳에는
돌아갈 길도 있을테니
넘어져도 울지 말라, 그에게는 자비도 있겠지

거대한 엔진이 돌아가는 것 같은 비명 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온다
나는 푸른 풀잎을 밟고 사람 없는 길을 찾아 헤매인다
하늘에는 둥근 그림자, 그것은 꿈의 단면이네
연기에 찌든 내 몸
깨끗한 물 한 모금을 바라네
그러나 그 물은 내 것이 아니라
내가 사랑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것이다

도망쳐라, 도망쳐라. 땅이 끝나는 곳까지
스스로 짓눌려서 질식해가는 사람은
도망쳐라, 숨이 끊어지기 직전의 절정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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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잠들지 않은 밤

글/시 2012. 11. 20. 05:34 |
잠들지 않은 밤


동이 트고
태양의 햇빛으로
나는 새로운 꿈을 꾼다

녹아내리는 황금 속
벌거벗은 갈색의 여인을
나는 본다

그녀의 생기 넘치는 머리칼과
황동색 눈동자 속
넘쳐흐르는 생명의 힘을
그리고 소금 냄새가 나는
그녀의 살가죽을

나의 슬픔은 어디로 갔나?
밤새 내 심장을 붙들과 놔주지 않던
시꺼먼 악마의 손아귀 같던 그 슬픔은
어디에 흘려두고 왔나

가로등 등불 밑
미광이 비치는 자리에
얼어붙은 내 슬픔을 버려두고 왔네.
Posted by Lim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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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지저귐

글/시 2012. 11. 12. 06:17 |
새벽, 지저귐


내게는 칼깃이 잘린 날개가 있다
내 둥지는
밤새 내린 비에 젖었다
그것은 나무 밑
진흙탕 속에 빠져있다

나는 공연히 몇 번인가 날개를 퍼덕여보지만
나는 안다

여우야 너는 어디로 가느냐
칼깃이 잘려 날지도 못하는 나를 두고
어디로 사냥을 하러 가느냐

언젠가 이 날개는 도로 붙을까
언젠가 나는 그들이 날았던 하늘을
뒤쫓아 날아갈 수 있을까

춤추자, 춤추자꾸나
잘린 날개를 퍼덕이면서
흙탕물 속에서 춤추자꾸나
하얀 날개가
진흙에 뒤범벅이 되어
시커멓게 물들 때까지

언젠가 이 대지는
나마저도 집어삼켜
곱고 부슬부슬한 한 줌의 흙으로
토해내겠지

또 내일이 올지도 모른다
나에게 어떤 동의도 구하지 않고
멋대로 올지도 모른다

내게는 칼깃이 잘린 날개가 있다
내 둥지는 밤새 내린 비에 젖었다.
Posted by Lim_
:

로고스

글/시 2012. 11. 2. 03:38 |
로고스


 몇 마리의 해파리들이 보인다. 그것들은 발광한다. 가까운 곳에서 보면 커다란 달덩이 같다. 나는 익사하는 중이고 내 머리에는 월계관이 쓰여있다. 음산한 조류가 때때로 거대한 굉음을 내면서 내 귓가를 스쳐간다. 그는 생각한다. 몇 가지 죄와 차가운 바다에 대하여. 붉은 아기를 보면 심장이 갖고 싶다. 왜냐하면 차게 식은 늙은이들에게는, 더 이상 피도 돌지 않는 육체를 가진 사막의 모래알 같은 인간들에게는 없는 뜨거운 고기가 그것에게는 있기 때문이다. 고기는 생명이요 에로스일지니 경외할지어다. 그러나 그는 오래 전에 기도하는 것을 그만두었고, 대신 하늘을 향해 탐욕스런 손갈퀴를 뻗어 휘두르기 시작했다. 그의 손톱은 늑대의 발톱처럼 날카롭고 뾰족하게 되었고, 이빨 역시 육식성의 동물처럼 흉폭해졌다. 모든 것이 다 그분의 뜻이었다. 하지만 나는 곰곰이 생각한다. 그분은 아무 것도 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는 것을. 왜냐하면 그분에게는 조건이라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는 갈가마귀들의 부리를 보았다. 그것들은 막 죽은 암소의 대장을 부리로 쪼았다. 그는 차가운 바닷속에 빠져있는 꿈을 꾸었고 차가운 바닷속에서 깨어났다. 오래된 바닷물이 기도를 타고 폐로 들어가면 난폭한 마음도 가라앉는다. 나는 경외한다! 고기들의 메커니즘을. 그 정확함을. 그 미세한 착오를. 나는 그분과 하나가 될 수 있다. 만약 그분을 먹을 수 있다면 말이다. 아무튼 그는 붉은 아기의 심장을 탐했고 들개처럼 사나운 입으로 뜯어 먹었다. 그는 자신이 영원히 무한으로 회귀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타당했다. 그러나 타당한 자들도 늘 실패의 결말을 맞는다. 나는 거리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뜨거운 심장들을 뜯어 먹었고 내 생명도 넘치는 술잔처럼 차올랐다. 밤에 뜨는 태양이 고요를 작렬하고 있었고 어둠과 빛은 하나가 되어서 분간할 수 없었다. 그는 기쁨의 눈물을 흘렸고 가끔은 소리내어 울부짖었다. 왜냐하면 그것이 짐승이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찬탄, 찬탄! 모든 규칙들은 하나로 뭉쳐져서 벌겋게 뛰는 거대한 육신이 되었다. 영혼은 그의 이빨과 손톱 속에 있었다. 나는 겨울 바다에 있다. 갑자기 사방에서 수백개의 해가 뜨고 금과 은으로 된 왕국에는 온통 왕들 밖에 없게 될 것이다. 군인이여, 그대는 더 이상 할 일이 없다. 그대의 존재는 그분도 원하지 않고 그도 원하지 않는다. 그대의 소멸에 박수쳐라! 다만 이제 왕들은 스스로 고기를 구하러 돌아다녀야 한다. 바다 밑바닥은 무겁고 환하다. 어머니여! 그대는 좋은 자식들을 낳았다. 이제 그들이 서로를 뜯어 먹기 위해 주먹다짐하고 할퀴고 물어 뜯는 것을 보아라. 모두 다 정당한 뜻에 따른다. 하수구 속 쥐들의 왕국을 생각해보았는가? 빨갛게 불거진 눈을 가진 그 시궁쥐들에게는 주인이 없다. 그것들은 자신의 새끼를 먹어 치운다. 나는 경외한다.
Posted by Lim_
:
나는 거기에 없고 여기에도 없고 어딘가에는 있을 것이지만 그곳이 어딘지 지금의 나로서는 전혀 모른다


내가 걸어 돌아온 모퉁이에는
발자국도 남지 않았다
마른 바람이
낙엽마저 지우고
그곳은 빈 웅덩이.

우두커니 선 나의 그림자는
억새처럼 길게 드리운
나무의 그림자를
무뚝뚝이 강간하고 있다.

새까만 쟁반에 얼음 같이 뜬
달만이
동공도 없는 눈동자로
나의 범행을 지켜보고 있을 뿐.

나는 거세당한 강간범
나는 바짝 말랐고
죽은 나무의 껍질처럼
바람에 나뒹굴고 있다

나는 발자국도 없는
눈 뜬 유령.

나는 돌아가지 않는다
어디로도
계속 여기서
홀로 그림자를
사랑한다

가끔 거울이 나타나고 나는 그 거울에서
이상한 표정을 본다 거기에는
무엇인가가 없다

왜냐하면 나는 길을 잃어버렸기 때문이고
길은 나를 잃어버렸고
그리고 너도 잃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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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쪽과 저쪽 사이

글/시 2012. 10. 4. 23:25 |
이쪽과 저쪽 사이


벌써 한기가 이슬처럼 내리는 계절이 왔다
밤의 골목 구석에서는
어둠이 깡통을 차며 혼자 놀고
캄캄한 거리 곳곳에는
달이 수도 없이 피었다.

머리 위 희고 둥근 달이 하나
넷.

닭이 운다. 저편에서.
내게 보이지 않는 땅에서
태양이 이제 눈동자를 열려는 기색에 눈치채고
새벽에 노래한다.

나무들은 잠을 자는 중
암록색 꿈을 꾸는 중.

나는 만신창이, 거리를 걷네.
내 피부에는 피와 진물이 뜨겁게 흐르고
나는 취한 사람, 세계가 무리지어
배고픈 늑대들처럼 조용하고 음산하게
저 멀리 있는 지구의 반대편을 향해 흐른다.
흐른다. 물 소리도 없이.

또 밤이 오면 나는 술을 마시러 가야지.
Posted by Lim_
:
새장 속의 올빼미처럼


사람이 띄운 별이 여기저기서
밝게 빛을 발한다.
그 어떤 별보다도 지상 가까운 곳에서
말 없이 빛나는 별들아
나랑 술 한 잔만 함께 마시자
사람을 품고 빛나는 별들아
너희도 그 높은 곳에서
땅을 굽어보고만 있으려면
외롭지 않느냐.

무거운 공기가 밤을 싣고 내 위로 가라앉는다
바람 따라 흐르는
거대한 적갈색 구름들
신음소리 내는 나뭇잎들.
시(詩)가 다 무엇이며 영혼이 다 무엇인가?
인간도 바람 불 때마다 흔들리며
신음하는 나뭇잎 한 장과 다르지 않은 것을.

나는 누워서 새까만 하늘과
그 속에서 가끔 터져나오는
그 누구도 아닌 누군가의 조용한 외침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나는 인간의 삶에서 벗어나고 싶었노라
잠시 쉬었다 갈 내륙의 존재조차 모르는
커다란 날개를 가진 바닷새처럼
가끔 동족을 찾아 헛된 노래를 부르고
소금 냄새 속에서 날개를 퍼덕이고 싶었노라.
저 깊은 바닷속은 평화로우냐
슬프냐
아름다우냐.

비가 올 것 같다.
나는 집으로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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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가 내린 뒤

글/시 2012. 7. 23. 05:56 |
비가 내린 뒤


여름이 오기 전
해는 빛나지 않는다 하늘엔
푸르고 하얀 반점들 뿐
땅에는 까만 돌들과
물기를 한껏 머금고 얼굴을 내민
초록빛 잎사귀들이
아침을 반가워하며 숨을 뿜고 있다.

밤은 내게 한마디 말도 걸지 않고
자신이 갈 길로 가버렸다
나는 그를 잊고 있었다
내 사랑, 내 영혼이 품은
내 반신.
내가 빛나는 감옥에 갇혀
눈 위를 스치는 영상들에 홀려
곰팡이와 마주앉아
소리도 없는 노래를 부르고 있을 때
그는 마치 철마처럼 무뚝뚝하게
달려가 버렸다.

내 가슴속 뿌연 연기들
나의 피부에서 나는 시큼한 체취들
그대는 어디로 갔나 나는 바보처럼 웅크리고
알코올의 냄새가 나는 눈물을 짓는다.

피곤하게 뻗은 팔다리
장막 속에서 혼자 꿈을 꾸네.
Posted by Lim_
:
단단한 대지의 납덩어리 같은 어둠을 밟고


연기 사이로 불빛이 출렁인다
가로등의 주황색 불빛
저것은 시민들로 하여금 공포에 떨게 하기 위해
밝혀진 것이다
인적 없는, 어둡고 가라앉은
들개의 시체 위를 넘나들지 말라고.
그러나 나는 빨간 불꽃을 품에 안고
그것들의 뼈를 밟고
흘러나온 피와 내장을 슬픈 듯이 핥는다
너는 지금 그 위대한 해골에게 무어라고 짖고 있을까?
계속 짖어라. 나도 함께 울부짖어 주리라
나의 형제여
내가 최초의 혼돈이 되리라
바람조차 불지 않고
아무것도 죽지 않는 원시의 밤이.

아, 마지막 외마디 비명소리!
빨간 불꽃이 꺼진다.
Posted by Lim_
:

밤에 우는 새

글/시 2012. 7. 13. 10:53 |
밤에 우는 새


밤에 새들이 울었으면 좋겠다.
그들은 아침에 노래한다
대기가 근질거리고
하늘이 푸른 먹빛으로 진동하기 시작하는,
어느새 새까만 장막이
서서히 밝게 물들어가는
그 시간에.

그들은 수천 년 전부터
아침에 뜨는 태양에게 자신들의 노랫소리를
바쳐왔을 것이지만 나는
그들의 노랫소리가 빛과 어울린다고는
도무지 생각하지 못하겠다 왜냐하면
내가 까만 연기로 물들어
온몸의 근육을 찌르는 통증과 싸우면서
공수병 걸린 짐승처럼 캄캄한 길을 기어 다닐 때
나는 몇 번이나 내 안의 신에게
기도하기 때문이다 새들이 울게 해달라고!

노래하는 새들이여, 그대들은 알아야한다
자신의 노랫소리가 시꺼먼 눈동자와
침묵하는 하늘과 부들부들 떨고 있는
공포에 질린 인간정신과 얼마나 어울리며
또 조화될 수 있는 지를.

더 이상 광명을 위해 노래하지 말라.
그대들의 지저귀는 소리는
잠들지 못하는 영혼에게, 그리고
루시페르의 오른편 권좌에 앉아
술 한 잔 마실 수 있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더 없이 아름답기에!
Posted by Lim_
:

백야

글/시 2012. 6. 30. 10:52 |
백야


한 발자국만 떼면 호수다
도무지 깊이를 알 수 없는
가을하늘처럼 깊고 시커먼 호수다
수면에는 유령들의 연회처럼 공기에 뒤엉긴 안개가
죽은 구더기들 배 뒤집고 둥둥 뜬 시쳇물처럼
깔려있다

가끔 검은 잉어나
흰 비단뱀들이 파문을 일으키며
휙휙 지나간다
등 뒤는 소란. 사람들의 빛, 목소리 깔깔대는 얼굴들
인간아, 너 한 발자국을 딛어라!

저기 보이느냐? 죽은 신들이 눈 감고 누운
무한한 늪이. 불꽃의 정상처럼
춤추는 물결이

가끔 호수 주변에 뿌리박고 선
나무들의 나뭇잎 사락거리는 노래가
어머니의 거대한 비명이 무너져가는 소리처럼
영혼을 웃음 짓게 한다. 인간아!
너 한 발자국만 딛어라.
Posted by Lim_
:

육신을 가진 유령

글/시 2012. 6. 30. 10:52 |
육신을 가진 유령


해가 하얗게 내리쬐는 날
보도블록 위에 서있는 내 발이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가죽을 덧씌운 것 같은
그런 얼굴들이
강가를 내려다보면
풀잎 사이로 잠든 짐승의 심근처럼
흐르는 물살이
모두 파랗게 진동하는(너무나 밝아서 오히려)
유리잔의 목 같이 얇은 다리를 지닌 초식동물인 나를
멀리서 노려보는 굶주린 늑대의 눈동자처럼
나를 꿰뚫는다 나를
시체를 갉아먹는 구더기처럼 스멀스멀
좀먹는다

나는 태양 아래서 내 피가
타르처럼 검고 걸쭉하게 변해가는 것을 본다
나는 죽은 쥐가 썩고 부패하여
팽창된 눈알이 두개골로부터 빠져나오는 것을
본 일이 있다 마치 그 썩은 눈알처럼
나의 심장도 부패하여 흔들거리다가 식도를 타고 넘어와
내 입에서 쏟아진다 왜냐하면
만물을 자라게 하는 태양이 빛나는 날에도
늙은이들이 지팡이를 짚고 경쾌하게 걷는 거리에서도
내 두 발은 오래된 폐허의 비석처럼
부서지고 무너져서 바들바들 떨고 있기 때문이다 날개가 잘린 잠자리처럼

표정들이 나다닌다 단단한 갑각을 가진
게처럼 재빠른 발동작으로 옆으로 옆으로 걷는다
그런데 나는 거울로 만든 감옥에 웅크리고 앉아서
거울 속의 그들이 나를 노려본다고
그들이 내 뱃가죽에 칼을 꽂으러 올 것이라고 굳게 믿고
한밤중 굴속에 숨어있는 야만인처럼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가끔 바깥을 내다보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돌과 나무와 흙으로 만든 모형 도시 속에서
덜그럭거리며 걸어 다니는 마리오네트들의 공포극 밖에는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에
어리둥절하여 겁을 집어먹고 문을 잠그려고 한다 하지만
열쇠는 내 말을 듣지 않는다.
Posted by Lim_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