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와 고기

글/시 2012. 11. 27. 00:39 |
피와 고기


내가 사랑한 적 없는 그 육체는 진흙에서 태어났고
고기와 피를 담아놓은 가죽 부대 같아서 내 마음을 끌었다
나는 오물 구덩이에서 굴러 떨어진 새빨간 태아라
온몸이 성기와 같고 눈에는 알지도 못하는 죄악의 그림자가
동공 위에 겹쳐져 아른거렸다

나는 지저분한 과실을 나이프로 잘라서
마녀의 혈액 같은 과즙이 뚝뚝 떨어지는 조각을 백열등에 비춰보았다
과실에 두 눈을 박은 내 귀는 단단하게 막혀 있었고
그래서 하늘에서 울리는 위험한 나팔소리를
단 한 번도 듣지 못했다

나는 독액을 섞은 술을 마시듯이 과실을 한 입에 털어 넣었다
나는 바위에 조각된 해골들을 보았고
산등성이의 깎아지른 듯한 절벽들을 이로 씹었고
덫에 걸린 토끼의 살점을 발라내듯이
고기를 물어뜯었고 병든 피를 마셨다

내 심장은 공수병 걸린 늑대의 심장이었고
내 허파는 익사한 시체 덩어리의 축축한 그것이었고
내 눈동자는 뒤집혀서 계명도 법률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마침내 뼈가 불거진 내 손마저 물어뜯기 시작했고
내게서도 시커먼 독액 같은 피가 흘러 내렸다

나는 울지 않았노라. 나는 비명조차 지르지 않았노라.
나는 단 한 마디의 신음도 흘리지 않았노라.
나는 벽돌처럼 무뚝뚝하게 고기를 씹었고 가죽 부대에 난도질을 했다
칼집이 난 가죽 부대에서는 피와 내장이 폭포처럼 쏟아져 나와
바닥에 나뒹굴었고 나는 이 세상에서 누구보다 지혜로운 악마가 된 기분이었다

그리고 마땅히 누군가의 위대한 손이
나의 영혼을 길게 잘라갔고
나는 아픔조차 몰랐다.
Posted by Lim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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