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5/30)
다리 밑에서


 이미 용훈은 탐색을 포기한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 그녀는 지친 표정으로 강가 벤치에 앉아있다. 벌써 세 시간 동안 마포대교 북단을 들쑤시고 다녔으니 피곤할 만도 하다. 그녀는 쭉 뻗은 두 다리 사이에 양팔을 넣은 자세로 구부정하게 앉아있다. 허리까지 내려온 검은 머리칼이 계절 때문에 차가워진 강바람에 나부끼고 있다. 용훈은, 터널 같은 것은 이제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는 갈대밭을 헤치며 찾아낸 한강의 수위조절용 터널을 돌아본다. 비슷하지만 다르다. 그들은 세 시간 동안 이런 ‘비슷하지만 다른’ 터널을 네 개나 찾아냈다. 그것들은 전부 흡사한 생김새에, 자전거도로나 산책로로부터 멀찍이 떨어져 있다. 콘크리트로 지어진 네모난 구멍은 성인 남성 키보다도 훨씬 천정이 높다. 수위조절용 터널이라지만 강물에 젖는 일은 그다지 없고, 안쪽으로 들어가면 깊은 통로가 보인다. 어디까지 이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 14년 전에도 통로 끝까지 가본 일은 없으니까.
 혜미.
 용훈이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간다. 뾰족한 갈댓잎이 목덜미와 손목을 찌른다. 터널을 찾으러 가자고 먼저 말을 꺼냈던 것은 그녀다. 그러나 한눈에 보아도 그녀는 벌써 지쳐있다. 지금 하고 있는 ‘한강 탐색’이라는 놀이에 질려버렸다. 그녀가 용훈을 향해 고개를 돌린다. 눈동자가 가을 햇살을 반사해 약간 갈색으로 빛난다. 용훈은 다시금 생각한다. 지금 와서 14년 전의 터널을 찾는다는 것은 애초에 바보 같은 일이었다. 그녀가 호기심을 보이기에 동조했을 뿐, 그에게는 마땅한 이유나 동기도 없었다. 만일 14년 전의 자신이 지금의 그를 본다면, 꿈도 못 꾸던 생활을 손에 넣었으면서 무슨 여흥거리라도 되는 듯이 과거에 집적대냐고 비아냥댈 것이 분명했다. 결국 찾아내지 못한 그 터널 안에 드러누워서 말이다.
 나는 순전히 운이 좋았을 뿐이야. 용훈은 굳이 입속말로 중얼거린다. 아버지를 생각한다. ‘아버지’라는 단어를 생각하기만 해도 눈앞이 빨갛게 물드는 것 같다.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온 집안에 붙은 빨간딱지가 아버지를 데리고 가버렸기 때문이다. 그 빨간딱지란 참 기묘한 것이었다. 지금까지 잘만 사용해오던 물건들에 딱지가 붙으면 그것은 곧바로 남의 것이 되어 끝내 사라져버렸다. 집안 살림들이 모조리 어디론가 실려 나가버리자, 빨간딱지는 이제 가족들마저 잡아먹기 시작했다. 모두가 집으로부터 떠나야만 했다. 그는 아직도 주공 아파트 2층에 있던 그 집을 또렷하게 떠올릴 수 있다. 처음으로 화장실에 욕조가 있는 집이었고, 처음으로 방이 세 개나 되는 집이었으며, 처음으로 침대를 들여놓은 집이었다. 그리고 가족끼리 살았던 집 중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지상에 지어진 집이었다. 그러나, 여하간에 그가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하는 이유로 인해 가구들에는 온통 빨간딱지가 붙고, 아파트는 남의 것이 되었다. 그 뒤에는 제일 먼저 어머니와 동생이 외가로 향했다. 아버지는 용훈에게 얼마간의 돈―초등학교를 막 졸업한 당시의 그에게는 굉장한 액수의 돈―을 주고 큰댁으로 가라고 말했다. 그리고 사라져버렸다.
 찾았어?
 혜미의 질문에 그는 고개를 젓는다. 기대하지도 않는다는 어조다. 터널을 찾으러 가자고 몇 번이나 꼬드긴 것은 그녀였다. 그러나 쉽게 호기심이 동하다가도 쉽게 질려버리는 것이 지난 2년간 확인할 수 있었던 그녀의 특징이다. 가끔 용훈은 그녀가 무슨 이유로 지금까지 자신과 연인관계로 남아있는 것인지 알 수 없다는 생각을 한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그녀가 용훈에게 가졌던 호감이란, 실은 호기심과 막연한 동경일 것이 분명하기에 그렇다. 2년이란 시간이면 호기심과 동경 따위는 사그라들기에 충분하다.
 3년 전, 그는 생애 처음으로 자신의 직업이 무엇인지 타인에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그와 함께 기회라는 것을 얻었고 자립할 능력을 얻었으며 덧붙여서 여자친구까지 얻었다. 신문에 그의 이름 석 자와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작 / 「다리 밑에서」’라는 활자가 찍혔다. 평소 책에서나 볼 수 있었던 사람들이 직접 심사평을 써주는 믿기 힘든 일도 일어났다. 그는 마침내 손에 넣은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열심이었다. 큰댁의 식객으로 지내기엔 이미 너무 많은 나이였다.
 작품을 쓰기 전 용훈이 했던 일은 십 년도 전에 마구잡이로 썼던 소설들을 다시 읽는 것이었다. 문장도 명확하지 않고 이야기 구조도 엉성한, 소설 같지도 않은 소설에서 유난히 눈에 걸리는 것은 다음과 같은 문장이었다. <그는 자신이 과거에 어떻게 살았는지 기억해내는 능력을 잃었다. 과거를 모조리 글로 써서 기록으로 바꾸어놓았기 때문이다. 기록은 기억보다 확실한 것처럼 보였고 오염될 수도 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어떤 이야기에서 그는 그렇게 썼다. 십수 년 전에 쓴 그 글은 어째서인지 돌부리처럼 위험하게 돋아있었다. 때문에 그는 집과 가족에게 온통 빨간딱지가 붙은 뒤부터 자신이 체념해온 것들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보아야 했다. 큰댁으로 가라며 돈을 쥐어주고 사라진 아버지의 마지막 부탁, 혹은 명령을 듣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 말이다.
 아버지마저 사라지고, 그는 딱지가 붙어있는 장롱의 안쪽 한구석에서 국방색 침낭을 꺼냈다. 보다 어릴 때 가족과 캠핑을 하며 단 한 번 써본 물건이었다. 베란다에 남아있는 휴대용 가스레인지를 배낭에 넣었다. 돈 봉투는 진즉 배낭 가장 깊은 곳에 숨기듯이 넣어놓았다. 아파트를 나와 우선은 물이 보이는 곳까지 걸었다. 신곡동 한쪽에 흐르는 개천까지는 금방이었다. 그러나 그곳은 행인이 너무 많았다. 좁은 개천가는 산책객이나 자전거를 타러 온 사람들로 바글바글했다. 용훈은 중랑천을 따라 남쪽으로 무작정 걸었다. 돈 봉투와 휴대용 가스레인지가 든 묵직한 배낭 위에 침낭을 묶어놓고, 걷다가 피곤하면 아무 곳에서나 앉아 쉬고, 또 걷다 밤이 되면 개천가의 으슥한 곳에 나동그라져 잠들었다. 이틀하고 한나절 정도를 걸으니 바다처럼 넓은 강이 나타났다.
 한강에 도착할 즈음에 이미 용훈의 몸에서는 부패한 음식물쓰레기 같은 냄새가 나고 있었다. 스스로도 그 악취를 맡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는 기묘한 해방감을 느꼈다. 누구나 피해갈 정도로 심한 악취를 온몸에서 풍기며, 엉망이 된 옷을 입은 채 기름이 엉겨 붙은 머리로 밖을 나다니는 것은 살면서 겪어본 적이 없는 일이었다. 아니, 누가 되었든 겪어볼 만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누군가의 찡그린 표정도, 불길한 시선도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 게다가 잘 생각해보니 그는 학교를 다니는 육 년 동안 단 한 번도 공부를 쉰 적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학업이니 가족이니 하는 일들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상황에 놓여있는 것이었다. 밤낮없이 울어대는 동생도 곁에 없었고, 시험에서 만점을 받지 못할 때마다 벼린 칼날처럼 시퍼런 눈으로 용훈을 노려보던 어머니도 없었다. 눈앞에 보이는 커다란 다리의 이름은 동호대교였다.
 어떡할까? 돌아가?
 용훈이 혜미에게 묻는다. 그녀는 고개만 움직여 주변을 돌아본다. 무슨 의도가 있어서 하는 행동은 아닐 것이다. 아마 혜미는 돌아가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터널을 찾으러 가자고 말을 꺼냈던 것은 그녀 자신이다. 지쳤으니 돌아가자고 말하기는 창피할지도 모른다. 그녀는 괜히, 찾는 것도 없이 주변을 돌아보고 있다. 쉽게 대답을 할 것 같지 않다. 얼마쯤 기다리다가, 그녀가 원하는 답을 용훈이 대신 말한다.
 좀 쉬다가 저녁이나 먹으러 가자.
 혜미는 고개를 끄덕인다.
 번거롭다고 생각한다. 어쩌다가 혜미를 만나게 되었더라, 하고 용훈은 기억을 돌이켜본다. 만나게 된 계기보다도 뚜렷하게 기억하는 것은 그녀의 가정환경이다. 어머니는 약사, 아버지는 고등학교 교사라고 했다. 그리고 그녀 역시 약대를 나와 어머니의 약국에서 함께 일하고 있다. 처음 그녀의 가정환경을 알게 되었을 때 용훈이 느낀 것은 기묘하게 뒤틀린 우월감이었다. 아니면 우월감으로 가장한 열등감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작가님 데뷔작 읽고 정말 충격이었어요, 너무 현실적이어서 직접 겪으신 일인가 궁금했었는데, 이렇게 눈앞에서 뵐 수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네요. 아, 네……, 좋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생각해보면 그녀는 충격적이었다는 말만 했지 용훈의 글이 좋았다거나 감명 깊었다는 말은 한 적이 없다. 그게 그리 중요한 일도 아니지만,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랬다.
 그녀는 자주 용훈의 경험담에 비교하듯 자신이 살아온 길을 이야기하곤 했다. 그럴 때마다 늘 자신의 삶이란, 마치 굴곡 없는 평탄면을 달리는 것 같았다고, 더욱 과장하여 말하자면 마치 아무런 희로애락조차 없었던 것 같았다고 늘어놓았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착잡한 감정이 슬쩍 가슴 한구석에 자리 잡았다. 왜인지는 분명하게 알 수 없으나, 아무래도 그녀는 용훈의 소설에 대해 별 관심이 없는 것 같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혜미 옆에 앉아, 마포대교 근처는 그나마 조용하다고 생각한다. 동호대교는 도무지 지낼만한 곳이 아니었다. 거의 오 분에 한 번씩 머리 위로 전동차가 굉음을 내며 지나다니는 곳이었다. 그는 다리 밑에 침낭을 푼 지 하루 만에 다시 짐을 쌌다. 그리고 강을 정면으로 두고서 ‘오른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자전거도로에는 딱 달라붙는 운동복을 입고 값비싼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이 엄청난 속도로 지나다녔다. 13살짜리 노숙인이었던 그는 될 수 있는 한 그런 사람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걷고자 했다. 그러자 필연적으로 갈대가 높이 자라고 길이 정리되지 않은 강가의 끝자락으로만 걷게 되었다. 가스레인지와 침낭, 그리고 가게에 들러 사들인 참치통조림으로 묵직한 가방을 메고서 그는 계속 걸었다. 딱히 목적지도 없었고 찾는 것도 없었다. 다만 욕심을 부리자면 사람들이 지나다니지 않고, 짐을 부려도 눈에 띄지 않을만한 곳이 있었으면 했다. 날씨가 궂을 때 빗방울을 막아줄 지붕이 있으면 금상첨화였다. 이미 한번 지나가는 빗줄기에 젖었다가 그대로 마르고 보니, 말로 형용하기 어려울 정도의 악취가 몸에서 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용훈은 몇 개의 커다란 다리 밑을 지나갔다. 몇이나 지났는지는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저녁은 뭐가 좋을까.
 그땐 뭘 먹고 살았어?
 그때? 하고 되묻는다. 지금 상황에 ‘그때’라면 뻔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한강에 온 목적을 지금껏 혜미가 의식하고 있었다는 것이 이상하게도 놀라웠다. 그땐 참치통조림을 주로 먹었지, 가끔 둔치 매점에서 컵라면도 사 먹었고.
 그녀가 고개를 끄덕인다. 용훈은 어째 마음 한구석이 불편하다. 해결되지 않을 문제가 또 하나 심중에 얹힌 기분이다. 당시에 뭘 먹고 지냈으며, 어떻게 음식값을 마련했는지는 소설에 상세하게 써놓았다. 분명 써놓았었다. 동호대교에서부터 오른쪽으로, 한참을 걸으며 그는 몇 개의 이상한 굴들을 보았다. 산책객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에 일견 불규칙하게 뚫려있는 콘크리트 터널들이었다. 어떤 것들은 강물과 가까운 곳에 있었고 어떤 것들은 고수부지 바로 밑에 새까만 입을 벌리고 있었다. 나중에서야 알게 된 것이지만 그 굴은 전부 한강 수위조절용 인공터널이었다. 용훈은 마포대교 북단의 어딘가에서 딱 알맞은, 그러니까 사람들이 함부로 다가오지도 않을뿐더러 웬만한 일이 없는 한 강물에 젖지도 않을 터널을 찾아냈다. 네모진 터널 입구로 들어가자 안으로 쭉 통로가 펼쳐져 있었다. 통로 안쪽에 불빛은 단 한 점도 보이지 않았다. 딱히 안쪽으로 들어갈 생각도 없었다. 비가 오더라도 터널은 쉽사리 빗물이 넘칠 것 같지 않았다. 용훈은 곧바로 터널 입구에서 열 발자국 정도 들어간 곳에 침낭을 펼치고 배낭의 짐을 꺼내 바닥에 깔았다.
 휴대용 가스레인지는 정말 어디에도 쓸 데가 없다는 사실을, 이틀 정도가 지나고서야 알아차렸다. 가스레인지를 배낭에 넣을 때 냄비를 챙기지 않은 스스로가 멍청하게 생각됐다. 게다가 소모품인 가스를 계속 사야 한다는 것도 사치스러운 일이었다. 방금 혜미에게 말한 것처럼, 주로 먹는 음식은 참치통조림이었다. 상하지 않고, 처리해야 할 쓰레기도 많이 나오지 않았다. 하루에 통조림 두 개를 먹으면 그것으로 그만이었다. 가끔 따뜻한 음식이 먹고 싶을 때면 한강 둔치에 있는 매점에서 컵라면을 사 먹었다. 아버지가 준 돈을 굳이 꺼내서 쓸 필요도 없었다. 터널 입구에 자리를 잡고 매일 드러누워 있자면 가끔 방문객이 있었던 것이다. 처음 터널에 들어와 둘러볼 때, 벽면에 락카로 그린 그림인지 낙서인지 알 수 없는 것들이 꽤 많이 발견되었다. 물론 그 그림들은 누군가가 드나들고 있다는 증거였다. 얼굴을 알 수 없는 낙서꾼들은 금세 만날 수 있었다. 터널에 자리 잡고 사흘째였는지 나흘째였는지,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남학생들이 달그락거리는 락카를 비닐봉지에 한가득 담고 그곳을 찾은 것이다.
 넌 여기서 뭘 해?
 남학생들은 누가 봐도 노숙자인, 그러나 누가 봐도 기껏해야 중학생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는 용훈에게 그렇게 물었다. 중랑천을 걸어 내려와 터널에 둥지를 틀기까지의 과정 덕분에 용훈은 꽤 대담해져 있었다. 대담이라기보다는 자포자기에 가까운 것 같기도 했다. 무슨 일이 벌어지든, 될 대로 되라는 식의 사고방식이 벌써 그의 어린 머리에 뿌리박혀 있었다.
 집이 없어서.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말한 것이었지만 어느 정도 계산속도 있었다. 사실 ‘집’ 자체는 큰댁으로 가기만 하면 있을 것이다. 큰아버지는 박정한 사람이 아니다. 남동생의 어린 아들이 집도 절도 없는 몸으로 찾아왔는데 내쫓을 사람은 분명히 아니었다. 그러니 엄밀히 말하자면 집이야 찾아가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집이 없다’고 단정적으로 말하는 것이 자신에게 도움이 되리라고, 용훈은 막연하게 느끼고 있었다. 생각은 맞아떨어졌다. 남학생들은 용훈에게 어디서 왔느냐, 몇 살이나 됐느냐, 언제부터 여기서 살았냐는 등의 여러 가지 질문을 했다. 용훈은 담담하게 사실대로 답했다. 그다지 숨길 일도 아니었고 그들에게서 동정하는 기색이 보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천 원짜리 몇 장을 건네주었다. 자신들은 일주일에 두 번 정도 터널에 온다고 했다. 고맙다고 말하는 것만으로 식비의 태반을 충당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친절한 학생들이 터널 안쪽 벽에서 낙서―그라피티라고 했다―에 열중하는 것을 가끔 재미 삼아 지켜볼 수도 있었다.
 이런 이야기를 분명히 작품에 썼을 터다.
 내가 소설에 쓰지 않았던가?
 그랬나? 잘 기억이 안 나.
 그래.
 달리 할 말이 없다. 독자가 기억하지 못한다면, 기억에 남을만한 장면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인상적인 구절을 만드는 것은 작가의 몫이므로 독자의 기억력에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 용훈은 그렇게 생각한다. 그리고 지금 상황에서 기억력에 관해 책임을 묻자면 죄인은 그다. 세 시간 넘도록 그놈의 터널 하나를 찾지 못해 벌써 날이 저물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왜 찾을 수가 없는 걸까?
 문뜩 혜미가 용훈의 눈동자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새삼스럽게 묻는다. 그는 순간 당황한다. 갑자기 취조당하는 피의자 신분이라도 된 것 같다. 혜미의 속눈썹 사이에서, 그러니까 그 짙은 갈색 눈동자에서 새어 나오는 것이 단순한 의문인지 아니면 무언가 불길한 것을 감춘 의혹인지, 용훈은 판별하기 어렵다. 그러나 어느 쪽이건, 의도를 읽는 것은 독자 나름이다. 그는 어째서인지 자신의 성대에서 나오는 목소리가 약간 갈라져 있는 것을 스스로 느낄 수 있다.
 풍경이 달라져서인지도 몰라, 가을이 왔을 때는 이미 여기에 없었으니까.
 그렇게 말하자 그녀의 시선은 다시 반짝거리며 노을을 반사하고 있는 강으로 향한다. 가을에는 이곳에 없었다. 당장 다음 날 급사하더라도 상관없다는 식의 마음가짐으로, 그는 터널에서 수 개월을 지냈다. 그러나 본능이, 특히 생명력이라는 것이 얼마나 힘이 센지를 알게 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다리 밑에서 봄이 가고 여름이 가며, 용훈은 완전히 노숙 생활에 익숙해진 듯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인지 강에서 차가운, 피부에 소름이 돋게 하는 바람이 불기 시작한 것이다. 해가 지면 바람은 더욱 싸늘해졌고 터널을 향해 막무가내로 들이닥쳤다. 아직은 침낭 속에서 웅크리고 있으면 버틸만한 추위였다. 그러나 강바람은 계절의 변화보다 더 빨리 차가워졌고, 얼마 안 가 용훈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계속 이곳에서 버티고 있으면 틀림없이 얼어 죽을 것이라는 걸. 강바람에는 그의 목숨을 걷어갈 무언가라도 깃들어있는 듯, 부정할 수 없는 죽음의 냄새가 물씬 풍겼다. 그것은 평소처럼 오수가 섞인 한강의 질척거리는 냄새와는 분명히 다른 것이었다.
 언제 죽어도 그만이라는 생각은 머릿속에서만 성립되어있는 관념에 불과했다. 직접 죽음의 위협을 느끼자 몸을 움직이는 것은 생각이 아니라 본능이었다. 생각은 멈추고, 본능이 모든 판단을 주도했다. 어느 초가을 밤 유난히 어둡고 차가운 강바람이 불고 난 뒤, 아침이 되자 그는 고민도 하지 않고 짐을 정리해 터널을 나왔다. 다리 밑을 지나서 사람들이 사는 도시까지 걸어 올라갔다. 아마 마포역에서 전철을 탔을 것이다. 몸에서 나는 끔찍한 악취 때문에 승객들이 불편했을 테지만, 당시에는 자신이 아닌 타인에게까지 신경을 쓸 여유 따위는 없었다. 그대로 목동까지 갔다. 돈 봉투 안에는 큰댁의 주소가 적힌 메모지가 들어있었다. 한참을 헤매며 맞는 주소를 찾아다녔다. 연립빌라 1층의 현관문을 두드리자 잠이 덜 깬 큰아버지가 문을 열어주었다. 당시 큰아버지는 정년퇴직 후 아파트 야간경비 일을 하고 있었다.
 큰아버지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아니, 너무 오래 전의 일이라 기억이 불확실하지만, 아무것도 묻지 않았던 것 같다. 아마 동생의 집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겠거니, 하고 생각하는 듯했다.
 저녁 먹으러 갈까.
 그녀가 고개를 끄덕인다. 서늘한 바람이 강변의 갈대밭을 스친다. 하늘에서는 붉은 노을이 점점 짙어지고 있다. 그녀가 벤치에서 몸을 일으킨 뒤 용훈을 돌아본다. 용훈은 그녀의 눈동자 속에 어떤 읽을 수 없는 불신 같은 것이 배어있다고 느낀다. 그러나 그것도 그저 느낌일 뿐이다.



 갈매기살 식당 앞의 어수선한 거리에 용훈은 핸드폰을 들고 서 있다. 이미 해가 졌고, 도심의 불빛이 하늘을 어두운 보라색으로 밝히고 있다. 혜미에게는 담배를 피우고 오겠다고 둘러대고서 잠시 가게를 나온 참이었다. 주변에는 넥타이를 풀어헤치고 불콰하게 취한 회사원들이 굴뚝처럼 연기를 내뿜고 있다. 용훈은 큰아버지에게 전화를 건다. 이미 노인이 된 그가 이 시간에 전화를 받을지는 확신이 없다. 일흔 살이 넘으면서 큰아버지는 점점 새벽잠이 없어지고, 저녁에 잠드는 시간이 빨라졌다. 다섯 번 정도 송신음이 울린다. 아무래도 주무시고 있는 모양이라고, 전화를 끊으려 할 때 큰아버지가 전화를 받는다.
 어, 잘 지내냐.
 예, 큰아버지, 주무시고 계셨어요.
 매번 그렇게 정해놓기라도 한 듯 똑같은 안부 인사를 반복한다. 수화기 저편에서는 불분명한 음질로 바둑 중계방송 같은 것이 들려온다. 아무래도 잠들어있는 사람을 깨운 것은 아닌 것 같다고 생각하며, 용훈은 본론을 꺼낸다. 그가 궁금한 것은 처음 큰댁에서 살기 시작한 가을 무렵, 당시 자신이 무슨 얘기든 큰아버지에게 고했는가 하는 것이다. 특히 다리 밑에서 살던 봄부터 초가을까지의 일 중 무엇이라도 말하지는 않았는지 그는 확인하고 싶었다.
 글쎄다, 그때 네가 뭐 하고 다녔는지 나도 네 소설 보고야 알았는데.
 아, 네, 그렇죠, 혹시나 싶어서요.
 안녕히 주무시라고 인사를 한 뒤 전화를 끊는다. 그는 왁자지껄한 거리 한구석에 서서 담배를 꺼내 문다. 재빨리 피우고 들어가지 않으면 혜미에게 한 소리 들을 것이다. 하얀 연기가 폐부에 가득 찼다가 입 밖으로 뿜어지기를 수 차례, 다 타지도 않은 꽁초를 재떨이에 던지고 그는 가게로 돌아간다. 식당 안은 사람으로 가득해 바깥보다 곱절은 붐빈다. 용훈은 서로 등이 마주 닿을 듯 앉아있는 사람들 사이를 힘겹게 통과해 자리로 돌아온다. 혜미는 의자에 앉아 핸드폰을 보고 있다. 불판 위의 고기는 용훈이 나가기 전 그대로다. 한 점도 건드리지 않은 모양이다. 그는 자리에 앉으며 손에 집게를 든다.
 금방 왔네.
 기다릴까 봐. 그렇게 말하면서 용훈은 오늘 하루의 계획이 전부 허사로 돌아가고, 벌써 저녁이 늦었다는 것을 새삼 의식한다. 그가 어릴 적에 홀로 살아남았던, 그리고 나중에는 처녀작의 소재가 되어준 터널은 결국 찾아내지 못했다. 종일 강변을 오르락내리락했을 뿐이다. 유난히 오늘 혜미는 말이 없다. 그에 휩쓸리듯이 용훈은 영문 모를 의구심 때문에 마음 한 켠이 답답한 채로, 시야 또한 부옇게 흐려있었다. 그는 테이블 위에 놓인 빈 맥주병을 바라본다. 맥주 한 병 정도로는 취하기는커녕 오히려 감질이 날 뿐이다.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겠다. 그들은 무언의 약속이라도 한 듯이, 예전처럼 술을 양껏 마시지 않게 되었다. 아니, 함께 있지 않을 때는 그들도 얼마든지 마셨다. 그런데 마치 서로에게 취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을 두려워하게 된 것처럼, 어느새인가 함께 식사할 때는 소주도 양주도 마시지 않고 맥주만 조금 홀짝일 뿐이었다.
 용훈은 지금 상황이 바보스럽고 어리석다고 생각한다. 그는 여름에는 무덥고 겨울에는 얼어붙을 것 같은 다락방에서, 아무런 보장도 없이 학교에도 다니지 않으며 오로지 책을 읽고 글을 쓰기만 했던 기나긴 날들을 분명히 기억한다. 매해 여름마다 습기 때문에 방 안의 책들은 누렇게 변색되며 점점 휘어갔다. 그런 책으로 가득 채운 감귤 상자 위에 사촌이 물려준 낡은 노트북을 올려놓고, 미래는커녕 내일에 대한 의지도 없이 글을 썼다. 가장 괴로웠던 것은 다락방에 창문이 없다는 것도, 늘 수중에 천 원 한 장조차 없다는 것도, 몇 년째 세탁하지 않은 이불 위에서 노트북을 두들기다가 그대로 쓰러져 자야만 하는 현실도 아니었다. 사실 그 정도 불편은 괴로움이라고 부를만한 것도 아니었다. 아버지는 여전히 연락이 닿지 않아 생사를 알 수가 없다.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친정에 얹혀살며 정신이 없는 모양이었다. 큰댁은 늘 텅 비어있었고, 큰아버지는 새벽 근무로 바빠 용훈에게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그러니까 그가 하얗게 빈 종이뭉치와 책들 속으로 파묻히는 일에만 몰두했던 것은 아마도 외로웠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손을 뻗으면, 그것이 습관 때문이든 무엇 때문이든, 손을 마주 잡을 사람이 바로 눈앞에 있지 않은가. 용훈은 자신이 하루 종일 무언가에 홀려있었던 게 아닌가 생각한다. 강물이 바로 눈앞에서 흐르는 그 풍경 때문에 그는 넋이 나가 있었던 것이다. 번거롭다니, 사람은 풍족해지면 출신마저 잊게 되는 모양이다. 그는 테이블을 내려다보다가 입을 연다.
 우리 오랜만에 소주 마실까.
 그녀는 고개를 들어 용훈을 본다. 노을빛 아래에서는 짙은 갈색으로 보이던 눈동자가 가게 조명 밑에서는 평범한 검은색이다.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어서 그러냐는 듯 그를 잠시 바라본다. 곧 그녀는 그러자고 말한다.
 찾고 싶었던 걸 못 찾았으니, 술이라도 마셔야 하루가 결말이 나지.
 소주 두 병을 주문한다. 저녁마다 손님으로 가득 차는 이 식당에서 술은 한 번에 두 병씩 시켜놓는 것이 서로간에 편하다. 차가운 병을 쥐고 흔든다. 초록색 유리병 안에서 기포가 소용돌이친다. 혜미와 자신의 잔에 술을 따른다. 술잔을 부딪치고, 짠, 하는 작은 소리가 울린다.
 같이 소주 마시는 거 오랜만이네. 그녀가 말한다.
 취할 일이 한동안 없었으니까.
 어쩌다 그렇게 됐지?
 서로 다음 날 컨디션 걱정해야 하잖아.
 한 잔을 더 따른다. 처음 만나기 시작했을 무렵에는 물보다도 더 많이 마셨던 것이 술이다. 마치 드넓은 사막을 건너와 드디어 샘을 찾아낸 사람처럼, 혹은 대양에 표류해 자포자기로 바닷물에 손을 대려는 사람처럼 그들은 술을 마셨다. 오늘 용훈은 그때처럼 마실 작정이다. 가슴속에 비리고 들척지근한 뭔가가 얹힌 느낌을, 알코올로 다 씻어내려고 한다. 그녀 역시 비슷한 마음이다. 어떤 질문으로도 꺼내질 수 없고 형태 지어지지도 않는 답답한 심정에 부어 대듯이, 한 잔 한 잔 소주를 마신다. 어느새 고기는 너무 익어 오그라들고 있다. 그러나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다. 금세 한 병을 해치우고 다음 병을 딴다.
 벌써 옅게 안개가 끼기 시작하는 머릿속으로 그는 생각한다. 지난 3년 동안 그는 열심히 살았다. 창작 활동을 멈추지 않았고 청탁이 들어오는 원고마다 성심껏 결과물을 냈다. 뒤늦게나마 사람답게 살게 되어, 큰댁으로부터 독립하고 자신의 생계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자신은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순전히 운이 좋았기 때문에, 그는 누렇게 삭은 책들과 곰팡이로 가득 찬 다락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다락방에서 그가 했던 것은 오로지 반복되는 글쓰기뿐이었다. 끊임없이 비슷한 작문만을 되풀이했다. 어린 시절부터 시작해 그 방에 살게 되기까지의 모든 일을 조금씩 다른 시점으로, 불분명한 기억들은 허구로 보완하며, 낡은 노트북의 자판을 두들기면서 몇 번이고 고쳐 썼다. 그렇게 다시 쓰고, 다시 쓰다 보니 마침내 그는 운이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었다.
 마포대교 북단이 아니었는지도 몰라. 그녀에게 술을 따라주면서 중얼거리듯 말한다.
 그럼 어딘데? 글에서도 마포대교라면서.
 그러게.
 잔을 부딪치고 계속 마신다. 두 사람 모두 점점 혀가 풀리고, 생각의 결 또한 풀려간다. 이제는 숫제 불판 밑의 숯불을 빼고 술만 연신 마시고 있다. 한 잔, 한 잔이 비워질 때마다 흉금의 빗장이 열리는 것처럼 말이 많아진다. 까맣게 탄 고기를 방치해놓고, 테이블 위에는 술병만 늘어간다. 당장 오늘 있었던 일도 잊어버린 사람들처럼, 그들은 아무런 맥락도 주제도 없이 떠들며 즐거워한다. 시간은 취기 때문에 느낄 새도 없이 흘러가 버린다.
 요새는 즐거워지는 일에도 투자비용이 들어.
 가게가 너무 더워, 지금 몇 시야?
 테이블 위의 빈 병이 일곱 개가 될 즈음, 서로가 독백만 하고 있을 정도로 그들은 취해있다. 시간은 벌써 새벽 두 시를 넘었다. 택시를 타면 그만이지만 혜미가 택시 안에서 정신을 잃지 않을 거라고 확신할 수가 없다. 눈앞에 보이는 것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윤곽이 흩어져 있으니 용훈도 남 말할 처지는 아니다. 짧게 한숨을 쉰다. 알코올 냄새가 내장에서부터 올라오는 것 같다.
 집에 갈 기력은 있어?
 못 가, 너무 취했어.
 그럼 별 수 없지.
 정말로 별 도리가 없다. 음식값을 계산하는 중에도 혜미는 제대로 서 있지를 못했다. 용훈은 그녀를 부축하며 찬 바람이 신선한 바깥으로 나온다. 담배 한 개비가 절실하다. 그러나 사람과 팔짱을 끼고서 담배를 피울 수는 없다. 이리저리 흔들리는 골목을 걸으며 그는 모텔이든 어디든, 하룻밤 자고 갈 곳을 찾아 눈동자를 굴린다. 소주가 머릿속을 휘저어놓아서 다행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풀리지 않는 어떤 의혹에 대해 더는 고민할 의지도, 이유도 없었다.



 비좁고 담배 찌든 냄새가 퀴퀴한 모텔방에서, 아직도 벨트를 못 풀고 있냐고 혜미는 놀리듯이 말한다. 어지간히도 술에 취한 목소리다. 이렇게 유쾌한 그녀를 보는 것은 제법 오랜만이라고 용훈은 생각한다.
 가만, 나도 많이 취했어, 됐다.
 불 좀 꺼.
 불은 왜?
 우리 둘 다 너무 취해서 꼴이 웃겨.
 그렇게 말하고는 키득키득 웃는다. 무엇이 웃긴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도 따라서 소리 내 웃는다. 불을 끄고 이불 위로 올라간다. 김광균 시인의 <설야>라는 시에서는 여인이 옷 벗는 소리를 눈 쌓이는 소리에 비유했었는데, 전혀 연상되는 바가 없어 그는 오히려 우스개처럼 그 시구를 떠올린다. 술 냄새가 뭉근하게 피어오르고, 그들은 자조하는 듯한 웃음소리를 겹친다. 그러나 취기 때문에, 어둠 때문에 세상의 상하좌우가 온통 뒤틀린 것만 같다. 그는 어둠 속에서 길을 찾지 못하고 젠장, 하며 중얼거린다. 그때 혜미가 혼잣말이라도 하듯, 약간 음정이 나간 목소리로 저기, 하고 묻는다.
 정말 다리 밑에서 살았어?
 순간 등줄기가 오싹하다. 어둠 속에서 형태도 없는 어떤 공포스러운 것과 돌연 맞닥뜨린 기분이다. 대답할 말은 헐벗은 몸과 담배 냄새가 찌든 어두운 방 안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다. 머릿속은 알코올 때문에 해무가 잔뜩 낀 새벽 바다처럼 부옇고 불분명하다. 그 안쪽에서 몇 토막의 문장들이 아지랑이처럼 흔들거린다. 그것은 아마도 아주 오래전에 자신이 썼던 글이다. 이제는 어떤 이야기였는지도 모르겠으나, 자신의 기억을 계속 종이 위에 기록하는 바람에 ‘기억’하는 방법을 잃어버린 남자에 대한 성긴 조각들이다. 너무 많이 마셨어, 용훈은 자책하듯 입안에서 말을 되뇐다. 혜미는 아무 말이 없다. 애당초 대답을 기대하지 않은 것인지, 혹 그새 잠들어버린 것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다. 어깨 위에 얹힌 체온에 소름이 돋을 것 같다. 그는 여전히 맨몸뚱이로 버티고 앉은 채, 어디로 향해야 길이 나올지 알지 못한다.


끝.

Posted by Lim_
:

(2023/01/28)쥐구멍

글/소설 2024. 4. 21. 22:54 |

(2023/01/28)
쥐구멍


 5월 9일, 월요일, 오후 6시
 오후 2시가 조금 지나 깨어났다. 뱃속에 커다란 동굴이 뚫린 것 같은 굶주림에 잠에서 깼다. 위장에서 고통이 느껴질 정도였다. 입 주변에는 거품이 잔뜩 말라붙어있었다. 허기와 목마름 때문에 역으로 욕지기가 치밀어올랐다. 그대로 거실 바닥에서 몸을 웅크리고 속을 게워내자, 식도가 타들어가는 것 같아 구토를 멈출 수가 없었다. 나는 거실에서 끔찍한 소리를 내며 거의 투명에 가까운 위액을 뱉어냈다. 구토가 멈출 즈음이면 또 식도의 통증과 이물감 때문에 구역질이 올라오는 식이었다.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눈물로 젖은 얼굴을 들었다. 잠들기 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바닥과 벽의 경계에 뚫린 자그마한 구멍이었다. 딱 보기에 다 자란 생쥐 한 마리가 드나들 수 있을 만한 크기였다.
 의식이 물에 잠긴 것처럼 혼탁했다. 자신이 처한 상황을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없었다. 눈앞에 보인 구멍이 맥락도 없이 머리를 꽉 채웠다. 어린아이들이 처음 보는 장난감을 쥐어보는 것처럼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었다. 손가락이 어둠 속으로 쑥 들어갔다. 무언가 날카로운 것에 깎여나간 듯 까슬까슬한 구멍의 벽면이 손끝에 느껴졌다. 그것은 틀림없이 벽에 뚫린 쥐구멍이었다. 그리고 나서야 마침내 나는 상황을 살피기 시작했다. 탁상 위의 전자시계를 확인하고 날짜를 계산해보았다. 나는 사흘 동안 잠들어있었던 모양이다. 그 사실을 깨닫자 다시 뱃속에서 맹렬한 허기가 들끓기 시작했다. 사흘이나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잠들어있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어쩐지 내 것 같지 않은 사지를 억지로 움직여 냉장고까지 기어갔다. 우유, 햄 통조림, 식빵, 달걀부터 냉동 밥까지 닥치는 대로 입안에 욱여넣었다. 한참을 아귀처럼 먹어댄 뒤에야 조금 안정이 되는 듯했으나, 다시 구역질이 올라왔다. 두 번 정도 게워내고 또 먹어치우는 짓을 반복했다. 그리고서 드디어, 내가 살아있다는 사실에 대해 생각해볼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일단은 좀 누워야겠다.

 같은 5월 9일, 월요일, 밤 11시
 한참을 매트리스 위에 누워 정신을 가다듬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머릿속의 혼란스럽던 생각들이 가닥이 잡히기 시작했다. 거실 탁상으로 가 수첩을 뒤졌다. 잠에서 깨어나기 전 마지막으로 쓴 것은 5월 6일의 기록이었다. 대단한 것은 없었다. 주된 내용은 내가 어떤 약을 몇 그램이나 삼킬 것인가에 대한 것이었다. 수첩에 적힌 수 많은 화학성분들의 이름을 가만히 읽어내려갔다. 그날 내가 삼킨 약은 트리아졸람 0.25mg 정제 스물한 정과 수십 알이나 되는 리튬, 쿠에티아핀푸르마산염 등이었다. 그밖에, 문장에서 나타나는 산만한 정신상태와 사후세계에 대한 강한 부정 따위를 확인할 수 있었다. 앙드레 지드가 삶을 긍정하기 위해 썼던 글까지 인용하며, 난삽한 문장으로 내 ‘삶이 약을 삼키고 잠드는 순간 완전히 끝나’버릴 것이라고 적어놓았다. 그날 저녁 내가 약물의 성분과 용량에 대해 수첩에 써놓았던 것은 기억한다. 그러나 죽음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늘어놓은 부분은 기억에 없다. 아무래도 약 기운 때문에 몽롱할 때 쓴 것 같다.
 그런데 지금, 내가 실패했다는 사실에 대해 전혀 현실감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이상한 일이었으나 특별히 유감스럽지도 않다. 며칠이나 잠들어있다가 깨어났기 때문인지, 심한 피로감과 두통 때문에 마냥 눕고만 싶다. 팔다리가 사시나무처럼 떨려서 몸을 움직이기도 힘들다. 좀 더 쉬고 나면 내가 처한 상황을 보다 감정적으로 느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거실에 게워놓은 오물을 치워야겠으나 도무지 몸에 힘이 없다. 한숨 자고 난 뒤에 치운다고 큰일이 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벽의 구멍은 난데없이 어쩌다가 생긴 것인지 모르겠다. 잠들어있던 사흘 사이에 쥐라도 들락거리게 된 것일까.

 5월 10일, 화요일, 밤
 두통과 피로감이 가시질 않는다. 밤에 잠을 자기는 했지만, 내내 혼란스러운 꿈만 꿔서 전혀 개운하지 않다. 억지로 몸을 움직여 거실을 청소했다. 청소라고는 해도 휴지로 바닥을 닦아냈을 뿐이다. 오물을 닦은 휴지를 처리하기가 귀찮아 벽에 난 쥐구멍에 전부 쑤셔 넣어버렸다. 집안의 쓰레기통들은 진즉에 가득 찼다. 지난 삼 개월간 단 한 번도 집 밖에 나가지 않았으니, 쓰레기를 처리할 방법도 없었다. 만약 내게 거리로, 아니, 현관 앞의 쓰레기장까지만이라도 나갈 용기가 있었더라면 굳이 남아있던 약으로 자살을 시도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바깥세상에는 보다 확실하게 죽을 수 있는 방법이 수도 없이 많다. 그런데 바로 그런 사실 때문에 나는 밖에 나가기를 두려워하는 것이다. 나열해보자면, 건물 밑을 지날 때는 옥상에서 벽돌이 떨어져 내릴 것 같다. 거리를 건널 때는 느닷없이 자동차가 돌진해올 것 같다. 그리고 길에서 지나치는 행인이 갑자기 칼을 쥐고 덤벼들 것 같다. 그런 공포가 늘 나의 발을 묶고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한다. 전부 말도 안 되는 망상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다. 그러나 알고 있는 것과 극복할 수 있는 것은 다른 문제다.
 평생을 이런 어처구니없는 공포에 시달려온 것은 아니다. 반년 전까지만 해도 나는 어엿한 직장인이었다. 중소 IT기업에서 2년을 일했다. 아니, 어엿한 직장인이라는 말은 취소해야겠다. 시쳇말로 나는 고문관이었다. PC용 웹사이트를 모바일 사양으로 변환하는 일을 2년이나 계속했으나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성과를 낸 적이 없다. 늘 기한에 늦거나 세세한 부분에서 오류를 냈다. 직장에서 나의 주 업무는 시말서를 쓰고 사죄하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하늘이 무너지지는 않으려나, 땅이 꺼져버리지는 않으려나 하고 습관적으로 좌절하곤 했는데, 사실 이것이 나의 가장 한심한 성질이었다. 보다 나은 인간이 될 각오를 하기보다는 세상이 끝장나기만을 바랐던 것이다. 그러니 5월 6일에도, 아니, 그만두자, 이제는 삼킬 약도 남지 않았다.
 아무튼, 그렇게 죽음이 찾아오는 몽상만 하며 살다 보니 상상은 어느새 망상이자 병이 되어버렸다. 어느 때고 죽음이 닥쳐올 수 있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뿌리를 박자 이번에는 그것이 두려워진 것이다.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우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공기가 싸늘하고 하늘이 화창하던 11월 초순, 나는 출근준비를 마치고 현관을 나섰었다. 그런데 그 주택가의 골목 한가운데에서 도무지 움직일 수가 없었다. 골목을 걷는 사람들 모두가 내게 지독한 악의를 품고 있었다. 무어라고 중얼거리는 소리마저 들리는 듯했다. 총칼로 무장한 적군들 앞에 맨몸으로 내던져진 기분이었다.
 아무래도 몸에 기력이 없으니 기분까지 우울해진 모양이다. 회사 대신 병원에 다니기 시작한 이래, 당시의 일은 어지간해서는 떠올리지 않으려고 노력해왔다. 그러나 지금같이 수첩에 온갖 일을 적고 있자면, 생각이 제멋대로 이어진다. 실상 오늘 한 일이라고는 거실을 닦은 휴지를 쥐구멍에 욱여넣은 뒤 해가 질 때까지 넋 놓고 앉아있던 것뿐이다. 모아뒀던 약을 전부 삼켜버렸으니, 이제는 자려고 해도 쉬이 잠들 수가 없다. 트리아졸람 없이 잠드는 방법을 몸이 잊어버린 것만 같은 느낌이다.
 죽을 작정으로 먹었던 약은 치사량도 아니었던 모양이고, 이제 무얼 해야 할지 모르겠다.

 5월 11일, 수요일
 쓰레기통 하나를 비웠다. 밖에 나간 것은 아니다. 새벽에 잠이 오지 않아 거실 탁상 옆에 널브러진 듯 누워있었다. 집안은 어스름했고 곳곳에 그늘이 져 있었다. 그림자 안쪽에 새까맣게 뚫려있는 쥐구멍은 계속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한 시간, 어쩌면 두 시간 동안 서로 쳐다보고만 있었다. 전날 욱여넣은 휴지 생각이 났다. 만약 구멍 안에 쥐가 살고 있다면, 내가 한 일 때문에 입구가 막혀 오도 가도 못하고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어 쥐구멍까지 기어가 손가락을 넣어보았다. 그런데 구멍은 막혀있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쥐들이―정말 쥐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그 지저분한 휴지를 갉아먹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기묘한 흥미를 느꼈다. 거실 구석에 놓여있는 쓰레기통을 끌어와 안에 든 것들을 조금씩 꺼내, 쥐구멍 안으로 밀어 넣었다. 처음에는 어딘가에 걸리는 듯 잘 들어가지 않더니, 약간 힘을 주자 쓰레기는 구멍 안쪽으로 밀려 들어갔다. 나는 다소 멍한 상태로 쓰레기통의 내용물을 쥐구멍에 집어넣는 일을 반복했다. 어쩌면 꿈을 꾸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 작은 입구 안쪽에 상당한 크기의 공간이라도 있지 않은 한, 쓰레기통의 내용물이 전부 들어갈 리가 없다. 그제야 나는 자살시도 이후 처음으로, 내가 이미 죽은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느꼈다. 약을 삼킨 뒤 나는 생명을 잃었고, 영혼만이 이 거실에 붙잡힌 채 정체불명의 쥐구멍에 대한 환상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그 구멍은 현실감이 없었다.
 텅 빈 쓰레기통을 확인하고 나서 다른 생각도 해보았다. 5월 6일에 삼켰던 약이 치사량은 아니었으나 뇌와 신경계를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놓기에는 충분한 용량이었을 수도 있겠다고 말이다. 그러나 내가 이미 죽었든 정신이 망가졌든, 증명할 방도가 없다. 손에 오물이 묻어 끈적거렸다. 나는 개수대에서 손을 닦고, 다시 쥐구멍 앞으로 돌아와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다. 휴지며 약봉지며 달걀 껍데기 따위를 잔뜩 집어삼킨 구멍은, 전보다 입구가 커진 것처럼 보였다. 나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머리로 이해하기에는 지금 겪고 있는 사태가 너무 이상스러웠다. 결국에는 스스로 판단하기를 포기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저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일어나는 일을 수첩에 적어놓기로만 했다. 창문 밖으로 아침 해가 뜨고 있다. 그리고 거실의 쓰레기통은 분명히 텅 비었다. 쥐구멍은 전보다 넓어진 것 같지만 분명하지는 않다.
 처음 직장을 구했을 때 품었던 것과 비슷한 불안을 느낀다. 내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유전자에 대한 근심과 불안이다. 친가와 외가를 통틀어 가까운 친지 중 알코올중독자와 조현병 환자가 넷이나 된다는 사실이 늘 내 가슴 속에 불발탄처럼 묻혀있다.

 5월 12일, 목요일
 깜빡 잠들었나 보다. 깨어나니 집안이 환했다. 나는 거실 탁자 밑에 나동그라져 자고 있었던 모양이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 아래서 보니, 거실은 전날 생각했던 것만큼 기괴한 분위기가 아니었다. 어쩌면 새벽이라는 시간이 가진 특유의 불길함 때문에, 별 것 아닌 일을 유난스럽게 생각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정신을 보다 맑게 만들어야겠다. 걸레를 빨아 아직도 시큼한 냄새가 나는 거실을 청소했다. 찬장에서 라면을 꺼내 끓여 먹었다. 5월 9일에 깨어나 냉장고에 든 것을 손에 잡히는 대로 먹어치운 이후 처음으로 하는 식사였다.

 5월 13일, 금요일
 쥐구멍이 점점 커지고 있는 게 분명하다. 더 이상 쥐구멍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넓이다. A4용지로 겨우 입구가 가려질 정도다. 이 정도 크기라면 건물 외벽까지 닿아도 이상하지 않은데, 지하로 쑥 꺼진 울퉁불퉁한 통로가 보일 뿐이다. 건물에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닌가 걱정이 된다. 회사에 다닐 때 입던 와이셔츠를 구멍에 구겨 넣고 달력을 뜯어내 입구를 막았다. 바보 같은 생각이라는 것은 알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고 보니 학생 때나 읽던 공포소설들이 계속 머릿속에 떠오른다. 러브크래프트나 스티븐 킹의 작품 따위 말이다. 그들의 소설은 대부분이 어딘가 왜곡된 현실에서 솟구쳐나오는, 실제로 있어서는 안 될 것들이 주인공들의 생명을 위협하는 공포스러운 이야기다. 그런 일이 현실에서 일어날 수는 없겠지만, 이미 이 쥐구멍 때문에 내가 겪고 있는 상황이 현실의 법칙을 따르는 것인지도 불분명해졌다.
 창문 밖은 어두컴컴하고 비가 내리고 있다. 어제 햇살이 밝았던 것이 거짓말 같다.

 5월 14일, 토요일
 이틀째 비가 멎지 않는다. 나는 하루 종일 탁상의자에 앉아 달력 낱장으로 막아놓은 쥐구멍과 창문을 번갈아 바라보고만 있다. 밖에서 울리는 빗소리가 마치 구멍 안쪽에 있는 무언가가 달력을 툭, 툭, 하고 건드리는 소리처럼 들린다. 삶이 끝나고 자유로워지리라는 기대로 일을 저질렀는데, 성공하지 못한 지금 내가 하는 일이라고는 편집증 환자처럼 신경을 곤두세우고 막힌 쥐구멍을 바라보는 것뿐이다. 구멍에서 빗물이라도 차올랐는지 달력의 아랫부분이 젖은 듯하다. 정체를 예측할 수 없는 무언가가 달력을 찢고 거실로 기어 나오리라는 생각이 잦아들지를 않는다. 빗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릴 때마다 어깨가 들썩 솟을 만큼 놀라곤 한다.
 몸 상태는 여전히 좋지 않다. 제때 밥을 챙겨 먹지도 않고, 아무래도 신경과민이 있는 것 같다. 종일 의자 위에 쭈그려 앉은 자세로 있으려니 온몸의 관절이며 근육이 아프다. 내내 긴장한 채로 쥐구멍을 향해 거북이처럼 목을 빼고 있으니, 머리통이 떨어질 것 같다. 그래, 차라리 이대로 머리가 목에서 뚝 떨어져버리면 좋을 텐데. 결국에는 이렇게 되었다. 나는 지금의 나와 아주 닮은 사람을 한 명 알고 있다.
 막내 삼촌은 아버지보다 열 살 어렸다. 큰아버지와 아버지, 삼촌 삼 형제 가운데 혼자만 성격이 유별난 편이었다. 사실 유별나다기보다는 이상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내가 어릴 때부터 그는 항상 직업도 없이 놀고 있었다. 큰아버지 댁에 있는 자신의 좁은 방에서 나오는 일도 거의 없었다. 그놈은 글러먹었어. 삼촌 이야기가 나오면 아버지는 늘 그렇게 말하곤 했다. 추석이었는지 설날이었는지, 큰댁에 명절을 쇠러 갔을 때의 일이다. 친척들로 바글거리는 집안에서 도망이라도 친 것인지 삼촌은 외출하고 없었다. 당시 나는 중학생이었을 것이다. 저녁이 되어도 삼촌은 돌아오지 않았다. 아버지를 포함한 어른들은 한참 화투를 치다가 판을 접은 뒤 술을 마시고 있었다. 지루했고, 아무도 나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나는 슬쩍 거실에서 나와 삼촌의 방인 뒷방으로 향했다.
 문은 잠겨있기는커녕 살짝 열려있었다. 그대로 밀자 습기 차고 담배 찌든 냄새가 퀴퀴한, 어둡고 좁은 방이 눈에 들어왔다. 낡은 매트리스 위에 이불이 흩어져있고, 장롱 하나와 오래된 TV가 놓인 단출한 방이었다. 바닥 한구석에는 새것으로 보이는 일제 담배 세 갑이 쌓여있었다. 그러나 삼촌이 어떤 생활을 하고 있는지를 알려주는 것은 그따위 것들이 아니었다. 매트리스의 반대쪽 벽면에야말로 삼촌의 정신이 그대로 투영되어있었다. 그곳에는 붉은색, 노란색, 파란색, 검은색, 청록색 등 온갖 색깔의 마커로 쓴 단어들이 벽지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문장을 이루고 있는 것은 없었고, 각기 다른 색깔로 된 단어들뿐이었다. 그리고 어떤 단어들은 검은색 선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붉은색 ‘사랑’과 노란색 ‘증오’가 연결되어 있었고, 청색 ‘보다’와 보라색 ‘기다리다’가 선으로 이어져 있는 식이었다.
 아마 삼촌은 하루 종일 그 좁은 방안에서, 매트리스에 앉아 자신이 만든 계산식―나는 그것이 계산식이 분명하다고 생각한다―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을 것이다. 마치 직접 보기라도 한 듯 그런 장면이 머릿속에 선하다. 가끔 단어들을 추가하거나 수정하고, 새로운 공식을 발견하면 같은 개념끼리 선으로 묶곤 했겠지.
 나는 그때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날을 기점으로 삼촌이 나의 육친이라는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리려 했다. 솔직히, 나는 친인척 중 그다지 대화도 해본 적 없는 삼촌에게서 가장 큰 동질감을 느끼곤 했었기에 더욱 그렇게 해야만 했다.
 나는 자신이 삼촌처럼 미쳐버렸다는 것을 긍정하려고 이런 글을 쓰는 것인가? 그러나 어찌 되었든 건강한 사람은 자살을 시도하지 않고, 시계의 시침이 몇 바퀴씩 도는 동안 벽에 발라놓은 달력만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지도 않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아직 스스로의 행위와 기억들을 수첩에 옮겨적을 정도의 제정신은 유지하고 있다. 그렇게 펜을 놀릴 때만은 빗소리인지 구멍에서 나는 소리인지 때문에 시도 때도 없이 동요하지 않는다. 다만, 그 제정신을 유지한다고 해서 앞으로 무얼 할 수 있다는 말인가.

 5월 16일, 월요일
 내 방에 사람이 있다. ‘있는 것 같다’가 아니다. 그는 하나뿐인 방을 차지하고서 지금 잠들어있다. 그가 나타난 것은 바로 하루 전이다. 나는 탁상의자 위에서 무릎을 끌어안고 앉아 오뚝이처럼 몸을 흔들고 있었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는 도무지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온 집안이 습하고 어두웠다. 마음속의 불길한 감정을 내쫓을 수가 없었다. 그때 작은 짐승 같은 것들이 거실 벽 속에서 내달리는 소리를 들었다. 환청이 아닌가 의심스러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마침내 일이 벌어지겠구나, 싶어 오히려 침착해졌다. 의자 위에서 나는 달력으로 막아놓은 쥐구멍을 가만히 살피고 있었다. 달력은 이미 반쯤 젖어 너덜너덜한 상태였다. 곧 안쪽에서 무언가가 젖은 달력을 찢고 나왔다. 쥐인가 싶었으나 아니었다. 그것은 지저분하게 얼룩이 지고 곰팡이까지 슬기 시작한 흰색 와이셔츠였다.
 내가 어떻게 그리 침착할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와이셔츠는 슬며시 공중으로 떠오르더니 깃발이라도 되는 것처럼 좌우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어두워서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으나, 와이셔츠는 깡마르고 뼈가 불거진 손에 붙잡혀 흔들리고 있었다. 아무리 보아도 말이 되지 않는 상황에 나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전혀 생각나는 바가 없었다. 나는 그저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 커다란 쥐구멍에서 뼈와 가죽밖에 없는 나체의 남자가 달력을 찢으며 기어 나오는 것을 보고 있었을 뿐이다. 그 비쩍 마른 남자는 서커스단의 곡예사처럼 온몸을 뒤틀며 어깨너비도 되지 않는 구멍으로부터 천천히 빠져나왔다. 몸이 전부 거실로 나오자 그는 탈진한 듯이 바닥에 풀썩 엎어져 버렸는데, 오른손은 여전히 지저분한 와이셔츠를 백기라도 되는 듯 흔들고 있었다.
 의자 위에서 그 모든 과정을 지켜보고 있던 나는 홀린 듯이 그 남자에게 다가갔다. 거실 위에 나체로 늘어져 있는 그의 몸은 비참할 정도로 바싹 말라 있었다. 등은 갈비뼈와 척추가 전부 드러나 보였고, 하체 또한 둔부 없이 골반이 그대로 대퇴부에서 정강이로 이어져 있는 것만 같았다. 이것이 도저히 살아 움직이는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다만 그는 여전히 와이셔츠를 좌우로, 곧 실이 끊겨 무너져내릴 꼭두각시 인형처럼 흔들고 있었다. 말이 통할지 어떨지는 알 수 없었으나 나는 그에게 단 한 가지 물어볼 것이 있었다. 나는 그에게 누구냐고 물었다.
 에곤.
 마지막 숨을 쥐어 짜내는 듯한 한마디와 함께 마침내 그의 오른팔마저 바닥에 널브러졌다. 그러면서 와이셔츠를 쥐고 있던 오른손이 펼쳐졌는데, 그 손아귀에서 흰색 알약 이십여 정이 가벼운 소리를 내며 바닥에 쏟아졌다.
 나는 이 남자를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한참을 고민했다. 여전히 나는 밖에 나가지 못하고, 경찰이나 구급대원을 부르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어떻게 상황을 설명하든 결국에 나는 집 밖으로 끌려나가고 말 것이다. 끝내 내가 한 일은 에곤이라는 남자를 거실에서 방까지 끌어다가 매트리스 위에 눕혀놓는 것이었다. 다시 깨어나기는 할지 의문이었으나, 다른 방법이 없었다. 처참할 정도로 마른 몸뚱이에 이불을 덮어주고 거실로 나왔다. 그리고 에곤이 손에서 놓친 알약들을 들여다보았다. 본 적이 없는 약이었다. 쓸어모아서 비닐로 된 약봉지에 담아놓았다.
 그 뒤로 하루가 지나도록 에곤은 깨어나지 않고, 나는 찢어진 달력이 너덜거리며 붙어있는 구멍을 그냥 내버려 두고 있다. 이미 사람 하나가 그곳에서 기어 나왔다. 더 이상 무슨 일이 벌어지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5월 18일, 수요일
 에곤은 죽지 않았다. 그는 오늘 새벽에 잠에서 깼다. 거실에서 어두운 천장을 보며 누워있던 나는 그가 방문을 열고 나오는 소리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뼈 위에 가죽만 입혀놓은 것 같은 나체의 남자가 비척거리며 거실에 나타나는 장면은 마치 산송장이 억지로 사지를 뒤틀어가며 걷기 위해 노력하는 것처럼 기괴했다. 나는 그에게, 옷장에 남는 옷이 있으니 꺼내 입으라고 했다. 그는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되돌아갔다. 에곤과 의사소통이 가능하다는 것이 이상하게 생각됐다. 너무나도 퀭하고 병색이 짙은 얼굴이었으나, 그의 눈동자 색과 생김새 따위로 보아 에곤은 외국인이 분명했다. 아마도 유럽계인 것 같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환각이나 망상일 수 있는데, 하나하나 따져보는 것도 실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에곤이 가져온 약을 담아둔 봉투를 서랍에서 꺼냈다가, 도로 집어넣었다.
 마른 몸에 비해 너무 큰 옷을 입은 그는 다소 우스꽝스러워 보였다. 나는 냉장고에서 빵과 우유를 꺼내 그에게 건넸다. 내가 남의 걱정이나 할 상황은 아니었지만, 그토록 심하게 마른 사람을 그냥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다. 그는 사양도 하지 않고 먹기 시작했다. 그가 식사를 하는 동안 나는 몇 가지 궁금한 것을 물어보았다. 에곤은 거리낌 없이 대답했다.
 그러니까, 누구시라고요?
 에곤이요.
 어디서 왔습니까?
 툴른에서 왔습니다.
 거기가 어딥니까?
 그야 구멍 밑이지요.
 내 말은… 알겠어요, 가족은 있으세요?
 모두 병으로 죽었습니다.
 저런.
 당신은 누구신가요?
 나는, 그게, 나도 잘 모르겠군요.
 잘 알겠습니다.
 내가 말문이 막혀있는 사이, 그는 빵과 우유를 아주 느리게, 그러나 남김없이 먹어 치웠다. 그리고는 해가 막 뜨기 시작하는 창문 밖을 내다보았다. 그제야 나도 비구름이 걷히고 다시 하늘이 밝아오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에곤은 나에게 종이와 연필이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탁자 위에 있던 A4용지 다발과 볼펜을 내주었다. 연필은 없었다. 에곤은 군말 없이 물건을 받더니 창문으로 다가가 종이에 무언가를 끄적였다. 나는 며칠 사이 일어난 일들 때문에 갑자기 피로가 몰려오는 것을 느꼈다. 생각할 것은 많았지만 고민할 기력이 없었다. 창문 앞에 달라붙어 종이와 펜으로 무슨 일인가에 열중하고 있는 에곤은 그리 위험한 사람 같지는 않다. 방으로 가서 잠을 자야겠다.

 같은 5월 18일, 수요일
 저녁에 일어났다. 거실로 나와보니 탁자 위에는 펜화가 그려진 종이 수십 장이 쌓여있었다. 그림은 모두 똑같은 구도였다. 창문에서 내다보이는 풍경을 수십 번이나 반복해 그린 것들뿐이었다. 에곤은 아직도 창문 앞에서 새 종이에 풍경을 그리고 있었다. 뒷모습만 보았을 뿐이지만, 어쩐지 새벽에 보았던 것보다 살이 조금 붙은 것 같았다. 생각해보니 자살시도 이후로 보름 정도 제대로 된 식사를 한 것이 손에 꼽을 정도인데, 남을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내 두 팔을 보니 새삼 그것은 말라붙은 나무막대기처럼 보였다.
 아직도 거실에 휑하니 뚫려있는 쥐구멍 앞으로 다가갔다. 찢겨 너덜너덜한 달력을 전부 뜯어냈다. 구멍은 명백하게 전보다 더 커져 있었다. 그럴 마음만 든다면 별 무리 없이 구멍을 향해 투신할 수도 있을 정도였다. 나는 갑자기 생각난 바가 있어 에곤을 불렀다. 그는 그림 그리는 것을 멈추고 내 쪽으로 다가와 앉았다.
 당신이 들고 온 약은 뭡니까?
 무슨 약이요?
 당신 오른손에 쥐고 있던 것 말이에요.
 그건 바르비탈입니다.
 바르비탈?
 그러니까 일종의 백기 같은 거죠, 항복의 표시라든가….
 와이셔츠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알고 있어요, 여하간 말하자면 쥐구멍으로 들어갈 때 필요한 겁니다.
 왜 그걸 갖고 있었습니까?
 그 질문에 에곤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잠시 내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는 말을 고르는 듯 입술을 조금 달싹거리며, 무언가를 고민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다소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그러나 중요한 것을 설명하는 듯 힘주어 말하기 시작했다.
 삶이든 가족이든, 강제로 주어진 것들은 하나 같이 믿을 수가 없어요, 도망을 꿈꾸는 게 당연한 겁니다.
 그렇게 말하고 에곤은 펜화를 그리러 돌아갔다. 나는 작은 동굴처럼 시커먼 입을 벌리고 있는 구멍을 오래도록 내려다보았다. 몇 가지 생각을 기록해두려 한다. 스스로 쥐구멍에 들어갔다던 에곤은 왜 다시 세상으로 나오게 되었을까. 그는 왜 바르비탈을 삼키지 않고 손에 쥐고만 있었을까. 나는 같은 이름을 가진 불우한 화가의 이야기를 알고 있다. 그는 금지된 것만 바라다가 손에 있던 것마저 전부 빼앗긴 어처구니없는 인간이었다. 그리고 다른 생각은, 왜 하필이면 이 쥐구멍이 내 거실에 생겨난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다. 5월 9일에 깨어난 뒤로 지금까지 줄곧 혼란스러운 꿈을 꾸는 것만 같다. 영화 <엔터 더 보이드>에서 주인공이 사망한 뒤 다시 태어나기까지의 혼탁하고 음울한 환각을 직접 겪고 있는 기분이다. 그 영화의 마지막에서 주인공은 ‘대롱 같은 통로’를 통과해 다시 태어났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금 알아챈 것인데, 근 일주일 정도 허기를 느끼지 못하고 있다.

 5월 24일, 화요일
 달력은 오늘이 화요일이라고 말하고 있다. 에곤 덕분에 집에 쟁여두었던 A4용지가 동이 났다. 이제 그는 이미 그린 그림들의 뒷면에 새로운 그림을 그리고 있다. 새로운 그림이라고는 하지만 여전히 창밖으로 보이는, 똑같은 풍경을 계속해서 그릴 뿐이다. 냉장고 안의 음식과 찬장의 라면까지 꺼내먹으면서 그는 점점 건강해지고 있다. 나는 거실에 송장처럼 늘어져서 벽에 난 커다란 구멍을 마냥 들여다보고 있다. 내가 입던 옷들은 에곤에게 제법 잘 어울린다.

 5월 30일,
 에곤이 내게 결혼한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없다고 했다. 그러자 그는 내가 부럽다고 말했다. 그리고 종이를 사러 밖에 나가야겠다고 했다. 나는 탁자 위에 있는 지갑을 가져가라고 했다. 그 지갑은 너무 오랫동안 한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에곤은 이미 내가 회사에 다닐 적에 입던 바지와 셔츠를 입고 있다. 전보다 살집이 붙은 얼굴은 틀림없이 어딘가에서 본 일이 있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그런 것은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니다. 나는 점점 몸의 기력이 쇠하고 팔다리가 얇아지는 것을 느낀다. 가슴에 손을 대면 내 갈비뼈들의 모양을 손끝으로 짚어볼 수 있다. 아마 밥을 먹지 않아서 그렇겠지. 나는 가장 적절한 순간을 기다리고 있다. 꿈은 그저 시간이 흐른다고 깨는 것이 아니다. 꿈에서 어떤 징조가 나타나거나 사건이 벌어질 때 사람은 깨어나는 것이다.

 5월 33일
 집안이 에곤의 그림들로 가득 찼다. 요새 그는 밖에서 그림을 그린다. 어느새 이젤과 캔버스까지 구해 들고서 돌아다니는 모양이다. 거실과 방에는 이미 완성되었거나 작업 중인 캔버스가 잔뜩 쌓여있다. 오늘 나는 커다란 구멍을 쳐다보면서 에드거 앨런 포의 <M. 발드마르 사건의 진실>에 대해서 생각했다. 최면에 걸린 채로 죽은 발드마르는 죽어있는 동안, 그러니까 최면에 걸려있는 동안, 두 가지 상태가 중첩되어있는 동안 어디에 있었을까? 그는 죽음이라는 상태에 있던 것일까? 그러나 최면에 걸린 그의 몸은 썩지 않았었고… 아니, 여하간 중요한 점은 최면에서 깨어난 순간 발드마르의 몸이 순식간에 썩어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가 마지막으로 외친, 비명인지 환성인지 모를 “dead! dead!”라는 절규가 귀에서 쟁쟁 울리는 것 같다.
 에곤은 최근 혈색이 좋다. 그가 웃는 걸 본 것 같기도 하다.

 38일
 나는 오늘 에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물어보았다. 그는 요새 그림을 그리느라 너무 바빠서 나와 대화를 나눌 시간도 없는 듯하다. 나는 쥐구멍 안에 무엇이 있었느냐고 물었다. 그는 구멍 안에 ‘무엇’ 따위는 없다고 했다. 그 대답을 듣자 번역이 잘못된 외국 소설을 읽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직접 다녀온 사람의 말이니 생각해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밖으로 나올 수 있었느냐고 묻자 에곤은 웃었다. 그야 출구가 있었으니까요. 질문이고 대답이고 지리멸렬해서 더는 의미가 없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에곤은 몇 마디를 덧붙였다. 그리고 나는 바르비탈을 삼키지 않았습니다, 삼키기에는 원망할 것이 많았습니다.
 에곤이 처음 쥐구멍에서 나왔을 때 흰색 와이셔츠를 흔들던 것은 백기를 흔드는 것과는 다른 의미였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은 화가 날 때 남의 옷깃을 쥐고 흔들어대기도 하니 말이다.

 4?일
 요즘 에곤은 나를 쳐다보며 그림을 그리고 있다. 내가 움직이든 움직이지 않든, 그다지 신경 쓰는 것 같지는 않다. 나 역시 이제 에곤에 대해서 아무 생각이 없다. 나는 구멍의 새까만 입구를 쳐다보며 삼촌에 대한 생각, 병원에 대한 생각, 바깥세상의 위협에 대한 생각을 했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사실이라면, 시작부터 내 인생의 절반은 어긋나 있었다. 그리고 나머지 절반은 5월 6일 자살을 결심했을 때 완전히 무너져내렸다. 예전에 <랜트>라는 아주 기괴한 소설을 읽은 적이 있다. 과거로 시간여행을 반복하며 계속해서 자기 자신을 낳는 위험천만한 소설이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그런 것이 생각났느냐면, 그 책을 읽을 때 머릿속에 드는 유일한 생각은 주인공의 저주 같은 순환을 끊어버리고 싶다는 것뿐이었기 때문이다.
 서랍 안에서 꺼낸 바르비탈은 세어보니 스물한 알이었다. 나도 모르게 웃음소리를 내고 말았다. 나는 이제 이상한 환각을 끝내고 그 ‘무엇’도 없는 곳으로 향할 것이다.

 5월 6일, 금요일
 이것이 내 마지막 기록이 되었으면 하고 바란다. 탁자에는 초봄에 모아 놓은 트리아졸람 0.25mg 정제 스물한 알과 물 한 컵이 준비되어있다. 내가 지금 정상적인 심리상태가 아니라는 것은 나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삼 개월이 넘도록 집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으면서 제정신을 유지하는 것이 더 이상한 일이다. 지금 내가 가장 바라는 것은,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 이 삶이 약을 삼키고 잠드는 순간 완전히 끝나버리는 것이다. 트리아졸람만으로는 부족할지도 모르기 때문에 리튬과 쿠에티아핀푸르마산염도 모을 수 있는 만큼 모아놓았다. 단번에 삼키면 이 중 무엇이라도 효과가 있겠지. 그러고 보니 약품의 성분과 효능에 필요 이상으로 호기심을 보이는 것도 증상 중 하나라고 의사가 말했었는데, 아니다, 이야기가 지리멸렬해지고 있다. 나는 곧 모아놓은 약을 전부 삼키고 바닥에 누울 것이다. 억울하거나 미련이 남는 일은 없는 듯하다. 다만 사후세계 같은 것이 느닷없이 내 눈앞에 튀어나오는 일만은 없었으면 한다. 앙드레 지드는 <나에게는 육체에서 떼어낸 영혼 같은 것은 필요 없다>고 말했다. 그것은 백번 옳은 말이고, 만약 영혼이나 내세 같은 것이 있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인간에 대한 모독이다. 또 사설이 길어지고 있다. 이 글이 더 이상 엉망진창이 되기 전에 이만 끝을 내야겠다.


끝.

Posted by Lim_
:

(2023/01/12)
나는 이불을 개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침대 위에 이불을 갠다. 나는 내가 이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이 자랑스럽다. 3년 전 나는 한가지 목표를 정했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이불을 갠다는 목표 말이다. 그러나 목표를 정하기만 했을 뿐, 2년이 넘어가도록 나는 단 한 번도 이불을 갠 일이 없었다. 이불은 항상 침대 위에 널브러져 있었고 겹겹이 파도치는 그 곡선 주변으로 소주병과 맥주병 따위가 조화롭게 굴러다녔다. 곳곳에 책과 음반 따위가 무질서하게 쌓여있었고 무언가를 무너트리지 않고 걸으려면 몹시 주의를 기울여야만 했다. 방뿐만이 아니라 온 집안이 그런 꼴이었다.

 내가 무엇을 하는 사람이었더라? 나는 책을 쓰기도 했고 대학로에서 베이스를 연주하기도 했고 가끔은 조각을 깎기도 했다. 돈이 필요하면 아무런 경력도 되지 못할 아르바이트를 했으며 그마저도 싫증이 나면 친구들에게 돈을 빌려 그들이 다시는 내 전화를 받지 않도록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나는 술을 마셨다. 술을 마시는 건 중요한 일이었다. 나는 나 자신을 해치지 않기 위해 술을 마셨다. 길을 걸을 때 마주치는 통행인의 눈동자를 살인마의 눈으로 착각하지 않기 위해, 은행에 들어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접수원 앞에서 굳어버리지 않기 위해, 전철에 탔을 때 한 정거장마다 뛰어내려 숨을 몰아쉬지 않기 위해 말이다. 굳이 술일 필요는 없었다. 대마든 LSD든 버섯이든 상관없었고, 실제로 시험해보기도 했다. 그러나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다는 것은 꽤 중요한 일이다. 나 같은 사람이 교도소에 들어가서 좋을 일이 뭐가 있겠는가. 그렇기에 술은 합법이라는 점에서 중요했다.

 아무튼 나는 술을 마셨다. 책을 쓸 때도 악기를 연주할 때도 조각을 깎을 때도, 심지어는 일을 하고 친구들에게 돈을 빌리는 와중에도 술을 마셨다. 언제부터 그랬는지는 이미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나는 잠에서 깨어났을 때 ‘이불조차 갤 수 없는 사람’이 되어있었다. 그런 사실을 자각할 때면 절망감에 휩싸이기도 했으나, 또 술을 마시고 나면 절망은 거짓말처럼, 내가 알지도 못하는 어느 먼 곳으로 날아가 버렸다. 그곳에 얼마나 많은 절망이 쌓여있을지, 나는 짐작하려고 시도해본 일도 없다.

 그리고 세상일은 이치에 맞도록 돌아간다. 나는 매일 술에 취해서 집안을 돌아다녔고 내 발걸음 소리가 너무 크다는 아래층 세입자들과 하루가 멀다 하고 다툼을 벌였다. 결국에는 그들이 어딘가에 신고를 한 모양이다. 무슨 복지 센터 직원이라는 사람들이 집에 찾아왔다. 그들은 들여 보내줄 수 있겠냐고 물었다. 안될 것도 없었다. 여자 한 명, 남자 한 명이 내 집에 들어왔고 그들이 분명히 무슨 긴 얘기를 늘어놓았는데, 당시에 난 이미 소주를 네 병이나 마신 상태였기 때문에 무슨 소리를 했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기억나는 것은 그들이 내게 재활원에 입원하는 것을 추천했다는 점이다. 그때 나는 나에게 얼마 정도의 돈이 있는지 헤아려보았다. 당장 다음 달부터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했고, 그런 식의 삶이 벌써 수년간 이어져 온 상태였다. 나는 그들에게 입원씩이나 할 돈은 없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들은 ‘기금’이라는 것에 대해 운운했다. 어쨌거나 내가 얼마간 무료로―그들이 지원사업이라느니 뭐가 어떻다느니 하고 말을 했는데― 재활원에 들어갈 수 있다는 얘기였다. 그렇다면 안 될 것도 없었다. 그것이 대강 1년 전인 것 같다. 아마도 그렇다.

 그렇게 하여 나는 지금 침대 위에 이불을 갠다. 아침 식사 시간이 되기 전에 세안을 하고, 이를 닦고, 환자들이 모이는 식당으로 간다. 나는 배식을 받은 후 평소처럼 최 씨 할아버지가 앉아있는 자리로 향했다. 미라처럼 삐쩍 마르고 볼이 움푹 팬 이 영감님은 한쪽 발을 관 안에 들여놓은 정도가 아니라 당장이라도 쓰러져 이승을 떠날 것 같이 생겼으나, 67세밖에 되지 않았다. 이렇게 비정상적으로 마른 사람들은 이곳에서 쉽게 볼 수 있다. 다들 밥 먹듯이 술만 마셔왔을 뿐, 안주나 음식에는 제대로 손댄 적도 없는 사람들뿐이기 때문이다. 아마 내 얼굴도 비슷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문제는 스스로 판단할 만한 것이 아니기에 나는 남들에게 내가 어떤 얼굴로 보이는지 알지 못한다.

 최 씨 할아버지는 배식판을 응시한 채 젓가락으로 애먼 미역국만 계속 찔러대고 있었다. 탁, 탁, 하는 금속성의 소음이 반복적으로 울렸다. 주변에 앉은 환자들이 눈치를 주고 있었으나 영감님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안 드세요? 내가 옆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영감님은 나를 힐끗 보더니, 대답도 하지 않고 여전히 젓가락으로 배식판을 찔러댈 뿐이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그는 입을 열었다.

 내일이 무슨 날인지 알아?

 무슨 날인데요.

 손주 생일이야, 다섯 번째 생일.

 갇혀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의사한테 물어보지 그래요.

 아들내미가 오지 말라더라.

 이제 나는 별로 할 말이 없었다. 상황은 너무 뻔했다. 아니, 그보다도 이 좁은 건물 안에서 부대끼며 사는 환자들은 서로의 사정을 훤히 다 알고 있다. 영감님은 의사 동의를 구해 손주 생일잔치에 갈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곳에서 틀림없이 술에 손을 댈 것이다. 처음에는 맥주나 막걸리 한 잔으로 시작하겠지. 잔칫날이니 딱 한 잔만 하고 그만두자고 말이다. 그리고 한 잔으로는 부족하다고 느낄 것이다. 두 잔까지는 괜찮겠지. 그러면 이제 6개월간의 치료와 상담이 전부 뒤집어 엎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것은 의사도, 영감님의 아들내미도 아니다. 영감님 본인이다.

 그래, 여기 있는 사람들은 서로가 서로를 너무 잘 안다. 그것이 나에게는 사실 축복 같은 일이었다. 이 건물 안에서는 그 누구도 이방인이 아니고, 무슨 일을 할지 예측불허한 공포스러운 타인도 아니다. 그렇기에 나는 여기에서 술을 안 마시고도 다소간 제정신으로 지낼 수 있는 것이다. 가끔 난동을 피우거나 금단증상 때문에 여기저기 구토를 해대는 신참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의 행동은 어디까지나 상정한 범위 내에 있다. 그렇다면 무어 두려울 일이, 두려울 사람이 있겠는가.

 식사를 하고 나서 약을 받아 삼키고 나는 의자에 앉아 신문을 읽었다. 세상에서 온갖 끔찍하고 말도 안 되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나는 약간 소리 내어 웃었다. 바깥세상은 늘 그렇지. 너무 넓기 때문이야. 더러는 너무 많은 사람이 밀집해있기 때문이고. 온 세상에 격리병동을 만들어 사람들이 생활하게 하면 차라리 낫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즐거운 몽상에 빠졌다. 어차피 모두가 미치광이라면……. 그러고 있을 때에 남자 간호사가 내게 다가왔다. 시계를 보니 정오가 되기 한 시간 전이었다.

 면회입니다.

 그래요, 요새 자주 오네. 그렇게 말하면서 나는 누가 면회를 왔을지 이미 알고 있었다.

 남자 간호사를 따라 면회실로 향했다. 이곳은 바깥세상과 ‘안’쪽 세상의 완충지 같은 곳이다. 흔히 상상하는 방탄 유리벽이나 감시인 같은 것은 없다. 교도소도 아니고. 그저 테이블이 대여섯 개 놓여있고, 테이블마다 서너 개씩 의자가 있는 공간이다. 창문가에 있는 테이블에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내 동생이었다. 10살 차이가 나는 남동생. 덕분에 그는 철이 들 무렵부터 내가 술에 절어있는 모습만 보아왔다. 열 살짜리 꼬맹이가 스무 살이나 되는 친형이 매일 술에 꼴아 가구를 부수거나 가족들과 몸싸움을 하는 것을 보면서 자라왔다고 생각해보라. 동생은 자기 인생에서 나를 완전히 지워버릴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계속 나를 형으로 대했다. 내게 동생은 내가 술 때문에 망쳐버리지 않은 유일한 인간관계였다. 그래서 가끔은 두렵기도 하다. 아마도, 내가 마지막으로 망칠 것이 남아있다는 사실이 말이다.

 잘 지냈어? 내가 물었다.

 나는 잘 지냈지, 형은 어때.

 술 안 마신 지 벌써 일 년쯤 된 것 같은데.

 잘됐네, 잘됐어.

 오늘은 무슨 일로 왔어.

 이때 동생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나는 순간 아침 식사 때 보았던 최 씨 할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다. 정반대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똑같은 모습을 보이고 있다.

 내년 말에 결혼해 나.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내 남동생이 결혼을 한다고. 얘가 지금 몇 살이더라. 하기야 벌써 삼십이 넘었지. 그런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고 보면 내게는 아직도 젖살이 덜 빠진 꼬맹이 모습부터 생각이 나지만 이미 한참도 전부터 어엿한 성인인 것이다. 그런데 왜인지, 무슨 말이 나오지를 않았다. 특별히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잘 알 수 없었다. 동생이 결혼을 하게 되면 뭐라고 말해줘야 하지? 축하한다고 하나? 너무 거리감이 느껴지는 말 아닌가. 그보다도 이 녀석은 왜 말하기 전에 뜸을 들였지?

 아, 생각할 필요도 없이, 이것도 뻔한 일이다. 바깥세상에서 멀쩡히 살아가는 동생에게 나는 억지로 짊어지게 된 짐 같은 것이다. 더군다나 결혼을 한다지 않는가. 배우자가 생긴다는 것이다. 처가도 생기기 마련일 것이고, 내 존재는 무엇 하나 동생에게 도움이 되는 면이 없다. 그러니까 나는 언제까지고 여기에 있는 수밖에.

 잘됐네. 나는 웃었다.

 동생도 웃었다. 그리고 나는 생각했다. 오늘 밤 약을 먹고 잠든 뒤, 내일 아침에 일어나면 나는 또 이불을 개야지. 침대 위에 칼같이 이불을 개어놓고 스스로 만족스러워해야지. 내가 이 정도 일을 스스로의 의지로 해낼 수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에 성취감을 느껴야지. 그리고 그 다음 날도, 그 다음다음 날도 말이다. 우리 형제는 마주 보면서 웃었고, 내 입안에서 아주 오랜만에 소주의 씁쓸하고 불쾌한 단맛이 감돌았다. 나는 꿀꺽 침을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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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문에 의하면 그는

글/소설 2022. 11. 29. 22:06 |

소문에 의하면 그는

 

 

1.

 도대체 누가 저지른 짓인지는 알 수 없으나 도시에 나에 대한 소문이 나돌고 있다.

 응급실에 실려 갈 때마다 능숙하게 거짓말을 해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의사라는 인종들은 생각보다 눈치가 빠르고 심지어는 훈련된 관찰력까지 있다. 그들은 내 거짓말을 믿는 수밖에 없었으나 의심을 완전히 거두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처음 세 번의 시도들이 입에서 입으로 퍼져나갔을 것을 상상하는 일은 그렇게 어렵지 않다. 하지만 우리 집 천장에 두 개의 시꺼먼 구멍이 나버린 일을 모두가 알고 있는 점은 어떻게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

 한강 공원 한구석에서 시궁창 냄새가 나는 물을 토하고 저녁 하늘을 올려다보던 때가 아직도 기억난다. 도대체 누가 삶이 아름답다는 말을 함부로 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매번 마지막이어야 했을 잠에서 깰 때마다, 올가미 안에 머리를 넣으며 스스로에게 미소 지었을 때마다, 공중에서 자신의 몸무게를 완전히 잊어버리는, 그런 순간마다 나에게는 확신이 있었다. 그리고 그 확신은 매번 나를 배신했다. 이것은 정말로 저주라도 받은 것 같다.

 나는 내가 선택할 죽음에 대해 어쩌고저쩌고하며 옹졸하게 늘어놓을 생각은 추호도 없다. 이번에야말로 나는 끝날 것이다. 나라는 세포들을 가득 담고 움찔거리는, 생각보다 너무 단단했던 그릇도 이제는 깨질 것이다. 내 오른손에는 소주가 잔뜩 담긴 비닐봉지가 있고 주머니에는 손잡이까지 금속으로 된 나이프가 있다. 우선 위장에 소주를 들이부어, 내가 새로 맛볼 고통 때문에 스스로 망설이지 않게 할 것이다. 그리고 칼은, 사방에 널린 게 콘센트다. 지금까지 여섯 번의 시도로 엉망진창이 된 몸이 전기에 한껏 지져지면, 아무리 여태 버텨왔던 몸이라고 해도 생명이 남아날 리가 없다.

 우선은 방으로 돌아가 소주를 따야겠다.


2.

 도시에 이상한 소문이 돌고 있다.

 그 소문은 너무 구체적이라서 사실상 소문이 아니라 누군가가 작정하고 만들어낸 것 같았다. 내용인즉 여섯 번의 자살시도를 실패한 사람이 이 도시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세 번의 음독자살을―첫 번째와 두 번째는 수면제 과용이었으며 세 번째는 메탄올을 들이켰다고 한다― 시도했으나 매번 며칠 뒤 응급실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두 번 목을 매달았으나 첫 번째는 실링이 부서져 내렸고 두 번째는 천장 타일이 뜯겨나오며 떨어졌다. 마침내 그는 모두가 그렇게 하듯이, 마포대교에서 난간을 기어올라 한강물에 몸을 던졌다. 그러나 곧 살아있는 채로 하류에서 발견되었다.

 이것은 소문이라기에는 너무나 세세하고 구체적인 이야기였다. 덧붙여 그가 드디어 성공하고 말 일곱 번째 죽음을 준비하고 있다는, 도대체 출처조차 알 수 없는 정보까지 나돌고 있었다. 애당초 이상한 것은 왜 이런 이야기가 소문이라는 형태로 돌아다니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뉴스에까지 나올법한 이야기는 아니더라도, 이것이 사실이라면 보다 신빙성 있는 루트로 이야기가 퍼져야 마땅하다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사실 내가 크게 신경을 쓸만한 이야기는 아니다. 어디까지나 사람들의 흥미를 돋우는 도시 괴담 같은 것에 지나지 않고, 이 좁고도 넓은 도시에서 내가 소문의 주인공과 만나게 될 가능성은 없는 것과 다름없다. 그 불쌍하고 안타까운 누군가가 일곱 번째 시도를 성공시키든 그러지 못하든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다. 나는 나를 위한 준비를 하느라 바쁘기 때문이다.

 벌써 직장을 구하지 못한 지 2년이 지났다. 아니, 그렇지 않다. 처음 한해는 분명 아무리 시도해도 제대로 된 일자리를 구하지 못했던 것이 맞다. 그러나 그 뒤부터 나는 모든 의욕을 잃고 저금해두었던 돈만 천천히 까먹으며 일 년을 보냈다. 이 일 자체는 그리 큰 문제가 아니다. 인생의 흐름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일은 누구에게나, 아무 때나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발견하고 만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지낸 일 년 사이에, 내게는 더 이상 삶을 헤쳐나갈 그 어떤 의욕도 원동력도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나에게는 가족도 없고 내 삶에 있어 중요하게 여길 만한 ‘그 무언가’도 없다. 애당초 멀쩡한 모습으로 직장에 다니던 시절이 이상했던 것이다. 그것은 목표도 목적도 없는, 오로지 관성에만 의지한 생존방식이었다. 그런 것을 나는 일 년간의 백수 생활에서 확연하게 깨닫고 만 것이다.

 죽고자 하는 마음은 확실하다. 그리고 그 날은 오늘이다. 정확한 방법은 아직 생각 중에 있다. 다만 그 얼토당토않은 소문이 내게 약간의 교훈을 주기는 했다. 정말로 확실하지 못한 방법이란 계획의 나머지 부분을 운에 맡겨버리는 것과 마찬가지다. 나는 비닐봉지에 소주를 가득 담은 채 집으로 돌아가고 있다. 아주 확실한 방법을 떠올리는 데 알코올이 도움이 되리라고 믿는다.


3.

 그들이 서로를 지나치고 있다. 소주를 잔뜩 들고 서로 똑같은 생각을 하면서.

 처음 남자가 졸피뎀 한 병을 입안에 쏟아부었을 때 나는 평소처럼 수거해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미 너무도 많이 봐온 장면 중 하나였고, 일상처럼 행하는 업무 중의 하나였다. 그런데 나는 그때 남자의 방안을 둘러보았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다만 길거리를 거닐다가 주변을 둘러보는 것 마냥, 버릇처럼 그랬던 것이다. 그런데 나는 졸피뎀뿐만이 아니라 트리아졸람이 가득 담긴 병을 발견했고, 분명히 목적이 있어서 쌓아놓은 복사기 토너들을 발견했고, 서툴게 매듭을 지은 올가미부터 아주 완벽하게 길이를 맞춘 밧줄 매듭까지 온갖 것들을 발견했다. 그 더럽고 엉망인 방 안에서 체계가 있는 것이라고는 ‘그런’ 물건들뿐이었다.

 그때 내게 한가지 발상이 떠올랐다. 낙엽을 치울 때도 한곳에 모아놓았다가 단번에 자루에 담는 법이다. 나는 이 남자가 빗자루 역할을 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생각이랄까, 계획이 완벽하게 정리되어있지 않았다. 다만 나는 내 영감을 따라 가보기로 했다. 수면제를 한 병 삼키고 10분도 되지 않아 남자는 휘청거리더니 자리에 쓰러지듯 누웠다. 그러나 나는 그를 수거하지 않았다. 그냥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그리고 3일째 되던 날 누군가가 그의 방으로 들어와 응급차를 부르고 난리를 쳤다.

 그다음에도 나는 그를 수거하지 않았고, 다시 그랬고, 다음엔 천장의 실링에 약간 장난을 쳤으며, 또 같은 일을 반복했다. 남자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서 변화가 나타났다. 그들은 죽음이라는 개념에게서 약간의 장난스러운 감정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것은 내가 정확히 예상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어느 정도 계획하고 있던 일이었다. 나는 내가 효율적인 방법을 개발하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러나 그 자살중독자는 인간관계가 그리 넓지 않았다. 더 많은 사람에게 영향력을 행사해주었으면 했다. 나는 길에서 자는 이들, 진심으로 웃지 못하는 이들, 손톱을 씹는 이들에게 남자의 이야기를 속삭였다―이 일을 하면서 나는 아주 예전에 만났던 어떤 학자를 떠올렸는데, 그 이야기는 지금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러자 그들은 눈을 뜨고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전하기 시작했다. 이야기는 금세 눈덩이처럼 불어나 도시에 사는 모든 사람이 알게 되었다.

 남자가 일곱 번째 헛수고를 준비하는 사이 나는 첫 번째 성과를 찾아냈다. 그는 원래부터 자질이 있었으나 ‘소문’ 덕분에 자신도 모르는 새 죽음에 대한 방비를 다 풀어놓은 상태였다. 나는 위에서 낙엽을 치우는 방법에 관해서 이야기했다. 남자의 일곱 번째 시도에도 절망한 실업자의 첫 번째 시도에도, 나는 결과물을 쥐여주지 않을 것이다. 곧 두 번째, 세 번째 성과가 나타날 것이다. 그러면 나는 계속 소문을 퍼트릴 것이다. 아무도 수거되지 않을 것이다. 도시 모두가 죽음이란 달성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허상 같은, 그야말로 거짓말이나 장난 같은 것이라고 느끼게 될 때까지 말이다.

 그리고 그때가 되면 낙엽은 모조리 한 군데에 모일 것이다. 나는 그것을 쓸어 담기만 하면 된다. 벌써 몇몇 동료들이 내 작업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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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가 지옥으로 간다


 이것은 작가와 작가 지망생들을 위한 글이다. 그러나 이 글에는 그 어떠한 종류의 충고나 조언도 없다. 애당초 내게 그럴만한 자격이 있지도 않을뿐더러, 사실 작가들에게는 어떤 종류의 조언과 충고도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나는 이곳에서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실용서다. 말하자면 단테의 <신곡>이 실용서였고, 밀턴의 <실낙원>이 실용서였던 것처럼 말이다. 나는 아주 오래전에―지금은 그것이 얼마나 오래전 일이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이 마을에 도착했다. 어쩌면 ‘떨어졌다’고 말해야 옳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그때 나는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숲에서 막 빠져나온 참이었다.
 시간은 밤이었고 내가 걸어온 어두운 숲을 벗어나자 갑자기 드넓은 초원이 펼쳐졌다. 그때 나는 어둠 속에서 초원에 늘어져 있는 그림자 같은 인영을 발견했다. 나로서는 아주 오랜만에 사람을 만난 기분이었다. 다가가서 보니 그것은 금발 머리를 가진 외다리 청년이었다. 한밤중이었지만 휘영청 밝은 보름달 덕분에 그의 머리 색깔과, 다리 한쪽이 없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자세히 바라보니 청년은 눈을 감고 있었고 만취한 사람처럼 두 팔을 벌린 채 풀밭에 누워있었다. 아주 아름다운 얼굴 생김이어서 짧게 자란 수염이 아니었다면 여자로 착각했을지도 모른다.
 여보세요.
 내가 묻자 그는 슬며시 눈을 떴다. 그리고 느닷없이, 그의 내면에 가득 쌓여있던 화약 더미가 폭발하기라도 한 것처럼, 격렬한 어조로 내게 무슨 말인가를 쏟아부었다. 나는 그가 어느 나라 말을 하는 것인지도 구분할 수 없었다. 다만 확실한 것은 그것이 욕설과 저주의 뉘앙스를 품고 있었다는 것이다. 나는 깜짝 놀라 뒷걸음질 쳤고, 그는 내게 손가락질까지 하며 정체불명의 폭언을 내뱉고 있었다.
 나는 황당하고 어리둥절한 채 그로부터 멀리 떨어졌다. 가던 길을 계속 걷기 시작하자 뒤에서 무어라고 중얼거리는 목소리와 한숨이 들렸다. 그리고 나서야 나는 그가 내뱉던 괴성과 욕설이 언젠가 들었던 프랑스어와 닮아있지 않았나, 하고 생각했다.
 이상한 사건을 뒤로하고, 약간 언덕진 초원 저 너머로 시선을 향했다. 건축물처럼 보이는 그림자들이 무수히 솟아있었다. 그러나 그것들 중 단 한 개도 불이 밝혀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 ‘건축물처럼 보이는 것들’이 과연 건물인지, 사람이 살고는 있는 것인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초원에 난 길을 걷는 와중에 나는 처음에 만난 외다리 청년처럼 풀밭 곳곳에 늘어져 있거나, 앉아 있거나, 혹은 유령처럼 선 채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사람들을 자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미 외다리 청년에게서 교훈을 배운바, 그들에게 다가서서 말을 거는 어리석은 행동은 하지 않았다. 다만 흥미로웠던 점은 그들 모두가 남자였고, 각각 다른 인종이라는 사실을 어둠 속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종의 다양성 때문에 나는 언덕 저편에 도착한다 하더라도 과연 내 말이 통하는 사람을 찾을 수 있을지 불안해졌다.
 낮은 언덕을 넘어가자 그곳은 역시 마을이 맞았다. 나무로 건축한 단층이나 2층짜리 주택이 수도 없이 밀집해있었다. 마을에 딱히 입구라고 할 만한 것은 없었다. 다만 초원과의 경계를 의미하는 듯 어느 지점부터 건물들이 세워져 있고 풀밭에 나동그라진 사람의 수가 줄어있었을 뿐이다. 울타리 같은 것은 없었다.
 마을의 초입에서 나는 익숙한 얼굴을 발견했다. 나와 아는 사람인 것은 아니었고, 다만 검은 머리털이나 동북아시아인 특유의 얼굴 형태가 새삼 내게 익숙하게 여겨졌던 것이다. 그는 어느 건물 벽에 기대선 채 끊임없이 자신의 두 손을 서로 쥐었다 폈다 하며 불안한 몸짓을 하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서서 그에게 대화를 시도해보았다. 그는 우리말을 할 줄 몰랐고, 일본인인 듯했다. 다행히도 나는 조금이나마 일본어를 할 줄 알았다. 대화의 내용을 요약하자면 이렇다.
 이 마을은 왜 이렇게 캄캄합니까?
 여기에는 불이 없습니다.
 불이 없다는 게 무슨 말입니까?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그가 미친 사람이 아닌가 의심했다. 계속해서 움직이는 손가락과 겁먹은 듯한 표정은 정신에 안타까운 상처가 있는 사람 특유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불이 없다는 말은 사실인 것처럼 보였다. 이미 상기했듯 한밤중임에도 온 마을에 달빛 말고는 아무런 빛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순간 과거에 읽었던 코맥 매카시의 어떤 작품을 떠올렸다. 인류문명이 멸망해버린 세계를 다루는 그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상징은 <불을 운반하는> 사람들이었다. 나는 잠깐 잡념에 빠져들었다. 마을의 새까만 광경과 일본인의 의미심장한 말이 내 상상력을 부풀린 것이다. 어쩌면 굉장히 오랫동안, 어느 누구도 이 마을로 ‘불’을 운반해올 수 없었던 것은 아닐까.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오래된 습관 때문에 생긴, 관념적인 상상에 지나지 않았다.
 여하간 나는 이 마을의 중심으로 가면 광장이 있으려니, 광장이 있다면 더 멀쩡한 사람과 만날 수 있으려니 싶었다. 하늘을 보니 달은 여전히 그 자리에서 대지를 은빛으로 비추고 있었다. 나는 불쌍한 일본인 사내를 내버려 두고 걸음을 재촉했다. 길들은 좁았고 제대로 관리되어있지 않았다. 보아하니 아무도 관리하는 사람이 없는 것 같았다. 그런 지저분한 길목마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사내들이 서 있었다. 그들은 모두가 외따로 떨어져 있었으며 통행인이나 서로에게 전혀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불쌍한 일본인처럼 불안증세를 보이는 이들도 자주 보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마을에 광장 따위는 없었다. 더 정확하게는, 이 마을에는 중심이 되는 구역조차 없었다. 그저 건물들이 무질서하게 밀집해있을 뿐이었다. 그 사이사이로 수도 없는 길목들이 겹쳐졌다가 나뉘어지고, 또 교차하고 있었다. 그리고 건물 안에 있을 사람들까지 합하면, 도대체 얼마나 되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넋을 놓고 있는 것일지도 헤아릴 수가 없었다. 정신적인 피로감이 정점에 달할 즈음에, 나는 아주 놀라운 일을 겪었다.
 어느 건물의 계단참에 새하얀 수염이 인상적인 노인이 앉아 있었다. 그 얼굴이 몹시도 익숙했다. 그래서 나는 자신도 모르게 멍하니 그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나는 그 얼굴을 분명히 본 일이 있었는데…… 맙소사, 그는 톨스토이, 레프 톨스토이가 틀림없었다. 비록 책에서 사진으로밖에 본 적이 없기는 하지만, 그 얼굴을 잘못 볼 리가 없다. 나는 순간 귀신에 홀린 듯, 계단참에 올라앉은 그에게로 달려가 질문 공세를 퍼부었다. 그때 나는 마땅히 이 마을에 관해 물어봐야 했을 실제적인 질문은 단 하나도 하지 않았다. 나는 오로지 그의 작품과 사상에 대해서 무어라 무어라, 높은 목소리로 외쳐대기만 했다. 그러나 그 늙은 사상가는 완전한 몰이해의 표정으로 내내 날 쳐다보고만 있었다. 몇 분 뒤에야 나는 당연한 사실을 깨달았다. 이 제정 러시아의 문호가 우리말을 알아들을 리가 없었던 것이다. 나는 순간 어깨에 힘이 쭉 빠지는 것을 느끼며 그 옆에 주저앉았다.
 머릿속이 다소 냉정해지는 것을 느끼면서 나는 생각을 가다듬었다. 만약 이 마을이 내가 생각하는 곳이 맞다면, 그렇기에 이곳에 불이 없는 것이라면. 나는 몇 가지 생각을 거쳐 진실을 확인할 한 가지 방도를 찾아냈다. 내가 사용할 수 있는 외국어는 지극히 한정되어있고, 그마저도 복잡한 대화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내가 단지 누군가의 이름을 말할 뿐이라면 어떨까. 그것이 외국인의 귀에 얼마나 부정확하게 들릴지는 쉬이 예상할 수 있다. 하지만 몇 번의 시행착오를 거친다면 나는 이 마을이 어떤 곳인지만은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곧바로, 내 곁에 초라하게 쭈그리고 앉은 대문호에게 질문을 시작했다.
 니콜라이 고골.
 노인은 저 멀리 있는 어느 건물을 가리켰다.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노인은 흥, 하고 코웃음을 치더니 또 다른 건물을 가리켰다.
 알렉산드르 푸시킨.
 노인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또 다른 건물을 가리켰다. 나는 이미 거의 진실에 가까워졌다. 더 이상 묻는 것이 두려울 지경이었다. 그러나 나는 계속해서 ‘이름’을 나열했다. 19세기로부터 조금씩 멀리, 그리고 러시아로부터 조금씩 멀리 향하는 이름들을 말이다. 키르케고르부터 카뮈까지, 셰익스피어부터 피츠제럴드까지……. 이름을 들은 노인은 모조리 고개를 끄덕이거나, 어딘가를 가리키거나, 더러는 어깨를 으쓱이며 마을을 보라는 듯 손바닥을 옆으로 저었다.
 솔직히 말하건대, 나는 그때 절망 때문에 눈앞이 캄캄해졌다. 내가 ‘그들’을 만날 수 있다는 환희 따위는 전혀 없었다. 왜냐하면 자신이 이 마을에 자의로 들어왔다는 것을, 스스로 떨어져 내렸다는 것을 이미 깨닫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숲을 빠져나온 후부터 요만큼도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 하늘에 유리구슬처럼 떠 있는 새하얀 보름달을 가리켰다. 그것이 내 마지막 희망이었다. 이 인본주의자가 마을 입구에 있던 일본인의 말을 부정해주었으면 했던 것이다. 그러나 벌써 탁해진 눈동자로 노인은 미간에 주름을 짓고, 고개를 양옆으로 휘저었다. 이제 모든 절망이 확실해졌다. 마을 초입의 불쌍한 일본인 작가가 말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 순간 내 귓속을 향해, 지금까지 듣지 못하고 있었던 무수한 소음이 기어 들어왔다. 애벌레가 나뭇잎 먹는 소리를 수천 배로 증폭시킨 것 같은 소음이었다. 이 거대한 마을 전체가 실낱같은 숨으로 비명을 토해내는 소리였다. 그것은 내가 처음 마을에 발을 들였을 때부터 계속해서 들려왔지만 알아채지 못한 소리였고, 아주 작은 소리였지만 사방팔방에서 멈추지 않고 들려온 소리였다. 마을의 모든 목조건물 안에서, 그 건물들의 작고 좁은 방 안에서, 그 작은 소리들은 겹쳐지고 공명하며 그야말로 이 세상 전체에 울려 퍼졌다. 사각사각, 사각사각하며.
 나는 공포에 질린 채 구르듯이 계단참을 뛰쳐 내려왔다. 그리고 왔던 길을, 그 좁고 더럽고 엉망진창인 길들을 있는 힘껏 역방향으로 달렸다. 가끔 멀거니 서 있던 사내들이 어깨에 치였으나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시야 끄트머리에 불쌍한 일본인 작가가 잠시 보였다가 사라졌다. 나는 마을 밖으로, 초원으로, 언덕으로 달렸다. 한참을 달리고서야 그 끔찍한 소리로부터 거리를 둘 수 있었다. 그러나 사각사각하며, 내 인생 전체에 들러붙어 있던, 마침내는 삶을 모조리 갉아 먹어버린, 그 오래된 소리가 아직도 멀리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거친 숨을 쉬며 내가 나왔던 숲길을 향해 걸어나갔다. 숲은 빠져나왔을 때보다 더욱 어두컴컴했다. 나는 다시 외다리 청년과 만났다. 그러나 내가 나왔던 그 숲길은 찾을 수 없었다. 아주 빽빽하고 울창한, 새까만 숲이 벽처럼 놓여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나는 조롱하는 듯한 웃음소리를 들었다. 금발 머리를 가진 아름다운 얼굴의 외다리 청년은 모로 누운 채, 나를 보며 키득키득 웃고 있었다. 나는 이제 그가 누군지 안다. 그는 태양으로 걸어 올라가려던, 나쁜 피를 가진 시인이었다.
 나는 처음에 이 글에는 조언도 충고도 없다고 말했다. 그런 것은 있을 수도 없다. 사각거리며 종이에 펜을 긁는 소리가 이미 우리의 삶을 먹어치운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명성과 존경이, 또한 모든 실패와 무관심이 그 소리와 함께 이곳으로 온다. 살아있는 피부에 열기를 전해줄 불꽃조차 없는 이곳까지 와서도, 그 소리는 멈추지 않는다. 멈출 리가 없다. 우리가 멈출 리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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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레시보 메시지

글/소설 2022. 2. 19. 21:33 |

아레시보 메시지


 모든 일이 다 잘못되었다고 그는 생각한다. 변기를 얼싸안고 있는 그의 뒤통수 위, 화장실 천장에서는 약간 황색이 도는 백열등이 잉잉거리며 빛나고 있다. 변기에 고인 물에서는 토해낸 비누 거품이 무지갯빛으로 반짝이며 둥둥 떠다닌다. 퉤, 하고 입안에 맴도는 로즈메리 향을 뱉어낸다. 약간의 알코올 냄새가 섞여 있다. 그는 얼굴에 번들거리는 눈물을 소매로 닦는다. 그리고 손에 쥐고 있던, 베어 문 잇자국이 선명한 반쪽짜리 비누를 세면대에 올려놓는다. 선반에 개어진 수건들 틈에 놓아둔 휴대전화를 꺼내려다가, 그는 위장에서부터 올라오는 역한 비누향을 견디지 못해 온몸을 들썩이며 또 한 번 토악질을 하고 만다. 작은 비누 조각들이 더 많은 거품과 함께 변기 안으로 쏟아진다. 다시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그는 비틀거리며 일어선다. 20분이 넘도록 구토를 하고 있을 동안 휴대전화는 단 한 번도 울리지 않았다.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휴대전화를 열어도 도착한 문자메시지는 한 건도 없다.
 ‘들어오세요. 저 종민이예요.’ 3년 동안 저장만 되어있던 번호로 다시 한번 문자메시지를 보낸다. 그러나 자신이 정말 답장을 바라고서 메시지를 보내는 것인지 잘 알 수가 없다. 사실, 진즉에 아버지는 전화번호를 바꾸거나, 더 먼 곳으로 떠나버렸을지도 모른다. 아니 전화번호는 분명 바뀌었으리라. 3년 전에 산책 좀 다녀오겠다며 현관을 나서더니 귀신같이 사라져버린 사람이다. 그는 자신이 보낸 메시지가 엉뚱한 사람의 전화에 도착했거나, 어디에도 도착하지 못한 채 전파 상태로 공중에서 흩어져버렸으리라고 확신할 수 있다.
 아버지가 사라졌을 때 어머니가 보였던 이상한 반응을 그는 기억한다. 그녀는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행동했다. 시댁에 전화를 하지도 실종신고를 하지도 않았다. 아버지가 ‘산책’을 간 뒤 일주일이 지나자, 마치 그것만으로 상황이 매듭지어졌다는 듯 그녀는 생계를 위해 일을 하기 시작했다. 마트에서 김치를 팔기도 하고 보험회사에서 영업직을 하기도 했다. 대체로 한 번에 두세 가지 일을 하곤 했다. 그런 어머니를 보며, 그는 자신에게 혼란스러워할 권리가 없다는 것을 느꼈다. 매일 밤 지친 모습으로 돌아와 콩나물국 따위를 끓여 찬밥을 말아먹는 어머니의 모습에서, 그는 당황하거나 우울해하는 것은 생계에 여유가 있을 때나 가능한 것이라고 깨달았다. 그래서 그 또한 눈앞에 놓인, 학생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절망하여 주저앉는 것은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수돗물로 입안을 헹구고 거울을 보았다. 눈이 온통 충혈되고 얼굴에 그늘이 진, 퀭한 인상의 그 젊은이는 평판 높은 K 공과 대학의 장학생이었다. 참 성실도 하지, 그렇게 그는 생각한다. 거울 위에 달린, 누렇게 물때가 낀 방수 시계를 본다. 새벽 세 시였다. 그렇다면 적어도 다섯 시간은 술집에 있었다는 계산이 된다. 어제저녁 학교에서 돌아오니 어머니는 안방 이불에 누워있었다. 평일 초저녁에 어머니가 잠들어있는 건 이상한 일이었다. 게다가 어머니는 아침에도 그 모습 그대로 자고 있었다. 그는 생각했다. 전날 퇴근했을 때 어머니는 평소보다도 유난히 지치고 수척해 보였다.
 그는 문지방을 넘지 못한 채, 부엌과 안방의 경계에 마냥 서 있었을 뿐이었다. 저 어둡고 퀴퀴한 방 한구석에 돌무더기처럼 옴짝달싹도 하지 않고 이불을 덮고 있는 그녀를, 마찬가지로 석상이라도 된 듯 그는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3년 전 아버지가 산책을 나가버린 이후로, 이제 이상한 일이라고는 질색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대로 현관을 박차고 나갔다. 지갑에는 팔만 원이라는 거금이 들어있었다. 사흘 전 어머니가 용돈으로 쥐여준 이후 한 푼도 건드리지 않은 돈이었다. 그는 연립주택 밖으로 나가, 가로등 불빛을 싸늘하게 반사하며 주차되어있는 승용차들을 지나쳐, 주택가 귀퉁이에 자리 잡은 늘 왁자한 소리가 나는 술집으로 향했다. ‘노가리 1000원’. 가게 이름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으나 그렇게 간판이 붙어있다. 그는 자리를 잡고 천 원짜리 노가리와 삼천 원짜리 소주를 시켰다. 한 잔, 한 잔을 비울 때마다 절벽 끝으로 밀려가는 기분이 들었다. 그는 시간이 흐르는 것을 부정하는 것처럼 더욱 느린 속도로만 마셨다. 눌어붙은 기름과 사람 비린내가 가득한 술집에서 팔만 원이 전부 없어질 때까지 다섯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결국에는 집으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가긴 어딜 가겠는가. 어느새 새벽 거리에는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분명 아침이 오면 경사로가 많은 이 동네에서 한두 사람이 넘어지고 말 것이다. 그는 비틀거리며, 추위에 눈과 코가 빨갛게 얼어 집으로 돌아왔다. 현관을 열고 어두컴컴한, 10평짜리 연립주택 안으로 들어서자 평생 맡아본 적 없는 기묘한 냄새가 났다. 가스레인지에 올려놓은 된장국이 상했나 하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냄새는 안방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거실 불도 켜지 않고 화장실로 뛰쳐들어가, 그는 삼만 원어치 술을 전부 게워냈다. 산책간 아버지가 이제 돌아올 때도 되지 않았는가, 하고 술기운 속에서 생각했다. 슬슬 집으로 들어오라고, 그는 휴대전화 안의 전화번호부를 뒤져 문자를 보냈다. 답장은 오지 않았다. 고요한 집안에선 여전히 형언하기 힘든, 비강에 달라붙는 듯한 불쾌한 냄새가 흐르고 있었다. 비누라도 먹으면 냄새가 지워지겠지, 알코올 때문에 회로가 엉켜버린 머리가 그렇게 생각했다.
 역겨운 로즈메리 향밖에 느껴지지 않는 채로, 그는 화장실 불을 끄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어두운 방에 어머니는 그가 술집으로 도망치기 전과 똑같은 자세로 누워있다. 그는 휴대전화를 꺼낸다. 아직도 산책 중인 아버지에게 한 번만 더 문자메시지를 보낸다. 술에 취한 손가락이 계속 잘못된 버튼을 누른다. ‘어머니도 없으니 이제 들어오세요’ 메시지를 전송한다.
 그는 초점이 맞지 않을 정도로 어지럽고, 피로하다. 누워있는 어머니의 발치에 머리를 대고 눕는다. 아직도 비누 냄새 때문에 속이 메스껍다. 이제 그만 잠들어버려야지, 그는 눈을 감는다. 내일이야 오든 말든,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달리 있는 것도 아니다. 눈동자는 눈꺼풀 안쪽에서 흩어지는, 파도의 포말처럼 불분명한 잔무늬를 보고 있다. 지난 하룻밤 동안 있었던 일을 그의 술 취한 머리가 천천히 정리하려 한다. 그는 작년 교양과목에서 배웠던 어느 서글픈 천체물리학 지식을 떠올린다. 그것이 척추를 타고 온몸을 돌며 사지를 천천히 굳게 하고 있다.
 1974년 아레시보 전파 망원경에서 쏘아 올린 메시지는 외계의 지적생명체가 수신하기를 기대하고 쏘아 보낸 것이 아니었다. 왕복 5만 년이 걸리는 메시지에 과학자들이 기대한 것은 답신이 아니었다. 전파를 송출한 천문대가 ‘이 정도 기술력을 갖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말하자면 일종의 시위 행위로 벌인 프로젝트였다. 전파를 받을 누군가가 있든 없든, 답신이 오든 오지 않든 처음부터 상관없는 일이었다.
 취기와 구역질의 산란한 물결 속에서 천천히 의식이 가라앉는다. 아주 깊고 어두운 곳까지 의식이 떨어졌을 때, 그는 멀리서 울리는 듯한 휴대전화의 메시지 착신음을 듣는다. 그러나 굳이 깨어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그림자와 침묵이 방안의 낡은 가구며 두 사람을 검은 장막처럼 덮고 있었다. 해가 뜨기 전의 가장 어두운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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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담배

글/소설 2021. 10. 22. 01:23 |

(스토리텔링 습작)

책과 담배


 내 친구 이철우에게 전화가 왔을 때 나는 한창 서랍장이며 장롱 따위를 필사적으로 뒤지는 중이었다. 그날은 14일이었는데, 수중에 남은 돈과 날짜를 계산해보니 보름 동안 담배를 피우지 않아야만 생활이 가능했다. 나는 어떻게든 담뱃값을 충당하기 위해 여권과 통장이 있는, 가장 안쪽에 있던 서랍까지 전부 꺼내 바닥에 늘어놓았다. 어딘가에 천 원짜리 몇 장이나, 동전, 그도 아니라면 환전할 수 있는 적은 액수의 외화라도 있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친구에게서 전화가 온 것은 오백 원짜리 동전 하나도 찾지 못해, 돼먹지 않은 분노로 가슴속이 끓다시피 할 때였다.
 거칠게 전화를 받자 철우는 잠시 말이 없었다. 무슨 일이 있느냐는 질문을 받고서야 나는 감정을 추스를 수 있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무슨 일인데. 내가 되묻자 그는 용건을 이야기했다. 철우는 자신의 막내 여동생 이야기를 시작했다. 동생은 지금 대학생이고 내년이면 철학과를 졸업할 예정이라고 했다. 나는 수화기로 그가 말하는 것을 들으면서 이미 뒤졌던 서랍들을 다시 한번 살피고 있었다. 아무튼, 철우의 말에 의하면 여동생은 3년간 대학을 다니며 처음 입학했을 때 갖고 있던 열정을 전부 잃어버렸다고 한다. 매주 반복되는 장황한 토론과 현학적인 전문용어들 사이에서 완전히 지쳐버렸다는 것이다.
 나는 왜 그가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전혀 알 수 없었고, 내심 어떻게 하면 약간의 돈이라도 빌릴 수 있을까 궁리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철우는 막내 여동생에게 추천해줄 만한 책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내가 책을 좋아하던 것을, 장르를 가리지 않고 온갖 책을 사서 읽던 시절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니 여동생의 학구열에 다시 불을 붙일만한 책을 내가 추천해줄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는 듯했다. 지금의 나는 책을 거의 읽지 않았다. 집안이 온통 책장으로 가득했으나 전부 거추장스럽기만 했다. 언제부터인가, 쉬는 날에는 책을 읽기보다 잠을 자거나 술을 마시는 일이 더 중요해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담배가 중요했다. 집안에 가득한 갖가지 종류의 책들은 벌써 몇 년째 먼지만 켜켜이 쌓여가고 있었다.
 그러나 책을 읽었던 기억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나는 이제 푼돈 찾는 일을 포기하고 거의 해체되다시피 한 장롱 옆에 주저앉았다. 전공과목인 철학에 흥미를 잃었다고 하니 사상서보다는 인문교양서 등을 읽으며 다른 학문에도 흥미를 갖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그러면 복수전공도 생각해볼 것 아니냐고 친구에게 말했다. 친구는 어떤 책이 괜찮겠냐고 물었다. 나는 전화를 든 채 난장판이 된 집안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고개를 향하는 곳마다 과거에 읽었던 책들이 빽빽하게 꽂혀있었다. 먼저 윌러드 게일린의 증오와 범죄심리에 대한 인문서를 이야기하고, 고명섭 교수의 인간 내면의 문제적 열정에 관한 책, 카잔차키스의 자서전, 볼테르의 철학소설, 이런 식으로 한참 책 제목들을 나열했다. 사실 깊게 생각하지 않고 보이는 대로 내뱉는 식이었다. 생판 남이나 다름없는 대학생의 진로까지 신경 쓸 상황이 아니었던 것이다. 전화 저편에서는 컴퓨터로 받아 적고 있는지, 자판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직후 철우가 한 말 때문에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는 내가 열거한 책 중 절반이 이미 절판되었다고 말했다. 절판, 나는 계시라도 받은 기분이었다. 곧바로 컴퓨터의 전원을 켜고 인터넷 서점을 검색했다. 철우가 절판되었다고 얘기한 책들은 중고서점에서 최소 만오천 원, 비싼 경우에는 육만 원을 호가하고 있었다. 기분이 몹시 들떠 환호성이라도 지르고 싶었다. 나는 책장에 있는 오래되고 제본이 호화로운 책들을 검색해보았다. 레프 톨스토이의 은박이 입혀진 특수양장본은 새로 나온 보급판보다 두 배는 비싸게 팔 수 있었다.
 중고로 팔 만한 책들을 정리해보니, 적당한 가격으로 판매한다면 총 합쳐 내 두 달 생활비에 맞먹는 금액이었다. 불과 십수 분 전까지 아사 직전의 쥐처럼 집안을 뒤져대던 스스로가 거짓말 같았다.
 나는 희희낙락하여 마치 금괴라도 쌓듯 서가를 정리했다. 그리고 친구에게 말했다. 동생한테 얘기해, 내가 저녁 살 테니까 너랑 같이 한번 보자고, 진로같이 중요한 얘기는 직접 만나서 이야기 나눠야지. 친구는 내 느닷없는 감정변화에 어리둥절한 모양이었으나 신경 쓸 바가 아니었다. 다시 연락하겠다며 나는 전화를 끊었다. 얼굴에서 웃음기가 지워지지 않았다. 값비싼 책들을 방 한쪽에 몰아두고, 외투를 걸친 뒤 집을 나섰다. 이제는 남은 담배가 두 개비뿐이라는 사실에 초조해할 이유도 없었다.
 집 앞의 골목에서 담배를 피우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한 달을 사는데 40만 원이면 충분한 이 동네에서 나는 누구보다 부자가 된 기분이었다. 맞은편 건물에서 온종일 들려오는 개 짖는 소리마저 유쾌하게 느껴졌다. 늦가을 하늘은 높고 화창했다. 서늘하고 건조한 공기는 담배 맛을 더욱 좋게 만들었다. 이 모든 것이 책 덕분이었다. 폐 속 깊은 곳까지 들어갔다가 허공으로 뿜어져 나오는 연기를, 나는 만족스럽게 눈으로 좇았다. 그것이 몇 번이나 반복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흥분했던 마음은 서서히 가라앉았다.
 몇 권을 판 뒤 월급날이 되면 다시 책을 읽어볼까. 언젠가 이런 날이 또 올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꽁초를 버리고, 마지막 한 개비를 꺼내물며 생각했다. 마시면 사라지는 술에 생활이며 돈을 탕진하는 것보다는 그편이 나을 것이다. 문득, 몇 달 뒤에 내가 어떤 생활을 하고 있을지가 궁금했고 버릇처럼 불길한 생각들이 떠올랐다. 그러나 그런 일을 지금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당장은 진로상담 문제를 힘이 닿는 대로 도와줘야 할 것이다. 대학까지 들어갔으면 나보다 나은 생활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마지막 꽁초를 버리고 집으로 돌아갔다. 도움이 될 만한 책이 분명 더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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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편)구멍

글/소설 2021. 8. 18. 21:17 |

(고전적 글쓰기 연습)

구멍


 나는 지금 탁자 위에 앉아 검은 파도가 치는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다. 이 재앙은 모두 내가 불러온 것이다. 현실을 캄캄한 구멍 속에 집어넣으려 했던 결과, 이제 곧 내가 그 어둠에 삼켜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힘주어 말하건데, 나는 아무런 후회도 하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다.

 처음에는 부엌에 놔두었던 음식이 몇 개 없어졌다는 것을 눈치챈 정도였다. 대수롭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아마도 내가 먹어치운 뒤에 그 사실을 잊어버린 것일 터다. 나는 혼자 살고 있었고 내 기억력은 언제나 분명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일은 흔히 일어나는 것이었다. 하지만 몇 번이나 비슷한 일이 반복되었다. 그러자 내 건망증이 범인이 아니라는 것은 확신할 수 있었다. 부엌에 올려놓았던 사과나 식빵들, 장을 보고 탁자 위에 던져둔 채소들이 갉아 먹혔다. 다용도실에 있는 쌀자루의 귀퉁이가 터진 것까지 발견하자 나는 마침내 상황을 제대로 판단할 수 있었다.
 다음 날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나는 곧바로 시장으로 향했다. 시장 입구에서는 커다란 카트를 끌고 다니는 행상인이 해충구제 약을 쌓아놓고 팔고 있었다. 카트에 달린 파라솔 밑에서 부채질을 하고 있는 중년 여성에게 집에 쥐가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녀는 중국어가 인쇄된 상자를 하나 내밀며, 음식에 섞어 집안에 뿌려두라고 했다. 그리고 내 얼굴을 바라보더니, 독한 약이니 엄한 데 쓰지 말라는 말을 덧붙였다.
 그녀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다. 집으로 돌아온 뒤 나는 설명을 들은 대로 빵조각에 약을 섞어 부엌과 다용도실 구석에 뿌려두었다. 쥐약을 집어 먹은 놈들이 어떻게 되는지 직접 보고 싶었지만 이미 외출할 시간이었다. 밖으로 나서기 전 집안 곳곳을 다시 한번 살펴보았다. 거실의 어두운 구석에서 나는 놈들의 소굴을 발견했다. 거실 벽이 나무 몰딩으로 되어있기 때문에 이런 사태가 일어난 것이 확실했다. 그곳에는 날카로운 무언가로 긁어서 뚫어놓은 듯한 작은 구멍이 있었다. 구멍은 성인 남성의 주먹 절반 정도 되는 크기였다. 안쪽은 아주 깜깜해서 무엇이 있는지, 얼마나 깊은지 알 도리가 없었다. 저녁에 돌아오면 전부 정리되어 있으려니 하며, 나는 집을 나섰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나는 약을 뿌려두었던 곳을 확인했다. 검고 지저분한 쥐의 시체 하나를 발견했을 때 나는 정확히 설명하기 힘든 음습한 기쁨을 느꼈다. 그것은 축 늘어진 채 다용도실 한복판에서 죽어있었다. 죽기 직전까지 쌀 포대를 갉아먹고 있었는지 주변에 쌀알이 흩어져있었다. 나는 비닐장갑을 끼고 시체를 집어 들었다. 죽은 생물을 만질 때의 촉감은 절대 익숙해지지 않을 것 같았다. 나는 쥐를 들고 선 채로 잠시 고민했는데, 이것을 도대체 어디에 버려야 할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분명히 일반 쓰레기는 아니고, 음식물쓰레기라고 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때 나에게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어렸을 때 읽었던 동물도감에 따르면 쥐들은 잡식이라고 했다. 놈들은 무엇이든 먹으며, 단 한시라도 먹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5분에서 10분만 굶어도 죽어버리는 것이 쥐라고, 분명히 읽은 기억이 났다. 그래서 나는 쥐의 몸뚱어리를 거실로 들고 가, 어둡고 캄캄한 놈들의 구멍 안으로 집어넣었다. 그것들이 알아서 처리할 것이라는 강한 확신이 들었다.

 그 뒤로 사흘 정도 아무 일도 없었다. 쥐들은 더 이상 내 음식을 훔쳐가지 않았고, 나도 구멍을 내버려 뒀다. 시멘트를 발라 막아버릴까 생각해봤지만, 놈들이 음식을 훔쳐가지 않는다면 그럴 이유도 없었다. 게다가 그 구멍은 의외로 내게 편리한 것이기도 했다. 독신생활을 하며 생기는, 음식물 찌꺼기가 잔뜩 들러붙은 비닐이라든가, 종이와 플라스틱이 단단히 붙어있는 포장지 등, 배출이 난감한 쓰레기는 그 구멍에 넣어버리면 그만이었다. 밖으로 밀려 나오거나 안에서 썩는 냄새가 나지 않는 사실로 보아 구멍 안에 사는 것들이 알아서 잘 처리하는 것 같았다. 쓰레기를 구겨 넣을 때마다 모서리끼리 마찰하기 때문인지 구멍이 조금씩 커지는 것도 같았다. 그러나 크게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에게는 특이한 취미가 생겼다. 신문을 읽다가 불쾌한 기사가 있으면 오려서 구멍에 넣었다. 주로 정치, 사회와 관련된 기사들이었다. 전기, 가스비 따위의 청구서는 요금을 지불한 뒤에 누군가에게 복수라도 하는 기분으로 구멍에 욱여넣었다. 구멍은 정말 끝도 없이 깊은 것인지 아니면 그 안의 짐승들이 내가 넣는 불쾌한 것들을 전부 먹어치우고 있는 것인지, 절대 막히는 일이 없었다. 어느새 나는 이 구멍이 집에 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이 구멍이야말로 현대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온갖 불쾌하고 어딘가 멀리 집어던지고 싶은 물건들―혹은 생각들―을 구멍이 훌륭하게 처리해주지 않는가. 성가시고 정신건강에 도움이 되지 않는 모든 것이 구멍 안에서 해충들에게 갉아 먹히고 있었다. 바로 눈앞에 그 새까맣고 커다란 구멍이 있으니 그러한 상상은 노력 없이도 즉각적으로 떠오르는 것이었다.
 그 후로 오랫동안 나는 온갖 것들을 구멍에 집어넣었다. 누군가의 부고(訃告), 5년 넘게 만나지 않은 옛 친구가 보내온 청첩장, 구청에서 보낸 선거홍보지, 죽어버린 화초, 심지어 사회생활에 진절머리가 났을 때는 지갑에 있던 30여 장의 명함을 전부 구겨 넣기도 했다. 내 손길을 타면서 구멍은 계속해서 커졌고, 나는 내가 ‘그것들’에게 먹이를 주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분명히 알고는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먹이를 주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 표현을 일차원적이고 피상적인 의미로밖에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나는 그 ‘구멍’에만 너무 집중하고 있었다. 생활의 일부이자 나의 특별한 쓰레기통이 된, 새카만 입구까지밖에 생각하지 못했다. 구멍의 안쪽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을지, 한 무리의 쥐들이 계속해서 내가 주는 먹이를 갉아먹으며 생존할 때 그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어느 날 저녁, 거실 의자에 앉아 식사를 하고 있을 때였다. 그것은 정말 아무것도 아닌 우연이었다. 젓가락으로 집은 반찬이 기름이나 조청 때문에 미끄러워서 떨어지는 일은 아무 때고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콩은 바닥에 떨어져 2cm 정도를 굴러갔다. 나는 그것이 굴러간 방향에 구멍이 있다는 것을 무심히 생각하며, 그리로 시선을 향했다. 그제야 나는 알아차렸다. 구멍이 처음 발견했을 때보다 세배 이상 넓어졌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이 사건이 벌어졌다. 굶주리고 잔악한―틀림없이 내가 먹여온 것들 때문에― 검은 파도가 핏빛으로 점멸하는 눈동자들과 함께 해일처럼 쏟아져나왔다.
 나에게는 경악할 시간도, 도망칠 시간도 없었다. 나는 식기들을 전부 밀어내며 탁자 위로 뛰듯이 올라갔다. 놈들은 순식간에 온 집안을 뒤덮었다. 곧이어 집 전체가 비명 지르는 것처럼 할퀴고 뜯어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들은 내가 올라앉은 탁자 다리를 그 흉측한 앞니로 갉아 먹고 있었다.

Posted by Lim_
:

봄의 조각들

글/소설 2020. 4. 16. 23:24 |

2020/04/16

 

1. 이것은 픽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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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의 조각들


 아름다운 음악을 틀어놓으면 되지 않을까? 바보 같긴, 바로 그 아름다운 음악을 못 견뎌서 방금 전 카페에서 일행을 놔두고 도망 나왔잖아. 사내는 방 안에서 장롱에 기대앉은 채 중얼거렸다. 책상 위에 로라제팜이 30알이 넘게 있지만 그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가 쓰고 싶다. 생각해보니 단 한 번도 그런 것을 쓴 일이 없다. 더욱이 모두가 행복한 결말이라면. 그렇게 생각하자 사내의 얼굴이 유리로 만든 가면처럼 굳었다. 갈비뼈가 온통 피부를 뚫고 튀어나와, 장미꽃마냥 활짝 필 것 같은 흉통을 느꼈다. 그럼 더할 나위 없지. 실패한 원고만 가득한 삶이라도 끝나는 것이 삶이다. 시체라도 꽃처럼 핀다면, 사람들은 아름답다고 하겠지.

 벌써 4월인데 말라비틀어진 잎사귀를 잔뜩 움켜쥐고 있는 나무를 보았다. 낙엽을 떨어트리기도 전에 죽었나, 하고 생각했다. 죽기 전에 낙엽을 놔줄 생각은 있었는지 궁금했다. 궁금증이 다른 생각으로 연계되기 전에 얼른 자리를 떴다.

 그래서 도대체 어쩔 것이냐, 라고 친구가 대뜸 물었다. 그런 난폭하게 걱정하는 말투는 생각지도 않던 중이라 사내는 흠칫 놀랐다. 뭐가 말이야, 하고 사내는 평정을 가장하면서 되물었다. 해가 넘어갈 무렵의 전집이었다. 친구가 막걸리와 안주를 샀다.
 “널 나쁘게 말하는 게 아니야. 다만 K도 너에게 돈을 빌려줬다던데.” 친구는 막걸리가 담긴 사발을 들고 마치 교무실의 선생님처럼 말했다. 사내는 친구의 눈을 바로 보면서도 손톱으로 숟가락 손잡이를 마구 긁더니, 그 돈은 A에게 빌렸던 돈을 갚는 데 썼어, 라고 말했다. 친구는 아무 말도 않더니 사발에 든 것을 마셨다. 친구의 눈은 질책을 담고 있지 않았다. 이놈의 혀를 잘라버릴까, 사내는 생각했다. 진실은 말을 하든 안 하든 변하는 것이 없다. 언제나 추하고 가학적이다.
 “네 빚, 얼마 안 되면 그냥 내가 갚아줄까.” 사발을 비우더니 친구가 한 말은 그것이었다. 그 뒤에 <나중에 편집부가 네 글을 사면>이라던가 <예전에 네가 냈던 책이 재판되기라도 하면> 같은 문장들이 따라왔지만, 사내한테는 들리지도 않았다. 손 좀 씻고 오겠다고 갑자기 일어나고선, 사내는 비틀비틀 밖으로 나갔다. 봄이었고 어두웠고 어디선가 윙윙거리는 소리가 났다. 어서 죽어야겠다, 그렇게 생각했다.

 인간의 책무.

 유서를 쓰려고 종이를 꺼냈는데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한 시간인가 두 시간을 백지만 쳐다보았다. 결국 사내는 펜을 들어 이렇게 썼다. 일평생이 수치였는데, 수치스럽지 않게 죽을 방법이 도무지 떠오르지 않습니다. 방도를 모색해보겠습니다. 그리고 그대로 서랍에 넣어버렸다.

 무가치한 원고작업에 시달리다가 밤을 새버린 어느 날, 흔치 않게 아침에 밖으로 나갔다. 산책을 할 요량이었다. 걷다보니 동네 중학교 앞까지 왔다. 적지만 교복을 입고 등교하는 학생들이 있었다. 사내는 선 채로 그들을 멀리서 쳐다보았다. 그들 한 명 한 명의 가족과 친척과 친구들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과거와 미래에 대해서도. 그 뒤에 주머니에 넣어뒀던 신경안정제를 꺼내먹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도둑고양이가 앞을 가로질렀다.

 밥은 잘 먹고 있냐고 어머니가 전화로 물어왔다. 거짓말을 했다. 사실 삼일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냉장고에 음식은 있지만 요새는 물만 마셔도 구역질이 난다. 어머니가 약은 잘 챙겨먹고 있냐고 물어왔다. 이번에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마치 차에 기름을 넣듯이 철저하게 먹고 있다. 병원비가 모자라지는 않냐고 물어왔다. 또 거짓말을 했다. 이젠 도대체 어디서 병원비를 충당해야할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 사내는 자신이 왜 가족에게 돈이 더 필요하다는 말을 하지 못하는 것인지 스스로도 모른다. 어머니가 잘 지내라며 인사를 했다. 전화를 끊고 사내는 한동안 소리 없이 울었다. 아니, 눈물이 나오지 않았으니 운 게 아닐지도 모른다.
 운건지 그냥 고개를 숙이고 있던 건지, 아무튼 그러고 나니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어차피 봄이다. 겨울옷 중 멀쩡해 보이는 것은 전부 전당포에 넘겨버리자. 사내는 집에서 10분 거리에 있던 전당포 간판을 기억해냈다. 그는 장롱에서 그나마 깨끗하고, 값이 나갔던 코트 같은 것들을 꺼냈다. 대부분 오래 전에 가족이 사준 것이었다. 일주일치 약값은 벌 수 있겠지. 혹은 빚의 일부라도 좀 갚을 수 있겠지. 그러면 스스로를 비참하게 여기는 일도 좀 덜해지겠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옷더미를 짊어 매고 전당포로 걸었다.
 전당포에서는 브랜드도 없는 코트 같은 건 받지 않았다.

 “무슨 일이야, 대체.” 사내가 병상에 누워있는 젊은 여자에게 물었다. 대학교 동창으로 그나마 최근까지 연락을 주고받던 여자다. 실의에 빠진 얼굴로 환자복을 입고, 왼쪽 손목에 부자연스러운 붕대를 감고 있다. 사실 무슨 일인지는 이미 알고 있다. 그저 자살시도가 도중에 발각된 정도의 사건인 것이다.
 “이상하지. 아픈 곳도 없는데 병원침대에 눕혀놓다니.” 여자가 자조적으로 말했다. 목소리가 갈라져있다. 이 갈라진 목소리가 함의하는 감정이 어떤 것인지 사내는 잘 파악할 수 없었다.
 “이 이상한 상황은 유희인 거야.” 건조하게 말했다.
 “유희였던 것 같은데. 하다 보니 진심이 됐어.” 여자가 웃는다.
 대답을 듣고 보니 지루하다. 낱낱이 듣지 않아도 낱낱이 추정할 수 있는 상황인 것이다. 정말로 쉬운 일이구나, 하고 사내는 생각했다. 어쩐지 저 붕대에서 인텔리 냄새가 난다.
 “왼손은 쓸 수 있대?” 이미 살아난 이상 질문은 한정되어있다.
 “아직 몰라. 인대가 다시 붙는다면.”
 유서에 써놨듯이 수치스럽지 않게 죽는 방법을 모색 중이다. 그런데 이 방법은 이미 오래전부터 지양하는 것이다. 처음 정신병원을 들락거렸을 때부터, 대기실에는 항상 왼쪽 손목에 붕대를 감은 젊고 바싹 마른 여자들이 어슬렁거렸다. 어렸던 그는 그녀들이 인간이 아니라 인간모양 얼음세공 같다고 생각했다. 그녀들에게서 살아있는 인간의 느낌을 받을 수 없었다. 굳이 자살하거나 하지 않아도 곧 형체도 없이 녹아 사라질 것 같았다. 사내는 그 얼음세공들에 대한 모든 가치판단을 영원히 보류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마음은 불유쾌했다. 버스에서 자신의 경동맥이 어디 있는지 목과 손목을 더듬어보았다.

 김밥을 한 줄 사서 돌아오는 중이었다. 여전히 뱃속이 들끓고 아무것도 소화시키지 못할 것 같았지만, 이러다가 정말 아사하는 게 아닌가 불안했다. 빌라 앞에서 늙은이 셋이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누군가가 주차를 이상하게 했다는 것이었다. 사내와는 아무 상관없는 일이었다. 조금 주춤거리며 그들을 지나쳤다. 오후 세 시에 사지 멀쩡한 청년이 슬리퍼를 끌고 다니는 걸 이상하게 보지는 않을까. 아무 가치도, 의미도 없는 걱정을 했다. 집에서 김밥을 이빨로 씹는데 어쩐지 울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달리지도 않을 열차에 석탄을 채우는 건 낭비고, 또한 슬픈 일이다.
 삼킨 김밥은 전부 토했다.

 근처 공원에 가니 개를 데리고 산책 나온 사람들이 많았다. 저 개들은 주인과 함께여서 기뻐 보이는구나.

 결국 죽게 된다. 봄 햇살이 따사로웠고, 이것이 사내의 책이 아무도 모르게 출간되었다가 아무도 모르게 잊혀 진 뒤 몇 번째 봄이던가. 봄 햇살처럼 아름다운 것을 쓰고 싶다. 태양 같은 것은 싫다. 배경에 비춰지는 옅고 반투명한 햇살 같은 것이 쓰고 싶다. 반짝이고 따스하지만 정말로 그 어떤 질량도 가지지 않는, 사람들이 스스로 가슴을 열어 읽고 난 뒤 조금도 기억하지 못할 책. 나중에서야, 어라, 그런 책이 있었던가, 하고는 굳이 떠올리려 하지도 않을 책.
 유산도 묘비도, 그런 것을 남기기에는 평생을 철지난 날벌레의 심정으로 살아왔다. 날씨가 추워진 것을 느끼고 하수구에서 잠들며, 이제 죽는가, 하지만 다음날 아침 눈을 뜨고, 힘없이 날아다니고 행인들의 방해를 하다가 저녁에 다시 하수구에서, 이번에야말로 죽겠지, 그런데 또 눈을 뜨고, 그것을 반복하다가 어느새 겨울이 되어 동료들은 모두 죽었는데, 죽은 동료들을 시기하며 혼자 비척비척 날아다닌다.
 그래도 결국에는 죽겠지. 그러니 아름다운 사랑이야기가 쓰고 싶은 것이다. 통속 소설이라도 괜찮아. 오히려 사내는 통속 소설가들을 존경하고 싶다.

 할 말 있으면 해. 아니, 아무것도, 할 수 있는 말은 없어.

 자주 지나가는 골목에 어느 목수의 사무실이 있다. 사내가 지나갈 때마다 자신의 사무실 앞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다. 체구가 그렇게 크진 않지만 그을린 피부와 단단한 몸집 때문에 강인하게 보이는 목수다. 서로 전혀 아는 사이는 아니지만, 몇 개월이나 비슷한 시간에 사내는 그 앞을 지나가고, 목수는 그 시간에 담배를 피운다. 그러다보니 왠지는 모르겠으나 마주칠 때마다 가볍게 목례하게 되었고, 나중에는 목수가 인사를 걸어왔다.
 안녕하세요, 이 동네 사시는 모양이죠. 처음으로 인사를 받고 당황하여 입을 뻐끔거렸다. 안녕하세요, 하고 말했으나 즉시 목소리가 너무 작았던 것은 아닐까, 후회했다.
 “매일 이 시간에 지나가시더라고요.” 불붙은 담배를 입에 물더니, 담뱃갑 뚜껑을 열어 내밀면서 말했다. “피우세요?” 사내는 담배를 한 개비 뽑으면서 대답했다. “피우지만, 형편이 안 됩니다.” 그러자 목수는 끄덕거리면서 입술과 이빨로 뭐라 형언하기 힘든 소리를 냈다. 공감인지, 동정인지, 아무튼 그런 것이었다. 목수에게 라이터를 빌려 불을 붙이고 깊게 빨았다. 얼마만인지 기억도 없다. “좋네요.” 혼잣말인지 목수에게 하는 말인지 애매한 말투로 그렇게 말했다.
 “예술 하는 분이시죠?” 목수가 대뜸 그렇게 물었다. 놀랐다. “마주칠 때마다 분명히 그렇다고 생각했어요.” 사내는 당황하고 있었지만 겉보기에는 그저 멍하니 서서 담배를 피우는 것으로만 보였다. 한 박자 늦은 대답을 어렵게 꺼냈다. “아니, 아니요. 예술 같은 것은, 그다지…….” 말꼬리를 흐리며 땅을 본 채, 자신이 나누고 있는 대화가 무슨 의미인지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어쩐지 창피스럽고, 아니, 예술가라니, 그것은 사회에서 가장 쓸모없는 사람들의 총칭이라고 생각한다. 인간구실도 못하면서 끊임없이 사람들한테 기생할 명분을 만드는, 그런 것이 예술가라고, 아, 그렇다면 나는 예술가다. 사내는 갑자기 목이 잠기는 것을 느꼈다.
 “담배, 고맙습니다.” 꽁초를 쥔 손을 올리며 힘겹게 말했다. 그 말을 하는 동안은 목수의 눈동자를 쳐다보고자 노력했다. 그리고 사내는 일방적으로 목례를 하고 자리를 벗어났다. 작은 삼거리를 돌아 집으로 가는 골목을 걸으며, 온갖 처참이라고 부를만한 감정들을 애써 무시하고, 그저 담배를 피울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한모금의 연기를 삼킬 때마다 심장이 딱딱하게 닫혀가는 기분이 들어서, 용케 주저앉지 않고 걸을 수 있었다.

 그 선생은 흰 당나귀도 나타샤도 있었잖아. 그러면 됐지. 나타샤가 그 선생을 사랑했잖아. 그러면 더 이상 쓰지 않아도 되는 거야. 아름다운 나타샤가 널 사랑하면, 그러면 넌 펜이고 원고지고, 그런 것은 더러운 것이라고 버릴 수도 있겠지.

 “휴양 온 거라고 생각하고 느긋이 지내.” 버스정류장에서 기다리던 매형은 그렇게 말했다. “아니요. 그렇게 오래 있을 생각은 없습니다.” 사내는 음색도 없이 대답했다. 기분이 언짢은 것은 아니었다. 다만 스스로도 지금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었다. 지저분한 방안에서, 완성한들 동전 한 푼도 되지 않을 원고에 병적으로 집착하던 여느 날, 그저 한없이 고독하고 서러웠던 것이다. 누가 인간의 체온을 갖고 있을까, 누가 나에 대해 보편적인 애정을 갖고 있지? 하고 생각했던 것이다. 사내는 결국 뒤돌아보지도 않고 서서히 멀어졌던 가족에게 생각이 미쳤다. 그러나 부모님은 안 된다. 그들에게 가서 당신들의 아들이 이렇게나 망가졌다는 것을 자랑스레 내보일 수는 없다. 누이와의 사이는 어땠더라. 우리가 좋은 남매였는지 전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사내는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누이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떠올릴 수가 없었다. 그러나 조카가 태어나던 날, 매형이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자신에게 감동스러운 호의를 보인 것은 기억하고 있었다. 그날 사내는 병원에서 나는 소독제 냄새가 왜 이렇게 익숙한 것인지 혼자 혼란스러워하고만 있었는데, 매형은 와줘서 고맙다면서 크게 웃는 얼굴로 어깨를 탕탕 두드려주었다. 아마 5년 전이다. 그 뒤로 누이도 매형도 만난 일이 없다. 그러나 사내는 고장 난 기계가 돌발행동을 하는 것처럼 누이가 아니라 매형에게 전화를 걸었던 것이다. 얼굴 좀 보러가도 될까요, 라고.
 그런데 휴양 온 거라고 생각하라니, 사내가 집안의 문젯거리라는 사실은 진즉 모두가 알고 있는 것이다. 아아, 그렇구나. 오랜만에 만나서 정말로 반갑다고 웃으며 말하는 매형의 이 친절어린 태도에 스스로의 존재가 진절머리 난다. “그러고 보니, 조카가 이제.” “5살이지. 말도 잘 해.” 그렇군요, 하며 중얼거린다. 그것을 잊고 있었다. 조카가, 어린아이가 있다는 것. 그러나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매형이 아파트 현관문을 열고 있었다. “오늘 저녁은 외식을 하자. 다 같이 맛있는 거라도 먹자고.” 그런 얘기를 하면서.
 두 사람이 현관으로 들어가고, 어린아이가 아빠, 하며 달려 나오고, 그 어린아이가 생면부지의 친척을 보고 경계하고, 아버지가 딸에게 네 외삼촌이야, 하고 소개하고, 외삼촌은 어떤 표정을 지어야할지 몰라서 입꼬리가 뒤틀려있고. 그 일련의 사건들 사이에서 외삼촌은 대체로 자기가 왜 여기에 왔는지 후회하고 있었다.
 간신히 소파에 둘러앉아, 사내는 매형이 건넨 캔맥주를 들고 있다. 병든 위장이 이걸 감당할 수 있을지 걱정하고 있다. 조카는 지금 외삼촌에게 굉장히 흥미가 있다. 약간 경계를 하면서도 옆에 앉아 사내를 구석구석 관찰한다. “정말 우리 외삼촌이에요?” “그렇지. 그럴 거야.” 얼버무리듯이 대답하면서 매형에게 누이는 집에 없는지 묻는다. 곧 올 거라고 한다. 이제야 조카를 쳐다보니 과연 예쁘게 생긴 여자아이다. 성장하면서 어떻게 변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미인이 될 것이다. 사내는 이 아이가 가엾다고 생각한다. 아니 물론, 추녀인 것보다야 편한 삶이겠지만, 그런 이야기가 아니다. “머리 예쁘게 묶었네.” 마음에도 없는 소리지만 이런 말을 던지면 아이들이 알아서 떠들기 시작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건요, 엄마가요, 아빠가 별님 머리끈을 사왔는데요, 기타 등등. 사내는 이미 듣지도 않고 절망적인 문장들을 곱씹고 있다. 5년을 살았고, 광야처럼 끝이 안 보이고 난폭한 미래가 있다. 아하, 광야처럼, 이라니. 어리면 급사하지 않는다는 법칙 같은 것도 없지 않은가. 왜인지는 모르지만 사람들은 대처할 수 없는 미래에 대해서는 상정하지 않는 습성이 있다. 모두 죽는다. 모두들 하나같이 정당한 이유도 없이 죽는다. 이런 젠장. 사내는 자신이 신이 나서 떠드는 5살짜리 조카를 눈앞에 두고 죽음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남의 죽음이 문제가 아니다. 자신이 죽어야 한다. 영혼에 독액이 퍼진 상태로 너무 오래 살았다. 진작 죽어야했을 인간이 억지로 살고 있으니 모든 것에서 죽음이 보이는 것이다. 발정난 개가 아무것에나 허리를 흔들 듯이, 보이는 모든 것이 죽음으로 가는 길을 가리킨다.
 기가 죽고 눈물이 날 것 같아서 사내는 괜히 맥주 캔을 땄다. 기포가 좁은 틈새로 뿜어져 나오는 소리가 났다. “아빠도 이거 좋아하는데, 너무 마시면 엄마한테 혼나요.” 아이가 동그란 눈을 하고 말했다. 매형이 소리 내 웃었다. 사내는 따라 웃으려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얼마 뒤 집에 들어온 누이는 남동생의 얼굴을 보자마자 이런 말을 했다. “너, 더 안 좋아졌네.” 사내는 과연 가족뿐이다, 생각하고 웃으며 대꾸했다. “뭘, 언제나 비슷해.”
 호화로운 외식. 거의 먹지 못했다. 매형이 걱정했다. 누이는 남편에게 걱정할 필요 없다고 말했다. 생각보다 조카가 먹성이 좋았다. 위장이 안 좋은 탓인지 몇 잔 만에 술에 취했다. 마음이 우수수 무너질 것 같은 죄책감으로 미소를 유지했다.
 새벽에 슬그머니 일어나 아무도 깨우지 않고 집으로 돌아갔다. 심야 버스 안에는 온통 검은색 연기가 들어찬 것 같았다.

 왜 죽지 않는 거지? 왜?

 영화에서, 어느 백인 배우가 상대 배우에게 데미지드 굿즈(Damaged goods)라고 소리를 질렀다. 상대 배우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 아가씨가 알고 보니 아주 무섭더라고, 까맣고 세련된 가죽 핸드백에 항상 마르크스를 넣고 다니고, 내가 능청스럽게 술이라도 한 잔 할까, 하면 그 하얗고 예쁜 얼굴이 순식간에 살인범을 추궁하는 고결한 검사나리 같아지는 거야, 아무 말도 않지만, 칼날처럼 시퍼런 눈동자가 마치, 당신은 그 술 마시면서 무산계급의 혁명을 위해 무어라도 했나? 라고 쏘아붙이는 것 같다니까.” 친구가 한 손에 맥주잔을 들고 낄낄거리면서 떠들고 있다. 사내는 멍하니 듣고 있다가 묻는다. “잠깐, 그 여자, 전에 말했던 그 여대생이야?” “그래, 아주 인텔리한 아가씨야, 그렇지?” 지금 저급하게 웃으며 자기 엽색 얘기나 하고 있는 이 친구는 놀랍게도 전에 사내의 빚을 대신 갚아주겠다고 말한 그 사람이다. 만날 때마다 자기가 마시고 싶으니 술을 사주곤 하는데, 매번 컨디션에 따라 완전히 다른 성격이 되는 것이 감탄스럽다고 사내는 생각한다. “우리들, 곧 30대 후반이 되는 거 아니었나.” 사내가 중얼중얼 말한다. 사실 말하면서도 별로 지탄할 생각도 없다. 어차피 이 친구는 일주일 뒤면 다른 여자 얘기를 할 것이다. “나이가 무슨 상관이야, 지금 세상에 마르크스주의 여대생이라고. 신기해서라도 손을 댈 수밖에 없지.” “그렇기도 하겠지.” 맥주를 홀짝이면서 무성의하게 대답한다. “이미 뒹굴었지?” 역전에서 만났을 때 친구가 비열한 미소를 띠고 있는 것을 보고 이미 눈치 채고 있었다. “도대체가 무슨 수집취미라도 있는 거야.” 신기한 것을 보면 자기 위장 속에 집어넣어야하는 사람들이 있기도 하다.
 그래도 네가 즐거워 보여 다행이다. 30대가 남자의 전성기라고 어디서 들었던 것 같다. 사내의 전성기도 오는가. 그런데 도대체 무슨 전성기냔 말이다. 방안에서 원고 파지나 구겨 발로 차고, 밤에 삼킬 약이나 한줌 달그락거리는 그런 전성기인가. 그러고 보니 최근 체중이 성인이 된 뒤 최저점을 찍긴 했다. 화장실에서 거울을 보고 이것 봐, 시체가 웃고 있군, 하며 실실거리기도 했다. 여러모로 절정에 다다르긴 했구나, 사내는 혀를 차며 생각했다. 아아, 최소한 40대가 되기 전엔 꼭, 꼭 죽고 말테다. 기도하듯이 읊조렸다. “로맨스는 말이야, 역시 한쪽이 죽어야 해. 함께 죽는다면 더할 나위 없지…….” 사내가 맥주잔을 들여다보며 느릿느릿 말했다. “죽기는. 이 몸으로 즐길 게 얼마나 많은데. 셰익스피어 때부터 작가들은 나쁜 버릇이 있어.” “그 몸이 썩어버리고 만단 말이다……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라면, 반드시 등장인물들이 아름다울 때 끝이 나버려야 하는 거라고…….” 취했나? 위장병을 앓고서부터 주량에 대중이 없어져버렸다. 그러면서도 위악적으로 들이킨다.
 어찌됐건 친구는 사내의 말을 주의 깊게 듣지 않을 것이다. 그를 아는 모든 사람들이 그의 말을 주의 깊게 듣지 않는다. 멸망할 것 같은 어조로 가끔씩 입을 열어 헛소리를 하는 사람, 그렇게 역할이 정해져 있다. 사내의 말에서 의미를 찾으려는 사람은, 기껏해야 병원 의사 정도겠지.
 봄이 가기 전에 끝을 낼까. 청산가리는 어쩐지 야생화의 이름 같다.

 술이다, 술. 취하면 중요한 말이라고는 한 마디도 못하게 되니 좋다. 취중에는 진담이 아니라 허담만 오가는 것이다. 그편이 마음을 다치지 않는다.

 A에게서 전화가 왔다. 대학 동창이다. 얼마 전 사내는 K에게 돈을 빌려 그에게 빌렸던 돈을 갚았다. 아무튼 전화기 너머에서 그가 짤막하게 내뱉었다. “죽었어.” 사내는 조용히 있다가 퍼뜩 되물었다. “뭐? 무슨 말이야?” “그러니까 죽었다고. 간호사가 옮기던 카트를 덮쳐서 주사기를 닥치는 대로 자기 몸에 찔렀대.” 사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할 말이 없었다. 전화기를 들고 막힌 창문만 멍하니 보고 있었다. 그 녀석이 그런 행동력이 있었다니, 놀라운 일이다, 이런 생각이나 하고 있었다. “갈 거냐?” A가 무덤덤하게 물었다. “어딜?” 사내는 계속 되묻기만 하는 자신이 멍청하게 느껴졌다. “장례식 말이야. 듣자하니 부모는 슬프기보다 열이 머리에 뻗쳐서, 그런 불효자식은 딸도 아니라고 장례를 안 연다는 얘기도 있었다는 모양이다만.” “아, 모르겠는데, 몰라.” 이상한 대화에 계속 침묵이 낀다. “……나중에 정해지면 장례식 일정이랑 주소는 보내 놓을게.” 혹시 A는 사내가 슬퍼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그냥 두어도 별 상관은 없다. 전화가 끊겼다.
 사건을 진지하게 생각하기가 쉽지 않다. 도무지 그 녀석이 인생에 엄청난 비애가 있어, 마지막 결단을 내린 것이라고는 생각이 되질 않는 것이다. 이것도 그저 대학시절부터 계속 반복되어왔던 퍼포먼스의 일환인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래서 사내는 전화를 끊고도 여전히 어리둥절한 상태였다.
 A는 사내가 대학재학 당시 함께 몰려다니던 무리의 중심 같은 인물이었다. 다른 학과였지만 동아리인지 뭔지 기억도 나지 않는 경로를 통해 자연스럽게 어울렸고, 어느새 무슨 술자리라도 생기면 가장 많이 전화를 걸어대는 사람이 되었다. 아마 그래서 이번에도 제일 먼저 정보를 접했고 무슨 의무감으로 전화를 돌려대는 것이겠지. 여하간 사내는 무표정으로 전화기 겉면을 쓰다듬고 있었다. 간호사가 끌고 다니는 카트에 약물이 든 주사기가 있을 리가 없을 텐데. 혈관에 공기라도 주사했나. 괴상한 일이다. 그런데 괴상하지 않을 이유도 없다. 죽으려고 하면 무슨 방법으로든 죽겠지. 시간만 있다면 카테터로도 목을 매달았을 것이다.
 “꽃이라도 사둘까.” 사내가 마치 자기가 들어야만 한다는 듯이 말했다. 그러나 즉시 부정한다. “아니야, 바보 같은 짓이다.” 결국 흉측하게 시들고 말 것을 왜 돈 주고 산단 말인가. 받는 입장에서도 처치곤란이다.
 이로써 사내의 생활에서 잡담이나마 나눌 수 있는 여자의 수는 제로가 되었다.
 그러고 보니 A는 재작년엔가 결혼을 했지.

 완성이다. 내 평생의 역작이다. 한 30번째 평생의 역작인 것 같다. 가슴이 기쁘고 들떠서 지금이라면 옥상에서 소리 내 웃으며 뛰어내릴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그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는 언제 쓸 수 있게 될까. 그걸 쓰지 못하고 죽으면 영 멋이 없는데. 아니, 어찌되든 멋은 없겠지. 멋은 계속 살아가는 사람들만 쓰는 말이다.

 “재미가 없어요.” 편집장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이 사람은 처음 사내가 소설책을 낼 때 일반 편집자로 담당되었었는데, 어느새 부서 편집장이 되었다. “재미가 없고, 너무 난해하고 음습해요. 아무도 이런 건 돈 내고 보지 않아요.” 사내는 표정도 변하지 않고 편집장을 쳐다보고 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기 이전에, 사실 아무 생각도 없다. “애당초 이거 소설입니까, 아니면 수필입니까, 그도 아니면 무슨 언어유희 같은 겁니까.” 분명히 악의가 담겨서 하는 말은 아니다. 그 정도는 분간할 수 있다. 그런데 사내는 대답할 수가 없는 것이다. 할 말도 없고, 하도록 된 말도 없다. “저기.” 사내가 가까스로 입을 뗀다.
 “오천 원만 빌려주시겠습니까. 돌아갈 차비가 없습니다.”

 외로움. 외로움. 외로움. 그러나 더 외로워할 기력도 없다.

 사내가 방에 틀어박혀 뭔가를 쓴다. 가끔씩 만취한 사람처럼 혀를 내밀며 헛구역질을 한다. 난폭하게 잉크를 새기고 있는 종이는 다름 아닌, 예전에 썼던 유서의 뒷면이다. 책상과 마주보고 있는 면에는 여전히 수치가 어쩌고, 방도를 모색해보겠다는 문장이 변명처럼 적혀있다. 깨끗한 면에 뭔가를 마구 쓰고 있다.
 옛 시절에는 여인들이 낙태를 하기 위해 간장을 통째로 퍼마시곤 했다는 기록을 보았습니다. 무서운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 짠맛에 몸부림치며 태아는 차라리 게으른 노인처럼 안도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합니다. 아무래도 어머니의 품에서 나오게 되면 자, 이것이 네 이름이고, 이것은 네 책임이고, 이것은 네 운명이다, 하며 짊어질 십자가가 너무 많은 것입니다. 너는 인간이니까, 라는 말에서 벗어날 수가 없게 되어버립니다. 인간이니까, 인간이니까 인간이 되려고 발버둥치는 수밖에 없습니다. 중략. 아름다운 사랑이야기가 쓰고 싶었다는 꿈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 동경이었을까요. 극본이 될 만큼 아름다운 연인은 필시 손을 마주잡고 죽어야한다는 이야기를 하기도 했습니다만, 솔직히 다른 결말이더라도 그 극본의 위대함에 손상이 가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작가가 연인을 죽이든, 연인에게 모든 시선을 집중시키고 그 세상 자체를 페이드아웃 하든, 그다지 다를 것도 없습니다. 사랑이라는 꽃이 활짝 피었을 때, 나중에 반드시 시들어 추악하게 되리라는 운명을 가위로 잘라낸다는 점에서 동일합니다. 역시 온 세상이 황금이 된 것 같은 아름다운 순간만을 고정시키고 싶은 것입니다. 이런, 셰익스피어 이후로 늘 작가들은 나쁜 버릇이 있다는 친구의 말이 옳은 것 같기도 합니다.
 구구절절…….
 이건 유서인가? 도대체가 유서인지, 수기인지, 그냥 언어유희인지. 사내는 새로운 종이를 세 장이나 더 꺼내어 정체불명의 희론 같은 것을 완성했다. 그리고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다는 불쾌한 기분을 느꼈다. 아무도 읽지 말기를, 기도하며 그 종이뭉치를 원래 있던 서랍에 넣었다.

 만일 늑대였다면 초원을 달리는 게 억울했을 것이고, 만일 새였다면 하늘을 나는 것이 서러웠을 것이다. 그런 기분으로 생명을 얻었다.

 4월. 아직 봄이다. 창문을 막고 있는 신문지를 다 뜯어내고 활짝 열었다. 이제 차갑지는 않지만 조금 서늘한 바람이 분다. 사내는 장롱을 기어 올라가 높은 곳에 있는 벽장을 열었다. 곰팡이냄새가 자욱한 안쪽에서 설탕이 담긴 병 같은 것을 꺼냈다. 다시 장롱을 기어 내려가 부엌으로 갔다. 유리컵에 수돗물을 담았다. 그리고 설탕 같은 것을 병에서 듬뿍 퍼내어 물에 넣고, 숟가락으로 계속 저으며 녹였다. 잘 녹지 않았다. 아무리 저어도 알갱이가 남아서 사내는 쓸쓸한 기분이 되었다. 시간은 밤이다.
 담배가 피우고 싶었다.
 담배가 있다면 좋을 텐데.

 자, 집에 가자.


끝.

Posted by Lim_
:

동생의 기억

글/소설 2020. 2. 4. 19:53 |

동생의 기억


 형 주변에 항상 신기한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을 기억한다. 늘 악기 케이스를 등에 매고 다니는 사람무리라든가, 볼 때 마다 줄담배를 물고 있는 더벅머리를 한 남자들이라든가 말이다. 형과 나는 십년을 훌쩍 넘기는 나이차가 있어서, 형은 동생이라기보다 조카쯤 되는 아이를 데리고 다니는 기분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분명 형이 나를 같은 핏줄로서 아낀다는 것은 당시의 어렸던 나도 느낄 수 있었다. 당시 형의 직업이 도대체 무엇이었는지는 지금도 알 수 없다. 일정하게 출퇴근을 하는 것도 아니었고 한량처럼 부모님에게 돈을 꾸지도 않았다. 다만 일주일에 몇 번인가 집에 돌아오지 않는 밤이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으레 대낮에 집 앞의 평상에서 담배를 피우다가, 당시 여덟 살이나 됐을까 싶은 내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낸다. 지폐 몇 장을 내밀면서, 담배 하나랑 너 먹을 과자 사와라, 하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내 어린 시절의 군것질 값은 전부 아버지나 어머니가 아닌 형이 내주었다.
 이따금, 주로 여름이었던 것 같은데, 산보하기 좋은 저녁이면 형은 나를 데리고 신정동에서 크게 원을 그리며 돌아다녔다. 노을 때문에 벽돌담들의 그림자가 길어진 골목에서 왼손은 호주머니에 넣고, 언제나처럼 담배를 피우며 형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지 알 수 없는 그 얼굴로 느릿느릿 걸었다. 너무 느려서 내가 답답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골목을 걷다보면 꼭 어느 집의 지하실로 들어가는데, 지하실에는 조악한 드럼세트나 낡은 앰프 같은 것들 주변에 때가 탄 매트리스가 깔려있다. 형의 친구들 중 몇몇은 저녁마다 그곳에 둘러앉아, 도대체 연주하는 걸 본 적도 없는 통기타들을 벽에 세워두고 막사발에 소주를 마시며 늘 뭔가에 대한 논쟁을 펼치는 것이다. 나와 형이 지하실에 들어가면 다들 반기곤 했다. 그들은 내 친척이라도 된 것처럼 나를 예뻐했는데, 내가 그 아저씨뻘의 형들과 장난을 치는 사이 형은 술자리에 끼어 꼭 두어 잔씩만 마시면서 친구들과 무슨 얘기인가를 했다. 무슨 얘기였는지는 들은 바가 없다. 그저 어린 마음에 우리 형이니까 뭐든 간에 중요한 얘기겠지, 했을 뿐이다.
 그 뒤에는 지하실을 나와 또 걷고, 공원이나 공터에서 다른 친구무리들과 비슷한 일을 반복한다. 형은 신정동 어딜 가도 항상 친구가 있었다. 어딜 가나 친구들이 형을 반기고, 나는 그런 형의 어린 동생이라는 이유만으로 귀여움을 샀다. 산보는 언제나 집근처의 대포집에서 끝났다. 마지막으로 들르는 그 대포집에는 형의 친구가 아니라 아버지가 있었고, 얼큰히 취한 아버지가, 막내가 왔구나, 이제 집으로 갈까, 하면 나는 아버지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며 아버지가 마신 것을 계산하는 형을 뒤돌아봤다.
 출근도 하지 않고 매일 평상 위에서 담배만 피우며 앉아있던 형이 도대체 무슨 수로 항상 푼돈이나마 있었는지, 어렴풋이 짐작이 가는 바가 있다. 그러나 직장을 짐작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형이 무얼 하던 사람이었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당시에도 여기저기 떨어져있던 힌트들을, 이제 어른이 되어서야 짜맞춰보는 것이다. 내가 열 살이 되던 날, 헌병이 들이닥쳐 형을 데려갔고, 그 뒤로 동네에서 형뿐만이 아니라 형의 친구 몇 명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 전날 밤에는 드물게 형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거실의 수화기 너머에서 뭐라고 하는지는 알 방도가 없으나, 잠결에 열린 문틈으로 나는 형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 사상전파라고, 편집 담당이 가장 죄가 크니까, 나만 도망가지 않으면 되겠지.
 그 뒤로 형을 본 일은 없다. 형을 잡아간 헌병들은 그런 사람이 있었다는 것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니 무슨 죄목으로 잡아갔는지도 알 수가 없다.
 그리고 수년 뒤에 뭣 때문에 언론이 통제되니 신문이 검열되었다느니 큰일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형은 여전히 존재한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 사람은 나의 짧았던 10년 속에만, 말이 없고 발걸음이 조용하던, 나이 많은 형으로 기억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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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퍼하는 나는 슬픔 자체가 슬픈 존재인가


 최씨는 쉽게 슬퍼한다. 오늘 아침에는 교복 차림의 소년소녀들을 보고 슬퍼했다. 그들이 발랄했기 때문에, 그리고 곧 그들의 젊음이 탁하게 흩어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젊음이라는 것의 덧없음에 대해 사유해보기도 전에 가로수를 보고 슬퍼했다. 그것이 도시계획에 의해 규칙적인 거리를 두고 일정하게 서있기 때문이었다. 인위성과 무위자연에 대해 저울질을 해보기도 전에 하늘에 구름이 너무 많아서 슬퍼했다. 이쯤 되니 최씨는 자신이 왜 슬퍼하는지도 알 수가 없어서 슬펐다. 그러나 딱히 논증할 것도 없었다. 슬픔은 기억나지도 않는 아주 오래 전부터 최씨의 뇌에 총알파편처럼 박혀있었고, 딱히 해결된 일도 없었다.
 그러나 최씨는 누군가에게 자신의 슬픔에 대해 말한 일이 없다. 애당초 서술이 불가능하다. 운명이려니 싶어서 괴로운 것이었다. 자신의 운명을 타인에게 해설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세상과 존재에 대한 엄청난 통찰이 있으면 모를까, 애초에 그런 통찰력이 있다면 슬프지도 않지 않을까. 이런 슬픔은 일종의 장애가 아닌가 싶었다. 도무지 해결되지 않는 정신의 장애 같은 것 말이다.
 퇴근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날씨가 추웠다. 바람이 칼날처럼 매섭게 불었다. 물론 어쩐지 슬픈 심상이 되었다. 겨울의 초입은 세계의 냄새 자체가 슬픈 뉘앙스를 풍긴다. 생명이 절멸한 것 같은 냄새가 난다. 그런데 최씨는 그런 발상으로 들어가자마자, 그렇다면 여름의 냄새는 슬프지 않은가, 단연 슬프다. 그 생명이 부풀어 터져 오르다가 부패하는 냄새도 슬프다. 하지만 겨울의 이 무기물로 공기가 가득 찬 것 같은 냄새도 슬프다. 그렇게 중얼거리며 슬퍼했다. 행성 자체가 슬픔으로 가득 찬 것 같다고 조용히 슬퍼했다.
 골목으로 들어서 최씨는 담배를 물었다. 담배를 피울 때는 슬픔이 조금 옅어지는 것 같았다. 폐에 독을 밀어 넣을 때는 슬프지 않다니, 그렇다면 생존자체가 슬픈 것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자 자신의 삶의 구조가 슬픈 것 같았다. 그러나 별 도리가 없었고, 너무나 오래된, 망각되지 않는 심상이고, 최씨는 결국 담배를 피우며 어두운 골목으로 터덜터덜 들어갔다.
 그런데 그날은 어쩐지 담배가 오래 타는 날이었다. 집의 현관 밖에 서서 여전히 남은 담배를 태우고 있자니 온갖 쓰잘데 없는 망상이 피어올랐다. 생각해보면 내 연배의 동료들은 이미 다들 결혼을 하고 아이도 있거나 하다. 나는 평생을 혼자 살아왔구나. 그것도 늘상 슬퍼하기만 하면서. 빨갛게 타는 불똥이 시야에서, 숨을 들이쉴 때마다 더욱 빨갛게 탔다. 집에 들어가도 물론 혼자다. 혼자 살기에 최적화된 공간에서 나는 혼자 슬퍼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벽지가 하얗다면 흰색에 대해 슬퍼하면서. 왜 흰색 벽지가 만들어지고, 사람들은 그것을 소비하는가에 대해 슬퍼하면서 말이다. 최씨는 담배를 뻐끔대며 시야가 어그러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눈물이 난 것도 뭣도 아니었고, 분명한 것은 최씨의 정신 자체가 슬픔으로 구부러지는 것이었다. 최씨는 가족이라는 개념에 대한 생각을 멈추지 않았다. 아버지는 얼마 전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늙은 채로 홀로 살고 있다. 그런데 그때 깨달은 것은,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느꼈던 슬픔이 하늘이 파란색이어서 느꼈던 슬픔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이었다. 어머니가 노인이 된 채 혼자 사는 현실도, 들고양이가 새벽에 울어서 느꼈던 슬픔과 다를 것 없었다. 담배는 이미 다 탔다. 최씨는 교묘한 어지러움을 느꼈다. 평생 슬퍼하기만 하면서 살아왔으나, 어쩌면 말이다, 나는 사실 살며 단 한 번도 제대로 슬퍼한 적이 없는 것은 아닐까. 그럼 나의 삶을 이토록 지배해왔던 심상은 무엇이었을까.
 다 탄 꽁초를 입에 멍하니 문 채 최씨는 한참을 현관 앞에 서있었다. 집으로 들어갈 마음도 어딘가로 뒷걸음질 칠 마음도 없었다. 어느 방향으로 몸을 움직여야할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최씨는 한참을 서있었다.
 계절은 여전히 겨울의 초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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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작은 마음은 어디에 있나


 준영은 바닥에 누워 있었다. 그는 계속 반복해서 네팔에서 사온 보리수 염주의 알을 세고 있었다. 몇 번을 세어도 107개나 109개가 될 뿐 도무지 108개라는 답이 나오질 않았다. 그 잡상인이 만들 때 108개를 정확히 넣지 않은 것은 아닐까, 그런 의문이 들면서도, 달리 할 일도 없어서 계속 세고 있었다. 보일러를 틀어놓은 방바닥은 따뜻했다.
 이대로 죽게 되는가, 그런 생각을 했다. 백수로 지낸 지 5년 째. 아무것도 하지 않고 살아온 지 5년 째. 5년 내내 되풀이한 문장은 다자이 오사무의 그 유명한 <수치스러운 삶을 살아왔습니다>였다. 무엇이 그리 수치스러웠는지 명확하게 기억나는 바는 없지만, 여하간 수치스러웠다. 단 한 푼도 벌지 않고 살면서도 겨울엔 바닥에 보일러가 돌아간다는 것이 수치스러웠다. 가끔 친구들이 부르면 무상으로 술을 얻어 마시는 것이 수치스러웠고, 취하면 기분이 드높아져 다음날 아침이면 후회할 짓을 저지르는 것도 수치스러웠다. 준영은 방바닥에서 공연히 발을 까딱거리며 48개째의 염주 알을 세고 있었다. 5년 전 네팔여행에서 사온 물건이다. 그때는 혼자가 아니었지, 그런 생각이 들었는데, 그것 또한 곧바로 고통이 될 생각이라 후회스러웠다.
 지금은 어떻게든 이름을 기억하지 않으려 애를 쓰는 대상이 있다. 5년 전에 준영의 인생에서 떨어져나간 사람이다. 그녀가 준영의 마지막 연인이었다. 짧은 듯 길었던 2년간의 연애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논하는 것도 지금에 와서는 쓸모도 없는 일이다. 다만 그때의 일은 수치스러울 일이 없었고 준영은 항상 헛헛했던 28년간의 삶도 그녀를 만나려고 있었던 삶이었거니 했다. 헛헛했던 삶. 참으로 얻을 것도 없는 세상에서의 삶이었지. 애당초 이 세상에서 얻긴 뭘 얻는단 말인가.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말이다, 금강석을 찾겠다고 바다를 체로 뜨는 일 같은 것이 세상살이다. 그런데 이런 생각은 좀 제쳐두고, 그 2년간은 정말로 세상이 온통 황금이 되어 빛나는 것 같았지. 수치나 후회도 전부 철폐되어 부서지곤 했지.
 네팔에 갔던 일을 지금까지도 도무지 가치판단 할 도리가 없다. 애당초 그녀를 만났던 것이 사찰에서였고, 28세의 준영은 출판사에서 도서 디자인을 하는 일을 하고 있었더랬다. 그녀는 미대를 나와 탱화 공부를 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무어 눈이 맞은 거야 온갖 이유나 인연이 있었겠지. 만날만 했으니 만난 것이었을 터다. 그런데 사랑이란 것에 빠졌던 일은, 그것이 도대체가 그럴듯한 일이었는지 알 수가 없다. 여하간 보석의 반짝임 같은 2년이기는 했다만은. 결론은 말이다, 그녀는 네팔의 산사들을 함께 돌아다니다가 불연이 닿았는지 법과 사랑에 빠졌는지, 준영은 한국으로 돌아올 때는 오롯이 혼자였다.
 연인이 사찰에서 바리깡으로 머리를 미는 것은 도무지 보지 못하겠고, 준영은 혼자 돌아왔다. 그리고 잃을 것은 전부 잃는 것이다. 애당초 잃지 않을 수 있는 것이 어디에 있겠는가. 세상이 황금빛으로 빛나는 것을 멈추자 회색과 잿빛의 먹먹한 광경이 되돌아왔다. 도시의 구석에서 그 광경을 마음에 새기는 와중에 직업도 잃고 무엇이고 잃어버렸다. 정확히 무얼 잃어버렸는지, 언어로 나열하기는 힘든 일인데 무엇이고 다 잃어버렸다. 흘러온 삶은 그야말로 수치가 되어 비수처럼 꽂히는 것이다. 그러나 절벽에서 몸을 날릴 만큼 대단한 좌절까지도 아니었다. 그저 의문스러운 것은, 5년 전인지 35년 전인지 어디론가 가버린 것 같은, 나의 작은 마음은 어디에 있나.
 그걸 찾으면 남은 삶에 거리낌이 없을 터인데.
 몇 백번을 더 세어야 이 염주 알은 108개가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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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대리인의 수기


8월 26일.
 오늘은 김가네에서 사온 김밥이 터져있었다. 참을 수 없이 화가 났다. 한 줄에 4500원이나 하는 김밥이 포장될 때부터 터져있다니 이것이 말이나 되는 일인가? 모두 사회인 실격이다. 김밥집에서 터진 김밥을 파는 사회 따위 애당초 없는 게 낫다.
 내가 돈이 썩어 넘쳐서 한 줄에 4500원 하는 김밥을 사는 게 아니란 말이다. 아무 김밥이나 먹을 셈이었으면 한 줄에 1000원하는 김밥으로 족하다. 김가네는 김밥 전문점이다. 김밥 전문점이면 김밥을 마는 사람도 김밥 전문가여야 한다. 동네 아줌마 데려다가 김밥 말게 해놓고 김밥 전문점이라고 하지 말란 말이다. 그러나 이따위 상황이 길마다 펼쳐져 있는 것이 현실 사회다. 이런 쓰레기 같은 것이 인류가 5천년에 걸쳐 만들어낸 문명사회다. 엿이나 먹으라지.
 생각해보니 오늘은 한 일이 김밥 사온 것 밖에 없다. 오후 3시 쯤 일어났던 것 같다. 그리고, 담배를 피우고, 잘 모르겠다. 사실 요즘은 매일이 이런 식이다. 어쩌면 그래서 터진 김밥에 불같이 화를 냈던 것일 수도. 당장은 수중에 돈이 좀 있다. 그래서 김가네에 가는 사치도 부렸던 것인데, 결국은 이 꼴이다. 망할 자식들, 어차피 숟가락으로 퍼먹어야 했다면 김밥이 아니라 공깃밥을 샀을 거다. 모두들 책임감이 결여되어있다. 엉망진창으로 사는 놈들뿐이다. 신은 없는 것이 분명하다. 성경을 보면 신은 인간들이 퇴폐와 향락에 좀 젖었다고 불벼락을 내리던 놈이다. 그런 놈이 지금 세상을 보고 가만히 있을 리 없다. 만약에 있다면 분노조절장애로 정신병원에 감금되어서 불벼락을 못 내리는 것이겠지.
 내일도 엿 같은 날일 것이 분명하다. 다만 김가네에는 가지 않겠다. 그럼 터진 김밥을 돈 내고 사먹는 엿 같음은 겪지 않아도 되겠지.

8월 27일(새벽).
 맞은편 건물의 늙은 부부가 또 지랄이다. 저 영감탱이는 미친 것이 틀림없다. 게다가 항상 새벽 1시 30분만 되면 지랄병이 도진다. 아마도 밖에서 술을 먹고 그때 들어오는 것 같다. 나이는 잘 모른다. 사실 얼굴도 모르지만 목소리로 보아 70대는 되었을 것이다. 매일 이 시간만 되면 술에 꼴아 자기 마누라한테 쌍욕을 하는 게 저 영감의 취미다. 왜 목을 매달고 죽어버리지 않는지 모르겠다. 아니면, 그렇게 마누라를 증오하면 차라리 칼을 들고 한바탕 한 뒤 9시 뉴스에라도 나오든가 말이다. 마누라라는 할망구도 똑같이 제정신이 아니다. 물론 제가 먼저 싸움을 시작한 일이 없는 것으로 보아 영감보다는 나은 것 같지만, 창문을 통해 들리는 두 미친 노인들의 육두문자를 듣노라면 짚신도 짝이 있다는 말이 헛소리는 아닌 것 같다. 지들끼리 쿵짝이 맞아서 같이 살기 시작했을 것인 인간들이 서로에게 외쳐대는 욕설은 그야말로 부모 죽인 원수끼리 같은 집에서 사는 것 같다. 저 늙은이들에게 자식이 있을 것인가 생각해봤는데, 아마 자식이 있다면 그것도 똑같이 미쳤을 것인즉 이 소음공해는 결국 자식이 노부모를 죽이는 것으로 해결이 될 것 같다.
 30분 쯤 지나면 결말은 언제나 똑같다. 너무 술에 꼴아 고래고래 욕설을 외쳐대는 게 지치면 영감탱이 쪽이 목소리가 잦아들더니, 마지막으로 <내일 아침밥을 해둬라>고 하고선 더 이상 짖어대는 소리가 들리지 않게 된다. 남자망신도 이런 망신이 없다. 할망구는 자빠져 자는 것으로 추정되는 남편에게 10분 정도 ‘개새끼’, ‘시발새끼’ 고함치다가 똑같이 조용해진다. 저것들은 죽어야한다. 만일 누가 나한테 이 세상에 존재할 가치가 없는 인간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난 저 노망난 늙은이들부터 언급한 뒤에 나머지 69억 9천만여 명의 인간들에 대해 이야기하겠다.
 가끔 ‘늙으면 죽어야지’하며 신세 한탄하는 늙은이들이 있는데, 내 맞은편 집 노부부에 대해서라면 제발 좀 추잡스럽게 계속 살지 말고 죽어줬으면 한다. 스스로의 삶이 수치스러운 것도 모른다면 차라리 남의 손에라도 죽어야한다. 제기랄, 인간이란 것들은 하나같이 추하고 더럽고 그런 주제에 끈질겨서, 말하자면 마치 서로 피를 빨며 뫼비우스의 띠를 이루고 있는 거머리들 같다. 지금은 탄탄하고 잘나 보이는 인간들도 애초에 근본은 모조리 폐기물덩어리 같아서, 늙으면서 그 유독물질이 점점 피부 가까이 퍼지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겉보기에도 벌레인지 사람인지 알 수 없게 되어 보는 이로 하여금 눈살을 찌푸리게 만든다.
 쓰레기 같은 인간들. 덕분에 오늘도 해가 뜨기 한참 전부터 개 같은 기분이다.

8월 27일.
 오늘은 하루 종일 논문을 썼다. 새벽에 있었던 기분 더러운 소음 때문에 오랫동안 잠들지 못하다가 맨바닥에서 잠들어, 오후 늦게 깼다. 논문은 인간의 다면성을 전제로, 개인이 타인을 얼마나 일방적으로 판단하는 지에 대한 내용이었다. 아직 완성하지는 못했지만 꽤 잘 진행되고 있다는 기분이 든다. 그러나 완성된다고 한들 아무 의미도 없을 것이다. 예전에는 논문을 쓰면 신문의 칼럼란에 투고해볼까 하는 생각도 했다. 그러나 정작 신문을 읽어보면 칼럼란에는 별 지적장애인이 쓴 것 같은 글들만 가득한데, 그런 것들이 버젓이 게시되어있다. 중요한 건 그런 지적장애가 있는 논평들의 저자가 죄다 교수나 박사, 혹은 정치인 등등이라는 것이다. 내 학력은 중졸이다. 원고를 들고 신문사로 쳐들어간다고 한들 편집부 입구에서 되돌려 보내질 것이다. 그래서 나는 한 번도 신문사나 출판사에 투고해본 일이 없고, 집안에는 나밖에 읽어보지 않은 원고들로 가득하다. 만일 누가 나더러 왜 논문을 쓰냐고 묻는다면, 내가 할 수 있는 대답은 하나 밖에 없을 것이다. 나도 모른다고.
 어느 정도 단을 마무리 짓고 바람이 쐬고 싶었다. 현관문을 열고 나가기까지 10분 정도가 걸렸다. 신경안정제를 어디다 뒀었는지 까먹었기 때문이다. 그걸 뒷주머니에 넣어두지 않으면 바깥세상에서 내 손발은 몹시 떨리고 심장은 빈맥을 일으킨다. 결국 찾았고, 난 밖으로 나갔다.
 나가자마자 곤란한 일이 생겼다. 지금은 여름이라 밤늦게까지도 행인들이 많다. 집 앞에서 어떤 젊은 여자와 마주쳤는데, 지나치고 나서도 그 여자가 계속 날 주시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내 꼴은 그다지 모범적이지 못하다. 머리는 가슴께까지 내려오는 산발이고 마지막으로 면도한 것이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제기랄! 저― 저 젊고 활기찬 육체를 가진 여자는 마치 도망 나온 산짐승이라도 보는 듯이 날 쳐다보고 있었겠지! 불안을 숨기기 위해 연거푸 담배를 피워댔지만 담배를 피우는 내 모습이, 팔의 각도라든가 손목의 움직임이라든가 머리의 방향 따위가 정상적이지 않다는 생각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 멍청한 여자가 날 보고 있건 어쨌건 그게 무슨 상관이기에! 그러나 나는 결국 발걸음을 빨리하며 골목의 어둠으로 뛰어들었고, 아무도 없고 이상한 소음과 침묵만 가득한 골목 끝자락에서 연신 허덕거렸다.
 분노와 악의가 심장의 구렁텅이에서 부글거렸다. 그러나 고함을 칠 수도 뭘 어쩔 방도도 없었다. 애꿎은 담배꽁초만 신경질적으로 바닥에 내동댕이치며 뭐라고 중얼거렸던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질 않는다. 산발적으로 장작도끼니 적출이니 하는 소리를 했던 것 같다.
 해가 질 무렵이라 가로수의 나뭇잎이 암청색에 주황빛이었다. 가슴이 진정될 때까지 그것들을 쳐다보고 있었는데, 그것들뿐만이 아니라 그 커다란 가로수도 결국엔 송두리째 시체가 되어 썩어 없어질 것이라고 생각하자 마음이 조금 편해지는 듯 했다. 그러자 내가 밟고 있는 이 땅, 이 지구가 수십억 년분의 시체더미라는 사실을 깨달았고, 그제야 마침내 담뱃갑에서 계속 담배를 꺼내 무는 짓을 멈출 수 있었다.
 아무튼 집에 돌아오자 오늘은 글이라도 썼다는 사실이 나를 좀 안정시켰다. 그러나 논문을 쓰면서 물마시듯 커피를 마셔댔기 때문에 밤이 지나 새벽이 되어도 안면은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망할. 누가 제발, 내가 왜 안 죽고 살아있는지를 좀 알려줬으면 싶다.

8월 28일.
 아무래도 몸 상태가 안 좋다. 빈혈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광과민이 심하고 몸의 균형 감각이 잡히지 않는다. 딱히 다리가 아픈 것도 아닌데 걸을 때 절뚝거리며 걷는다. 어느 근육에 힘을 줘야 몸을 제대로 쓸 수 있는 지를 까먹은 것 같다. 그러나 이런 건 그다지 신경 쓸 문제는 아니다.
 오늘 담배를 사는 데 수치스러운 일을 겪었다. 슈퍼마켓에서 담배를 살 때 커피를 함께 사는 걸 잊어버린 것이다. 근처의 아파트 단지를 어슬렁거리며 담배를 세 개비 째 피웠을 때 커피를 사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나 다시 슈퍼마켓으로 갈 수는 없었다. 물론이다, 이건 체면의 문제다. 만일 내가 슈퍼마켓에 다시 가서 담배냄새를 풍기며 멍청한 얼굴로 캔 커피 하나를 집어 든다면 계산원은 날 기억력도 나쁘고 주의가 산만한 바보로 알 것이다. 그럴 수는 없다. 빌어먹을 늙은 계산원 같으니라고. 그 40대 여자는 꼴에 어울리지도 않는 노란 머리를 하고 있다. 자기가 아직도 젊은 줄 착각하는 천치 같은 여자에게 몇 분 꼴로 슈퍼마켓을 들락거리는 인간으로 보일 수는 없다. 다른 마켓에 가는 것도 생각해봤지만 내 집 주변에는 가게가 그리 많지 않다. 8분은 족히 걸어야 할 것이다. 결국 나는 커피 사는 것을 포기하고 그 망할 계산원의 버러지 같은 노란 머리에 대해 성을 내며 집으로 돌아왔다.
 역시 안압이 높은 것 같다. 빛을 쳐다보는 게 괴롭다. 광과민이 날 괴롭힌다. 화가가 되지 않은 것이 차라리 다행이다. 고흐의 소용돌이 화법은 이비인후과적 증상과 황시증 때문이었다는 설이 있다. 생각해보면 후세의 사람들이 누군가의 병리적 증명을 가지고 미학을 논하며 감동한다는 것도 웃다 죽을 일이다.
 오늘은 아무 것도 쓰지 않았다. 쓰고 싶지 않았다. 아니 거짓말이다. 난 항상 글을 쓰고 싶어 한다. 하루라도 글을 쓰지 않으면 스스로의 존재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죽어버리고 싶어진다. 하지만 아무 것도 쓰지 않았다. 미쳐가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커피를 마시고 담배를 태우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밖으로 나가는 것이 두려워 계단참에서 담배를 피웠는데, 이 연립빌라의 통로 어딘가에서 발소리가 들릴 때마다 어깨가 불쑥 솟으며 화들짝 놀랐다. 그러나 거리로 나가는 것 보다는 낫다. 거리에 나가면 사람들을 볼 때마다, 그리고 사람들의 시선―그것이 진실인지 내 과민인지는 제쳐두더라도―을 느낄 때마다 뇌가 대각선으로 핑핑 돈다. 그런데 거리에 나가면 거의 3초 간격으로 사람을 만나기 마련이다. 도저히 밖으로 나갈 수가 없다.
 계단참 하니까 말인데,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 있다. 이 연립주택의 전셋집은 내가 생애 처음으로 서울에서 얻은 지상층이다. 집은 4층이고, 건물도 4층이 최상층이다. 계단참에서 조금만 올라가면 옥상창고가 나온다. 그런데 분명히 그 옥상창고는 더 넓고 지저분하며, 온갖 상자와 폐기물 따위로 가득한 공간으로 연결됐었다. 수십 년간 청소를 하지 않아 먼지가 5cm는 내려앉은 미닫이 창문도 하나 있었다. 전체적으로 황색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오늘 계단참에서 담배를 피우다 올라가보니, 옥상창고는 5평도 되지 않는 공간으로 사방이 꽉 막혀있었다. 뭐가 뭔지 모르겠다. 난 이 집으로 이사 오기 전까지 평생을 반지하에서만 살았다. 옥상창고 따위 갈 일도 없었다. 다른 건물과 혼동한 것이 아니다. 내 기억이 잘못됐단 말인가? 이젠 뭘 믿어야할 지도 모르겠다.

8월 29일.
 파(破)다. 파! 빌어먹을! 이 따위 논문은 도대체 무어하러 쓴단 말인가? 인간의 다면성을 전제한 개인이 타인을 판단하는 기준의 일방성? 이 현학적은 타이틀은 도대체 뭐야? 나는 이걸 완성해서 누군가, 그러니까 독자나 평론가에게 기립박수라도 받고 싶은 것인가? 아니다, 그건 끔찍하고 치졸한 일이다. 애당초 모든 화가는 닫아놓은 옷장 안에다가만 그림을 그려야 하고, 바이올리니스트들은 독방인 방음실에서 나오지 말아야한다. 인간들의 박수갈채는 한 인간을 완전히 못 쓰게 만들어버린다. 가엾은 존재로 만드는 것이다. 자신의 능력을 평가할 줄도 모르는 콧대 높은 왕으로 만드는 동시에 어깨가 좁은 노예로 만드는 것이다.
 이 병신 같은 수기는 또 뭐란 말인가.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을 것이면서, 문법과 표기를 딱딱 맞춰서 쓰고 있는 이유가 뭐냔 말이다. 그래, 난 내 추악한 속마음을 알고 있다. 내 비열하고 치졸한 마음을 알고 있단 말이다. 만약 언젠가 어떤 독자가 이 수기를 읽는다면, 나는 그에게 나를 이해시키고 감명을 주려는 비겁한 마음을 감추고 있는 것이다. 나야말로 박수갈채를 받고 싶어 혈안이 되어있는 노예다!
 나 스스로를 가둬야한다. 순수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것이 있었다는 것은 기억한다. 그렇다면 더욱 날 가둬야한다. 세상으로부터 날 가두고, 집으로부터도 날 가두고, 나 자신으로부터도 날 가둬서 차라리 길거리에 흩날리는 신문지 같은 존재가 되어야한다. 마침 가을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계절이다. 이런 시기에 한강 굴다리 밑에서 생활했던 적이 있다. 아니 보다 더운 계절이었던 것 같다. 침낭 한 장과 참치캔만 가지고 한 달을 살았었다. 내 인생에서 유일하게 인간애를 느낀 계절이었다. 굴다리에 스프레이 캔으로 낙서를 하러 오는 젊은이들이 푼돈을 주거나 여러 가지를 묻기도 했었다. 아마도 내가 적개심 없이 인간을 대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것 같다. 가진 게 없다는 점은 차치하고, 생존하려는 욕구조차 없었던 것 때문이 아닌가 싶다.

8월 30일.
 창문 건너편 아파트 단지에 아침 8시만 되면 프레디 머큐리 흉내를 내면서 노래를 부르는 미친 새끼가 있다. 프레디 특유의 창법을 구사하면서 더럽게 못 부르는데, 매일 아침 8시만 되면 그 지랄을 시작한다. 분명히 사람들의 아침 시간을 방해해야겠다는 숭고한 결심이라도 한 것일 터다. 오늘 난 안 그래도 불면증 때문에 잠을 설친 상태였기 때문에 몹시 짜증이 났다. 도대체 저 아파트의 관리인은 뭘 하는 것이란 말인가. 저 망할 새끼도 분명 에이즈로 죽고 말겠지.
 어머니에게 전화가 왔다. 내 치료비를 끊겠다는 것이다. 난 항의하고 싶었지만 뭐라 할 말도 없었다. 그래서 이대로 병세가 악화되다가 병동으로 옮겨가면 좋겠냐는 말이나 간신히 했다. 그러자 어머니는 굉장히 화를 냈다. 도대체 왜 그렇게 치료비가 많이 들어 가냐는 것이다. 나도 모른다! 내가 병에 걸리고 싶어서 병에 걸린 것도 아니고, 심지어 일부러 치료비가 많이 들어가는 병에 걸린 것이냐는 말투였다. 나는 도무지 할 말이 없었지만, 어머니의 말투는 내 짜증을 돋우기에 충분했다. 그래서 나는 일부러 어머니의 부모로서의 의무와 감정을 툭툭 건드리는 단어만 사용해서 그녀를 비꼬았다. 그녀는 완전히 화가 난 것이 분명했다. 빌어먹을. 그리고 덕분에 나도 정말로 죽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모른다, 모른다, 모른다. 뭘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애당초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휙 사라지면 그만한 것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자살에 대한 욕망은 우울증이 정신분열증으로 진화할 때 쯤 사라졌다. 죽고 싶다고 계속 스스로에게 되뇌지만 사실 죽을 마음도 없다. 그냥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제일 쉬운 방법을 스스로에게 제시나 해보는 것이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절망했을 때에나 상황이 나빠 보이는 것이지, 사실 상황은 단 한 번도 나빠진 적이 없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코미디의 법칙에 따르면 당연한 것이 당연하지 않게 될 때 웃음이 발생하는 것인데, 그렇게 생각하면 사실 온 세상 사람들이 절망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것들이 실소나 키득거리게 하는 코미디에 불과하다. 비극 같은 건 애당초 없다. 어머니가 치료비를 대주지 않겠다고 했으니 나는 더 이상 병원에 가지 못할 것이고, 그럼 나는 내 희극에 대한 믿음을 더욱 견고하게 밀어붙일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없다. 아무 문제도 없다. 인생은 죽을 때까지는 어떻게든 이어지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람들이 신보다 더 높이 받들고 있는 돈이라는 것도 한강 굴다리에서의 생활에 의하면 별로 대단한 것도 아니었다. 돈이 없으면 굶으면 되고 굶어 죽게 되면 죽으면 된다.
 하지만 진지하게 말하는데 내가 굶어 죽는 아침에 저 빌어먹을 가짜 프레디 머큐리가 또 돼지 멱따는 소리를 내면 그 새끼 목구멍에 칼집을 내고 죽을 것이다.

8월 31일.
 도무지 책을 못 읽겠다. 대략 일 년 전쯤부터 그렇다. 활자를 못 읽겠다는 건 아니다. 활자는 정확히 시각을 통해 내 뇌수에 새겨지고 있다. 문제는 내 인간혐오증이다. 왜 이런 말을 하는가 하면, 학술서나 논문 같은 건 읽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기 때문이다. 소설과 시를 못 읽겠다. 소설에 인물들이 등장하기 시작하면, 그것이 작가의 의도야 어쨌건 간에, 소설에 나오는 모든 인물이 참을 수 없이 증오스럽다. 나의 비대한 상상력도 한 몫 하는 것이다. 서술에 나오는 인물의 대사라던가 행동, 그들이 상황을 대처하는 방법들을 읽게 되면 내 머릿속에서는 그 인물의 아주 정밀하고 지엽적인 부분까지 떠오른다. 그러면 어느 인물이고 상관없이 멍청하고, 추하고, 기만적인 것으로 보여서 날 분노케 한다. 그러면 몇 줄인가를 더 읽다가 그냥 책장을 덮어버리는 것이다. 나는 누군가의 삶 따위 전혀 알고 싶지 않다. 그것이 현실에서 지하철에 올라탔을 때 보이는 수십 개의 마스크들이든, 소설 속에만 존재하는 가공의 인물이든, 난 인간의 삶 따위는 정말이지 알고 싶지 않다. 게다가 그들은 하나 같이 모순덩어리에다가 객관적인 시각을 갖추지도 못한다. 시는 문제가 더 심각하다. 설령 화자가 <인물>에 대해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더라도 시는 그 자체로 하나의 인격이 된다. 언제부턴가 지하철 플랫폼에 전업 작가부터 아마추어들까지 그들이 쓴 시가 중구난방으로 붙어있는데, 제발 좀 그만해줬으면 한다. 나는 그저 지하철을 타고 이동하고 싶을 뿐이지 기만과 위선으로 가득 찬 인간찬미나 읽으려고 홈에 들어간 게 아니란 말이다.
 사실 내가 아직도 문제없이 읽을 수 있는 시인이 둘 있긴 하다. 그것은 랭보와 로트레아몽이다. 랭보가 10대 후반에 절필했다는 점이나 로트레아몽이 젊은 나이에 요절해버렸다는 것도 큰 도움이 된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가장 아름다운 글씨로 반란과 퇴폐와 증오를 노래한다는 것이다. 19살 때까지 쓰인 랭보의 시들은 그가 어느 누구보다도 인간을 사랑하고 싶었으나 절대로 그럴 수 없었다는 것에 대한 발악이고 불경하게 악쓰는 구절들이다. 로트레아몽에 대해서는 더 말할 것도 없이 아직도 학자들이 그의 작품을 두고 이게 정말 시학에 들어맞기나 하는 것인지 아니면 정신분열증 환자의 맥락 없는 저널인지 의견이 분분하다. 기억나는 대로 써보자면, 내가 로트레아몽에 몰입하게 된 건 첫 부분의 몇 소절이었다. <보름 동안 손톱이 자라도록 내버려두어야 한다. 활짝 열린 눈을 가진, 윗입술의 위에 아직 아무것도 나지 않은 어린아이를 침대에서 난폭하게 끌어내려, 그의 아름다운 머리털을 뒤로 쓸어주면서, 그의 이마에 그윽하게 손을 내미는 체하는 것, 아, 그것은 얼마나 감미로운가! 그 다음, 그가 가장 예기치 않은 순간에, 갑자기 긴 손톱을 그의 부드러운 가슴에 박아 넣는다.>, <장밋빛 얼굴의 어린애를 껴안을 때면, 그는 면도날로 그 아이의 뺨을 떼어내고 싶어 했으며……>.
 기독교 신자들이 성경에서 구원을 얻을 때 나는 이 두 시인에게 구원을 얻었다. 그들이 쓰는 것은 아름다운 시였지만, 분명히 언어에 대한 반항이기도 했다. 특히 로트레아몽은 내게 <굳이 인간이 되려고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는 듯 했다. 내 온 정신을 미라처럼 칭칭 감고 있던 죄책감과 도덕에의 강박이 일순간에 다 불타 없어졌다. 랭보가 데뷔한지 2년 만에 절필한 것도 굉장한 얘깃거리다. 그는 애초에 남들이 말하는 시인이 될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모든 예술가들이 미학을 찾지만 일단 그걸 찾아서 표현하고 나면 별로 할 일이 없다. 샐린저는 이제 글쓰기가 자신의 종교가 되었다고 한 뒤로 단 한 권의 책도 정식으로 출판하지 않았다. 랭보가 왜 아프리카로 갔을까? 그야 유럽대륙은 너무 춥고 공기도 씁쓸하니까. 그는 아마도 병에 걸려 태양에 타죽어 버리려고 인류의 고향으로 간 것일 터다.
 젠장, 어차피 아무도 안 읽을 이 수기에서 대체 내가 누구에게 뭘 가르치려는 거지? 나는 전두엽 절제술이 필요하다. 내 라면사리 같은 뇌 쪼가리에서 <독자>라는 개념을 완전히 삭제해야한다. 18살 때 시학선생님이 말하길 내 최대의 비극은 스스로 작가이며 독자이며 평론가인 것이라고 했는데, 그건 정말이지 끝나지를 않는 저주였다. 폐허가 된 건물 옥상에 버려진 다육식물이 되고 싶다. 그러면 난 누가 나에게 물이나 비료를 주는 것을 전혀 기대하지도 않을 것이고, 수명이 다 할 때 까지 공기 중의 수증기나 빨아먹으면서 누구도 만나지 않을 것이고 누구도 날 보러 오지 않을 것이다.
 쓰다 보니 생각났는데, 2년 전 즈음일 거다. 동두천의 바에서 정신을 잃을 정도로 술을 마시다가 어떤 금발의 키 큰 흰둥이 미군이랑 시비가 붙어서 쫓겨났을 때, 집으로 가려고 지하철로 들어갔는데 어디서 가져온 건지는 몰라도 웬 소주병이―아직도 내가 그 텅 빈 소주병을 왜 갖고 다녔는지 기억이 안 난다. 그날 난 소주를 안 마셨다. 바랑 클럽에서 럼주만 오라지게 마셨다― 손에 들려 있기에, 스크린 도어에 붙은 어머니가 어쩌고 자신의 4살 먹은 딸의 웃음이 저쩌고 가을에는 코스모스인지 치매 걸린 하마 궁둥인지가 피어나네 하는 시민참여작 시에 냅다 집어던졌다. 그때야 그 멀대 같은 흰둥이한테 맞은 광대뼈가 시큰거려서 자지러지게 웃는데 달려온 공익요원들이 날 경찰서에 처넣으려고 했다. 그래서 나는 그렇게 꼴았음에도 불구하고 신사적으로 해결하자며 빗자루와 청소도구를 빌려달라고 했다. 그리고 나는 깨진 유리병들을 다 담아 치운 뒤에 그 과체중 요원들에게 넘겼다. 난 경찰 따위는 딱 질색이다. 경찰은 내가 세상에서 두 번째로 혐오하는 인종인데, 첫 번째로 혐오하는 건 시비만 털리면 바로 경찰 찾는 습관이 있는 겁쟁이 새끼들이다. 아무튼 그 과체중 요원들은 적당히 나태했고 적당히 사람 좋은 것들이었다. 내가 저지른 걸 내가 수습했으니 가 봐도 된다는 것이었다. 난 나보다 한참 어린, 스무 살이나 처먹었을까 싶은 복부비만청년들―평발이나 허리디스크였을 지도 모르지. 누가 알겠는가―에게 무슨 연극하듯이 과도한 감사를 전하고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정확히 기억은 안 나는데, 아마 집에 도착할 때 까지 지하철 안에서 <사노라면>을 열창했던 것 같다. 씨발.

9월 1일.
 방법을 알아냈다. 그것은 그리도 간단했다. 술을 마시면 되는 것이었다. 난 지금 5잔의 브랜디 덕분에 홀든 콜필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낱낱이 알 수 있다. 그리고 나는 화가 나지도 않는다. 완전한 관조자의 입장으로 저 문제아의 뇌 속을 헤집어보고 있다. 써니! 써니라니! 어쩌면 그렇게도 창녀 같은 이름이란 말인가! 나는 내 시상하부에 알코올을 똑 떨어트리고 써니의 모습을 그려보았다. 그것은 정말로 끔찍한 것이었다……. 알비노증이라도 걸린 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창백하고, 골격이 다 튀어나오는 뉴욕의 하층 창부. 눈에는 비웃음이 들어있다. 자신을 사는 남자들 모두를 비웃으면서 다리를 벌리는 것이다! 그래,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써니는 호텔 옥상에서 온갖 멜랑꼴리한 자기모순 투성이의 감정에 사로잡혀 몸을 투신하겠지. 천치 같으니라고. 사실 여자는 자신의 몸에 자본주의가 적용된다는 것을 아는 순간 천치가 된다! 도도하게 외투를 입고 푼돈 5달러를 받아든 채 방을 나가는 써니. 써니. 나는 당신을 내 청춘의 어딘가에서 본 일이 있다.
 쁘로하르친 씨도 분명 내가 아는 사람이다. 아무와도 제대로 된 관계를 갖지 못하다가 왜소하게 죽어버린 노인을 나는 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이후로 할아버지가 눈에 띄게 약해졌다는 것이 떠오른다. 원래 술을 좋아하는 양반이었지만 더 술을 찾아다녔다. 그러다 어느 겨울 빙판을 밟고 넘어져 골반 뼈가 부서졌었지. 그 뒤로 할아버지는 운신도 못하면서 점점 더 괴상한 인간이 되어갔다. 간호사들이 채혈을 하러 오면 이 마녀들이 자기 피를 갖다 팔려고 한다며 발악을 했었다. 아무래도 신경이 어떻게 됐었던 건 아닌가 싶다. 할아버지가 제정신으로 돌아오는 건 오로지 하루에 한 시간 정도뿐이었는데, 오후 8시가 넘어가면 본래의 입을 꾹 다문 주철로 만든 인형처럼 되었다. 그러다가 당시 어렸던 내가 다가가면 입술이 납으로 되어있어 몹시 움직이기 어렵다는 듯이 힘겹게 미소를 짓는 것이었다. 안타깝게도 할아버지가 죽은 뒤에 쁘로하르친 씨처럼 침대에서 거액의 돈이 나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그래, 잠깐. 술에 취했더니 아무 관련도 없는 얘기가 계속 나오잖아. 제기랄, 난 분명히 내일 아침 눈을 뜨면 오늘 술 따위를 처먹는데 돈을 썼다는 사실 때문에 스스로가 지독히 미워질 것이다. 담배야 생필품이라지만 술은 그렇지 않다. 책 따위 것, 안 읽으면 어떻단 말인가. 속이 부대낀다. 잠깐 구토를 좀 하고 와야겠다.
 알고 보니 오늘 먹은 것이 브랜디 다섯 잔 말고는 없는 모양이다. 구토를 한 변기물이 너무 깨끗해서 성수로 써도 될 정도다. 뱉거나 토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침을 뱉든 담배연기를 토하든 구토를 하든 대소변을 배출하든 눈물을 토하든 땀이나 정액을 각 기관에서 토악질해버리든 내부에 있는 것을 바깥 세상에 내다버리는 것은 뭐든 간에 기분 좋은 일이다―한 가지 절대로 경험해볼 수 없는 예시가 있는데, 그건 출산이다. 근데 생각해보면 대다수의 여성들이 출산 직후에 웃긴 하더라―. 몸이 비워지는 느낌이 든다. 난 단식에는 별 관심이 없지만 내장을 깨끗하게 비울 수 있다면 해봐도 좋을 거라는 생각까지는 한 적 있다. 애당초 인간의 몸은 내부에서 뭔가를 너무 많이 만든다. 자체 생산도 정도가 있는데 심지어 음식물까지 아가리로 처넣으니 기름때가 덕지덕지 붙은 고물 태엽시계처럼 되는 것이다.
 그래, 체질상 쉽게 비만이 되는 사람도 있다는 거야 알고 있다. 누구 말처럼 하루 한 끼만 먹는데도 뒤룩뒤룩 살이 찔 수도 있겠지. 세상은 신비로우니까. 그러나 나는 고도비만인 인간이 내 눈앞에 있으면 이성을 잃을 것 같다. 도대체 뭐가 부족하기에? 이미 인간이 이 행성에 70억 명이 넘게 있는데 왜 각 개체까지 부피를 늘리지 않으면 안 된단 말이냐. 그렇게까지 자기 존재감을 과시하고 싶은 것인가? 그래, 이 사막 한복판에 버려놔도 40일간 자가 지방연소로 살아남을 대단한 자식아. 다른 게 아니라 인간들이 그렇게 가시적으로 보일 정도로 생명에 집착한다는 사실이 짜증을 돋운다. 당신들이 자궁 속에서 어머니 내장 걷어차면서 놀던 시기부터 니들 뒤통수에 붙어있던 게 바로 다름 아닌 죽음이다. 근데 그 오래된 친구와 만나기가 싫어서 고기 가는 기계마냥 연료를 아가리에 처 붓고 있단 말이냐. 아니 그래, 솔직히 내가 고도비만 인간들을 보기만 하면 짜증이 나서 말도 안 섞고 도망쳤던 것은 사실이다. 어쩌면 내 추리와는 달리 죽음을 외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뭔가 숭고한 목적을 위해 세포 총량을 늘리고 있는 걸지도 모르지. 글쎄, 뭔지는 모른다. 계속 체세포를 늘리다가 분열한다든가……. 내가 어떻게 알겠는가. 난 하루에 한 끼 먹는 것도 기껏 깨끗하게 만들어놓은 내장을 더럽혀야만 하냐고 쌍욕을 하면서 먹는 인간인데. 씨발! 모른다. 애당초 화만 지랄같이 나지 관련하고 싶지도 알고 싶지도 않다. 내가 대통령이면 전 세계 사람들을 불임으로 만드는 무기를 개발하라고 지시할 텐데. 인류재생산이라니, 크로넌버그가 고안한 괴물들보다 더 추악하게 생긴 새끼들이 재생산은 무슨 얼어 죽을 재생산.
 취한 것 같다. 자야겠다.

9월 2일.
 전화 때문에 오후 2시에 깼다. 일어나자마자 끔찍한 기분이었다. 첫째는 숙취 때문이고, 두 번째는 그 망할 놈의 전화기 용도 때문이다. 난 전화가 올 때마다 심각한 불안감과 공포를 느낀다. 굳이 말하자면 어렸을 때 어머니 휴대전화로 포르노를 봤는데 통화료 고지서가 날아왔을 때와 똑같은 느낌이다. 전화벨이 울리는 내내 그 기분이다. 아무튼 발신인은 병원의 간호사였다. 올 때가 지났는데 왜 오지 않냐는 것이었다. 내 대답이 걸작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기도 전에 ‘모르겠다’는 말이 튀어나간 것이었다. 이유야 많지. 무엇보다도 어머니가 치료비를 끊었으니 이제 병원에 가려면 내가 가진 돈에서 할애해야하는데, 애당초 이 돈은 하루 한 끼 먹고 물만 마셔도 한 달이면 없어질 돈이다. 그런 돈을 양주 먹는데 쓰다니, 내가 미친놈이지. 여하간 돈이 없다는 게 첫 번째 이유였고, 두 번째는……. 생각해보니 없다. 이유가 많지 않고 하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중대한 이유였다. 빌어 처먹을 놈의 정부는 지난 정권 때 두 배로 올린 담뱃값을 내리겠다고 공약을 걸어두고서는 도무지 실현할 생각도 안 한다. 커피는 말이다, 이것에 대해선 내가 할 얘기가 좀 있다. 도대체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는데 10년 전만해도 밥 먹고 숭늉이나 처마시던 인간들이 도대체 단체로 무슨 지랄병에 걸렸는지 케냐 100%가 어쩌고 과테말라 안티구아가 어쩌고 에스프레소에서는 산미가 돌아야 한다는 둥, 아무래도 대한민국 전역에 뇌랑 관련된 전염병이 돌고 있는 게 틀림없다. 물론 돈이 썩어 넘쳐서 지 입으로 들어가는 게 사향고양이 똥인지 사향고양이 오줌인지도 모르면서 사치 부리고 있는 척 좀 해보고 싶다는 거야 내 알 바 아니다. 문제는 그 천치들 때문에 한 캔에 300원 하던 캔커피가 지금 1000원 대를 넘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당당히 말하겠는데 난 커피에서 바닷물 맛이 나도 상관없다. 난 그저 300원으로 카페인 60mg을 사고 싶을 뿐이란 말이다. 브라질 본토에서 공수를 해왔건 옷장 안에 백열전등 매달아놓고 키웠건 쥐똥만큼도 상관 안하니까 내 작업을 좀 방해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다.
 그래, 카페인이 없으면 일이 안 된다. 하루에 18알 씩 집어삼키는 약들이 날 인간으로 붙잡아놓고 있다는 거야 물론 고마운 일이지만, 그것들은 사람을 정말 멍청하게 만든다. 처음으로 투약을 시작했을 때는 3시간이나 꼼짝도 않고 빈 페이지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던 일도 있다. 머릿속에 도무지 떠오르는 게 없는 것이다. 그리고 항상 입술이 바싹 말라서 하루에 도대체 몇 리터나 되는 물을 들이켰는지 모르겠다. 게다가 수면시간을 하루에 20시간으로 만들어버린다! 이쯤 되면 이미 치료목적이 아니라 사고나 치지 말라고 약으로 재워두는 격이다.
 물론 투약 초기의 얘기고, 지금은 내성도 어느 정도 생겨서 별 문제는 없지만…… 커피와 담배가 아니면 작업이 힘든 것은 사실이다. 그러니까 난 커피와 담배를 이용해서 나름대로 약물치료와 작업의 밸런스를 맞춘 것이다.
 아무튼 돈이 없고, 간호사한테는 모르겠다고 말했고, 당연히 간호사는 되물었다. 모르다니 도대체 뭘 모르겠냐는 거냐고. 모르는 거야 모르는 거지 어떤 걸 모르는지 모르는 사람한테 물어보면 그걸 어떻게 아냔 말이다. 그러나 그런 영원순환 같은 헛소리를 할 기분도 아니었고, 그저 당분간 병원에 못갈 것 같으니 담당의에게 메모나 전해달라고 말했다. 간호사는 끈질겼다……. 지속적인 치료가 이어지지 않으면 위험한 병이라는 걸 환자분도 알고 있지 않느냐고, 그렇게 갑자기 투약을 끊으면 금단증상 때문에 ER에 실려 갈 수도 있다고, 어쩌고, 저쩌고, 그런데 돈이 없다니까 이 아가씨야.
 난 그냥 전화를 끊어버렸다. 무슨 화가 나거나 해서 그런 건 아니고, 그냥, 별로 할 말이 없었다. 상황이 개선될 여지가 없는데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달력을 보니 오늘은 월요일이었다. 그래서 어제 전화를 하지 못한 거로군. 얼마 전에 쓰다가 내팽개친 논문이 마구 구겨진 채로 발치에서 뒹굴대고 있었다. 돈……. 애당초 이런 걸 쓰기 시작한 이유가 뭐더라? 살면서 한 번도 글 팔아서 돈 벌어본 일이 없는데. 아, 아니다. 두 번 있었다. 중학교 1학년 때 작은 이모가 대학원생이었는데, 바쁘다고 논문 대신 써주면 오만 원을 주겠다기에 써준 적이 있다. 두 번째는 스무 살 때, 친구―그 때는 나도 친구가 있었다―가 어린이용 학습 애니메이션 감독 보조였는데, 스무 살이 되도록 아무것도 안하고 약에 쩔어 굴러다니기만 하는 내가 안타까웠는지 시나리오 일감을 줬던 것이다. 3시간 만에 시나리오 세 편을 써서 15만원을 번 굉장한 일이었다. 나중에 방영이 됐을 테지만, 보진 않았다. 난 살면서 TV를 가져본 일이 없다.
 전화를 끊고 나서 뭘 했는지 똑똑히 기억한다. 아무것도 안했다. 오후 9시까지 그 자리 그대로 앉아 한 손에는 핸드폰을 쥐고 눈으로는 굴러다니는 원고 조각을 보고 있었다.
 달리 뭘 하겠는가. 그나마 지금 내가 이렇게 수기라도 쓰는 것이 살아있는 이유가 아닌가 싶다.

9월 5일.
 집안이 난장판이다. 전자레인지는 앞 유리가 날아갔고, 냉장고는 충격으로 온통 울퉁불퉁하다. 그리고 내 주먹은 피멍투성이라서 원래 어떤 색깔이었는지 기억도 못 하겠다. 손뼈에 금이 간 것 같다. 타자를 칠 때 중지가 움직일 적마다 싸한 통증이 느껴진다.
 9월 3일에 어머니가 집에 왔었다. 예고도 하지 않고 갑자기 들이닥쳤다. 얼굴을 보자마자 한다는 소리가 ‘널 볼 때마다 짜증이 치민다’는 것이었다. 그 뒤로는 기억이 애매하다. 머리에 피가 몰리면 항상 기억력에 문제가 생긴다. 별로 기억하고 싶지도 않은 일이 벌어졌을 것이 분명하다. 정신이 들 때쯤엔 울부짖으면서 집안에 있는 것들을 전부 깨부수고 있었다. 집에는 나밖에 없었다.
 도대체 뭣 때문에 왔던 걸까? 그러고 언제 돌아간 걸까? 깨진 사금파리들 위에 엎어져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유리조각을 밟은 채로 돌아다녔는지 방바닥은 핏자국 투성이였다. 그게 9월 3일 저녁이었다. 그 뒤에 나는 서랍을 뒤져 남은 수면제를 싸그리 모아 삼키고 태풍이라도 지나간 것 같은 방 안에 자빠졌다. 정신의 사지가 잘려나가는데 13분이 걸렸을 것이다. 빈속에 약을 처넣으면 항상 딱 13분이 걸린다. 그리고 관절염 걸린 개새끼처럼 사지를 뒤틀다가 헛소리를 한다. 뭐라고 했더라. 기억이 날 리가 없지. 다만 벽지에다가 피로 뭐라고 써놓았는데, ‘까마귀는 부자 위에만 난다’라고 의미도 알 수 없는 개소리를 적어놓았다.
 그리고 깨보니까 9월 5일 오후 3시였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어차피 뭘 하든 패배자의 넋두리가 될 것이고, 내 삶이란 세상에게 민폐나 끼쳐대는 것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는 것 같다. 차라리 천 년 정도 잠이나 잤으면 싶은데, 이미 이틀이나 자버려서 졸리지도 않다. 만일 정말로 천 년을 잘 수 있으면 깨어난 뒤 이름이라도 바꾸고 모든 걸 새로 시작할 텐데. 시야가 뿌옇다. 몇 번이나 눈을 비벼도 사물이 명확하게 보이질 않는다. 아마 수면제의 부작용일 것이다. 하루 이틀 지나면 나아지겠지.
 그래도 나는, 도대체 뭘 위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발바닥에 난 자상에 약을 바른 뒤 붕대를 감고 주먹에 안티푸라민을 발랐다. 효과가 있을지 어떨지는 모른다. 그냥 하는 것이다. 내가 자살하지 않는 것과 똑같은 이유다. 그 이유라는 게 언제나 불명확하긴 하지만, 존재하긴 한다. 그리고 앉은 채로 집안을 둘러보았다. 말 그대로 아주 개판이었다. 뭘 어떻게 손을 댈 의욕도 나지 않았다. 앞으로 전자레인지는 못 쓰겠구나 하는 생각이 돌연 들었다. 그래, 아마 어머니는 이렇게 될 걸 원하고 내 집에 침입한 거겠지.
 절뚝거리며 계단참으로 나가 담배를 피웠다. 나뭇잎들은 아직 초록색이었다. 그러나 곧 낙엽이 될 것이다. 담배를 다 피운 뒤 옥상창고로 올라가, 분명 철제문이 있었던 벽을 두들겨보았다. 그냥 벽이었다. 허탈한 기분과 짜증이 동시에 피어올랐다. 손에는 기름때와 짙은 먼지가 묻었다.
 오늘은 잠을 자지도 못하겠지. 약도 없고, 이틀이나 죽은 듯이 기절해있었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수기를 쓴다. 앞날은 언제나 불행 투성이다. 현재가 비참하다면 더욱 그렇다. 그러나 내가 뭘 어떻게 할 수 있단 말인가. 예를 들어, 토요일에 약이 하루치 밖에 안 남아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 세상이 무너지고 자신이 인간으로 있을 수 없으리라는 극악한 공포에 휘말려버리는 인간이, 자신의 앞날에 대해서 뭘 어쩔 수 있단 말인가?
 그저 어떻게 되어가든 손을 놓는 수밖에 없다. 적어도 기록이나마 해가면서.

9월 6일.
 깨달음을 얻었다. 깨달음을 얻었다기보다는, 평소 머릿속에서 뒤죽박죽으로 엉겨있던 사고들이 제자리를 찾았다. 아무튼 깨달은 것이 무엇인가 하면, 통상 인간의 길은 믿음으로서 시작된다고들 하는데, 그것은 터무니없는 거짓부렁이다. 인간의 길은 불신에서 시작된다. 당장 이 세계를 살고 있는 사람들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인간은 자신의 발끝에서 땅이 무너져 내릴 것이라는 가능성을 불신함으로서 목적지까지 걸어갈 수 있다. 하늘에서 뜬금없이 벽돌이 떨어져 머리에 맞는 바람에 비명횡사할 가능성을 불신함으로서 거리에 나갈 수 있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다. 인간은 사상과 신념을 갖는 게 아니라, 세계에 포화된 무수한 가능성을 불신하고 그 중 자신이 믿고 싶은 것만 고르는 것으로 존재가 가능한 것이다. 누가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질 가능성이 0%라고 말할 수 있는가?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것을 무의식에서부터 불신한다. 어느 날이랄 것도 없이 예고도 준비도 없이 죽음이 들이닥쳐 자신의 목숨을 앗아가지 않으리라고 누가 확신할 수 있는가? 그러나 사람들은 그런 것에 대해 생각조차 하려 들지 않는다.
 인간은 불신의 생물이다. 공포와 혼란을 피하는 방법으로 제딴에는 믿음과 사상을 선택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오로지 불신뿐인 것이다. 세계는 마구잡이다. 세계는 다시 말할 것도 없이 하늘에서 창이 쏟아지고 수천만 명이 아무 이유도 없이 사지가 찢겨나가는 마구잡이인 곳이다. 그러나 그런 사실을 전부 받아들이기에 인간의 영혼은 너무도 좁다. 그래서 굳이 말하지도 않고 ‘나는 믿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다. 게다가 모든 가능성을 신뢰하는 사람을 정신병질자 취급하기까지 한다!
 축약하여 하나의 상황에 천 개의 가능성이 있다면 인간은 999개의 가능성을 불신하고 한 개의 가능성을 신뢰함으로서 생존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것은 신념이나 사상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객관적으로나 수학적으로나 이것은 불신의 법칙이다. 하하. 무궁무진한 가능성이니 신념의 힘이니 지껄이는 것들이, 속을 들여다보면 불신만으로 가득하다. 그러나 그것이 인간생존의 기본이다.
 어떻게 하면 모든 가능성을 받아들이는 자가 될 수 있을까? 그것은 간단하다. <인간존재>가 아니라 <현상>이 되면 되는 것이다. 단순히 인간의 모습으로 현세에 일렁거리는 현상. 그러면 그 스파크나 불똥 같은 존재는 자연히 세계에 귀속된다. 바로말해 혼돈에 귀속되는 것이다. 사상이나 신념을 가질 필요도, 욕망이나 의지를 가질 필요도 없다. 현상은 그런 것들을 필요로 하지 않으면서도 엔트로피 증가 법칙에 휘말려 다니며 더 많은 혼란을 야기할 것이다. 그리고 그 끝은, 사망이 아니라 열적사라 불리어야할 것이다.
 여하간, 그런 생각을 정리하면서 길거리의 벽돌 위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는데, 허연 대낮에 반바지를 입은 어떤 늙은이가 지나갔다. 나는 그 늙은이의 다리를 보자마자 구토할 뻔 했다. 백색으로 완전히 탈색되고 삐쩍 말라 혈관과 근육이 완전히 드러나 보이는, 털 하나 나지 않은 삐걱거리는 다리. 병든 다리. 늙은 다리. 저런 다리가 생몰하는 인간의 말로라고 생각하니 구역질이 나왔다. 늙은이는 절뚝거리면서 어디론가 걸어갔다. 그 나무토막 같은 다리를 질질 끌면서 말이다. 나는 늙음에 대해서 화가 치솟았다. 늙음에 대해서 화가 나자 마찬가지로 젊은 것들에 대해서도 화가 났다. 젊은 것들은 마치 자신의 탄탄하고 부서지지 않은 육체가 영원할 것처럼 과시하며 동네를 돌아다닌다. 그러나 눈앞에 떡하니 놓인 증거를 보고서도 알아차리지 못한단 말인가? 얼마나 멍청하면 자신의 다리가 곧 가죽이 다 늘어지고 뼈밖에 남지 않은 괴물 같은 것이 되리라는 사실을 모른다는 것인가? 젊음이 영원하리라는 듯이 뽐내고 다니는 것들을 보면 분노가 내 시야를 하얗게 만든다. 차라리 내가 알려주고 싶다. 건물 철거용 해머로 그 살과 뼈를 전부 다져 손에 그러쥐고, 눈앞에 내밀면서 <봐라, 이게 네가 갖고 있는 전부다>라고 설교해주고 싶다.
 생명은 슬로우 모션으로 폭발하는 폭탄처럼 인간을 추악하게 만들어간다. 피부는 자글자글 주름이 생기고 독버섯처럼 반점이 피어오르며, 곧 숨조차 원활하게 쉴 수 없게 되고, 스스로 걷지 못해 장님처럼 지팡이를 휘둘러대야 한다. 그러면 이제 병이 코와 입으로 스며들어와 내장을 적시고 죽음에 한없이 가까운 것으로 만들어간다. 차마 눈뜨고 못 볼 꼴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게 인간의 전부다! 바들대며 절벽 끄트머리에 들러붙은 버러지처럼 되는 것이 인간의 의무다. 생명의 풍성함을 믿는 것들에게 저주 있으라! 아니, 내가 저주하지 않아도 그들은 이미 저주를 품고 태어났다. 어떻게든 추악하게 추락해 갈 것이다. 그 후에는 소멸뿐이다. ‘억’ 소리조차 못 내고 풀벌레들의 먹이가 되어, 곧이어 아무도 그런 것이 존재했다고는 기억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난 가족과 함께 살 때 명절에 벌초를 하는 것이 정말이지 싫었다. 아버지 어머니가 정성을 다해 잔디를 심고 잡초를 뽑은 그 봉분 안에는 아무것도 없다. 있다 한들 흙과 박테리아에 분해되어가는 뼛조각뿐이다. 도대체 왜 이미 죽은 몸뚱어리에 신위神位를 주는지 나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다. 죽은 자와의 추억에 술을 올리고 싶으면 방구석에 틀어 앉아 하면 될 뿐이다. 나는 지금 인간이 죽으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뻔한 얘기를 하는 것뿐만 아니라, 인간은 애초에 아무것도 아니라는 얘기를 하고 있다. 나는 언젠가 어머니와 아버지 몰래 무덤을 파 관을 들어내어, 저쪽 계곡 어딘가에 갖다버리고, 나중엔 아버지와 어머니가 텅 빈 흙더미에 절을 올리고 술을 따르는 꼴을 보며 비웃을 계획을 세우곤 했었다.
 그러나 그 계획은 실현되지 못했다. 애당초 난 획책하는 것은 잘 하지만 무엇 하나 행동으로 옮긴 것이 없다. 나 역시 빌어먹을 쓰레기더미다. 남들의 비열을 비웃으면서 자신의 비겁 속에 파묻히기나 한다.
 9월 2일부터 음식을 먹지 않은 것 같다. 이대로 이어나가야겠다.

Posted by Lim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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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인의 둥지

글/소설 2019. 5. 5. 16:54 |

악인의 둥지


 벽 밖의 냉기가 거실까지 침범하던 날. 옷과 코트를 갖춰 입고, 분명 밖은 하얀 아침햇살로 가득할 날에, 내 다리는 현관 앞에서 무너졌다. 움직여야한다고 생각했지만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더 이상 열심히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어머니와 아버지에 대한 생각을 한 것 같았고 소리 없는 구토처럼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나무로 된 현관바닥은 차가웠고, 손을 뻗으면 닿을 현관문이 100m는 멀리 있는 것처럼 보였다. 27살. 어른이 될 수는 없었지만 스스로의 목숨을 책임져야한다고 목이 졸린 나이. 청바지를 뚫고 들어오는 냉기를 온 다리로 느끼며, 어디로 가야할지 알 수 없다고 느꼈다.
 겁에 질린 손으로 핸드폰의 전원을 끄고, 힘이 풀린 다리를 밀며 곰팡이 냄새로 가득한 방으로 기어간다. 폐부와 심장이 찢어지는 것 같았고 할 수만 있다면 정말로 찢고 싶었다. 울면서 엎드려, 되뇌었다. 내 집은 어디? 내가 누워 잠들 수 있는 자리는 어디에 있지?
 서랍을 뒤져 나온 것은 9알의 파란색 수면제.
 이 모든 게 꿈이라면, 정말로 악몽 같은 꿈이고, 깨어나고 싶지만, 깨어나는 방법은 모른다.

 꿈속의 꿈. 일요일의 할인마트에서 길을 잃은 아이. 다른 꿈. 아버지와 농구경기장에 가서 인파에 겁을 먹은 아이. 약간 시간을 뛰어넘어서, 훔친 술에 취해 도장 파는 칼로 가슴 가죽을 찢고 있는 이상한 아이. 주변엔 낯선 인파뿐. 나무막대기처럼 뻣뻣하게 경직된 근육과 끓어올라 흘러내리는 뇌수. 훔친 술을 한 모금 더. 끔찍한 맛이지만 정신을 잃는 것이야말로 유일하게 제정신으로 있을 수 있는 방법이다. 왜. 왜. 왜. 그러나 대답해줄 자가 아무도 없다는 것은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다. 하늘은 절대 올려다보지 않는다. 거기에는 아무도 없고, 또한 죄악으로 가득한 지상과 연결된 환각적인 그라데이션에 불과하니까.

 눈물을 흘리며 잠에서 깼다. 현실이라는 또 다른 꿈. 시야가 부옇다. 얇은 이불 위에 엉망으로 구겨진 몸체. 코트를 입은 채로 잠에 들었던 것 같다. 주머니를 뒤져 담뱃갑을 찾고, 한 개비를 입에 물자 손끝에 입에서 흘러나온 하얀 거품이 묻는다. 손가락 관절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불을 붙이는 데 고생을 했다.
 연기를 뻐끔거리며, 흐린 눈으로 생각했다. 누군가 내 심장을, 내 심장을, 내 심장을 뜯어내서, 끌어안아줘. 담배연기는 좁은 방 안으로 퍼져가고, 냄새가 배고, 이곳을 악몽의 둥지로 만든다. 니코틴과 침이 섞인 액체를 입가로 흘린다. 언제부터 잘못되었을까?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던 걸까? 답이 나올 리가 없는 스스로에 대한 책망을, 답을 찾을 생각도 없이 하고 있다. 이대로 죽어버린다면, 아니지, 죽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세상에는 사후세계에 대한 터무니없이 많은 가설들이 있다. 공허로 돌아가, 완전히 사라질 수 있다면. 마치 태어나기 이전에 내가 없었던 것처럼. 자살하지 않는 것은 무섭기 때문이야. 어쩌면 내게 영혼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공포. 천국이든 지옥이든, 내가 나로 영원히 지속될지도 모른다는 위협. 그것이 내게는 너무나도 무섭다.
 나는 존재하고 싶지 않아.

 위액과 수면제와 침이 섞인 자국 위에 13개비의 구겨진 담배꽁초. 누군가 마구 현관문을 두드렸었다. 성난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던 것 같기도 하다. 밖은 낮인가? 지하에 지어진 내 집에는 창문이 없다. 누군가가 주먹으로 마구 현관문을 쳐댈 때 눈을 감지도 못하고 숨을 참고 있었다. 그냥 돌아가. 네가 찾는 사람은 없어. 이제 그런 사람은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아. 그래, 그 추운 아침에 현관에서 주저앉아버렸을 때, 사실 나는 전부 무너진 것이다. 나라는 형상과 흔적이 전부 무너져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러니까 전화하지 마. 찾아오지 마. 이젠 인간으로 있는 것도 무리니까. 누운 채로 토했다. 거품 낀 위액이 흘러나오고, 눈물도 강제로 밀려나오고. 이불 위에서 움직이지 않은 채로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겠다. 배에서 굉장한 소리가 나면서 위장이 아프다.
 그러나 밥을 먹을 수는 없어. 생존하기 위한 모든 노력을 그만둬야한다. 생존하기 위한 노력? 노력하지 않는 건 쉬운 일이다. 그러나 며칠만 굶으면 생명력이 나를 제치고 행동하기 시작한다는 것을 나는 경험으로 알고 있다. 그때부터는 생존하지 않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웃음이 새어나왔다. 나는 나의 주인이 아니다. 배가 부르고 목이 마르지 않으면 자신이 자신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이성이나 인격 같은 것은 듣기에나 아름다운 겉치레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존재의 주인은 오로지 생존하려고만 하는 처절한 본능이다. 경험으로 알고 있다. 나는 나의 주인이 아니다.
 하지만 이번엔 내가 이길 거야.
 이번에야말로 아무것도 아니게 될 거야.
 그러면 살기위해 발버둥 치면서 동시에 외로움에 목을 졸라매는 일도 없게 되겠지.

 <인간>의 책무는 영웅이 되는 것이다. 오른손의 손톱 세 개가 빠졌다. 정의롭고 정직하고 어렵고 좁은 길로 가는 것. 오른쪽 이마부터 광대뼈까지 온통 가죽이 벗겨져 피투성이가 됐다. 행복하지 않더라도, 보상이 없더라도 <인간>은 어렵고 좁은 길을 헤치고 가야한다. 얼굴 반쪽이 불이 붙은 것처럼 뜨겁고 아프다.
 배고픔을 잊으려고 스스로를 할퀴다보니 멈출 수 없게 됐다. 피나는 통증이 잠시라도 흐려지면 발이 제멋대로 부엌을 향해 뛰려고 한다. 오른쪽 시야가 붉다. 문뜩 탈수 증상이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이불은 온통 피로 축축하다. 탈수가 아니라 빈혈인가? 누운 자리에서 상체를 들어 앉았다. 며칠 만에 두뇌가 허공에 떴다. 세반고리관이 갑작스러운 변화에 적응하지 못해 극심한 어지러움을 느끼고, 욕지기가 나온다. 하지만 이미 위장은 텅 비어서 약간의 위액 거품만 혓바닥 끝으로 밀려나올 뿐이다. 두 팔로 상체를 지지하고 주저앉아 있었다. 곧 이마에서 흘러나온 피가 바닥에 고여 똑똑하고 듣기 시작했다. 시야는 여전히 혼란. 상하좌우를 구분할 수 없고, 윤곽이 그려지지 않은 이상한 곡선들만 눈 안에 가득하다. 그러니까 생각도 제대로 할 수 없다. 뭣 때문에 이러고 있었더라? 나는 뭐지? 아, 온몸이 피와 체액으로 끈적끈적하다. 샤워가 하고 싶어.
 샤워가 하고 싶어. 일어서려고 노력해봤다. 균형을 잡기 힘들어서 허리를 펴기도 전에 몇 번이고 넘어졌다. 한 번은 벽에 이마를 찧어서 온몸에 전기가 흐르는 것 같은 통증에 기절할 뻔 했다. 왜인지는 몰라도 얼른 씻고 거울을 보자는 욕심이 있었다. 원래는 거울 따위 일부러 피해 다니는데, 이제는 내가 얼마나 스스로를 무너트렸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그러나 도저히 설 수가 없었다. 피와 토사물과 담배꽁초의 진창 속에서 치매 걸린 노새처럼 버둥거리다가, 결국 포기하고 기기 시작했다. 다리로 몸뚱어리를 밀면서, 문턱을 넘어, 냉기가 새하얗게 반짝이는 거실로, 그 위에 내 피를 덧칠하고, 그러나 아주 깜깜한 거실, 창문이 없어서 다행이야, 만약 누군가가 아스팔트 위에 납작 엎드려 내 자멸의 둥지를 훔쳐볼 수 있었다면, 그런 가능성만으로도 나는 이런 상황까지 도달하지 못했을 것이다. 관객은 나 한 명으로도 충분하다. 아니, 나 한 명만 있어야한다. 아무도 내 알량한 연극무대를 보게 할 수 없다. 만일 관객석에서 당신들이 내 괴상한 연기를 보고 있다면, 난 즉시 무대를 취소하고 정상적인 각본을 짜올 테니까. 그러니까 관객은 비난도 비판도 그렇다고 호응을 해주지도 않는 목각 같은 나 한 사람으로 충분하다. 마침내 화장실 문 앞에 죽어가는 구더기처럼 웅크려있는 이 관객은, 애당초 이 무대를 보고 싶다는 생각도 없었고, 거친 채찍 같은 운명에 등 떠밀려 억지로 배우의 눈구멍 속에 앉게 된 것이니까.

 사촌 언니가 울고 있다. 아니, 곡을 하고 있다. 사촌 오빠는 어떻게든 그녀를 진정시키려고 진땀을 빼고 있고, 저쪽에는 영정사진, 내가 그리 좋아하지는 않았던 큰어머니, 영정사진 안에서조차 그녀는 매사에 화가 난 표정이다. 곡소리가 점점 새되어지고 히스테릭한 비명소리로 바뀌어간다. 상황 자체를 이해할 수 없다. 내가 전혀 소속되어있지도 않고 이해되지도 않는 장면에서 나는 끔찍한 지루함을 느꼈다. 2년 전 나의 어머니가 죽었을 때와 거의 비슷한 감정. 차이점은 내가 어머니를 사랑했었다는 것이다. 사랑? 그래, 프로이트와 비트겐슈타인 이후로 우리는 일상적인 단어 하나 능란하게 쓸 수 없게 되었지. 나는 여전히 동상처럼 서서 사촌 언니가 자지러지는 장면을 관망하고 있다. 무엇이 슬픈 걸까? 아니, 더 정확한 질문은 무엇이 못마땅한 것일까? 인간의 유한성? 상실이 반복되기만 할 뿐인 인생? 언젠가는 오고야 마는, 가을수확을 하듯이 낫을 들고 찾아오는 운명? 글쎄, 아마 사촌 언니의 <감정>은 그런 것과는 별 상관이 없겠지. 논리가 매듭지어지지 않는다. 장례식장의 시간이 무한하게 늘어지는 것 같은 감각에 입맛을 다시고, 아빠를 찾으러 간다.
 걷기에 적합한 몸. 뛰어도 부담이 느껴지지 않는 젊고 활기찬 몸. 검은 단화에 검은 양말에 검은 스커트에 흰 블라우스 위에 검은 웃옷을 입고 장례식장의 야외를 종횡무진. 잘은 몰라도 아빠는 큰아버지와 함께 있을 것이다.
 화장실 건물 뒤. 거의 회색으로 변하기 시작한 머리칼을 가진 익숙한 중년남자. 그리고 그 앞에 이미 완전히 백발인 노년의 남자가 벤치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다. 두 사람은 대화를 나누지 않는다. 아마 대화를 나누지 않아도 괜찮은 것일 테지. 담배연기 자욱한 그 좁은 길목은 두 사람의 침묵을 위한 것이었다. 마치 벽이 둘러쳐진 듯, 그 안으로 비집고 들어갈 수 있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중년남자의 얼굴은 아빠의 얼굴이었지만 그 표정은 아빠의 표정이 아니었고, 또한 그 표정은 2년 전에 본 기억이 있었던 것이었다. 흐린 눈을 가진 백발의 노인은, 아빠와 한없이 닮은 그 노인은 한 손에 담배를 들고 공허를 응시하고 있었다. 아마도 거기에 슬픔 같은 것은 없었다. 그냥 막연히, 공허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그 안개로 장막이 쳐진 것 같은 광경을 마냥 지켜보고 있었다.
 다급한 구두소리가 들려왔고, 누군가, 아마도 친척 중 한 사람이겠지, 그가 노인에게로 가 숨을 고르며 말했다. “……가 실신했어요.” 나도, 아빠도, 큰아버지도 표정 하나 바뀌지 않았다. 애당초 무슨 다른 소식이 있겠는가? 다만 나는 노인이 담배연기를 더 길게 뿜어내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는 재떨이에 꽁초를 비비더니, 두 손을 깍지 끼고 눈꺼풀을 껌뻑였다.
 그리고 아빠는 내가 그들의 주변에 있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차리고, 나를 쳐다보더니, 마치 <아빠처럼> 미소를 지었다.

 뜨거운 물이 타일 바닥에 웅크린 내 몸 위로 쏟아져 내린다. 물. 이 물이 내 죄악까지 씻겨냈으면 좋겠어. 가능하다면 내 영혼도 씻겨나가, 하수구로 빨려 들어가고, 그대로 영원히 찾을 수 없게 된다면. 갖가지 도피적인 망상들. 그러나 현실에서 씻겨 지는 것은 피부에 들러붙은 위액과 피와 담뱃재뿐이다. 주황색 조명이 비추는 화장실. 균일하게 물줄기가 떨어져 흩어지는 소리. 나는 눈을 감고 있다. 아주 완벽하게 유리되고, 폐쇄되고, 의미와 가치를 벗어난 주황색 공간. 내 피부를 거친 물은 주황색 혹은 분홍색이 되어 하수구로 흘러 들어간다. 상처가 또 열려, 피와 진물이 배어나오고, 불에 타는 것 같아. 오른손을 보자 내가 검지와 중지와 새끼손가락의 손톱을 잃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흉하고 벌겋게 벌어진, 열린, 원래는 닫혀있어야 할 살이 움찔거리며 진액을 토한다. “하하하.” 누가 웃었지? 누가 웃었어? 아, 내가 웃었군. 거울을 봐야겠어.
 시야는 여전히 붉고 흔들린다. 온수를 맞으며 비척비척 타일바닥 위에서 일어서려고 노력한다. 벽을 짚으면 손가락 끝이 너무 아파. 그러나 어쩔 수 없다. 여기서 넘어져서 머리라도 바닥에 박으면 그대로 죽는다. 물론 모든 시나리오의 결말은 죽는 것이지만, 아직 페이지가 남았을 것이다. 기승전결 같은 정석적인 것은 바라지도 않아. 그저 아직 페이지가 남았고, 결말은 가깝기는 해도 눈앞에 있지는 않다.
 세면대 위에 붙은 높이 1m 가량의 거울. 가까스로 서서 보자 틀어놓은 온수 때문에 거울에 온통 김이 끼었다. 불확실한 반사. 검고 하얀 어떤 유령 같은 것이 거기에 깃들어있다. 닦아야할까? 닦지 않아도 충분히 보이는 것 같은데. 그러니까, 내가 봐야할 것이, 충분히 보이는 것 같은데. 불확실함. 불길함. 고장 난 메트로놈 소리가 이미지화 된 것 같은, 섬뜩한 소음공해. 그 희뿌연 거울을 마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중국산 담배를 피운 것처럼 흉부가 죄어온다. 주황색, 주황색, 주황색 속에, 어떤 낙하 중인 것, 어떤 불분명한 형태. 정확히 알 수 없는 것은 불길함과 공포를 유발한다. 다시 말해서 모든 것은―자기 자신을 포함해― 불길하고 공포스럽다. 야밤에 갑자기 문밖에서 들려오는 정체를 알 수 없는 폭발음 같이. 혹은, 혹은 도시 한복판에서 너무나도 바쁜 군중 떼에 둘러싸여있을 때, 그 모든 사건들의 중첩에 대해서 어느 정도 이해해버렸을 때 같이.
 아, 제기랄, 이마의 열린 상처가 너무 아파.

 그런데 나 자신을 증명하는 길이 무가치하고 사악하게 되는 것밖에 없다면요?
 왜 그렇게 생각하죠?
 보세요, 시대는 절대성을 잃었어요. 정확히는 그런 건 원래 없었죠. 다만 사람들을 안심시키기 위해서 원시부터 중세까지 작동하던 안전장치였는데, 그게……
 작동을 멈췄군요.
 맞아요. 선생님, 만약에 기계부품이, 자신이 오로지 기계를 작동시키기 위해 존재하는 부품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부정하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요?
 말씀해보세요.
 기계의 작동을 방해해야 해요. 기계를 부숴야 해요. 자신이 속한 기계를 망가트리는 부품이 있다면, 그건 더 이상 기계부품이 아니죠.

 여긴 막다른 길이야. 여긴 막다른 길이야. 여긴 막다른 길이야.
 여긴 막다른 길이야.
 그 창백한 젊은 여자는 탁자에 놓인 커피 잔을 보면서 말했다. 커피 잔은 커피로 가득 차있었다. 여자는 사물의 모든 존재방식이 끔찍하게 무섭다고 느꼈다. 그녀는 도무지 커피 잔을 쥘 수가 없었다. 쥘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그 유리로 된 대상은 너무도 취약해서, 손가락을 가져다 대는 순간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파열음을 내면서 터져버릴 것 같았다. 아니 그럴 것이 분명했다. 그녀는 아주 조심스럽게 눈동자를 굴렸다. 눈동자 역시 너무 빠르게 움직였다가는, 그 시선의 움직임에 의해서, 이 나약한 세상이 거꾸로 뒤집어져 모조리 쏟아져 내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목소리의 치명성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 옆자리에 앉은 두 명의 여자는 무언가 담소를 나누면서 간헐적으로 새된 웃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 <웃음소리>가 들릴 때마다 젊은 여자는 천 개의 바늘이, 감정을 가진 바늘이 뇌수로 침입하는 것을 느꼈다. 그럴 때마다 화들짝 놀라 자빠질 지경이었지만 경련과도 같은 그런 행동을 했다가는 온몸의 살가죽이 우수수 떨어질 것이었다. 그녀는 카페에 들어온 것을, 애당초 신선한 공기를 찾아 밖으로 나온 것을 진심으로 후회하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카페의 라디오에서는 발라드싱어가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감정이 실린 목소리는 위험하다. 여자는 완전히 공포에 질렸고, 이내 천천히, 아주 천천히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지갑 안에 부적처럼 모셔둔 발륨 봉지를 엄지와 검지로 조심스레 집었다. 내 뉴런들이 욕을 하고 있어.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고 완전히 길을 잃었을 때, 길을 잃었다는 사실 자체를 잊어버리는 건 방법이 아니라고, 소리를 치고 있다. 그러나 다른 도리가 없었다. 여자는 봉지 안의 발륨제제를 하나하나 꺼내 커피 잔 앞에 늘어놓았다. 그리고 그 하얀-하얗고 강력하고 조그마한 고체들을 손끝으로 움직여 정사각형 모양을 만들었다. 공포와 혼란으로 뒤죽박죽이 된 의식은 그 정사각형을 주시하라고 명령했다. 커피가 식어가고 발라드싱어는 서정적인 음색으로 폭력을 울부짖는다. 삼켜야해. 삼켜야해. 사물의 본질에 노출되어있는 것은 인간존재의 가장 끔찍한 고통이다. 그리고 그 사물들은 사방팔방에 즐비하다. 말 그대로, 그것들은 어디에나 있다. 안전장치가 작동하지 않게 될 때를 기다리며, 태초부터 숨겨온 칼날을 은밀히 조준하고 있다. 정사각형을 이루고 있던 타원형의 제제들을 여자는 신중하게 하나하나 왼손으로 옮긴다. 그리고 삼킨다.
 15분. 구원을 위한 15분. 어떤 구원? 도피는 아니고? 그러나 도대체 차이점이 뭐란 말인가? 발라드싱어가 더 이상 자살을 종용하지 않을 때까지 기다리고, 옆 자리의 웃음소리가 추악한 고문기구가 아니게 될 때까지 기다리고, 유리잔이 보다 견고해질 때까지 기다리고, 그리고 두 손을 뻗는다. 여전히 취약한 세상. 그러나 아까보다는 깨지기 어려워졌다. 사약사발을 들듯이 조심스럽게 양손으로 커피 잔을 들어 올려 죄악의 엑기스를 삼키듯이 들이킨다.
 이제 잔의 커피는 절반.
 절반의 막다른 길.

 거울의 김을 손바닥으로 지운다. 주황색 조명 아래 객관이 규정한 내 모습이 한 줄기씩 드러난다. 검은 머리의, 얼굴 반쪽이 피투성이인, 저 눈, 저 눈을 좀 봐, 건강-건강한 사람들은 절대 저런 눈을 하지 않지. 왜 동공이 닫혀있지? 너는 지금 따뜻한 물로 온몸을 씻으며 안락해야할 텐데. 저 동공은 새까맣게 닫혀있다. 노이즈. 안전장치. 노이즈. 생각하지 말 것. 사고는 자멸의 지름길이다. 그리고 우리의 본능은 우리가 생각하지 말아야할 때 시끄러운 잡음을 뇌하수체에서 분비한다. 경고다. 생-각하지마. 계속해서 거울을 지워간다. 담배 때문에 잿빛으로 변한 입술이 웃고 있다. 그야 그렇겠지. 절망의 다음 단계는 웃음이다. 정확히는, 절망이 어떤 것인지 이해하면 사람은 웃게 된다. “히히.” 거울 속의 웃고 있는 잿빛 입술이 우스워서 웃었다. 마주 댄 거울처럼, 계속해서 서로를 반사하는 농담. 결국 이 모든 것은 영원의 망각 속에서 바스러져갈 먼지에 불과하고, 그것을 깨닫게 되면, 이 우주 자체가 허황된 농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고통도, 불행도, 비참도, 부조리도, 미치광이의 농담이다. 아가트! 아가트! 내가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은 당신뿐이야, 아가트. 그녀의 이름은 에브였다. 하하하. 하하하하.
 손을 좀 더 움직인다. 창백하고 빈약한 젖가슴 한 쌍과, 그 사이에 그어진 수 없이 많은, 오래되고 불거진 직선의 흉터들이 보인다. 오십 개, 혹은 육십 개? 그것들은 흰색이다. 흉터는 처음 벌어졌을 때 피를 흘리며 붉은 색으로 보이지만, 곧 갈색이 되고, 딱지가 떨어지고 불거져 나오며 살보다 흰 지독한 백색이 된다. 저 아래에 심장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시꺼멓고 쪼그라든 심장을 꺼내서 내 사랑을 다 해 끌어안아주려고 했는데, 칼로 가죽을 찢는 건 너무 아팠고, 칼날이 복장뼈를 긁는 소리는 너무 시끄러웠어. 아아, 몸에 갇힌 가엾은 영령들아. 사실 심장을 꺼낸다고 한들, 분명 심장의 더 안쪽에서는 누군가가 울고 있겠지. 고로 이것도 거짓말쟁이의 농담이다. 우리가 <어딘가>에 있다는 것. 우리는 어디에도 없어. 만약에 우리가 있다면, 천지사방에 흩어진 암스테르담의 안개 같은 비참함이 우리다.

 괴물이 되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이렇게 말하기만 하면 된다: 나는 괴물이 아니야.

 쌍뜨뻬쩨르부르크에서는 설날이 되면 2주 동안 해가 뜨지 않는다. 그러면 사람들은 친척모두가 모여 2주 내내 보드카를 마시고 담배를 피우고 잠을 자는 것을 반복한다. 밖에는 나갈 수 없다. 얼어 죽으니까. 담배연기와 너부러진 술병과 너부러진 사람들 사이에서 인생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고 러시아에서 온 남자친구는 말했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인생은 보드카 잔 위에 앉은 녹색요정 같은 거라고.

 이 컵은 매우 현명하군. 검은색인 것을 보면 알 수 있어. 검은색은 견고하지. 잘 깨지지 않아. 그래서 나도 내 방의 벽지를 전부 검은색으로 칠했었지. 그래야 망령들이 벽을 통과해 들어오지 못하니까.
 옆방에 있던 사람이 한 말이다.

 누군가가 아주 중요한 말을 했다. 당신의 행동과 말들을 매우 주의 깊게 관찰하면 당신이 믿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거라고. 온몸에서 투명하거나 혹은 붉은 물이 뚝뚝 떨어지는 채로 욕실 밖으로 나간다. 깜깜하지만 몇 년이나 살아온 집이다. 부엌으로 가는 길은 머리가 기억하고 있다. 어둠 속에서 더듬거리며 식칼 옆에 놓인 과도를 집어 든다. 다시 욕실로. 주황빛 조명 아래 스테인리스 제 과도가 둔하게 번쩍인다. 거울에는 알몸의 앙상한, 피투성이 여자가 칼을 들고 있다. “나는 게으르고.” 잿빛 입술이 말한다. “나약하고, 아, 난잡한 환경 속에서만 살아왔지.” 칼끝으로 손톱이 나간 손가락 끝을 빙글빙글 파낸다. “그러면서도 남들에게 원망을 사는 게 죽기보다 무서웠어.” 다리가 무너진 건 그것 때문이다. “내 이름은……” 손가락 끝에서 피가 방울방울 떨어진다. 통증 때문에 눈이 충혈 되어간다. 칼날을 이마에 댄다. “내 이름이 뭐였더라.” 칼을 쥔 손에 힘을 넣어 얼굴 가죽을 벗기듯이 이마에서부터 광대뼈로 천천히 도려낸다. 하하하. “내 이름이 뭐였냐고.” 웃으면서 묻는다. 칼날은 이미 볼을 찢고 있다. “아니야, 그런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 나는 죽었어. 사실은 아주 여러 번 죽었지.” 반대쪽 볼. 턱관절. 위로, 광대뼈. “마스크가 필요해.” 그리고 새 이름. 아니야, 어쩌면 필요 없을지도. 절취선을 자르듯이 이마 옆쪽을 깊이 베고, 반대쪽의 선과 이어지도록 하고. “아무도 내 이름을 모르는 곳에서 한 번 행복했던 적이 있어.” 이마부터 광대뼈를 따라 볼과 입술까지 가죽이 잘려 피가 비 오듯이 내린다. 3년 전에 혼자 충동적으로 떠났던 여행. 켄터키의 깡촌, 비오는 공동묘지의 한복판에 누워 쿠키를 먹고 있었다. 아무도 내 이름을 모르는 곳. 쿠키에서는 마리화나의 냄새가 났다. 반죽에 말린 대마 잎을 갈아 넣은 초콜릿 쿠키. “모두 죽는다. 시체들 사이에서, 내가 반드시 죽을 것이라는 위안과.” 손가락을 얼굴가죽의 터진 틈 사이로 우겨넣는다. 그리고 통째로 뜯어낸다. 순간 욕실이 검은색 섬광과 새빨간 잔상으로 시끄럽게 발작한다. “아아아.” 이제 내 오른손은 뜯어진 내 얼굴 가죽을 쥐고 있다. “마스크. 새 마스크. 하하.” 대마 쿠키나 대마 브라우니는 피우는 것과 달라서 정신에 작용하기까지 약 20분이 걸린다. 그 뒤에는 모든 근심과 걱정거리들이 녹아 사라진다. 나는 계속 쿠키를 깨작거리며 비를 맞았다. 해가 지고, 다시 해가 떠오를 때까지. 추위도 통증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거울을 봐. 하악 위로는 전부 피부가 벗겨진, 박물관에 전시된 인체 모형 같은 얼굴. 피가, 혈액이 거울까지 튀었다. 피가 눈으로 스며들어 모든 게 다 빨간색으로 보인다. 유일하게 멀쩡한 하악의 아랫입술이 웃으려고 애를 쓰고 있다. 주의 깊게 본다.
 내가 믿는 게 뭐지?
 얼굴 가죽이 진액으로 끈적거린다. 조심스럽게, 거울에 붙인다.
 아주 훌륭한 농담이야.

 엄마, 제발, 나는 정말로 노력했어요. 학교에 나보다 점수가 높은 애가 한 명 있다는 건 내 잘못이 아니에요. 선생님도 내 점수를 칭찬했어요. 제발, 엄마, 화내지 마세요. 제발 방에 가두지마세요. 문제집을 다 풀 때까지 화장실도 못 가게 할 거잖아요. 저번에도 의자에 오줌을 싸고 한참을 울었어요. 제발.

 플래시백이 점점 잦아든다. 거울에 비친 괴물을 오래 보고 있을수록, 과거는 허상이 된다. 나는 여러 번 죽었다가 완전히 죽었다. 거울에 들러붙은 내 얼굴가죽 한복판에 칼을 박아 넣는다. 쨍 소리가 나며 거울이 깨진다. “카-흐-아-아-하.” 헐벗은 얼굴근육이 괴상한 웃음소리를 낸다. 피투성이 세면대. 안락한 기분. 안전한 기분. 얼굴 전체에서 느껴지는 통증이 우습다. 세면대에 칼을 던진다. 쨍그랑.

 내 광기가 나이와 함께 충분히 자랐을 무렵 아버지는 날 정신병동에 집어넣었다. 잘 된 일이었다. 나는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 커다란 비밀을 숨기고 있고, 내가 정신병동에 있는 한, 아버지는 날 심문할 수 없다. 거기서 많은 친구들을 만났다. 사실은, 그들이 내가 처음 사귀는 친구들이었다. 밤마다 어느 병실에서 숨이 넘어가는 비명소리가 들렸지만 어느 때보다 잘 잤다. 룸메이트는 정상적인 회화가 가능했지만 간호사들이 조금만 눈길을 돌리면 어떻게든 날카로운 물건을 구해 손목과 팔뚝을 그었다. 그녀는 아주 친절한 젊은 여자였다. 어느 늙은 노파는 매일 아침 내게 만나서 반갑다며 자기소개를 했다. 그녀는 망각의 축복을 받은 자였다. 나에게는 그저 모든 것이 편안했다. 그곳에서는 자기 자신을 책임질 필요가 없었다. 내가 지시에 순종적이었기 때문에 간호사와 의사는 내게 살갑게 대해주었다.
 다만 내가 매일 세 번씩 먹는 약은 병동의 어느 누구보다 많은 양이었다.

 담배를 피우려고 했는데 윗입술이 없으니 고생스러웠다. 담배를 입에 고정할 수가 없었다. 연기를 빨아들이는 것도 불가능했다. 곧 포기하고, 더러운 이불에 또 내 피를 묻혔다. 켄터키에서의 하룻밤이 떠올랐다. 그만큼 편안하고 안락했다.
 다 잘 되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신에게 정신병동 입원기록이 있다면 이미 이 사회에서 당신의 역할은 모두 끝났다는 뜻이다. 제대로 된 직장을 구할 수도, 제정신인 친구를 곁에 둘 수도 없다. 그저 책임자가 의료기록 같은 건 신경 쓸 생각도 없는 아르바이트 정도나 가능하다. 그러나 그것도 오래가지 못한다. 제정신은 사람들은 귀신같이 타인의 이상한 면을 찾아내기 때문이다. 정신질환자들은 치료받기 위해 정신병동으로 가지만, 퇴원하는 사람들이 전부 나았다는 뜻은 아니다. 병원과 사회는 서로 다른 바로미터를 갖고 있다. 인생에서 한 번 추락하면 다시 기어 올라올 방법은 없다. 퇴원할 때도 우리는 이미 똑같은 비극적 결말로 향하고 있다.

 나는 새해가 싫었어. 너무 싫었어. 그 냄새, 그 분위기, 모든 게 잘못되었다는 느낌이었어.
 그래서 한국으로 온 거야?
 그래, 도망친 거야.
 그리고 날 만났고.
 그렇지, 도망치고, 널 만났어. 그리고 네 덕분에 깨달았지.
 뭘?
 어느 누구도, 절대로 도망칠 수 없다는 것을.

 이제 빛이 보고 싶어. 겨울의 맑은 하늘도 보고 싶고. 나는 이미 죽었으니, 망령처럼 거리로 나설 거야. 빛이 나를 태울 거야. 난 이름도 생명도 없는 존재로서, 불타올라, 재가 될 거야. 이곳은 내 둥지지만, 사라질 때는 둥지 밖에서 사라져야 해. 이제 나는 세계를 사랑해. 물론 여전히 증오하지만, 증오하는 만큼 사랑해. 왜냐하면 이제 난 정말로 아무도 아니니까.

 현관문을 연다. 아주 오랫동안 잠궈 놓았던 기분이다. 며칠인지 몇 주인지는 모른다. 바라 건데 밖이 정오이기를. 해가 하늘 꼭대기에서 만물을 향해 쬐어 내리고 있기를. 현관을 지나 지상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오른다. 시야는 붉고 흐리다. 눈꺼풀마저 떼어내서 눈도 깜빡일 수 없다. 그러나 지상에 알몸으로 피투성이로 섰을 때, 영원한 종말을 의미하는 무지막지하고 폭력적인 빛이 내 무방비한 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웅웅거리는 이명 사이로 공포와 혐오의 비명 같은 것들이 들렸다. 태양이 저기 있다. 태양은 분명히 나를 내리쬐고 있다. 온전치 못한 오감 속에서 내가 느낀 것은 한없는 가벼움이었다. 이것이 마지막 페이지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피인지 눈물인지 알 수 없는 것이 드러난 얼굴근육을 타고 흘러 따가웠다.
 나는 그림자로 빚어졌으니
 이제 나는 빛으로 지워지는 것이다.
 굳바이,
 내가 이겼어.


끝.

Posted by Lim_
:

도망자

글/소설 2017. 12. 26. 16:32 |

2017/12/24 완성.


1. 억지로 쓴 거 같기도 하고

2. 그러나 혈통에 대한 이야기는 항상 쓰고 싶었다.




Posted by Lim_
:

그는 그곳에 있었다

글/소설 2017. 10. 22. 22:17 |

2017/10/22 완성.


1. 나는 글을 쓴다.

2. 나는 일을 한다.




Posted by Lim_
:

우화羽化의 꿈

글/소설 2017. 8. 10. 20:15 |

2017/08/10 완성.

 

 

1. 나는 창작자로서 독자들에게 무엇을 주려고 했는가?

2. 붕괴 뒤에 건축이 있고 죽음 안에 진실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려줬으면 했던 것일까. 그리고 거기서 자연스레 뻗어나오는 환희와 자유를, 나는 보여줄 역량이나 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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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8/08 완성.


1. 자가 표절 의혹.

2. 실존주의는 사망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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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자 이야기

글/소설 2017. 8. 1. 16:58 |

2017/08/01 완성.


1. 스승께서 실존의 절망에 멈춰버리면 안 된다고 말씀하셨다.

2. 나는 그를 나 자신보다 신뢰한다.


2017/08/02 추가분량 완성.


1. 일반 독자들은 매끄럽게 활주로에 랜딩하는 여객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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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의 근심

글/소설 2017. 7. 17. 00:06 |

2017/07/17 완성.


1. 장마철이라 비가 많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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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자亭子의 슬픔

글/소설 2017. 7. 10. 15:15 |

2017/07/10 완성.


1. 텍스트는 출판만을 위하여 창조되는 것이 아니다.

2. 더 자유로워져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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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의 감금

글/소설 2017. 7. 7. 15:20 |

2017/07/06 완성.


1. 나는 이제 내가 누구를(혹은 무엇을) 위해 글을 쓰는 지 어느 정도 알고 있다.

2. 이 길도 결국은 끊고 떨치고 떠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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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26 완성.


1. 새삼 느낀 것이지만 나는 역시 글 쓰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나 그 즐거움은 그 어떤 살아있는 자를 위함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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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도求道

글/소설 2017. 5. 17. 15:13 |

2017/05/17 완성.


1. 여러 일들이 있은 후에 나는 세속의 진지함을 고통스럽게 쓰레기통에 처박아버리고 존재의 진중함과 부조리를 다시 찾아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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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감옥

글/소설 2015. 10. 12. 09:28 |

2015/10/5 완성


1. 쓸 때는 신나게 썼다.

2. 완성하고 보니 만족할 수도 불만을 가질 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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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직서

글/소설 2015. 4. 22. 22:58 |

2015/4/17 완성.

 

1. 나는 나의 문학을 사랑한다.

2. 설령 내가 문학이라는 것의 정의를 내릴 수 없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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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1/16 완성.


1. 시 쓴다고 거의 반년동안 소설에 손도 안 대다가 쓴 것.

2. 나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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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차로

글/소설 2014. 8. 13. 22:05 |
2014/8/4 완성.

1. 척 팔라닉의 <질식>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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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3월에 집필한 장편소설.
실질적으로 내 최초의 장편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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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네 타는 남자

글/소설 2013. 4. 24. 22:47 |
2013/04/23 완성.

1. 그간 장편소설을 하나 집필하고 있었다. 그것이 완성 된 뒤에 쓴 첫번째 단편소설.
2. 시점을 좀 보편화해야 독자들이 주인공과 감정을 교류할 수 있다는 조언을 기반으로 하여 썼다.
3. A4용지 16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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