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1/28)쥐구멍

글/소설 2024. 4. 21. 22:54 |

(2023/01/28)
쥐구멍


 5월 9일, 월요일, 오후 6시
 오후 2시가 조금 지나 깨어났다. 뱃속에 커다란 동굴이 뚫린 것 같은 굶주림에 잠에서 깼다. 위장에서 고통이 느껴질 정도였다. 입 주변에는 거품이 잔뜩 말라붙어있었다. 허기와 목마름 때문에 역으로 욕지기가 치밀어올랐다. 그대로 거실 바닥에서 몸을 웅크리고 속을 게워내자, 식도가 타들어가는 것 같아 구토를 멈출 수가 없었다. 나는 거실에서 끔찍한 소리를 내며 거의 투명에 가까운 위액을 뱉어냈다. 구토가 멈출 즈음이면 또 식도의 통증과 이물감 때문에 구역질이 올라오는 식이었다.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눈물로 젖은 얼굴을 들었다. 잠들기 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바닥과 벽의 경계에 뚫린 자그마한 구멍이었다. 딱 보기에 다 자란 생쥐 한 마리가 드나들 수 있을 만한 크기였다.
 의식이 물에 잠긴 것처럼 혼탁했다. 자신이 처한 상황을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없었다. 눈앞에 보인 구멍이 맥락도 없이 머리를 꽉 채웠다. 어린아이들이 처음 보는 장난감을 쥐어보는 것처럼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었다. 손가락이 어둠 속으로 쑥 들어갔다. 무언가 날카로운 것에 깎여나간 듯 까슬까슬한 구멍의 벽면이 손끝에 느껴졌다. 그것은 틀림없이 벽에 뚫린 쥐구멍이었다. 그리고 나서야 마침내 나는 상황을 살피기 시작했다. 탁상 위의 전자시계를 확인하고 날짜를 계산해보았다. 나는 사흘 동안 잠들어있었던 모양이다. 그 사실을 깨닫자 다시 뱃속에서 맹렬한 허기가 들끓기 시작했다. 사흘이나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잠들어있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어쩐지 내 것 같지 않은 사지를 억지로 움직여 냉장고까지 기어갔다. 우유, 햄 통조림, 식빵, 달걀부터 냉동 밥까지 닥치는 대로 입안에 욱여넣었다. 한참을 아귀처럼 먹어댄 뒤에야 조금 안정이 되는 듯했으나, 다시 구역질이 올라왔다. 두 번 정도 게워내고 또 먹어치우는 짓을 반복했다. 그리고서 드디어, 내가 살아있다는 사실에 대해 생각해볼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일단은 좀 누워야겠다.

 같은 5월 9일, 월요일, 밤 11시
 한참을 매트리스 위에 누워 정신을 가다듬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머릿속의 혼란스럽던 생각들이 가닥이 잡히기 시작했다. 거실 탁상으로 가 수첩을 뒤졌다. 잠에서 깨어나기 전 마지막으로 쓴 것은 5월 6일의 기록이었다. 대단한 것은 없었다. 주된 내용은 내가 어떤 약을 몇 그램이나 삼킬 것인가에 대한 것이었다. 수첩에 적힌 수 많은 화학성분들의 이름을 가만히 읽어내려갔다. 그날 내가 삼킨 약은 트리아졸람 0.25mg 정제 스물한 정과 수십 알이나 되는 리튬, 쿠에티아핀푸르마산염 등이었다. 그밖에, 문장에서 나타나는 산만한 정신상태와 사후세계에 대한 강한 부정 따위를 확인할 수 있었다. 앙드레 지드가 삶을 긍정하기 위해 썼던 글까지 인용하며, 난삽한 문장으로 내 ‘삶이 약을 삼키고 잠드는 순간 완전히 끝나’버릴 것이라고 적어놓았다. 그날 저녁 내가 약물의 성분과 용량에 대해 수첩에 써놓았던 것은 기억한다. 그러나 죽음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늘어놓은 부분은 기억에 없다. 아무래도 약 기운 때문에 몽롱할 때 쓴 것 같다.
 그런데 지금, 내가 실패했다는 사실에 대해 전혀 현실감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이상한 일이었으나 특별히 유감스럽지도 않다. 며칠이나 잠들어있다가 깨어났기 때문인지, 심한 피로감과 두통 때문에 마냥 눕고만 싶다. 팔다리가 사시나무처럼 떨려서 몸을 움직이기도 힘들다. 좀 더 쉬고 나면 내가 처한 상황을 보다 감정적으로 느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거실에 게워놓은 오물을 치워야겠으나 도무지 몸에 힘이 없다. 한숨 자고 난 뒤에 치운다고 큰일이 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벽의 구멍은 난데없이 어쩌다가 생긴 것인지 모르겠다. 잠들어있던 사흘 사이에 쥐라도 들락거리게 된 것일까.

 5월 10일, 화요일, 밤
 두통과 피로감이 가시질 않는다. 밤에 잠을 자기는 했지만, 내내 혼란스러운 꿈만 꿔서 전혀 개운하지 않다. 억지로 몸을 움직여 거실을 청소했다. 청소라고는 해도 휴지로 바닥을 닦아냈을 뿐이다. 오물을 닦은 휴지를 처리하기가 귀찮아 벽에 난 쥐구멍에 전부 쑤셔 넣어버렸다. 집안의 쓰레기통들은 진즉에 가득 찼다. 지난 삼 개월간 단 한 번도 집 밖에 나가지 않았으니, 쓰레기를 처리할 방법도 없었다. 만약 내게 거리로, 아니, 현관 앞의 쓰레기장까지만이라도 나갈 용기가 있었더라면 굳이 남아있던 약으로 자살을 시도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바깥세상에는 보다 확실하게 죽을 수 있는 방법이 수도 없이 많다. 그런데 바로 그런 사실 때문에 나는 밖에 나가기를 두려워하는 것이다. 나열해보자면, 건물 밑을 지날 때는 옥상에서 벽돌이 떨어져 내릴 것 같다. 거리를 건널 때는 느닷없이 자동차가 돌진해올 것 같다. 그리고 길에서 지나치는 행인이 갑자기 칼을 쥐고 덤벼들 것 같다. 그런 공포가 늘 나의 발을 묶고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한다. 전부 말도 안 되는 망상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다. 그러나 알고 있는 것과 극복할 수 있는 것은 다른 문제다.
 평생을 이런 어처구니없는 공포에 시달려온 것은 아니다. 반년 전까지만 해도 나는 어엿한 직장인이었다. 중소 IT기업에서 2년을 일했다. 아니, 어엿한 직장인이라는 말은 취소해야겠다. 시쳇말로 나는 고문관이었다. PC용 웹사이트를 모바일 사양으로 변환하는 일을 2년이나 계속했으나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성과를 낸 적이 없다. 늘 기한에 늦거나 세세한 부분에서 오류를 냈다. 직장에서 나의 주 업무는 시말서를 쓰고 사죄하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하늘이 무너지지는 않으려나, 땅이 꺼져버리지는 않으려나 하고 습관적으로 좌절하곤 했는데, 사실 이것이 나의 가장 한심한 성질이었다. 보다 나은 인간이 될 각오를 하기보다는 세상이 끝장나기만을 바랐던 것이다. 그러니 5월 6일에도, 아니, 그만두자, 이제는 삼킬 약도 남지 않았다.
 아무튼, 그렇게 죽음이 찾아오는 몽상만 하며 살다 보니 상상은 어느새 망상이자 병이 되어버렸다. 어느 때고 죽음이 닥쳐올 수 있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뿌리를 박자 이번에는 그것이 두려워진 것이다.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우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공기가 싸늘하고 하늘이 화창하던 11월 초순, 나는 출근준비를 마치고 현관을 나섰었다. 그런데 그 주택가의 골목 한가운데에서 도무지 움직일 수가 없었다. 골목을 걷는 사람들 모두가 내게 지독한 악의를 품고 있었다. 무어라고 중얼거리는 소리마저 들리는 듯했다. 총칼로 무장한 적군들 앞에 맨몸으로 내던져진 기분이었다.
 아무래도 몸에 기력이 없으니 기분까지 우울해진 모양이다. 회사 대신 병원에 다니기 시작한 이래, 당시의 일은 어지간해서는 떠올리지 않으려고 노력해왔다. 그러나 지금같이 수첩에 온갖 일을 적고 있자면, 생각이 제멋대로 이어진다. 실상 오늘 한 일이라고는 거실을 닦은 휴지를 쥐구멍에 욱여넣은 뒤 해가 질 때까지 넋 놓고 앉아있던 것뿐이다. 모아뒀던 약을 전부 삼켜버렸으니, 이제는 자려고 해도 쉬이 잠들 수가 없다. 트리아졸람 없이 잠드는 방법을 몸이 잊어버린 것만 같은 느낌이다.
 죽을 작정으로 먹었던 약은 치사량도 아니었던 모양이고, 이제 무얼 해야 할지 모르겠다.

 5월 11일, 수요일
 쓰레기통 하나를 비웠다. 밖에 나간 것은 아니다. 새벽에 잠이 오지 않아 거실 탁상 옆에 널브러진 듯 누워있었다. 집안은 어스름했고 곳곳에 그늘이 져 있었다. 그림자 안쪽에 새까맣게 뚫려있는 쥐구멍은 계속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한 시간, 어쩌면 두 시간 동안 서로 쳐다보고만 있었다. 전날 욱여넣은 휴지 생각이 났다. 만약 구멍 안에 쥐가 살고 있다면, 내가 한 일 때문에 입구가 막혀 오도 가도 못하고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어 쥐구멍까지 기어가 손가락을 넣어보았다. 그런데 구멍은 막혀있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쥐들이―정말 쥐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그 지저분한 휴지를 갉아먹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기묘한 흥미를 느꼈다. 거실 구석에 놓여있는 쓰레기통을 끌어와 안에 든 것들을 조금씩 꺼내, 쥐구멍 안으로 밀어 넣었다. 처음에는 어딘가에 걸리는 듯 잘 들어가지 않더니, 약간 힘을 주자 쓰레기는 구멍 안쪽으로 밀려 들어갔다. 나는 다소 멍한 상태로 쓰레기통의 내용물을 쥐구멍에 집어넣는 일을 반복했다. 어쩌면 꿈을 꾸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 작은 입구 안쪽에 상당한 크기의 공간이라도 있지 않은 한, 쓰레기통의 내용물이 전부 들어갈 리가 없다. 그제야 나는 자살시도 이후 처음으로, 내가 이미 죽은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느꼈다. 약을 삼킨 뒤 나는 생명을 잃었고, 영혼만이 이 거실에 붙잡힌 채 정체불명의 쥐구멍에 대한 환상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그 구멍은 현실감이 없었다.
 텅 빈 쓰레기통을 확인하고 나서 다른 생각도 해보았다. 5월 6일에 삼켰던 약이 치사량은 아니었으나 뇌와 신경계를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놓기에는 충분한 용량이었을 수도 있겠다고 말이다. 그러나 내가 이미 죽었든 정신이 망가졌든, 증명할 방도가 없다. 손에 오물이 묻어 끈적거렸다. 나는 개수대에서 손을 닦고, 다시 쥐구멍 앞으로 돌아와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다. 휴지며 약봉지며 달걀 껍데기 따위를 잔뜩 집어삼킨 구멍은, 전보다 입구가 커진 것처럼 보였다. 나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머리로 이해하기에는 지금 겪고 있는 사태가 너무 이상스러웠다. 결국에는 스스로 판단하기를 포기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저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일어나는 일을 수첩에 적어놓기로만 했다. 창문 밖으로 아침 해가 뜨고 있다. 그리고 거실의 쓰레기통은 분명히 텅 비었다. 쥐구멍은 전보다 넓어진 것 같지만 분명하지는 않다.
 처음 직장을 구했을 때 품었던 것과 비슷한 불안을 느낀다. 내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유전자에 대한 근심과 불안이다. 친가와 외가를 통틀어 가까운 친지 중 알코올중독자와 조현병 환자가 넷이나 된다는 사실이 늘 내 가슴 속에 불발탄처럼 묻혀있다.

 5월 12일, 목요일
 깜빡 잠들었나 보다. 깨어나니 집안이 환했다. 나는 거실 탁자 밑에 나동그라져 자고 있었던 모양이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 아래서 보니, 거실은 전날 생각했던 것만큼 기괴한 분위기가 아니었다. 어쩌면 새벽이라는 시간이 가진 특유의 불길함 때문에, 별 것 아닌 일을 유난스럽게 생각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정신을 보다 맑게 만들어야겠다. 걸레를 빨아 아직도 시큼한 냄새가 나는 거실을 청소했다. 찬장에서 라면을 꺼내 끓여 먹었다. 5월 9일에 깨어나 냉장고에 든 것을 손에 잡히는 대로 먹어치운 이후 처음으로 하는 식사였다.

 5월 13일, 금요일
 쥐구멍이 점점 커지고 있는 게 분명하다. 더 이상 쥐구멍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넓이다. A4용지로 겨우 입구가 가려질 정도다. 이 정도 크기라면 건물 외벽까지 닿아도 이상하지 않은데, 지하로 쑥 꺼진 울퉁불퉁한 통로가 보일 뿐이다. 건물에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닌가 걱정이 된다. 회사에 다닐 때 입던 와이셔츠를 구멍에 구겨 넣고 달력을 뜯어내 입구를 막았다. 바보 같은 생각이라는 것은 알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고 보니 학생 때나 읽던 공포소설들이 계속 머릿속에 떠오른다. 러브크래프트나 스티븐 킹의 작품 따위 말이다. 그들의 소설은 대부분이 어딘가 왜곡된 현실에서 솟구쳐나오는, 실제로 있어서는 안 될 것들이 주인공들의 생명을 위협하는 공포스러운 이야기다. 그런 일이 현실에서 일어날 수는 없겠지만, 이미 이 쥐구멍 때문에 내가 겪고 있는 상황이 현실의 법칙을 따르는 것인지도 불분명해졌다.
 창문 밖은 어두컴컴하고 비가 내리고 있다. 어제 햇살이 밝았던 것이 거짓말 같다.

 5월 14일, 토요일
 이틀째 비가 멎지 않는다. 나는 하루 종일 탁상의자에 앉아 달력 낱장으로 막아놓은 쥐구멍과 창문을 번갈아 바라보고만 있다. 밖에서 울리는 빗소리가 마치 구멍 안쪽에 있는 무언가가 달력을 툭, 툭, 하고 건드리는 소리처럼 들린다. 삶이 끝나고 자유로워지리라는 기대로 일을 저질렀는데, 성공하지 못한 지금 내가 하는 일이라고는 편집증 환자처럼 신경을 곤두세우고 막힌 쥐구멍을 바라보는 것뿐이다. 구멍에서 빗물이라도 차올랐는지 달력의 아랫부분이 젖은 듯하다. 정체를 예측할 수 없는 무언가가 달력을 찢고 거실로 기어 나오리라는 생각이 잦아들지를 않는다. 빗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릴 때마다 어깨가 들썩 솟을 만큼 놀라곤 한다.
 몸 상태는 여전히 좋지 않다. 제때 밥을 챙겨 먹지도 않고, 아무래도 신경과민이 있는 것 같다. 종일 의자 위에 쭈그려 앉은 자세로 있으려니 온몸의 관절이며 근육이 아프다. 내내 긴장한 채로 쥐구멍을 향해 거북이처럼 목을 빼고 있으니, 머리통이 떨어질 것 같다. 그래, 차라리 이대로 머리가 목에서 뚝 떨어져버리면 좋을 텐데. 결국에는 이렇게 되었다. 나는 지금의 나와 아주 닮은 사람을 한 명 알고 있다.
 막내 삼촌은 아버지보다 열 살 어렸다. 큰아버지와 아버지, 삼촌 삼 형제 가운데 혼자만 성격이 유별난 편이었다. 사실 유별나다기보다는 이상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내가 어릴 때부터 그는 항상 직업도 없이 놀고 있었다. 큰아버지 댁에 있는 자신의 좁은 방에서 나오는 일도 거의 없었다. 그놈은 글러먹었어. 삼촌 이야기가 나오면 아버지는 늘 그렇게 말하곤 했다. 추석이었는지 설날이었는지, 큰댁에 명절을 쇠러 갔을 때의 일이다. 친척들로 바글거리는 집안에서 도망이라도 친 것인지 삼촌은 외출하고 없었다. 당시 나는 중학생이었을 것이다. 저녁이 되어도 삼촌은 돌아오지 않았다. 아버지를 포함한 어른들은 한참 화투를 치다가 판을 접은 뒤 술을 마시고 있었다. 지루했고, 아무도 나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나는 슬쩍 거실에서 나와 삼촌의 방인 뒷방으로 향했다.
 문은 잠겨있기는커녕 살짝 열려있었다. 그대로 밀자 습기 차고 담배 찌든 냄새가 퀴퀴한, 어둡고 좁은 방이 눈에 들어왔다. 낡은 매트리스 위에 이불이 흩어져있고, 장롱 하나와 오래된 TV가 놓인 단출한 방이었다. 바닥 한구석에는 새것으로 보이는 일제 담배 세 갑이 쌓여있었다. 그러나 삼촌이 어떤 생활을 하고 있는지를 알려주는 것은 그따위 것들이 아니었다. 매트리스의 반대쪽 벽면에야말로 삼촌의 정신이 그대로 투영되어있었다. 그곳에는 붉은색, 노란색, 파란색, 검은색, 청록색 등 온갖 색깔의 마커로 쓴 단어들이 벽지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문장을 이루고 있는 것은 없었고, 각기 다른 색깔로 된 단어들뿐이었다. 그리고 어떤 단어들은 검은색 선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붉은색 ‘사랑’과 노란색 ‘증오’가 연결되어 있었고, 청색 ‘보다’와 보라색 ‘기다리다’가 선으로 이어져 있는 식이었다.
 아마 삼촌은 하루 종일 그 좁은 방안에서, 매트리스에 앉아 자신이 만든 계산식―나는 그것이 계산식이 분명하다고 생각한다―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을 것이다. 마치 직접 보기라도 한 듯 그런 장면이 머릿속에 선하다. 가끔 단어들을 추가하거나 수정하고, 새로운 공식을 발견하면 같은 개념끼리 선으로 묶곤 했겠지.
 나는 그때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날을 기점으로 삼촌이 나의 육친이라는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리려 했다. 솔직히, 나는 친인척 중 그다지 대화도 해본 적 없는 삼촌에게서 가장 큰 동질감을 느끼곤 했었기에 더욱 그렇게 해야만 했다.
 나는 자신이 삼촌처럼 미쳐버렸다는 것을 긍정하려고 이런 글을 쓰는 것인가? 그러나 어찌 되었든 건강한 사람은 자살을 시도하지 않고, 시계의 시침이 몇 바퀴씩 도는 동안 벽에 발라놓은 달력만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지도 않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아직 스스로의 행위와 기억들을 수첩에 옮겨적을 정도의 제정신은 유지하고 있다. 그렇게 펜을 놀릴 때만은 빗소리인지 구멍에서 나는 소리인지 때문에 시도 때도 없이 동요하지 않는다. 다만, 그 제정신을 유지한다고 해서 앞으로 무얼 할 수 있다는 말인가.

 5월 16일, 월요일
 내 방에 사람이 있다. ‘있는 것 같다’가 아니다. 그는 하나뿐인 방을 차지하고서 지금 잠들어있다. 그가 나타난 것은 바로 하루 전이다. 나는 탁상의자 위에서 무릎을 끌어안고 앉아 오뚝이처럼 몸을 흔들고 있었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는 도무지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온 집안이 습하고 어두웠다. 마음속의 불길한 감정을 내쫓을 수가 없었다. 그때 작은 짐승 같은 것들이 거실 벽 속에서 내달리는 소리를 들었다. 환청이 아닌가 의심스러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마침내 일이 벌어지겠구나, 싶어 오히려 침착해졌다. 의자 위에서 나는 달력으로 막아놓은 쥐구멍을 가만히 살피고 있었다. 달력은 이미 반쯤 젖어 너덜너덜한 상태였다. 곧 안쪽에서 무언가가 젖은 달력을 찢고 나왔다. 쥐인가 싶었으나 아니었다. 그것은 지저분하게 얼룩이 지고 곰팡이까지 슬기 시작한 흰색 와이셔츠였다.
 내가 어떻게 그리 침착할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와이셔츠는 슬며시 공중으로 떠오르더니 깃발이라도 되는 것처럼 좌우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어두워서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으나, 와이셔츠는 깡마르고 뼈가 불거진 손에 붙잡혀 흔들리고 있었다. 아무리 보아도 말이 되지 않는 상황에 나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전혀 생각나는 바가 없었다. 나는 그저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 커다란 쥐구멍에서 뼈와 가죽밖에 없는 나체의 남자가 달력을 찢으며 기어 나오는 것을 보고 있었을 뿐이다. 그 비쩍 마른 남자는 서커스단의 곡예사처럼 온몸을 뒤틀며 어깨너비도 되지 않는 구멍으로부터 천천히 빠져나왔다. 몸이 전부 거실로 나오자 그는 탈진한 듯이 바닥에 풀썩 엎어져 버렸는데, 오른손은 여전히 지저분한 와이셔츠를 백기라도 되는 듯 흔들고 있었다.
 의자 위에서 그 모든 과정을 지켜보고 있던 나는 홀린 듯이 그 남자에게 다가갔다. 거실 위에 나체로 늘어져 있는 그의 몸은 비참할 정도로 바싹 말라 있었다. 등은 갈비뼈와 척추가 전부 드러나 보였고, 하체 또한 둔부 없이 골반이 그대로 대퇴부에서 정강이로 이어져 있는 것만 같았다. 이것이 도저히 살아 움직이는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다만 그는 여전히 와이셔츠를 좌우로, 곧 실이 끊겨 무너져내릴 꼭두각시 인형처럼 흔들고 있었다. 말이 통할지 어떨지는 알 수 없었으나 나는 그에게 단 한 가지 물어볼 것이 있었다. 나는 그에게 누구냐고 물었다.
 에곤.
 마지막 숨을 쥐어 짜내는 듯한 한마디와 함께 마침내 그의 오른팔마저 바닥에 널브러졌다. 그러면서 와이셔츠를 쥐고 있던 오른손이 펼쳐졌는데, 그 손아귀에서 흰색 알약 이십여 정이 가벼운 소리를 내며 바닥에 쏟아졌다.
 나는 이 남자를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한참을 고민했다. 여전히 나는 밖에 나가지 못하고, 경찰이나 구급대원을 부르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어떻게 상황을 설명하든 결국에 나는 집 밖으로 끌려나가고 말 것이다. 끝내 내가 한 일은 에곤이라는 남자를 거실에서 방까지 끌어다가 매트리스 위에 눕혀놓는 것이었다. 다시 깨어나기는 할지 의문이었으나, 다른 방법이 없었다. 처참할 정도로 마른 몸뚱이에 이불을 덮어주고 거실로 나왔다. 그리고 에곤이 손에서 놓친 알약들을 들여다보았다. 본 적이 없는 약이었다. 쓸어모아서 비닐로 된 약봉지에 담아놓았다.
 그 뒤로 하루가 지나도록 에곤은 깨어나지 않고, 나는 찢어진 달력이 너덜거리며 붙어있는 구멍을 그냥 내버려 두고 있다. 이미 사람 하나가 그곳에서 기어 나왔다. 더 이상 무슨 일이 벌어지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5월 18일, 수요일
 에곤은 죽지 않았다. 그는 오늘 새벽에 잠에서 깼다. 거실에서 어두운 천장을 보며 누워있던 나는 그가 방문을 열고 나오는 소리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뼈 위에 가죽만 입혀놓은 것 같은 나체의 남자가 비척거리며 거실에 나타나는 장면은 마치 산송장이 억지로 사지를 뒤틀어가며 걷기 위해 노력하는 것처럼 기괴했다. 나는 그에게, 옷장에 남는 옷이 있으니 꺼내 입으라고 했다. 그는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되돌아갔다. 에곤과 의사소통이 가능하다는 것이 이상하게 생각됐다. 너무나도 퀭하고 병색이 짙은 얼굴이었으나, 그의 눈동자 색과 생김새 따위로 보아 에곤은 외국인이 분명했다. 아마도 유럽계인 것 같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환각이나 망상일 수 있는데, 하나하나 따져보는 것도 실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에곤이 가져온 약을 담아둔 봉투를 서랍에서 꺼냈다가, 도로 집어넣었다.
 마른 몸에 비해 너무 큰 옷을 입은 그는 다소 우스꽝스러워 보였다. 나는 냉장고에서 빵과 우유를 꺼내 그에게 건넸다. 내가 남의 걱정이나 할 상황은 아니었지만, 그토록 심하게 마른 사람을 그냥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다. 그는 사양도 하지 않고 먹기 시작했다. 그가 식사를 하는 동안 나는 몇 가지 궁금한 것을 물어보았다. 에곤은 거리낌 없이 대답했다.
 그러니까, 누구시라고요?
 에곤이요.
 어디서 왔습니까?
 툴른에서 왔습니다.
 거기가 어딥니까?
 그야 구멍 밑이지요.
 내 말은… 알겠어요, 가족은 있으세요?
 모두 병으로 죽었습니다.
 저런.
 당신은 누구신가요?
 나는, 그게, 나도 잘 모르겠군요.
 잘 알겠습니다.
 내가 말문이 막혀있는 사이, 그는 빵과 우유를 아주 느리게, 그러나 남김없이 먹어 치웠다. 그리고는 해가 막 뜨기 시작하는 창문 밖을 내다보았다. 그제야 나도 비구름이 걷히고 다시 하늘이 밝아오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에곤은 나에게 종이와 연필이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탁자 위에 있던 A4용지 다발과 볼펜을 내주었다. 연필은 없었다. 에곤은 군말 없이 물건을 받더니 창문으로 다가가 종이에 무언가를 끄적였다. 나는 며칠 사이 일어난 일들 때문에 갑자기 피로가 몰려오는 것을 느꼈다. 생각할 것은 많았지만 고민할 기력이 없었다. 창문 앞에 달라붙어 종이와 펜으로 무슨 일인가에 열중하고 있는 에곤은 그리 위험한 사람 같지는 않다. 방으로 가서 잠을 자야겠다.

 같은 5월 18일, 수요일
 저녁에 일어났다. 거실로 나와보니 탁자 위에는 펜화가 그려진 종이 수십 장이 쌓여있었다. 그림은 모두 똑같은 구도였다. 창문에서 내다보이는 풍경을 수십 번이나 반복해 그린 것들뿐이었다. 에곤은 아직도 창문 앞에서 새 종이에 풍경을 그리고 있었다. 뒷모습만 보았을 뿐이지만, 어쩐지 새벽에 보았던 것보다 살이 조금 붙은 것 같았다. 생각해보니 자살시도 이후로 보름 정도 제대로 된 식사를 한 것이 손에 꼽을 정도인데, 남을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내 두 팔을 보니 새삼 그것은 말라붙은 나무막대기처럼 보였다.
 아직도 거실에 휑하니 뚫려있는 쥐구멍 앞으로 다가갔다. 찢겨 너덜너덜한 달력을 전부 뜯어냈다. 구멍은 명백하게 전보다 더 커져 있었다. 그럴 마음만 든다면 별 무리 없이 구멍을 향해 투신할 수도 있을 정도였다. 나는 갑자기 생각난 바가 있어 에곤을 불렀다. 그는 그림 그리는 것을 멈추고 내 쪽으로 다가와 앉았다.
 당신이 들고 온 약은 뭡니까?
 무슨 약이요?
 당신 오른손에 쥐고 있던 것 말이에요.
 그건 바르비탈입니다.
 바르비탈?
 그러니까 일종의 백기 같은 거죠, 항복의 표시라든가….
 와이셔츠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알고 있어요, 여하간 말하자면 쥐구멍으로 들어갈 때 필요한 겁니다.
 왜 그걸 갖고 있었습니까?
 그 질문에 에곤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잠시 내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는 말을 고르는 듯 입술을 조금 달싹거리며, 무언가를 고민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다소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그러나 중요한 것을 설명하는 듯 힘주어 말하기 시작했다.
 삶이든 가족이든, 강제로 주어진 것들은 하나 같이 믿을 수가 없어요, 도망을 꿈꾸는 게 당연한 겁니다.
 그렇게 말하고 에곤은 펜화를 그리러 돌아갔다. 나는 작은 동굴처럼 시커먼 입을 벌리고 있는 구멍을 오래도록 내려다보았다. 몇 가지 생각을 기록해두려 한다. 스스로 쥐구멍에 들어갔다던 에곤은 왜 다시 세상으로 나오게 되었을까. 그는 왜 바르비탈을 삼키지 않고 손에 쥐고만 있었을까. 나는 같은 이름을 가진 불우한 화가의 이야기를 알고 있다. 그는 금지된 것만 바라다가 손에 있던 것마저 전부 빼앗긴 어처구니없는 인간이었다. 그리고 다른 생각은, 왜 하필이면 이 쥐구멍이 내 거실에 생겨난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다. 5월 9일에 깨어난 뒤로 지금까지 줄곧 혼란스러운 꿈을 꾸는 것만 같다. 영화 <엔터 더 보이드>에서 주인공이 사망한 뒤 다시 태어나기까지의 혼탁하고 음울한 환각을 직접 겪고 있는 기분이다. 그 영화의 마지막에서 주인공은 ‘대롱 같은 통로’를 통과해 다시 태어났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금 알아챈 것인데, 근 일주일 정도 허기를 느끼지 못하고 있다.

 5월 24일, 화요일
 달력은 오늘이 화요일이라고 말하고 있다. 에곤 덕분에 집에 쟁여두었던 A4용지가 동이 났다. 이제 그는 이미 그린 그림들의 뒷면에 새로운 그림을 그리고 있다. 새로운 그림이라고는 하지만 여전히 창밖으로 보이는, 똑같은 풍경을 계속해서 그릴 뿐이다. 냉장고 안의 음식과 찬장의 라면까지 꺼내먹으면서 그는 점점 건강해지고 있다. 나는 거실에 송장처럼 늘어져서 벽에 난 커다란 구멍을 마냥 들여다보고 있다. 내가 입던 옷들은 에곤에게 제법 잘 어울린다.

 5월 30일,
 에곤이 내게 결혼한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없다고 했다. 그러자 그는 내가 부럽다고 말했다. 그리고 종이를 사러 밖에 나가야겠다고 했다. 나는 탁자 위에 있는 지갑을 가져가라고 했다. 그 지갑은 너무 오랫동안 한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에곤은 이미 내가 회사에 다닐 적에 입던 바지와 셔츠를 입고 있다. 전보다 살집이 붙은 얼굴은 틀림없이 어딘가에서 본 일이 있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그런 것은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니다. 나는 점점 몸의 기력이 쇠하고 팔다리가 얇아지는 것을 느낀다. 가슴에 손을 대면 내 갈비뼈들의 모양을 손끝으로 짚어볼 수 있다. 아마 밥을 먹지 않아서 그렇겠지. 나는 가장 적절한 순간을 기다리고 있다. 꿈은 그저 시간이 흐른다고 깨는 것이 아니다. 꿈에서 어떤 징조가 나타나거나 사건이 벌어질 때 사람은 깨어나는 것이다.

 5월 33일
 집안이 에곤의 그림들로 가득 찼다. 요새 그는 밖에서 그림을 그린다. 어느새 이젤과 캔버스까지 구해 들고서 돌아다니는 모양이다. 거실과 방에는 이미 완성되었거나 작업 중인 캔버스가 잔뜩 쌓여있다. 오늘 나는 커다란 구멍을 쳐다보면서 에드거 앨런 포의 <M. 발드마르 사건의 진실>에 대해서 생각했다. 최면에 걸린 채로 죽은 발드마르는 죽어있는 동안, 그러니까 최면에 걸려있는 동안, 두 가지 상태가 중첩되어있는 동안 어디에 있었을까? 그는 죽음이라는 상태에 있던 것일까? 그러나 최면에 걸린 그의 몸은 썩지 않았었고… 아니, 여하간 중요한 점은 최면에서 깨어난 순간 발드마르의 몸이 순식간에 썩어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가 마지막으로 외친, 비명인지 환성인지 모를 “dead! dead!”라는 절규가 귀에서 쟁쟁 울리는 것 같다.
 에곤은 최근 혈색이 좋다. 그가 웃는 걸 본 것 같기도 하다.

 38일
 나는 오늘 에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물어보았다. 그는 요새 그림을 그리느라 너무 바빠서 나와 대화를 나눌 시간도 없는 듯하다. 나는 쥐구멍 안에 무엇이 있었느냐고 물었다. 그는 구멍 안에 ‘무엇’ 따위는 없다고 했다. 그 대답을 듣자 번역이 잘못된 외국 소설을 읽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직접 다녀온 사람의 말이니 생각해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밖으로 나올 수 있었느냐고 묻자 에곤은 웃었다. 그야 출구가 있었으니까요. 질문이고 대답이고 지리멸렬해서 더는 의미가 없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에곤은 몇 마디를 덧붙였다. 그리고 나는 바르비탈을 삼키지 않았습니다, 삼키기에는 원망할 것이 많았습니다.
 에곤이 처음 쥐구멍에서 나왔을 때 흰색 와이셔츠를 흔들던 것은 백기를 흔드는 것과는 다른 의미였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은 화가 날 때 남의 옷깃을 쥐고 흔들어대기도 하니 말이다.

 4?일
 요즘 에곤은 나를 쳐다보며 그림을 그리고 있다. 내가 움직이든 움직이지 않든, 그다지 신경 쓰는 것 같지는 않다. 나 역시 이제 에곤에 대해서 아무 생각이 없다. 나는 구멍의 새까만 입구를 쳐다보며 삼촌에 대한 생각, 병원에 대한 생각, 바깥세상의 위협에 대한 생각을 했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사실이라면, 시작부터 내 인생의 절반은 어긋나 있었다. 그리고 나머지 절반은 5월 6일 자살을 결심했을 때 완전히 무너져내렸다. 예전에 <랜트>라는 아주 기괴한 소설을 읽은 적이 있다. 과거로 시간여행을 반복하며 계속해서 자기 자신을 낳는 위험천만한 소설이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그런 것이 생각났느냐면, 그 책을 읽을 때 머릿속에 드는 유일한 생각은 주인공의 저주 같은 순환을 끊어버리고 싶다는 것뿐이었기 때문이다.
 서랍 안에서 꺼낸 바르비탈은 세어보니 스물한 알이었다. 나도 모르게 웃음소리를 내고 말았다. 나는 이제 이상한 환각을 끝내고 그 ‘무엇’도 없는 곳으로 향할 것이다.

 5월 6일, 금요일
 이것이 내 마지막 기록이 되었으면 하고 바란다. 탁자에는 초봄에 모아 놓은 트리아졸람 0.25mg 정제 스물한 알과 물 한 컵이 준비되어있다. 내가 지금 정상적인 심리상태가 아니라는 것은 나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삼 개월이 넘도록 집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으면서 제정신을 유지하는 것이 더 이상한 일이다. 지금 내가 가장 바라는 것은,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 이 삶이 약을 삼키고 잠드는 순간 완전히 끝나버리는 것이다. 트리아졸람만으로는 부족할지도 모르기 때문에 리튬과 쿠에티아핀푸르마산염도 모을 수 있는 만큼 모아놓았다. 단번에 삼키면 이 중 무엇이라도 효과가 있겠지. 그러고 보니 약품의 성분과 효능에 필요 이상으로 호기심을 보이는 것도 증상 중 하나라고 의사가 말했었는데, 아니다, 이야기가 지리멸렬해지고 있다. 나는 곧 모아놓은 약을 전부 삼키고 바닥에 누울 것이다. 억울하거나 미련이 남는 일은 없는 듯하다. 다만 사후세계 같은 것이 느닷없이 내 눈앞에 튀어나오는 일만은 없었으면 한다. 앙드레 지드는 <나에게는 육체에서 떼어낸 영혼 같은 것은 필요 없다>고 말했다. 그것은 백번 옳은 말이고, 만약 영혼이나 내세 같은 것이 있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인간에 대한 모독이다. 또 사설이 길어지고 있다. 이 글이 더 이상 엉망진창이 되기 전에 이만 끝을 내야겠다.


끝.

Posted by Lim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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