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7/10 완성.
1. 텍스트는 출판만을 위하여 창조되는 것이 아니다.
2. 더 자유로워져야만 한다.
정자亭子의 슬픔
아주 오래 전에, 어쩌면 얼마 전에. 한 소년이 내 위에서 랭보를 읽었다. 나는 그가 시집의 단어 하나하나를 발음하며 읽었다고 명확히 기억하지만 어쩌면 그것은 그저 잉잉거리는 날벌레 소리였을지도 모른다. 나는 내가 이 연못 위에 꽤나 오랫동안 떠있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을지도 모른다. 애당초 과거라는 것은 잘려진 반죽처럼 토막토막 나있는 것이 아니라 시간 순서에 관계없이 뒤죽박죽으로 뭉쳐진 것이기 때문에 어느 사건의 시간대를 특정시키는 것이 내겐 커다란 골치다. 아무튼 확실한 것은 그 소년이 내 위에서 랭보를 읽었다는 것인데―그런데 어쩌면 보들레르일지도 모르겠다, 여하간 그 낭송하는 목소리인지 날벌레의 날갯소리인지가 불어의 어휘였다는 것은 말할 수 있다― 나는 그 낭송하는 소리를 배경으로 연못가에 핀 홍련을 기분 좋게 바라보고 있었다. 소년은 시 대여섯 편을 읽더니 떠났고, 그 이후로 단 한 번도 돌아온 일이 없다. 그 이후로 나는 가끔 이해하지도 못하는 불어 어휘의 조각조각을 흥얼거리면서 연못 위에 떠있다. 그리고 철이 바뀔 때마다 홍련은 피는 위치가 달라진다. 가끔은 내 시선 밖에서 피어있는 듯 전혀 보이지 않을 때도 있다. 그럴 때면 나는 조금 우울하거나 화가 나서 몸을 뒤틀어 물결을 만들곤 하는데 실상 아무 의미도 없는 짓이다. 그러나 또 철이 지나면 홍련은 무작위하게 아무 곳에나, 딱 한 송이만 피는 것이므로 기다림을 미덕으로 삼을 수도 있다. 그런데 기다림이 미덕이라니, 그건 또 무슨 말인가? 내 몸도 한 때는 단단하고 연못 위에 똑바로 서있었다. 그러나 홍련이라거나 어떤 시를 읽는 소년이라거나 불어어휘 따위를 기다리는 사이 몸은 물에 불어 물렁물렁해졌고 나는 이미 몸의 반 정도를 연못 속에 처박고 있다. 위에서 설명한 대로 과거란 혼란스러운 것이라서 얼마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 랭보를 읽던 소년 이후로 어느 누구도 내 위에 올라탄 일이 없다. 내 나무 몸체에 물이 스며들어 천천히 침수하는 내내 연꽃들은 피었다가 순식간에 죽었고 그 뒤 죽음이 거짓말이었다는 듯이 다시 피어났다. 그러나 나는 뻣뻣한 정자亭子라서 그러한 죽음과 부활의 기적을 기대할 수도 없는 몸이다. 나는 지금도 어렴풋이 생각나는 불어의 어휘들을 중얼대고 있지만 주변에는 여전히 사람의 기척 따위는 없다. 과연 내 삶도 한때는 꿀과 술이 넘치는 축제였다거나 갑판에 끌어내려진 알바트로스처럼 비극적인 것일 수도 있을까 싶지만 그것은 허황된 망상일 뿐이고 내 기억은 여전히 시집을 읽던 단 한 명의 소년에게만 못박혀있고 몸은 점점 침수되는 중이다. 언젠가 내가 완전히 물에 잠겨버린다면 이 연못이 그리 깊지 않은 관계로 지붕만이 우스꽝스럽게 수면 위로 솟아있게 될 것이다. 그때부터는 물속의 녹색 이끼나 올챙이들만을 쳐다보면서 살아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홍련은 여기저기서 필 테지만, 나는 볼 수 없을 것이다. 이미 반쯤 침수된 내 위에서, 앞으로도 누군가가 시를 읽는 일은 없을 것이고, 단 한 가지 기다림에 대한 미덕이 있다면 그것은 내가 연못 속에서 나뭇결이 완전히 녹아 흩어져버리는 것에 대한 기다림일 것이다. 그러나 그 때가 언제일지는 나로서는 전연 알 수가 없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