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의 조각들

글/소설 2020. 4. 16. 23:24 |

2020/04/16

 

1. 이것은 픽션이다.

 

더보기

봄의 조각들


 아름다운 음악을 틀어놓으면 되지 않을까? 바보 같긴, 바로 그 아름다운 음악을 못 견뎌서 방금 전 카페에서 일행을 놔두고 도망 나왔잖아. 사내는 방 안에서 장롱에 기대앉은 채 중얼거렸다. 책상 위에 로라제팜이 30알이 넘게 있지만 그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가 쓰고 싶다. 생각해보니 단 한 번도 그런 것을 쓴 일이 없다. 더욱이 모두가 행복한 결말이라면. 그렇게 생각하자 사내의 얼굴이 유리로 만든 가면처럼 굳었다. 갈비뼈가 온통 피부를 뚫고 튀어나와, 장미꽃마냥 활짝 필 것 같은 흉통을 느꼈다. 그럼 더할 나위 없지. 실패한 원고만 가득한 삶이라도 끝나는 것이 삶이다. 시체라도 꽃처럼 핀다면, 사람들은 아름답다고 하겠지.

 벌써 4월인데 말라비틀어진 잎사귀를 잔뜩 움켜쥐고 있는 나무를 보았다. 낙엽을 떨어트리기도 전에 죽었나, 하고 생각했다. 죽기 전에 낙엽을 놔줄 생각은 있었는지 궁금했다. 궁금증이 다른 생각으로 연계되기 전에 얼른 자리를 떴다.

 그래서 도대체 어쩔 것이냐, 라고 친구가 대뜸 물었다. 그런 난폭하게 걱정하는 말투는 생각지도 않던 중이라 사내는 흠칫 놀랐다. 뭐가 말이야, 하고 사내는 평정을 가장하면서 되물었다. 해가 넘어갈 무렵의 전집이었다. 친구가 막걸리와 안주를 샀다.
 “널 나쁘게 말하는 게 아니야. 다만 K도 너에게 돈을 빌려줬다던데.” 친구는 막걸리가 담긴 사발을 들고 마치 교무실의 선생님처럼 말했다. 사내는 친구의 눈을 바로 보면서도 손톱으로 숟가락 손잡이를 마구 긁더니, 그 돈은 A에게 빌렸던 돈을 갚는 데 썼어, 라고 말했다. 친구는 아무 말도 않더니 사발에 든 것을 마셨다. 친구의 눈은 질책을 담고 있지 않았다. 이놈의 혀를 잘라버릴까, 사내는 생각했다. 진실은 말을 하든 안 하든 변하는 것이 없다. 언제나 추하고 가학적이다.
 “네 빚, 얼마 안 되면 그냥 내가 갚아줄까.” 사발을 비우더니 친구가 한 말은 그것이었다. 그 뒤에 <나중에 편집부가 네 글을 사면>이라던가 <예전에 네가 냈던 책이 재판되기라도 하면> 같은 문장들이 따라왔지만, 사내한테는 들리지도 않았다. 손 좀 씻고 오겠다고 갑자기 일어나고선, 사내는 비틀비틀 밖으로 나갔다. 봄이었고 어두웠고 어디선가 윙윙거리는 소리가 났다. 어서 죽어야겠다, 그렇게 생각했다.

 인간의 책무.

 유서를 쓰려고 종이를 꺼냈는데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한 시간인가 두 시간을 백지만 쳐다보았다. 결국 사내는 펜을 들어 이렇게 썼다. 일평생이 수치였는데, 수치스럽지 않게 죽을 방법이 도무지 떠오르지 않습니다. 방도를 모색해보겠습니다. 그리고 그대로 서랍에 넣어버렸다.

 무가치한 원고작업에 시달리다가 밤을 새버린 어느 날, 흔치 않게 아침에 밖으로 나갔다. 산책을 할 요량이었다. 걷다보니 동네 중학교 앞까지 왔다. 적지만 교복을 입고 등교하는 학생들이 있었다. 사내는 선 채로 그들을 멀리서 쳐다보았다. 그들 한 명 한 명의 가족과 친척과 친구들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과거와 미래에 대해서도. 그 뒤에 주머니에 넣어뒀던 신경안정제를 꺼내먹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도둑고양이가 앞을 가로질렀다.

 밥은 잘 먹고 있냐고 어머니가 전화로 물어왔다. 거짓말을 했다. 사실 삼일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냉장고에 음식은 있지만 요새는 물만 마셔도 구역질이 난다. 어머니가 약은 잘 챙겨먹고 있냐고 물어왔다. 이번에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마치 차에 기름을 넣듯이 철저하게 먹고 있다. 병원비가 모자라지는 않냐고 물어왔다. 또 거짓말을 했다. 이젠 도대체 어디서 병원비를 충당해야할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 사내는 자신이 왜 가족에게 돈이 더 필요하다는 말을 하지 못하는 것인지 스스로도 모른다. 어머니가 잘 지내라며 인사를 했다. 전화를 끊고 사내는 한동안 소리 없이 울었다. 아니, 눈물이 나오지 않았으니 운 게 아닐지도 모른다.
 운건지 그냥 고개를 숙이고 있던 건지, 아무튼 그러고 나니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어차피 봄이다. 겨울옷 중 멀쩡해 보이는 것은 전부 전당포에 넘겨버리자. 사내는 집에서 10분 거리에 있던 전당포 간판을 기억해냈다. 그는 장롱에서 그나마 깨끗하고, 값이 나갔던 코트 같은 것들을 꺼냈다. 대부분 오래 전에 가족이 사준 것이었다. 일주일치 약값은 벌 수 있겠지. 혹은 빚의 일부라도 좀 갚을 수 있겠지. 그러면 스스로를 비참하게 여기는 일도 좀 덜해지겠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옷더미를 짊어 매고 전당포로 걸었다.
 전당포에서는 브랜드도 없는 코트 같은 건 받지 않았다.

 “무슨 일이야, 대체.” 사내가 병상에 누워있는 젊은 여자에게 물었다. 대학교 동창으로 그나마 최근까지 연락을 주고받던 여자다. 실의에 빠진 얼굴로 환자복을 입고, 왼쪽 손목에 부자연스러운 붕대를 감고 있다. 사실 무슨 일인지는 이미 알고 있다. 그저 자살시도가 도중에 발각된 정도의 사건인 것이다.
 “이상하지. 아픈 곳도 없는데 병원침대에 눕혀놓다니.” 여자가 자조적으로 말했다. 목소리가 갈라져있다. 이 갈라진 목소리가 함의하는 감정이 어떤 것인지 사내는 잘 파악할 수 없었다.
 “이 이상한 상황은 유희인 거야.” 건조하게 말했다.
 “유희였던 것 같은데. 하다 보니 진심이 됐어.” 여자가 웃는다.
 대답을 듣고 보니 지루하다. 낱낱이 듣지 않아도 낱낱이 추정할 수 있는 상황인 것이다. 정말로 쉬운 일이구나, 하고 사내는 생각했다. 어쩐지 저 붕대에서 인텔리 냄새가 난다.
 “왼손은 쓸 수 있대?” 이미 살아난 이상 질문은 한정되어있다.
 “아직 몰라. 인대가 다시 붙는다면.”
 유서에 써놨듯이 수치스럽지 않게 죽는 방법을 모색 중이다. 그런데 이 방법은 이미 오래전부터 지양하는 것이다. 처음 정신병원을 들락거렸을 때부터, 대기실에는 항상 왼쪽 손목에 붕대를 감은 젊고 바싹 마른 여자들이 어슬렁거렸다. 어렸던 그는 그녀들이 인간이 아니라 인간모양 얼음세공 같다고 생각했다. 그녀들에게서 살아있는 인간의 느낌을 받을 수 없었다. 굳이 자살하거나 하지 않아도 곧 형체도 없이 녹아 사라질 것 같았다. 사내는 그 얼음세공들에 대한 모든 가치판단을 영원히 보류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마음은 불유쾌했다. 버스에서 자신의 경동맥이 어디 있는지 목과 손목을 더듬어보았다.

 김밥을 한 줄 사서 돌아오는 중이었다. 여전히 뱃속이 들끓고 아무것도 소화시키지 못할 것 같았지만, 이러다가 정말 아사하는 게 아닌가 불안했다. 빌라 앞에서 늙은이 셋이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누군가가 주차를 이상하게 했다는 것이었다. 사내와는 아무 상관없는 일이었다. 조금 주춤거리며 그들을 지나쳤다. 오후 세 시에 사지 멀쩡한 청년이 슬리퍼를 끌고 다니는 걸 이상하게 보지는 않을까. 아무 가치도, 의미도 없는 걱정을 했다. 집에서 김밥을 이빨로 씹는데 어쩐지 울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달리지도 않을 열차에 석탄을 채우는 건 낭비고, 또한 슬픈 일이다.
 삼킨 김밥은 전부 토했다.

 근처 공원에 가니 개를 데리고 산책 나온 사람들이 많았다. 저 개들은 주인과 함께여서 기뻐 보이는구나.

 결국 죽게 된다. 봄 햇살이 따사로웠고, 이것이 사내의 책이 아무도 모르게 출간되었다가 아무도 모르게 잊혀 진 뒤 몇 번째 봄이던가. 봄 햇살처럼 아름다운 것을 쓰고 싶다. 태양 같은 것은 싫다. 배경에 비춰지는 옅고 반투명한 햇살 같은 것이 쓰고 싶다. 반짝이고 따스하지만 정말로 그 어떤 질량도 가지지 않는, 사람들이 스스로 가슴을 열어 읽고 난 뒤 조금도 기억하지 못할 책. 나중에서야, 어라, 그런 책이 있었던가, 하고는 굳이 떠올리려 하지도 않을 책.
 유산도 묘비도, 그런 것을 남기기에는 평생을 철지난 날벌레의 심정으로 살아왔다. 날씨가 추워진 것을 느끼고 하수구에서 잠들며, 이제 죽는가, 하지만 다음날 아침 눈을 뜨고, 힘없이 날아다니고 행인들의 방해를 하다가 저녁에 다시 하수구에서, 이번에야말로 죽겠지, 그런데 또 눈을 뜨고, 그것을 반복하다가 어느새 겨울이 되어 동료들은 모두 죽었는데, 죽은 동료들을 시기하며 혼자 비척비척 날아다닌다.
 그래도 결국에는 죽겠지. 그러니 아름다운 사랑이야기가 쓰고 싶은 것이다. 통속 소설이라도 괜찮아. 오히려 사내는 통속 소설가들을 존경하고 싶다.

 할 말 있으면 해. 아니, 아무것도, 할 수 있는 말은 없어.

 자주 지나가는 골목에 어느 목수의 사무실이 있다. 사내가 지나갈 때마다 자신의 사무실 앞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다. 체구가 그렇게 크진 않지만 그을린 피부와 단단한 몸집 때문에 강인하게 보이는 목수다. 서로 전혀 아는 사이는 아니지만, 몇 개월이나 비슷한 시간에 사내는 그 앞을 지나가고, 목수는 그 시간에 담배를 피운다. 그러다보니 왠지는 모르겠으나 마주칠 때마다 가볍게 목례하게 되었고, 나중에는 목수가 인사를 걸어왔다.
 안녕하세요, 이 동네 사시는 모양이죠. 처음으로 인사를 받고 당황하여 입을 뻐끔거렸다. 안녕하세요, 하고 말했으나 즉시 목소리가 너무 작았던 것은 아닐까, 후회했다.
 “매일 이 시간에 지나가시더라고요.” 불붙은 담배를 입에 물더니, 담뱃갑 뚜껑을 열어 내밀면서 말했다. “피우세요?” 사내는 담배를 한 개비 뽑으면서 대답했다. “피우지만, 형편이 안 됩니다.” 그러자 목수는 끄덕거리면서 입술과 이빨로 뭐라 형언하기 힘든 소리를 냈다. 공감인지, 동정인지, 아무튼 그런 것이었다. 목수에게 라이터를 빌려 불을 붙이고 깊게 빨았다. 얼마만인지 기억도 없다. “좋네요.” 혼잣말인지 목수에게 하는 말인지 애매한 말투로 그렇게 말했다.
 “예술 하는 분이시죠?” 목수가 대뜸 그렇게 물었다. 놀랐다. “마주칠 때마다 분명히 그렇다고 생각했어요.” 사내는 당황하고 있었지만 겉보기에는 그저 멍하니 서서 담배를 피우는 것으로만 보였다. 한 박자 늦은 대답을 어렵게 꺼냈다. “아니, 아니요. 예술 같은 것은, 그다지…….” 말꼬리를 흐리며 땅을 본 채, 자신이 나누고 있는 대화가 무슨 의미인지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어쩐지 창피스럽고, 아니, 예술가라니, 그것은 사회에서 가장 쓸모없는 사람들의 총칭이라고 생각한다. 인간구실도 못하면서 끊임없이 사람들한테 기생할 명분을 만드는, 그런 것이 예술가라고, 아, 그렇다면 나는 예술가다. 사내는 갑자기 목이 잠기는 것을 느꼈다.
 “담배, 고맙습니다.” 꽁초를 쥔 손을 올리며 힘겹게 말했다. 그 말을 하는 동안은 목수의 눈동자를 쳐다보고자 노력했다. 그리고 사내는 일방적으로 목례를 하고 자리를 벗어났다. 작은 삼거리를 돌아 집으로 가는 골목을 걸으며, 온갖 처참이라고 부를만한 감정들을 애써 무시하고, 그저 담배를 피울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한모금의 연기를 삼킬 때마다 심장이 딱딱하게 닫혀가는 기분이 들어서, 용케 주저앉지 않고 걸을 수 있었다.

 그 선생은 흰 당나귀도 나타샤도 있었잖아. 그러면 됐지. 나타샤가 그 선생을 사랑했잖아. 그러면 더 이상 쓰지 않아도 되는 거야. 아름다운 나타샤가 널 사랑하면, 그러면 넌 펜이고 원고지고, 그런 것은 더러운 것이라고 버릴 수도 있겠지.

 “휴양 온 거라고 생각하고 느긋이 지내.” 버스정류장에서 기다리던 매형은 그렇게 말했다. “아니요. 그렇게 오래 있을 생각은 없습니다.” 사내는 음색도 없이 대답했다. 기분이 언짢은 것은 아니었다. 다만 스스로도 지금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었다. 지저분한 방안에서, 완성한들 동전 한 푼도 되지 않을 원고에 병적으로 집착하던 여느 날, 그저 한없이 고독하고 서러웠던 것이다. 누가 인간의 체온을 갖고 있을까, 누가 나에 대해 보편적인 애정을 갖고 있지? 하고 생각했던 것이다. 사내는 결국 뒤돌아보지도 않고 서서히 멀어졌던 가족에게 생각이 미쳤다. 그러나 부모님은 안 된다. 그들에게 가서 당신들의 아들이 이렇게나 망가졌다는 것을 자랑스레 내보일 수는 없다. 누이와의 사이는 어땠더라. 우리가 좋은 남매였는지 전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사내는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누이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떠올릴 수가 없었다. 그러나 조카가 태어나던 날, 매형이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자신에게 감동스러운 호의를 보인 것은 기억하고 있었다. 그날 사내는 병원에서 나는 소독제 냄새가 왜 이렇게 익숙한 것인지 혼자 혼란스러워하고만 있었는데, 매형은 와줘서 고맙다면서 크게 웃는 얼굴로 어깨를 탕탕 두드려주었다. 아마 5년 전이다. 그 뒤로 누이도 매형도 만난 일이 없다. 그러나 사내는 고장 난 기계가 돌발행동을 하는 것처럼 누이가 아니라 매형에게 전화를 걸었던 것이다. 얼굴 좀 보러가도 될까요, 라고.
 그런데 휴양 온 거라고 생각하라니, 사내가 집안의 문젯거리라는 사실은 진즉 모두가 알고 있는 것이다. 아아, 그렇구나. 오랜만에 만나서 정말로 반갑다고 웃으며 말하는 매형의 이 친절어린 태도에 스스로의 존재가 진절머리 난다. “그러고 보니, 조카가 이제.” “5살이지. 말도 잘 해.” 그렇군요, 하며 중얼거린다. 그것을 잊고 있었다. 조카가, 어린아이가 있다는 것. 그러나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매형이 아파트 현관문을 열고 있었다. “오늘 저녁은 외식을 하자. 다 같이 맛있는 거라도 먹자고.” 그런 얘기를 하면서.
 두 사람이 현관으로 들어가고, 어린아이가 아빠, 하며 달려 나오고, 그 어린아이가 생면부지의 친척을 보고 경계하고, 아버지가 딸에게 네 외삼촌이야, 하고 소개하고, 외삼촌은 어떤 표정을 지어야할지 몰라서 입꼬리가 뒤틀려있고. 그 일련의 사건들 사이에서 외삼촌은 대체로 자기가 왜 여기에 왔는지 후회하고 있었다.
 간신히 소파에 둘러앉아, 사내는 매형이 건넨 캔맥주를 들고 있다. 병든 위장이 이걸 감당할 수 있을지 걱정하고 있다. 조카는 지금 외삼촌에게 굉장히 흥미가 있다. 약간 경계를 하면서도 옆에 앉아 사내를 구석구석 관찰한다. “정말 우리 외삼촌이에요?” “그렇지. 그럴 거야.” 얼버무리듯이 대답하면서 매형에게 누이는 집에 없는지 묻는다. 곧 올 거라고 한다. 이제야 조카를 쳐다보니 과연 예쁘게 생긴 여자아이다. 성장하면서 어떻게 변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미인이 될 것이다. 사내는 이 아이가 가엾다고 생각한다. 아니 물론, 추녀인 것보다야 편한 삶이겠지만, 그런 이야기가 아니다. “머리 예쁘게 묶었네.” 마음에도 없는 소리지만 이런 말을 던지면 아이들이 알아서 떠들기 시작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건요, 엄마가요, 아빠가 별님 머리끈을 사왔는데요, 기타 등등. 사내는 이미 듣지도 않고 절망적인 문장들을 곱씹고 있다. 5년을 살았고, 광야처럼 끝이 안 보이고 난폭한 미래가 있다. 아하, 광야처럼, 이라니. 어리면 급사하지 않는다는 법칙 같은 것도 없지 않은가. 왜인지는 모르지만 사람들은 대처할 수 없는 미래에 대해서는 상정하지 않는 습성이 있다. 모두 죽는다. 모두들 하나같이 정당한 이유도 없이 죽는다. 이런 젠장. 사내는 자신이 신이 나서 떠드는 5살짜리 조카를 눈앞에 두고 죽음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남의 죽음이 문제가 아니다. 자신이 죽어야 한다. 영혼에 독액이 퍼진 상태로 너무 오래 살았다. 진작 죽어야했을 인간이 억지로 살고 있으니 모든 것에서 죽음이 보이는 것이다. 발정난 개가 아무것에나 허리를 흔들 듯이, 보이는 모든 것이 죽음으로 가는 길을 가리킨다.
 기가 죽고 눈물이 날 것 같아서 사내는 괜히 맥주 캔을 땄다. 기포가 좁은 틈새로 뿜어져 나오는 소리가 났다. “아빠도 이거 좋아하는데, 너무 마시면 엄마한테 혼나요.” 아이가 동그란 눈을 하고 말했다. 매형이 소리 내 웃었다. 사내는 따라 웃으려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얼마 뒤 집에 들어온 누이는 남동생의 얼굴을 보자마자 이런 말을 했다. “너, 더 안 좋아졌네.” 사내는 과연 가족뿐이다, 생각하고 웃으며 대꾸했다. “뭘, 언제나 비슷해.”
 호화로운 외식. 거의 먹지 못했다. 매형이 걱정했다. 누이는 남편에게 걱정할 필요 없다고 말했다. 생각보다 조카가 먹성이 좋았다. 위장이 안 좋은 탓인지 몇 잔 만에 술에 취했다. 마음이 우수수 무너질 것 같은 죄책감으로 미소를 유지했다.
 새벽에 슬그머니 일어나 아무도 깨우지 않고 집으로 돌아갔다. 심야 버스 안에는 온통 검은색 연기가 들어찬 것 같았다.

 왜 죽지 않는 거지? 왜?

 영화에서, 어느 백인 배우가 상대 배우에게 데미지드 굿즈(Damaged goods)라고 소리를 질렀다. 상대 배우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 아가씨가 알고 보니 아주 무섭더라고, 까맣고 세련된 가죽 핸드백에 항상 마르크스를 넣고 다니고, 내가 능청스럽게 술이라도 한 잔 할까, 하면 그 하얗고 예쁜 얼굴이 순식간에 살인범을 추궁하는 고결한 검사나리 같아지는 거야, 아무 말도 않지만, 칼날처럼 시퍼런 눈동자가 마치, 당신은 그 술 마시면서 무산계급의 혁명을 위해 무어라도 했나? 라고 쏘아붙이는 것 같다니까.” 친구가 한 손에 맥주잔을 들고 낄낄거리면서 떠들고 있다. 사내는 멍하니 듣고 있다가 묻는다. “잠깐, 그 여자, 전에 말했던 그 여대생이야?” “그래, 아주 인텔리한 아가씨야, 그렇지?” 지금 저급하게 웃으며 자기 엽색 얘기나 하고 있는 이 친구는 놀랍게도 전에 사내의 빚을 대신 갚아주겠다고 말한 그 사람이다. 만날 때마다 자기가 마시고 싶으니 술을 사주곤 하는데, 매번 컨디션에 따라 완전히 다른 성격이 되는 것이 감탄스럽다고 사내는 생각한다. “우리들, 곧 30대 후반이 되는 거 아니었나.” 사내가 중얼중얼 말한다. 사실 말하면서도 별로 지탄할 생각도 없다. 어차피 이 친구는 일주일 뒤면 다른 여자 얘기를 할 것이다. “나이가 무슨 상관이야, 지금 세상에 마르크스주의 여대생이라고. 신기해서라도 손을 댈 수밖에 없지.” “그렇기도 하겠지.” 맥주를 홀짝이면서 무성의하게 대답한다. “이미 뒹굴었지?” 역전에서 만났을 때 친구가 비열한 미소를 띠고 있는 것을 보고 이미 눈치 채고 있었다. “도대체가 무슨 수집취미라도 있는 거야.” 신기한 것을 보면 자기 위장 속에 집어넣어야하는 사람들이 있기도 하다.
 그래도 네가 즐거워 보여 다행이다. 30대가 남자의 전성기라고 어디서 들었던 것 같다. 사내의 전성기도 오는가. 그런데 도대체 무슨 전성기냔 말이다. 방안에서 원고 파지나 구겨 발로 차고, 밤에 삼킬 약이나 한줌 달그락거리는 그런 전성기인가. 그러고 보니 최근 체중이 성인이 된 뒤 최저점을 찍긴 했다. 화장실에서 거울을 보고 이것 봐, 시체가 웃고 있군, 하며 실실거리기도 했다. 여러모로 절정에 다다르긴 했구나, 사내는 혀를 차며 생각했다. 아아, 최소한 40대가 되기 전엔 꼭, 꼭 죽고 말테다. 기도하듯이 읊조렸다. “로맨스는 말이야, 역시 한쪽이 죽어야 해. 함께 죽는다면 더할 나위 없지…….” 사내가 맥주잔을 들여다보며 느릿느릿 말했다. “죽기는. 이 몸으로 즐길 게 얼마나 많은데. 셰익스피어 때부터 작가들은 나쁜 버릇이 있어.” “그 몸이 썩어버리고 만단 말이다……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라면, 반드시 등장인물들이 아름다울 때 끝이 나버려야 하는 거라고…….” 취했나? 위장병을 앓고서부터 주량에 대중이 없어져버렸다. 그러면서도 위악적으로 들이킨다.
 어찌됐건 친구는 사내의 말을 주의 깊게 듣지 않을 것이다. 그를 아는 모든 사람들이 그의 말을 주의 깊게 듣지 않는다. 멸망할 것 같은 어조로 가끔씩 입을 열어 헛소리를 하는 사람, 그렇게 역할이 정해져 있다. 사내의 말에서 의미를 찾으려는 사람은, 기껏해야 병원 의사 정도겠지.
 봄이 가기 전에 끝을 낼까. 청산가리는 어쩐지 야생화의 이름 같다.

 술이다, 술. 취하면 중요한 말이라고는 한 마디도 못하게 되니 좋다. 취중에는 진담이 아니라 허담만 오가는 것이다. 그편이 마음을 다치지 않는다.

 A에게서 전화가 왔다. 대학 동창이다. 얼마 전 사내는 K에게 돈을 빌려 그에게 빌렸던 돈을 갚았다. 아무튼 전화기 너머에서 그가 짤막하게 내뱉었다. “죽었어.” 사내는 조용히 있다가 퍼뜩 되물었다. “뭐? 무슨 말이야?” “그러니까 죽었다고. 간호사가 옮기던 카트를 덮쳐서 주사기를 닥치는 대로 자기 몸에 찔렀대.” 사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할 말이 없었다. 전화기를 들고 막힌 창문만 멍하니 보고 있었다. 그 녀석이 그런 행동력이 있었다니, 놀라운 일이다, 이런 생각이나 하고 있었다. “갈 거냐?” A가 무덤덤하게 물었다. “어딜?” 사내는 계속 되묻기만 하는 자신이 멍청하게 느껴졌다. “장례식 말이야. 듣자하니 부모는 슬프기보다 열이 머리에 뻗쳐서, 그런 불효자식은 딸도 아니라고 장례를 안 연다는 얘기도 있었다는 모양이다만.” “아, 모르겠는데, 몰라.” 이상한 대화에 계속 침묵이 낀다. “……나중에 정해지면 장례식 일정이랑 주소는 보내 놓을게.” 혹시 A는 사내가 슬퍼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그냥 두어도 별 상관은 없다. 전화가 끊겼다.
 사건을 진지하게 생각하기가 쉽지 않다. 도무지 그 녀석이 인생에 엄청난 비애가 있어, 마지막 결단을 내린 것이라고는 생각이 되질 않는 것이다. 이것도 그저 대학시절부터 계속 반복되어왔던 퍼포먼스의 일환인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래서 사내는 전화를 끊고도 여전히 어리둥절한 상태였다.
 A는 사내가 대학재학 당시 함께 몰려다니던 무리의 중심 같은 인물이었다. 다른 학과였지만 동아리인지 뭔지 기억도 나지 않는 경로를 통해 자연스럽게 어울렸고, 어느새 무슨 술자리라도 생기면 가장 많이 전화를 걸어대는 사람이 되었다. 아마 그래서 이번에도 제일 먼저 정보를 접했고 무슨 의무감으로 전화를 돌려대는 것이겠지. 여하간 사내는 무표정으로 전화기 겉면을 쓰다듬고 있었다. 간호사가 끌고 다니는 카트에 약물이 든 주사기가 있을 리가 없을 텐데. 혈관에 공기라도 주사했나. 괴상한 일이다. 그런데 괴상하지 않을 이유도 없다. 죽으려고 하면 무슨 방법으로든 죽겠지. 시간만 있다면 카테터로도 목을 매달았을 것이다.
 “꽃이라도 사둘까.” 사내가 마치 자기가 들어야만 한다는 듯이 말했다. 그러나 즉시 부정한다. “아니야, 바보 같은 짓이다.” 결국 흉측하게 시들고 말 것을 왜 돈 주고 산단 말인가. 받는 입장에서도 처치곤란이다.
 이로써 사내의 생활에서 잡담이나마 나눌 수 있는 여자의 수는 제로가 되었다.
 그러고 보니 A는 재작년엔가 결혼을 했지.

 완성이다. 내 평생의 역작이다. 한 30번째 평생의 역작인 것 같다. 가슴이 기쁘고 들떠서 지금이라면 옥상에서 소리 내 웃으며 뛰어내릴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그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는 언제 쓸 수 있게 될까. 그걸 쓰지 못하고 죽으면 영 멋이 없는데. 아니, 어찌되든 멋은 없겠지. 멋은 계속 살아가는 사람들만 쓰는 말이다.

 “재미가 없어요.” 편집장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이 사람은 처음 사내가 소설책을 낼 때 일반 편집자로 담당되었었는데, 어느새 부서 편집장이 되었다. “재미가 없고, 너무 난해하고 음습해요. 아무도 이런 건 돈 내고 보지 않아요.” 사내는 표정도 변하지 않고 편집장을 쳐다보고 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기 이전에, 사실 아무 생각도 없다. “애당초 이거 소설입니까, 아니면 수필입니까, 그도 아니면 무슨 언어유희 같은 겁니까.” 분명히 악의가 담겨서 하는 말은 아니다. 그 정도는 분간할 수 있다. 그런데 사내는 대답할 수가 없는 것이다. 할 말도 없고, 하도록 된 말도 없다. “저기.” 사내가 가까스로 입을 뗀다.
 “오천 원만 빌려주시겠습니까. 돌아갈 차비가 없습니다.”

 외로움. 외로움. 외로움. 그러나 더 외로워할 기력도 없다.

 사내가 방에 틀어박혀 뭔가를 쓴다. 가끔씩 만취한 사람처럼 혀를 내밀며 헛구역질을 한다. 난폭하게 잉크를 새기고 있는 종이는 다름 아닌, 예전에 썼던 유서의 뒷면이다. 책상과 마주보고 있는 면에는 여전히 수치가 어쩌고, 방도를 모색해보겠다는 문장이 변명처럼 적혀있다. 깨끗한 면에 뭔가를 마구 쓰고 있다.
 옛 시절에는 여인들이 낙태를 하기 위해 간장을 통째로 퍼마시곤 했다는 기록을 보았습니다. 무서운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 짠맛에 몸부림치며 태아는 차라리 게으른 노인처럼 안도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합니다. 아무래도 어머니의 품에서 나오게 되면 자, 이것이 네 이름이고, 이것은 네 책임이고, 이것은 네 운명이다, 하며 짊어질 십자가가 너무 많은 것입니다. 너는 인간이니까, 라는 말에서 벗어날 수가 없게 되어버립니다. 인간이니까, 인간이니까 인간이 되려고 발버둥치는 수밖에 없습니다. 중략. 아름다운 사랑이야기가 쓰고 싶었다는 꿈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 동경이었을까요. 극본이 될 만큼 아름다운 연인은 필시 손을 마주잡고 죽어야한다는 이야기를 하기도 했습니다만, 솔직히 다른 결말이더라도 그 극본의 위대함에 손상이 가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작가가 연인을 죽이든, 연인에게 모든 시선을 집중시키고 그 세상 자체를 페이드아웃 하든, 그다지 다를 것도 없습니다. 사랑이라는 꽃이 활짝 피었을 때, 나중에 반드시 시들어 추악하게 되리라는 운명을 가위로 잘라낸다는 점에서 동일합니다. 역시 온 세상이 황금이 된 것 같은 아름다운 순간만을 고정시키고 싶은 것입니다. 이런, 셰익스피어 이후로 늘 작가들은 나쁜 버릇이 있다는 친구의 말이 옳은 것 같기도 합니다.
 구구절절…….
 이건 유서인가? 도대체가 유서인지, 수기인지, 그냥 언어유희인지. 사내는 새로운 종이를 세 장이나 더 꺼내어 정체불명의 희론 같은 것을 완성했다. 그리고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다는 불쾌한 기분을 느꼈다. 아무도 읽지 말기를, 기도하며 그 종이뭉치를 원래 있던 서랍에 넣었다.

 만일 늑대였다면 초원을 달리는 게 억울했을 것이고, 만일 새였다면 하늘을 나는 것이 서러웠을 것이다. 그런 기분으로 생명을 얻었다.

 4월. 아직 봄이다. 창문을 막고 있는 신문지를 다 뜯어내고 활짝 열었다. 이제 차갑지는 않지만 조금 서늘한 바람이 분다. 사내는 장롱을 기어 올라가 높은 곳에 있는 벽장을 열었다. 곰팡이냄새가 자욱한 안쪽에서 설탕이 담긴 병 같은 것을 꺼냈다. 다시 장롱을 기어 내려가 부엌으로 갔다. 유리컵에 수돗물을 담았다. 그리고 설탕 같은 것을 병에서 듬뿍 퍼내어 물에 넣고, 숟가락으로 계속 저으며 녹였다. 잘 녹지 않았다. 아무리 저어도 알갱이가 남아서 사내는 쓸쓸한 기분이 되었다. 시간은 밤이다.
 담배가 피우고 싶었다.
 담배가 있다면 좋을 텐데.

 자, 집에 가자.


끝.

Posted by Lim_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