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의 기억

글/소설 2020. 2. 4. 19:53 |

동생의 기억


 형 주변에 항상 신기한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을 기억한다. 늘 악기 케이스를 등에 매고 다니는 사람무리라든가, 볼 때 마다 줄담배를 물고 있는 더벅머리를 한 남자들이라든가 말이다. 형과 나는 십년을 훌쩍 넘기는 나이차가 있어서, 형은 동생이라기보다 조카쯤 되는 아이를 데리고 다니는 기분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분명 형이 나를 같은 핏줄로서 아낀다는 것은 당시의 어렸던 나도 느낄 수 있었다. 당시 형의 직업이 도대체 무엇이었는지는 지금도 알 수 없다. 일정하게 출퇴근을 하는 것도 아니었고 한량처럼 부모님에게 돈을 꾸지도 않았다. 다만 일주일에 몇 번인가 집에 돌아오지 않는 밤이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으레 대낮에 집 앞의 평상에서 담배를 피우다가, 당시 여덟 살이나 됐을까 싶은 내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낸다. 지폐 몇 장을 내밀면서, 담배 하나랑 너 먹을 과자 사와라, 하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내 어린 시절의 군것질 값은 전부 아버지나 어머니가 아닌 형이 내주었다.
 이따금, 주로 여름이었던 것 같은데, 산보하기 좋은 저녁이면 형은 나를 데리고 신정동에서 크게 원을 그리며 돌아다녔다. 노을 때문에 벽돌담들의 그림자가 길어진 골목에서 왼손은 호주머니에 넣고, 언제나처럼 담배를 피우며 형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지 알 수 없는 그 얼굴로 느릿느릿 걸었다. 너무 느려서 내가 답답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골목을 걷다보면 꼭 어느 집의 지하실로 들어가는데, 지하실에는 조악한 드럼세트나 낡은 앰프 같은 것들 주변에 때가 탄 매트리스가 깔려있다. 형의 친구들 중 몇몇은 저녁마다 그곳에 둘러앉아, 도대체 연주하는 걸 본 적도 없는 통기타들을 벽에 세워두고 막사발에 소주를 마시며 늘 뭔가에 대한 논쟁을 펼치는 것이다. 나와 형이 지하실에 들어가면 다들 반기곤 했다. 그들은 내 친척이라도 된 것처럼 나를 예뻐했는데, 내가 그 아저씨뻘의 형들과 장난을 치는 사이 형은 술자리에 끼어 꼭 두어 잔씩만 마시면서 친구들과 무슨 얘기인가를 했다. 무슨 얘기였는지는 들은 바가 없다. 그저 어린 마음에 우리 형이니까 뭐든 간에 중요한 얘기겠지, 했을 뿐이다.
 그 뒤에는 지하실을 나와 또 걷고, 공원이나 공터에서 다른 친구무리들과 비슷한 일을 반복한다. 형은 신정동 어딜 가도 항상 친구가 있었다. 어딜 가나 친구들이 형을 반기고, 나는 그런 형의 어린 동생이라는 이유만으로 귀여움을 샀다. 산보는 언제나 집근처의 대포집에서 끝났다. 마지막으로 들르는 그 대포집에는 형의 친구가 아니라 아버지가 있었고, 얼큰히 취한 아버지가, 막내가 왔구나, 이제 집으로 갈까, 하면 나는 아버지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며 아버지가 마신 것을 계산하는 형을 뒤돌아봤다.
 출근도 하지 않고 매일 평상 위에서 담배만 피우며 앉아있던 형이 도대체 무슨 수로 항상 푼돈이나마 있었는지, 어렴풋이 짐작이 가는 바가 있다. 그러나 직장을 짐작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형이 무얼 하던 사람이었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당시에도 여기저기 떨어져있던 힌트들을, 이제 어른이 되어서야 짜맞춰보는 것이다. 내가 열 살이 되던 날, 헌병이 들이닥쳐 형을 데려갔고, 그 뒤로 동네에서 형뿐만이 아니라 형의 친구 몇 명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 전날 밤에는 드물게 형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거실의 수화기 너머에서 뭐라고 하는지는 알 방도가 없으나, 잠결에 열린 문틈으로 나는 형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 사상전파라고, 편집 담당이 가장 죄가 크니까, 나만 도망가지 않으면 되겠지.
 그 뒤로 형을 본 일은 없다. 형을 잡아간 헌병들은 그런 사람이 있었다는 것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니 무슨 죄목으로 잡아갔는지도 알 수가 없다.
 그리고 수년 뒤에 뭣 때문에 언론이 통제되니 신문이 검열되었다느니 큰일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형은 여전히 존재한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 사람은 나의 짧았던 10년 속에만, 말이 없고 발걸음이 조용하던, 나이 많은 형으로 기억될 뿐이다.

Posted by Lim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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