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7/06 완성.
1. 나는 이제 내가 누구를(혹은 무엇을) 위해 글을 쓰는 지 어느 정도 알고 있다.
2. 이 길도 결국은 끊고 떨치고 떠나는 길이다.
땅의 감금
곰팡이와 언젠가 먹어본 오래된 치즈 냄새가 나는 도시의 변두리에서 K는 태어났었다. K의 가족은 몹시 궁핍했다. 이미 백 년 이상 대물림된 가난에, 그들은 이미 항의하거나 심지어는 고통스러워하지도 않게끔 적응되어 있었다. 실상 가난이라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 불운하거나 절망스러운 것은 아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들이 사는 변두리의 기후에 있었다. 지옥의 동심원들처럼 깊고 깊은 내륙지방에 사는 그들에게는 수백 년간 단 한 번도 태양의 빛이 곧바로 내리쬔 일이 없었고, 사방은 철책과 붉은 벽돌의 담으로 막혀 바다나 해변을 본다는 것은 꿈속에서도 불가능한 일이었으며 하늘은 가끔 푸르렀으나 그것은 마치 낮은 유리천장처럼 짓누르는 느낌의 것이었다. 그러한 환경 속에서 가난은 불이 붙은 가솔린처럼 악마적으로 타오른다. 인간의 정신을 꺾고 뒤틀어버리는 증오가 바로 그곳에서 태어나는 것이다. 자연이 풍성하고 탁 트인 항구도시 따위라면 차라리 가난은 자유에 날개를 달아주는 축복과 같으나, 납 냄새가 나는 더러운 동전 이외에는 그 무엇으로도 그 무엇도 살 수 없는 막힌 변두리의 판자촌과 공장들 사이에서 가난이나 궁핍은 인간의 내면을 새까맣게 매연으로 채워버린다. K가 어렸을 때부터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던 말이 있는데, 그것은 「수돗물을 마시지 마. 이 동네 파이프는 어디라고 할 것도 없이 전부 녹이 슬었어. 뒷산에서 퍼온 물만 마시도록 해」였다. 물조차 대가 없이는 마실 수 없는 것이었다. 이런 곳에서 증오가 태어난다고 말했는데, 그것은 변두리 동네에 사는 모든 이들의 미간과 처진 입 꼬리에 주물처럼 단단하게 새겨진 주름으로 증명되는 것이었다.
K가 어렸을 때 그의 어머니는 늘 폐병을 앓고 있었으며 그로 인한 고통의 탓인지 혹은 선천적인 성질 때문인지 언제나 신경질적으로 매사를 대했다. 틀림없이 그녀에게도 증오라는 변두리 동네의 저주가 깃들어서, 그녀는 그녀의 남편과 아이들을 증오할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일주일에 6일을 일했는데, 매일 고된 일터에서 돌아오면 그로서는 쓰러져 쉬고자 했으나 그도 어머니와 똑같이 그의 아내를 증오했기 때문에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면 새로운―그러나 악랄한― 활력이라도 얻은 듯 고성과 주먹질로 그의 저녁을 꽉 채워버리고 마는 것이었다. 그들의 단칸방은 한 가족이 살기엔 너무 좁을뿐더러 칸막이가 있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어린 K는 늘 그 둘의 소름끼치는 비명과 욕설을 묵시하는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는 한바탕 남편에게 고함과 욕설을 내뱉고 나면 그녀의 나쁜 폐 탓으로 새벽까지 내내 마른기침을 해댔는데, 그러면 아버지는 도무지 이런 집구석에선 잠도 잘 수 없다고 어딘가로 나가버리고, 어딘가로 갈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K는 그 끔찍한 기침소리에 자주 경련하며 선잠을 자는 것이었다. K가 처음 학교에 입학했을 때 그의 형은 이미 12살가량 되었는데, 몇 년 전부터 형은 며칠에 한 번 꼴로나 집에 돌아오고 도대체 어디서 무얼 하고 다니는 것인지 만나기조차 힘들었다. 가끔씩 만나게 되는 그의 형에게서는 늘 짙은 담배냄새가 났고 얼굴과 팔은 상처와 멍투성이였다.
그런데 나는 지금 K의 비극에 대해서 감상주의적으로 동정을 구하며 서술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애당초 이 나라에서 이러한 도시적 비극은 사방팔방에서 수도 없이 벌어지는 일이다. 이것은 지금부터 서술할 내용의 이해를 돕기 위해 K의 유년기를 간단하게 정리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아무튼 K가 사춘기에 들기 직전에 어머니는 치료 받을 수도 없었던 그녀의 폐 때문에 어느 날 부엌에서 <흑>이나 혹은 <학>에 가까운 날숨소리를 내며 쓰러졌고 그대로 죽어버렸다. 그녀의 시체를 흔들고 불러보다가 마침내 그녀가 정말로 죽었구나, 하고 깨달은 K는 극도로 긴장되어 아버지가 일하는 공장으로 급히 뛰어갔고, 한창 일을 하던 아버지를 붙잡고 어머니가 죽었노라고 전했다. 그러자 아버지는 들고 있던 공구를 내던지고 억양도 없는 목소리로 욕설을 하더니 자신의 얼굴을 움켜쥐고 주저앉아버리는 것이었다. 그때 K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버지가 우는 것을 보았다. 이상한 감정이 K 안에서 들끓었다. 그것은 이상하다고밖에 표현할 수가 없는 것이었는데, 왜냐하면 K 자신도 그것이 감정인지 혹은 다른 무엇인지 판단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형은 장례식장에 오지 않았다. 무엇보다 이미 일 년 전부터 형은 어디에서 살고 있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더러는 이미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K는 막연하게 생각했었다.
어머니가 사망한 덕분에 집안은 전보다 조용해졌다. 장례식 이후로 아버지는 퇴근하면 늘 술에 진탕 취해 그대로 쓰러져 잤으며, 단칸방인 집은 전보다 아주 조금은 넓어보였다. K는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타성적으로 학업에만 열중했다. 그가 돈을 벌 수 있는 나이가 될 때까지는 잡다한 집안일 외에 학교 공부 밖에 할 일이 없었던 것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K는 머리가 좋았다. 늘 공부한 만큼, 아니면 그보다 더 좋은 성적을 받았고 아버지는 그것을 다소 자랑으로 여기는 듯, 가끔 술에 취해 그 크고 온통 못이 박힌 데에다가 공업용 오일로 검게 물든 손으로 K의 머리통을 두들기며 「이건 날 닮지 않아 잘 됐단 말이야」하며 슬며시 웃는 것이었다. K는 그러한 서투른 칭찬이 어색하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여 아버지가 웃는 방식을 따라해 보곤 했다. 우등생이었던 K는 성적이 좋은 학생에게만 지급되는 노트와 필기구 등을 손에 넣을 수 있었고, 교사들의 신뢰도 덤으로 가져 공부하는 일에는 지장이 없게 되었다. 16살이 됐을 때 K는 학교에 다니면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다녔다. 방과 후에 동네에 단 하나 밖에 없는 오래된 서점에서 일하기도 했고, 술집 주방에서 새벽까지 설거지를 하기도 했다. 그 변두리 동네의 가게들 치고 K가 닦아보지 않은 테이블은 단 하나도 없을 정도였다. 그리고 학교에서 전공을 정하게 됐을 때, K는 빨리 돈을 벌고자 생각해 공과로 가려고 했으나 이전부터 K의 영특함을 마음에 두고 있던 아버지의 의견에 의해 대학을 목표로 하는 인문과로 가게 되었다. 그것은 K로서는 놀랄만한 일이었다. 이미 충분히 늙어버린 아버지가, 자신을 대학에 보내기 위해 앞으로 수년을 더 그 하늘도 앞날도 없는 노동을 지속하겠다고 결정한 것이다.
하여간 K는 머리가 좋은 것이 분명했다. 몇몇 교사들의 도움도 받아 명문대에 합격하고 중앙도시로 가는 것이 확정되었다. 그때 K는 처음으로 아버지의 형제자매들을 보았다. 자신의 아들이 명문대에 합격했다고 아버지가 그 좁은 단칸방으로 이미 수 년 이상 얼굴도 보지 못한 친척들을 불러 없는 돈으로 잔치를 벌인 것이다. K는 처음 보는 친척들 사이에서 당황하다가, 기묘한 쓰라림 같은 것을 느껴 변명을 대고 집밖에 나왔다. 그날 그는 아버지가 쥐여 준 구겨지고 기름이 묻은 인생 최초의 용돈으로 어째서인지 담배를 사, 변두리 동네의 더 변두리에 있는 어두운 골목에서 이유 모를 커다란 절망을 느끼며 인생 첫 담배를 피웠다.
대학에 다니기 위해 도시로 가는 열차는 초봄이었음에도 승객들로 인해 후끈거리고 습했다. 언제나 아버지에게서 나던 익숙한 쇠붙이 냄새와 공업용 기름 냄새, 땀 냄새, 그리고 토사물 냄새 따위가 객실에 가득했고 모두가 땀을 흘리고 있었다. 바깥 날씨가 추웠기에 껴입은 코트와 모자 때문에 더욱 그랬다. 열차는 한참을 달렸다. 덜컹거리는 객실 속에서 얼핏 잠들었다 깨기를 반복하는 사이에 K는 왜인지 어머니의 마른기침 소리가 자신의 머릿속에서 계속 울리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K는 직감적으로 자신이 병에 걸릴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 흔들리는 객차 속에서 K는 병과 죽음의 향기를 맡고 들리지 않게 키들거렸다.
열차가 중앙도시에 도착했을 때 K는 자신이 병에 걸렸다는 것을 확신했다. 그곳의 냄새를 맡고 그렇게 확신했다. 이제 K는 자신의 폐 속에 마귀들이 기어 다니는 것을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첫 마른기침이 플랫폼에 서있는 K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병에 대해 완전한 무관심의 태도로 대했고, 그저 대학에 가서 공부를 계속하며 기숙사에서 잠을 잤다. 그는 법대에 다녔고 언제나 성적이 우수해 장학금까지 받으며 공부를 할 수 있었다. 학비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고 아버지에게 전화했을 때, 아버지는 너털웃음을 터트렸는데, 비록 울음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K는 전화기 너머에서 그 늙은 남자가 울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일주일 뒤 비보가 들어왔다. 아버지가 죽었다. 후에 알기로 사인은 중금속 중독으로 인한 손상과 합병증이었다. K는 <알 것 같다>고 생각했다. 병으로 죽었다고는 하나, 그 남자는 스스로 죽은 것이다. 그 남자는 더 이상 해야 할 일이 없어서 죽어버린 것이다. 그는 장례식에 가지 않았다.
K는 졸업하고 변호사가 되었다. 그럴싸한 변호사 사무실과 스폰서들도 가졌다. 마른기침은 점점 잦고 심해졌지만 그런 것에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같은 대학 선배들인 판사나 검사들과도 친분을 다져야했고, 이 바닥에서 입지를 확고히 해야 했고, 돈이 되는 고객들도 잡아야했다. 그는 돈과 지위를 얻을 수 있는 사건이라면 닥치는 대로 맡아했다. 사람들이 <돈만 주면 악마도 변호할 인간>이라고 부르든 말든 알 바도 아니었다. 그는 머리가 좋았고 수완이 있었다. 재판에서 이기기 위해 학벌과 연줄을 타고 거액의 뒷돈이 오가기도 했다. 거리낄 것도 없었다. 그야 그는 하늘도 바다도 태양도 없는 변두리의 공장과 판자촌 출신이다. 이미 영혼은 태어났을 때부터 매연으로 새까맣게 타버렸다. 돈, 돈, 돈. <내가 부모에게 배운 것은 분명히 그것이다>하고 그는 생각했다. 쇳덩이 같은 물탱크를 지고 산을 내려오는 고통 없이는 물도 마음껏 마실 수 없는 것이 이 세계다. 분명 사랑했던 사람인데도 증오하고 원망하다가 잃어버릴 수밖에 없는 것이 가난이라는 저주다. 갓 태어난 아기의 눈동자에도 악마가 들게 하는 것이 궁핍이다. 그렇다, 거리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내 삶은 사람들이 쓰레기를 쑤셔 넣는 쓰레기통이었고 이제 그걸 깨끗이 비우려고 쓰레기통을 뒤집을 뿐이다> K는 전진했다. 멈출 줄 모르는 마른기침과 함께 말이다.
K는 자신의 사무실에서 의자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사무실의 등은 모두 꺼져있었고 창밖은 짙은 밤이었다. 입에 문 궐련 끝의 빨간 불꽃만이 보이는 어둠 속에서 그는 일주일에 한 번 꼴로나 있을까 말까 한 안락을 즐기고 있었다. K는 서류작업이나 기타 다른 일 때문에 굳이 필요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전구를 켜는 것을 아주 싫어했다. 밝은 곳에서는 아무래도 마음이 편치가 않았다. 그것은 그가 어린 시절 언제나 햇빛이 보이지 않는 반지하에서만 살았기 때문일까? 그런데 그 어린 시절의 어디에 도대체 안락이 있었단 말인가. 어머니의 숨넘어가는 기침소리 때문에 잠도 잘 수 없었던 그 어둠이 안락할 수가 있기나 하느냔 말이다. 그러나 어쨌든 밝은 곳은 싫었다. 밝은 곳에 있으면 그는 언제나 무언가로부터 공격당할 것만 같은 불안을 느꼈다. 그러니 쉴 때만은 불을 꺼두자. 왜인지는 알 수 없고 몰라도 상관없었다. 확실한 것은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만 그가 평화를 느낀다는 것이었다. 보이지 않는 담배연기가 하늘하늘 사무실 전체에 퍼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가 느끼는 평화는 기묘한 것이었다. 그 매연 사이에서 마치 자신의 몸도 공기보다 가벼운 연기로 서서히 변해가며 사방으로 흩어지는 듯한, 존재의 상실을 그는 감각으로 느끼며 그것을 평화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럴 때면 언제나 복병처럼 기침이 터져 나왔다. 그러면 연기로 흩어지던 몸은 순식간에 다시 물컹거리는 살덩어리로 돌아와 단단한 뼈에 들러붙는 것이다. 기침의 빈도는 점점 심해지고 있었고, 매번 전기톱으로 폐를 찢어내는 듯한 통증을 몰고 왔다. 누군가가 본다면 분명 안쓰러워할 정도로 심한 기침 끝에 폐부를 손으로 움켜잡고 등을 구부리는 와중에도, 다른 한 손에는 피우던 담배를 그는 늘 쥐고 있었다. 한 모금 한 모금을 피울 때마다 병사病死라는 움찔거리는 재앙덩어리가 K를 향해 한걸음씩 발을 딛고 있었지만, K는 여전히 그것에 무관심했고 심지어는 그것을 환희에 찬 눈으로 쳐다보기도 했다. 이렇다보니 담배라는 것을 그만둘 이유도 없었다. 게다가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담뱃잎이 타는 냄새에서 K는 노스탤지어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이상한 일이다. 그에게 그리워할 만한 과거는 단 한 줌도 없는데.
바로 얼마 전 K는 한 연쇄살인범의 변호를 훌륭히 끝마쳤다. 그자는 10살 이전의 어린이들만을 다섯 명이나 죽인 악독한 인간이었다. 게다가 피해자를 토막 내어 먹는 등 시체훼손과 식인 혐의까지 있었다. 검사는 사형을 주장했지만 K는 자신의 능란한 혓바닥으로 정신질환과 심신미약 등을 들먹이며 판사의 입에서 정신병원에의 강제 입원을 끌어내는 데 성공하여 훌륭하게 사건을 마무리했다. 사실 K는 그 과정에서 드물게 진실 된 적극성이라고 할 만한 것을 보였다. 반성의 기미 따위는 조금도 보이지 않던 범인과의 상담에서 K는 그와 자신의 기묘한 동질성 같은 것을 발견했던 것이다. 이미 인간성이 상실된 것을 상징하듯 무쇠처럼 딱딱한 어조로 말을 하던 그 남자는 빈민가에서 태어났으나 고등학생이 되기도 전 독립하여 자수성가한 사람이었다. 법망을 교묘히 피해가며 합법도 불법도 아닌 방법으로 많은 돈을 번 그는 자신이 일치감치 잃어버린 <생명력>을 되찾기 위해 아이들을 먹었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행위를 전혀 후회하거나 반성하지 않았으나 만일 자신이 교수대에 서게 된다 하더라도 그것은 전혀 중요한 일이 아니라고 말했다. 이미 자신은 생명의 환희를 가졌다는 것이다. 대화를 나눌 때마다 K는 그에 대한 우정 같은 것이 점점 커지는 것을 느꼈다. 사실 K는 그가 정신병자 따위가 아니라는 것을 확신했다. 그는 자신이 한 일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으며 그 여파가 어떠할지, 결국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질지 확실하게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K는 그 <친구>가 사람을 다소 죽이고 먹었다는 이유로 교수대에 대롱대롱 매달리게 될 것이라는 미래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물론 K는 이미 엄청난 변호사 선임료를 받았지만 그건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이 괴물이 된 인간을 계속 살려두고 싶었다. 단순히 자신의 뭔지 모를 욕심을 위해서. 그때 K는 자신에게 모럴이 없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그리고 직감적으로, 그 남자가 자신과 같은 땅에서 자란 동향인이라고 K는 느낄 수 있었다. 그래, <우리>에게 도덕 따위는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K는 성공했고, 승리했고, 덧붙여 거액의 재화도 벌었다. 그 남자는 오랜 시간을 감금병동에서 지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 사회에 생존해있을 것이다. 그것으로 되었다. K는 의자에 더 깊숙이 파묻혀 앉으며 천천히 연기를 뿜어냈다. 창밖에서는 멀리서 네온사인들이 깜빡였다.
<나는 아직도 아버지가 준 용돈으로 담배를 피우고 있는 것 같아> 그 두툼하고, 땀과 기름에 젖었으며 온통 구겨진 지폐다발. 터무니없이 멀리 온 것 같았지만, 동시에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는 감각.
<나는 내 혈연들의 죽음을 짓밟고 올라왔다> 거리낄 것도 없이. 하지만 그래도 기침은 멈추지 않는다. 모든 것이 태양빛에 대한 가난에서 시작된, 세계의 뒤틀린 진실이라는 느낌을 K는 지속적으로 받고 있었다. 쇠로 된 재가 하루 종일 바람에 휘날리는 마을에서는 활짝 열린 세계의 냄새라고는 단 한 점도 맡을 수 없었다. 비밀들은 모조리 추하게 폭로되어있었고, 그것에 노출된 가련한 인간들은 침묵하는 광인으로 변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그는 감겨진 눈동자 밖에 없는 감겨진 마을에서 태어났던 것이다. 그 연쇄살인범의 심장 속에 말뚝처럼 박힌 무언가가 똑같이 K의 심장에도 박혀있었다. 그것을 무엇이라 불러야할지 K는 자신만만하게 말할 수 없었지만, 그것은 아마도 증오, 혹은 그와 비슷한 안타까운 함성소리, 타는 유황불 같은 악마 들린 까만 눈동자 같은 것이었다. 야밤에 단도를 들고 달빛 아래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그저 서있는, 그 광인이 눈물을 흘리지 못해 오히려 달이 대신 눈물을 흘려주는 광막하고 치명적인 시간과 같은 것이었다. 담배는 다 타들어갔고 의자 위에서 K는 온몸을 내던진 듯이 축 처져있었다. 폐에서부터 솟구쳐 오르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내뱉으며 기침을 하자 데스크에 검은 핏자국이 물감을 흩뿌린 듯 들러붙었다.
어느 날 K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발신자는 자신이 경찰이라고 했다. 얼마 전 집안에서 대마초를 몰래 기르던 마약사범을 잡았는데, 그가 K의 이름을 대며, 자신이 그의 형이라고, 제발 연락을 해달라고 며칠이나 졸랐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듣자마자 K는 자신의 육신이 설탕공예처럼 경직되고 또 동시에 너무도 쉽게 부서져 버리는 종류의 것으로 변한 것을 느꼈다. K는 전화선 너머의 경찰이라는 자에게 그 마약사범의 이름을 물었다. 그것은 분명히 알고 있는 이름이었다. 그러나 너무 오랫동안 기억할 필요도 없는 이름이었다. K는 꼬여가는 혓바닥으로 자신이 그의 친동생이 맞다고 말했다. 형이 살아있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가 죽었을 것이리라 확신한 것도 아니었다. 무의식 속의 암초처럼 그것은 해류에 숨겨져 있다가, 순항하는 배를 <위하여> 솟구치는 것이었다.
“선생의 이름을 신문에서 봤다고 합디다.” 경찰이 말했다.
“그런데 그가 왜 내게 연락하길 원했죠?”
“그야…… 변호사가 필요했기 때문 아닐까요.” 경찰은 무관심이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K는 한동안 침묵하다가 경찰서의 전화번호를 알려달라고, 생각할 시간이 조금 필요하다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모든 드라마에 끝이 있듯이 K의 비극인지 희극인지, 아무튼 어떤 종류의 희곡이든 그것도 아주 나지막한 물결의 클라이맥스와 함께 끝나가려는 것이다. K는 자신이 그것을 자신에게 암시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내 혈연들의 죽음을 짓밟고 올라왔다> 그러니 이제는 아직 죽지 않은 혈연이 나의 이 완전한 자유를 향해 숫돌에 갈아놓은 뿔을 달고 접근해오는 것이다. 가끔은 끈적거리는 점액질처럼, 가끔은 돌진하는 황소처럼. 이때 K는 자신의 삶에서 절망이라는 것이 단 한 번도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내내 목표도 근거도 없었기 때문인 것이다. 그는 그저 괴물처럼 사람의 생명을 포식하며 오로지 높이 기어오르기만 하는 현상에 지나지 않았다. K는 자신이 인간이 아니었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얼마 전 감금병동에 갇힌 그 친구도, K와 같은 땅에서 살았던 죽고 낡은 마을사람들도, 모조리 인간이 아니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그간 어떻게 살아왔는지 도무지 알 도리가 없는 그의 형도. 그들은 모두 비인간이었다. 태양빛에 대한 가난, 자연의 풍요와 파도치는 대양에 대한 가난, 그런 것들이 증오로 응결되는 궁핍을 만들고, 사람을 사람이 아니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 아동연쇄살인마의 말이 옳았다. 우리는 진즉 생명력에 대한 궁핍을 앓고 있었다. K는 점점 심해지는 마른기침에 들썩거리며 전화를 끊고도 한참을 수화기 위에 손을 올려두고 있었다.
그때 K는 자신이 살면서 단 한 번도 바다를 본 일이 없다는 것을 떠올렸다. 내륙의 내륙에 있는 그의 출생지로부터 시작하여, 그는 동심원들 사이로만 지네처럼 흘렀을 뿐 단 한 번도 대지의 끝을 본 일이 없었다. 바다라는 것은 교과서나 사진으로만 설명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설명도 충분치 않았다. 그는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었다. 땅의 끝에서 물결치는 한없는 웅덩이도, 푸른 어둠으로 깊이 감싸인 대양이라는 것도, 아무것도 이해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오로지 어떠한 동경, 이 차가운 내륙에도 끝이 있으리라는 형태도 지어질 수 없는 관념적인 동경만 있을 뿐이었다. 내리쬐는 빛과 태양으로 붉게 달궈진 모래들, 그리고 죽음과 같이 심원하게 웅웅거리는 거대한 대양. 그것들은 K의 삶에 단 한 번도 접촉해본 일이 없는 것들이었다. K는 흐느적거리며 일어나 코트를 옷걸이에서 빼냈다. 창밖에서는 습기도 없는 진눈깨비가 얼음 같은 광풍에 휘몰아치고 있었다. K는 떠나야했다. 땅 끝으로, 그 이름도 잊어지지 않을 아동연쇄살인마가 칼과 실톱으로 떼어내 송두리째 삼켜야 했던 것이, 아무런 범죄나 결핍의 냄새도 없이 오로지 무한하게 넘쳐흐르는 <자유>의 끝으로 말이다. K는 자신이 완전한 자유를 이미 얻었노라고 믿고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자유란 여러 가지 색을 가진 것이었다. K는 가난조차 소금결정처럼 작지만 찬연하게 빛나는 땅을 봐야만 했다.
중앙도시에서 멀어질수록 열차의 흔들림은 점점 심해졌다. K는 자신이 고향을 떠나올 때의 기분을 그대로 맛보고 있었다. 어머니의 죽음을 딛고 올라 한 평의 땅을 얻고 거기서부터 K는 시작했었다. 변두리 동네의 아무도 접근하려하지 않는 골목으로 사라진 형과, 이미 오래 전부터 삶을 잃어버린 아버지, 심지어 그 아버지의 노동을 착취하며 피투성이 손으로 기어오르던 K의 모습, 그것들은 전부 <무언가로부터 달아나는> 뉘앙스를 머금고 있었다. 열차는 끊임없이 덜컹거렸고 그와 함께 K의 폐도 비명을 지르며 흔들리고 있었다. K는 자신이 평생토록 수인囚人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감옥은 너무 넓어서 자신이 갇혀있다는 것을 알기도 힘들었지만, 갇힌 사람들 모두가 이유모를 비참에 신음하고 있었다. 완전한 자유를 쟁취했다고 믿었던 K마저도 감옥의 중심에서 빙글빙글 돌고만 있었던 것이다. K는 땅의 끝으로 가고 있었다. 그러나 이 낡은 열차 안에서는, 이 안에서 풍기는 모든 냄새들은 오히려 K를 그의 끔찍한 고향으로 데리고 가는 것만 같은 소름끼치는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새까만 공업용 기름과 피와 살과 색채 없는 가난의 냄새가 작은 직방형의 공간 속에 넘쳐흐르도록 짙게 배어있었다. K의 옆자리에 앉은 어느 젊은 부인은 갓난아기를 품에 안고 가쁜 숨을 쉬며 잠들어있었다. 갓난아기는 거의 30초 간격으로 눈을 뜨며 회색의 텅 빈 눈동자로 K를 쳐다보다가, 울음을 토해낼 것처럼 인상을 찡그렸다가도 마치 모든 것을 포기한 것처럼 눈을 감는 일을 반복하고 있었다. K는 폐가 들썩거리는 것을 느꼈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갇힌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온 영혼이 구속된 채, 심지어 그것을 알지도 못하며, 폐병 환자처럼 숨을 쉬며 살고 있단 말인가. K는 슬픔을 느껴보고자 했지만 결국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이 열차는 분명히 항구도시로 가고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K의 온몸과 그의 내장들은 점점 딱딱하게 경직되어가는 것 같았다. 자꾸만 기침이 터져 나오려고 했다. 그러나 주위를 둘러보면 값비싼 가죽코트로 몸을 감싸고 실크 모자를 눌러쓴 사람은 K밖에 없었기에, 그는 자기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끔찍한 가난과 궁핍의 냄새가 모두에게서 나고 있었다. K는 기침을 참으며 점점 몸을 둥글게 웅크리고 딱딱한 의자에 파묻혔다. <죄수의 발목에 채워진 족쇄처럼……> 그는 눈을 감은 채 중얼댔다.
항구도시의 역에서는 구급차와 구급요원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그들은 약 20분 전에 연락을 받은 것이다. 역으로 들어오고 있는 열차의 6호실에서, 어느 남자가 피를 토하고 쓰러졌다고 말이다. 구급요원들에게 전화를 건 열차의 차장은 이렇게 말했다: <아주 중요해 보이는 남자입니다. 높으신 나리가 틀림없어요. 한 됫박이나 되는 피를 토하고 앞으로 고꾸라졌습니다. 이미 죽은 게 아닌가 싶지만 저는 차장으로서 연락할 의무가 있었어요>
열차가 역에 들어오자 요원들이 들어가 남자의 시체를 꺼내왔다. 그의 얇고 풍성한 머리칼은 토혈에 젖어 뭉그러져있었고, 실크 모자가 계단 밑으로 떨어졌다. 그의 눈은 죽음을 저주하는 것처럼 있는 힘껏 감겨있었고, 새하얀 이빨이 드러난 입은 억지로라도 마지막 숨을 들이쉬려는 듯 한껏 벌려진 채 피를 흘리고 있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