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서 오세요, 작가를 꿈꾸는 아가씨.」
기록/생각 2019. 7. 30. 14:06 |「어서 오세요, 작가를 꿈꾸는 아가씨.」
안녕하십니까, 아가씨. 도대체 왜 그 많은 전업작가들을 제치고 저에게 오신 건지는 아직도 알 수 없습니다만, 그래도 제 의견을 듣고 싶어 하신다니 영광입니다. 듣자하니 소설가가 되는 것이 꿈이시라고요. 지금 나이가 어떻게 되시죠? 아, 18살이라, 학생이시군요. 참 좋을 때입니다. 틀림없이 온갖 감성과 영감이 쉴 틈도 주지 않고 머릿속에서 번쩍거릴 테지요. 영감과 직관에 이끌려 투박하게 쓴 글조차 젊음의 수액을 머금어 빛나 보일 것이 분명합니다. 그 시절에는 모두가 천재의 조각들을 품고 있지요. 서론이 길었군요. 당신께서 궁금해 하시는 것을 제 별것 아닌 소견으로 해소해드릴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당신께서는 영어도 불어도 노어도 아닌 한글로 글을 쓰고 계시지요? 예, 아마도 그러하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설령 타국어에 능통해 현란한 어휘를 구사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고향의 말로 글을 쓰는 것과 타향의 말로 글을 쓰는 것은 큰 차이가 있지요. 결국 아가씨께서는 한국에서 한국어로 글을 쓰게 되실 것입니다. 무어 그것이 잘못되었다거나 문제가 있다거나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놓인 조건을 확인할 수밖에 없게 만들뿐이죠. 소설가가 꿈이 아가씨, 분명 온갖 서점을 매일처럼 드나들다보면, 입구에서부터 화려하게 쌓여있는, 이미 베스트셀러가 될 목적으로 출판된 책들을 거의 강제적으로 보게 되실 겁니다. 눈과 귀를 잘 이용하세요, 문학소녀 아가씨. 우리는 짚고 넘어가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아가씨를 문학의 세계로 밀어 넣은 장본인은 누구입니까? 당신의 어린 시절, 압도적인 문장과 울부짖는 존재와 때때로 달이나 혹은 태양을 가리키던 손가락으로 당신의 세계를 산산조각 내버린 것은 어떤 한 권의 책이었습니까? 도스토예프스키였습니까? 니코스 카잔차키스였습니까? 알베르 카뮈였나요? 뇌수를 뒤틀리게 하는 프란츠 카프카였습니까? 현인 헤르만 헷세였습니까? 아니면 다자이 오사무의 차갑고 축축한 손길이었습니까? 분명 무엇이든 있었겠지요. 문학소녀 아가씨. 그런데 우리는 짚고 넘어가야할 것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죽었습니다.
아니 뭐라고! 절대 죽지 않는, 세대를 초월한 걸작으로 활자 속에서 영생을 얻은 그들이 죽을 리가! 그렇게 생각하실 겁니다. 그런데 반복하여 말하는데, 그들은 정말이지 죽었습니다. 굳이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그들은 지엽적으로 죽었습니다. 이야기를 잠깐 되돌려보죠 18세의 빛나는 아가씨. 그 대형서점들의 프런트에 들어설 때마다 보이던 책들이, 방금 말한 사망한 작가들과 같은 절대성을 갖고 있던가요? 그 책들이 시대를 초월해 영생하던가요? 사상과 서술만으로 나라 하나를 뒤엎던가요? 그렇지는 않으리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 책들은 현시대를 위해 공급된 소비물자들입니다.
그렇다고 그것들이 가치가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도대체 가치가 없는 것이 어디 있으며 가치가 있는 것은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말입니다, 아가씨, 시대정신은 개인을 위대하게도 만들고 혹은 파멸시키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당신이 태어나 살고 있는 나라를 잘 살펴보세요. 극단화된 자본주의 경제사회의 실험대로서 쓰이고 있는 이 땅의 21세기를 잘 살펴보세요. 사람들은 지쳤고,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나, 무언가를 해야만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있으며, 연속적으로 자본주의의 본질에 대해 의문을 가지지만, 자본을 취득하지 않으면 그런 의문을 가질 자격조차 없다는 믿음으로 스스로의 사고를 취소합니다. 가면 갈수록 사람들은 인간실존으로서의 존재성을 버리고 자발적으로 기업―비단 국어사전에서의 기업만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의 부품이 되어갑니다. 그들은 더 이상 위대함을 좇을 기반을 가지지 못하고, 턱없이 가난한 존재의 조건 속에서 짧은 안도나 쾌락이 자신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행복이라고 믿게 됩니다. 소확행, 워라밸, 이런 신조어들은 사실 인간을 치유하는 말들이 아닙니다. 인간이 아니게 된 부품들을 타협시키는 말입니다.
실존을 상실하고, 개인이 파괴된, 과거 인간이었던 자본주의 경제체계의 부품들은 이제 두 가지 선택밖에 하지 못합니다. 공급하거나 소비하거나, 그것뿐입니다. 그로 인하여, 아가씨, 소설가가 되고 싶어 하는 젊은 아가씨, 작가라는 단어는 사어死語입니다. 그 단어는 이제 <콘텐츠 공급자>로 전환됩니다. 공급과 소비의 상관관계는 학교에서 배우셨겠지요. 콘텐츠 공급자는 말 그대로 콘텐츠를 공급하는 자인만큼, 수요에 대하여 확실한 이해와 행동을 겸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그 콘텐츠는 소비됩니다. 근대에 예술이라는 개념이 가졌던 특권은 소멸하였고, 안 그래도 이미 끔찍하게 지쳐있는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존재에 대한 처절한 마주봄이 아니라 결말 없는 위안입니다.
제 20대 때가 생각나는군요. 그때 전 이런 것들을 이해해버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제 난도질당한 <문학>에 가격표를 붙여달라고 오기 속으로 부르짖었으며, 완전히 실패했습니다.
이런 실패자에게 도대체 무엇을 배우고자 오셨는지, 저는 아직도 이해가 되질 않는군요. 그러나 저는 말씀드렸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것만은 알려 드렸습니다. 저는 가끔 스스로를 <아직도 특권의식을 버리지 못한 시대착오자>라고 천천히 읊어보기도 합니다! 하여간 명백한 객관에 의하면 저는 수요와 공급의 법칙을 받아들이지 못해 도태된 글쟁이입니다. 당신과 나의 이 만남이 타산지석이나 반면교사라는 말로 이어질 수 있다면 좋겠군요.
작가를 꿈꾸는 아가씨, 그저 제가 바랄 수 있는 것은, 당신이 빛을 잃지 않았으면 하는 것뿐이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