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서 오세요, 작가를 꿈꾸는 아가씨.」


 안녕하십니까, 아가씨. 도대체 왜 그 많은 전업작가들을 제치고 저에게 오신 건지는 아직도 알 수 없습니다만, 그래도 제 의견을 듣고 싶어 하신다니 영광입니다. 듣자하니 소설가가 되는 것이 꿈이시라고요. 지금 나이가 어떻게 되시죠? 아, 18살이라, 학생이시군요. 참 좋을 때입니다. 틀림없이 온갖 감성과 영감이 쉴 틈도 주지 않고 머릿속에서 번쩍거릴 테지요. 영감과 직관에 이끌려 투박하게 쓴 글조차 젊음의 수액을 머금어 빛나 보일 것이 분명합니다. 그 시절에는 모두가 천재의 조각들을 품고 있지요. 서론이 길었군요. 당신께서 궁금해 하시는 것을 제 별것 아닌 소견으로 해소해드릴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당신께서는 영어도 불어도 노어도 아닌 한글로 글을 쓰고 계시지요? 예, 아마도 그러하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설령 타국어에 능통해 현란한 어휘를 구사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고향의 말로 글을 쓰는 것과 타향의 말로 글을 쓰는 것은 큰 차이가 있지요. 결국 아가씨께서는 한국에서 한국어로 글을 쓰게 되실 것입니다. 무어 그것이 잘못되었다거나 문제가 있다거나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놓인 조건을 확인할 수밖에 없게 만들뿐이죠. 소설가가 꿈이 아가씨, 분명 온갖 서점을 매일처럼 드나들다보면, 입구에서부터 화려하게 쌓여있는, 이미 베스트셀러가 될 목적으로 출판된 책들을 거의 강제적으로 보게 되실 겁니다. 눈과 귀를 잘 이용하세요, 문학소녀 아가씨. 우리는 짚고 넘어가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아가씨를 문학의 세계로 밀어 넣은 장본인은 누구입니까? 당신의 어린 시절, 압도적인 문장과 울부짖는 존재와 때때로 달이나 혹은 태양을 가리키던 손가락으로 당신의 세계를 산산조각 내버린 것은 어떤 한 권의 책이었습니까? 도스토예프스키였습니까? 니코스 카잔차키스였습니까? 알베르 카뮈였나요? 뇌수를 뒤틀리게 하는 프란츠 카프카였습니까? 현인 헤르만 헷세였습니까? 아니면 다자이 오사무의 차갑고 축축한 손길이었습니까? 분명 무엇이든 있었겠지요. 문학소녀 아가씨. 그런데 우리는 짚고 넘어가야할 것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죽었습니다.

 아니 뭐라고! 절대 죽지 않는, 세대를 초월한 걸작으로 활자 속에서 영생을 얻은 그들이 죽을 리가! 그렇게 생각하실 겁니다. 그런데 반복하여 말하는데, 그들은 정말이지 죽었습니다. 굳이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그들은 지엽적으로 죽었습니다. 이야기를 잠깐 되돌려보죠 18세의 빛나는 아가씨. 그 대형서점들의 프런트에 들어설 때마다 보이던 책들이, 방금 말한 사망한 작가들과 같은 절대성을 갖고 있던가요? 그 책들이 시대를 초월해 영생하던가요? 사상과 서술만으로 나라 하나를 뒤엎던가요? 그렇지는 않으리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 책들은 현시대를 위해 공급된 소비물자들입니다.

 그렇다고 그것들이 가치가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도대체 가치가 없는 것이 어디 있으며 가치가 있는 것은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말입니다, 아가씨, 시대정신은 개인을 위대하게도 만들고 혹은 파멸시키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당신이 태어나 살고 있는 나라를 잘 살펴보세요. 극단화된 자본주의 경제사회의 실험대로서 쓰이고 있는 이 땅의 21세기를 잘 살펴보세요. 사람들은 지쳤고,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나, 무언가를 해야만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있으며, 연속적으로 자본주의의 본질에 대해 의문을 가지지만, 자본을 취득하지 않으면 그런 의문을 가질 자격조차 없다는 믿음으로 스스로의 사고를 취소합니다. 가면 갈수록 사람들은 인간실존으로서의 존재성을 버리고 자발적으로 기업―비단 국어사전에서의 기업만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의 부품이 되어갑니다. 그들은 더 이상 위대함을 좇을 기반을 가지지 못하고, 턱없이 가난한 존재의 조건 속에서 짧은 안도나 쾌락이 자신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행복이라고 믿게 됩니다. 소확행, 워라밸, 이런 신조어들은 사실 인간을 치유하는 말들이 아닙니다. 인간이 아니게 된 부품들을 타협시키는 말입니다.

 실존을 상실하고, 개인이 파괴된, 과거 인간이었던 자본주의 경제체계의 부품들은 이제 두 가지 선택밖에 하지 못합니다. 공급하거나 소비하거나, 그것뿐입니다. 그로 인하여, 아가씨, 소설가가 되고 싶어 하는 젊은 아가씨, 작가라는 단어는 사어死語입니다. 그 단어는 이제 <콘텐츠 공급자>로 전환됩니다. 공급과 소비의 상관관계는 학교에서 배우셨겠지요. 콘텐츠 공급자는 말 그대로 콘텐츠를 공급하는 자인만큼, 수요에 대하여 확실한 이해와 행동을 겸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그 콘텐츠는 소비됩니다. 근대에 예술이라는 개념이 가졌던 특권은 소멸하였고, 안 그래도 이미 끔찍하게 지쳐있는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존재에 대한 처절한 마주봄이 아니라 결말 없는 위안입니다.

 제 20대 때가 생각나는군요. 그때 전 이런 것들을 이해해버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제 난도질당한 <문학>에 가격표를 붙여달라고 오기 속으로 부르짖었으며, 완전히 실패했습니다.

 이런 실패자에게 도대체 무엇을 배우고자 오셨는지, 저는 아직도 이해가 되질 않는군요. 그러나 저는 말씀드렸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것만은 알려 드렸습니다. 저는 가끔 스스로를 <아직도 특권의식을 버리지 못한 시대착오자>라고 천천히 읊어보기도 합니다! 하여간 명백한 객관에 의하면 저는 수요와 공급의 법칙을 받아들이지 못해 도태된 글쟁이입니다. 당신과 나의 이 만남이 타산지석이나 반면교사라는 말로 이어질 수 있다면 좋겠군요.

 작가를 꿈꾸는 아가씨, 그저 제가 바랄 수 있는 것은, 당신이 빛을 잃지 않았으면 하는 것뿐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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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피우시겠습니까?」


 물론이죠. 울지 않는 매미는 더 오래 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만, 그런 매미는 없지요. 빗물이 뚝뚝 듣는 한여름의 새벽에, 저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나는 비非생존자라고. 생존자들의 특권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자살입니다. 생존하는 것들만이 자살할 수 있지요. 그들에게는 사고와, 비관과, 회의와, 합리적인 절망이 허락됩니다. 그래서 그들은 빠르고 간단하게 죽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것은 굉장한 특권이죠.


 세 시간 전부터 여기에 앉아있었습니다. 얼마 전부터 하늘이 붕 뜬 가래 같은 색깔에서 남청색으로 변하고 있어요. 태양이 뜨기 시작하면 제 피부 색깔을 알아볼 수 있게 되는데, 그러면 나는 이상한 것을 발견합니다. 이 황인종의 마른 피부는 아무리 봐도 거품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직관되는 거예요. 만약 뾰족한 바늘의 개념을 가져다대면 육신 전체가 미약한 소음과 함께 펑 터져버릴 것 같은, 그런 환각과도 같은 믿음이 날 지배합니다. 그러나 플라톤은 고대의 사망자이기 때문에 바늘의 개념idea 같은 것은 가져올 도리가 없습니다. 나는 황야 위에 떠있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타르거품입니다.


 거품에게 즉각적인 자살은 허락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럴 수 없습니다. 사고하는 것도 비관하는 것도 회의하는 것도 절망하는 것도 순차적이지 않고, 논리가 없으며, 한 덩어리로 사악하게 뒤섞인 혼란 그 자체입니다. 생존자가 되는 조건을 말씀드렸던가요? 그것은 믿음입니다. 어떠한 종류의 믿음이든, 단 하나의 믿음이라도 있기만 하다면, 예를 들어 신념 같은, 삶의 조건에 대해 신뢰하고 있는 단 하나의 끄트머리라도 있다면, 인간은 충분히 생존자가 될 수 있습니다. 자신이 녹슨 톱니바퀴라고 할지언정 계속 작동합니다. 생명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자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자신과 연결된 다른 톱니바퀴, 나사, 볼트 따위에 의미를 부여할 때 그 톱니바퀴의 극단적인 자기파괴 또한 찬란한 절망과 함께 가능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존재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절망의 아가리로 들어가는 첫 발걸음이고, 생명에의 믿음이 없으면 의미 따위는 부여할 수 없기 때문이죠.


 그래서 세 시간 째 여기서 아무것도 기다리지 않고 있는 바, 비非생존자들에게도 자살의 방편 정도는 모색할 수 있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재떨이에 떨어진 담뱃재들이 자신을 흐트러트리고 파괴할 바람을 기다리는 것과 동일한 방편입니다. 아주 길고 느리며, 끔찍이도 수동적이고, 죽음에 대한 기대조차 하지 않는 자살, 그것입니다. 앙드레 지드는 일찍이 <흡족한 마음으로 더 바랄 것 없이 완전하게 절망하여 죽기를 희망한다>고 나타나엘에게 말했습니다. 이 어찌나 아름다운 문장인지요. 그러나 이런 아름다움에 우리는 손을 뻗을 수조차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피는 소리를 지른다>고 썼던 H. 노바크 시절에는 이렇게 죽을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태양에 반항하여 리볼버를 발사할 수 있었던 때라면, 아아, 그러나 지금은.


 껍질 안에 갇힌 것이 아닙니다. 애당초 껍질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심연을 너무 오래 들여다보면 심연 그 자체가 되어버린다는 니체의 말은 철학자의 고상하고 멋 부린 한 구절 따위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예언이고 저주였습니다. 심연은 다름 아닌 이 꿈같은 현실에 수도 없이 깔려있고, 인간본성은 그것을 들여다볼 수밖에 없게 합니다. 그야 알고 싶지 않습니까? 심연이라는 것의 진실을 말입니다. 짐승들은 피할 것입니다. 짐승들은 공포의 본질에 대해 호기심을 느끼지 않습니다. 그저 도망쳐버리지요. 인간은 이상해요. 아무래도 이상합니다. 마치 자멸로의 행로가 미리 설계된 프로그램 같습니다. 감히 말하건데 인간은 생물실격입니다.


 그렇습니다. 심연의 진실은 굉장히 입체적입니다만, 제 본성에 맞는 면을 발견하게 되기 마련이지요. 아마 지금쯤 당신은 저를 허무주의자나 염세주의자 정도로 착각하고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닙니다. 심연 속의 진실의 한 면에서 제가 발견한 것은, 허무나 개개인의 실존조차 압도하는 엄청난 의미였습니다. 그것은 서로 모순되고 공격하는 악의들이 혼재된 괴상망측한 의미들의 덩어리였고, 집합이었고, 그 자체가 하나의 지평이었으며, 또한 영원히 서로를 반사하는 마주본 거울이었습니다. 그것은 꿈도 아니었고 현실도 아니었으며, 그렇다고 꿈이나 현실이 아닌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완벽하게 실재하는 허구였습니다. 우주만물의 평등한 무가치를 가리키는 그것은, 혼돈이었습니다.


 이로써 저의 두서없고 횡설수설하는 이야기를 당신께서 알아차렸으리라 생각합니다. 왜 제가 자신을 비非생존자라는 생소한 단어로 설명했는지, 왜 입을 떼자마자 자살 운운하더니 능동적으로 자살할 수 있는 이들에게 질투했는지 따위를 말입니다.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예, 물론입니다. 앞뒤가 맞을 리가 없는 것입니다. 비단 저 자신뿐만이 아니라…….


 그래서 저는 이것을 계속 피울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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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명

글/시 2019. 7. 12. 16:22 |

비명


미래가 두려운 것이 아니야
미래는 분명 두려워하고 있지
인류는 응고되어가고 있다

단두대 모양의 세상
단두대가 준비된 세상
단두대에 의한 세상
사람이라는 단어는 사어死語다

인류는 19살 이후로 각화증에 시달리며
항암제를 마신다, 변이는 죄악
늙어가는 몸에 숙명이라고 새겨놓고
질식하고 익사해가는 사지四肢

어디까지 굴러가게 될는지?
조정되고, 조각되고, 처분되고
하여 시대정신 끝에 남는 것은
토르소 한 점

실존이 파열하는 소리는 아주 미약한 소음이었다
알아들은 이도 거의 없었다
거의

울부짖는 비명도
군홧발에 터져버리는 핏줄기도
가스실 안의 깨진 손톱도 없었다
그저 희희낙락 스스로의 목을 절단하는
단도를 든 젊은이들

회의, 회의, 회의, 직후 압살
앞서 가던 중늙은이에게서
나사 하나가 떨어졌다
주워주니 고맙게 받는다

지금 내 늑골을 갈라보면
아직은 선혈이 흐른다는 것에 감사
나는 존재한다, 고로 반역한다
단도 끝의 나의 적: 그것의 이름은 때때로 我다
방심하면 그것에게 압살당한다

나타나엘의 스승에게 청하노니, 부디 영원한 치기를!
반역을, 반란을, 목적 없는 반달리즘을
왜냐하면 인류는 응고되어가고 있기에
차라리 단단한 쇠망치를: 그 토르소를 산산조각내면

조각조각에서 머리와 사지가 슬금슬금 뻗어 나오리라고
시체뿐인 땅위에서 소원한다.

Posted by Lim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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