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관화

글/시 2019. 5. 11. 23:39 |

객관화


거울을 보며 식사를 한다
카페인 중독으로 요동치는 신경을 억누르려
맛도 모르고 오로지 음식을 입에 우겨넣는
그 장면은 몹시도 그로테스크하다
이것은 식사라 할 수 없다
저 수염 난 괴인은 자살을 꾀하고 있다
음식을 나르는 숟가락은 히스테릭하게 움직인다
치아가 제 역할을 다 하기도 전에
목구멍은 자학적으로 음식더미를 삼킨다
거울에서 보이는 눈은
과거에는 구원을 구하는 빛이었다.

다음 페이지는 거식拒食을 준비하고 있다
몸의 감금에서 벗어나 영령이 되는 길은
아사뿐이라는 거짓을 믿으려하고 있다.

Posted by Lim_
:

분노의 끝

글/시 2019. 5. 11. 17:49 |

분노의 끝


매일 아침 내가 얼마나 끔찍한 인간인지를 깨달아 웃으며 잠에서 깬다.

어제도 항공기가 추락했다
난민들은 스스로 피해자인지 가해자인지 헛갈려하며
가게에 벽돌을 던진다
러시아의 동성애 인권운동가가 지나가던
공수부대원들에게 두들겨 맞는 것을 보고 웃었다
국가들은 텅 빈 지하자원과 함께 붕괴해간다
두 살 먹은 아이를 먹여 살리려 몸을 파는
타국에서 온 매춘부를 보고 지갑을 더듬어보았다
새 시대의 언론이 부르짖는 시대정신에
네오아나키즘이라는 단어를 붙여보고 눈을 돌렸다
세계는 아이러니 위에 지어졌고
아이러니의 다른 이름은 농담이다

매일 밤 고성과 접시 깨지는 소리를 만들어내는 옆집 부부에게
어린 아이가 있을까 생각해보고 웃었다

새벽마다 담배를 피우며 골목을 방황하는 저 반지하의 남자는
아마 예술가였던 과거가 있지 않을까

살 곳을 잃어가는 북극곰을 도와주세요, 라니
거리에 넘쳐나는 노숙자에 대해서는 인본주의가 적용되지 않는가
나는 이미 티브이와 뉴스를 끊고 외출마저 끊을 예정이다

우물에 독을 풀어라, 내 이름은 인간이다.

Posted by Lim_
:

제 1 정리

글/시 2019. 5. 9. 19:18 |

제 1 정리


담배 술 마약 할 수 있는 건 전부 했다
시간에게서 도망치려고 매듭도 묶었다
누구에게도 주지 않을 결심으로 체내의 피를 전부 꺼냈다
폐는 썩었고 간은 문드러졌고 심장은 텅 비었다
맹장 한 조각도 인류를 위해서는 쓰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각막은 계단참에서 쓰러졌다
인간은 보이지 않는다, 수치와 통계 너머의 잔혹함만 보인다
이것이 21세기의 그노시즘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신이 되는 방법은 없다, 애당초 신이 없다
여러 번에 걸쳐 게르만족에게 맞아죽었다
<신은 죽었다. 이제 우리에게는 초인이 필요하다>
그러나 초인과 감정 없는 정신병질자의 차이를 모르겠다
애당초 그 차이를 감각할 수 있다면 아직 인간이다
사팔뜨기 철학자를 비웃으며 세계를 분해했다
꿈속에서 느끼는 사랑은 꿈결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꿈에는 논리가 없다, 논리가 해체되면 웃음만 남는다
더러운 옥상에 서서 도시를 내려다보기도 했다
이 우주에 높이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찾았다. 이게 우울증 환자가 되지 않는 방법이다
이것은 거대한 하수 시스템이다
추락하고 역류하고 흐르고 다시 사용된다
인류애라는 단어를 입술에 달고 사는 이들에겐 주머니칼을 흔들어보였다
하수구에 사는 쥐들에게도 사회와 유대가 있다
영장류들은 머리가 좋을수록 잔혹한 행위를 저지른다
혼돈은 혼돈으로밖에 정의되지 않는다
그래도 감각을 사랑하려고 했다, 육신에서 잘라낸 영혼은 필요없다
순간을 송두리째 느끼려고 했다, 필멸하는 존재에게 유일하게 허락된 것이다
그래서 스스로를 실존주의자라고 소개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그것도 거짓말이다
타락 모순 퇴폐 악의 증오 원한 자멸 불신
이 퍼즐들은 자기소개의 액자에 도무지 들어맞지 않는다
다시 돌아온다, 바텀라인bottom line은 또 혼돈이다
그렇다면 골라라, 무관심하거나 혼돈을 가중해라

당신이 성모상에게 꽃을 바치는 와중에도
이 행성에서 사람들은 짚이 쓰러지듯 죽어간다.

Posted by Lim_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