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날은 죽어가고
오늘도 참으로 아무 일 없었습니다
오후 5시 초겨울 하늘은
흰색 푸른색으로 바싹 굳었고
단지 안의 사람들은
어미가 새끼 손을 잡고 가는데
단풍이 지려나보다, 누가 말했는데
그 말에 처음 나뭇잎을 보고
정말로 그렇구나, 납득하고는
인간들도 단풍이 들지는 않으려나
평상에 앉아 마시는 커피는
맛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고
습관처럼 졸린 눈으로 담배를 물며
늙은 개가 묶여 지나가는 것을 보고
오후 7시, 어둠이 내리면 바깥세상에는
그림자처럼 괴물이 살아
얘야 어서 들어가자꾸나
또 졸린 눈으로 그런 광경을 보고, 암, 그렇지
별도 꽃도 없는 저녁 무렵에는
단풍이 시커멓게 몸부림칩니다
평상에 들러붙은 먹물 같은 나는
이젠 거리에 어미도 새끼도 없구나
담뱃불은 암막에 부유하는 나룻배 같고
구름 낀 천정 밑에는
여기엔 희망도 꿈도 없어, 미래는 니코틴처럼 소화되고
바람은 후우우 루우우 울기만 할 뿐
죽음을 기다리나? 굳이 그렇지도 않겠지
단지 어디선가 밥하는 소리는 들려오고
따뜻한 정종 한 잔 마시고 싶긴 하나―굳이 그럴 일도 없지
후우우 루우우 울며 나날은 죽어갈 뿐
오늘도 참으로 아무 일 없었습니다
애가
내륙의 밤에 모두가 잠드는 시간에
차가운 콘크리트 위에 콘크리트만큼 차가운
내가 평생 바라기를 마지않던 육신이
거기에 누워있다면
해부학적으로 완벽한 인형은 누구든 될 수 있다
뇌파가 끊기고 전기신호가 끊기고
우연이 만든 가장 적절한 시간에
당신을 누구보다 사랑할 내가 거기에 있기만 하다면
별빛이 비추는 암청색 거리에
인형 하나가 버려져 있다
별빛이 비추는 암청색 거리에
별빛만큼 조용한 인형이 있다
분명 어떤 어린아이가 흘리고 간 것이겠지
그러나 왜 흘렸는지는 모른다
단백질, 칼슘, 지방, 그런 것들은
무기물보다 달빛에 더 빛나는 성질이 있다
철분, 초산, 스테인리스스틸, 그런 것들은
달 속에 녹아들어 현상을 더 아름답게 한다
인간은 밤에 태어났음이 틀림없다
본성은 평화롭고 광막한 것이다, 마치
당신이 눈을 감는 시간에 어둠이 내리듯이
영령은 떠났다. 그러나 영령이 떠나도
아름다움은 공중으로 흩어지지 않는다
생각보다 미학이라는 것은
그로테스크에 머물기를 좋아한다
지구가 하나의 묘지라면
거기 묻힌 뼈들의 웅장함을 우리가 볼 수 있다면
우리는 굳이 환경주의자들이 필요하지 않을 텐데
해부학적으로 완벽한 인형을
우리는 뭐라고 불러야 좋을까
그 칼슘이 만드는 요철이나
날붙이 끝에 벗겨지는 콜라겐에 대하여
그 침묵하는 아름다움에 대하여
굳이 뭐라 부르든 상관은 없을 것이다
이제 알았다, 난 인본주의자였다
영혼이나 정신이라는 개념은 처음부터 필요하지 않았다
인간은 인간에게 에로스가 절제된 사랑을
그러나 아가페라는 성역으로 갈 이유도 없는 사랑을 할 뿐이다
온갖 파토스를 통하여
결백하지 못한 슬픔에
글/시 2019. 10. 30. 01:32 |결백하지 못한 슬픔에
맥주에서 짠맛이 났다
없는 돈을 긁어모아 간 맥주집에서
시킨 가장 싼 맥주는
짜디짠 소금 맛이 났다
왜 짠맛이 나나
홍콩 시민들이
최루탄과 진압봉에 맞고 있어서 그런가
아프리카에서
눈도 못 뜨는 아이들이 굶어죽고 있어서 그런가
위안부 할머니들이
일본 정부에게 매춘부 취급을 받고 있어서 그런가
아니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맥주를 사서 마시고 있어서인가
짜디짠 소금 맛이 나는 맥주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한 방울까지 먹어치우고선
짜디짠 마음으로
거리에 나섰다
아무도 없는 거리에 빨간 불은 서글프게 빛나고
나는 그것을 담아
내 안에 빨갛게 옮겨 붙이고
아무도 없는 거리에서
미국 남부에서 만든 블루칼라들의 담배는
단맛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