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꽃
아파트 화단에 붉은 꽃이 피었다. 내가 사는 아파트가 아니다. 가깝고 재떨이가 있어서 자주 오는 것뿐이다. 누군가 낡은 접이의자를 가져다놓은 것이 좋다. 요새는 아무것도 안하고 그냥 서있어도 다리가 무너질 것 같다. 아무튼 무슨 꽃인지는 몰라도 아주 새빨갛게 피었다. 해가 넘어갈 무렵이라 사방에 그늘이 졌는데도 꽃은 이질적으로 붉었다. 접이의자에 앉아 느릿느릿 담배를 피우면서, 이렇다 할 의식도 없이 꽃을 보고 있었다. 무슨 연관이 지어졌는지 역사상 유명한 화가들에 대한 생각을 했다. 어쩌면 그들의 시신경은 돌연변이적인 것이 아닐까? 나는 이 꽃을 보고 있어봤자 밤에 핀 붉은 꽃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이것이 딱히 아름답다거나, 미학적으로 가치가 있다거나, 하여간에 무슨 정신적 유희거리라도 되리라는 생각은 전혀 없다. 비단 꽃뿐만이 아니라 세상에 여기저기 뿌려져있는 오브젝트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화가들은 무엇을 보는 걸까? 그들이 그린 그림들에 대해서, 화가들은 아마도 무언가의 아름다움을 발견했기 때문에 그것을 굳이 캔버스에 옮겨놓는 것이라고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나에게 있어서 이런 행위는 뭐라고나 할까, 정신적이거나 심미안과 관련된 그런 게 아니고, 그냥 그들의 시신경이 남들과는 다른, 난폭하게 말하자면 기형적인 방향으로 형성되어서 보편적으로 보일 리가 없는 화상을 보고 그림을 그리는 게 아닌가 싶은 것이다.
나는 해바라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좋아하는 것도 싫어하는 것도 아니고, 만약 길거리에 피어있다면 아, 멀대같은 꽃이군, 그런 감상을 하고 그냥 지나쳐버릴 정도의 물건으로 밖에 생각하지 않았다. 4년 전인가 경상남도에 머물 때, 밤에 차를 끓이다가 끓는 물을 오른쪽 발등에 쏟아버린 일이 있었다. 흔히들 입는 화상 정도가 아니라 오른발이 삶은 고기가 되어버렸다. 기절할 정도의 통증이 지속됐지만 나는 즉시 병원에 가지 않았다. 일단 나에게는 자가용은커녕 운전면허도 없었고, 병원에 가려면 같이 사는 노부인을 깨워야했다. 그러나 그녀는 이미 잠에 들어있을 시간이었고, 잠든 노부인을 깨우는 건 민폐라고 생각해 미련하게 끙끙 앓으며 밤을 새웠다. 아침이 돼서야 병원에 갔고, 노부인은 왜 깨우지 않았냐고 타박하고, 심지어 그때 나는 병원비도 없었기 때문에 그녀가 치료비를 전부 내주었다. 한 달 정도 일주일에 한 번씩 노부인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통원치료를 했다. 그녀가 모든 치료비와 약값을 내주었다. 그때부터 그녀와 대화하게 되면 어쩐지 의기소침하게 되었던 것 같다. 지금도 오른발은 흉터가 흉측하고 만지면 감각이 없다.
1년 전에 나는 이미 서울로 돌아와 있었다. 노부인에게서 소포가 왔는데 한 상자 가득한 책들이었다. 책장 정리를 하다 보니 내가 좋아할만한 책들이 보여 선물로 보낸다는 노부인의 카드가 함께 들어있었다. 그 중에는 빈센트 반 고흐의 화집도 있었다. 언제 어디서 구매한 건지 텍스트가 전부 영어로 되어있는, 영국이나 미국의 출판사에서 낸 화집이었다. 해바라기 그림이 아름다웠다. 꽃 주제에 비현실성과 괴물성을 표현하며 비극적인 아름다움을 갖고 있었다. 즉시 나는 현실의 해바라기도 좋아하게 되었다. 해바라기를 볼 때마다 이미 죽은 반 고흐의 시각소자를 빌려와 꽃을 보는 것 같았다.
그들의 시각은 분명히 이상하다. 이상하다고 할 정도는 아닐지 몰라도, 적어도 나와는 전혀 닮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반 고흐가 황시증과 이비인후과적 질환을 앓았다는 얘기를 어디서 본 것 같기도 하고……. 여하간 나는 꽁초를 쥔 채 이름 모를 붉은 꽃을 보면서, 누군가는 이 물체를 보고 아름답다고 여기겠지, 내가 그렇게 여기지 못한다는 것이 유감일 것도 없지만 유감으로 느껴졌다.
그렇게 앉은 채로 죽은 인간마냥 담배를 피우고 있는데 아파트 건물에서 30대 쯤 되어 보이는 남자가 나왔다. 큰 소리로 통화를 하기 시작했다. 맥락을 들어보니 자신의 어린 조카와 통화를 하는 것 같았다. 목소리만 들어도 그가 자신의 조카를 티 없이 맑은 마음으로, 커다랗게 사랑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미지근한 봄바람과 남자의 생기 넘치는 목소리가 날 우울하게 만들었다. 담배는 이미 다 탔다. 빈맥이 있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납덩이를 삼킨 듯한 마음으로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다.
눈물의 효용성과, 이상한 이야기
기록/생각 2020. 5. 1. 10:05 |눈물의 효용성과, 이상한 이야기
아주 뻔한 일본 애정극이었습니다. 스토리는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누가 누구를 흠모하고, 누가 누구를 흠모하는지 흠모하지 않는지 당황해하고, 사랑하거나 배신하고……. 이런 식이니 뭐가 기억날 것도 없습니다. 다만 아름다운 여주인공의 머리칼이 거의 무슨 사상표현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짧았고, 그녀 역시 누군가를 흠모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함께 놀던 쾌활한 남자였습니다. 그러나 그 남자는 여주인공의 친구에게 마음이 있었습니다. 자, 어떻게 봐도 뻔한 구도에 치정극으로 분량을 늘릴 속셈마저 은근히 엿보입니다만, 어쩐지 특정 장면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는 것입니다.
머리가 짧은 여주인공은 다리 위에서 남자에게 자기 마음을 고백합니다. 물론 남자는 부정합니다. 그야 이미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니까요. 남자는 사죄를 하고 다리를 떠납니다. 떠나고 나서야 여주인공은 울기 시작합니다. 왜 우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하여간에 울고, 울고, 사정을 알아챈 친구가 데리러 올 때까지 웁니다. 친구가 집까지 데려다주는 와중에도 웁니다. 자기 침대 위에 쓰러져서도 계속 눈물을 흘립니다. 흑흑, 거리면서 도무지 멈출 생각을 않습니다.
작품이야 어찌 되었든 간에 이 장면이 인상에 남습니다. 아, 나도 저렇게 운다면 기분이 좀 나아지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예전에 어딘가에서 읽은 바로는 울면 눈물을 통해서 스트레스 성분이 배출된다고 합니다. 과학적인 근거가 있는 것인지 그냥 미신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자세히 조사해보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인간이 몸 안에서 뭔가를 뱉어내는 경우는 죄다 더 이상 몸에서 쓰일 일이 없는 폐기물들을 배출하는 것이니까, 눈물도 그렇지 않을까 하고 막연하게 납득했던 것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누군가에게 애정을 가지고,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슬퍼하며 눈물 흘릴 수 있는 것일까요. 저도 나름대로 일생일대의 사랑이라는 것을 해보기는 했습니다만, 일이 어긋났을 때 저에게는 ‘슬프니까 운다’는 발상이 전혀 없었습니다. 제가 한 일이라고는 산에서 가장 높은 절벽에 기어 올라가서, 떨어지면 곤죽이 되어 죽을 것이 분명한 높이를 내려다보며, 떨어진다, 떨어진다, 떨어지면 슬픔도 고통도 이 복잡한 상황도 전부 무(無)가 된다, 하며 자살놀이나 하던 것이 전부입니다. 등 뒤에 신라시대에 새겨진 것으로 추정되는 지장보살이 한심하게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제 얘기는 그렇다 치고.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스트레스가 가면 갈수록 심화된다고 하는데, 눈물이 스트레스 성분을 배출하는 게 사실이라면, 자주 우는 사람이 더 건강하지 않을까요. 무슨 이상한 감성주의나 자기비관 같은 건 다 집어치우고, 어떤 울게 만드는 약 같은 거라도 처방해서, 주기적으로 눈물을 흘리면 그것이야말로 신세대의 링거 주사 같은 게 아닐까 싶습니다. 아마 스트레스 성분이 배출된다는 건 머릿속의 망념들을 좀 정리 정돈할 여유도 생긴다는 것이겠지요. 오거나이징(Organizing). 이 영단어는 의미도 의미지만 발음이 재미있어서 좋아하는 단어기도 합니다.
이야기의 발단이 된 애정극 말입니다만, 끝까지 보고 나니 저 같은 사람이 소비하라고 만든 게 아니었습니다. 실연의 슬픔에 빠져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는 여주인공을, 그녀의 친구가, 그러니까 그 쾌활한 남자가 흠모하는 여자가 말입니다, 겁간합니다. 아니, 여주인공이 저항하는 묘사가 없었으니 겁간이라는 단어는 좀 이상하군요. 수동적 쌍방합의 하의 성관계라고 할까요. 단어가 길어지는군요. 뭐야 이거,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당황하고 있는 사이에 극이 끝났습니다. 그러고 보니 프랑스 영화에도 이런 맥락을 파악할 수 없는 동성 간의 섹스 장면이 낭만주의적 필터를 친 채 자주 나오기도 하지요. 이상한 이야기였네요.
가족
밖에 나가는 것이 두렵다.
행인들이 있기 때문이다.
방안에서 담배를 피우고 싶다.
그러나 여긴 내 집이 아니다.
어머니가 쓰러졌다.
병원에 입원해있다.
늑골이 참을 수 없이 아프다. 그러나 별 도리가 없다. 늑골인지 가슴인지는 14살 때부터 끊임없이 아파왔다. 흉부외과에서는 아무런 이상도 발견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들은 날 신경정신과로 보냈다. 성모병원 신경정신과의 여의사는 내게 엄청난 양의 약을 줬다.
새벽에 거실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 나가봤다. 어머니가 거실바닥에 쓰러진 채로 구토를 하고 있었다. 일으켜 세워 변기까지 옮겨놓았다. 열 번인가 구토를 했다. 몸을 움직일 힘도 없는 듯 변기를 얼싸안고 있었다. 한참동안 어머니의 등을 쓰다듬었다. 내가 상황에 적합하지 않은 얼굴표정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깐 방으로 가서 의사가 긴급용으로 준 신경안정제를 꺼내먹었다. 15분 정도면 내 얼굴표정에 강박을 가지기보다는 어머니를 걱정하게 되겠지.
어머니를 거의 짊어 매다시피 해 이불에 뉘였다. 어두운 방 안에 누워 환자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마 나도 환자의 얼굴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어머니가 누워서 불규칙한 호흡을 하는 동안 그녀의 손을 잡고 있었다. 창밖에서 비치는 빛에 어머니의 얼굴 어딘가가 반짝거렸다. 자세히 보니 눈물이었다. 아무 절망도 슬픔도 없이 오랫동안 어머니의 손을 잡고 있었다.
아침에 아버지가 출근하는 길에 어머니를 부축하고 병원으로 갔다.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거의 아버지한테 온몸을 맡기고 있는 어머니를 보았다. 이제 좀 자야겠다고 생각해서 수면제를 먹고 잠에 들었다.
어머니가 큰 병원으로 옮겨지는 동안 나는 수면제에 취해 아버지 전화도 받지 못했다.
“너 얼굴이 누렇게 떴어. 죽으려는 듯이…….” 일주일 전인가 어머니가 내게 한 말이다. 원인을 알 수 없는 위장병 때문에 두 달 정도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않았다. 하루에 먹는 식사라는 것이 밥 한 숟가락 정도였다. 엄청난 속도로 살이 빠졌다. 어느 날 아버지는 술기운에 화를 냈다. 굶어죽을 셈이냐고. 가만히 앉아 꾸지람을 들었다. 그러나 어떤 음식이든 입안에 넣으면 불쾌한 이물질처럼 느껴지는 것이 내 잘못은 아니다. 잘못? 아, 잘못이라. 다시 생각해보면 분명 내 잘못이겠지. 심신이 건강하지 못하다는 것은 죄악이다. 자신의 몸이고 정신이고 최악의 결과에 도달하리라는 것을 짐작하면서도, 그저 흘러가고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두는 것은 죄악이다. 스스로의 존재를 책임지지 않는 일은 온 사회로부터 지탄받을 끔찍한 죄악이다.
새벽에 화장실에서 거울을 보았다. 어릴 때는 총명하게 잘 생겼다는 얘기를 수도 없이 들었다. 지금은 그 얼굴이 광대뼈 밑에 깊은 그늘이 파였고, 눈두덩은 미치광이처럼 툭 튀어나와있다. 추악한 얼굴이라고 생각한다. ‘추악’에 惡이라는 한자가 들어가는 걸 생각해보면 과연 그렇다. 거울에 대고 조소할 용기도 없다.
가족.
이보다 더 비극적인 명사가 따로 있을까. 계속 사랑하며 계속 배신한다. 의지로 그러는 것도 아니고, 그냥 그렇게 설계된 인간군집이다. 당신을 사랑하지만 당신을 증오하고, 당신이 사라졌으면 좋겠지만 정말 사라진다면 견딜 수가 없다.
다섯 알의 노란 정제가
거품처럼 식도를 타고 내려간다.
이제 나는 분노하거나 원망하는 방법을 잊어버려
당신을 바보처럼 행복한 눈으로 바라보기도 한다.
불행한 눈동자를 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설령 초면이더라도 함께 죽으러 가지 않겠냐고 묻고 싶어 견딜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