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골카페 가는 길
5월입니다. 완연한 봄입니다. 가끔씩 내리는 봄비 때문에 느닷없이 추워지기도 합니다만, 봄이 확실합니다. 어떤 날들은 이미 여름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엊그제는 끔찍한 것을 보았습니다. 단골카페에 가기 위해 아파트 단지 안을 걷고 있었습니다. 오후 3시쯤 이려나요. 따뜻한 날씨였습니다만 체질적으로 피부를 드러내는 걸 불쾌하게 여기는 성격 때문에 반팔 티 위에 아버지의 긴팔 후드를 걸치고 있었습니다. 아파트 단지 구석 뒤편에 단골카페가 있었기 때문에 걷는 도로는 음지였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톤이 높다고도 낮다고도 할 수 없고, 어떤 기괴한 구절이 반복되면서, 사람이 내는 소리인지 가스통에서 가스가 새는 소리인지도 구별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호기심에 소리의 발원지로 고개를 향하니 100미터 쯤 앞에 사람 세 명이 모여 있었습니다. 남자 한 명과 여자 둘로 보였습니다. 멀리서는 여자 둘이라고 확신하기 힘들었던 것이, 남자와 여자 한 명은 서있는데 나머지 한 명은 시멘트 바닥에 거의 엎어질 듯이 웅크리고 앉아 몸을 흔들고 있었습니다. 괴상한 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그 사람이었습니다. 어차피 그 길로 가야 카페가 나오기 때문에 제가 가까이 다가가는 것은 필연적이었습니다. 얼굴을 못 봐서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만 머리가 길고 풍채가 커다란 여자인 것 같았습니다. 기이한 톤으로 반복되는 구절의 정체는 ‘어떡해, 어떡해.’하며 완전히 상심한 채 절규하는 소리였습니다. 장례식에서의 유난스런 곡소리와 비슷한 것 같기도 했습니다.
그 여자는 신경질적으로 몸을 앞뒤로 흔들면서 뭔가를 끌어안고 있었습니다. 뭔가 하얗고 붉은 것이었습니다. 시멘트 바닥에는 새빨간 액체가 흥건했고 그것이 경사를 따라 10m 가량 제 쪽으로 흐르고 있었습니다. 남자는 들고 있던 커다란 쇼핑백에서 내용물을 전부 꺼내더니, 텅 빈 백을 웅크린 여자한테 내밀면서 ‘어서 담아!’라고 고함지르고 있었습니다. 그 옆에 서있는 여자는 한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움직이지도 말하지도 않고 있었습니다. 웅크린 여자는 남자의 말을 무시하는 것인지 전혀 듣지도 못한 것인지 똑같은 반복행동만 하고 있었고, 마침내 저는 충분히 가까워져 그녀가 안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피투성이 정도가 아니라 피 웅덩이에 한번 담갔다 꺼낸 것처럼 피범벅인 흰색 개였습니다. 마침 개의 얼굴이 보였는데 눈은 감고 있고, 전혀 움직이지 않고 있었습니다. 남자는 다시 한 번 백을 들이밀면서 ‘빨리 담아! 동물병원에는 가야지!’하며 어쩐지 분노가 섞인 목소리로 고함을 쳤습니다. 소리 지르는 내용을 들어보니 제가 그들을 발견하기 직전에, 어이없게도 그들은 119에 전화를 걸었던 모양입니다. 소방서에서는 와주지 않는다는 둥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카페에 가기 위해 그 길을 걷는 내내 제 발걸음 속도는 일정했고, 피범벅인 개의 얼굴을 봤을 때도 딱히 느려지거나 하지는 않았습니다. 아, 무슨 사고인지는 몰라도 끔찍한 일이군,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기도 합니다. 당연하게도 저는 결국 그들을 지나쳤고, 그때까지도 웅크린 여자는 기괴한 절규와 반복행동을 하면서 남자의 합리적인 요구를 완전히 무시하고 있었습니다. 조금 더 걸어 저는 카페에 도착했습니다.
늘 그렇듯이 카페에는 손님이 저밖에 없었고, 사장님은 우리가 ‘공장’이라고 부르는, 유리벽으로 나눠진 가게 안쪽 공간에서 로스팅을 하고 있었습니다. 원두를 로스팅할 때 나는 소리가 꽤 크기 때문에 문을 열고 들어가도 사장님은 대체로 누군가 왔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합니다. 제가 ‘공장’구역으로 들어가는 열린 문을 두드려야 그는 돌아보면서 인사를 해줍니다.
저는 ‘카페 구역’에 앉아서 로스팅이 일단락 될 때까지 잠시 멍하니 있습니다. 그 가게에 가면 사장님과 저는 커피를 마시면서 꽤 길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곤 합니다. 가벼운 신변잡기일 때도 있고, 가끔은 신기할 만큼 잣대 없는 마음으로 신이나 우주나 부처에 대한 얘기를 나누기도 합니다. 저는 별 생각 없이 방금 보고 온 피투성이의 이상한 장면에 대해 얘기하려고 하다가 그만 뒀습니다. 사장님이 애견가이고 오래전부터 키우던 두 마리의 개 중 한 마리가 최근에 노환으로 죽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글쎄, 잘 모르겠습니다만, 평범하게 생각하면 아마 그 사실 때문에 말을 않은 것이겠지요. 저는 커피를 마시고 이런저런 대화를 하다가 해가 기울 때 쯤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것이 엊그제의 일입니다.
어제도 카페에 갔습니다. 전날의 일은 깡그리 잊어버리고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같은 길을 걸었습니다. 걷다가 길바닥에 뭔가 있어서 보니, 커다란 피 웅덩이가 하루 만에 햇볕과 달빛에 말라 검붉은 핏자국이 되어있었습니다. 잠깐 멈춰 서서 그걸 들여다보았습니다. 그 세 명과 한 마리는 어떻게 되었을까? 어떡해, 어떡해를 연발하던 여자는 만족할 만큼 절규를 하다가 결국 빈 백에 개를 넣었을까? 무슨 관계인지도 알 수 없는 그 세 명의 사람들은 오늘 각각 무슨 감정을 느끼고 있을까? 잠시 그런 생각을 하다가, 사실 나와는 아무 상관없는 일이다, 그렇게 새삼스럽게 깨닫고, 결국 또 커피를 마시러 갑니다.
오늘도 카페에 갔으나 사장님이 로스팅이니 원두 배달이니 몹시 바빴습니다. 그가 혼자서 ‘공장 구역’과 ‘카페 구역’을 동시에 담당하기가 힘들 때가 있다는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인사하고, 쌓여있던 생두 가마니가 꽤 줄었네요, 이런 별 의미 없는 말마디를 던지고, 다음에 오겠다고 고생하시라며 가게를 나옵니다. 이럴 때마다 사장님은 제게 미안해하시는데, 사실은 그가 미안해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가게 앞 평상에서 담배 한 대 태우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생각해보니 핏자국에 대한 것은 이 글을 쓰기 직전까지 오늘도 깡그리 잊고 있었네요. 누군가가 물청소라도 하지 않았을까요.
날씨가 본격적으로 더워지면 하는 수 없이 반팔을 입어야할 텐데, 조금 두려운 계절입니다.
20200504
면도라도 합시다. 평이하지 못한 모습으로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것은 충분히 피해망상을 자극할 수 있습니다. 외출이라고 해봤자 새벽에 담배 피우러 집 앞에 나가는 것이 전부기는 하지만, 야밤에도 행인은 있습니다. 츄리닝에 쓰레빠 끌고 아버지 재킷 입은 채로 담배를 피우다 보면 가끔 사람들이 지나가기도 합니다. 어째서인지 대부분 젊은 커플입니다. 저는 본능적으로 숨습니다. 아니, 정확히는 말이죠, 머릿속으로 ‘나는 숨어있다’고 생각하면서 실제로는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습니다. 마치 행인들의 그늘진 얼굴이나 눈동자를 쳐다보지 않고, 지저분한 시멘트 바닥이나 쳐다보면 그들이 나를 발견하지 못할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고 보니 일주일 전인가, 밤을 새버려서 하늘이 밝아오는 오전 6시쯤에 여느 때와 같은 자리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옆 건물 4층의 창문이 열리더니, 아무래도 만취한 것 같은, 런닝차림의 남자가 이상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음정이고 박자고 가사고 도저히 정체를 파악할 수 없는, 노래인지, 아니면 아침이 밝았으니 소음공해로 같은 동네의 모든 사람들을 깨우고자 하는 건지, 그런 괴상한 소리를 내고 있었습니다. 이 남자가 왜 오전6시부터 술에 꼴아있는 건지, 그건 모르겠고…… 사실 생각해보면 여러 가지 추측도 가능하겠지요. 아무튼 이 남자는 한동안 괴성을 내더니 갑자기 이렇게 중얼거리는 것이었습니다. 아이 씨, 담배냄새 나잖아. 그 순간 4층의 창문을 올려다보고 있던 저와 그는 눈이 마주쳤습니다. 아저씨, 거기서 담배 피우지 마세요. 어지간히 혀가 꼬인 말마디였습니다. 평소 같으면 그런 술 취한 명령조의 말투에 짜증이 날 법도 했습니다만, 당시에는 의사가 제 분노장애를 치료하려고 리튬을 하루에 4g씩이나 처방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아무 대답도 없이 조금 위치를 옮겨 내뿜은 연기가 건물 쪽으로 향하지 않도록 했습니다. 위치를 옮기는 도중에도 남자는, 죄송합니다, 감사합니다, 죄송합니다, 감사합니다, 마치 스스로 그렇게 말하는 게 재밌기라도 한 듯, 완전히 조증환자처럼 굴면서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었습니다. 시발, 좀 닥쳐. 입에 담배를 문 채로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게 중얼거렸습니다.
우울증이 점점 심해져서 상담치료가 필요하다. 그러나 상담치료를 감당할 경제적 여유가 없어서, 아무나 붙잡히는 대로 내 증상을 호소했다. 주변에서 사람이 사라졌다.
요새 영 정서상태가 극악해서 그런지 떨쳐내려고 해도 뇌를 움켜쥐고 있는 생각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자살에 대한 생각입니다. 처음에야 그냥 어떻게 죽는 것이 간단하고 또한 미니멀리즘하려나 그런 생각이나 하고 있었는데, 생각이란 것이 다 그렇듯 고민의 영역이 점점 넓어지는 것이었습니다. 몇 시간씩 이불 위에서 움직이지도 않고 천장이나 쳐다보다가 한 생각이라 그다지 명료한 사고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만, 어떤 발상이 들었습니다. 아무래도 자살은 차선책이다. 최선책은 70억 인구를 전부 죽이는 것이다. 지구 위에 혼자 앉아있으면, 딱히 죽지 않아도 모두에게서 완전히 망각된 존재가 될 수 있다. 가치판단도 기준도 완전히 붕괴하여, 행복도 없고 괴로움도 없다. 분명히 존재하지만 전혀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최선책은 물리적으로 거의 불가능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아픔과 출혈과 중독으로 차선책을 선택해서, 차라리 이쪽에서 모두를 망각하는 것입니다. 유심론과 유물론이 마치 계면활성제를 탄 물과 기름처럼 혼탁하게 섞여있네요.
아아, 인간의 책임이라니. 요즈음은 틈만 나면 맥을 짚듯이 목에서 경동맥을 찾곤 합니다. 만약에 고등학교에 진학했더라면 해부학 수업 비슷한 거라도 듣지 않았을까. 아니, 딱히 경동맥의 위치를 외과의사처럼 명확하게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당장 끊어버릴 생각도 없습니다만…….
돌이켜보면 그렇습니다. 죽을 만큼 비참하다고 해도, 침울한 상태에서는 아무래도 제가 주변사람들에게 진 빚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런 문장을 수첩에 적는 것입니다. 가장 무서운 것은 아침에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잠에서 깨어났을 때, 침대에서 내 시체를 발견하는 것이다. 그것도 그냥 곱게 죽은 시체가 아니라, 경동맥이 끊겨있고 한 손에는 날붙이가 들린 시체 말이다. 그들에게 도저히 그런 짓은 할 수 없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뭔가에 대해 마구 화가 나고 아드레날린이 분비 되었을 때, 에이, 빚이니 뭐니 무슨 상관이야, 죽어버릴 테다, 살아도 이미 충분히 죄인이란 말이다. 이러면서 자포자기하기도 합니다.
자낙스를 세 알정도 먹으면 세계의 윤곽이 조금 더 단단해진다는 것을 아시나요. 아주 진절머리가 납니다.
「족발에 인생을 걸었습니다.」
기록/생각 2020. 5. 3. 23:58 |「족발에 인생을 걸었습니다.」
「족발에 인생을 걸었습니다.」 축하합니다. 당신이 그 인생이라는 걸 돼지 앞다리에 걸었는지 뒷다리에 걸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여하간 축하합니다. 요식업 종사자가 그런 문구를 자기 가게에 걸어놓을 수 있다는 건 커다란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체질적으로랄까, 선험적으로랄까 그런 발언을 당당하게 할 수 있는 것 자체가 부럽기만 합니다. 아무래도 저는 그런 열정적인 느낌을 주는 문장을 만드는 방법을 잊어버린 것 같습니다. 인생, 인생을 걸다. 아마도 자신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의미를 그것에 부여했다는 뜻이겠네요.
족발이 됐든 백신 연구가 됐든, 자신의 인생을 무언가에 거는 사람들은 존경스럽고 사랑스럽고 더없이 무섭습니다. 어떤 대상에 열성적이고 열정적일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렇습니다. 그런 마음가짐은 저에게 있어 사람들이 말하는 천사의 아름다움 같은 것입니다. 단 한 번도 천사를 만나본 일이 없고, 다른 사람들도 대체로 그럴 것입니다만, 모두가 천사는 아름답다고 말하니 분명 천사는 아름다울 것입니다. 정확히는 아름다워야만 합니다. 그러한 본적도 소유해본적도 없지만 반드시 아름답다고 정해져있는 것에 대하여, 반복합니다만, 그것은 존경스럽고 사랑스럽고 더없이 무섭습니다. 경외라고 할까요. 비유를 위해 하느님이 정말로 존재한다고 가정합시다. 구약신경에 대해서는 그냥 잊어버립시다. 지금 하려는 얘기에 구약신경은 정말이지 도움도 되지 않고, 차라리 방해입니다. 아무튼 그런 완벽하고 아름답고 전지전능하고 초월적이며 상냥하면서도 우리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하는 존재가, 뜬금없이 길거리에 서있는 것입니다. 그럼 당신은 그에게 스스럼없이 말을 걸 수 있을까요. 단언컨대 불가능합니다. 그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황홀경에 빠지고 감당할 수 없는 사랑과 존경이 북받치는데, 그의 완벽함과 초월적인 아름다움 때문에, 당신은 자신의 초라한 존재가 마치 하수구에 사는 해충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하느님이 모든 인간을 무조건적으로 사랑한다고 해도, 그건 별로 중요한 정보도 되지 않습니다. 그의 신령한 옷깃에 인간의 때가 묻을까봐 손을 내밀 수도 없고, 온갖 지저분한 용도로 사용했던 입을 이용해 그에게 말을 걸 수도 없습니다. 자신의 불쾌한 육신의 부품 중 하나인 눈동자로 그를 바라보는 일조차 신성모독으로 느껴질 것입니다. 당신은 무지막지한 공포를 느낄 것입니다……. 그가 무서운 존재여서가 아니라, 그의 완전함이 어쩔 도리도 없이 무섭습니다. 저 같으면 차라리 도망칠 것입니다. 골목거리의 가장 지저분하고 불온한 곳까지 도망칠 것입니다.
갑자기 웬 천사니 하느님 얘기냐고 의아해하실 수 있는데, 애당초 이건 <무언가에 인생을 걸 수 있을 정도의 열정을 삶에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볼 때 제가 느끼는 심정에 대한 극단적인 비유였습니다. 사실 전 신학도도 개신교도도 아니라서 비유에 오류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만, 하여간에 의미는 전해졌으리라 믿습니다.
도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균형도 못 잡고 병적인 무기력증에 사로잡혀 살아왔는지. 더 이상 삶에 대한 의욕은커녕 동기도 없고, 저질러왔던 인생은 패악질과 수치, 남은 것은 계속 도주하는 습성뿐입니다. 17살인가 18살 때의 일인데요, 친구가 체스를 두자고 했습니다. 우리는 보드를 펼치고 규칙에 따라 말들을 늘어놓았습니다. 제가 백이라서 먼저 두어야 했습니다. 시작하자마자 킹을 눕히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 네가 이겼어. 농담이 아니었습니다. 정말이지 농담을 할 의도는 추호도 없었습니다. 다만 노력이니 시도니 다툼이니 경쟁이니, 승리하고 패하고…… 아아.
족발에 인생을 걸었다고 말할 수 있는 당신을 축하하며 질투하고,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당신이 하염없이 무서우니, 당신과 말을 섞는 일은 결코 없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