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의 효용성과, 이상한 이야기
기록/생각 2020. 5. 1. 10:05 |눈물의 효용성과, 이상한 이야기
아주 뻔한 일본 애정극이었습니다. 스토리는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누가 누구를 흠모하고, 누가 누구를 흠모하는지 흠모하지 않는지 당황해하고, 사랑하거나 배신하고……. 이런 식이니 뭐가 기억날 것도 없습니다. 다만 아름다운 여주인공의 머리칼이 거의 무슨 사상표현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짧았고, 그녀 역시 누군가를 흠모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함께 놀던 쾌활한 남자였습니다. 그러나 그 남자는 여주인공의 친구에게 마음이 있었습니다. 자, 어떻게 봐도 뻔한 구도에 치정극으로 분량을 늘릴 속셈마저 은근히 엿보입니다만, 어쩐지 특정 장면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는 것입니다.
머리가 짧은 여주인공은 다리 위에서 남자에게 자기 마음을 고백합니다. 물론 남자는 부정합니다. 그야 이미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니까요. 남자는 사죄를 하고 다리를 떠납니다. 떠나고 나서야 여주인공은 울기 시작합니다. 왜 우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하여간에 울고, 울고, 사정을 알아챈 친구가 데리러 올 때까지 웁니다. 친구가 집까지 데려다주는 와중에도 웁니다. 자기 침대 위에 쓰러져서도 계속 눈물을 흘립니다. 흑흑, 거리면서 도무지 멈출 생각을 않습니다.
작품이야 어찌 되었든 간에 이 장면이 인상에 남습니다. 아, 나도 저렇게 운다면 기분이 좀 나아지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예전에 어딘가에서 읽은 바로는 울면 눈물을 통해서 스트레스 성분이 배출된다고 합니다. 과학적인 근거가 있는 것인지 그냥 미신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자세히 조사해보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인간이 몸 안에서 뭔가를 뱉어내는 경우는 죄다 더 이상 몸에서 쓰일 일이 없는 폐기물들을 배출하는 것이니까, 눈물도 그렇지 않을까 하고 막연하게 납득했던 것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누군가에게 애정을 가지고,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슬퍼하며 눈물 흘릴 수 있는 것일까요. 저도 나름대로 일생일대의 사랑이라는 것을 해보기는 했습니다만, 일이 어긋났을 때 저에게는 ‘슬프니까 운다’는 발상이 전혀 없었습니다. 제가 한 일이라고는 산에서 가장 높은 절벽에 기어 올라가서, 떨어지면 곤죽이 되어 죽을 것이 분명한 높이를 내려다보며, 떨어진다, 떨어진다, 떨어지면 슬픔도 고통도 이 복잡한 상황도 전부 무(無)가 된다, 하며 자살놀이나 하던 것이 전부입니다. 등 뒤에 신라시대에 새겨진 것으로 추정되는 지장보살이 한심하게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제 얘기는 그렇다 치고.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스트레스가 가면 갈수록 심화된다고 하는데, 눈물이 스트레스 성분을 배출하는 게 사실이라면, 자주 우는 사람이 더 건강하지 않을까요. 무슨 이상한 감성주의나 자기비관 같은 건 다 집어치우고, 어떤 울게 만드는 약 같은 거라도 처방해서, 주기적으로 눈물을 흘리면 그것이야말로 신세대의 링거 주사 같은 게 아닐까 싶습니다. 아마 스트레스 성분이 배출된다는 건 머릿속의 망념들을 좀 정리 정돈할 여유도 생긴다는 것이겠지요. 오거나이징(Organizing). 이 영단어는 의미도 의미지만 발음이 재미있어서 좋아하는 단어기도 합니다.
이야기의 발단이 된 애정극 말입니다만, 끝까지 보고 나니 저 같은 사람이 소비하라고 만든 게 아니었습니다. 실연의 슬픔에 빠져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는 여주인공을, 그녀의 친구가, 그러니까 그 쾌활한 남자가 흠모하는 여자가 말입니다, 겁간합니다. 아니, 여주인공이 저항하는 묘사가 없었으니 겁간이라는 단어는 좀 이상하군요. 수동적 쌍방합의 하의 성관계라고 할까요. 단어가 길어지는군요. 뭐야 이거,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당황하고 있는 사이에 극이 끝났습니다. 그러고 보니 프랑스 영화에도 이런 맥락을 파악할 수 없는 동성 간의 섹스 장면이 낭만주의적 필터를 친 채 자주 나오기도 하지요. 이상한 이야기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