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약 3~4주만에 완성한 글. <태양 아래서>를 완성한 뒤 약 3개월 가량 소설의 오락성에 대해 재탐구해보고자 SF소설을 집필하고 있었는데 완성하지 못한 채로 보류시켜두었다. 그리고 새로 집필하여 완성한 것이 본 작품이다.
2. 너무 노골적이고 단순한, 안이한 글이 되어버리지 않았나 하는 후회가 남는다.
향수(鄕愁)
Y시의 중심부를 벗어나 도시 변두리로 가면 그 지역을 둘러싸고 있는 산맥이 있다. 그 산맥을 이루는 어느 산봉우리의 능선에는 넓고 깨끗한 이 층짜리 건물이 하나 지어져있다. 건물 자체도 넓지만 그 부동산이 포함하고 있는 부지 또한 굉장히 넓다. 이곳은 사람 사는 곳으로부터 몹시 멀다. 가장 가까운 도시인 Y시의 시내까지 들어가려면 차로도 두 시간은 넘게 걸린다. 부지는 높은 철망으로 둘러싸여있다. 바깥에서 들어오려는 자와 안에서 나가려는 자 양쪽을 모두 막기 위함이다. 그것을 세운 것은 썩 잘 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부지에는 산책로처럼 여기저기로 길이 나있고 풀과 나무가 봄다운 초록빛으로 화창하게 피어있다. 건물은 전체적으로 흰색이고, 도어나 창문들은 잘 깨지지 않는 단단한 재질로 되어있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성질 때문이다. 아무튼 간에, 현관을 열고 들어가면 접수창구가 있고, 간호사가 한쪽 복도로 안내한다. 그리로 들어가면 기다란 복도가 나오는데, 벽면에는 다섯 발짝 간격으로 철제문이 하나씩 나있다. 안으로 들어가면 병원식 싱글베드가 두 개씩 놓여있는 살풍경하고 단조로운 방이 나타난다. 방에서 나와 복도를 계속 걸어가면 갑자기 탁 트인 공간이 나온다. 이곳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낮에 주로 생활하는 <거실> 같은 공간이다. 벽붙이 TV가 있고, 기다란 의자들이 있고, 커다란 시계가 있으며, 창문이 많아 빛이 잘 든다. 그리고 그 거실 한쪽에 이 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다.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또 다시 복도가 나온다. 일 층과는 달리 보다 다채로운 색깔과 고급스런 자재로 벽과 바닥이 깔려있고 벽면에 난 문들 또한 철제가 아닌 목제로 되어있다. 그 문들 중 하나가 소장실로 들어가는 문이다. 나는 대략 한 시간 전 소장으로부터 호출이 있어서 그곳으로 들어간 참이었다. 소장은 내게 여러 가지 이야기를 했다. 생활은 어떠냐는 등의 인사로 시작해 주로 내 가족들의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나는 듣고 있었다.
몇 십분 뒤 소장은 말을 마치고 내 눈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나는 그가 말을 하는 내내 그저 입을 다물고 있었다. 만감이 머릿속에서 소용돌이 쳤다. 그러나 실제로 나는 그것에 휘말려 들어가지 않고, 한걸음 떨어져서 그 복잡한 감정들을 관찰하는 기분이었다. 마음 한 구석이 단단하게 굳어있는 것이 느껴졌다. 마치 굳게 닫힌 철문처럼 말이다. 나는 관조하는 입장으로, 마침내 입을 열며 <그래서 가족들은 뭐라고 합니까?> 하고 소장에게 물었다.
“그들은 당신이 돌아왔으면 좋겠다고 하더군요. 부인 분께서는 아이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고 하셨어요.” 소장이 나를 설득하듯이 대답했다. 그는 나의 담담한 표정을 보고 약간 당황하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의자에 앉은 채 손으로 두 눈을 문질렀다. 소장실의 창문으로 봄날의 빛살이 비쳐 들어오고 있었다. 바람소리도 들리지 않는 조용한 오후였다.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내의 얼굴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딸아이의 얼굴도. 나는 돌연 불쾌감을 느꼈다. 부조리한 불행을 어쩔 도리도 없이 받아들여야만 하는 사람의 분노 같은 것이 가슴속을 스멀스멀 기어 다니고 있었다. 나는 불쾌감 때문에 내뱉듯이 말했다.
“나는 돌아가고 싶지 않습니다.”
소장은 당장 대답하지는 않았다. 그는 한 손을 입가에 대고 나를 바라보며 다른 한 손으로는 검지로 탁자 위를 규칙적으로 두들기고 있었다. 서로가 침묵하고 있는 동안에도 시간이 흘렀다. 그러다가 마침내 그가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소장은 가족들에게는 자신이 잘 설명해두겠다고 말했다. 나는 평소처럼 이곳에서 지내면 된다는 것이었다. 나는 알겠다고 했다. <나가봐도 좋습니다.> 하고 그가 말했다. 나는 의자에서 일어나 소장실을 나왔다. 복도로 나온 뒤에 계단을 한 층 내려갔다. 넓은 거실이 나왔다. 열댓 명 정도 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한 구석에서 TV를 보거나, 창가에서 햇볕을 쬐는 등의 소일거리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내가 계단을 내려오는 것을 보고 누군가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내 쪽으로 다가왔다. V였다. 그는 마르고 멀쑥한 몸에 머리만 단정하게 빗고 다니는, 안경을 쓰고 얼굴이 갸름한 30살 즈음 된 남자였다. V는 이곳 요양소에서 나를 ‘형님’이라고 부르며 따르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는 내 앞으로 다가오더니 묻는 것이었다. “형님, 소장이 뭐라고 합디까?”
“가족들이 내가 퇴소하기를 원한다던데.”
“아하! 또! 그래서 뭐라고 했어요?”
“싫다고 했지.”
그러자 V는 유쾌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면서 무표정한 얼굴로 생각했다. <V도 가족과 무슨 일이 있었음이 틀림이 없다…… 결혼을 해서 아내가 있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나는 약간 우울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자 그가 수다스럽게 말했다. “우리 같은 사람들은 이곳을 나가지 않는 게 오히려 더 나아요! 그렇고말고요…….” 그는 과연 자신의 말이 옳다는 듯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의 말을 듣고 쓰게 웃었다.
“우리 같은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데?”
“배제당한 사람들…… 예를 들어 저기 저 녀석 같은 경우에는(그렇게 말하면서 V는 손가락으로 복도 한구석에 쭈그리고 앉아있는 앳되어 보이는 남자를 가리켰다.) 부모가 억지로 이곳에 집어넣었다더군요.”
“왜?”
“남색가라서요. 듣기로는 가족들이 전부 크리스천이랍디다. 저 녀석 자신도 그렇고요.”
나는 V의 말을 듣고 그 젊은 남자를 쳐다보았다. <젊은 남자>라기보다는 오히려 어린애 같아 보였다. 20대 초반 즈음 되었을까. 그는 우리가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것을 알아차렸는지 고개를 들어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얼굴에 침울한 기운이 가득했다. “그런 건 어떻게 알았어?” 나는 여전히 그 남색가와 눈을 마주치고 있는 채로 V에게 물었다.
“저 애가 입소한지 얼마 안 되어 다들 알게 됐어요. 형님은 남들한테 관심이 없으니 그런 정보를 모르지.” V가 질책하듯이 말했다.
<사생활이라는 것이 없군.> 내가 말없이 생각했다. 하기야 이런 좁은 공간에 열 몇 명밖에 안 되는 인간들이 모여서 몇 주고 몇 달이고 살다보면 억지로 숨기려고 하지 않는 한 웬만한 것은 다 소문이 나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다들 그런 것을 알고 있다. 알고서도 만족한 채 사는 것이다. <모두들 별 것도 아닌 프라이버시를 지키기보다는 바깥세상으로부터 격리된 채 사는 것을 더 좋아하기 때문에 이곳에 있는 거지.> 나는 주변을 휘휘 둘러보았다. 늙은이 하나가 복도를 뱅뱅 돌며 연신 뭐라고 중얼대고 있었다. 벽시계를 보았다. 오후 세 시가 막 넘은 시각이었다. 나는 창가로 가서 의자에 주저앉았다. 창을 통해 들어오는 태양빛이 몸을 포근하게 감쌌다. 나는 어쩐지 슬픈 기분이 들었다. <흠, 자유라. 나는 어서 이런 것에 익숙해져야한다…… 정말로 나는 지금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은 것이다. 말하자면 나는 그 어떤 책임도 지고 있지 않다. 이것은 굉장한 일이다. 과연 현재의 나에게는 시간의 흐름마저도 의미가 없다. V는 무얼 하고 있지…… 그 늙은이와 대화를 나누고 있군. 저 녀석은 끊임없이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려고 하는 습성이 있다. 이런 곳에서는 보기 드문 유형이다. 대부분 자기 자신과 대화하는 것만으로도 벅차하는 사람들이기에 그렇다. 그러고 보니 며칠 전에 자살 소동이 있었지…… 의식(意識)을 견디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다들 평화를 좋아하니까. 그런데 V가 이쪽으로 오는군…….>
“무슨 얘기를 했어?” 내가 V에게 물었다.
“그냥 요새 어떠냐고 물었죠. 하지만 저 영감은 언제나 하는 얘기가 똑같아요. <나쁘지 않아! 나쁘지 않아! 매일매일이 비슷한 나날들이지! 그런데 내 옷에서 지독한 냄새가 나는 것 같아. 생선 눈알 냄새가 나! 자네는 모르겠나? 생선 눈알 냄새가 난다고! 옷을 갈아입어야하는데 아들이 더 이상 새 옷을 보내주질 않아. 몹쓸 놈이지. 그런데 이상하게 아들놈이 보내주는 옷들은 전부 다 냄새가 난단 말이야!> 하고요. 그러면 나는 무슨 종교의식처럼 영감의 옷소매에 코를 대고 냄새를 맡아보죠. 그런데 냄새라고는 구질구질한 영감 냄새밖에 안 난단 말예요. 그래서 내가 <아무 냄새도 안 나는데요!> 하고 말하면 그는 <아니야! 자네는 모르는군!> 하고 입을 다물어버린단 말이죠.”
“저 늙은이는 항상 그렇잖아,”
“그렇죠.”
“그런데 왜 매일 말을 걸지?”
“그냥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거죠.”
“커뮤니케이션이라!” 그리고 나는 입을 다물었다.
V는 내 옆자리에 앉았다. 나는 말이 많은 사람은 아니었지만 V와 대화하는 것은 그리 싫지 않았다. <저 영감님도 고생이에요.> 하고 V가 말했다. “늘상 실재하지도 않는 악취랑 씨름을 해야 하니 말입니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나 저런 사람들은 오히려 낫지. 말하자면 아직도 저 구석에 앉아서 무릎 사이에 머리를 박고 있는 남색가처럼 말이다. 적어도 문제가 눈에 보이니까. 흠. 크리스천이라! 신이 금지한 것을 타고 났으니 죄책감으로 칠갑이 되어있겠지. 하지만 몇 달만 있으면 여기에서는 신 같은 것은 아무 의미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저 늙은이가 간호사에게로 가는군.>
<세탁은 아직 멀었나?> 하고 늙은이가 외치는 것이 들려왔다. 간호사는 방금 새 옷을 꺼내 입지 않았느냐고 반문했다. “하지만 냄새가 난단 말이야. 이러면 사람들이 날 지저분한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겠어?” 늙은이가 불만스럽게 외쳤다. 사람은 청결해야만 최소한의 예의를 지킬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영감님에게서는 아무 냄새도 안 나는 걸요!” 간호사가 늙은이를 설득하려는 것처럼 말했다.
“아니야! 제기랄! 다들 날 속이려고 작정을 했군! 노인이 하는 말은 아무도 믿지 않아!”
“그렇다면 환자복을 꺼내드릴까요?”
“됐어. 그것들도 마찬가지로 고약한 냄새가 난다고.”
나는 그들이 한동안 실랑이를 하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V는 그 모습이 재미나다는 듯이 히죽거리며 그들을 쳐다보는 것이었다. 복도 한 쪽에서 TV를 보고 있던 사람들도 실랑이하는 소리 때문에 고개를 돌려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람들 머리 너머로 보니 TV 스크린에서는 초원에서 동물들이 풀을 뜯는 영상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나는 금세 그 모든 일들에 흥미가 없어졌다. 늙은이와 간호사도, 하루 종일 TV 앞에만 붙어있는 사람들도, 죄책감에 빠져 망연자실해 있는 남색가도, 끊임없이 무어라고 떠들어대려는 V도 전부 부질없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나는 고개를 위로 젖히고 눈을 감았다. 햇빛이 얼굴에 부드럽게 쏟아졌다. 감은 눈꺼풀 너머로 이지러진 빛조각들이 보였다. 나는 소장이 했던 말을 생각해보았다. 가족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고. 나는 마음속으로 침을 뱉듯이 코웃음을 쳤다. 나는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나는 더 이상 그러고 싶지 않다……. 몸이 노곤했다. 따뜻한 햇볕 때문에 더욱 그랬다. 옆에서 V가 뭐라 뭐라 떠드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지만 내 의식은 이미 마음속 깊은 곳으로 가라앉는 중이었다. <과연 수면만이 정신건강에 도움이 된다…….> 무의식중에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앉은 채로 잠이 들었다.
V가 어깨를 부여잡고 흔드는 바람에 잠에서 깨었다. 눈을 뜨자 코앞에 그의 얼굴이 보였다. 내가 눈 뜨는 것을 보고 V는 외쳤다. “형님, 왜 그래요?” 나는 비몽사몽 중에 그가 무슨 말을 하는 지 이해하지 못하고 <뭐? 왜? 뭐가?>라고 의문문만 연달아 되뇌었다.
“왜 울고 있느냔 말이오.”
“울어? 누가? 누가 우는데?” 내가 정신없이 대답했다.
V는 말없이 내 얼굴을 가리켰다. 나는 얼이 빠져 있다가 손을 들어 얼굴을 더듬어보았다. 미지근한 물방울이 손끝에 닿았다. 물방울은 내 눈 안에서 흘러나온 것이었다. 나는 손으로 눈물에 젖은 광대를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젠장, 나이는 먹을 대로 먹어서 이게 뭐람.” 그러자 V가 <왜 운거예요?>라고 물어왔다.
“나도 몰라. 기분 나쁘군.” 나는 손을 털며 대답했다.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무슨 꿈이라도 꾸었나 싶었지만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저 축축하고 불쾌한 감정의 잔재만이 어슴푸레하게 가슴 속에 남아있었다. 나는 눈가를 닦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V의 외침 때문인지 몇 사람이 내 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나와 눈이 마주치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다들 그러려니 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V도 더 이상 소란을 떨거나 묻지 않고 옆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곳에서는 아무도 서로의 사정에 대해 캐묻지 않는다. <나는 특별한 사정이랄 것도 없긴 하지만…….> 아마도 그 남색가의 경우에는 좌절하는 바람에 주변 사람에게 제멋대로 털어놓았기 때문에 소문이 돈 것일 터였다. V는 옆자리에서 멀거니 허공을 쳐다보며 다리를 떨고 있었다. 나는 눈동자만을 굴려 그를 쳐다보며 생각했다. <내가 울다니! 도대체 무엇 때문에? 썩 불쾌한 일이다. 나는 우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특히나 남 앞에서는 더욱…… 하여간에 비록 꿈속이라고는 하더라도 나를 울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었다는 사실이 영 심기가 불편하다. 음…… 나는 나무껍질 같은 존재가 되고 싶다…… 모든 것이 여전히 자연스럽지 못하다. 그런데 내가 몇 시간이나 잠을 잔거지?> 나는 고개를 들어 벽시계를 보았다. 네 시 반. 시간을 확인하고 나는 몸을 일으켰다. 앉은 채로 잔 탓에 몸이 찌뿌둥했다. 기지개를 켜고 복도를 따라 조금 걸었다. 뒤편에서 V의 눈길이 따라오는 것 같았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쭉 걸어 나가자 정원으로 나가는 문이 보였다. 나는 다가가서 문에 난 창으로 바깥을 내다보았다. 문손잡이에 손을 올려놓았지만 그것을 돌리지는 않았다. 약간 노랗게 색이 입혀진 빛살이 초록빛 정원 위에 미끈거리며 흘러내리고 있었다. 나는 한참동안 그 좁은 창으로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밖에 나갈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러고 있자니 어느새 V가 등 뒤에 다가와 있었다.
“왜 그러고 있어요? 나가려고?”
“안 나가.” 내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이어서 말했다. “나가면 안 돼.”
“왜 나가면 안 돼요? 저렇게 날씨가 좋은데.”
“나가려면 자네나 나가. 난 나가면 안 돼.”
내가 그렇게 잘라 말하자 V는 알았다는 듯이 입을 다물었다. <나도 별로 산책하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하고 그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리고 나는 창에서 고개를 돌려 V의 얼굴을 좀 들여다보다가 복도를 따라 왔던 길을 돌아갔다. 하얗게 회칠이 된 복도에는 몇몇 사람들과 제복을 입은 간호사들이 있었다. 복도를 거니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초점이 없는 눈으로 발을 질질 끌며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곳으로 가려는 듯이 느릿느릿 걷거나 혹은 너무나 취해서 당장이라도 쓰러질 사람처럼 벽에 어깨를 기댄 채 고개를 푹 숙이고 달팽이처럼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말을 걸어도 소용이 없다. 그들은 <좌절한> 사람들인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보고만 있어도 그 존재의 절망성 때문에 십자가에 박히는 듯한 고통을 공감하게 된다. 그러나 적어도 그들은 순진한 피해자들인 것이다! <그 점에서 그들이 《바깥》에서 교묘한 낯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보다는 훨씬 낫다.> 나는 냉철한 이성으로 스스로를 다잡으며 그들을 지나쳤다.
복도를 걷다가 빈 방을 하나 거쳤다. 지금은 아무도 쓰지 않는 방이었다. 얼마 전에 자살소동이 일어난 것이 바로 이 방이었다. 방의 주인과는 몇 번인가 대화를 나눠본 적이 있는데, 섬세한 용모에 머리가 긴 젊은 사내였다. 이름은 모른다. 묻지 않았다. 그는 늘 수첩과 연필을 들고 다니면서 복도나 의자에 주저앉아 뭔가를 쓰거나, 혹은 아무데나 돌아다니면서 초점 없는 눈으로 혼잣말을 하곤 했었다. 건물 안을 거닐고 있자면 일정한 구역을 계속 반복해 걸으며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그와 쉽게 만날 수 있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의 커뮤니케이션은 가능한 친구였다. 대화를 하는 와중에 너무 빈번하게 주제가 바뀐다거나 문맥에 맞지 않는 말들을 마구 쏟아내기도 했지만 웬만한 회화는 성립했고, 무엇보다 그는 사람과 대화하는 것을 싫어하지 않는 것 같았다. 오히려 그 쪽에서 먼저 내게 말을 건 일도 있었다. 그는 우리를 <형제>라고 불렀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칼을 든 형제>들이라고 했었던 것도 기억한다. 아무튼 어느 날 그는 찢어낸 스웨터로 문고리에 목을 맸다. 바닥에 몸을 늘어트려 체중으로 목을 졸라 죽으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미처 죽기 전에 간호사에게 발견되었고, 정신병원으로 이송되었다. 이곳 요양소에서 사고를 일으키면 정신병원으로 가게 되는 것이다. 정신병원과 요양소를 몇 번이나 왕복하는 사람들도 꽤나 있었다. <말하자면 이곳은 광인들의 세계와 정상인들의 세계의 틈바구니에 끼인 경계 지대 같은 것이다…….> 나는 음울한 기분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자살소동 때문에 사람들 사이의 공기가 흥분되려는 기세도 있었지만 얼마 못가 수그러졌다. 그 정도는 간간이 있는 일이었던 것이다.
나는 왜 그가 죽으려고 했는지 알지 못한다. 알 도리가 없다. 모두들 각자의 신념…… 그렇다, 신념이 있기 마련이다. 아무튼 그는 그 <신념> 때문에 정신병원으로 끌려갔다. 아마도 몇 달간은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자살. 쉬운 일은 아니다. <쉬운 일은 아니지.> 내가 굳이 되뇌었다. 이른바 충동과의 싸움이다. 가슴이 메어오는 것 같았다. 나는 손을 들어서 심장을 탕탕 두드렸다. 끊임없이 복도를 걷고 있자니 이제 석양이 지기 시작하는 태양빛이 창문을 통해 얼굴에 비쳤다. 나는 스치는 눈길로 창을 내다보았다. 오직 창으로만 나타나는 바깥세상. 하늘이 붉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창문에 엷게 내 얼굴이 비치는 것이 하늘 풍경에 겹쳐보였다. 나는 창문에 비친 내 눈동자와 시선을 마주치자마자 황급히 눈길을 돌렸다. 마치 화를 내는 어린아이처럼.
요양소에는 거울이 없다. 화장실과 세면대에도 거울은 설치되어있지 않다. 유난히 거울에 신경질적인 반응을 나타내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나도 거울은 좋아하지 않는다. 수십 년 동안이나 보면서 살아온 얼굴인데, 어느 날 부터인가 그 모습을 견딜 수가 없었다. 악마 같이 새까만 눈동자부터 시작하여 기괴하게 자리 잡고 있는 뼈대, 윤곽들이 하나같이 내 정신을 미치게 만들었다. 어느 밤 화장실에서 거울에 수조를 집어던져 큰 소리와 함께 모든 것이 깨지고 산산조각이 났을 때, 자다 깬 채 달려와 나를 쳐다보던 아내의 당혹과 공포가 뒤섞인 얼굴을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그러나 그것도 현상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마치 도미노가 쓰러질 때 블록 하나가 넘어가는 것처럼…….> 나는 마음이 갑갑했다. 창문으로부터 도망치다시피 눈길을 돌리며 하얀 회벽에 얼굴을 묻었다. 눈을 감았다. 차가운 벽이 이마에 와 닿으며 우둘투둘한 석회 알갱이들이 느껴졌다.
“와장창.” 내가 소리 내어 말했다. 유리로 된 수조가 거울과 부딪힐 때 나던 소리를 나는 입으로 재현하고 있었다. <와장창.> 하고 나는 다시 한 번 말했다. 사방으로 튀기는 유리조각과 담겨있던 물의 형태가 수조와 함께 무너지는 모습. 나는 눈을 감은 채 꽉 쥔 주먹으로, 망치를 내려치기 전에 못이 자리를 잡게 하도록 두들길 때 하듯이 벽을 살살 두드리면서 그 때의 그 장면을 계속해서 머릿속으로 반복 재생했다. 충격이 닿으면서 거울에 선명한 금이 그어지는 순간. 밤의 정적 속에서 갑자기 폭발하듯이 소음이 터지는 순간. 모든 것이 다 잘게 부서져 쏟아져 내리고 엉망진창이 되는 순간. “와장창!” 나는 압착기로 씨앗에서 기름을 짜내듯이 웃음 지었다. 질끈 감은 눈꺼풀 사이로 감정이 새어나올 것 같았다.
<우리들 세계에는 색깔이 너무나도 많다. 그래서 우리들을 이렇게 무채색한 건물 안에 격리시켜둔 것이다. 나는 감긴 눈꺼풀로도 온갖 빛나는 섬광들과 다채로운 색깔들을 본다…… 어떤…… 물속에 빠진 수백 개의 잉크방울처럼…….> 그때 종이 울렸다.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고개를 들어 주변을 보았다. 각자 내팽개쳐진 걸레조각처럼 늘어져있던 사람들이 종소리를 듣고 모두들 일어나 한 곳으로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나도 그들을 따라갔다. 우리들은 규칙을 지킬 줄은 안다. <그리고 규칙을 만들기도 한다…….> 요양소 안의 모든 사람들이 식당으로 향하고 있었다. 작은 행렬 속에서 나는 V와 다시 만났다. 우리는 식당 안으로 들어섰다. 어떤 사람들은 간호사의 부축을 받으며 식당으로 들어왔다.
우리들은 말없이 줄을 섰다. 식당은 100명 정도 되는 사람들을 수용할 수 있을만한 너비의 공간이다. 기다란 식탁과 의자들이 줄지어 놓여있고, 한쪽 벽면으로는 배급용 창구가 있다. 우리들은 늘 이곳에서 식사를 한다. 지금은 요양소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은 시기라서 식당이 꽉 차는 일은 없다. “별로 식욕이 없어요.” 내 뒤에서 V가 중얼거렸다. <그래도 규칙이잖아.>라고 내가 말했다. V는 대답하지 않았다. 식사 시간에는 식사를 하는 것이 요양소의 얼마 안 되는 규칙 중의 하나다. 가끔 거식증 환자가 입소하는 일도 있지만…… 흠, 그들의 문제는 의사와 간호사들이 알아서 해결한다. 아무튼 간에 그들은 그것이 직업인 것이다. 차례가 오자 우리는 식사를 받아들고 한쪽 식탁으로 가서 앉았다. 식사를 시작하려는데 시야 한편에 그 남색가의 모습이 보였다. 식탁 구석 사람들 사이에 앉아서 젊고 음침한 얼굴로 식판을 노려보고 있었다. 마치 그것에 담긴 음식들이 자신의 부모를 죽이기나 한 듯이……. 나는 무심한 눈으로 그를 잠시 쳐다보다가 고개를 돌리고 밥을 먹기 시작했다.
식사를 마치고 우리들은 맥없이 시간을 보냈다. 시간이 되자 간호사가 사람들을 불러 약을 나눠주었다. 우리들은 받아든 약을 물과 함께 삼킨 뒤에 간호사를 향해 입을 벌려 그것을 깨끗이 삼켜버렸다는 것을 증명한다. 나는 내가 먹는 약이 내게 무슨 영향을 끼치는지에 대해 그다지 잘 알지는 못한다. 다만 그것이 나를 조금 더 평화롭게 만들어준다는 것만 알고 있다. 모두들 비슷할 것이다. V는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약 먹는 것을 싫어했다. 몇 번인가 간호사를 속이려고 하기도 했다. 그는 자신이 그런 약을 먹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도 그것에 별다른 의미를 두지 않는다. V는 간호사가 내민 것을 군말 없이 집어삼킨다.
“음…….” 약을 삼키고 나서 V가 조용히 신음했다. 나는 그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그도 나를 쳐다보더니 씨익 하고 패배감 어린 웃음을 짓는 것이었다. 그리고 말했다. “형님도 내가 왜 여기에 들어왔는지 알게 되면 이해할 거예요.”
“뭘?”
“이 약들…… 이런 약리학 따위가 내게 적용될 이유가 없다는 것 말이에요.”
나는 웃지도 않고 그의 말을 받아넘겼다. 굳이 물을 필요는 없었다. 연질 캡슐에 든 약들이 식도를 거쳐 위장에서 소화되는 것이 느껴졌다. <이제 곧 졸리기 시작할 것이다. 몹시도 부자연스럽게 말이다…….>
우리들은 일찍 잠든다. 그리고 오래 잔다. 그리고 우리는 그만큼 광증에 빠져있을 시간을 잃어버린다. 모든 것이 다 계획된 대로다. V와 나는 얼마간 시간을 보내다가 각자의 침대가 있는 방으로 가기 위해 헤어졌다. 룸에는 싱글베드가 두 개 놓여있고 나는 그 중 하나를 사용한다. 다른 하나는 룸메이트가 쓰는 침대다. 나는 그와 대화를 해본 일이 없다. 그가 매일 밤 자신의 침대로 가서 잠드는 것을 관찰할 수는 있지만, 그는 절대 누군가와 말을 나누려고 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에게 억지로 말을 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의 폐쇄를 존중해줘야 하는 것이다.
나는 넋을 놓고 침대 위에 앉아 있다가 뱃속에서 꿈틀거리며 올라오는 공허한 졸음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 이상한 졸음은 몇 번을 겪어도 익숙해지지 않는 비인간적인 것이다. 나는 침대 위에 지푸라기처럼 쓰러졌다. <금세 내일이 오겠지. 또 내가 신경도 쓰지 않는 내일이 올 것이다…… 그래도 《바깥》에서 맞는 내일보다는 훨씬 견딜만하다. 왜냐하면 이곳에서는 경계라고 할 만한 것이 굉장히도 희미하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반드시 밤에만 잠을 자야할 이유도 없다. 나는 벗어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나…… 마치 늪 속을 헤매는 것 같구나! 지평선까지 펼쳐진 늪을 말이다. 어쩌면 나는 자유로운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어쩌면 나는 굴러 떨어지고 있는 중인 것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내 가슴속에는 여전히 무겁고 지독한 혼돈이…… 날뛰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는 졸음이 생각할 기운을 전부 먹어치워버렸군…….>
다음날 나는 아침식사를 마치고 V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매일처럼 반복되는 별다를 것 없는 오전이었다. 햇살은 깨끗하고 어딘가 구멍이 뚫린 것 같은 공허한 소음들만이 복도를 울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간호사 한 명이 우리에게 다가오더니 V에게 말을 했다. 그 남자 간호사는 무뚝뚝한 얼굴로 천천히 입을 움직였다.
“소장님이 찾으십니다.”
“나를?” V가 반문했다. 그리고 그는 고개를 돌려 나를 보더니 이상스럽게 웃었다. 그리고 다시 간호사에게로 시선을 향하는 것이었다. “나를 왜?”
“그건 저도 모르죠. 가보세요.”
간호사의 말에 V는 <그럼 그러지.> 하고 대답하더니 실실거리며 이 층으로 향하는 계단으로 걸어갔다. 그러면서 그는 나를 힐끔 쳐다보며 눈짓을 하는 것이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V는 한 걸음씩 계단을 오르더니 마침내 층계 위로 사라졌다.
혼자 남겨진 나는 할 일이 없었다. 나는 그저 건물 안의 하얀 공기를 눈으로 쫓으며 의자에 앉아있었다. 주변에는 몇 안 되는 사람들이 벌레처럼 느리고 기묘한 동작으로 천천히 움직이거나, 나와 마찬가지로 앉아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제 곧 아침 약을 먹을 시간이었다……. 모든 것이 느리고 투명한 것처럼 느껴졌다. 그때 누군가가 힘없는 걸음걸이로 터벅터벅 걸어오더니 내 옆자리에 주저앉았다…….
나는 <누구지?> 하고 생각하며 그를 보았다. 그는 바로 젊은 남색가였다. 그리고 그는 구부정한 자세로 내 바로 옆에 앉아있었다. 나는 그의 초점 없는 눈이 바닥을 향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우리들은 말이 없었다. 나는 그가 왜 내 옆으로 온 것인지 궁금했지만 그런 것을 물어볼 마음은 들지 않았다. 한동안 그러한 침묵상태가 이어졌다. 남색가는 처음 봤을 때와 똑같은 절망적인 눈으로 맥없이 땅바닥만 쳐다보고 있었다. 기운 없이 반쯤 열린 입으로 옅은 숨을 내쉬는 것이 보였다. 그는 도무지 살아있는 것 같지가 않았다……. 나는 더 이상 그에게 신경을 쓰지 않으려고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그가 문득 말을 내뱉었다…….
“식당에서 나를 쳐다보고 있었지요.”
그 말에 나는 다시 그에게로 시선을 향했다. <흠. 이 젊은이는 내게 뭔가 용건이 있는 모양이다.> 나는 즉각 대답하지는 않았다. 여전히 나를 향하지 않고 있는 그의 눈을 쳐다보며 나는 천천히, 처―언―처―어언히 대답했다.
“그래. 그랬지.”
“나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요!”
그가 갑자기 외쳤다. 순간 주변이 조용해졌다. 사람들의 시선이 은근슬쩍 이쪽으로 모이는 것이 느껴졌다. 무릎 위에 얹혀있는 그의 손이 작게 떨리는 것이 보였다. 나는 조용히 말했다.
“난 아무 말도 안했어.”
그러자 그는 조금 진정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잠시 동안 입을 다물었다. 나는 참을성 있게 그가 다시 말하기 시작하기를 기다렸다. 그는 두려워하는 듯한 눈초리로 힐끗 나를 흘겨보더니 다시 시선을 땅바닥에 처박고 웅얼거리기 시작했다. “가족들은 나 같은 죄인이 살아있는 것을 원하지 않아요.”
“그래.” 내가 간단하게 말을 받았다.
“그렇다고 내가 죽는 것을 바라지도 않아요…….”
“그랬겠지.”
“나는 그냥 태어났어요…… 갑자기…… 그냥 태어나버렸어요…….” 남색가는 말끝을 질질 끌면서 혼잣말을 하듯이 말했다. 나는 그가 중얼거리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그가 혼란스러워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하나님!> 하고 그가 작게 탄식했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말했다…….
“이봐.” 나는 은근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죄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아.”
내 말에 그는 기겁하듯이 고개를 쳐들었다! 이마 위로 흘러내린 그의 짧고 부드러운 머리카락에 빛이 날아와 부서졌다. 그는 나를 쳐다보았다. 아주 깊게……. 그의 눈동자는 공포에 질려있었다. 마치 유령을 본 사람처럼 말이다. 그러더니 그는 도망쳤다. 벌떡 일어나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쳐버렸다. 그는 복도 저편으로 사라졌다. 나는 여전히 꿈쩍도 하지 않고 의자에 앉은 채로 남색가가 사라진 모퉁이에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점점 멀어지고 있는 발소리만이 귓가에 울렸다.
V는 약 배급시간이 되기 전에 돌아왔다. 나는 계단을 내려오는 그를 보았는데, 그의 표정이 평소 같지 않았다. 그의 얼굴 표정이란 언제나 일부러 그러기라도 하는 듯이 경박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V는 마치 절망에 빠진 것처럼 보였다……. 그는 터덜터덜 내게로 다가오더니 내 눈을 보고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아마도 웃는 것이리라.> 내가 생각했다. 우리 둘 사이의 거리가 충분히 가까워지자 내가 물었다.
“무슨 일이야?”
V는 새까만 눈동자로 나를 쳐다보더니 느리게 대답했다. “아내가 전화를 했어요…….”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V는 입을 다물더니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가까운 거리에서도 들릴락 말락 한, 아주 낮고 작은 신음소리 같은 한숨이었다. “……괜찮으냐고…….” 그가 중얼거렸다.
“뭐라고?”
“이제 괜찮으냐고 하더군요…… 이제 괜찮으냐고…….” V는 단어들을 입에서 떨구듯이 말했다. 그는 무언가 불만이 있는 것 같았다. 손으로 가려진 그의 얼굴이 자조적인 웃음으로 물드는 것이 보였다. 나는 뭐라고 대답해야할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그저 그가 계속 말하기만을 잠자코 기다렸다.
“형님.” 갑자기 그가 얼굴에서 손을 떼더니, 무언가 결단을 내린 것처럼 말했다. “잠깐 따라와 보세요. 형님에게 말할 것이 있어요.” 그리고 <약을 먹기 전에…….>라고 조그맣게 덧붙였다.
V는 복도 저편으로 걸어갔고, 나는 그를 따라갔다. 그는 점점 사람들이 적은 곳으로 향했다. 우리는 마침내 건물 한 구석의, 조용하고 희미하게 햇살이 드는 창문가에 도달했다. 그리고 V는 걸음을 멈추더니 벽에 기대서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말을 시작하는 그의 눈은 둘 곳을 찾지 못해 이리저리 헤매고 있었다. 그는 몹시 망설이고 있었다. <형님, 나는 형님에게 말해두고 싶은 것이 있어요…….> 하고 그가 중얼거렸다. V는 말을 이었다. “나는 성도착자예요.”
그는 그렇게 말했다. 마치 원한이 서린 것 같은 눈으로, 그렇게 내뱉어버렸다! 나는 그의 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뭐라고 말을 받는 것이 좋을까? 나는 그냥 입을 다물고 있었다. V는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에 개의치 않고 계속해서 떠들기 시작했다.
“나는 생명이 없는 것들을 좋아해요. 더 이상 자발적 의지를 갖지 못하고 내 뼈와 근육에 의해서 덜렁거리며 움직여지는 수동적인 살덩어리들을 좋아해요.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사람이 아닌 것, 말하자면 경계가 모호한 것이라고 해두죠…… 나는 모호한 것에 욕망을 느껴요. 생명이 빠져나간 인형 같은 육체에 얼마나 수많은 관능적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지 형님은 모를 거예요. 나는 시체와 <그 짓>을 하고 싶어 해요. 나는 시체성욕자예요…….”
V는 숨도 쉬지 않고 연달아 내뱉었다. 그는 말을 마치고도 다시 한 번 되뇌었다. <나는 시체성욕자예요.> 하고. 나는 그의 말을 조용히 듣고 있었다. 나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잠시 침묵하다가…… 물었다.
“그럼 자네는 시체와 <그 짓>을 한 적이 있는 거야?”
그러자 갑자기 V가 <바로 그게 문제예요!> 하고 소리쳤다. 그는 흥분한 것처럼 보였다.
“내가 정신병동으로 가지 않고 요양소로 오게 된 이유도 거기에 있어요. 나는 평생 내 욕망을 억누르면서만 살아왔어요. 단 한 번도, 단 한 번도 내 꿈속의 여인(그러니까 죽은 여인이죠.)과 몸을 섞을 수 있었던 적이 없어요. 나의 사회화 된 의식 때문에! 기껏해야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스너프 필름을 보면서 자위행위를 하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어요.”
나는 그가 갑자기 울기 시작할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울지 않았다. V는 다만 굉장히 흥분해있을 뿐이었다. 나는 그에게 넌지시 물었다…….
“그런데 어쩌다가?”
“그냥 어느 날 갑자기 새어나와 버린 거예요. 마개를 단단히 잠그지 않았기 때문에…… 아내와 잠자리를 하다가…… 목을 졸랐죠. 내가 사정하고 나서도 계속…… 나는 오르가즘 속에서 그녀를 죽이려고 했던 것 같아요. 그러나 다행히 죽지는 않았어요. 제때 정신을 차렸으니 망정이죠. 아무튼 아내는 굉장히 놀랐고, 또 겁에 질렸어요. 지금까지 그런 일은 단 한 번도 없었으니까. 내가 그런 짓을 할 사람이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테니까 말입니다!(이렇게 말하면서 V는 같잖다는 듯이 웃었다.) 그리고 그녀는 모든 일들이 웬만큼 진정된 뒤에…… 내가 <스트레스 때문에> 그랬을 거라고, 조금 쉬는 게 좋을 것이라고 말했죠.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전부 받아들였어요. 그리고 이곳에 보내졌죠. 아내와의 <정당한 합의>에 의해서……!”
V는 또 일그러진 웃음을 터트렸다. 내 머릿속에서는 순간 남색가가 내게 했던 말이 스쳐지나가고 있었다. <나는 그냥 태어났어요…… 갑자기…… 그냥 태어나버렸어요…….> 내 가슴 속에서 무엇인가가 두근거리면서 박동하고 있었다. 나는 어떤 생각에 집중했다. V는 지금까지 정열적으로 말들을 쏟아낸 것 때문에 지쳤는지 바닥에 주저앉아버렸다. 그리고 그는 거의 호소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악인이 아니에요 형님.”
“그래. 그렇고말고.” 내가 그렇게 대답했다. 그리고 이어서 말했다. “걱정하지 마. 우리는 조만간 돌아갈 수 있을 거야.”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이 V는 어리둥절하여 나를 쳐다보았다. <어디로요?> 하고 그가 물었다. 그러나 나는 설명하지 않았다. 나는 그의 손을 잡고 일으켜 세워준 뒤에 왔던 길을 다시 따라서 돌아갔다. 이제 약을 먹을 시간이었다. 그러나 나는 V의 말을 들으면서 한 가지 결심한 것이 있었다. 그날 나는 간호사에게 약을 받은 뒤 그것을 삼키는 척 하면서, 혀와 잇몸 사이에 알약들을 숨겨두고 물만을 삼켰다. 그리고 화장실에서 그것들을 다시 뱉어낸 뒤에 변기에 넣고 물을 내렸다. 반쯤 녹은 알약들이 변기 속의 소용돌이에 말려들어가는 것을 나는 입을 다문 채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우리>들을 위한 어떤 행위를 계획하기 시작했다.
그 날부터 계속 나는 간호사들을 속이며 약을 먹지 않았다. 가슴 속의 광증을 억제하던 것이 사라지자 나의 마음은 동면에서 깨어난 짐승처럼 슬그머니 고개를 쳐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손발이 떨리거나 근육이 경련하고 눈알이 뒤집어지는 등의 금단증상이 생겨서 그것들을 간호사에게 숨기느라 조금 애를 먹었다. 그러나 그런 증상들은 일주일 내외로 대부분 사라졌다. 이제 남은 것은 예전처럼 온몸에 가시를 세우고 원망스러운 눈동자로 웅크리고 있는 나의 정신뿐이었다……. 다시 한 번 세계가 내게 진면목을 드러냈다. 약을 끊자 동시에 세계가 뒤집어쓰고 있던 껍질이 벗겨지고 그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온갖 의미심장한 관념들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내가 지금까지 반쯤 잠들어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다시 예민하고 날이 선 시야를 갖게 된 것이다…….> V도 나의 변화를 알아차렸다. 그는 우선 내가 예전에 비해 잠을 자지 않게 되었다고 지적했다. 그것은 타당한 말이었다. 나는 낮에는 물론 밤에도 거의 잠들지 않았다. 모든 시간을 생각하고 감각하는 데에만 사용했다. V는 내가 뭔가 달라졌다고 말했다. 그는 내 변화 때문에 다소 불안한 것 같기도 했다. 나는 그저 그에게 불안해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고만 말해주었다. 요양소에서의 생활은 변한 것이 없었다. 변할 필요조차 없었다. 매일 복도를 방황하는 그 늙은이는 여전히 상상 속의 악취와 싸우느라 기력을 낭비하고 있었고, 젊은 남색가는 내게서 도망친 그 날 이후로 계속 날 피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의 상태가 점점 안 좋아지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어쩌면 그에게 <죄>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 것이 더 좋았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그렇다고 내가 한 일을 후회하지는 않았다. <그도 결국은 전쟁을 치러야하는 종류의 인간이다. 승리하거나 패배하거나, 두 가지 길밖에는 남지 않은 것이다…….> 나는 생각했다.
V는 내게 그 <고백>을 한 날 이후로 그다지 변한 것이 없었다. 며칠간은 내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지에 대해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내가 평소와 다름없이 그를 대하고 행동하자 그러한 두려움은 간단히 수그러든 것 같았다. 그러한 용기를 만드는 데에는 이곳의 공기가 또 한몫 했을 것이다. 나. 나는 말했다시피 많은 것이 변했다. 나는 밖에 나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평소에도 나를 자세히 관찰하던 사람이 아니면 알아차릴 수 없는 변화였지만, 아무튼 커다란 변화였다. 나는 가끔 요양소의 뒷문을 열고 나무와 풀들이 돋은 정원으로 나가, 철조망 안쪽을 맴돌며 걸어 다니곤 했다. 유리창을 통하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태양빛을 맞고, 바람을 쐬고 공기를 들이마셨다. 그러한 와중에도 나는 늘 칼날처럼 날카로운 관찰력으로 주변을 쏘아보며 다녔다……. 이따금 나는 철조망 저편을 바라보기도 했다. 나무가 빽빽이 솟아 길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는, 철조망 너머의 숲을 나는 몇 분이고 가만히 쳐다보곤 했다. 그러다가 나는 다시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어느 날 V가 내게 물었다. 형님은 분명 바깥에 나가면 안 되는 것이 아니었느냐고. 나는 <그랬지.> 하고 대답했다. “상황이 달라졌어.” 내가 말했다. “이제는 더 멀리까지도 갈 수 있어. 우리는 돌아갈 거야.”
“어디로요? 도대체 어디로 돌아간단 말입니까?” V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목소리로 외치듯이 물었다. 그러나 나는 대답하지 않고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기만 했다. 그리고 그날 나는 V에게, 내가 몇 주 전부터 간호사들이 주는 약을 전혀 먹지 않고 있다는 것을 밝혔다. <남들에게는 말하지 마.> 하고 내가 덧붙였다. V는 작게 입을 벌리고 나를 보았다. 그는 놀랍다는 듯이 말했다. “형님은 변하고 있어요.”
“그래. 어쩌면 본격적으로 미치는 중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런 건 아무 의미도 없어.”
그것이 그날 우리가 한 대화였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나는 언제나처럼 창가 의자에 앉아서 태평함을 연기하며 사람들의 걸음걸이를 하나씩 자세히 살펴보고 있었다. 비틀거리며 걷는 사람이나 한곳을 계속 맴도는 사람, 혹은 필요 이상으로 똑바른 간호사들의 걸음걸이 따위를 말이다. 어떤 면으로 생각해보면 인간의 모든 행동은 그의 기저에 있는 심리를 표현하는 상징일 수도 있다……. 그들의 걸음걸이 하나에서도 그들 정신의 한켠이 비쳐 보이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과연 <거짓>이라는 개념은 성립될 수 있는 것일까? 우리들의 모든 행동과 몸짓들이 개인의 진실의 표상이라면, 인간은 과연 총체적으로 보았을 때 <거짓될 수 있는 요소>를 가질 수 있겠느냔 말이다. 거짓말조차도 진실의 한 단면이 아니던가! 카뮈의 익사자인 클라망스가 말했던 것처럼……. 문제는 다만 우리들 인간의 지각능력의 한계이며, 진실은 항상 도처에 노골적으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아무도 속일 수 없고 속을 수조차 없는 것이다. 나는 마음이 뛰었다. 진실이란 찾아야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것은 마치 공기처럼,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지만 자신의 존재성을 당당히 과시하며 사방에서 흐르고 있는 것이다……. 나는 내 생각 때문에 탄성을 지를 것 같았지만 억지로 참았다. 내 두뇌가 다시 <활동>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누군가에게 들켜서는 안 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때 어디선가 커다란 외침소리가 들려왔다.
나를 포함한 사람들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향했다. 그것은 복도 저편의 어떤 룸에서 간호사가 외친 소리였다. 그리고 그 간호사는 재차 뭐라고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거실 한쪽에 있던 V가 그리로 시선을 향한 채 내 곁으로 다가왔다. 곧바로 다른 간호사들이 구급용품이 담긴 카트를 끌고 소리를 지른 간호사 쪽으로 달려갔다.
“가보자고.” 내가 V에게 말했다. 그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와 V를 포함한 몇 명의 사람들이 소동이 일어난 장소로 모여들었다. 카트에서 구급용품들을 내려 뭔가 처치를 하고 있는 간호사들 사이에 누군가가 바닥에 드러누워 있었다. 둘러싼 간호사들 때문에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의 틈새로 얼핏 새빨간 핏빛이 보인 것 같았다……. 나는 모여든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까치발을 들어 바닥에 누운 사람의 얼굴을 확인하려 했다. 이유모를 강한 호기심이 나를 움직이고 있었다. 등 뒤에서 다른 간호사들이 들것을 가져오고 있었다. 그들은 다른 입소자들에게 물러나라고 외치면서 이쪽으로 향했다. 나는 소란 중에 누워있는 사람의 얼굴을 보았다. 그것은 젊은 남색가였다……. 그는 바닥에 대(大)자로 드러누워 천장으로 얼굴을 향하고 있었다. 그는 눈을 뜨고 있었지만 눈동자에는 거의 색깔이 없었다. 희멀건 동공으로 천장을 쳐다보고 있는 그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있었고 생명의 낌새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의 오른손에는 피투성이의 만년필이 한 자루 쥐여져있었다. 왼팔 손목에는 커다란 자상이 나있고, 거기서 피가 솟고 있었다. 손목 주변은 이미 흘러내리고 굳은 피로 검붉게 물들어있었다. 그 모습을 확인하자마자 나는 간호사에게 제지당해 뒤로 물러났다.
구토감을 느꼈다. 그리고 지독한 혐오감이 위장에서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간호사들은 지혈을 하고 상처를 싸매더니 들것 위에 남색가를 실어올렸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들고서 복도 저편으로 바쁘게 뛰어갔다. 사지가 축 쳐진채로 실려가는 남색가의 눈동자가 문득 내 시선과 마주친 것 같았다. 그 순간 나는 그의 새하얀 얼굴이 웃고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구역질이 올라오고 화가 났다…….
“더러운 게이자식.” 나도 모르게 나지막히 내뱉었다.
옆에 있던 V가 그 말을 듣고 놀랐다는 듯이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분노 때문에 몸이 떨릴 지경이었다. V에게는 아무런 변명도 하지 않고 나는 그저 손톱을 물어뜯었다. <그래. 오늘이다!> 내가 날뛰는 감정 때문에 혼란한 머리로 생각했다. <바로 오늘이다. 더 이상은 지체할 수 없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수장되어가는 시체와 같다. 꼴보기도 싫은 남색가놈…… 저것이 바로 <너희>들의 결말이다. 나는 오늘 생각해둔 일을 이루고야 말리라…….>
모여있던 사람들은 서서히 흩어지고, 복도에는 핏자국을 닦고 있는 간호사와 나, 그리고 V만이 남아있었다. V는 멍한 눈으로 서있었다. 나는 손톱을 물어뜯다가 V에게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간호사에게 들리지 않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밤에 잠들지 말고 깨어있어.”
V는 이상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네? 왜요?> 하고 그가 물어왔다.
“할 일이 있어. 아무튼 말한대로 해. 그리고 오늘 저녁에는 약도 먹지 마…….” 내가 거의 강요하듯이 말했다. V는 조금 주춤거리더니, 대걸레질을 하고 있는 간호사를 힐끔 쳐다보고서는 알겠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그는 내가 하는 말이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것 같았다. 나는 그 정도면 됐다고 말했다.
그리고 밤이 되었다. 나는 침대 위에 눈을 뜬 채로 누워서 모두가 잠들기를 기다렸다. 룸메이트는 자신의 침대에서 등을 돌린 채로 자고 있었다. 소등이 되어 사방이 깜깜했다. 높은 곳에 난 창문으로는 미약한 달빛만이 비쳐들어오고 있었다. 방 안은 조용하고 적막했다. 룸메이트의 규칙적인 숨소리만이 들릴 뿐이었다. 나는 천천히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조용히 신발을 신고 문 쪽으로 다가갔다. 철문이 열릴 때 최대한 소음이 나지 않도록 조심하며 나는 문을 열었다. 낮은 조명이 켜진 복도가 나타났다. 나는 우선 문을 살짝만 열어둔 채 복도를 내다보며 기다렸다. 야간에는 건물 안을 돌아다니는 것이 금지되어 있다. 그리고 그 규칙은 모두가 먹는 약 덕분에 굉장히 효율적으로 지켜지고 있다……. 나는 복도를 순회하는 간호사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감시카메라에 대한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지만 그런 것은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모든 일은 순식간에 일어날 것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한동안 기다린 뒤에 아무런 발소리도 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고 복도로 나와 조용히 문을 닫았다. V의 방이 어딘지는 알고 있었다. 나는 주변을 경계하고 발소리를 내지 않으면서 걸었다. 복도는 어두웠고 음산한 그늘이 사방에 드리워져 있었다. 광인들의 집. 모두가 자고 있다……. 내 심장이 뛰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나는 계속 걸었다. 다행히 아무도 만나지 않고 V의 방 문 앞까지 올 수 있었다. 나는 천천히 손잡이를 돌리고 문을 밀었다.
방의 구조는 내가 자던 방과 똑같았다. 마주하는 벽면에 침대가 하나씩 있었고, 그 중 하나가 V의 침대였다. 그는 시트 위에 앉은 채로 문을 여는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의 룸메이트는 자는 것 같았다. 나는 문을 열어둔 채로 V에게로 다가가 속삭였다.
“따라와.”
이제 그는 내 행위의 의미를 묻거나 따질 생각도 없는 것 같아 보였다. V는 조금 불안한 얼굴로 나를 따라 복도로 나왔다.
나는 우선 건물 뒷문으로 향했다. 따라오는 V가 계속해서 <어디로 가는 거죠? 어딜 가는 거예요 형님?> 하고 물어왔지만 대답하지 않았다. 우리는 뒷문까지 무사히 도착했다. 야간 당직을 서고 있어야 할 간호사들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신기했다. 나는 뒷문의 손잡이를 돌려보았다. 잠겨있지 않았다. <아마도 철조망을 믿고 있는 것이리라.> 나는 생각했다. 하기야 여기에 사는 사람들은 애당초 도망칠 일이 없다. 이곳은 강제수용소가 아니다. 모두 자신의 의지로 있는 것이다. 자신의 의지로 격리당한 채, 자신의 의지로 정신을 침잠시키는 약을 먹는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는 가족과 세계, 그리고 나 자신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이 요양소를 선택했다. 그러나 이곳은 썩은 뻘이었다. 내 정신은 내달리기를 원했다. V를 그가 있어야할 곳으로 되돌려주고 말이다……. 아무튼 정문으로 정면 돌파를 하거나 창문을 깨지 않아도 되어서 다행이었다. 나는 문을 열었다.
밤의 정원이 달빛 아래 드러나 보였다. 고요하게 부는 밤바람에 나뭇잎들이 사락거리고 있었다. 조명이라고는 단 한 점의 불빛도 없었다. 오직 하늘에서 흐르는 달빛뿐이었다. 풀잎 위에 달빛이 물결치며 번져 있었다. 우리는 정원으로 나왔다. V는 뭔가를 두려워하면서 내 뒤를 따라왔다. 밤이슬에 젖은 잔디를 밟자 푹신한 느낌이 신발 밑창을 통해 전해져왔다. 나는 똑바로 철조망까지 걸었다. 우리가 철조망 바로 앞까지 도달하자 나는 V에게로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우린 이걸 넘을 거야.”
그러자 V는 넋 빠진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그는 나를 향해 외쳤다.
“도대체 어디로 갈 건데요? 무슨 짓을 하려는 거예요 형님?”
“돌아갈 거라고 말했잖아.”
“집으로요? 안 돼요! 나는 돌아갈 수 없어요. 안 갈 겁니다!”
“집이 아니야. 나를 믿어. 자네를 위해 이러는 거야. 그냥 따라 와주면 안 되겠나?” 내가 그의 팔을 잡고 호소했다. V는 고민하는 것 같았다. 지금의 나를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V에게조차 내가 미치광이로 보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나 내 가슴 속은 생각한 바를 반드시 실행하고자하는 마음으로만 가득했다. 지금 나는 그저 앞만 보며 내달리는 미친개나 다름없었다.
“나는 자네 집이 어딘지도 몰라.” 내가 말했다. 그는 흔들리는 것 같았다. 설득이랄 것도 없었지만 V는 나를 따라가도 괜찮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한 것처럼 보였다. 나는 여전히 그의 팔을 붙잡고 있었다. 마침내 그가 말했다.
“제기랄.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나는 형님이 이 요양소에서 제일 똑똑한 사람이라고 믿어요.” 그러면서 그는 내 손을 팔에서 떼어놓고 철조망 쪽으로 한 발짝 내딛는 것이었다. 나는 그에게 작게 웃어보였다.
그리고 우리는 철조망을 넘기 시작했다. 먼저 내가 얼기설기 얽힌 철망을 움켜쥐고 위로 올라갔다. 철조망의 꼭대기에는 하나의 틈도 없이 가시 철선이 둘러쳐져 있었다. 나는 거리낌 없이 철선을 맨손으로 잡았다. 쇠로 된 가시가 손바닥에 박히며 찌릿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잡아당기고 늘어뜨려 사람이 지나갈 수 있을만한 틈을 만들었다. 손은 피투성이가 되고 옷소매는 온통 찢겨졌지만 나는 신경 쓰지 않고 작업을 계속했다. 밑에서 V가 걱정스럽게 쳐다보고 있었다. 핏방울이 그의 얼굴 위로 떨어지기도 했다. 그는 소매로 피를 닦았다.
내가 충분히 커다란 틈새를 만들자 우리는 그곳을 통해 철조망을 넘었다. 나는 아직도 계속해서 피가 흐르는 두 손을 힘껏 마주잡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온통 나무였다.
“우선 정문 쪽으로 가자고. 길을 찾아야 해.” 내가 말했다. V는 알겠노라고 대답했다. 우리는 철조망의 바깥을 둘러서 걸었다. 어느 정도 걷자 요양소 정문이 나왔다. 이 차선 포장도로가 깔려있었고, 그 위에 쇠창살로 된 커다란 문이 굳게 잠겨있었다. 우리는 지금 그 <바깥>에 있었다. 나는 쇠창살 틈새로 보이는 요양소 건물을 조금 쳐다보다가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도로는 내리막길이었다. 산에서 내려가는 길인 것이다.
“이 길이 어디로 이어지죠?” V가 옆에서 걸으며 물었다.
“병원. 큰 종합병원이 있어. 요양소를 일부러 가깝게 지었지. 거긴 정신병동도 있으니까.” 내가 대답했다. 나는 예전에, 그러니까 요양소에서 살지 않았을 때 그 병원에 서너 번 정도 가본 일이 있었다.
우리는 오랫동안 묵묵히 걸었다. 요양소에서는 점점 멀어졌다. 도로에는 가로등도 없었기 때문에 오직 달빛에만 의지해서 길을 따라가야 했다. 그리고 사십 분 정도 걷자 드디어 길가에 세워진 가로등들이 나타났다. 길 주변을 뒤덮은 나무들이 점점 적어졌고, 마침내는 멀리서 도시의 불빛까지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우리는 거기까지 걸어갈 필요는 없었다. 한 시간 쯤 더 걷자 길이 넓어지고 커다란 병원 건물이 눈에 보였다. 우리는 그쪽으로 향했다. V는 이제부터 무슨 일이 벌어질지 전혀 알고 있는 바가 없었다. 그는 그저 따라왔다.
병원 건물까지는 그냥 걸어올 수 있었다. 담장이나 빗장이 걸린 문 따위는 없었다. 그저 도로에 연결된 길을 쭉 따라오기만 하면 되었다. 병원은 ㄴ자 모양의 건물로 크고 높았다. 어떤 층의 창문들로부터는 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낮은 층들은 전부 깜깜했다.
“건물 뒤편으로 가야 해.” 내가 말했다. V는 순순히 따라왔다.
건물 뒤편에는 <OO병원 장례식장>이라고 간판이 붙은 별채가 있었다. 별채는 병원 본 건물과 연결되어 있었고, 무엇보다도 불이 켜있었다. 게다가 드문드문 사람들도 보였다. 대부분 검은 정장을 입고 있었다. 그들은 가끔 장례식장 건물의 문으로 드나들며 바깥에 서서 담배를 피우거나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나는 V를 잡아당기며 그들 사이에 끼어 자연스럽게 장례식장 정문을 통과할 수 있었다. 우리는 건물 안으로 들어왔다.
건물 안에서는 향냄새가 풍겼다. V의 표정이 변하기 시작했다. 그는 뭔가를 예감하고 있는 듯 했다. 나는 딱히 그에게 무어라고 말을 주지는 않았다. 우리는 건물 안의 복도를 걸었다. 복도에는 다섯 개의 뚫린 문이 있었는데, 그 중 세 군데 정도의 문 안쪽에서 사람들이 엄숙한 분위기로 밤을 새고 있었다. 초상을 치루는 중인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곳에는 관심을 주지 않고 계속 복도를 따라 걸었다. 본 건물로 이어지는 길을 찾아야 했다.
조금 걷자 별채의 모든 복도가 이어지는 커다란 문이 나왔다. 문은 병원에 나있는 문들이 대부분 그러하듯 위급할 때에는 병실침대 째로 밀고 들어갈 수 있도록 잠금장치나 손잡이가 없는, 가벼운 여닫이문이었다.
“여기야.” 내가 혼잣말을 하듯이 말했다. V는 점점 더 말이 없어졌다. 우리는 그리로 들어갔다.
길고 넓은, 어둑한 복도가 눈앞에 나타났다. 이것이 아마도 별채와 본 건물을 잇는 통로이리라. 우리는 복도를 따라 걸었다. 병원 특유의 소독약 냄새가 점점 짙어졌다. 조용하고 음침한 복도였다. 우리들은 아무 말도 없이 걸었다. 이제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 V 또한 예감하고 있었다. 마침내 우리들은 <영안실>이라고 패가 붙은 문 앞에 도달했다. 나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그리고 안을 확인했다. 아무도 없었다. V는 문 앞에서 머뭇거리고 있었다. 나는 그를 끌어당기면서 영안실 안으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커다란 공간이 있었다. 그리고 벽면에는 모두 천장까지 닿은, 철제 사물함 같은 것이 세워져있었다. 그 <사물함>에는 폭과 높이가 세 뼘 정도 될법한 사각형의 작은 문들이 무수히 많이 나있었다. V는 얼어붙은 듯이 서있었다. 나는 <사물함>으로 다가가서 거침없이 문들을 열어젖히고, 안에 있는 손잡이를 당겨 속에 든 것들을 죄다 꺼내놓았다. 한 개, 두 개, 세 개, 네 개……. 손이 닿는 문은 모조리 다 열어서 내용물을 꺼냈다. 바퀴 달린 기다란 찬장 같은 것들이 내용물을 담고 바깥으로 굴러 나와 <텅>하는 금속성의 소리를 내며 멈췄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냉장 보관된 시체들이 우리 눈앞에 나타났다.
남자, 여자, 늙은이, 젊은이, 아기. 사지 멀쩡한 것부터 복부가 터지고 머리가 날아간 것까지……. 온갖 송장이란 송장은 모조리 다 우리 앞에 있었다. 혈액이 깨끗이 제거되고, 차갑고 신선하게 보존된 채로. 감긴 눈꺼풀. 창백하게 질린 얼굴. 희미한 조명 아래 곧 바스러질 듯이 굳은 피부들……. V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나는 그가 이 광경을 어떻게 느끼고 있을지 상상해보았다. 숨을 죽인 관능의 도가니. 파랗게 얼어붙은 채 뒤끓는 욕망…….
그리고 나는 V에게로 갔다. 그의 눈동자에서 깊고 사나운 혼돈이 보였다. 그는 말도 못하고 그저 그 시체들을 멀거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나는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자.” 내가 말했다. “이제 자네 선택이야.”
그리고서 나는 시체들을 향해 그를 가볍게 밀었다. V는 힘없는 발걸음으로 몇 발짝을 내딛었다. 그는 어쩔 줄 몰라 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의 뒷모습을 잠깐 바라보다가 영안실 문을 통해 복도로 나왔다. 그리고 문을 닫았다.
십 분 정도 침묵이 흘렀다. 나는 영안실 문 앞에서 묵묵히 서있었다. 그러다가 문 안쪽에서 <덜컹>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아주 긴 간격을 두고, 끼익 거리는 소음이 작게 울리기 시작했다. 나는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나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끼익 거리는 소음은 점점 간격이 짧아졌다. 그것은 더욱 빨라지더니, 마치 폭풍처럼 거칠고 둔탁한 소리로 변해갔다. 나는 웃기 시작했다. <그렇지!> 하고 나는 웃으면서 소리를 질렀다. 문 안쪽에서는 <오! 아아!>하는 야수의 울음소리 같은 괴성이 울려 퍼졌다. 나는 손으로 바닥을 치면서 미친 듯이 웃었다. 복도 바닥에 피로 된 손도장이 찍혔다. 나는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나는 내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오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눈물이 광대를 타고 내려와 볼과 턱선을 따라 흘렀다. 나는 울면서 웃고 고함을 쳐댔다. 우리는 미친 사람들이다! 우리는 미친 사람들이다. 문 안쪽에서 나는 소리는 더 소란스럽고 격해져갔다. 웃음도 눈물도 멈추지를 않았다. 감정이 너무나도 광란발작을 하여 내 목에서 나오는 소리는 우는 것인지 웃는 것인지 모를 히끅거리는 소음으로 변했다. 그런데도 나는 계속해서 언어가 되어 나오지 않는 말들을 외쳤다. 나는 흐흐거리면서 바닥에 찍힌 새빨간 손도장에 눈을 박고 있었다. 눈물은 끊임없이 흘렀다.
1. <익사자들>, <홀로 사는 집>의 연장선상에 있는 소설. 완성한 지 몇 달이나 지난 뒤라서 글의 완성도에 대해서는 이렇다 저렇다 얘기하기가 힘들다.
2. 기행문의 형식을 하고 있지만 완전히 관념과 상상으로만 만들어진 소설. 까뮈적 상징성을 갖고 있는 배경을 깔아놓은 것 까지는 괜찮았는데 그 위에 글을 짓는 방식이 다소 서툴렀다.
태양 아래서
빛이 부서지고, 도시가 깨어나고 있었다. 창가 너머 멀리에서 사람의 목소리 같은 것이 들려왔다. 웅성거리는 발소리들. 벌써부터 태양빛이 밤새 차갑게 식어버린 공기를 달구고 있었다. 아침 햇빛이 침대 가에 다다르자 남자는 눈을 떴다. 그는 처음 태어난 사람처럼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여전히 숨통이 갑갑했다. 배를 타고 대양을 건너는 동안 얻은 질병이 아직도 그의 폐부에 남아 숨 쉬는 것을 고통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남자는 웬만하면 그 고통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는 이미 완전히 잠에서 깨었음에도 불구하고 잠시 동안 침대 위에 그대로 누워있었다. 그의 눈에 흙으로 된 천장과 벽이 비쳤다. 빛이 그것들을 황토색으로 빛나게 하고 있었다. 창밖에서는 규칙적으로 철썩이는 소리가 나지막하게 들려왔다.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두 눈을 문질렀다. 첫 번째 아침이었다. 그는 머리맡에 걸어두었던 수건을 집어 들고 방 밖으로 나섰다. 묵은 나무의 냄새가 나는 객실의 좁은 문을 열고 나오자 벽은 물론 바닥까지 돌과 흙으로 만들어진 기다란 복도가 나타났다. 마치 동굴의 벽을 도려낸 듯이 뚫려있는, 유리창도 달리지 않은 창문들로는 햇살이 방울져 흐르고 있는 초록빛 나뭇잎이 보였다. 그리고 사람들이 얇은 신발로 밟고 다니는 거리의 모습이 나뭇잎들의 사이사이로 흩어진 퍼즐조각처럼 드러나 있었다. 갑자기 날 것 그대로의 빛과 마주치게 된 남자는 눈이 부셔서 미간을 찡그렸다. 그는 천천히 빛에 익숙해지면서 수건을 쥔 채 복도의 한쪽 끝으로 걸어갔다. 그곳에는 화장실 겸 세면실이 공용으로 설치되어 있었는데, 그저 문으로 분리시켜두었을 뿐 황톳빛 벽은 복도의 그것과 다를 것이 없었다. 처음 건물에 들어섰을 적부터 계속 남자는 자신이 토굴 안에 들어와 있는 것 같다고 느꼈다. 그것은 사실 그럴싸한 감상이었다. 그 건물은 밖에서 보면 여기저기 구멍이 뚫린, 흙으로 빚어 만든 하나의 거대한 도자기나 다름없어 보였다. 어떤 커다란 손이 땅에서 흙을 긁어모아 건물을 만든 것처럼, 그것은 이음매나 억지로 접붙인 흔적도 없이 대지 위에 불쑥 솟아올라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속에 있으면 인간이 만든 인위적인 건축물 안에 속해있다는 느낌은 들지 않고, 천연의, 주변을 흐르던 수맥이 우연히 뚫어놓은 자연 동굴 속에 있는 것 같은 느낌만 드는 것이었다.
남자는 세면대를 찾아 수도꼭지를 틀었다. 미지근한 물이 뿜어져 나오며 그의 손을 적셨다. 생전 처음 맛보는 타지의 물줄기가 그의 손에 느껴졌다. 남자는 자신이 이국에 와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두 손을 그릇 모양으로 모아 물을 담고 세수를 하기 시작했다. 세수를 마치고 고개를 쳐들자 기침이 터져 나왔다. 가슴이 좀 먹히는 듯이 아팠다. 그는 수건으로 손과 얼굴을 닦았다. 거울을 보고 싶었지만 거울이 보이지 않았다. 별 수 없이 남자는 손대중으로 머리를 다듬고 화장실 밖으로 나왔다. 방으로 돌아가, 수건이 마를 수 있도록 침대의 머리맡에 그것을 펼쳐서 걸어놓고 그는 다시 복도로 나와 계단을 따라 내려갔다. 계단도 단조로운 색깔의 흙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두 개의 층을 내려가자 로비가 나왔다. 카운터에는 어젯밤에도 자리를 지키고 있던 마른 사내가 턱을 괴고 앉아있었다. 사내는 인기척을 듣고 계단을 내려온 남자 쪽으로 눈을 굴렸다. 그들은 고개도 까딱이지 않고, 무표정으로 인사했다. 로비는 창문이 없어서 어두웠다. 천장에 전등이 달려―달려있다기보다는 차라리 흙으로 된 천장에 박혀있다고 하는 것이 더 어울리는 표현이지만―있었지만 아침인지라 켜있지 않았다. 그늘진 흙과 돌들. 약간의 선선함이 감도는 모래냄새가 공기 중을 떠돌고 있었다. 남자는 그 냄새에 잠시 멈춰 있다가 다시 걸었다. 그는 살짝 열려있는 상태인 현관으로 향했다.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서자 거리의 모습이 눈앞에 들이닥치듯이 나타났다. 하늘에서는 햇빛이 직선으로 쏟아지고 있었고, 바람은 덥고 건조했다. 길거리를 누비는 사람들은 통이 넓고 소매가 긴 옷을 입고 있었다. 그들은 대부분 머리에 햇빛을 가릴 모자를 쓰고 있었으며 얼굴은 갈색으로 탔고 표정은 무뚝뚝했다. 마치 나무로 깎아 만든 커다란 인형들 같았다. 그 거리에서 흰 피부를 가진 사람은 남자 자신뿐이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대로변을 차지한 다른 건물들 역시 남자가 나온 여관처럼 황토색이었고 자연물처럼 솟아나있었다. 도시 전체가 흙으로 빚어진 왕국 같았다. 남자는 숨을 들이쉬었다. 대기 중의 태양빛의 농도가 너무 진해서 그야말로 녹은 황금을 들이마시는 것 같았다. 녹아내린 황금이 흐르는 대기. 단조롭고 건조한 모래로 쌓아올린 대지. 나무장승 같은 사람들. 하늘에서는 하얀 광선이 눈이 부시도록 엄청나게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과연 이 땅이 이렇게나 많은 빛들을 받아내고도 터지지 않고 버틸 수 있을지 걱정이 될 정도로.
그때 누군가가 등 뒤에서 남자의 어깨를 잡았다. 고개를 돌려보니 거리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갈색 피부인, 체격이 다부지고 눈매가 웃는 모양인 중년의 남자였다. 그는 어젯밤 트럭으로 남자를 이 도시까지 태워다 준 운전수였다. 그는 남자가 온 나라의 말을 할 줄 알았고, 차 안에서 남자와 몇 마디 이야기를 하기도 했었다. 「뭐 해요? 아침부터.」 그가 말했다. 「아침, 아침인데도 이렇게 뜨겁군요.」 남자가 그를 쳐다보면서 대답했다. 「그래도 선선한 편이지. 아직 해가 덜 떴으니까.」 그렇게 말하면서 운전수는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을 터트렸다. 「당신네 나라는 이렇게 뜨겁지 않은 모양이지?」 「네, 내가 자란 곳은 태양과 멀죠.」 아주 멀어요. 남자가 중얼거렸다. 「나는 차고 어두운 땅에서 왔습니다.」 운전수는 고개를 끄떡거렸다. 그리고 말했다. 「나는 오후쯤에 집으로 돌아갈 건데, 여기서 멀지 않아요. 만약 통역이 필요하다면 그리로 오쇼. 내가 어딘지 알려줄 테니까.」 남자는 알았다면서 말했다. 「고맙군요. 하지만 괜찮아요. 나도 이 나라 말은 어느 정도 공부했으니까.」 「그래, 그렇군.」 운전수는 또 고개를 끄덕였다.
전날 밤 운전수와 남자는 차로 사막을 건너왔다. 뼈가 시리도록 차갑고 어두운 사막이었다. 밤새 남자는 차창으로 바깥 풍경을 보고 있었다. 그런 광경은 태어나서 처음 보는 것이었다. 상념마저 송두리째 먹어치우는 완전한 고독.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과 그 속에 뚫린 구멍인 듯 교교한 달덩어리. 인간의 냄새라고는 털끝만큼도 나지 않는 그 풍경은 세상 끝의 폐허인 것처럼 보이면서 동시에 모든 것의 탄생 이전에 깔려있는 잔잔하고 깊은 호수처럼도 보였다. 모든 것이 공허를 담고서 벌벌 떨고 있었다. 남자는 그때 자신이 극단의 세계에 와 있다는 것을 피부로 느꼈다. 한량없이 내리쬐는 존재의 외침. 그 엄청난 파도 속에서 간신히 정신을 유지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은 털털거리는 트럭의 엔진소리 뿐이었다.
여관 앞에서, 얼마간 대화를 나누다가 그들은 헤어졌다. 운전수는 볼일이 있다면서 거리의 인파 사이로 사라졌다. 남자에게는 할 일이 없었다. 그는 몹시 한가했다. 사실 그는 무턱대고 본국을 떠난 것이었다. 아무런 계획도 예정도 없었다. 갑자기 광기에 휘둘린 것처럼 그는 모두 다 그만두고 배를 탔다. 그리고 한 점의 망설임도 없이 돌과 모래의 땅으로 향한 것이었다. 그래서 막상 도착하자 할 일이 없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그가 권태나 지겨움을 느끼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 땅의 태양빛은 도무지 그러한 감정을 느낄 수 없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었다. 눈앞이 막막할 정도의 빛은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남자를 알 수 없는 충만감으로 넘치게 만들고 있었다. 빛은 그의 영혼 밑바닥까지 쬐고 있었다. 존재가 투명하게 꿰뚫리고 그 속의 바닥없는 허무와 고통까지 벌거벗겨진 채 드러나는 것 같았다. 아아, 하고 남자는 마음속으로 탄식하며 발을 내딛었다. 그는 갈색 피부의 사람들 사이에 섞여 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태양이 하늘 꼭대기에 다다랐다. 남자는 한참이나 걷고 있었다. 온몸이 땀으로 번질번질했고 피부고 몸속이고 할 것 없이 화끈거렸다. 어느새 그는 바다 앞에 서있었다. 돌로 된 해변이었다. 파도가 바위 위로 내려치고 있었다. 불같은 하늘 아래 청록색 바다가 끊임없이 펼쳐져있었다. 몇 척의 배가 보였다. 주변에는 어부들이 검게 그을린 근육을 드러낸 채 일하고 있었다. 그 사이에서 남자는 열 때문에 반쯤 혼이 나간 상태였다. 그는 바지 자락을 걷고 파도로 깎인 바위 아래로 내려갔다. 구두를 벗고 바닷물 속에 발을 집어넣자 우둘투둘한 자갈들이 밟혔다. 바닷물은 대지의 열을 받아 따뜻했다. 그는 바위그늘 밑에 앉았다. 한손에는 가죽구두 한 짝을 쥐고 있었다. 이런 나라에 가죽구두는 어울리지 않았다. 남자는 돌아가면 시장에서 샌들을 하나 사야겠노라고 생각했다. 그는 한참 동안 그늘에서 열을 식히고 있었다. 등 뒤로는 사람들의 부산한 발소리가 멀찍이서 들려왔고 앞에서는 규칙적인 파도소리가 깊고 아득하게 밀려오고 있었다. 이곳은 영혼을 소독하는 장소 같았다. 불볕 같은 더위. 팽팽한 힘줄을 세차게 해변으로 내리치는 파도. 그의 생명을 모두 불살라버릴 듯한 태양. 남자가 태어난 나라의 스산하고 습기 찬 공기가 이제 와서는 모조리 거짓말 같았다. 그는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소금기 섞인 더운 공기가 가슴 가득히 들이찼다. 그는 또 한 번 가슴의 통증을 느꼈다. 수천 개의 바늘로 폐부를 찔러대는 것 같은 고통. 남자는 그것을 일종의 대가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파도로 흔들리는 배 위에서 며칠 밤낮을 앓는 동안 그가 생각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그것뿐이었다. 고통. 주어진 운명을 거부하려는 자에 대한 신의 분노. 그는 고열과 가쁜 기침 속에서 내내 주먹을 불끈 쥐고 있었다. 배의 흔들림에 따라 죽음이 눈앞에서 어른거릴 때마다 남자는 더욱 더 거부했다. 나는 수면 위로 나가노라. 죽음이여, 나는 네가 발도 못 댈 땅으로 간다. 그리고 남자의 가슴에는 영영 사라지지 않을 통증이 남았다.
태양빛이 죽일 듯이 달려드는 대지의 한복판에 놓인 요새인 양 바위그늘은 안전했다. 몸을 온통 뒤덮은 땀도 바닷바람에 식어가고 있었다. 더위 속에서 돌연 스쳐지나가는 한기가 느껴졌다. 남자는 연기처럼 피어오르는 졸음을 느꼈다. 태양의 땅. 바다의 앞마당. 그늘 밑에서, 그는 이 거대한 공기의 틈바구니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다. 잠결에 남자는 생각했다. 드디어 해방되었노라고.
눈을 떴을 때는 태양이 노을빛으로 변해있었다. 너무 오래 바닷물 속에 담가두었던 발은 쭈글쭈글해졌고 몹시 찼다. 그는 일어나서 기지개를 켰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몸이 피곤했다. 마치 하루 종일 달리기라도 한 듯이. 한 손에 가죽구두를 쥐고서 맨발로 바위 위로 걸어 올라갔다. 낮보다 적어진 사람들이 거리를 거닐고 있었고, 고기잡이를 하던 배들은 항구에 들어와 있었다. 가게를 지키는 늙은 상인들은 색깔 없는 눈으로 허공을 멀거니 지켜보고 있었다. 남자는 여전히 맨발이었다. 그는 열기가 흐르는 땅바닥을 걸었다. 모래와 자갈의 두드러진 형태가 발바닥에 느껴졌다. 불쑥 솟아난 돌들 때문에 발이 아프기도 했다. 그러나 남자는 여전히 신발을 신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는 땅에서 태어난 사람처럼 길을 걸었다. 짙어진 노을빛이 거리를 짓뭉개고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그 무게 때문에 지친 것처럼 보였다. 나뭇조각 같은 그들의 표정 속에 미세하게 새겨진 주름과 오래된 존재의 피로가 보였다. 남자는 지나치는 사람들의 모든 표정을 하나하나 눈에 담고 있었다. 이곳에서는 모든 것이 명백하다. 그는 생각했다. 남자가 원래 살던 나라에서는 사람들의 얼굴 위에 뿌연 안개가 끼어있었다. 일 년 내내 그 안개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것은 모든 사람들을 익사자처럼 보이게 만들었고, 사람들은 그 속에서 웃고 있었다. 그러나 이곳은 건조한 나라이고, 낮이고 밤이고 안개 따위는 끼지 않았다.
시장에 들어섰다. 사람들이 온갖 것들을 사거나 팔고 있었다. 남자는 맨발로 지저분한 거리를 걸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자락과 소매가 긴 옷을 입은 여자들이 식재료 따위를 사기 위해 시장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모두가 갈색 피부에 검은 머리를 하고 있었다. 가끔 행인들 중 유독 특이한 색을 하고 있는 남자에게 눈길을 향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같이 무표정한 눈으로 남자를 쳐다보다가, 곧 아무렇지도 않게 고개를 돌리고 남자 따위는 이미 완전히 잊어버린 듯이 자기 할 일에 집중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관심 자체가 무관심에 가까운 것이었다. 목석같은 사람들이었다. 남자는 그 사이를 걸어 다녔다.
얼마 안 가 남자는 옷가게를 하나 발견했다. 다른 가게들과 마찬가지로 흙으로 지어진 건물이 거리 쪽을 향해 완전히 트여있었고, 그 안쪽 벽에 옷가지들이 일견 무질서하게 걸려있었다. 나무로 만든 선반에는 신발들도 놓여있었다. 나무나 가죽으로 만든 샌들이 대부분이었다. 남자는 멈춰 서서 그것들을 훑어보았다. 가게 안쪽에 앉아있는 주인이 턱을 괴고 눈동자만을 굴려 남자를 지켜보고 있었다.
「신어 봐도 되겠습니까?」 남자가 가죽샌들 하나를 집어 들고 그들의 언어로 말했다. 상인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구두를 바닥에 내려놓고 샌들 몇 개를 하나씩 신어보았다. 그리고 그는 크기가 맞는 것을 하나 골라 상인에게로 가져갔다. 「얼마입니까?」 상인은 가격을 말하더니 남자가 바닥에 둔 구두를 잠시 눈여겨보았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저건 이제 안 신을 거요?」 「네. 왜 그러시죠?」 「얼마쯤 신었소?」 남자는 상인이 무엇 때문에 그런 것들을 묻는지 몰랐지만 순순히 대답해주었다. 「일 년하고도 반년쯤 신었죠.」 그러자 상인은 손을 내밀며 말했다. 「한 번 봐도 되겠소?」 남자는 구두를 들어 올려 상인에게 주었다. 상인은 그것을 들고서 가죽의 질이나 굽의 닳은 정도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가끔 이런 신발을 찾는 손님들이 있는데.」 상인은 책상 위에 그 구두를 올려놓으면서 계속 말했다. 「공급량이 부족하거든. 이거 팔지 않겠소?」 남자는 상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팔아도 상관없는 물건이었다. 여관까지 들고 가봤자 짐밖에 되지 않을 것이었다. 차라리 버려도 좋은 물건인데 사준다는 사람이 있으니 잘된 일이었다. 「그럼 그렇게 하시죠.」 남자가 희미하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리고서 남자는 지갑을 꺼내 샌들의 값을 지불했다. 상인은 그것을 받더니 지폐 몇 장을 세어 남자에게 되돌려주었다. 「구두 값이오.」 남자는 웃었다. 「물건을 샀는데 오히려 돈을 받았군.」 상인도 덩달아 그 나무껍질 같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그런 건 아니지. 당신은 샌들 값을 내었으니까. 외국인 양반.」 그의 웃는 얼굴은 찌그러지고 빛이 바랜 알루미늄 캔을 생각나게 했다. 남자는 발에 묻은 모래를 털고 방금 산 샌들을 신었다.
옷가게 밖으로 나와 남자는 걸어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시장을 나오자 거리를 걷는 사람들의 수가 적어졌다. 그는 여관으로 가는 길을 찾고 있었다. 어느덧 하늘은 짙은 붉은색에게 완전히 점령당해 있었다. 간혹 푸른 구름이 보였다. 하늘의 동쪽 가장자리는 이미 어두운 보랏빛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빛의 선명함이 죽어가는 시간. 거리는 색깔의 무게 밑에 눌려있었다. 주택가를 가로질러 걸었다. 이 나라 특유의 향신료 냄새와 음식 만드는 냄새, 그리고 시큼한 인간 냄새가 풍겼다. 건물들의 안쪽에서는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소리가 들렸다. 골목골목으로 삶이 거닐고 있었다.
그는 곧 여관을 찾았으나 아직 시간은 밤이 아니었다. 지금은 그 좁고 퀴퀴한 방으로 들어가 누워있고 싶지 않았다. 방 안에서는 자는 것밖에 할 일이 없었다. 그는 나라를 뛰쳐나올 때 책 따위는 단 한 권도 가지고 나오지 않았다. 지금 방에 들어가 봤자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멍하니 창문 밖만 내다보다가 밤이 되면 잠드는 일 뿐일 것이다. 남자는 여관 주변의 거리를 조금 어슬렁거렸다. 어딘가 갈 곳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늘이 점점 어두워지고, 길가에 행인들의 숫자가 줄어들자 드디어 불을 밝히는 점포들이 있었다. 카페와 선술집들. 노란 조명 아래 모여드는 사람들. 남자도 그들의 드문드문한 행렬 속에 속해 어느 선술집으로 걸어 들어갔다. 카페테라스를 거쳐 점포 안으로 들어가자 눅진한 알코올 냄새와 부산스러운 소음이 얼굴을 향해 확 끼쳐왔다. 남자는 사람들 속에서 조금 머뭇거리다가 바텐더 맞은편으로 가 앉았다. 그리고 뭐든 좋으니 너무 독하지 않은 것을 달라고 주문했다. 기다리는 동안 남자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테이블을 둘러싸고 삼삼오오 모여앉아 술을 마시고 대화를 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피로를 취기로 씻어내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었다. 마치 어느 원시부족의 신과도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그들의 갈색 얼굴이 새롭게 보였다. 인간의 모습을 하고 감정을 흘리는 순간의 신들. 술을 마시고, 일터에서 있었던 일들을 짧고 담담한 어조로 이야기하고, 가끔 거대한 짐승처럼 웃는다. 태양의 조각이 남아있는 그들의 피부. 선술집의 조명 아래서 번들거리는 다부진 근육. 남자는 자신의 하얗고 마른 몸이 조금 부끄럽게 느껴졌다.
남자의 잔이 나오자 그는 그것을 홀짝였다. 오래된 나무의 향기가 나는 투명한 리큐어였다. 배를 탄 후 처음으로 마시는 술이었다. 오랜만에 알코올과 만나자 뇌에 전류가 흐르는 것 같았다. 술을 한 모금 머금고 그는 자기도 모르게 머리를 흔들었다. 사람 냄새가 나는 후끈한 공기가 얼굴을 스쳤다. 그는 느릿느릿 술을 마시면서 주변에 앉은 사람들을 흘겨보았다. 대부분 떠들고 있었고, 집중하지 않으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남자는 굳이 집중하려고 하지 않았다. 자신이 모르는 언어가 불안과 두려움의 형상으로 주변에서 얼씬거리는 것을 그는 그저 받아들였다. 완전한 이방인의 심정. 게다가 그는 취기 때문에 조금 대범해져 있었다. 술은 이 나라만큼이나 메마르고 화끈거리는 맛이 있었다. 방울져 떨어지는 태양을 마시는 느낌이었다.
밤이 점점 깊어갔다. 사람들의 목소리는 알코올에 달아오르고, 점점 더 유쾌하고 높은 톤으로 바뀌어갔다. 그다지 밝지 않은 노란 조명이 남자 주변을 감싸고 있었다. 누군가 새로운 사람이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빈자리를 찾더니 남자의 옆으로 와 앉았다. 키가 작고 명랑한 눈을 가진 남자였다. 그는 바텐더에게 주문을 하고, 남자와 눈이 마주치자 눈짓으로 인사를 건네 왔다. 남자도 인사를 받았다. 키 작은 남자는 바텐더에게 잔을 받더니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외국인이시군! 우리말 할 줄 아시오? 어디서 오셨소?」 남자는 잠시 입을 다물고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그들 말로 대답했다. 「조금이오. 바다 건너에서 왔습니다.」 키 작은 남자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왜 이런 나라에 오셨지? 볼 것도 없을 텐데.」 「사막이 보고 싶었거든요.」 「사막이라!」 키 작은 남자가 자신의 잔을 기울이고서 말했다. 「나는 외국에 나가본 적이 없어요. 나는 목수인데, 어려서부터 목공장에 다니면서 일을 배웠지. 평생 나무만 만지면서 살았소. 바다 너머에 뭐가 있는지 생각해본 적도 없고.」 말하다가 그는 웃었다. 「목수일 말고 다른 일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지.」 남자는 그 키 작은 남자의 웃음을 보고 그가 퍽 명랑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도 대낮에는 남자가 거리에서 만났던 사람들과 다름없이 사막의 우상처럼 무뚝뚝한 갈색 얼굴로 말없이 일에 열중하고 있을 것인데, 밤이 되자 모든 사람들이 더없이 육체적이고 솔직한 인간으로 보이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여러분이 넘칠 듯한 영혼의 풍요와 축복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남자가 아무도 듣지 못하게 중얼거렸다. 이토록 뜨거운 나라에서. 이토록 뜨거운 나라에서.
「내가 태어난 나라에서는 바다도 보이지 않아요.」 남자가 말했다. 「강은 많았지만 바다는 멀었습니다. 땅으로만 둘러싸인 곳이었죠.」 「우린 늘 바다를 끼고서 사는데.」 키 작은 남자가 대답을 겸하여 말했다. 「네. 나는 이곳이 정말 좋은 나라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남자의 병든 폐가 돌연 욱신거렸다. 그는 애써 통증을 무시하고 이어서 말했다. 「햇빛 밑에 인생이 전부 드러나 보이지요.」 남자가 짐짓 진지한 얼굴을 만들어 말하자 키 작은 남자는 싱긋 웃어보였다. 「그래, 그래서 여기엔 뭐 때문에 오신 거요? 관광?」 「관광이라.」 키 작은 남자의 질문에 남자가 중얼거렸다. 그렇다. 왜 여기에 왔는가? 「나는 고향에서 사업을 했었습니다.」 그는 사실 도망 온 것이었다. 「그런데…… 그만뒀지요. 전부 팔아버리고 배를 탔습니다.」 그는 그 추운 땅에서 죽어버리는 것이 두려웠다. 「나는 진력이 났어요.」 그 습기 찬 공기 속에서 계속 살아가는 것도 두려웠다. 「나는 사막이 보고 싶었습니다.」 남자는 안개에 가려지지 않은 태양이 보고 싶었다. 「바다도 보고 싶었고 말입니다.」 그는 생명을 느끼고 싶었다. 「삶과 만나고 싶었어요.」 남자의 눈은 초점이 없었다. 그는 술잔을 들어 들이켰다.
「하지만 이곳에 그렇게 대단한 것은 없는데.」 키 작은 남자가 말했다. 「네.」 남자는 동의했다. 「대단할 거 없죠.」 그렇게 말하면서 그는 웃음을 지었다. 말끔한 웃음이었다. 「내일은 수영을 하러 가야겠어요.」 술잔을 내려놓으면서 남자가 말했다.
그러나 다음날 남자는 수영을 하러 가지 않았다. 그는 아침이 밝았을 때 약간의 두통을 느끼며 여관방의 침대 위에서 눈을 감고 있었다.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두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입안에 여전히 리큐어의 향긋한 맛이 감돌고 있었다. 남자는 여전히 눈을 뜨지 않았다. 눈을 뜨지 않아도 아침의 태양빛이 눈꺼풀을 꿰뚫고 안구에 쏟아지고 있었다. 메마르고 세찬 빛이여. 그는 일어나고 싶지 않았다. 아직도 머릿속을 맴돌고 있는 알코올의 잔향과 무한히 남은 자유 때문이었다. 그의 얼굴을 쓰다듬는 손은 남자의 얼굴표면에서 몇 개의 주름을 짚어냈다. 가죽 깊이 새겨진 주름들을 남자의 손은 훑어나갔다. 남자는 아직 늙은이라고 불리울 나이는 아니었다. 그러나 분명히 젊지는 않았다. 그는 지나간 청춘을 생각했다. 청춘. 도대체 자신의 청춘을 온전히 쾌락과 사랑에 바칠 수 있는 운 좋은 젊은이가 이 세상에 얼마나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오히려 금욕주의와 고뇌에 사로잡혀 가슴의 깊숙한 곳에 감금시켜버리는 것이 청춘이다. 그리고 그 감금된 청춘마저 사라지고 나면 더 이상 젊지 않게 된 사람들은 생각하는 것이다. 그것이 내 입술을 적실 마지막 달콤한 물이었는데. 죽음에서 피어난 이 세상 그 어떤 술보다 독한 희망이라는 이름의 독주였는데.
남자의 청춘은 춥고 안개 낀 그의 조국에 매여 있었다. 태양빛도 쬐지 않고 사방에 솟은 산맥의 그늘이 드리운 깊은 땅에 붙잡혀 있었다. 그는 그 땅에서 일을 했고 돈을 벌었다. 그는 아주 재능 있는 장사꾼이었다. 그렇다, 그는 재능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그 재능이야말로 자신의 모든 것이리라고 생각했다. 그랬던 것이다. 남자는 온 열정을 다하여 돈을 벌고 물건을 팔아치우고 거래를 성사시켰다. 그의 모든 청춘을 소비해서. 그 추운 나라에서 남자의 재능은 무엇보다도 어울리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한 치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청춘이여, 그것은 소유하는 것이 아니었다.
남자는 수영을 하러 가고 싶었다. 바다로 가서 완전힌 맨몸뚱아리로 파도와 부딪히고 고래의 힘줄처럼 묵직하게 휘몰아치는 해류 위에서 헤엄치고 싶었다. 그러나 그의 메마른 팔다리, 하얀 피부, 단 한 번도 헤엄쳐본 적 없는 육신이 욕망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그는 배 위에서도 병마와 싸우느라 거품이 부글거리는 파도와 마주선 적이 없지 않던가. 그러나 나는 해방되었다! 남자가 돌연 내뱉었다. 그래, 그는 태양의 땅으로 왔다. 대서양과 사막을 건너 그는 태양과 바다의 번쩍 뜨인 눈앞에 도달했다. 그리고 삶을 모조리 태워버리는 것이다. 어느 누구에게나, 주어진 것은 오직 짧디 짧은 현재 뿐이라고 남자는 몇 번이나 되뇌었다.
그때 누군가가 방문을 두드렸다. 남자는 눈을 떴다. 문을 열자 운전수가 있었다. 「안녕하시오.」 남자의 얼굴을 보고 그가 웃음 지어보이며 인사를 건넸다. 「좋은 아침입니다.」 「네, 좋은 아침입니다.」 이렇게 일찍부터 무슨 일이시죠? 남자가 물었다. 운전수는 사막 한복판에 있는 오아시스 마을에 갈 일이 있다고 했다. 사람 몇과 물건을 싣고 차로 가는데, 남자가 대낮의 사막은 본적이 없으니 같이 가면 어떻겠냐는 것이었다. 여행객의 가이드 역을 자처하는 것을 즐기는 성격 같았다. 남자는 잠시 옷자락을 만지작거리더니 곧 좋다고 했다. 볼 수 있는 것은 전부 다 봐두고 싶었다. 운전수의 제안은 환영할만한 것이었다. 남자는 언제쯤에 출발하느냐고 물었다. 운전수는 손목시계를 보더니 두 시간 후에 차를 몰고 여관 앞으로 오겠다고 말했다.
운전수는 돌아갔다. 남자는 방문을 닫고 침대 위에 주저앉았다. 뭐라고 꼬집어 말할 수 없는 감정이 남자의 울렁이는 심장을 지배하고 있었다. 출렁거리는 갑판 위에 누워있는 기분이었다. 빛을, 좀 더 강하고 세찬 빛을. 남자는 마음의 껍질과 축축한 살점을 전부 불태워버리고 정신의 새하얀 알갱이만 남겨놓을 정도로 강렬한 빛을 원했다. 이 빛의 고장까지 와서도 남자의 정신은 더 강한 빛에 목말라 있었다. 그의 인간성을 지워버릴 만큼 강하고 자비 없는 빛에 남자는 자신의 온 존재를 내맡기고 싶었다. 충족되지 않는 비참한 욕망이 그의 가슴에 가득했다. 이것은 일종의 숙명 같은 것인가? 태양이 없는 토지에서 태어난 나는 일상의 공기에서도 외국의 하늘 아래서도 만족하지 못하고 언제까지나 빛을 찾아 헤매야만 하는 것인가? 내 마음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강하게 주장하고 있는, 어떤 초월적인 빛으로 말미암아 산산이 파열하고 싶어 하는 이 감정은 무엇인가? 과연 어떤 빛이 그 욕망을 채워줄 수 있단 말인가? 차라리 내가 바싹 마른 볏짚이었더라면! 남자의 정신은 횡설수설하며 지껄였다. 그는 갑갑했다. 사막을. 사막을 보면 나아질 것인가? 구름 한 점 없는 하얀 하늘과, 소금과, 돌과 태양빛의 한 가운데로 기어나가면 조금이라도 이 갈망이 충족될 것인가 말이다. 남자는 가만히 앉아서 기다렸다. 그는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이제 막 아침으로부터 벗어나고 있는 도시는 조용했다.
세 시간 뒤 남자는 운전수의 차에 몸을 싣고 있었다. 차는 일정한 소음을 내며 아무것도 없는 사막 위를 홀로 달리고 있었다. 차 안에는 시트에 몸을 파묻고 있는 남자와 운전수 외에도 사내 하나와 여자 둘이 타고 있었다. 그들은 바구니와 상자들 사이에 앉아 무표정한 갈색 얼굴로 손때 묻은 차창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렇다. 그들은 창문 밖의 풍경을 내다보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아무것도 바라보지 않으려고 하는데 그저 시야에 그것이 놓여있다는 듯이 차창에 눈을 박고 있었다. 이 지역 사람들 특유의 그러한 무관심에는 이미 익숙해져있었기 때문에 남자는 이제 와서 그들의 태도를 신기한 눈동자로 쳐다본다던가 하는 일은 하지 않았다. 차창 밖의 풍경은 이상할 정도로 단조롭고 노골적이었다. 그곳에는 돌과 태양밖에 없었다. 그 틈바구니에 끼인 지평선은 열기로 일그러져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태양빛과 바위로 만들어진 하나의 거대한 초현실적 그러데이션이 창문을 차지하고 있었다. 열기 또한 굉장했다. 차는 그야말로 불꽃의 한복판을 달리고 있는 것 같았다. 차 안의 공기는 후끈하게 달아올라 있었고 그 더위 때문에 공기의 부피가 유난히 더 잘 느껴졌다. 숨을 쉴 때마다 뜨겁고 부드러운 덩어리를 흡입하는 것 같았다. 다들 말이 없었다. 사막의 엄청난 침묵이 차 안까지 스며들어 있었다.
남자는 운전수 옆 조수석에 앉아 입을 꾹 다물고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벌써 얼마나 달렸을까? 계속해서 똑같은 풍경만 연속되고 있었다. 달궈진 돌멩이들이 버석거리며 부서지는 황갈색 사막. 내리쬐는 햇빛 때문에 오히려 새하얗게 보이는 백열화된 하늘. 남자의 머릿속도 하얗게 비어있었다. 그는 그저 돌과 바위들이 시야를 스치며 지나가는 것을 더위 때문에 몽롱한 눈으로 보고 있었다. 밤에 봤던 것만큼이나 사막은 고요했다. 한참이나 말이 없던 운전수가 문뜩 입을 열어 곧 도착할 것이라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남자는 눈썹도 까딱하지 않은 채 가슴 속의 쓰라린 통증을 느끼고 있었다. 가끔 생각하건데, 만약 지옥이 그가 생각하는 것만큼이나 뜨겁고 끊임없는 열광으로 가득한―그렇다. 차라리 환희로 보일 정도로 지독한 고통으로의 열광 말이다.― 곳이라면 남자는 기꺼이 그곳으로 떨어지고 싶었다. 고요와 열기를 머금은 공기가 그의 가슴을 짓누르고 있었다. 병(病)! 생명의 뒷면. 기쁨으로 거울놀이를 할 때 홀연히 나타나는 유령 같은 것. 진실의 잘려진 단면…… 그것은 죽음의 냄새 같은 것이라서, 고통과 더불어 삶을 더욱 분명하게 느낄 수 있게 해주었다. 통증이야말로 살아있다는 증명이 아니던가. 그리하여 불만족과 갈망의 표현인 남자의 병은 그가 어떤 빛을 열렬히 구하고 있다는 것을 자각할 수 있게 만들었다. 그는 그저 바깥을 내다보고 있었다. 뒷자리에서는 가끔씩 달칵거리는 인기척이 들려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시야 끝자락에서 번쩍거리는 무언가가 보이기 시작했다. 석영을 투과한 것 같은 희멀건 빛이 사막 저편에서 빛나고 있었다. 온통 돌무더기뿐인 땅에서 그 빛은 이질적이고 돌연스러운 것이었다. 그들이 타고 있는 차는 빛을 향해 직진해갔다. 어느 정도 가까이 다가가자 그 빛이 오아시스의 샘 표면에서 흩어진 햇살들이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보석조각을 흩뿌려놓은 것처럼 번뜩거리는 빛 덩어리들 주변에는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다. 층이 낮은 건물들이 샘을 중심으로 옹기종기 모여 있었고, 키 큰 종려나무가 길 곳곳에 뿌리를 뻗고 있었다. 꽤나 규모가 큰 마을이었다. 주택지역 바깥으로는 밭과 과수원이 둥글게 펼쳐져 있었다. 사람들은 그곳에서 땀 흘리며 일하고 있었다. 아무런 장애물도 없는 그 사막의 복판에는 마치 태양이 통째로 쏟아지는 것처럼 빛이 내리쬐었다. 햇빛 아래 무엇 하나 가릴 수 없는 땅. 이곳에서 태양과 과실나무들을 갖고 태어난 사람들은 자신이 행복하다는 사실도 모르는 채 행복하리라. 남자는 자칫하면 자기연민까지 느낄 것 같았다. 이래서는 안 된다. 그는 마음을 다잡았다. 그가 이곳에 온 것은 감상에 빠지기 위함이 아니었다. 남자는 장막들을 전부 걷어내고, 그가 찾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내기 위하여 배를 탄 것이 아니었던가. 그는 빛을 찾으러 온 것이었다.
운전수는 어느 벽돌건물 앞에 차를 세웠다. 뒷자리에 타고 있던 세 사람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문을 열고 짐들을 내리기 시작했다. 운전수도 트럭 뒤로 가서 물건을 내렸다. 남자는 혼자 앉아있기가 멋쩍어 짐을 내리는 것을 도왔다. 그간 내내 무표정하던 흑인 여자가 남자를 향해 웃어보였다. 그러나 그 웃음도 거짓말이었다는 듯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리는 것이었다. 남자는 그런 것이려니 하고 생각했다.
짐을 다 옮겼을 즈음에 건물에서 잘 차려입은 중늙은이 하나가 내려왔다. 그는 운전수의 손을 잡고 인사를 하더니 무어라고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세 사람은 그들의 이야기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남자는 눈이 부셔서 손으로 이마에 그늘을 만들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얇은 천으로 된 후드를 뒤집어 쓴 사람들이 길을 거닐고 있었다. 과연 이곳은 햇빛에 대한 방패가 필요했다. 머릿속까지 햇빛이 송곳처럼 찔러 들어오는 것 같았다. 눈을 감아도 눈꺼풀을 뚫고 들어오는 볕 때문에 사방이 하얗게만 보였다.
운전수는 대화를 마치고 남자에게로 걸어왔다. 세 사람의 흑인은 각자 바구니와 짐을 들고 중늙은이를 따라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일을 하러 온 거요.」 운전수가 말했다. 「도시에 있던 오래된 공장 몇 개가 망했거든.」 「여기엔 새 일자리가 있나요?」 남자가 물었다. 「이 마을엔 농장이 많으니까. 일손은 많을수록 좋지.」 운전수의 말에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곧 다시 차에 올라탔다. 운전수는 저녁까지 시간이 빈다고 말했다. 다섯 시간 정도 여유가 있었다. 그들은 흙빛 거리를 달리다가 길가의 어느 카페 앞에 차를 세우고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가게는 그늘이 지고 바람이 잘 통해서 서늘했다. 운전수와 남자는 테이블을 하나 잡고 점원에게 차를 주문했다. 「아직 이르지만.」 운전수가 말했다. 「술 한 잔 쯤 해도 좋아요. 나는 운전을 해야 하니까 못 마시지만.」 이곳은 아니스 술이 맛있다고 운전수가 알려주었다. 그러나 남자는 술을 마실 기분이 아니었다. 그는 사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탁하고 불투명한 색깔의 차가 두잔 나왔다. 단맛이 강한 음료였다. 너무 익어 술이 된 과실을 마시는 것 같았다.
활짝 열린 가게 현관으로는 거리가 내다보였다. 땅바닥에 반사된 빛들이 번쩍이면서 가게 안쪽으로 날아들고 있었다. 거리는 뜨거운 만큼이나 조용했다. 이 땅은 어딜 가든 항상 고요와 침묵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쨍쨍한 햇볕만이 귓가에 맴돌고 잉잉거렸다. 사람들은 말이 없었고 인기척도 내지 않은 채 걸어 다녔다. 이곳에서는 모든 것이 곧 스러질 모래알처럼 자기 존재에 대해 겸손했다. 절대적인 것은 태양뿐이었다. 태양만이 존재의 한계에 대한 준엄한 법률처럼 머리 위에서 쉴 새 없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남자의 가슴은 형언할 수 없는 감동으로 벅차올랐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자신이 빈손으로 태어나 빈손으로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투명한 영혼. 삶과 죽음에 대한 더할 나위 없이 순수한 통찰. 천혜의 자연이여. 신이 없는 땅에야말로 사실은 신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넘쳐흐르는 하얀 빛이 남자의 머릿속을 휘저어놓았다. 그는 감격 속에서 굉장한 졸음을 느꼈다. 그것은 일종의 안심과도 같은 것이었다. 남자는 의자에 앉은 채로 대번에 잠이 들었다.
아, 삶이여. 청춘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는 이곳에서 생명을 느낄 수 있었다. 타들어가는 불꽃처럼 소진되어가는, 그리고 빛을 발하는 그것을 남자는 마치 눈으로 본 듯이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잠에서 깨었을 때 거리는 붉게 물들어있었다. 잠깐 존 것 같았는데 꽤 시간이 지나있었다. 남자는 옆자리로 시선을 향했다. 운전수가 없었다. 그는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나지막한 한숨을 뱉었다. 테이블 위에는 마시다 만 차가 미지근하게 식어있었다. 남자는 찻잔을 들어서 단숨에 들이켰다. 열기가 없는 탓인지 더 달고 걸게 느껴졌다. 그는 테이블 위에 지폐 몇 장을 올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노을빛이 비치는 현관으로 나서자 약간 달큰한 담배연기 냄새가 풍겼다. 거리 쪽으로 뻗은 테라스에서 운전수가 벽에 등을 기대고 궐련을 피우고 있었다. 「일어나셨소?」 운전수는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남자는 자신이 잠든 줄도 몰랐노라고, 깨우지 그랬느냐고 말했다. 「아니, 괜찮아요.」 그는 다 타고 남은 담배꽁초를 길 쪽으로 내던졌다. 빨간 불꽃을 튀기며 모래바닥에 꽁초가 떨어졌다. 「마침 시간도 맞으니 가볼까.」 운전수가 혼잣말처럼 내뱉으며 트럭으로 향했다. 남자도 그를 따라 차에 올라탔다. 그들은 왔던 길을 그대로 돌아갔다. 거리에는 전보다 사람이 많았다. 일을 정리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처럼 보였다. 모두들 양손이 무거웠다. 수많은 발걸음 소리가 거리를 메우고 있었다. 그 인파 사이를 뚫고 지나가느라 차는 속도가 느렸다. 주변 사람들은 모두 걷고 있는데 혼자 차에 올라앉아 있어서인지 남자는 이상한 기분이었다. 자신도 차에서 내려 그들 사이에서 함께 걷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남자는 이 마을에서 돌아갈 곳이 없었다. 그는 가만히 시트에 앉아 차창 밖의 지나가는 사람들 얼굴만 말없이 보고 있었다.
차는 오후에 흑인 세 사람을 내려주었던 벽돌건물 앞에 도착했다. 운전수는 남자에게 잠깐 기다리라고 말한 뒤에 차에서 내렸다. 그는 건물 안으로 들어가더니 곧 일꾼 몇 사람과 함께 나와 트럭 짐칸에 짐을 싣기 시작했다. 남자는 고개를 뒤로 돌려서 그 광경을 잠시 바라보다가 다시 정면으로 시선을 향한 채 턱을 괴고 있었다.
짐을 다 싣고 일꾼들은 건물로 돌아갔다. 운전수는 운전석으로 돌아와 차 문을 닫았다. 「이제 또 사막을 건너야지. 가다보면 금세 해가 질 거요.」 운전수가 말했다. 얼어붙은 듯 미동도 않는, 밤의 차가운 사막은 남자가 이 땅에 와서 맨 처음 본 것이었다. 그들은 출발했다.
운전수의 말대로 해는 금방 졌다. 하늘의 색깔은 점점 붉어지더니 마침내 보라색으로 변하고 어느새 그 속에서 별까지 빛나고 있었다. 오아시스 마을은 등 뒤편으로 계속 멀어져 이미 그 끝자락도 보이지 않았다. 땅 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이 나라에 왔을 때 처음 본 것을 남자는 다시 보고 있었다. 하늘에는 이상하게 생각될 정도로 깨끗한 달이 떠있었다. 트럭은 달빛과 라이트의 불빛에만 의지해 사막 위를 달리고 있었다. 전에도 그랬듯이, 남자와 운전수는 모두 말이 없었다. 밤의 사막에 드리운 거대한 고요가 그들 사이에 스며들어와 알게 모르게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이곳에서는 말을 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광대함에 압도당하는 느낌. 이 불모의 땅. 이 모든 존재의 내면의 상징. 기막힌 침묵…… 얼마쯤 시간이 지났을까. 차는 계속 달리고 있었고 사막은 한없이 펼쳐져 있었다. 그 사이에서 남자는 갑자기, 그리고 힘겹게 입을 열었다.
「나는 내가 생명을 이해하지 못하고 죽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남자의 갑작스런 말에 운전수는 뭐라고 대답해야할지 알 수 없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남자는 상관하지 않고 말을 계속했다. 「내 조상들은 그들의 조국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내 나라에서 태어난 것입니다. 내 조상들이 그러했듯이 나도 그 추운 땅에서 늙고 시들어 죽을 것이라고, 뚜렷하게 생각하고 있던 것은 아니지만 거의 본능적으로 그렇게 느끼며 지금까지 살아왔었습니다.」 운전수는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나는 나의 병 때문에, 가슴앓이를 할 때마다 내 생명의 바로 곁에 자리 잡고 있는 죽음을 느낍니다. 모두가 죽음을 향해 한 발짝씩 내딛고 있는 것은 내 나라에서나 이곳에서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내가 태양 밑에서 만난 이 무뚝뚝한 사람들은……」 남자는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그는 무어라고 말해야 좋을지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운전수도 조용했다. 남자의 침묵에 동의하는 것 같았다.
차는 계속 달렸고 한참동안이나 그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남자가 문뜩,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맹렬하게, 짧고 맥락 없는 말마디를 던졌다. 「……불타듯이 살고, 불타듯이 사라져가고……」 그토록이나 열렬하게, 그토록이나 열정적으로, 그토록이나 빠르게. 생명을 소진하는 사람들. 마른 나뭇가지처럼 죽어버리는 사람들. 태양의 자손들.
그리고 남자는 입을 다물었다. 정적이 흘렀다. 얼마 뒤에, 이번에는 운전수가 침묵을 깨며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마지막으로 수영을 즐겨본 지가 한참이나 되었군.」 그리고 남자를 향해 말했다. 「당신도 내일 바다에 가지 않겠소?」 운전수의 제의에 남자는 묵묵히 앞만 바라보다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1. 적당한 길이의 단편소설. 이야기의 흐름보다는 장면 장면의 뉘앙스에 신경을 쓰느라 스토리텔링의 부분에 있어서는 부족한 점이 있을지도 모른다.
2. <익사자들>에서부터 연결되는 주제의식을 갖고 쓴 것. 삶의 인간이 죽음을-동시에 생명을- 대하는 태도에 대한 삼부작을 쓰려고 했고, 이것은 그 중 두번째 소설이다.
3. 나름대로 만족한다. 최근에는 창작의욕이 높아져서 기분이 나쁘지 않다. 퇴고하는 것을 귀찮아하지 말아야 할텐데.
홀로 사는 집
눈이 내리고 있었다. 남자는 창문가에 놓인 의자에 앉은 채 유리창 너머로 눈송이들이 떨어지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앉아있는 의자는 인조가죽으로 덮인 황갈색의 나무의자였는데, 집을 구할 때 창고형 가구매장에서 헐값에 가져온 것이었다. 창문을 거쳐서 남자의 손등 위로 쏟아지는 직선의 하얀 빛살들은 계절의 냉기를 품고 있었고 화살촉처럼 날카로웠다. 남자의 시선은 무표정하게 창문 너머로 향하고 있었다. 그의 두 손에는 책이 한권 들려 있었는데, 이미 3분의 1정도가 읽혀진 책은 아무런 의미도 없이 남자의 허벅지 위에 펼쳐져 있었다. 의자 옆 햇살이 들지 않는 자리에는 다탁이 하나 자리 잡고 있었다. 역시 나무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다탁 위에는 투명한 유리잔이 놓여 있었다. 유리잔에는 맑은 액체가 반 정도 담겨 있었다. 화주였다. 남자는 가끔 창문 너머로 시선을 붙박은 채 손을 뻗어 그것을 홀짝이곤 했다. 그가 난방도 하지 않은 방에서 가벼운 차림으로 있을 수 있는 것은 바로 그 술 덕분이었다. 심지어 그는 나무판자를 이어 붙여 만든 차디찬 바닥 위에 맨발을 올려놓고도 아무렇지 않았다. 남자는 아침에 눈을 뜨고서부터 계속 술을 마셔왔던 것이다. 정신만큼이나 육체도 뜨겁게 느껴졌다.
그는 얼핏 보기에 삼십대 후반 즈음으로 보이는 마른 남자였다. 까만 머리칼이 지저분하게 자라 있었고 며칠간 면도를 하지 않은 턱은 수염으로 거뭇거뭇했다. 여전히 창가에 앉아 하얀 빛살과 하얀 눈과 하얀 구름으로 뒤덮인 풍경만을 내다보는 그의 눈은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그렇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무척이나 조용했다. 남자는 다시 한 번 유리잔을 집어 안에 든 것을 전부 입안에 털어 넣었다. 뱃속에서부터 화끈하고 열기가 올라왔다. 그는 몸속에서 휘몰아치는 취기와 열을 찬찬히 감미하려는 듯이 가만히 눈을 감았다. 남자는 알코올이 좋았다. 그는 인생에 있어서 늘 그것을 필요로 했다. 같은 시대를 사는 사람들은 모두 술이 무슨 독약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 휘발성의 음료를 매도하고 깎아내리느라 바쁘게 입을 놀려댔지만, 남자 입장에서는 술이라는 것이 도무지 나쁜 것으로 생각되지 않았다. 그것은 인생을 감내하는 데에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가끔 너무 심하게 취하면 자기도 모르게 울어버리는 일이 일어나곤 했다. 그것은 그리 좋은 일이 아니었다. 알코올이 몰고 온 정신의 혼란과 침잠 속에서 남자는 표정도 변하지 않은 채 그저 눈물만 뚝뚝 흘려댔던 것이다. 그렇게 되면 멈출 방법이 없었다. 그는 열린 수도꼭지에서 쏟아지는 수돗물처럼 눈물을 흘리며 당황해서 온 집안을 헤매곤 했다. 그가 잃어버린 것과 마음속 깊이 알고 있는 것들 때문에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그럴 때면 남자는 눈알이 쪼그라들 때까지 울면서 더 독한 술을 마시고, 마침내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잤다. 그리고 다음날 두통과 함께 깨어나서, 부어오른 눈두덩을 문지르며 화창한 아침 햇살―때로는 붉은 노을빛 속에서 하품을 하는 것이었다. 그런 일은 종종 있었다. 그런데 그런 경험도 오직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만취 속에서의 눈물과 잠은 시간을 잊게 해주는 데에 탁월한 효과가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남자는 이러한 일상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유감스러울 일이 없는 것이다.
남자에게는 친구가 한명 있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사귀어온 친구였다. 그는 어느 운수회사의 사무원으로, 가족으로는 아내와 딸아이가 하나 있었다. 그는 이따금 자신의 검정빛 자가용을 몰고 남자를 찾아오기도 했다. 친구가 찾아올 때면 남자는 늘 그렇듯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친구는 그를 만날 때마다 남자의 음주습관에 대하여 꼭 한소리씩 하곤 했다. 「자네 그러다가 결국 병원 신세를 지게 될 거야. 두고 보라고.」 이렇게 말이다. 그럴 때면 남자는 그저 조용히 웃었다. 실상 친구의 말이 맞았다. 알코올이 간에 안 좋은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남자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별다른 반론이 없는 것이었다. 「알코올중독자 재활센터 같은 곳에 가게 될지도 모르지. 그런 생활을 하고 싶은가?」 친구는 그렇게 말하기도 했다. 「그다지 달갑지는 않은걸.」 남자는 언제나 이렇게 대답했다. 그러나 재활센터라니? 누가 남자를 그런 곳에 보낸단 말인가? 그에게는 가족도 없었다. 이미 오래전에 전부 죽었다. 남자의 아버지는 플라스틱 제품을 만드는 공장에서 일했었다. 그는 일터에서 피어오른 유독성 공기를 너무 많이 마신 탓에 죽었다. 어머니는 신경질적인 사람이었다. 그녀는 자주 자신의 공격적인 감성을 이기지 못해서 감정적으로 고통스러워하곤 했다. 어머니가 일찍 죽은 것은 바로 그 때문일 것이라고 남자는 생각했다. 그렇다, 남자에게는 가족이 없었다. 말했다시피 친구에게는 가족이 있었다. 그는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은 것이었다. 친구는 결혼을 결정했을 때 남자에게 와서 기쁜 낯으로 그 소식을 알렸다. 남자는 약간 쓸쓸한 눈빛으로, 그러나 웃는 얼굴로 친구에게 축하의 말을 건넸다. 그리고 수년이 지난 뒤에는 친구가 아내의 임신 소식을 알려왔다. 그때 남자는 무엇보다도 먼저 슬픈 기분을 느꼈다. 그것은 정말로 슬픈 일이었다. 그러나 만면에 화색이 가득한 친구에게 그러한 슬픔을 말로 전할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남자는 또 한 번 축하의 말만 전했던 것이다. 그 때 친구는 여전히 웃는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자네는 바보 같은 짓이라고 할지도 모르지만 말이야, 나는 내 아이가 생기는 것이 정말로 기뻐.」 남자는 대답했다. 「그래. 축하하네.」
남자는 아직 한 번도 친구의 아이를 본 일이 없었다. 햇수를 따져보면 지금쯤 그 여자아이는 다섯 살 즈음 되었을 것이다. 친구는 굳이 남자에게 자신의 아이를 소개시켜주거나 사진을 보여주려고 하지 않았다. 남자도 그다지 아이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친구는 이해는 할 수 없었지만 어림짐작으로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도 오랫동안이나 남자와 지내온 것이다. 그래서 친구는 그에게 아이를 보여주지 않았다. 남자는 그 점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바로 그런 이해심 때문에 남자는 자신의 친구를 더욱 사랑하고 친밀감을 느꼈던 것이다.
그는 술과 열기가 뱃속을 훑고 지나가는 것을 느낀 뒤에 눈을 떴다. 창문 밖에서는 계속 희미한 눈발이 휘날리고 있었고, 그의 눈은 술기운과 졸음 때문에 반쯤 감겨있었다. 그는 다탁 위에 텅 빈 유리잔을 다시 되돌려놓았다. 나무와 유리가 부딪히며 ‘딱’하는 소리가 고요한 집안에 울려 퍼졌다. 손에는 펼쳐진 책이 들려있었다. 남자는 그것도 다탁 위에 덮어놓았다. 그는 두 손을 깍지 끼고 허벅지 위에 놓았다. 날씨는 차가웠다. 계절은 겨울이었고 공기는 적막했다. 창밖 풍경은 눈으로 덮인 대지와 구름이 뒤섞여 지평선이 보이지 않았다. 마치 하나의 커다란 면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한동안 의자에 앉아있던 남자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금 비틀거렸다. 그러나 많이 취하지는 않았다. 그는 맨발로 목제 바닥을 조금 서성거려보았다. 딸아이라. 남자가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그는 엄지손가락으로 까칠까칠한 턱수염을 문질렀다. 그의 머릿속에는 딱히 이렇다 할 감상이 없었다. 창문 밖의 풍경만큼이나 이차원적이었고 공허했다. 알코올이 그의 감성이라고 부를만한 것을 마비시켜놓은 것이었다. 남자는 그러한 상태가 좋았다. 그래서 그는 조금 웃었다.
남자의 집은 도시 중심부로부터 멀리 떨어진 교외에 있었다. 그것은 회색 콘크리트와 철근으로 지어진 2층 집으로, 너무 크지도 않고 너무 작지도 않았다. 1층에는 거실과 부엌이 있었으며 2층에는 벽을 따라 둘러쳐진 복도와 방들이 있었다. 사실 남자 혼자 살기에는 비교적 큰 집이었다. 남자는 세 개나 되는 방들 중 서쪽을 향해 창문이 난 방 하나를 골라 침실로 쓰고 있었다. 나머지 방들은 마지막으로 문을 열어본지도 한참 오래전 일이었다. 그는 많이 움직이지 않았다. 혼자 지내기에는 너무 큰 그 집에서, 남자가 사용하는 공간은 한정되어 있었고 늘 엇비슷했다. 그가 찍고 다니는 발걸음만을 따라 도로를 닦을 수도 있을 정도였다. 그는 부엌에서 식사를 했고, 침실에서 잠을 잤으며, 나머지 시간은 창가에 앉아 술을 마시거나 책을 읽거나, 혹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지냈다. 그는 일을 하지 않았다. 그는 일을 하지 않아도 좋았다. 그에게는 더 이상의 노동이 필요하지 않을 만큼 충분한 돈이 있었다. 그것은 남자가 젊을 때 벌어둔 것들이었다. 그 시절 그는 사업을 했다. 그에게는 사업에 재능이 있었다. 실상, 그 남자는 뭘 시켜도 그 일에 대한 탁월한 재능을 보여줄 것만 같은 그런 인간이었다. 아무튼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가난하게 자랐던 그는 사업의 성공과 번영으로 말하자면 경제적 성공이라는 것을 한 손에 거머쥐었다. 그러나 자신의 발밑에 수많은 사원들이 늘어서고 한 손으로 다 꼽아볼 수도 없는 통장들의 잔고가 점점 늘어나고 사업의 범위가 더욱 확장되어도 그는 웃지 않았다. 다만 어느 정도의 돈이 손 안에 들어왔을 때, 남자는 이제 더는 일을 하지 않아도 되겠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말했다시피 그의 아버지는 공장에서 일하며 근근이 가족을 먹여 살렸던 가난한 남자였다. 남자 역시 어렸을 적부터 가난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래서 그에게는 사치하는 취미라는 것이 없었다. 애당초 그는 사치의 즐거움이라는 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종류의 인간이었다. 아마도 날 때부터 그랬으리라. 그는 회사의 지분을 전부 팔아넘기고 집을 하나 샀다. 조금만 걸어 나가면 멀리 펼쳐진 밭이 보이는, 교외에 세워진 집이었다. 그리고 남자는 은둔자처럼 그곳으로 숨어들어갔다.
사업가 시절의 동료도 가깝게 지내던 거래처 사람들도 남자가 어디로 갔는지, 그리고 왜 갑자기 일을 그만뒀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그가 가진 대부분의 관계들은 그의 직업으로 말미암은 것들이었고, 그 직업을 그만둠과 동시에 칼로 잘라낸 듯이 잘려나갔다. 사실 어느 정도는 남자가 의도한 일이기도 했다. 그는 더 이상 사람들과 만나고 싶지 않았다. 사람들과 만날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당연하다는 듯이 고독 속으로 스며들어서 원래 살던 사회에서는 형체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이제 남자가 만나는 사람은 단 한명의 친구뿐이었다. 그마저도 남자 입장에서는 수동적인 관계이기는 했다. 남자를 찾아오는 것은 늘 친구 쪽이었던 것이다. 그래도 그것은 유일하고 또 중요한 관계였다. 친구는 거의 일주일에 한번 꼴로 남자를 찾아왔다. 남자도 그것을 반겼다. 그들은 오랜 친구였고, 둘 다 그 사실에 만족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실 친구는 남자에 대해서 아는 것이 그리 많지 않았다. 그도 왜 남자가 갑자기 일을 그만뒀는지 몰랐다. 남자는 그것에 대해서 아무런 설명이나 변명도 없었다. 그는 그냥 그만뒀고, 그의 조용하고 고독한 집으로 걸어 들어갔다. 남자는 더는 정열적으로 일하고 사람들을 만나며 그의 매혹적인 화술로 계약을 성사시키던 그 시절의 인간이 아니었다. 아니, 정말로 그 때의 남자라는 것이 있기는 했던가? 이제 와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이제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다고 그가 모든 것에 만족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아니었지만 말이다. 다만 그는 침묵했다. 무표정으로 일관했다. 그는 적게 먹고 적게 썼다. 검소한 생활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것도 습관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언젠가 남자가 친구에게 이런 말을 한 일이 있었다. 「나는 음식을 먹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내가 무언가를 먹으면, 그것으로 인해서 나의 내면이 어지럽고 지저분해진 느낌이 든단 말이야. 나는 깨끗한 것이 좋아. 아무것도 먹지 않고 오랫동안 허기진 상태를 유지하면 나는 내가 깨끗해진 것만 같은 기분을 느껴.」 친구는 말없이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는 말랐고, 눈이 퀭했다. 얼굴에 진 그늘은 울적한 냄새를 풍겼으며 메마르고 세찬 눈빛은 삶에 대한 기쁨을 전부 포기한 사람의 것처럼 보였다. 친구는 자신의 벗이 그렇게도 윤기 없이 건조한 영혼의 소유자라는 사실에 안타까움을 느꼈다. 따뜻한 가정을 만들고 가족에 대한 사랑을 갖고서 살아가는 사람인 그는 자신의 친구가 좀 더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남자는 행복 같은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그는 안타까워했다. 이따금 남자에게 기쁨을 찾는 삶이라는 것을 권하고 싶기도 했다. 그러나 친구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어째서인지 그래서는 안 될 것 같았다. 그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일이었다. 남자는 공허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만은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그는 무언가를 갈구하는 것도 아니었다. 남자의 상태는 완전히 ‘필연적인 것’이었다. 구체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어도 그런 것이리라고, 친구는 조용히 납득했다.
「뭐라도 하고 싶은 일은 없는가?」 어느 날 친구가 남자에게 물었다. 「글쎄, 잘 모르겠는 걸.」 남자가 대답했다. 「하지만 늘상 그러고 있으려면 심심하지 않아?」 「괜찮아. 뭘 하든 별다를 건 없으니까.」 그러면서 남자는 슬쩍 웃어보였다.
남자는 술을 마셨다. 음식은 잘 입에 대지 않았지만, 술은 상관없었다. 자신이 영적으로 더럽혀졌다고 믿는 사람들 중에는 종종 끊임없이 물을 마셔대는 이들이 있다는 이야기를 언젠가 들은 기억이 있었다. 어쩌면 자신의 한계를 모르는 음주도 그와 비슷한 것이 아닐까하고 남자는 생각해보기도 했다. 그것은 정화작업인 것이다. 불타는 휘발성 음료. 내면의 찌꺼기들을 전부 불사르고 새하얀 본질만을 남겨 놓는다. 어쩌면 이렇게도 초현실적일 수 있을까. 남자는 자신의 손이 벌벌 떠는 것을 보았다. 전부 실없는 생각이다. 어쩌면 나는 한낱 알코올중독자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를 가진단 말인가? 그의 눈은 계속 자신의 거칠고 뼈가 불거진 손에 붙박여 있었다. 남자는 순간 자신이 나이를 먹었다는 것을 느꼈다. 그는 소년시절을 떠올려보았다. 그 손이 아직 깨끗하고 매끈매끈하던 시절을 생각했다. 그 아득한 과거. 그는 그 시절의 어느 여름날 저녁을 기억했다. 오후 여덟 시인가 아홉 시 즈음 되었을 시각. 일찍부터 해가 져서 하늘은 이미 깜깜했다. 그러나 지상은 네온사인과 가로등, 그리고 간판의 불빛들로 요란하게 번쩍이고 있었다. 남자는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그는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앞에서 걷던, 머리가 벗겨지고 반팔 셔츠를 입은 뚱뚱한 사내가 갑자기 쓰러졌다. 딱딱한 보도블록 위로 그대로 쓰러져버린 것이다. 그는 쓰러져서 움직이지 않았다. 남자는 그 움직임 없는 몸뚱어리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힘없이 입을 벌린 얼굴이 하늘을 향하고 있었다. 오십대 정도 되어 보이는 늙은 사내였다. 남자는 정말로 그가 늙어 보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곧이어 그 사내가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주변에는 구경꾼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소란스러웠다. 몇 분인가 지나 사이렌 소리가 들리더니 경광등을 번뜩거리며 경찰차가 도착했다. 누군가가 신고를 한 모양이었다. 경찰들은 차에서 내리더니 쓰러진 채로 움직이지 않는 그 사내를 붙잡고 흔들며 말을 걸었다. 그래도 사내는 대답하지 않았다. 들리는 것 같지도 않았다. 어린 남자는 그 꼴을 잠시 지켜보고 있다가 가던 길을 다시 걷기 시작했다. 쓰러진 사내와 경찰, 그리고 구경꾼들은 남자의 뒤편으로 점점 멀어졌다. 그는 그대로 버스를 잡아타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잠을 잤다. 쓰러진 늙은 사내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아직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죽었을지도 모르고, 그렇지 않을지도 모른다. 남자의 시선은 현재로 돌아왔다. 그의 거친 손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남자는 자신이 늙었다고 생각했다. 그는 술잔을 들어 올려 술을 한 모금 들이 삼켰다.
남자는 잠에서 깨었다. 밤이었다. 방안은 어두컴컴하고 나무로 된 바닥은 미광으로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창문은 어둠으로 새까맣게 칠해져 있었다. 시리도록 투명한 밤 속에서 별들이 보석조각처럼 남몰래 빛나고 있었다. 남자는 침대에서 상체를 일으켰다. 그는 꿈을 꾸었다. 이상한 꿈이었다. 남자는 손끝으로 자신의 입가를 더듬었다. 무심결에 한 행동이었다. 그가 깬 것은 꿈 때문이었다. 꿈속에서 남자는 어느 낡고 오래된 자동차의 앞좌석에 앉아 있었다. 창문으로 보이는 주변 풍경에는 채도가 없었고 가뭄이 든 것처럼 메말라 있었다. 그는 영문 모른 채로 그저 자리에 앉아만 있었다. 자신이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는 누군가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돌아올 것 같지 않았다. 그럴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다. 갑자기 대시보드와 시트 밑에서 시뻘건 액체가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사람의 혈액 같기도 했고 녹슨 쇳물 같기도 했다. 그 액체는 창문을 통해 비쳐 들어오는 회색의 건조한 햇살 밑에서 광물성의 빛깔로 번쩍였다. 창문 밖으로 향한 남자의 눈에는 무채색의 나무들이 들어왔다. 엽록소를 잃은 잎들이 팔락이고 있었다. 붉은 액체는 자동차 안쪽에 나있는 모든 틈새에서 멈추지 않고 뿜어져 나왔다. 밀폐된 차내에서, 그 액체는 점점 높이 차올랐다. 남자는 수위가 올라가는 것을 표정 없는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어느새 발목까지 잠겨있었다. 액체는 계속 흘러나왔고 남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는 계속 기다리기만 했다. 기다리는 것이 도착하지 않는다는 씁쓸한 감정만이 남자를 지배하고 있었다. 꿈속에서도 시간은 흘렀다. 수면은 점점 더 높아져 허벅다리를 지나 허리, 가슴께가 잠기고 마침내 목둘레까지 차올랐다. 남자는 그대로 있었다.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밖에서 본다면 검붉은 빛깔의 거대한 젤라틴이 자동차 안에 가득하게 들어차 있는 것처럼 보일 것이었다. 그리고 젤리 속에 박힌 사람 모양의 플라스틱 장식물. 목 아래로 신체 곳곳에 묵직하니 수압이 느껴졌다. 남자는 눈을 껌뻑거렸다. 그리고 잠에서 깨었다.
악몽이었는가? 이렇다 저렇다 단정 지어 얘기할 수가 없었다. 침대 위에 이불을 덮고 앉은 남자는 아무런 흥분된 감정도 가지고 있지 못했다. 목까지 차오른 무거운 핏빛 액체. 광물질의 수액. 그러나 어쩌겠어? 남자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러나 어쩌겠어?
곧 그는 침대 밖으로 나와 일어섰다.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다. 달빛으로 된 안개가 덮인 것 같은 밤. 그는 맨발로 나무 바닥 위를 서성거렸다. 창문가로 다가갔다. 밤하늘에서 흘러내리는 부드러운 미광으로 하얗게 보이는 목제 의자의 등받이를 쓰다듬었다. 가벼운 어둠. 겨울밤의 침묵. 남자의 눈은 반쯤 감겨있었다. 창문 밖으로 보이는 눈 덮인 땅은 어둠과 밤의 빛으로 단조로운 색을 하고 있었고 모난 곳 없이 부드러워 보였다. 대지는 기복도 솟아오른 돌출부도 없었고 깜깜한 어둠 속으로 그 형태가 사라져버릴 때까지 완만한 선을 그리며 내달리고 있었다. 끝없이 펼쳐진 눈밭. 터무니없이 멀고 아득하다. 남자는 한참 동안 밖을 내다보았다. 그의 마음속에서는 형언하기 힘든 감정이 남몰래 울렁이고 있었다. 추운 계절이었다. 남자는 자신의 꿈틀거리는 욕망을―욕망! 그것을 욕망이라고 불러도 좋은 것일까?―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늘 술을 마시고 감정의 셔터를 내려버리는 것이 아니었던가. 고뇌, 안타까움, 못다 한 감정, 그에 대한 체념,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라지지 않는, 울컥하고 솟구치는 반항적 의식. 그러나 도무지 어쩔 도리가 없었다. 남자는 생각했다.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 그는 필연이라는 단어에 지배당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명백한 진실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욕망을, 감정을, 안타까움을, 이미 오래전에 눈이 멀어버렸지만 여전히 빛을 갈구하는 깊은 동굴 속의 짐승 같은 마음을, 자신이 빤히 의식하고 있는 필연이라는 이름의 강철 같은 절대성으로 억눌러버리기 위하여 알코올을 이용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고독. 고립. 세계의 진면목을 발견했을 때 취할 수 있는 단 하나의 태도. 처음으로 눈을 떴을 때 나는 이미 죽어있었다.
손발이 시렸다. 공기가 찼다. 몸이 으스스 떨렸다. 가끔 이렇게 자신의 내면이 요동치는 것을 남자는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부엌으로 내려갔다. 부엌의 찬장에는 온갖 알파벳과 인장들이 새겨진 술병이 장사를 해도 될 만큼 많았다. 남자는 그 중 하나를 골라 들어 마개를 땄다. 그는 술잔도 찾지 않고 병째로 그것을 들이키기 시작했다. 열기를 품은 독주가 식도를 타고 위장으로 흘러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자다 깬 빈속에 알코올을 퍼부으니 속이 타는 것 같았다. 추위로 떨리던 사지는 차츰 진정되어갔다. 뱃속에 불덩어리를 하나 품은 것 같았다. 차가운 바닥 때문에 얼어붙을 것 같던 발에서도 점차 추위가 느껴지지 않았다. 감각이 마비되어가고 있었다. 그칠 줄 모르고 마셔대는 독주로 인해 초점이 흔들리고 균형 감각이 꼬이기 시작했다. 남자는 더 이상 저 멀리 시선 끄트머리에서 전차처럼 밀고 들어오는 그 무엇에게 시선을 집중하고 있지 않았다. 이미 모든 것이 둘로 보일만큼 취했기 때문이다.
그는 유리로 된 내벽에 증류주가 찰랑거리며 부딪히는 술병의 목을 부여잡고 계단층계를 디디며 올라갔다. 문뜩 밖에 나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취하면 늘 그런 충동을 느꼈다. 어딘가로 끊임없이 걸어가고 싶은 충동. 밖으로, 밖으로. 더 이상 걷지 못하게 될 때까지. 그러나 남자는 나서지 않았다. 그는 이미 전부 다 알고 있었다. 그가 갈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목적하는 곳도 없었고 부르는 곳 또한 없었다. 남자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결정적이고 치명적인 그것이 내게로 다가올 때까지, 오직 기다리는 것 뿐. 아무리 걸어봤자 눈밭은 끝나지 않을 것이고 새로이 발견할 수 있는 것도 없을 것이었다. 그는 모두 다 알고 있었다. 모든 것을 말이다. 내려쳐지는 단두대의 도끼날 같은 세상. 불변성. 운명이라는 단어의 견고함. 그리고 내 정신의 자유여! 내 심장을 옭아매는 끔찍한 자유여. 남자는 솟구치는 술기운 때문에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남자는 복도를 지나 침실에 다다랐다. 밤의 빛이 반투명한 비단처럼 방을 감싸고 있었다. 너풀거리는 은빛. 남자는 비틀거렸다. 그는 병의 주둥이를 입에 대고 병을 기울였다. 남자는 문뜩 지금쯤 친구가 무엇을 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그는 잠을 자고 있겠지. 자신의 아내와 한 이불을 덮고 말이다. 그의 작은 딸도 그녀의 침대에서 곤히 자고 있을 것이다. 달빛이 그들을, 그 가정을 돌보기를. 남자가 한 손을 들어 자신의 혼란스러운 눈을 비볐다. 그는 흐흐거리며 웃었다. 몸속에서는 불꽃이 일렁이고 있었지만 그는 방이 얼마나 추운지 살갗으로 느낄 수 있었다. 한겨울에 난방도 하지 않고 내버려둔 채인 그의 집은 온통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 집에서 살아있는 것이라고는 오직 남자 혼자밖에 없었다.
그러나 당연한 일이다. 남자가 허공에 대고 말했다.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연대. 한때 남자에게도 연인이 있었다. 그때 그는 외로웠고, 여자 또한 외로웠다. 그들은 함께 지냈다. 서로의 고독을 쓰다듬고 육체를 부대끼며 그들 사이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찾으려고 애를 썼다. 남자는 여자의 피부를 어루만지는 것이 좋았다. 그녀의 냄새를 한가득 맡는 것도 좋았다. 어쩌면 남자는 여자를 사랑하는 것도 같았다. 남자는 그 시절을 똑똑히 회상할 수 있었다. 여자의 모습은 고독만큼이나 뚜렷했고 손을 뻗으면 닿는 거리에 있었다. 그들은 서로에게 탐닉했고 퇴폐주의자들의 그것에 비길 정도로 상대의 내면에 침투한 채로 지냈지만, 그 관계는 어딘지 모르게 위태위태한 점이 있었다. 언제나 주변에, 바로 곁에 고독이 도사리고 있었다. 향락의 손끝은 무감각으로 덧씌워져있었고 서로를 갈구하는 얼굴에는 무표정의 그늘이 드리워져있었다. 그러나 상관없었다. 남자는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 이상의 무언가를 기대하지도 않았다. 남자가 아는 최대한의 관계란 그런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만족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끝은 터무니없을 정도로 갑작스러웠다. 어느 날 남자는 여자의 잠든 옆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갑자기, 어쩌면 그들이 결혼을 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결혼해서 하나의 가정을 꾸리고, 서로가 늙어가는 것을 지켜보며 ‘끝’까지 함께 지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이 머리에 떠오르자마자 남자는 온몸에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꼈다. 그는 격렬하게 몸서리를 쳤다. 남자는 공포에 질린 채로 일어나서 급히 자리를 떴다. 그리고 다시는 그녀를 만나지 않았고 연락도 하지 않았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런 일도 있었다. 남자는 별빛이 비치는 창가 주변을 휘청대면서 서성거리다가 침대 시트 위로 고꾸라졌다. 손에는 여전히 술병이 쥐여져 있었다. 그의 얼굴에서는 심한 알코올 냄새가 풍겼다. 남자는 침대 위에 엎어진 채로 무엇인가를 말하려고 입을 뻐끔거렸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남자의 부엌 찬장에는 유리병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술병들 사이, 찬장 가장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었다. 보르도 와인 병의 모가지만 잘라낸 듯한 모양의 그 병은 투명했고 알루미늄 마개로 뚜껑이 닫혀 있었다. 투명한 병에는 엷은 푸른색의 알약이 가득 들어있었다. 치사량을 훌쩍 넘는 수면진정제. 남자는 그것을 오랫동안이나 보관해왔다. 불면증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잠이 오지 않는 밤에는 쓰러질 때까지 술을 마시면 그만이었다. 그렇다고 남자가 당장 자살할 요량인 것도 아니었다. 그는 그냥 그 약 더미를 찬장 속에 처박아뒀을 뿐이었다. 그리고 가끔 술병 사이로 손을 뻗어 약병을 끄집어내서 그것이 확실히 거기에 있다는 것만을 확인하고 다시 집어넣곤 했다. 그것은 일종의 상징이었다. 남자는 늘, 자신이 언제든지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커다란 차이가 있다고 생각했다. 스스로의 죽음을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지성의 증명이고 자유의지의 결정이라고. 그래서 남자는 죽음을 찬장에 넣어두고 언제나 그것을 인식하면서 살아가는 것이었다. 사실 중요한 것은 약이 아니었다. 죽음은 언제나 삶의 바로 옆에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단지 그것을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이 있는 것 뿐. 남자는 그것을 알고 있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했다. 아니, 그보다는 한번 알아버리게 되면 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죽음에 대한 인지란 간단히 내버리거나 잊어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절대로 풀리지 않는 영혼의 족쇄 같은 것이다. 잠들어있던 노예가 눈을 뜬 순간 자신의 처지를 완전히 인식해버리는 것처럼, 남자는 자신이 언제든지 죽어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것이 진실이라는 것도 말이다. 게다가 그는 심지어 죽음을 선택할 수도 있었다. 그에게는 의식과 자유로운 양손이 있었기 때문이다. 죽음! 그 얼마나 절대적이고 낯설면서도 동시에 친근한 것인가. 오히려 죽음은 남자의 삶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자살할 생각도 없으면서 그 약병을 버리지 못했다.
그날 남자는 찬장에서 약병을 꺼내와 침실의 다탁 위에 두었다. 그리고 의자에 앉아 한동안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간은 오후였다. 태양빛이 약병의 표면에서 산산이 부서지고, 병의 표면은 내용물로 인하여 푸르게 보였다. 「무엇이 그리 대단하단 말인가?」 문뜩 남자가 내뱉었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한 번 더 반복해서 말했다. 무엇이 그리 대단하단 말인가? 그는 손에 들고 있던 술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삶이? 죽음이? 이 하루하루가? 내 집의 현관문은 어째서 그렇게 단단하게 닫혀있는가? 바깥 세상에 뭐가 있지? 사람들? 내일도 해가 뜰 것이라는 믿음? 그는 한 모금 더 마셨다. 정신이 나간 것처럼 돈을 긁어모으던 그 시절의 나는 무엇을 믿었던가? 이제 와서는 도무지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그때 믿었던 것을 이제 더는 믿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그때 나는 이따금 떠나버리고 싶다고 생각하곤 했다. 사시사철 춥고 건조한 바람이 부는 이 척박한 땅에서 벗어나, 하늘에서는 구름이 걷히고 눈 대신 빛줄기만이 쏟아져 내리는 바다 건너의 땅으로. 나는 그곳에 가고 싶다고 생각 했었다. 그러나 나는 지금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아무것도! 지중해의 태양. 삶의 단맛. 생명의 힘줄이 느껴지는 바닷바람. 육체의 생기. 그것들을 내가 어떻게 향유할 수 있단 말인가? 아무런 의미도 없다. 아무런 의미도 없다. 아무런 의미도 없다.
그는 손을 뻗어 다탁 위의 약병을 열었다. 병 안의 알약들이 달그락거렸다. 남자는 그 푸른 알약을 서너 알 집어 잔속의 독주와 함께 목으로 넘겨버렸다.
괜찮아. 아직 약은 충분해. 남자가 입속말로 중얼거렸다. 그는 잔을 내려놓고 약병으로 손을 뻗었다. 서너 알 쯤 줄어든다고 티가 나지도 않을 양이었다. 그는 별 의미도 없이 약병을 달그락 소리가 나게 흔들었다. 그때 현관문 쪽에서 벨소리가 들려왔다. 방문자였다. 남자는 약과 알코올 때문에 뒤죽박죽이 된 머리로 정신없이 일어났다. 그는 휘청거리면서 계단을 내려갔다. 졸음이 몰려와서 까딱하다가는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질 것 같았다. 남자는 거의 온몸을 난간에 밀착시키다시피 하며 1층으로 내려왔다. 머리가 어지럽고 정신이 없었다. 남자는 약을 많이 먹으면 어떻게 되는지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이러다가 기억이 끊기는 것이다. 약을 먹고 처음 이십 분 가량은 구역질이 나올 것 같고 휘청거리는 정신과 두통 때문에 제대로 서있지도 못하다가, 어느 순간 툭하고 기억이 끊긴다. 그리고 여덟 시간 내지 열다섯 시간 후, 끔찍한 두통과 함께 침대에서 눈을 뜬다. 그동안 자신이 무얼 했는지는 도무지 알 도리가 없다. 어떻게 멀쩡하게 사지가 붙어있는지, 어떻게 창문 밖으로 떨어지지 않았는지, 어떻게 벽 따위에 머리를 찧지 않았는지, 어떻게 바닥에 쓰러져서 그대로 잠들지 않았는지 전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그냥 두통을 느끼면서 침대에서 일어난다. 아, 살아있구나, 하고 어리둥절해하면서.
남자는 현관문에 달린 렌즈로 문 건너를 내다보았다. 친구였다. 친구가 두꺼운 코트를 입고서 현관에서 벨을 누르고 기다리고 있었다. 하필이면 이럴 때. 남자는 목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현관문에 머리를 처박았다. 철제 문짝에서 쿵하는 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그는 잠금장치를 풀고 문을 열었다. 하얀 겨울 냄새와 함께 차가운 바람이 휘몰아쳐 들어왔다. 「자네로군, 웬일이야?」 남자는 최선을 다해 또박또박 말하려고 했지만 이미 혀가 꼬부라져 있었다. 「지나가는 길에 들렸지. 그런데 자네 또 술 마셨나?」 「조금. 별 거 아니야.」 남자가 과장되게 손을 내저으면서 말했다. 「취한 것 같은데.」 「괜찮다니까. 아무튼 들어오게.」 친구는 현관을 넘어 집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안으로 들어와서도 코트를 벗지 않았다. 「썰렁하군. 난방을 좀 켜놓고 살지 그래.」 「괜찮아. 벽도 있고 지붕도 있는걸. 옷만 제대로 챙겨 입으면 돼. 올라오게. 거실엔 아무것도 없으니.」 그들은 2층으로 올라갔다. 남자가 휘청거리고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해 친구는 걱정스러워하며 그를 부축했다. 「늘 이렇군. 왜 늘 이렇게 망가져 있는 건가?」 친구의 질책 같은 물음에 남자는 그저 싱긋 웃기만 했다. 눈꺼풀이 자꾸만 닫히려고 했다.
친구는 남자를 부축하고 침실로 들어와 그를 침대 위에 앉혔다. 아무래도 영 상태가 좋지 않아 보였다. 어지간히 마시지 않으면 이렇게 될 리가 없는데. 그는 주변을 둘러봤다. 곧 그의 눈에는 다탁 위에 놓인 약병과 술잔이 보였다. 친구는 남자를 향해 고개를 휙 돌리더니 놀란 목소리로 소리쳤다. 「맙소사! 자네 약 먹었군!」 남자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한쪽 눈이 잘 뜨이지 않아서 윙크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손을 들어서 열리지 않는 눈꺼풀을 억지로 열어 보았다. 시야가 흐릿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 얼마나 먹었나?」 「아니야, 괜찮아. 괜찮다니까.」 「괜찮기는 뭐가, 당장 가서 토해야겠어!」 「괜찮다니까. 얼마 안 먹었어.」 친구는 남자를 억지로 화장실까지 끌고 가려고 했지만 그는 침대에 붙어 움직이지 않으려고 했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건가? 죽고 싶은 거야?」 「죽으려고 먹은 게 아니야. 그건 잘 알아둬야 하네. 난 죽으려고 한 게 아니야.」 남자가 발음이 불분명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친구는 이제 남자를 옮기려는 것을 포기하고 두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붙잡고 있었다. 「일도 그만두고 두문불출하더니 이젠 약까지 집어먹는군.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친구가 답답하다는 듯이 말했다.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졸고 있었다. 그는 앉은 채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눈은 반쯤 감겨 있었고 고개는 연이어서 끄떡거렸다. 한동안을 그러고 있었다. 친구는 아무 말도 않고 남자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남자가 스윽 고개를 들고 입을 열었다. 「이봐」 그가 약에 취해 괴상한 억양으로 말했다. 「이봐, 자네는 자신이 늙어가는 것을 느낄 수 있나? 자네의 아내는? 딸은 어떤가? 그 아이가 점점 커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어? 절대적인 중량이 자네와 자네 가족들의 머리 위로 쏟아져 내리는 것을 보고 있느냔 말이야. 그걸 견딜 수 있어? 이보게, 나는 내가 얼마나 얻을 수 있는지 알고 있다네. 또 얼마나 잃을지도 말이야. 자네는 알고 있나? 우리는 찰나야. 찰나에 불과해. 더 이상 무얼 바랄 수 있겠는가?」
하하하. 남자가 힘없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몸도 가누지 못하면서 죽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무얼 더 바라야 하지?」
무얼 더. 무얼 더 바라야 하나. 남자는 이제 눈을 감고서 조용히 읊조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의식을 잃으면서 앞으로 거꾸러졌다. 나무 바닥에 호되게 머리를 박을 뻔 한 것을 친구가 잡아 일으켰다. 그는 남자를 침대 위에 뉘였다. 그리고 약에 취해 엉망으로 잠든 자신의 친구를 묵묵히 내려다보았다.
「불쌍한 친구 같으니.」 그는 그 한마디를 남기고 방을 나섰다. 그리고 그는 그대로 남자의 집을 나와 차를 타고 떠났다. 가족들이 기다리고 있는 자신의 집으로 말이다.
남자가 일어났을 때 그의 입주 변에서는 하얀 거품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위장에서부터 수면제의 공허한 냄새가 올라왔고 심장 한 구석을 썩둑 도려낸 것 같은 감각이 가슴 속을 맴돌았다. 밤이었다. 또 밤이었다. 여전히 밤이었다. 최근 그는 늘 어둠 속에서만 눈을 떴다. 기상과 함께 아침을 맞아본 일이 터무니없이 오래 전인 것처럼 느껴졌다. 남자는 손등으로 입가의 거품을 닦아냈다. 「집으로 가고 싶다.」 캄캄한 밤 속에 퍼지는 혼잣말. 집? 그런데 그 집이 어디란 말인가? 어떻게 해야 할지 잘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침묵하는 천장을 흐리멍덩한 눈으로 멀거니 쳐다보았다. 잘은 기억나지 않지만, 친구가 왔던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그는 돌아가고 없다. 남자는 자신이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지 기억해내려고 노력해보았지만 아무것도 생각나는 것이 없었다. 그는 자신의 시간을 세어보았다.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의 시간들. 지금까지 자신이 시간에 새겨온 것들에 대해서 생각해보았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죽은 일. 친구를 만난 일. 대학을 졸업한 일. 사업을 시작한 일. 여자와 만난 일. 그리고 도망친 일. 가진 것들을 전부 팔아치우고 교외로 숨어든 일. 그리고 지금.
시간에 새겨온 것들이라고? 남자는 코웃음을 쳤다. 그것들은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아닌 일들이다. 시간은 나를 그저 스쳐지나갔다. 내 피부에 닿지도 않고, 내가 만져볼 틈도 없이 나를 통과해버렸다. 나는 살지 못했다. 살아본 일이 없다. 어떻게 살 수 있겠는가? 모든 것을 지배하는 절대의 늪이 그리도 당당하게 눈앞에 놓여있는데. 내륙지방에서 차고 건조한 공기와 함께 성장한 남자는 인생을 소진하는 방법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다. 그는 불타는 태양을 모르고, 삐걱거리며 열기를 뿜는 근육과도 친하지 않았으며, 차디찬 알코올 속으로만 침잠하고 있었다. 남자는 한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그러쥐었다. 공허 속에서 심장이 두근거리며 박동하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끊어질 것처럼 처절하게. 죽음을 앞둔 병자의 마지막 호흡처럼 가쁘게.
그는 일어났다. 몸의 균형이 잘 잡히지 않았다. 비틀거리며 아래층으로 걸어 내려가 찬장을 뒤적였다. 그는 또 술을 한 병 꺼내왔다. 침실의 다탁에는 여전히 약이 담긴 유리병이 별빛을 받으며 놓여있었다. 남자는 그 옆에 술병을 내려놓았다. 기운이 나질 않는군. 그가 중얼거렸다. 속이 쓰리고 폐부가 죄어오듯이 아팠다. 마지막으로 제대로 된 식사를 한 것이 언제였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러고 보면 남자의 옛 연인, 그 여자도 늘 식사를 제대로 하라며 남자에게 걱정 담긴 충고를 하곤 했다. 그러면 그는 알았다면서 맥없이 웃었다. 결국 충고는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그때 남자는 자신을 걱정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조금 기쁘게 느껴졌던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다 무슨 소용인가? 남자는 지금 불이 꺼진 집에 홀로 살고 있다.
그는 술잔에 술을 따랐다. 약간 노란빛을 띄는 투명한 액체가 잔속으로 흘러들어갔다. 밤의 미광으로 보석처럼 빛나면서 조용히 차올랐다. 그리고 남자는 그것을 마시기 시작했다. 쓴맛. 더는 생각하고 싶지 않다고 남자는 머릿속으로 뇌까렸다. 그런데 갑자기 가슴 속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솟구치는 것이 느껴졌다. 그것은 목구멍을 역류해 올라오더니 기침과 함께 터져 나왔다. 술잔에 새빨간 잉크가 흩뿌려졌다. 남자는 놀란 눈으로 그것을 보았다. 잔속에 퍼진 붉은 물감은 알코올 속에서 천천히 흩어지며 묽어지고 있었다. 그는 한참동안 그것을 내려다보더니 피가 묻은 술잔을 다탁에 올려놓고 일층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탁자 위에 놓인 전화기를 집어 들고 친구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한밤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친구는 의사를 찾아다가 남자의 집으로 차를 몰고 왔다. 남자는 침대에 앉아있었고 의사는 끌어온 의자에 앉아서 그를 진찰했다. 「목에 뭐가 걸린 것 같아요.」 남자가 기침을 해대면서 말했다. 의사는 방안에 수도 없이 늘어선 커다랗고 빈 술병들을 둘러보았다. 늙고 마른 그 사내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는 곧 큰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아 보는 게 좋을 것이라고 말했다. 친구는 남자 대신 어디가 잘못된 거냐고 물었다. 의사는 아마도 간에 이상이 있는 것 같다고 대답했다. 정확한 것은 병원에 가서 몇 가지 검사를 받아봐야 알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의사는 돌아갔다. 남자는 초점 없는 시선으로 방구석을 쳐다보고 있었고 친구는 주머니에 손을 쑤셔 넣은 채로 그 옆에 서있었다. 둘 다 아무 말이 없었다. 그들은 아침이 오기를 기다렸다.
아침이 되자마자 그들은 차를 타고 병원을 찾아갔다. 친구가 차를 몰았고 남자는 조수석에 앉아있었다. 가는 길에 친구가 말했다. 「여행을 가보지 않겠어?」 「모르겠어. 어디로?」 「어디든. 공기가 맑고, 태양이 뜨겁고, 몇 걸음 나가면 바다에서 수영도 할 수 있는 그런 곳 말이야.」 「그런데 왜?」 「글쎄.」 그리고 그들은 입을 다물었다. 환한 아침햇살이 자동차 유리창에 부딪혀 부서지고 있었다.
늙은 의사의 말이 맞았다. 병원에서는 남자의 간이 ‘썩어버린 것이나’마찬가지라고 말했다. 그 외 온갖 잡다한 장기들도 더 이상 제구실을 못할 것이란다. 간 이식을 하면 당장은 나아지겠지만 다른 장기들의 상태가 이미 한계에 다다라서 또 몸에 독소가 쌓일 것이라고 했다. 남자는 얼마 못 가 죽을 것이다. 병원의 의사는 그렇게 말했다. 남자는 침묵했다. 옆에 있던 친구도 딱히 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들은 조용히 남자의 집으로 돌아왔다. 한참 동안이나 그들은 말이 없었다. 몇 시간 뒤 친구는 돌아갔다. 그는 나서면서 몸에 이상이 생기면 언제든지 전화하라고 당부했다. 남자는 알았다고 했다. 그리고 남자는 침실로 올라가서 아침에 두고 나간, 피가 섞인 술을 마저 들이켰다.
며칠 뒤 친구가 어떤 덩치 큰 사내와 함께 남자의 집을 방문했다. 그 사내는 신부복을 입고 있었다. 「아내가.」 자신의 눈을 쳐다보는 남자를 향해 친구가 변명하듯이 말했다. 「아내에게 자네 얘기를 했더니, 이러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하더군.」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그 커다란 신부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하지만 신부님, 나는 신을 믿지 않습니다.」 신부가 말하기를 그는 그저 이야기를 들어주러 온 것뿐이라고 했다. 무슨 이야기든 좋으니 대화를 나눠보고 싶다고 신부는 말했다. 남자는 잠시 발밑을 내려다보다가 그들을 집안으로 들였다. 세 사람은 남자의 침실로 올라갔다.
남자는 평소처럼 침대 위에 앉았고, 신부는 남자와 마주보고 의자에 앉았다. 친구는 의사를 데려왔을 때처럼 옆에 서있었다. 신부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는 남자에게 무언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없느냐고 물었다. 「하고 싶은 말이라.」 남자가 되뇌었다. 그는 잠시 침묵하다가 말하기 시작했다.
「신부님, 나는 달리 믿는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단 하나만은 분명하게 믿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 죽음입니다.」 죽음이라구요. 신부가 말했다. 「네. 죽음. 제가 틀림없이 죽어서 썩어 없어질 것이라는 투명하고 명징한 진실만을 나는 믿습니다. 아마도 태어나서 처음으로 무언가를 의식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그랬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가끔 나는 종교에 귀의하는 것이 더 없이 편안한 길일 것이라고 생각하곤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믿음을 부러워하기도 합니다. 무언가 형식이 있는, 정해진 것을 믿고 따르는 것만으로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삶은 얼마나 보람된 것이겠습니까? 그래서 나는 종교인들을 싫어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늘 호의가 담긴 마음으로 그들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나는 그런 것을 믿지 못합니다. 종교뿐만이 아니라, 나는 도덕도 윤리도 법도 믿지 못합니다. 내가 믿는 것은 오직 죽음뿐입니다. 내 시간의 끝에서 한 치의 틀림도 없이 버티고 앉아있는, 그 절대적인 운명 말입니다. 나는 나의 필멸만을 믿습니다.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나는 늘 죽음만을 보면서 살아왔습니다. 죽음은 분명한 형태로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면서 내 정신의 핵심을 차지하고 지금까지 나와 같이 살았습니다. 나는 다 타버린 재처럼 스러집니다. 아침이슬처럼 증발해버릴 것입니다. 나는 죽어서 사라집니다. 그것이 내 삶을 지배하는 모든 것입니다. 인생에서 이 이외에 무엇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삶은 죽음을 위한 기회에 지나지 않습니다. 내 친구에게는 가족이 있습니다. 아내가 있고 어린 딸이 있습니다. 그들은 생명을 상징하고 삶의 가치를 의미합니다. 내 친구는 삶을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아닙니다. 나는 여행을 떠나지도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눈밭을, 오직 새하얗고 산도 하늘도 없는 땅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신부님, 보십시오. 나는 지금 숨 쉬며 살아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나는 오히려 죽음으로 인하여 삽니다. 죽음이야말로 나를 살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남자는 힘없는 목소리로 소리 내어 웃었다.
2011/09/28 완성.
1. 오늘 지하철을 타고 집에 오던 도중 생각난 것을 그대로 썼다. 과거의 내가 된 기분.
2. 이제까지 써왔던 것들과 소재가 너무 중복된다는 의견이 있다. 확실히 옳은 말이다.
3. 어쩐지 불안하다.
번식
내 방 서랍에는 오래된 권총이 한 자루 놓여있다. 나는 매일 밤 그것을 꺼내 쓰다듬고, 분해하여 닦고 기름칠 한 뒤에 다시 조립한다. 탄창을 꺼내 탄환을 하나씩 끄집어낸다. 그리고 그것들을 책상 위에 일렬로 세워놓는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여덟… 나는 두어 번 정도 그것들의 개수를 확인한 뒤에 다시 탄창에 집어넣는다. 그리고 그것을 권총 몸체에 끼워 넣은 뒤, 쇠로 된 것 특유의 묵직하고 차가운 질감을 느껴보기 위하여 볼에 가져다 대고 한참을 그러고 있는다. 이것이 내가 매일 밤마다 하는 일과이다.
평일이 아침이 되면 회사에 나간다. 나는 제약회사의 총무부에서 일한다. 하는 일들은 오직 서류, 서류들과 관련된 일 뿐이다. 서류를 작성하고, 서류를 정리하고, 서류를 묶고, 서류를 분리하고, 이걸 제품부에, 거래처에 팩스를 보내, 창고에서 용지를 더 가져와, 이걸 이백 부 복사해. 나는 하루의 절반을 종이들과 지낸다. 내게 있어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하는 활자의 나열들. 그러나 회사는 이것들을 필요로 하고, 또 이것을 위해 일할 수 있는 사람을 필요로 한다. 나는 묵묵히 일한다. 가끔 상사가 내게 왜 그렇게 굼뜨냐고 질책을 하기도 한다. 사실이다. 나는 굼뜨고 둔하다. 하지만 그것은 전부 약 때문이다. 내 본성이 아니다.
약. 나는 매주 목요일 점심시간마다 병원에 간다. 의사를 만나기 위해서다. 의사는 내게 일주일간의 일들을 묻고, 어디가 아프지는 않았는지, 잠은 잘 자는지 물어본다. 나는 솔직하게 대답하고, 그러면 의사는 돈을 받고 일주일치 약을 준다. 「중요한 건 분열증이 재발하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네. 그건 누구보다 제가 제일 잘 알고 있습니다.
나는 아침저녁으로 약을 먹는다. 회사에서 항상 졸음이 쏟아지고 행동이 둔해지는 이유는 아침에 먹는 약 때문이다. 내가 먹는 약은 독하다. 내 감각과 정신을 마비시키고 아무것도 느낄 수 없게 만든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나는 너무나도 예민한 감각을 타고 났기 때문이다. 이것은 필시 저주이리라.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일이 끝나면 전철로 귀가한다. 퇴근시간의 전철에는 사람들이 바글바글하다. 다들 지치고 어딘가 성난 표정으로 손잡이를 붙잡고선 무거운 몸으로 어서 목적지에 도착하기를 바란다. 어서 집에 가서 쉴 수 있었으면. 어서 이 하루가 끝나기만 한다면. 모두들 끝을 바라고 있다. 저녁이 되면 나는 약간 약기운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그래서 사람들의 표정을 아주 예리하게 관찰할 수 있게 된다. 딱딱하게 굳은 사람들의 표정으로부터 나는 조용한 분노를 느낀다. 매일 있는 일이다. 목적지에 도착하면 피곤한 눈을 껌뻑이며 집까지 걸어간다. 나의 좁고 어두컴컴한 집. 나는 몸을 씻고 저녁을 먹은 뒤 서랍에서 총을 꺼낸다. 그리고 책상에 앉아 위에서 말했던 것처럼 분해와 조립을 반복한다. 총탄이 하나. 총탄이 둘. 질릴 때까지 그 짓을 반복한 뒤에 나는 저녁 약을 먹는다. 수면진정제와 항불안제, 항우울제, 항분열제가 뒤섞인 알약 더미. 그것이 식도를 타고 넘어가면 나는 약기운이 돌기를 기다린다. 이불 위에 쓰러진다. 그리고 기억을 잃는다.
아침은 늘 힘들다. 눈을 뜨기도 힘들고, 정신을 차리기도 힘들다. 어젯밤 내가 어떻게 잠들었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한다. 나는 비몽사몽간에 빈속에 아침 약을 털어 넣고 씻는다. 옷을 입고 밖으로 나간다. 아침식사는 거른다. 늘 그래왔다. 빈속에 약을 넣으면 속이 쓰리고 금방 약기운이 독하게 오르지만 별 수 없다. 나는 반쯤 정신을 놓은 채로 전철을 타고 출근한다. 사람들의 얼굴표정 따위나 살필 여유는 없다. 꿈속에서 전철을 타는 기분이다. 푹신푹신하고 무색무취한 차량 속에 서서, 꿈이 끝나기를 기다린다. 구름으로 된 인형들. 난기류 속에서 덜컹거리는 차체. 의식 너머로. 의식 너머로. 그리고 현실. 나는 지하철역을 빠져나와 회사 건물로 들어간다. 그날도 종이 속에 파묻혀 일을 한다.
그 다음 날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그러나 그날 아침에는 깜빡하고 약을 먹는 것을 잊어버렸다. 조금 늦게 일어나기도 했고, 졸리고 바빠서 정신이 없었다. 나는 아침 약을 집에 놓고 온 채로 출근했다.
오전은 그럭저럭 버틸 만 했다. 전날 저녁에 먹은 약 덕분이리라. 그러나 되돌아오는 감각. 송곳의 끝처럼 찔러 들어오는 공기와 냄새. 사람들의 시선들. 나는 의식하기 시작한다. 사람들의 정신을. 나는 사람들의 정신이 그들의 눈과 코와 입으로 뿜어져 나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것들은 칼날로 된 구름처럼 뭉게뭉게 피어올라 사방을 꽉 메운다.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참았다. 그날 상사는 유난히 더 잔소리를 해댔다. 정신을 어디에 팔고 있는 거냐면서. 내 정신은 지금 난도질당하고 있답니다. 당신들의 영혼 때문에. 그러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뇌수가 강간당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머릿속에서 나는 상사의 명패로 끊임없이 그의 머리통을 후려갈기고 있었다.
어떻게 퇴근시간이 되었다. 나는 제일 먼저 문을 박차고 나왔다. 그날 업무는 거의 망친 거나 다름없었지만 그 따위 일은 안중에도 없었다. 얼른 집에 가서 약을 먹어야지. 약을. 약을. 약을 먹고 안정을 되찾아야지. 적의와 공격성으로만 가득한 세상으로부터 벗어나야지. 나는 전철을 탔다. 사람들이 가득 있었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들의 찌푸린 얼굴. 사나운 눈매. 비열한 입 꼬리. 나를 쳐다보는 썩은 영혼들. 아아, 내가 당신들을 전부 다 죽여 버릴 수만 있다면. 살점 하나 안남기고 조각조각 내서 죽여 버릴 수 있다면. 나는 잔뜩 힘이 들어간 손으로 철봉을 잡았다. 가슴이 미친 듯이 뛰었다. 두근두근. 내가 여기서 뭘 하는 거람. 고작 약 몇 알, 그 몇 알 때문에 이 꼴이라니. 나는 얼마나 망가져 있는 걸까? 어서 집에 가고 싶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약을 먹고 자고 싶다. 등 뒤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필시 나를 미친놈이라고 속닥거리고 있는 것이리라고 생각했다. 가슴이 더더욱 뛰었다. 나는 눈을 감고 이건 전부 다 정신분열증에 동반되는 피해망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세상은 멀쩡해. 망가진 건 나야. 세상은 멀쩡해. 아무도 나를 흉보지 않아.
그런데 나는 왜 이런 것들을 느끼지?
그런데 왜 나는 이런 것들을 느낀단 말인가? 내가 망가져서? 내가 돌아버렸으니까? 단지 그것뿐인가? 나는 고작 내 마음이 만들어 낸 허상 때문에 이렇게 고통 받고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 것인가? 뭔가 이상하다. 나는 이렇게나 명증한 정신을 가졌고 사물을 똑똑히 분간할 수 있는데 내가 미쳤다고? 망상증 환자라고? 정말로? 나는 의구심이 솟구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의사가 나를 속인 것은 아닐까? 어쩌면 내가 보고 있는 세계야말로 진실이고, 약은 진실을 가리는 장막이었던 것은 아닐까. 내가 내 감각을 믿지 못한다면 도대체 무얼 믿을 수 있겠느냔 말이다.
나는 그날 저녁 약을 먹지 않았다. 잠드는 데에는 엄청난 노력이 필요했다. 나는 계속 뒤척거렸고 머릿속에서 폭발적으로 떠오르는 온갖 생각 때문에 눈을 감을 수도 없었으며 그런 상념들은 새벽까지 계속 이어졌다. 나는 힘들게 잠들었다.
다음 날 나는 늦게 일어났다. 일어나자마자 느낀 것은 흉부가 미치도록 아프고 구역질이 난다는 것이었다. 갈퀴로 가슴 속을 긁어내고 있는 것 같았다. 숨통이 죄여서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나는 이불 위에서 몸을 말고 고통스럽게 짧은 숨을 내쉬었다. 몇 시간을 계속 그러고 있었다. 도무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내 머릿속은 분노와 원망으로 가득 찼다. 고통 때문이었다. 죽여 버릴 테다. 나는 허공에 대고 중얼거렸다. 전부 다 죽여 버릴 거야. 그날 나는 직장에 나가지 못했다.
그 다음 날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밤새 잠도 자지 못하고 집안을 돌아다니며 벽에 머리를 박고, 증오에 찬 괴성을 지르며 접시들을 깨트리고, 울고 신음하며 웅크리고 있었다. 가슴의 통증은 사라지지 않았고 가슴팍에는 새빨갛게 핏방울이 맺힌 손톱자국들이 남아있었다. 나는 계속 울면서 화냈다. 그 날도 그렇게 흘렀다. 전화벨이 한 번인가 두 번 울렸지만 받지 않았다. 내 우는 목소리를 아무에게도 들려주고 싶지 않았다.
겨우 잠들고 깨어났을 때 가슴의 통증은 어느 정도 가라앉아 있었지만 나는 몹시 겁에 질려 있었다. 손발이 벌벌 떨려서 뭔가를 제대로 쥐지도 못했고 매일 보던 내 방의 가구들 때문에 흠칫거리며 놀랐다. 숨통은 여전히 뭔가에 죄인 듯 답답했다. 그리고 화가 나 있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곰팡이 핀 흔적이 남아있는 흰 벽들이 나를 비웃고 있었다. 정신 나간 것처럼 마구 키득거리고 있었다. 나는 갑갑해서 밖으로 나가고 싶었지만 바깥세상이 더 없이 위험하고 무섭게 느껴졌다. 그때 나는 권총을 떠올렸다. 약을 먹지 않은 그날 아침부터, 며칠 간 권총을 꺼내보지도 않고 있었다. 나는 서랍을 열고 그것을 꺼냈다. 그리고 코트 주머니에 넣은 뒤 한결 안심된 마음으로 밖으로 나섰다.
늦은 오전. 길에는 아무도 없었다. 다들 직장이나 학교에 있겠지. 골목길은 한산하고 조용했다. 종종거리며 길을 거니는 들고양이들이 몇 마리 보였다. 나는 아무 이유도 없이 그것들의 목을 비틀어 죽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것들을 쫓아갔지만 눈치 빠르게 도망가는 바람에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 화가 나서 길가의 벽에 대고 화풀이를 했다. 아무 것도 해결되지 않았다. 나는 집으로 돌아갔다.
다음 날 아침 나는 밤을 새서 새빨개진 눈으로 양복을 입었다. 서류 가방에 권총을 집어넣었다. 세수를 하고 머리를 빗었다. 이 세상 어느 누구보다도 사회화 된 깔끔한 모습으로 바깥으로 나섰다. 나는 회사로 가는 전철을 탔다.
달리는 전철 안. 출근하는 직장인들과 등산복을 입은 노인들. 그리고 교복 차림의 학생들. 나는 그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가만히 살펴보았다. 구역질이 밀려 올라왔다. 빌어먹을 늙은이들. 빌어먹을 욕구불만의 덩어리들. 나는 백발이 성성한 어느 노파 앞에 가서 섰다. 그녀는 어리둥절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가방을 열고 권총을 꺼내 노파의 미간을 쏘았다.
총성.
사방으로 튀기는 살점과 핏덩어리들.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그저 놀란, 휘둥그레 한 사람들의 시선. 어, 이게 무슨 일이지? 그들이 넋 놓고 있는 사이에 나는 세 사람을 더 쐈다. 주저앉는 고깃덩어리들. 마치 자신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듯이 오만상을 다 찌푸리고 당당하게 서있던 인간들이 순식간에 고기가 담긴 가죽주머니로 변화해간다. 한 발 더. 한 발 더. 한 발 더. 몇 명이 더 쓰러진다. 비명소리가 전차 안에 울려 퍼진다. 겁에 질린 사람들이 옆 차량으로 마구 뛰어간다. 짓밟히고 짓밟는 사람들. 나는 구두와 정장의 덩어리들을 향해 미친 듯이 총을 쏜다. 비명소리. 괴성. 총성. 화약 냄새. 나는 끊임없이 쏜다. 부순다. 죽인다. 내 가슴 속의 답답함이 방아쇠를 한 번 당길 때마다 조금씩 풀려간다. 어느새 눈물이 한 방울 흘렀다.
총알이 다 떨어지고, 나는 서류가방에서 탄창을 새로 꺼내 끼운다, 또 쏜다. 또 한 발. 또 한 구의 시체. 아수라장. 시체. 시체. 시체. 도망가던 늙은이의 머리통이 박살난다. 그 나이를 먹고서도 살고는 싶은 모양이지. 피투성이로 쓰러진 어느 여학생의 얼굴을 짓밟으며 도망치는 사람들을 쫓는다. 더 죽여. 다 죽여 버리겠어. 너희가 만든 세상이니까 너희가 처리해.
탄창을 한 번 더 갈아 끼운다. 이미 수십 명은 넘게 죽었다. 마지막 객차에 도착해서 남아있던 사람들을 전부 쏴 죽인다. 차량 끝에 어느 여자가 한 명 있다. 그녀는 열 살 즈음 되어 보이는 어린아이를 안고서 벌벌 떨고 있다. 나는 여자의 머리에 총을 쏜다. 피가 튄다. 여자의 두개골이 부서진다. 열 살짜리 꼬맹이는 넋 놓은 표정이다.
죽고서도 여자의 팔은 아이를 감싸고 있다. 무얼 지키려고? 미래? 우리들의 미래는 이미 오래 전에 과거에게 목이 졸려 죽었다. 남은 것은 천천히 썩어가는 시체 뿐. 우리를 구원할 방법은? 없다. 파괴당하는 수밖에. 파괴와 폭력만이 우리에게 남은 마지막 수단이다.
한 발 더. 이미 죽어있는 여자의 몸에 총알을 더 박아 넣는다.
우리는 구원 받지 못할 것이다. 부숴야 할 것 밖에 남은 것이 없다.
한 발 더.
의사선생, 당신이 틀렸어. 내가 옳았다고. 이게 세상의 진면목이야.
나는 아이에게로 다가간다. 그 녀석은 울지도 않고 정신을 놓고 있다. 나는 아이의 하얗고 작은 손에 묵직한 권총을 쥐어 준다.
「자, 꼬마야.」
아이는 손에 힘을 넣지 못해서 자꾸만 권총을 떨어트린다. 나는 억지로 그 손에 총을 쥐게 한다. 똑바로 들어.
「이제 네 차례야.」
녀석은 여전히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지도 못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남은 건 너밖에 없어. 정신을 차려. 이제부터 네가 할 일에 집중해.
「장전은 되어있어. 그냥 방아쇠를 당기기만 하면 돼. 여기에.」
나는 총구에 내 머리를 들이민다. 미간에 뜨겁게 달궈진 쇠의 감촉이 느껴진다.
「나는 네 엄마를 죽였어. 이제 네가 날 죽일 거야.」
내가 하는 말 정신 차리고 들어.
「명심해, 우리는 누구든지 죽일 수 있어. 뭐든지 부술 수 있고, 전부 다 불태워 버릴 수 있어.」
그때까지 넋을 놓고 있던 아이의 얼굴이 일그러지기 시작한다. 울려는 것 같다. 그 녀석은 이제 자기 힘으로 권총을 들고 있다.
「쏴.」
녀석이 양손 검지로 방아쇠를 당긴다. 뇌수와 함께 내 언어체계가 산산조각 나기 직전에 내가 가까스로 중얼거린다.
2011/09/04 완성.
1. 최초의 중편소설. 어느정도 만족한다. 그러나 계속 만족하지는 못하리라. 벌써 일종의 후회 같은 것이 뇌리에 밀물처럼 밀려들어오고 있다. 어서 다음 소설을 구상하고, 지금보다 더 높은 완성도로 그것을 이뤄내야하리라는 욕망. 더 완벽한 단순함. 더 풍부한 표현. 더 내밀한 깊이. 더 진중한 주제. 섬광처럼 빛나는 아름다움에 대한 끊임없는 갈망. 그리고 언젠가는 그것을 내 손에서 탄생시킬 수 있으리라는 근거 없는 믿음. 오직 이것만이 살 길이다.
익사자들
제1부
K는 매일 그가 사는 도시를 돌아다니며 전단지 따위를 붙이는 일을 하여 먹고 살았다. 누구나 알듯이 썩 벌이가 좋은 일은 아니었으나 K는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그는 몇 시간이고 연달아 도시를 죄 휘젓고 다닐 수 있을 만큼 자신이 젊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K에게는 큰돈이 필요하지도 않았다. 딱히 누구에게랄 것은 없지만 K는 그 점을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굳이 감사의 대상을 정하자면 그것은 아마도 K에게 어느 건물의 옥탑방을 빌려준 중년남자가 될 것이다. K가 그를 처음 만난 것은 아버지의 장례식 때였는데, 당시 K는 아직 어렸고 학생신분이었다. 아버지의 죽음을 시발점으로 하여 속속 가족과 친척들이 하나둘씩 죽어나가는 바람에 K는 몇 번이나 온갖 장례식에 참여해야했고, 그때마다 식장에는 그 중년남자가 있었다. 그리하여 꽤 얼굴이 익게 되었으나 사실 K는 그가 자신과 정확히 어떤 관계에 있는 친척인지도 알지 못했다. 다만 그는 K가 혈혈단신에 일찍도 부랑자가 되어 거리를 헤매고 다니던 어느 겨울날 우연히 만나, K의 비참한 꼴을 보고 다가와 그의 트고 갈라져 피가 배어나오는 입술 사이로 사정을 전해 듣고는, 자신의 건물에 쓰지 않고 버려둔 방이 있는데 그리로 와서 살지 않겠느냐고 제안한 사람이었다. 그를 만난 것은 굉장한 행운이었다. K는 심지어 그가 어디에 살고 있는지도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제의는 물론 K에게 있어 몹시 기쁜 일이었다. 당시의 계절은 막 겨울의 공기가 덮쳐오려는 태세여서, 그대로 부랑자 생활을 계속하기에는 너무나 혹독했던 것이다. 만약 그때, 촌수가 어떻게 되는지도 알지 못할 그 중년남자와 만나지 못했더라면 그해 겨울 K는 자신이 길거리에서 얼어 죽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새하얗게 얼어붙은 하늘로부터 자신을 보호해줄 지붕과 겨울의 냉풍에 대하여 방패처럼 굳건히 세워져있는 벽돌 벽을 갖게 된 이후에나 생각한 것이었고, 남자에게서 방을 제의받았을 때에는 그저 이제 추운 곳에서 자지 않아도 되겠다며 오직 그것만이 기쁠 뿐이었다.
그런데 K가 남자에게서 방을 제의받았을 때, 그가 아무런 인사치레도 없이 덥석 남자의 선의를 받아든 것은 아니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이상한 고집이 있었는데, 그것은 자존심이라고 할지 억지라고 할지, 하여간에 자기 체면에 대한 아집 같은 것이었다. 물론 K는 그때 남자의 선의를 순순히 받아들여야만 자신이 얼어 죽지 않고 최소한의 안전을 보장받으며 살 수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으나, 아무런 보답도 하지 못할 것이면서 자신만 좋은 일을 받아먹는 것이 창피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처음에는 괜찮다며 그저 손사래만 쳤던 것이다. K는 더 이상 차가운 땅바닥에서 자고 싶지 않았고, 남자의 제의대로 벽과 지붕이 있는 방으로 가서 살고 싶었지만 자신이 무작정 받을 수만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남자에게 자신이 남의 도움 없이도 건실하게 살아갈 수 있는 인간처럼 보이기를 바랐다. 그래서 K는 누더기 같은 외투와 반쯤 뜯어진 털모자를 입고 쓴 채 이런 부랑생활은 피치 못할 실수 때문에 벌어진 유감스러운 일이고 또 일시적인 것이며, 곧 알아봐둔 기업체에서 직업을 얻고 예전처럼 당당하게 살 수 있을 것이라고 되지도 않는 거짓부렁을 늘어놨던 것이다. 그러나 그 선량한 친척이 곧 겨울이 올 텐데 거리에서 살다간 큰일이 날 것이라고 억지로 팔을 잡고 일으켜 세우자 그제야 K는 타인의 호의를 냉담하게 저버리는 것도 신사다운 태도는 아니라는 둥 주절주절 혼잣말을 늘어놓으며 그를 따라 나섰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K는 털 뭉치 밖에 들어있지 않은 외투의 호주머니를 뒤지면서 「내가 당신에게 보답으로 줄 것이 있을 텐데」하고 씨알도 안 먹힐 체면치레를 하는 것이었다.
중년남자가 K에게 내준 방은 벽으로 나뉘어있지도 않은 직육면체의 공간이었다. 전등도 없고 보온도 되지 않아 그야말로 창고 같은 곳이었으나 수도는 연결되어 있었고 수도 옆에는 양변기도 하나 놓여있었다. K를 데려온 남자는 구석에서 두텁게 먼지가 쌓인 매트리스를 꺼내어 펼쳐놓으며 지저분하고 좁지만 겨울을 보내기에는 적합할 것이라고, 또 더 좋은 방을 내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말했다. K는 미안하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 이렇게 좋은 방을 내주다니 감사해서 어쩔 줄을 모르겠다는 둥 남자의 손을 붙잡고 정신 나간 듯이 그를 칭찬하며 늦가을 태양빛이 비추는 방의 구석구석을 곁눈질로 훑어보았던 것이다. K의 눈이 닿는 곳에는 어디에나 갑작스런 방문자에게 놀라 그늘 밑으로 도망치는 벌레와 쥐떼가 보였고 천장에는 사방에 거미줄이 쳐져있었다. 그래도 K는 벽이 있는 곳에서 자게 된 것이 기뻐서 붙잡은 남자의 손을 더욱 세게 움켜쥐며 놓을 생각도 안하고 위아래로 흔들기만 하는 것이었다.
그러던 와중 갑자기 불안한 생각이 들어 K는 문뜩 흔들던 손을 놓고 쭈뼛거리며 남자를 향해 입을 열었다.
「음, 그런데, 제가 지금은 그다지 가진 것이 없어서요. 방세는…… 물론 언젠가는 갚을 수 있을 겁니다만…… 아니, 언젠가가 아니라, 아마 곧 갚을 수 있을 겁니다. 저도 이제 금방 일자리를 잡을 것이고, 그러면 돈도 벌게 될 것이니까.」
그러나 K의 말은 남자에 의하여 중간에 허리가 잘렸다. 남자는 K에게 자신이 방세나 받으려고 K를 데려온 것이 아니며, 순전히 친족 간의 호의로 방을 내준 것이니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아도 좋다고 말한 것이다.
「하지만 은혜라는 것이 있는 법이죠. 제가 지금 단 한 푼도 가진 것이 없기는 합니다만……」
K는 다소 당황한 듯이 그렇게 말하며 말꼬리를 흐렸다. 그러자 중년남자는 약간 미소를 띠우며 그렇게 깊게 생각할 것은 없다고 말한 뒤 계단을 내려가 K의 눈에 보이지 않게 되었다. K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있었다. 바람을 막을 수 있는 곳에서 자게 된 것이 기쁘고 안심도 되었지만, K의 마음속에서는 그보다 초조함과 불안이 더 크게 파도치고 있었다. 저 남자가 내가 한 말을 믿었을 것인가? 저자가 나를 쓸모없고 지저분한 부랑자로만 보고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그는 절대로 내가 직장을 찾아서 돈을 벌어 오리라고 믿지 않을 것이다! 내 주머니에 지폐 한 장이라도 들어있었더라면. 그러면 내가 그것을 꺼내서 그의 손에 쥐어주며 감사를 표현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 그도 나를 더 괜찮은 사람으로 보지 않겠는가? 그런데 이게 무슨 꼴인가! 나는 벌써 일주일이 넘게 씻지도 못했고 길거리에서 주운 모자를 뒤집어썼으며 단 한 푼도 가진 돈이 없다. 혹시 저 남자가 나를 저능자로 보는 것은 아닐까? 물론 멀쩡한 사람이라면 다 해진 옷을 입고 길바닥에 며칠이고 웅크리고 앉아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내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구걸을 해본 일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한다. 나도 자존심과 신념이 있는 것이다! 어떤 저능자가 그런 것을 가질 수 있겠는가! 내가 비록 부랑자였어도 그는 내가 정신머리가 올바로 박혀있는 부랑자라는 것을 알아야했다. 나는 결백한 사람인 것이다! 흠, 그러나 그는 이미 계단을 내려가고 없다. 내가 은혜 운운한 것을 그는 제대로 이해했을까? 나는 은혜를 모르는 사람이 아니다. 나는 염치도 있고 받은 것에 대하여 보답할 줄도 아는 사람이란 말이다. 등등……
그는 한참이나 선채로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는 중년남자에 대한 생각으로부터 헤어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마침내 K는 씩씩거리며 인상을 쓰더니 현관문을 냅다 걷어차고 매트리스 위에 풀썩 주저앉았다. 그 바람에 섬유 속에 쌓여있던 먼지가 붕 떠올라 공기 중을 까맣게 덮었다. 그러나 K는 코를 막거나 숨을 멈추지도 않고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여전히 흥분된 호흡을 하는 것이다. 그는 가만히 앉아 조금씩 화를 삭이며 다른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K는 내일이 되면 거리를 좀 걸어보아야겠다고 결심했다. 마침 여기에 수도가 있으니 오랜만에 씻고 깔끔해진 얼굴로 거리에 나설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직장도 구할 것이다. 그러면 전부 완벽하지 않은가? 나는 친척인 남자의 호의로 살 곳도 마련했으니 이제 직장을 갖기만 하면 흠잡을 데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K는 그렇게 생각하며 먼지투성이의 매트릭스 위로 머리를 뉘였다. 하늘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벌써 해가 지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조금 추위가 느껴지는 것 같아 K는 외투의 옷깃을 한층 더 세게 여몄다. 그래도 밖에서 자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K는 눈을 감았다.
다음날 K는 괜찮은 일거리를 찾기 위해 거리로 나섰다. 그런데 K가 사는 이 도시는 기묘할 정도로 길이 복잡하고 모든 거리들이 전부 비슷비슷하게 생겨서 그 길을 걷는 보행자들조차도 자신이 도시의 어느 구역쯤을 지나고 있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는 것이었다. 길을 걷던 K도 다른 행인들과 마찬가지로 어느새 자신이 어디에 와있는지도 모르게 되어버렸다. 즉 길을 잃은 것이다. 모든 거리들은 그 끝이 나뭇가지처럼 샛길과 골목들로 산발하여 나뉘고 엉켜있어서 어느 방향으로 가야 목적지가 나오는지 가늠할 수가 없었고, 무턱대고 걷다보면 왜인지 처음 출발했던 장소로 돌아와 있는 상황까지 발생하곤 했다. 모든 건물들은 회색이었고 구름 낀 하늘은 정수리에 닿을 듯이 낮게 깔려있었다. K의 머릿속에서는 이 도시가 어디로도 빠져나갈 수 없도록 만들어져있다는 생각이 스쳐지나가고 있었다. 지형의 고저차 때문에 만들어진 시멘트 건축물들의 능선은 그 너머로 시선을 던지는 것을 방해하고 있었고, 하늘은 굳게 닫혀 무엇 하나 시원스럽게 보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 무작정 걷는 수밖에 없었다. 하다못해 지도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그러나 그런 바람은 완전히 헛된 것이었다. 이곳에 사는 공무원들도 이 도시의 지리를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 같았다. 그러니 누가 지도를 만들 수 있겠는가. K는 최선을 다해 자기가 걷는 거리와 골목들의 특징을 파악해서 길과 길 사이의 연계성을 알아내려고 했으나 계속 같은 자리를 돌고 있다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마침내 K는 이 원형도시―실제로 원형인지 어떤지는 알 수 없지만―의 ‘바깥’으로 나가는 것을 포기하고 자기 주변에 있는 건물들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곧 건물들의 간판과 표지판 따위가 보이기 시작했는데, K가 발견한 것들 중에서는 지역신문이 잔뜩 꽂혀있는 철제 구조물도 있었다. 아무래도 무료로 배포하는 신문인 듯하여 그는 신문 한 부를 꺼내 읽기 시작했다. 몇 장 넘기자 구인란이 나왔다.
상점에서 회계사 구함. 외식업체에서 보조 요리사 구함. 장례식장 관리자 구함. 운송업체에서 택배기사 구함. 택배기사라! K는 운송업체에서 실어놓은 구인 광고에서 시선을 멈췄다. 그는 육체노동도 나쁘지 않은 일이라고 중얼거리며 사업체의 위치나 전화번호, 그리고 임금 따위가 적힌 조그마한 항목을 읽었다. 퍽 다행으로 거기에는 작은 약도도 그려져 있었다. 그것이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같은 길을 계속해서 뱅뱅 돌게 만들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K는 약도를 보고 자신의 위치를 가늠하며 택배 회사를 찾아 걷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꽤 길을 잘 찾게 되어 이십여 분 만에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었다. 건물들이 온통 비슷하게 생겨먹은 바람에 몇 번 헤매기는 했지만 그래도 성공적인 길 찾기였다고 할 수 있었다. 택배 회사는 2층짜리 건물을 통째로 사용하고 있었다. K는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려다가 잠시 주춤하며 자신의 복장 따위를 살펴보았다. 무엇보다도 외투가 너무 낡았고 머리카락이 지저분했다. 현관의 옆쪽에는 회사가 사용하는 것으로 생각되는 커다란 창고가 문이 활짝 열린 채로 놓여있었는데, 그 문으로 제복을 입은 사원들이 드나들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행동하기에 편하도록 머리를 짧게 잘랐으며 건장한 몸을 갖고 있었다. K는 자신의 지저분하고 길게 흘러내려있는 머리칼을 한 손으로 쓰다듬어 보았다. 또 자신의 외투를 다시 한 번 점검하다가 그냥 그것을 벗어 들고 말았다. 외투 안쪽에 입고 있던 셔츠도 물론 깨끗한 것은 아니었지만 외투보다는 보기에 낫다고 생각되었다. K는 셔츠 자락에 묻은 얼룩이나 흙먼지 따위를 침을 발라서 긁어낸 뒤 좀 더 활발한 사람처럼 보이기 위하여 앞머리를 전부 뒤쪽으로 눌러 붙여 이마가 드러나게 하였다. 그리고서야 마침내 K는 현관문을 열고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는 마침 지나가던 직원에게 구인 광고를 보고 왔는데 어디로 가야하느냐고 물었다. 직원은 친절하게 사장실의 위치를 알려주었다. 그것은 2층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K는 계단을 올라가야했다. 계단을 오르던 와중 K의 뇌중에 갑자기 떠오른 생각이 있었는데, 그것은 자신이 오늘 한 끼도 먹지 못했다는 사실이었다. 부랑자 생활을 할 적에도 굶기를 밥 먹듯이 하여 허기에는 꽤나 익숙해져있었지만, 식사를 하지 못하면 속이 쓰리고 자세가 다소 구부정해져 겉보기에 안쓰럽게 변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었다. K는 그 점이 걱정되었다. 아무래도 사장이 어디서 죽도 못 얻어먹고 다닌 것 같은 말 뼈다귀를 대뜸 채용할 것 같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일부러 허리를 쭉 펴고 가슴을 약간 내민 자세를 하고서 계단을 올라 사장실에로 찾아들어갔다.
노크를 하고 방안에 들어서자 K의 눈에 들어온 것은 중앙에 당당하게 놓인 커다란 탁자와 그 양 옆의 벽에 붙어서있는 책장들이었다. 그리고 사장으로 보이는 자는 그 탁자 뒤에 앉아 서류 따위를 검토하고 있었다. K가 방안으로 들어오자 그는 문 쪽으로 시선을 향했는데, K는 그 남자의 벗겨진 이마와 굵은 눈썹에 인상을 받은 참이었다. 다소 강인한 인상을 가진 사장은 K를 보고 인사를 건네며 무슨 일로 오셨느냐고 물었다. K는 여전히 자기 복장에 대한 불안 때문에 다소 초조해하며 구인 광고를 보고 찾아왔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사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K를 향해 다가와, 그의 몸을 찬찬히 훑어보는 것이었다. 사장이 지금 자신을 평가하고 있는 것이리라고 알아차린 K는 더욱 의식적으로 가슴을 내밀고 당당한 체구를 가진 것처럼 자세를 잡았다.
「너무 말랐는걸.」
사장이 한 말이었다. 실제로 K는 굉장히 말라있었다. 게다가 사실은 마른 것뿐만이 아니고, 오랜 부랑 생활로 인하여 내장도 여기저기 상해있었던 것이다. 그에게는 도무지 육체노동을 할 만한 기력은 남아있지 않았다. 그의 몸은 멀쩡히 작동하는 것만으로도 큰 곤란을 겪고 있는 중이었던 것이다. 사장의 ‘너무 말랐다’는 말이 부정적인 평가인 것을 알아들은 K는 여전히 당황하여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제가 마른 것은 사실이지만 젊고 건강합니다. 한때는 운동선수이기도 했습니다. 써주시기만 한다면 한 사람 몫은 할 수 있으리라고……」
「그렇지만 너무 말랐어요. 실은 썩 건강해보이지도 않는군. 매일같이 짐을 올리고 내리고 하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닌데. 보세요, 당신 다리가 풀려있군. 이렇게 되면 못쓰지.」
거절! K는 사장의 이러한 말이 거절임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는 밖으로 내비쳐보이지는 않았으나 좌절하여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K는 그렇다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거짓웃음을 약간 띠우며 사장실에서 돌아 나왔다. 등 뒤에서 사장이 미안하다며 인사를 하는 것이 들렸다. K는 다소 비척거리는 발걸음으로 계단을 내려와 건물 밖으로 빠져나왔다. 제기랄! 내가 너무 말랐다고? 그의 눈에는 내가 택배 상자도 하나 못 들만큼 부실하게 보였나? 하지만 어느 정도는 사실이기도 하다…… 그래도 나는 일을 시키기만 한다면 잘 할 수 있었을 텐데! 아까운 일이다. 내 하체가 풀렸다고…… 이것은 조금 모욕적이기도 하다. 못쓰겠다니! 그는 이후에 나 같이 잘 된 일꾼을 놓쳤다면서 후회하게 될 것이다. 그때 가서 보라지. 너무 말랐다니, 터무니없다!
K는 계속 그렇게 불만에 찬 혼잣말을 지껄이며 다시 거리 한복판으로 나왔다. 이제 별 수 없었다. 다른 일거리를 찾아야 했다. 웬만하면 매일 일당을 주는 일이 나을 것이다. 왜냐하면 K의 호주머니는 여전히 텅 비어있고, 뱃속도 사정은 마찬가지였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K는 이미 일자리를 구하러 다닐 마음이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한참이나 도시를 맴돌던 것이 그의 의욕을 깎아먹은 후였고, 또 그 운송업체 사장에게서 ‘안 된다’는 말을 듣고 난 직후라서 자존심도 상하고 허탈감을 느끼던 중이었던 것이다. 어디를 가든 사람들은 나의 추레한 옷차림과, 앙상하게 말라붙어 척추뼈가 전부 드러나 보이는 구부정한 목을 볼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니 K는 도무지 다른 직장을 찾으러 나설 의욕이 나지 않는 것이었다. 그는 잠깐 도로 위에 멈춰 서서 신문 생각을 했다. 분명 거기에는 장례식장 관리자를 찾는다는 광고도 있었다. 어쩌면 그것이 나에게 딱 맞는 일은 아닐까? 왜냐하면, 이미 시체가 주인공인 무대에서 굳이 생기발랄하고 건강하게 살집이 붙은 사람이 있어야 할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그러나 곧 K는 자신이 그 신문을 구겨 택배회사 건물 앞에 던지고 왔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 신문을 찾겠다고 다시 거기까지 가고 싶지는 않았다. 이미 한참 걸어온 이후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그곳에서 일하던 건강한 신체를 가진 제복 입은 직원들의 눈에 띄고 싶지도 않았던 것이다. 그들은 내가 억지로 가슴께를 내민 자세로 걸어 다니는 것을 보고 한참이나 비웃었을 것이 분명하다! 나는 너무 말랐고 병들어있는 것처럼 보인다. 다시 그들 눈앞을 얼쩡거리면서 손가락질의 대상이 되고 싶지는 않다…… 운송업체의 직원들이 부랑자처럼 지저분하게 차려입은 자신에 대해 험담하면서 조소하는 장면을 상상하고 있자니 K는 울컥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젠장! 그들이 나를 거지 따위로 생각하다니! 나는 이래 뵈도 집도 있다. 물론 생긴 지 얼마 안 된 집이지만, 그래도 멀쩡한 집이다. 벽지도 장판도 없지만 창문만은 사방으로 활짝 열려있어 얼마나 햇빛이 잘 들어오는지. 나는 그렇게나 좋은 집을 갖고 있는, 엄연한 사회인이란 말이다. 내가 거지꼴이라고? 누구든 거지꼴이 될 수 있다! 누구나 실패할 수도 있고 실수로 발을 헛디디는 일도 있는 것이다. 나처럼 미래 유망한 젊은이도 까딱 쓰러지는 수가 있단 말이다. 그런 것은 사실 전부 운에 달린 일이니 내 책임이라 할 수는 없다. 그들은 그것을 알아야 한다. 암, 그렇고말고, 그 멍청한 택배기사들에게 말해주고 싶군. 누구나 돌부리에 발이 걸려 넘어질 수도 있는 법이지.
그렇게 중얼거리며 사납게 발걸음을 옮겨대던 K는 또 한 번 멈춰 섰다. K의 맞은편에서 걸어오고 있는 여자가 한 명 보였는데, 그는 계속 K의 얼굴을 직시하며 걸어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K도 그 눈빛이 자신을 향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지만 K 주변에는 다른 보행자들도 없고, 그녀는 K를 향해 직선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K와 여자 사이의 거리가 아직 충분했기 때문에 K는 도보 위에 선 채로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저 여자는 누군가? 누군데 마치 아는 사람처럼 나를 쳐다보고 내 쪽으로 걸어오는 걸까? 혹시라도 내가 어느 여성에게 원한이 될 만한 일을 저지른 과거가 있던가? 그는 열심히 생각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누군가에게 원한 살만한 일을 저지른 기억은 없었다. 애당초 K에게는 남에게 못할 짓을 할 배짱조차도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그가 죄악에 있어 자유로운 인간이라는 뜻은 아니지만, 하여튼 K는 기억나는 것이 없었다. 그렇다면 원한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그렇게 생각하고 K는 좀 더 자세히 여자를 살펴보았는데, 그녀 역시 복장이 꽤나 초라했다. 그녀는 말라서 볼이 쑥 들어가 있고 얼굴에 궁상맞은 주름들이 늘어서 있었으며, 입술도 하얗게 갈라져 있었고 눈에는 생기가 없었다. 또 그녀는 지저분한 회색 옷 위에 어디 길바닥에서 주워온 것 같은 누더기를 바람막이용으로 턱 언저리까지 감싸 놓았던 것이다. 퍽 가난해 보이는 여자였다. 아니, 가난할 것이 틀림없었다. 어쩌면 길거리에서 먹고 사는 여자일지도 모른다. 늙고 병든, 슬픔으로 새겨 넣은 것 같은 주름을 갖고 있는 여자라! K는 특히나 그녀의 눈에 인상을 받았다. 반투명한 장막에 가려진 것처럼 흐릿한 그녀의 눈은 안구 밑으로 무겁게 가라앉아 은근한 원망의 감정을 발산하고 있었다. 그런 눈을 K는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욕지기가 날 것 같았다. 늙고 불행한 여자.
그녀의 눈 때문에 어지러워진 생각들 사이에서 K가 가까스로 정신을 추스르고 있었는데, 여자는 어느새 K의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그런데 순간 그녀의 얼굴에 후회의 빛이 떠오르는 것이 보였다. 늙은 여자는 고개를 들어 K의 얼굴을 쳐다보다 뭔가가 잘못 되었다는 듯이 시선을 내리깐 채 멈칫거리곤 했는데, K가 그녀에게 말을 걸자 당황하여 손을 내저었다.
「무슨 일입니까?」
「아니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니라고? 늙은 여자는 그렇게 내뱉고서는 마치 도망치려는 듯이 성급히 방향을 틀어 K로부터 멀어지려고 하였다. 이상하게 생각한 K가 그녀의 팔을 불쑥 움켜잡고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라니, 당신은 이상한 여자로군! 볼일도 없이 남을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걸어와서는 그냥 간다는 거요?」
팔이 붙잡힌 여자는 전보다 더욱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는데, 그것이 K를 몹시 짜증나게 만들었다. K를 두려워하는 것 같은 여자의 동작이 계속 성질을 긁는 것이었다. 화가 난 K가 약간 성난 목소리로 무슨 볼일로 왔느냐고 마구 다그치자 노파는 곤욕스러워하면서 마침내 고백했다.
「돈을! 배가 너무 고파서, 우윳값을 좀 구걸하려고!」
「우윳값? 안될 것 없지! 그런데 왜 도망치려고 한거요?」
그러자 여자는 또 입을 다물고 도망가려고만 하는 것이었다. 어지간히 성질이 난 K는 재차 노파를 붙잡고 앞뒤로 흔들 듯이 하면서 물었다. 동냥하러 와서 그대로 가는 건 또 무슨 짓이냐고 말이다. 잔뜩 겁에 질린 노파는 거의 자포자기하여 대답했다.
「눈이 안 좋아서!」
「뭐요?」
「늙어서 눈이 침침해요. 멀리서 봤을 때는 몰랐는데 가까이 와서 보니까.」
「가까이 와서 보니까 뭐가 어쨌기에?」
「가까이 와서 보니 같은 신세인 것 같아서 그냥 가려고 했지요! 제발 이 손 좀 놔 줘요!」
같은 신세! 이 여자가 우스운 말을 하는군. 내가 그렇게나 비루해보인단 말인가! 우선 K는 그때까지 꽉 붙잡고 있던 팔을 놓았다. 그리고 큰 소리로 노파에게 도망가지 말고 서있으라고 외쳤다. 이대로 이 여자를 보낼 순 없었다. 그녀는 K를 죽도 못 얻어먹은 비렁뱅이로 본 것이다. 그런 것은 용납할 수 없었다. K가 풍족하고 자비심도 많은 훌륭한 인간이라는 것을 노파에게 알려주어야만 했다. 겁에 질리고 또 어리둥절하기도 하여 불안하게 서있는 노파 앞에서 K는 잠깐 생각을 시작했다. 그런데 어떻게? 내겐 지금 아무것도 없지 않은가. 주머니는 텅 비었고, 정작 나부터가 마지막으로 밥을 제대로 먹어본 것이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운송업체 사장이 날 더러 너무 말랐다고 했었지! 밥을 못 먹지만 않았어도 이렇게까지 마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당장 어디론가 가서 이 노파가 원하는 우윳값을 어떻게든 변통해올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이 도시에서 아는 사람이라고는 내게 방을 빌려준 그 남자밖에 없다. 방까지 무상으로―물론 나중에 사정이 나아지면 반드시 갚을 것이다!― 내준 사람에게 돈푼이나 구걸하러 갈 정도로 내가 염치없는 인간은 아니다. 그러면 어떻게 할까? 이대로 놔뒀다간 이 여자는 그대로 도망가 버릴 것이다. 우윳값이나 좀 얻으려다가 정신 나간 거지새끼한테 잘못 걸려 욕을 봤다면서 침을 뱉으며 도망칠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나는 그런 자가 아니다! 그런 취급을 받아도 되는 인간이 아닌 것이다. 그것을 분명히 이 여자에게 알려주어야 한다. 그러다가 K는 문뜩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이 박수를 치며 이렇게 말했다.
「자, 이거 받으시오! 내가 비록 지금 사정이 넉넉지 못하여 돈을 줄 수는 없지만, 당신은 내게 감사해야 할 거요!」
그러면서 K는 자신의 외투를 벗어 노파가 목을 감싸고 있던 누더기 위에 덧입히는 것이었다. 그래, 이거면 충분하다. 이제 곧 겨울이 올 계절이 아닌가? 아무렇지도 않게 입고 있던 외투를 건네주는 사람을 누가 비렁뱅이로 생각하겠느냔 말이다. 옷장에 외투 서너 벌쯤은 넉넉히 있는 사람이어야만 보여줄 수 있는 호의다! 갑자기 외투까지 겹쳐 입게 된 노파는 여전히 얼떨떨하여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다. 그러한 노파를 등 뒤에 두고 K는 자신의 호탕함에 몹시 만족하여 자리를 떠나는 것이다.
「안녕히! 열심히 사시오!」
날씨는 점점 차가워졌다. 날이 갈수록 하늘은 더욱 하얗게 탈색되고 있었다. 공기가 전부 얼어붙어버린 듯 새하얀 아침에, K는 자신의 매트리스 위에서 마치 태아처럼 웅크리고 있었다. K는 이미 일찌감치 눈을 뜨고 있었지만 일어날 수가 없었다. 난방도 되지 않는 방에서 셔츠바람으로, 심지어 변변한 덮을 것도 없이 잠을 자는 바람에 밤새 온몸이 얼어버린 것이다. 관절 마디마디에 냉기가 들어차 쑤시고 움직일 수가 없었다. K는 파랗게 질린 입술로 무어라고 중얼거리며 미동도 하지 않았다. 천천히 피가 돌고 몸이 녹을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달리 방도가 없었다. 제길, 그놈의 외투만 있었더라도! K는 감각이 없는 손가락 하나를 움직여보려고 계속 애를 쓰며 생각했다. 아무래도 그 늙은이에게 외투를 건네준 것은 실수인 것 같았다. 애당초 그런 뻔뻔한 낯짝으로 구걸을 하러 오다니. 얼마나 염치없는 여자란 말인가. 게다가 내가 외투를 주니 아무런 감사도 없이 얼빠진 표정으로 날 쳐다보고나 있었지 않은가! 그런 여자에게 호의랍시고 하나뿐인 외투를 줘버린 것은 정말이지 잘못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하여 내가 그 상황에서 달리 어떤 선택이 가능했단 말인가? 나는 누더기나 칭칭 감고 있는 늙어빠진 노파에게 거지 취급을 받고도 괜찮을 인물이 아니다! 외투 외에 뭐라도 내 자비심을 나타낼만한 것이 있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꽁꽁 언 몸은 어지간히 녹지를 않았다. K는 아까부터 계속 다리를 좀 펴보려고 노력하고 있었는데, 무릎이 풀리기는커녕 감각도 돌아오지를 않는 것이었다. 우선 몸이 풀리면 외투나 이불 대용으로 쓸 만한 것을 찾으러 가봐야겠다. 어쩌면 도시 변두리에서 짚 따위를 좀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지, 그러고 보니 어제 길을 헤매는 도중에 의류 수거함을 보았던 것도 같다. 비럭질이나 다름없는 일이긴 하지만 적어도 나를 향해 인상을 찡그리고 있는 여주인은 없을 것 아닌가. 구걸보다는 수거함이나 뒤지는 것이 훨씬 위신이 서는 일이다. 물론 남들이 보지 않을 때 해야 할 것이다. 새벽이나 혹은 거리가 한산해지는, 정오가 조금 지난 시간이 좋겠다. 나라고 기쁜 마음에서 그런 짓을 하는 건 아니다. 남이 버린 옷이나 뒤져야한다니, 이 얼마나 굴욕적인 일이란 말인가. 그러나 어쩔 수가 없다. 아직 겨울이 다 되지도 않았는데 이렇게나 춥단 말이다. 무엇이라도 껴입지 않으면 틀림없이 한 달 안으로 얼어 죽을 것이다. 그런 죽음은 사양하고 싶다. 죽는 방식에도 모두 미학이 있기 마련인데, 내 미학으로 보기에 옥탑방 구석에서 얼어 죽는 것은 그다지 미적인 죽음으로 분류되지 않는 것이다.
K는 한참을 그렇게, 배를 중심으로 하여 몸을 말고 있었다. 그러자 느리기는 해도 체온을 담은 피가 몸 곳곳으로 흐르며 조금씩 창자가 데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K가 처음으로 느낀 감각은 허기였다. 위장이 냉기로부터 벗어나자마자 먹을 것을 달라고 빽빽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K는 철저하게 그 요구를 무시했다. 당장 들어줄 수도 없는 소원일뿐더러 뭔가를 먹고 싶은 마음도 없었기 때문이다. 공복감이 있다고 하여 무조건 식사를 해야만 하는 법은 아닌 것이다. 그리고 사실 K는 오래전부터 무언가를 먹는다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거식증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 그는 끼니를 해결할 능력이 있을 때에도 밥 굶는 것을 예사로 해왔던 것이다. 무엇보다 식사라는 행위가 강제되는 것이 K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K라는 인간에게는 자존심이 있다. 식사를 하고 말고는 순전히 자신이 상황을 보아 선택해야할 문제란 말이다. 그러나 굶주림은 K의 의향을 아는지 모르는지, 항상 제멋대로 찾아와 그를 괴롭히곤 했다. K는 그것이 싫었다. 자신의 감각임에도 불구하고 통제되지가 않는다는 것이 말이다. 그런 점에서 지금의 빈곤상태는 K에게 흡족한 면도 없지 않아 있었다. 손에 빵 덩어리가 들려있으면 먹지 않으려고 해도 허기가 그것을 탐하곤 하는 법인데, 적어도 이 빈곤상태에서 K의 손에 빵 덩이가 쥐여있을 일은 없었던 것이다. 먹을 것인가 말 것인가를 고민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K는 만족스러웠다. 며칠씩 물만 마시며 사는 바람에 현기증이 나고 신물을 토해도 그는 괜찮았다. 오히려 K는 자신의 피치 못할 단식행위를 즐기기까지 했다. 수행자들도 뭔가 추상적인 것을 얻기 위해 밥을 굶는다지 않는가? K의 단식행위에 그런 정신적인 목적 같은 것은 없었지만 하여간에 그는 밥 굶는 것을 다소 자랑스럽게 여기기까지 했다. 먹는 것이 없었기 때문에 몸 밖으로 내보낼 것도 없었고, K의 내장들은 멀끔하게 말라붙어 기름만 흐르고 있었다. 오래 굶으면 굶을수록 K는 자신이 깨끗하다고 느꼈다. 덕분에 그의 걸음걸이는 휘청거리고 매일같이 무력증에 시달렸지만 여하튼 K의 괴상한 결벽증만은 만족되고 있는 것이었다.
그 와중에도 해는 계속 떠오르고 있었다. K의 방은 유난히 창문이 넓어서, 해가 지붕에 가려지는 정오 때가 아니면 항상 태양광이 직선으로 들이닥치곤 했다. 태양빛의 온기에 힘입어 K의 몸도 점점 풀리고 있었다. K는 온몸의 뼈다귀를 송곳으로 파내는 것처럼 아픈 것을 느꼈다. 지금까지는 냉기에 얼어있던 통증들이 햇빛에 녹으면서 감각 위로 쏟아져 내리는 것이었다. 곧 사지가 마음먹은 대로 움직이기 시작하고 피부의 감각도 돌아오자 K는 한숨을 쉬며 약간 안심했다. 밤새 다리나 팔 한 짝이 얼어서 죽어버린 것은 아닌지 걱정을 했던 것이다. 제대로 된 옷가지를 갖춰 입기 전까지 다시는 이 매트 위에서 잠들지 않으리라. K는 그렇게 다짐하며 누워있던 몸을 일으켜 앉았다. 맨바닥이 아닌 곳에서 자게 되었다고 너무 안심했었던 것이다. 계절은 철저하게 겨울을 향해 한발씩 나아가는 도중이다. 까딱하다가는 목숨이 위험하단 말이다. K는 창문너머 하늘을 보았다. 이미 완연히 해가 뜬 뒤였다.
목숨이라! K는 벌떡 일어서며 그렇게 소리쳤다. 그의 머릿속은 동트기 직전의 하늘처럼 깨끗했다. 그리고 그의 피는 너무 젊었다. K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죽음이 걱정되기는 뭐가 걱정된단 말이냐. 제대로 살아있지도 못한 주제에…… K는 약간은 화가 난 듯, 혹은 약간은 체념한 듯이 벽을 향해 지껄였다. 벽은 벽지도 바르지 않아 거칠거칠하고 석회 알맹이가 전부 드러나 보였다. K는 그것을 손가락 끝으로 쓰다듬어 보았다. 검지 끝에 까만 얼룩이 묻었다. 그는 엄지손가락으로 얼룩을 문질러 지우며 방 바깥으로 나섰다. 유난히 햇살이 밝은 날이었다. K는 공연히 옥상을 서성거렸다. 여전히 뼈마디 깊이 박혀있는 통증들이 신경에 거슬렸다. 아직 벌건 대낮이었는데도 불구하고 K의 마음속에서는 정체불명의 불만족이 미친 듯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는 계속해서 목적이 불분명한 손짓 따위를 하며 무언가를 망설이는 사람처럼 같은 자리를 반복해 걸었다. 한동안 그러다가 K는 문뜩 무언가가 떠올랐다는 듯이 옥상의 난간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내려다보니 3~4층 정도의 높이였다. 밑에는 막다르고 후미진 골목에 쓰레기나 낡은 가구 따위가 방치된 채 버려져있었다. 만족스러운 높이는 아니다. K가 중얼거렸다. 그의 마음속은 현재 불만족과 함께 자기 자신에 대한 반항심으로 가득했다. 이런 일은 종종 있는 일이었다. 말하자면 일종의 발작과도 같다. 어느 날 갑자기 머릿속이 깨끗해지고, 시선은 명징해지며 모든 사물들의 진면목이 포탄처럼 날아와 K의 정신 한가운데에 박힌다. 그러면 K는 도무지 견딜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무엇에 대하여? 그건 모른다. 다만 세상과 정면으로 대치하고 있는 것 같은 감각은 무엇보다도 위력적으로 그의 감정을 헝클어 놓는다. 그의 머릿속은 반항심으로 가득 찬다. 그러나 그 뿐, 출구는 도무지 보이지 않는 것이다. K는 눈 깜짝할 사이에 난간 위로 올라서더니, 곧바로 눈앞의 허공을 향해 뛰어내렸다.
짧은 비행. 그리고 중력의 법칙에 따라 K는 커다란 소리를 내며 쓰레기더미 위로 떨어지고 골목 바닥을 나뒹굴었다. 발부터 떨어진 탓인지 발목과 무릎 관절에 싸한 느낌이 들었다. 콘크리트 바닥에 뒹구는 바람에 셔츠의 팔꿈치가 찢어지고 피부도 벗겨져 피가 흘렀다. K는 한참 동안을 그대로 엎어져 있었다. 처음에는 그저 시큰거리기만 하던 관절이 시간이 지날수록 격렬하게 아파왔다. 뼈가 어긋나거나 금이 갔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것은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다. K는 자신의 심장이 쿵쾅거리면서 요란하게 뛰는 것을 가만히 듣고 있었다. 공중에서 추락할 때의 불안과 공포가 뒤늦게 심장을 자극한 것이다. 그 충격으로 말미암아 조금 전까지만 해도 K의 내면에서 사납게 파도치던 감정들은 위세를 잃고 움츠러들어 어딘가로 숨고 없었다. 그는 길바닥에 자빠진 채 정신없이 웃었다.
한동안 웃고 나서 K는 몸을 뒤집어 하늘을 향해 대자로 누웠다. 눈부신 초겨울 햇살이 화살처럼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오른쪽 다리가 염병하게 아팠다. 하늘은 너무 창백하고 맑았다. 선명한 겨울의 냄새를 머금은 빛 조각들이 유성처럼 떨어져 내렸다. K는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의 처지가 거짓처럼 느껴졌다. 삶 따위 신경 쓰지 않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K의 머릿속에서 누군가가 K를 향해 천한 공상가라며 비웃는 소리가 들렸다. 갑자기 골목 안에 찬바람이 불었다. K는 추위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그렇지, 옷이나 구하러 가야겠다. K는 그렇게 생각하며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른쪽 다리에 무게를 실을 수가 없었다. 조금만 그쪽으로 몸을 기울여도 격통이 느껴졌다. 별 도리가 없었다. K는 절뚝거리며 걷기 시작했다. 그날 K는 하루 종일 다리를 절며 온 도시를 돌아다녔다. 의류 수거함이 쉽게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이다. 거의 저녁때가 다 돼서야 그는 목적하던 것을 찾아냈고, 그 속을 뒤져 여기저기 실밥이 터졌지만 충분히 입고 다닐만한 외투를 두어 벌 구했다. 그는 만족스러워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외투 하나는 매트리스 위에 놓고 이불로 쓸 것이다. 이번 겨울은 충분히 희망적이라고 K는 생각했다. 이 도시는 풍족하고 재화가 넘친다. 덕분에 빈민 꼴로도 외투를 두 겹씩이나 입을 수 있지 않은가. 어쩌면 그 노파에게 외투를 벗어준 것이 잘한 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덕분에 나는 따뜻한 외투를 두 벌이나 구했다. 노파에게 준 외투를 벗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도 셔츠 위에 그 지저분한 웃옷 하나만을 걸치고 있었을 것이다. 심지어 내게는 무상으로 집을 빌려주는 친척도 있다! K는 만사가 다 잘 돌아간다고 생각했다. 그날 밤 그는 과거의 어떤 저녁보다도 흡족한 마음으로 매트리스에 누웠다. 시간이 지날수록 심하게 부어가는 오른쪽 다리가 신경 쓰이고 고통스럽긴 했지만 잠이 들고 나면 그런 것도 전부 잊을 수 있을 것이라고 K는 생각했다. 그리고 모든 일이 다 잘 되어가니 어쩌면 다리도 내일 아침쯤엔 붓기가 전부 가라앉고, 또 통증까지 없어져 있을지도 모른다. 그는 그런 호운도 충분히 기대해볼만한다고 허공을 향해 내지껄였다. 캄캄한 천장의 한구석에서 누군가가 호쾌한 목소리로 ‘그렇다’고 동의하는 소리를 낸 것을 들었다고 K는 확신했다. 그는 소리 내서 웃었다. 누군가와 악수라도 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다리의 붓기 때문인지 해골 안쪽이 열에 들뜬 것처럼 약간 어찔했다. 유쾌함과 아득함이 뒤섞인 정신으로 K는 곧 잠에 들었다.
다음날 새벽 일찍부터 K는 격한 고통 때문에 헐떡거리며 잠에서 깨어나야만 했다. K는 눈을 뜨자마자 심한 욕지기를 느껴 매트리스 밖으로 목을 내밀고 구역질을 했다. 머리가 핑글핑글 돌고 위장이 뒤집히는 것 같았다. 제일 끔찍한 것은 아무리 구역질을 해도 약간의 신물밖에는 내놓을 것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너무 오랫동안 굶었다! 위장이 텅 비어서 구토를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토악질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 탓에 K의 머리는 두개골이 쪼개질 정도로 아파왔다. 그는 성난 듯이 비명을 지르면서 재차 벽에다 머리를 박아댔다. 이마가 깨지고 피가 흘러도 그는 멈추지를 않았다. 피부가죽이 찢어지는 정도의 통증은 느끼지도 못할 정도로 두통이 너무 심했던 것이다. 그는 정신없이 울면서 입으로는 위액과 신음을 뚝뚝 흘려댔다. K는 비척거리며 수도 쪽으로 기어가 수돗물을 몇 모금 삼켰지만 그마저도 바로 토해냈다. 창자까지 토해낼 기세로 구역질을 했지만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K는 자신이 토해낸 물웅덩이 위에 엎어져 나지막하게 울었다. 욕지기가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혼미한 정신으로 K는 생각했다. 밥 달라고 지랄을 하는군. 그렇다, 굶주림 때문임이 틀림없었다. 육체란 늘 이렇게 한 박자 늦게 소란을 피운다. 몸이 허기를 견딜 수 있는 한계치를 넘은 것은 아마도 수일 전의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이제 와서 발악을 하는 것이다. 이대로는 죽을 것이라고 K를 붙들고 위협적으로 소리를 지른다. 온 창자와 뇌수를 뒤집어엎으며 죽음을 K의 눈앞에 들이밀고 을러대는 것이다. 당장 뭐라도 위장에 구겨 넣지 않으면 너는 죽는다고 말이다 K는 아픈 머리를 부여잡고 말했다. 그러나 내게는 가진 돈이 없다. 그럼 훔쳐라! 목숨이 경각에 달렸는데 법 따위가 다 무어냔 말이다. 훔치라고? 좋다. 하지만 지금 같은 꼴로는 무얼 씹어 삼켜도 도로 토해낼 것이다. 정말이지 너무 오래 굶었다. 나는 길을 걷다가 어느 가게로든 들어가서 빵을 집어 들고 도망칠 수도 있었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러고 싶지가 않았던 것이다. 나는 그럴 수가 없었다. 그리고 나는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았다! 나는 차라리 내장도 가죽도 없는 해골바가지가 되고 싶었다. 목숨 없는 꺾인 나뭇가지가 되고 싶었다. 나는 생명도 필요 없다. 생명을 짊어짐으로써 딸려오는 것들이 내게는 너무도 무거웠다. 그렇다면 네 단식행위는 숫제 자살과도 같다! 두통으로 지글거리는 시야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K에게 그렇게 말했다. K는 소극적으로 그 말에 동의했다. 그렇다, 그렇게 말할 수도 있다. 그럼 너는 죽고 싶으냐? 누군가가 K에게 물었다. K는 고개를 휘저으며 한동안 침묵하다가 소리쳤다. 나도 모른다! 단지 이 두통과 구토증이 가라앉을 때까지 내가 살아있다면, 나는 먹을 것을 구하러 갈 것이다. 그는 자신이 말한 그대로 행동했다. 그는 조용히 신음하면서 고통이 가시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그것들은 드디어 조금씩 가라앉기 시작했다. 어지럼증은 여전히 있었지만, 구역질과 두통이 줄어들면서 K의 피투성이가 된 이마와 부어오른 오른쪽 다리의 통증이 점점 선명하게 느껴지는 와중이었다. 언제부터인가 시야가 밝아지고 있었다. 비단 두통의 감소 때문만이 아니라 창문 너머에서 해가 떠올랐기 때문이기도 했다. K는 시척지근한 물웅덩이에 처박고 있던 고개를 들어보았다. 평형감각이 돌아왔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이제 일어서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조금 비틀거리기는 했지만 아무런 장애물도 없는 땅 위에서 넘어질 정도는 아니었다. K는 다소 불안한 걸음걸이로 수도로 다가가 물을 틀고 얼굴을 씻었다. 날씨 때문인지 물이 더욱 차가웠다. 그는 세수를 마치고 피가 흐르는 이마를 더듬으며 머리를 뒤로 쓸어 넘겼다. 통증의 소강상태는 그리 길지 않을 것이다. 다시 한 번 허기가 그의 울퉁불퉁한 손아귀로 K의 몸속을 쥐어 비틀기 전에 무엇이든 먹을 것을 뱃속에 채워 넣어야 했다. 그러나 기름지거나 거친 음식은 안 된다. 분명 전부 토해버릴 것이다. 죽이나 우유가 좋겠다. 수분이 많고 소화하기 쉬운…… 제기랄, 다 죽어가는 몸뚱이가 따지는 것도 많군! 그런데 그것들을 도대체 어디서 구한단 말인가? 그러나 우선은 밖으로 나가자. 분명한 것은 이 먼지구덩이의 집구석에는 아무것도 먹을 것이 없다는 사실이다.
K는 절뚝거리며 현관 밖으로 나왔다. 햇빛 때문에 어지럼증이 더 심해지는 것 같았다.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넘어질 뻔한 몸을 곧추세우며 그는 두 손을 얼굴로 가져가 흐리멍덩한 눈을 비볐다. 식사를 해야 한다. 그러나 어떻게? 그는 옥상의 난간 너머로 눈길을 돌렸다. 그냥 죽어버리는 게 더 낫지 않을까? 고작 음식 따위나 얻어 목숨을 부지하자고 이렇게 수치스럽게 살 수는 없다. 저번에는 비록 다리 한쪽만 망가지는 것으로 끝났지만, 머리를 아래로 하고 떨어지면 죽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흠, 그러나, 아니다! 그만두자. 이미 말했다시피 나는 내가 죽고 싶어 하는지 어떤지도 잘 알지 못한다……
K는 건물의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시야가 어른거려 까딱하면 허공을 밟고 넘어질 것 같았다. 그래서 K는 난간에 달라붙어 조심스럽게 한 발짝 한 발짝을 내딛었다. 계단에서 구르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잘못하면 구르다가 계단 모서리 따위에 머리를 부딪치고 해골이 깨질지도 모른다. K는 혼자서 그렇게 중얼거리며 계단 위에 발을 디뎠다. 거의 난간을 껴안듯이 하고 봉사처럼 다리를 지팡이 삼아 휘둘러대며 내려가자니 자연히 몹시 속도가 느려졌다. 그러나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한참을 내려가다 보니 계단 위에 누군가가 앉아있었다. 서른 살은 먹었을 법한 남자가 계단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도 K가 계단을 밟으며 내려오는 소리를 들었는지 자신의 뒤쪽으로 고개를 돌려 K를 바라보고 있었다. K는 그가 앉아있는 자리를 지나가야했기 때문에 그에게 비켜달라고 말해야했다. 물론 아무 말 없이 계속 내려가도 그 남자가 도리에 맞게 알아서 비켜줄 것 같긴 했지만, K는 정신없는 와중에 사람을 만난 것이 반가워 그에게 말을 붙여보고 싶었다.
「안녕하시오!」
K는 대뜸 그렇게 말했다. 밝고 경쾌한 어조였다. 실제로 K는 기분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자살을 고민하고 있었지만, 지금은 그저 괜찮았다. 아마도 담배 피우는 남자의 잘 정돈된 머리가 자신의 기분을 좋게 만든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K는 생각했다. 그의 머리는 정말로 잘 정돈되어 있었다. 짧게 정리된 그의 검은색 머리칼은 그가 어엿한 직업을 가진 사회인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 같았다. K는 그러한 번듯한 사람에게 경쾌하게 인사를 거는 자기 자신이 마음에 들었다. 하여간에, K의 인사를 받은 남자는 다소 놀란 표정이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바지를 털더니, 놀라서 크게 뜬 눈으로 K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맙소사, 어쩌다 그 꼴이 된 거요?」
「그 꼴이라니?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당신의 그 이마! 온통 피투성이로군!」
K는 한 손을 들어 이마를 쓰다듬어 보았다. 찌릿한 통증이 이마에 느껴졌다. 손에는 새빨간 피가 묻어 있었다.
「아! 이 상처! 별거 아닙니다. 그냥 좀 부딪쳤을 뿐이죠.」
「하지만 그렇게 피가 많이 나는데. 그리고 그 옷이며 얼굴……」
남자는 문뜩 입을 다물었다. K는 ‘얼굴……’ 뒤에 무슨 말이 나올지 알 수 있었다. 담배 피우던 남자는 아마도 자신이 앞으로 할 말이 K에게 실례가 되는 말일 것을 알아차리고 말하던 와중에 입을 다문 것일 터였다. 그가 하려던 말은 초췌한, 지독한, 끔찍한 등등일 것이 틀림없었다. K는 조금 창피한 기분이 들었다. 옷이나 얼굴, 상처뿐만이 아니라 그의 머리도 담배 피우던 남자에 비해서 너무나 지저분하고 초라했다. 그는 창피한 기분을 숨기려고 자신의 덥수룩한 머리를 손으로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런 것은 됐고, 여기에 사십니까? 저는 이 건물 옥상에 있는 방에서 살고 있는데.」
「예에. 네. 여기 2층에서 살죠. 잠깐 담배나 태우려고 나온 김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남자는 건물 복도에 난 문을 가리켰다.
「그럼 우린 이웃이로군요!」 K가 말했다.
「네. 이웃. 그런 셈이군요.」
남자는 K와의 대화를 어리둥절하게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그는 이마에서 흘러내린 피로 얼굴이 흥건한 거지꼴의 남자와 어떤 대화를 해야 좋을지 좀처럼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K가 왜 계속 자신에게 말을 붙이는지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짧은 고민 끝에 K를 평범한 사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최선일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예를 들자면 날씨가 아주 좋은 어느 날 그 날씨 탓에 기분이 들떠있는 사람이 있는데, 그는 화창한 하늘과 신선한 공기 때문에 인류에 대한 호의와 애정으로 마음속이 가득 찬 것이다. 그래서 그는 길을 가던 남자에게―서로 완전히 초면임에도 불구하고― 기분 좋게 인사를 한다. 안녕하시오!
담배 피우던 남자는 현재의 상황을 그렇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래서 그는 이번에는 자신 쪽에서 먼저 회화를 시작해보자고 생각했다.
「그래, 옥상에서 사신다고요!」
「정확히는 옥상에 있는 방이죠. 네. 그렇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웃이라면, 앞으로도 종종 만나게 되겠군요.」
「글쎄요. 오늘 같은 날이면 모를까, 평일에는 이 시간이면 직장에 나가기 때문에.」
「평일이라고요?」
「네. 오늘은 휴일입니다. 모르고 계셨나보군요.」
「아! 까맣게 모르고 있었습니다. 휴일이라!」
K는 그 사실이 경탄스럽다는 듯이 계속 되뇌었다. 휴일이라! 휴일이라! 그런데 사실 그의 머릿속은 다른 생각을 하느라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K는 이 남자에게서 돈을 조금 빌릴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절대로 구걸하는 것은 아니다. 같은 건물에 살고 있는 이웃지간이니 돈을 조금 빌릴 수도 있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그 돈으로 배를 채워 한동안 오늘 새벽 같은 꼴을 당하지 않아도 된다. 조금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긴 하지만, 누구든 먹어야 살지 않는가 말이다. 그런데 어떻게 말을 꺼낸다?
「그런데 나는 그 이마의 상처가 계속 신경 쓰입니다. 병원에 가봐야 할 것 같은데!」
「상처 얘기는 됐습니다. 아무렇지도 않아요! 그보다 초면에 굉장히 실례입니다만, 부탁드릴 것이 있습니다.」
K의 말에 담배 피우던 남자는 문뜩 불안을 느꼈다. 굉장히 실례가 될 만한 부탁이라니, 나는 이 남자의 언행을 도무지 예측할 수가 없다. 애당초 평소처럼 계단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는데 이런 피투성이의 초췌한 남자가 나타난 것부터가 이상한 일이었다. 어쩌면 쓸데없는 대화를 지속하지 말고 일찌감치 그가 지나갈 수 있도록 아무 말 없이 자리를 비켜줘야 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제는 이 걸인처럼 보이는 남자와 이웃지간이 되고, 실례가 될 만한 부탁까지―그것이 무엇인지는 아직 모르지만― 들어줘야하다니? 사실 담배 피우던 남자는 K와 한두 마디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을 때부터 줄곧 K가 미치광이인지 아닌지를 분간하기 위하여 애를 쓰고 있었다. 그러나 좀처럼 답을 내기가 어려웠다. K의 절룩거리는 걸음걸이나 불안하게 흔들리는 몸의 무게중심, 그리고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기 힘든 제스처와, 또 그의 괴상한 악센트 따위는 K의 이상성을 충분히 입증하고 있었지만, 한편으로 그는 몹시 예의를 차리며 남자와의 의사소통을 성립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무슨 부탁인지 들어나 보죠.」
「감사합니다! 사실 저는, 보시다시피 아주 가난합니다. 너무 가난한 탓에 격식 있는 옷차림을 유지하기도 힘들죠. 그렇다고 하여 저를 격식도 없는 인간으로 보시는 것은 안 될 일입니다…… 가난은 최소한의 예의조차 차리기 힘들게 만든답니다. 하여간에, 저는 벌써 일주일 이상을 굶었습니다. 도무지 굶주림을 견디다 못해 무엇이라도 얻을 수 없을까 싶어 거리로 나가려던 참입니다. 그런데 계단을 내려가던 도중에 선생과 만났지요. 염치없지만 저는 선생께서 돈을 좀 꾸어주셨으면 합니다! 많은 금액은 아닙니다. 그저 한 끼 식사를 할 수 있는 액수면 충분합니다!」
K의 장황한 이야기를 듣고 담배 피우던 남자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정도라면 못 들어줄 것도 없는 부탁이다. 남자는 오히려 K가 그런 부탁을 한 것이 고맙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비록 세든 것이긴 하지만 자신의 집도 있고, 번듯한 직장까지 있는 30대 독신남자가 배를 곪는 이웃에게 고작해야 담배 두 갑 값 정도나 될까 싶은 돈을 내어주지 못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남자는 K가 그 자신의 꼴만큼이나 황당한 부탁을 하지는 않을지 그것이 걱정이었는데, 한 끼니를 때울 돈푼이나 빌려달라니 몹시 쉬운 일로만 생각되는 것이었다.
「아! 물론 구걸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그렇게 뻔뻔한 인간은 못 됩니다. 빠른 시일 내로 갚을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맹세합니다! 오히려 이자를 쳐서 두 배로 돌려드리겠습니다!」
K는 지금 자신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혀가 제멋대로 움직이는 것이었다. 사실 K는 ‘부탁’ 운운하며 말을 꺼냈을 때부터 이미 담배 피우던 남자에게 돈을 빌려달라고 한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K의 머릿속에는 모든 것이 실수였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는 필사적으로 자신이 내뱉은 말을 무마시키려고 끊임없이 떠드는 것이었는데, K의 혀는 K의 의향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물론 돈이 필요하기는 하다! 돈을 구하거나 혹은 도둑질이라도 하지 않으면 얼마 못가 굶어죽을 것이 빤했다. 먹을 것이 차고 넘치는 이 비만의 시대에 아사라니! 그렇지만 만난 지 채 3분도 되지 않은 생면부지의 남자에게서 돈을 꾸는 것은 너무 비참한 일이다. 수치스러운 일이고 전혀 체면도 서지 않는다! K는 이야기를 전부 무르고 싶었다. 그는 그냥 도망쳐버리고 싶었다. 그의 좁고 지저분한 옥탑방으로 돌아가 외투를 뒤집어쓰고 굶어죽고 싶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런 치욕을 겪으면서 꾸역꾸역 먹고 또 살아야 한단 말인가. 그럴 가치가 있기나 한가? 저주받을 놈의 위장 같으니! 애당초 방에서 기어 나오는 게 아니었다. 내 멀건 토사물 위에서 그저 먼지처럼 죽어버려야 했다. 조금 전까지의 경쾌한 기분이 그야말로 거짓말 같았다.
K의 얼굴이 점점 좌절과 패배주의적인 분노의 색깔로 물들어가는 것을 담배 피우던 남자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는 K에게 빌려주기 위한 지폐를 찾느라고 호주머니를 뒤지는 중이었다. 마침 그에게는 적당한 액수의 잔돈이 있었다. 남자는 흔쾌한 표정으로 K의 손에 지폐 몇 장을 쥐어주며 말했다.
「별로 힘든 일도 아닌 것을 너무 어렵게 말씀하시는군요! 여기 받으시죠. 이자 같은 건 필요 없습니다. 갚는 것은 언제라도 좋으니 천천히 하시고, 우선은 가서 식사라도 하시죠.」
그런데 정작 돈을 받아든 K는 반쯤 정신이 나가 있었다. 그는 초점이 풀린 눈으로 담배 피우던 남자의 얼굴을 멀거니 쳐다보고만 있었다. K의 마음속에서는 문뜩 손에 쥐여진 지폐와 함께 남자의 호의까지 내팽개쳐버리고 싶다는 충동이 끓어올랐다. 하지만 그것은 이치에 맞는 일이 아니었다. 애최 돈을 빌려달라고 사정한 것이 K 자신이었다. K가 해야 할 일은 남자의 호의에 감사하며 꾸벅꾸벅 절을 한 뒤에 얼른 뭐라도 먹으러 절뚝거리는 다리를 끌고 거리로 나가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K는 무슨 말이든 내뱉으려고 했지만 방금 전까지만 해도 제멋대로 돌아가던 혀가 이번에는 완전히 얼어붙어버렸다. 그는 자신의 얼굴근육이 조금씩 경련하는 것을 느꼈다. 위장이 또 밥을 달라고 사납게 울부짖고 있었다. K는 자신의 창자가 증오스러웠다. 배를 갈라서 그 속에 든 것들을 전부 끄집어내고 살아갈 수만 있다면! 그는 지폐를 쥔 손을 세게 움켜쥐었다. 남자는 아무 말도 없이 서있는 K를 어리둥절한 눈으로 보기 시작했다. 그는 K의 안구 내부에서 혼란이 물결치는 것을 볼 수 없었다. 그가 보기에 K는 마치 전원이 나간 기계 같았다. 손에 지폐를 쥔 이후부터 계속 말이다.
돌연 K는 소리 없이 울기 시작했다. 마치 깨진 수도관에서 새어나오는 물처럼 K의 눈물샘에서는 눈물이 줄기차게 쏟아져 내렸다. K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세상의 온갖 모순이란 모순은 모조리 K의 정신 속으로 비집고 들어온 것 같았다. 빌어먹을, 눈물이나 흘리고 계집년처럼 굴다니! K는 모든 것이 다 수치스럽고 화가 났다. 그는 당장이라도 돈을 남자에게 돌려주고 어디로든 나가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담배 피우던 남자가 보여준 친절은 K를 너무나도 비참하게 만들었다. 차라리 그가 내게 침을 뱉고 돌아서버렸으면 이런 꼴은 나지 않았을 텐데. K는 아무 말도 못하고 원망스럽다는 듯이 이를 잘근잘근 씹어댔다. 눈물은 잠금장치가 고장 난 수도꼭지에서 흐르는 것처럼 도무지 멈출 줄을 몰랐다. K가 눈물 흘리는 것을 보고 누구보다 당황한 것은―물론 관객이라고 해봤자 한 사람이 전부였지만 말이다― 바로 담배 피우던 남자였다. 그는 당황해하면서, 아무래도 K는 미친 사람인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을 굳히고 있었다. 눈물을 뚝뚝 흘려대면서 침묵을 지키고 있는 K와 남자 사이의 대치상황이 길어질수록 남자는 더욱 더 속이 탔다. 도무지 상황을 통제할 방법이 없다! 이제는 오히려 그가 더 이 자리로부터 도망치고 싶어 했다. 광인과의 커뮤니케이션은 이것으로 충분하다. 나는 다시 내가 살던 안전한 언어의 영역으로 돌아가고 싶다! 남자는 이제 피우던 담배나 마저 피우고 싶었다. 평소처럼 직장동료들과 영양가 없는 대화나 나누면서 아무런 드라마도 없는 공기 속에서 숨 쉬고 싶었다.
K도 담배 피우던 남자가 적잖이 불편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도 남자의 불편을 해결해주고 싶었다. 언제까지고 이렇게 있을 수는 없다. 돈을 돌려주든지 아니면…… 글쎄, 아무튼 어떻게든 해야 할 일이다. K는 눈물로 번질거리는 눈을 남자에게로 향했다.
「미안합니다!」 K가 말했다.
「미안합니다. 선생은 좋은 사람입니다! 내가 견딜 수 없는 건 나 자신입니다. 이 돈이 당신의 친절과 호의의 증명이자 상징이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내가 선생께 감사한다는 것만 알아주십시오!」
그 외에도 온갖 혼란한 감정들이 내 혀 위에서 소용돌이치고 있지만, 그것들을 입 밖에 꺼낸다고 하더라도 아무것도 해소되지 않을 것입니다. K는 말끝에 객설을 붙이며 웅얼거렸다. K의 손에는 여전히 지폐들이 구겨진 채 쥐여져있었다. 그는 그 손을 주머니에 집어넣지도, 남자에게 내밀지도 못하고 엉거주춤하게 주먹을 쥐고 있었다. 또 뱃속이 요란하게 울부짖었다. 그것은 마치 일종의 경보처럼 간헐적으로 K를 위협하고 있었다. 그는 현기증이 나는 것을 느꼈다. 시야 주변으로 죽음이 뛰어다니는 것이 보일 지경이었다. K는 마침내 돈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고개를 푹 숙인 채 외친다. 내가 졌습니다!
「나는 패배했습니다!」
뭐라고 대답해야할지 몰라 곤란해 하는 남자를 뒤로 하고 K는 비틀거리면서 계단을 내려갔다. K는 일종의 체념상태였다. 그는 불안하게 발을 내딛으면서 하나의 공상을 하는 중이었다. 날카로운 날붙이로 자신의 몸을 온통 절개해 우선 창자와 위장을 꺼내 둥글게 말아 바닥에 쌓고, 심장을 도려내 그 위에 올려놓는다. 그리고 두 개의 안구를 뽑아 심장의 양옆에 치장해두고 날아갈 듯이 가벼워진 K는 다시 한 번 옥상 난간 너머로 도약하는 것이다. 그러면 완전히 자유로워질 것이다! 그러나 K는 그것이 무용한 공상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드디어 건물 밖으로 나온 그는 발을 절며 거리로 빠져나왔다. 공기는 서늘했고 약간의 바람이 불고 있었다. K는 차갑게 식어가는 눈물을 옷소매로 훔쳐내며 한숨을 내쉬었다. 거리에는 그리 사람이 많지 않았다. 그는 종종걸음으로 길을 따라 걸으며 두리번거렸다. 칙칙한 색조의 건물들에는 온갖 색상의 요란하고 번쩍거리는 간판들이 붙어있었다. K는 먹을 것을 사야했다. 조금 걷다보니 쇼윈도 안쪽에 오만 가지 빵들을 진열해놓은 빵집이 눈에 들어왔다. K는 급히 그 점포 안으로 걸어 들어가, 커다란 흰 빵과 우유 한 병을 사가지고 나왔다. 구겨지고 손바닥에서 흐른 땀으로 축축해진 지폐를 점원에게 내밀 때, 날 선 송곳으로 흉부를 찔러대는 것 같은 죄책감이 그를 괴롭혔지만 K는 더 이상 망설일 수가 없었다. 그는 최대한 점원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그리고 단 한 마디의 쓸모없는 발언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성급히 계산을 마치고 가게 밖으로 나온 것이다. 그는 종이봉투에 싸여진 흰색 빵을 좀 들여다보다가 성큼성큼 거리를 걸었다. 먹을거리를 눈으로 확인하고 나자 위장은 한층 더 미친것처럼 지랄을 떨기 시작했다. 허기는 거의 통증에 가까웠다. 조금만 기다려라! K는 냅다 소리를 질렀다. 마침 옆을 지나던 행인이 깜짝 놀라 K를 쳐다봤지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고 발걸음만 계속 했다.
K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달리 갈 곳이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집으로 가고 싶지 않았다. 담배 피우던 남자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걱정 때문이었다. K가 찾고 있는 것은 앉을만한 장소였다. 그리고 그는 곧 벤치를 하나 발견했다. 나뭇잎이 한 장도 달려있지 않은, 앙상하고 뒤틀린 가로수 밑에 놓여있는 벤치였다. K는 그곳에 털썩 주저앉아 빵과 우유가 담긴 봉투를 열었다. 그는 걸신들린 듯이 매섭게 그것들을 먹고 마시기 시작했다. 무슨 맛인지는 잘 알 수 없었다. 하여튼 그는 계속해서 음식을 씹어 삼켰다. 위장에 빵 덩이를 구겨 넣으면 넣을수록 K의 마음속에서는 자기혐오라고 부를 정도로 강렬하지는 않지만 자기혐오의 찌꺼기라고는 부를 수 있을 만한 감정이 울컥울컥 솟아올랐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가 먹는 것을 멈춘 것은 아니다. K는 계속 먹었다. 그는 역겨움을 느끼면서도 정신없이 빵조각을 입안에 우겨넣었다.
초점마저 잃고서 빵을 씹고 있는 K의 호주머니에서는 빵집 점원에게 받은 거스름돈이 짤랑거리고 있었다. 앞으로도 흰 빵을 두 덩이는 너끈히 살 수 있을 금액이었다. 담배 피우던 남자가 빌려준 돈은 K가 기대하던 것보다 배는 많은 액수였던 것이다. 그의 목숨이 또 며칠간 보장된 셈이다.
빵과 우유로 피와 살을 채운 뒤에 K는 생각했다. 이 도시에 온 이후부터 내 목숨은 순전히 타인의 호의로만 유지되고 있다. 의식주 세 가지가 모두 누군가의 찌꺼기 혹은 선심에 전적으로 의지한 채 위태롭게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K에게 있어 퍽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자존심? 아니, 자존심 같은 부르주아적인 감정이 내게 있기나 할까. 나의 사회적 의식이란 차라리 자존심을 갖고 싶어서 몸부림치는, 병든 노인이나 가질 법한 감정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내 자아(self)란 완벽하게 무근하다. 그리고 공허하다. 공갈로만 가득하다. 속이 텅 빈 종이 공예품처럼.
K는 다시 한 번 일자리를 찾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어느 새벽, K는 아무도 없는 밤거리를 걷고 있었다. 밤이 된지가 한참이 지났는데도 K는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는 늘 극도의 굶주림과 어지럼증 속에서 기절해버리듯이 잠들었었는데, 요 며칠간 매일 빼놓지 않고 식사를 했더니 약간의 체력이 생겨 가끔은 졸음이 오지 않는 밤까지 맞을 수 있게 된 것이었다. 덕분에 K는 자신의 하루하루가 얼마나 무의미하고 정적으로 흘러가는 지를 자각할 수 있었다. 그는 하루 종일 거의 움직이지도 않고 사는 것이었다. K는 오전이고 오후고 하늘에서 뻗어 내려온 빛으로 흘러넘치는 방 안에서 꿈쩍도 하지 않고 살았다. 특별한 용무가 없으면 외출하지도 않았다. 그 이전에 직업도 소속도 없는 K에게는 특별한 용무 따위가 생길 기회조차도 없었다. 그가 하루 동안 하는 일이라고는 기껏해야 딱딱하고 값싼 빵을 사러―그는 얼마간의 경제적 사고를 이용하여, 매일 흰 빵을 먹으면 이틀도 안 되어 주머니가 바닥날 것이라는 사실을 지각할 수 있었다― 거리로 나가는 것뿐이었다. 매일을 그런 꼴로 시간만 낭비하며 살고 있으니 밤이라고 졸릴 리가 없었다. 그것은 K가 여전히 만성적인 영양실조에 시달리고는 있지만, 그래도 전에 비하여 다소 건강해졌다는 증명이기도 했다. 아무튼, 그리하여 K는 잠도 오지 않는 밤에 길거리를 걷고 있었다. 산책을 좀 하다보면 쉽게 잠들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K는 자신에게 정말로 직업이 필요하다고 다시 한 번 생각했다. 직업이 있으면 스스로 밥값을 벌 수도 있고, 또 매일같이 일정량의 체력을 소비할 수도 있다. 그러면 매일 밤 아무런 장해도 없이 잠에 들 수도 있으리라. K는 이렇게 아무 가치도 없이 시간이 흘러가는 것이 싫었다. 권태 속에서 침묵하며 낭비되는 시간들은 아무도 보상해주지 않는다. K는 정말이지 강렬하게 무언가를 원했다. 말하자면, 자신의 시간들을 가치 있게 만들어줄 무언가를 말이다.
사실 이런 생각들은 그가 매일 식사를 할 수 있게 되면서 생겨난 것이었다. 그 이전에는 시간이고 가치고, 그 따위 것들은 전혀 생각할 수도 없었다. 왜냐하면 늘 K의 한쪽 손을 죽음이 붙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K가 굶주리면 굶주릴수록, 그리고 추위 속에서 떨면 떨수록 그는 죽음을 더욱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생명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고 있는가? 생명은 ‘나’의 소유가 아니다. 생명의 주인은 바로 생명 자신이다. 생명력이란 인간이성과 동떨어져있는 별개의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명령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생명력이 움직이는 것은 오직 죽음을 감각했을 때뿐이다. 우리들 자신이 죽음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서 생명은 전혀 관심이 없다. 그것은 오직 죽음으로부터 더 멀리 도망치려고 하는 본성 하나밖에 가진 것이 없다. 생명력은 사고를 마비시키고 이성을 억누르며 자유의지의 목을 잘라 버린다. 매일 죽음의 손을 잡고 살던 K는 바로 그 점 때문에 그동안 인생의 가치에 대해서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생명은 끊임없이 K의 목덜미를 잡아채서 끌고 다니며 죽지 않는 방법에 대해서만 골몰하게 만들었다. 가끔은 너무 심한 굶주림 때문에 감각에 날이 서고 미치광이 같은 짓을 저지르기도 했지만, 하여간에 그가 길바닥에서 얼어 죽거나 아사하지 않은 것은 순전히 생명의 강압 때문이었던 것이다.
여하튼, 이제 한동안은 굶어죽거나 얼어 죽을 걱정을 하지 않아도 괜찮은 상황이 되자 K는 곧바로 자기 삶에 대한 회의를 시작했다. 인생이 불꽃이고 시간이 불꽃을 위한 연료라면, 그 불꽃은 어떠한 목적을 위해 쓰여야 했다. 물론 불꽃이 혼자 타서 사라지건 냄비 밑에서 물을 끓이건 누가 신경을 쓰겠느냐만, K는 빵으로 속을 채우고 외투를 두 겹 씩이나 입고 있었기 때문에 그 불꽃이 공기 중에서 그저 흩어져버리는 꼴은 보고 싶지 않았다. K는 자신이 성실한 인간이라는 생각 때문에 기분이 좋았다. 나는 항상 직업을 가질 준비가 되어있는 성실한 인재다. 돈을 계획적으로 쓸 뿐만이 아니라 독립심도 강하다! K는 소리 내서 웃었다. 텅 빈 밤거리에 K의 웃음소리가 메아리쳤다. 가로등 불빛에 물들어 그의 웃음소리도 노랗게 퍼져나가는 것 같았다.
한참을 걷던 K는 갑자기 우뚝 멈춰 섰다. 다리가 아팠기 때문이다. 그의 오른쪽 다리는 아직도 낫지를 않아서 한걸음 걸을 때마다 절룩거려야만 했다. 이래서야 그 사장 말대로 물건 옮기는 일은 못하겠군. 자신을 퇴짜 놓은 운송업체 사장을 생각하며 K가 중얼거렸다. 그런데 다리를 다친 것이 그 이전부터던가 이후던가? K는 늘 기억을 회상하는 일이 서툴렀다. 그의 기억력은 마치 그의 건강만큼이나 병들어 있었다. 그래서 과거에 있던 일을 떠올릴라치면 언제나 시간순서와 꿈과 현실 따위가 뒤섞여서 도무지 믿을만한 것이 되질 못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자기 자신의 기억을 그다지 신용하지 않았다. K는 자신의 기억력이 고장 난 이유가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에 있다고 생각했다. 기억력이라는 것도 어떤 종류의 영양소를 연료로 하여 작동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어느새 동이 터오고 있었다. K는 어서 집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다리가 시큰거릴 정도로 걸었으니 자리에 누우면 곧바로 잠들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정오까지 잔 뒤에 일자리를 구하러 나가볼 것이다. 상가를 돌아보거나 이전처럼 일간지를 읽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K는 발걸음을 돌려 여태껏 걸어왔던 길을 밟으며 돌아가기 시작했다. 해가 점점 높이 떠오름과 함께 거리에도 사람들이 늘어났다. 정장을 입고 서류가방을 든 남자들, 은행원 같은 차림으로 핸드백을 들고 지나가는 여자들, 가방을 매고 삼삼오오 짝을 지어 다니는 학생들. K는 조금 불편한 기분이 들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거리에는 그 혼자밖에 없었는데, 이제는 햇빛 아래에서 수많은 시민들이 K와 함께 걷고 있었다. 그들 중 K만이 눈에 띄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은 모두 깨끗한 옷을 입고 단정한 차림으로 어딘가를 향해 당당히 걸어가고 있는데, K는 이발조차 못한 머리와 지저분한 외투를 입고 무언가로부터 도망치듯이 절룩거리며 걷고 있었기 때문이다. K는 행인들이 가끔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자신을 훔쳐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사회인들의 이 깨끗한 아침에, K 혼자만이 이질적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그는 그것이 창피했다. 어서 집으로 돌아가고자 발걸음을 빨리 했지만 걷는 속도를 의식하자 오른쪽 다리의 관절이 유난히 더 아파오기 시작했다. K가 빨리 걸으려고 하면 할수록 그의 걸음걸이는 절뚝거리는 것에서 기우뚱거리는 것으로 정도가 심해지고 있었다. 염병할, 어디서 지팡이라도 하나 구해야 하나? K는 욕지거리를 하듯이 작게 내뱉었다. 이 젊은 나이에 지팡이라니. 분명 우습게 보일 것이다. 그리고 지팡이를 살 돈은 차치하고 아픈 다리를 낫게 하기 위해 병원에 갈 돈조차 그에게는 없었다. 애당초 그래서 지금까지 발을 절고 있는 것 아닌가! K는 비틀거리면서 계속 걸었다. 그는 얼른 집에 가서 자고 싶었다. 태양 밑의 사물들이 전부 번쩍이면서 하얗게 빛나는 아침이 그는 싫었다. K는 햇빛 때문에 발가벗겨진 채 길거리로 내쫓겨진 기분이 들었다. 그는 외투 속으로 목을 움츠리며 걸었다. 지나가는 행인들이 자신을 욕하고 비웃는 소리가 K의 귓가에서 맴돌았다. 지저분한 인간 같으니! 어서 네 굴로 기어들어가서 평생 나오지 마라! K는 갈수록 화가 났다. 나는 이런 대접을 받기 위해 태어난 게 아니다! 그의 추악한 부분만을 환하게 밝히는 태양빛 때문에 K의 머릿속은 분노로 출렁이고 있었다. 도대체 내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이런 꼴을 당해야 한단 말인가. K는 신경질이 나서 구둣발로 길바닥을 걷어차고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걸었다. 남들 눈에 자신이 순전히 미치광이 꼴로 보일 것이라는 사실을 K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그는 자신의 시야를 스쳐지나가는 사람들의 얼굴표정과 사회화 된 눈빛 때문에 화를 낼 수밖에 없었다. K는 오히려 더 크게 욕설을 하기 시작했다. 아침이라니! 도대체 누가 아침을 좋아하겠느냔 말이다. 누구도 그더러 얼른 오라고 말하지 않았다. 한참 행패를 부리며 길을 걷자 마침내 K가 사는 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난폭한 몸짓으로 계단을 걸어 올라가 자신의 옹색한 방 앞에 다다랐다. 분노 때문인지 열병을 앓듯이 가슴이 답답하고 뜨거웠다. 그리고 여전히 방에 붙은 창문들은 너무 크고 투명했다. 태양빛이 그의 방을 완전히 점거하고 있었다. 그는 햇빛에 질식할 것 같았다. K는 더 이상은 못 참겠다며 얼마 되지도 않는 자신의 소지품들을 걷어차고 집어던지기 시작했다. 그는 미친 사람처럼 비명을 지르며 벽을 향해 옷가지들을 던지고 매트리스를 뒤집어엎었다. 그러나 아무리 해도 폐부가 콱 막힌 것 같은 답답함이 사라지지 않았다. K는 거칠게 외투와 셔츠를 벗어던졌다. 그리고 그는 오랫동안 먼지가 수북이 쌓인 채로 방구석에 놓여있던 시멘트 조각을 하나 집어 들었다. K는 중간 중간 「나를 조롱하지 말라」고 소리치며 그 돌덩이로 자신의 맨가슴을 내려찍고 찢어대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가슴과 시멘트 조각 양쪽이 모두 피투성이가 될 때까지 그 짓을 계속했다. 피부 위에 남겨진 상처가 아프면 아플수록 가슴속의 갑갑한 통증은 그에 반비례하여 줄어들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만족할 만큼 가슴팍에 많은 상처가 새겨지자 K는 시멘트 조각을 집어던지고 매트리스 위에 엎어졌다. 하하! K는 일부러 소리 내서 웃어보았다. 사실은 울고 싶었지만 혼자서 눈물을 흘리는 것은 어쩐지 부끄럽게 여겨졌기 때문에 울지 않았다. 그는 문뜩 한손을 들어 자신의 이마를 쓰다듬었다. 전에 생긴 상처 위에 딱지가 앉아 있었다. K의 가슴에서 배어나오는 피가 매트리스의 한쪽 면을 검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그는 상처가 아주 상쾌하다고 짐짓 입속말을 지껄였다. 그리고 통증과 출혈에 등 떠밀려 정신없이 잠에 빠져들었다.
그날 오후 K는 추위에 떨면서 눈을 떴다. 새벽에 윗옷을 전부 벗어부친 채 잠든 것이 화근이었다. 그는 파랗게 얼은 자신의 피부를 문질러대며 방 곳곳에 너부러져있는 셔츠와 외투를 주워 모은 뒤 입었다. 다행히도 해가 뜬 뒤에 잠든 덕분에 동상이 걸릴 정도는 아니었다. 유난히도 햇빛이 잘 드는 그의 방은 벽으로 스며들어오는 냉기만 없다면 비닐하우스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옷을 입을 때 셔츠자락이 가슴팍에 닿아 상처가 쓰라렸다. K는 반쯤 넋을 놓은 채 왜 자기 가슴이 상처로 가득한지를 떠올리려고 애썼다. 새벽에 있었던 일들이 전부 꿈인 것만 같았다. 당시 K의 내면에서 휘몰아치던 감정의 폭풍들은 이미 완전히 사라져 흔적조차 없었다. 수면과 아직 가시지 않은 졸음 때문에 K는 굉장히 냉철한 입장으로 새벽에 자신이 저지른 광기어린 행위들을 평가할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이 광대처럼 행동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소가 터져 나올 것 같았다. 아무리 커다랗고 강한 감정이라 하더라도 잠에서 깬 직후에는 아무것도 아닌 법이다. 순간의 감정을 놓치고 결백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 두렵다면 잠에 들지 말아야만 한다. 영원히, 영원히 말이다. 그것은 영원히 막이 내리지 않는 연극의 주인공이 되겠다고 억지를 부리는 것과 같다. 사람이 믿는 그 어떤 고귀함도 실재하지 못한다. 그것은 저급한 코미디에서 주장하는 개똥철학 같은 것이다. 나? 나는 그냥 병자다. 술 취한 부랑배고 충동의 들판 위에서 뒹구는 짐승새끼다. K는 이상과 같이 벽에 대고 연설을 하고 몹시 만족하여 박수를 쳐댔다. 그는 자신이 ‘고귀함은 실재하지 못한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는 사실이 흡족했다. 실제로 그는 고귀함은커녕 고귀함과 닮은 그 무엇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다만 그 자신도 고귀함에 목이 말라 갈증을 호소하며 사막 위를 기는 짐승이라는 사실을 K는 대충이나마 알고 있었다. 그는 수도로 다가가 쭈그려 앉은 채로 세수를 한 뒤에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무언가를 고민하는 듯이 수염으로 까슬까슬한 턱을 매만지며 방안을 맴돌기 시작했다. 그는 철학자 흉내를 내면서 고귀함에 대해 좀 더 생각해보고자 했다. 확실한 것은, 그는 고귀함이라는 것을 손톱만큼도 믿지 않지만 그 누구보다도 고귀함을 갈망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참으로 내가 원하는 것은 무어란 말인가? K는 자문하면서 습관적으로 외투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짤랑하고 동전 몇 개가 서로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담배 피우던 남자에게서 빌린 잔돈이 아직은 조금 남아있었다. 문뜩 그는 생각을 멈추고 동전 하나를 집어든 뒤 그것을 진지하게 관찰하기 시작했다. 지저분하고 손때가 탄 납작한 금속덩어리. 그는 그것의 표면을 더듬고 공중에 던졌다가 되받는 등 손장난을 치더니 다시 주머니 안에 넣어버렸다. 노동하지 않아도 음식을 구할 수 있으면 괜한 회의만 생기는 법이지. K가 중얼거렸다.
「습관화 된 삶!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그는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그 목소리에 노기는 섞여있지 않았다. K는 고함을 친 뒤에 자신의 옷매무새를 손보더니 집밖으로 걸어 나갔다. 할 수 있는 한 가장 당당한 걸음세로 하려고 했으나 한 쪽 다리를 저는 바람에 생각만큼 위세 있는 발걸음이 되지는 못했다. 그 사실이 K의 기분을 조금 상하게 만들었으나 그는 충분히 쾌활한 기분으로 계단을 내려갈 수 있었다. 맑은 날씨였다. 거리는 겨울 햇살 특유의 냉랭한 선명함으로 번쩍이고 있었다. 바구니를 들고 돌아다니는 아낙네들과 거리를 뛰노는 어린아이들이 보였다. 자신과 같은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가진 일상의 단면을 발견한 K는 문뜩 자신에게 모럴리스트로서의 굉장한 소질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유쾌한 기분이 되어 이렇게 말했다. 나의 인류애라는 것도 대단한 감정이다. 그렇지 아니한가? K의 머릿속에서 누군가가 대답을 하려고 했지만 K는 그의 발언을 무시한 채 다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는 길을 거니는 사람들의 삶에 찌든 얼굴을 보고도 유쾌한 기분을 유지할 수 있는 자신이 퍽 인간적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어쩌면 날 휴머니스트라고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실상, 나만큼이나 순수한 영혼을 가진 이가 달리 얼마나 있겠는가? K는 일종의 자기도취에 빠져 히죽거리며 걸었다. 나는 썩 괜찮은 인간이다. 그러니 이제 직업만 갖고 경제적 안정을 얻기만 하면 뭐 하나 빠진 곳 없는 훌륭한 양민이 되는 것이다. 노동의 대가로 돈을 받는다. 이 얼마나 건전한 일이란 말인가. 무슨 일이든 해서 급료를 받으면, 제일 먼저 2층에 사는 그 담배 피우던 남자에게 가겠다. 그리고 이자를 듬뿍 얹어 그에게 돈을 돌려줄 것이다. 그러면 그는 나를 어엿한 사회인으로 생각하고 내게 신뢰도 갖게 될 것이다. 매번 계단을 오르내릴 때마다 그와 마주치지는 않을까 걱정하게 되는 일도 없어질 것이다. 이웃에게 신뢰를 받는다는 것은 퍽 좋은 일이다. 그러면 그는 나를 의심하지도, 어딘가 위험한 구석이 있는 부랑자로 생각하여 꼬투리 잡을 것이 없는지 적대적인 시선으로 관찰하지도 않을 것이다.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롭다는 것도 굉장히 유쾌한 일이다.
그러한 온갖 생각들을 하며 걷던 K는 드디어 전에 보아두었던 무료 신문 배치대에 도착하였다. 아침시간에 출근하는 사람들을 위한 신문인 탓인지 정오가 조금 지난 지금은 거의 다 바닥나고 몇 부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K는 신문을 한 부 집어 들고 그 주변에서 일없이 서성거리다가 벤치를 찾아 앉았다. 그는 신문을 펴들고 읽기 시작했다. 구인 광고란은 이전과 그다지 다를 게 없었다. 여전히 K를 거절할 사람들이 일꾼을 찾고 있었다. 그러나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K는 스스로에게 그렇게 말하며 광고를 하나하나 자세히 읽었다.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인력을 필요로 하는데 직업을 갖지 못할 이유가 없다. 비록 내가 다리를 절고 초라한 옷매무새에 머리칼이 지저분한데다가 만성적인 영양실조로 고통 받고 있는 것이 사실이더라도, 그런 사람이 세상에 나 혼자만 있는 것은 아니지 않겠는가? 그리고 그들도 모두 어떻게든 살아가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죽지만 않으면 삶은 계속되는 것이다. 온갖 악조건들이 딸려오긴 하겠지만……
이 시점에서 K는 아리송하여 머리를 갸우뚱거렸다. 그런데 내가 삶을 계속 살기를 바랐던가? 흠, 하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자살이라는 것도 특정 계층만의 특권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으레 자신의 소지품을 버릴 때에는 그것이 자신에게 무용하다고 생각하여 버리는 것인데, 그렇다면 삶을 버리는 일에도 ‘삶은 무용하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의 분석력과 강력한 주관이 필요한 것 아니겠는가. 물론 모든 사람들이 논리에 맞게 행동하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K는 대뜸 웃기 시작했다. 내가 논리를 말하다니! 그는 여전히 통증이 심한 오른쪽 다리를 들어서 허공을 향해 발길질을 했다. 감전이라도 된 듯 K의 오른쪽 하반신 전체에 고통이 퍼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눈물이 찔끔 나올 정도로 아팠지만 K는 미간을 찡그리기만 하고 여전히 웃고 있었다. 이 통증도 논리 때문인가? 그는 누군가를 조롱하듯이 희극적으로 말했다. 내가 감정에 대해서 생각해본 일이 있지. K는 혼잣말을 계속 했다. 옆에서 보면 마치 그가 신문지에 대고 대화를 하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폭풍처럼 나타나서 폭풍처럼 사라지는 것! 감정의 천적은 다름 아닌 시간이다. 자살자들에 대해서, 만일 그들이 감정에 떠밀려서 사는 것을 그만 뒀다면 그들의 자살 역시 시간과 함께 희미해지기만 하다가 결국에 가선 존재하지도 않는 허구가 되어버릴 것이다. 그런데 만약 그들 중 누군가가 철벽같은 이성과 객관에만 근거하여 자살할 수 있었다면? 예를 들어 자신의 예언을 위해서 분화구로 뛰어든 철학자는 어떤가? 그러나 그의 행위도 짤막한 문장으로 단정 짓기는 쉽지 않다. 하여간에, 만약 논리와 이성으로만 성립된 자살이 있다면 그 자살의 주인은 굉장히도 반항적인 철학자일 것이다. 그는 분명 세상이 자신에게 내놓은 조건들에 대하여 단 한 번도 긍정한 일이 없는, 그야말로 금속으로 만든 것 같은 남자이리라. 새빨갛게 달궈진 금속 말이다!
그런데 K의 말은 여기에서 멈췄다. 그가 신문에서 무엇인가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남에게 돈을 빌려주지 못해서 안달이 난 대출회사들의 광고 사이에 K의 눈길을 끈 문구가 있었다. 연령, 성별, 학력 등 모든 사항 무관. 그것을 읽고 K는 생각했다. 돼지가 걸어 들어가도 일을 시켜주겠군. 문구 밑에는 깨알 같은 글씨로 업무 내용과 전화번호, 위치 따위가 억지로 구겨 넣은 것처럼 꽉꽉 들어차 있었다. 상업 광고지나 전단 따위를 배포하는 일이라고 적혀있었다. 그런 일을 전문으로 맡아서 하는 회사도 있나? K는 의구심이 들었지만 곧 생각을 접었다. 실제로 그런 회사가 존재하든지 존재하지 않든지 K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그는 다만 누가 가도 일을 줄 것 같은 뉘앙스의 문구가 마음에 들었다. K는 신문에서 그 광고 부분만을 찢어내 주머니에 넣었다. 그는 남은 신문을 접어 벤치 위에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찢어낸 신문지 조각에 인쇄되어있는 내용에 의하면 회사는 K의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걸어서 삼십분 정도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였다. 그는 전화를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일자리를 구하자면 직접 찾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K는 곧바로 그리로 향하지 않고, 일어선 자세 그대로 얼마간 멈춰있었다. 그는 새삼 자기 주변의 환경을 의식했다. 눈부신 햇살이 번쩍거리는 널찍한 대로변에는 K 혼자밖에 없었다. 햇빛 때문에 새하얗고 유독 고요한 거리였다. K는 어딘가에서 잉잉거리는 음악소리가 들린다고 생각했다. 마치 태양빛에서 나는 소리 같았다. 벌레 한 마리 날지 않는 얼어붙은 공기를 타고, 빛의 입자 하나하나가 미세하게 진동하며 노래하는 음악이 들려왔다. K는 꿈쩍도 않고 서서 그 노래를 듣고 있었다. 어쩌면 그것은 단순한 귀울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K에게는 그것이 들렸다. K는 그 음악이 여자의 눈동자를 연상시킨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전에 자신이 외투를 건네준 노파를 떠올렸다. 정확히는 그녀의 눈을 말이다. 그리고 그 뒤에 또 누군가가 있었다. 노파의 눈을 보면서 생각했던 것. 불행이 새겨진 슬픈 눈동자. K의 죄책감. K의 깊은 죄책감. 그는 자신이 행복해지는 일은 결코 없으리라고 중얼거렸다. 그것은 운명적이고 필연적인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든, 나는 좋은 것들은 절대로 얻지 못하리라. 그 노이즈 같은 음악 때문에 K는 순식간에 직장을 구할 맘이 사라졌다.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직업을 가질 수도 없었고 돈을 벌수도 없었으며, 하물며 살아갈 수도 없었다. 집도 빵도 이웃도 외투도, K는 아무것도 가져서는 안됐다. 해일 같은 탈력감이 덮쳐들어 온몸과 정신의 구석구석까지 그것이 스며들고 쓸려나가는 것을 느꼈다. 파도에 밀려 K는 비척비척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집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K는 그저 잠들고자 했다. 햇빛으로 포화된 방안에서 죽은 듯이 잠만 자고 싶었다. 한 백년쯤. 어쩌면 천년쯤.
조용한 거리를 지친 발걸음으로 걸으며 K는 생각했다. 전 세계의 늙은 여자들은 전부 사라져버려야 한다. 하필이면 그 노파의 눈을 통해서 떠올리다니. 다시 한 번 그 노파와 만나게 되면 기필코 그녀의 듬성듬성한 머리채를 붙잡아 땅바닥에 처박고 짓이겨버리리라고 K는 입속말을 해보았다. 그러나 분노조차도 지금 K의 온 정신을 지배하고 있는 무력감을 이겨내지는 못했다. 그는 화를 내보려고 같은 말을 계속 반복해서 중얼거렸지만 별다른 효과가 없었다. K는 자연히 입을 다물게 되었다. 이상할 정도로 조용하고 한적한 날이었다. 지금껏 K는 길에서 단 한 번의 인기척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는 흰 페인트로 칠해놓은 신기루 속을 걷는 기분이었다. 그 고요의 한복판에서 K의 정신은 몹시 느슨해져있었다. 까딱하면 영혼마저 육신을 빠져나와 어디까지고 날아가 버릴 것 같았다. 그는 위태로운 정신으로 드디어 집 앞에 도착했다. K는 계단을 올랐다. 방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그는 모래성이 무너지듯 매트리스 위에 쓰러졌다.
그리고 K는 삼 일 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삼 일 내내 잠을 잤다. 그의 영혼에 누적된 피로 때문인지, K는 질리지도 않고 계속해서 잠을 잘 수 있었다. 가끔 태양빛이나 너무 오랜 잠 때문에 눈이 뜨여지기도 했지만 그는 그저 다시 눈꺼풀을 닫을 뿐이었다. 그러면 K는 또 잠들 수 있었다. 그는 정말 죽은 사람처럼 잠을 잤다. 일어날 기력이 없었던 것이냐고 물으면 한편으로는 그렇기도 하다고 대답할 수도 있겠지만, 더 분명한 대답으로는 K가 그 삼 일 동안 일어나고 싶지 않았던 것이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매트리스에서 벗어나지 않은지 삼 일 째 되던 날 K는 강한 욕지기를 느껴 눈을 뜨고 말았다. 그는 수도 밑에 있는 하수도 구멍으로 기어가 그곳에 토악질을 해댔다. K는 또 자신의 입에서 희멀건 위액이 쏟아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는 구역질을 마친 후 찬물로 입을 헹구고 다시 매트리스로 돌아갔다. 그는 힘없이 그 위에 몸을 뉘였다. 지금이 몇 시지? 완전히 빛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창문 밖은 이미 상당히 어두컴컴해져 있었다. 그러나 겨울엔 해가 빨리 지기 때문에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의 양 만으로는 시간을 가늠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시간 따위를 알아서 무엇하게? K는 시간을 알아보려는 노력을 그만 두고 천장으로 눈을 향했다. 머리가 어찔어찔 했다. 너무 오래 자서 그런 것 같았다.
햇빛에서 음악이 들리던 날 그의 정신을 점거한 무력감은 이미 거의 다 사라지고 없었다. 사라졌다기보다는, 그런 감각을 느껴야할 근거를 요 삼 일간 잊어왔다고 말하는 것이 더 옳을 것이다. 내가 말했지. K가 중얼거렸다. 전부 시간과 함께 흐려지기 마련이라고. 만일 내게 엽총 한 정만 있다면 모든 일이 더 쉬워질 텐데. 그는 돌연 그런 생각을 떠올렸다. 사흘 전 받은 탈력증이 사라졌다고 하더라도 K의 마음속은 여전히 공허하고 창백했다. 시간은 여전히 미래로 흐르고 있었으며―지금이 몇 시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K는 가진 것 없이 부유하는 낙엽조각처럼 살고 있었다. 그는 참으로 가진 것이 없었다. 그는 무언가를 가지고 싶었다. 어지럼증을 좀 진정시켜보려고 K는 양손으로 두 눈을 문질렀다. 이미 누워있는데도 넘어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자기 존재의 껍질 안쪽이 텅 비어있는 것을 그는 정말이지 절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K는 두 눈을 꽉 누른 채 나지막하게 소리쳤다. 비렁뱅이 같으니! 게다가 그 껍질은 마치 유리막으로 되어있는 것처럼 약하고 쉽게 금이 가는 것이었다. K는 여전히 어떻게 해야 좋을지 전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을 밀치는 파도가 없으면 어디로도 움직일 수 없는 썩은 물웅덩이 같았다.
그때 K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났다. 누군가가 옥탑방의 현관문을 두드린 것이다. K는 깜짝 놀라서 벌떡 상체를 일으키며 현관으로 눈을 향했다. 그가 아무 소리 없이 앉아있자 현관문 건너에 있는 누군가가 다시 문을 두드렸다. K는 여전히 놀라서 얼어붙어 있었다. 뭐라고 반응을 하긴 해야 할 텐데, 그런 생각조차 K의 머릿속에서 달아나버린 것이었다. 현관문을 사이에 두고 얼마간 침묵이 흘렀다. 침묵을 깬 것은 문 너머의 사람이었다. 그가 문손잡이를 돌린 것이었다. 그는 그대로 문을 열고 들어왔다. K에게는 문을 잠가 두는 습관이 없었던 것이다. K는 예상치 못한 방문객 때문에 바짝 긴장하고 있었지만 문이 완전히 열리고 서로 얼굴을 확인하자 다소 긴장을 풀었다. 방문객은 다름 아닌 K의 친척, 그에게 이 방을 빌려준 중년남자였던 것이다. 매트리스 위에 주저앉아있는 K를 보고 남자가 인사를 겸해 말을 걸었다. 노크를 해도 아무 소리가 없기에 외출한 줄 알았노라고 말이다. K는 여전히 정신없는 얼굴로 꾸벅 인사를 했다. 잠을 자던 중이었다고 변명을 할까 싶었지만 지금이 몇 시인지도 알 수 없었고, 무슨 용무인지는 몰라도 남자의 방문이 자신의 수면을 방해했다고 생각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서 K는 그냥 가만히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돌연 소리치듯이 K가 말했다. 중년남자도 그렇다고 동의했다. 그는 마침 건물관리 문제로 왔는데, K가 어떻게 사는가 싶어 들렀다고 사정을 설명했다. 얼굴 꼴이 영 아니군. 남자가 말했다. 그야 그럴 수밖에 없었다. K는 3일간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잠만 잤으니 말이다. K는 딱히 할 말이 없어 멀뚱멀뚱 남자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다. 앉은 채로 대화를 하는 것이 예의에 어긋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일어날 기력이 없어 그냥 앉아있기로 했다. 곰팡이투성이의 매트리스마저도 남에게 빌려서 써야하는 K에게 누가 예의 같은 것을 강요하겠느냔 말이다. 생각이 거기까지 닿자 K는 괜한 배짱이 생겼다. 내 처지에 격식 따위 알게 무어냐. K가 마음속으로 누구에게든 한번 무례하게 굴어보겠다고 쓸데없는 다짐을 하고 있을 때 중년남자가 입을 열었다. 그는 K더러 같이 식사나 하러 가자고 말했다. 자신이 한 끼 대접하겠노라고. 그는 초췌한 K의 얼굴을 보니 K와 알고 지내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밥 한 끼 사주지 않고서는 배길 수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K는 반사적으로 사양하려고 했지만 방금 한 결심이 생각이 났다. 뻔뻔하게 밥 한 끼 쯤 얻어먹는다고 무슨 일이 생기겠는가. 자다 굶어죽지 않으려면 밥을 먹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뜩 K는 주머니에 잔돈이 남아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그런데 지금이 몇 시죠?」
K의 물음에 중년남자는 오후 8시쯤 되었다고 대답했다. 마침 딱 저녁시간이었던 것이다. 사흘을 내리 굶었으니 저녁시간이고 새벽시간이고 상관없는 일이었지만, 아무튼 그랬다. 남자는 밖으로 나가자고 했다. K는 현기증 때문에 쓰러질 듯 비틀거리며 그를 따라 나섰다.
바깥 공기는 폐가 차갑게 식어버릴 정도로 쌀쌀했다. 새까만 밤 아래 점포 간판과 가로등들이 유독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겹쳐 입은 외투의 옷깃 사이를 찌르며 스며드는 깜깜한 겨울공기와 냉기로 빙결된 밤하늘 속의 소음 때문에 K는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눈 덮인 벌판, 단단하게 얼어붙은 어두운 하늘, 천천히 동사해가는 K. 만일 그런 풍경 속이라면 얼어 죽는 것도 그렇게 나쁜 일은 아닐 것이라고 K는 생각했다. 연극무대에서는 배경 역시 무엇보다 중요한 요소들 가운데 하나인 것이다.
꿈꾸는 것처럼 중심을 못 잡고 비척거리는 K를 은근히 부축하며 남자는 그를 식당으로 데려갔다. 의자에 앉아서야 드디어 K는 균형을 잡을 수 있었다. 그들은 식탁을 가운데 두고 서로 마주본 채 앉았다. K가 도무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것 같아 중년남자는 자기 임의대로 음식을 주문하고, 그 주문으로 괜찮겠느냐고 K에게 눈짓을 보냈다. K는 그저 고개만 끄덕거렸다. 그는 사실 남자가 무엇을 주문했는지조차 듣지 못했다. 점포 천장에서 깜빡거리는 형광등을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었던 것이다. 곧 뜨거운 국과 음식들이 나왔다. 남자는 K에게 지쳤을 때에는 뜨거운 음식을 먹어야 힘이 생긴다고 말했다. K는 또 한 번 말없이 긍정했다. 넋 나간 눈빛으로 K가 음식들을 떠먹기 시작하자 중년남자도 식사를 시작했다. 그들은 조용히 식사를 했다. 식사 도중 중년남자가 K에게 물었다. 그런데 자네 어머니는 건강하신가? 「아니요. 돌아가셨습니다. 죽었어요.」 K가 대답했다. 남자는 놀라면서 재차 물었다. 아니, 돌아가셨다니? 도대체 언제?
「꽤 됐어요. 아마 다른 친척들도 모를 겁니다. 장례식을 안 했거든요. 물론 부고도 안 돌렸죠. 저 혼자밖에 없었으니까요.」
중년남자는 꽤나 충격을 받은 것 같았지만 K는 그저 묵묵히 수저만 계속 날랐다. K가 아무렇지도 않게 어머니의 죽음을 이야기하자 중년남자는 혼자 놀라고 있는 것이 무안했던지 표정을 가다듬었다. 그는 몹시 유감이라고 말했다. K는 다시 한 번 끄덕였다. 그는 일부러 식사에만 의식을 집중시켰다. 쓸모없는 감상을 일으키지 말라. K는 머릿속으로 계속 되뇌었다.
식사가 거의 끝났을 때쯤 중년남자는 「혹시」하며 말문을 열었다. 혹시 무언가 고민이 있다면, 남들처럼 살아보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지. K는 그 말을 듣고 남자의 눈을 빤히 쳐다보았다. 한동안을 아무 말도 않고 그를 바라만 보다가 K는 입을 열었다.
「네.」 K가 말했다.
「옳은 말씀입니다.」
그리고 무엇인가를 고민하듯 잠시 침묵하던 K는 벌떡 일어나더니 식탁 모퉁이를 돌아 중년남자에게 다가갔다. 그는 자기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어 잡히는 동전들을 전부 그러모아 남자에게 내밀었다. 얼마 안 되는 돈이었다. 분명 방금 식탁 위에서 먹어치운 음식들의 절반 값도 못될 액수다. 그러나 K는 물끄러미 자신을 바라보는 남자에게 거의 강요하듯이 동전들을 쥐어주고 꾸벅 인사를 한 뒤에 도망치듯이 가게를 나왔다. 그것이 최선이었다! K가 밤공기 사이에서 외쳤다. 그는 소리를 지르고 다리를 절면서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K는 밤새 목청 높여 울면서 비좁은 방 안을 이리저리 헤매고 다녔다. 서러워서 어쩔 도리가 없었다. 헛구역질을 하다가 하수구에 두어 번 토를 하기도 했다. 기껏 먹은 음식들이 전부 되돌아 나왔다. 그는 아침이 돼서야 겨우 잠들었다. 눈물과 위액으로 범벅이 된 K의 얼굴에서는 역한 냄새가 풍겼다.
오후에 눈을 뜬 K는 비몽사몽간에 호주머니를 뒤져 신문지 조각을 하나 찾아냈다. ‘그날’ 신문에서 찢어낸 그 조각이었다. 그는 그것을 서너 번 반복해서 읽더니 도로 주머니에 집어넣고, 수도로 다가가 세수를 하고 씻었다. 그리고 외투를 벗어 공기 중에 몇 번 털고 물을 칠해 얼룩을 문지르다가 다시 입었다. K는 밖으로 나왔다. 계단을 내려가고 거리를 건너 신문지 조각에 적혀있던 그 주소를 향해 걸었다. 그곳은 어느 건물 구석에 딸린 작은 사무실이었다. 종이상자와 묶여있는 전단들이 엄청나게 많았다. K는 그 사이에 앉아서 무언가 작업을 하고 있는 사람에게 사장님이 계시느냐고 물었다. 무슨 일로 왔느냐고 묻기에 K는 신문에서 구인광고를 보고 왔노라고 대답했다. 그는 채용에 대해서는 자신이 책임자라고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키가 크고 마른 남자였다. 그는 K를 잠시 훑어보더니 다리를 저느냐고 물었다. K는 사실 그렇다고 대답했다. 다리가 문제가 되겠느냐고 K가 묻자 남자는 무심한 목소리로 아마 괜찮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K에게 잠시 기다리라고 한 뒤 사무실 구석으로 가서 무언가를 뒤적거리더니 이천 장은 될 법한 전단 묶음을 들고 왔다. 남자는 무거우니까 우선은 천 장만 들고 가서 배부한 뒤 다시 돌아와서 나머지 천 장을 가지고 가라고 말했다. K는 상황을 이해하기가 어려워서 잠시 주춤거리다가 남자에게 자신이 채용된 것이냐고 물었다. 남자는 이상한 눈으로 K를 쳐다보더니 그렇다고 했다. 그는 혹시 K가 이런 일을 처음 해보는가 싶어 나름대로 친절하게 K가 해야 할 작업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었다.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온 도시에 전단을 붙이고 다니거나 거리에서 사람들에게 직접 나누어주면 되는데, K가 지금 맡을 일은 전자에 해당한다고 남자는 말했다. K는 조금 얼떨떨한 채였지만 알겠다며 전단지 천 장을 손에 들고 남자가 준 접착테이프 다발을 주머니에 넣은 뒤 사무실 밖으로 나왔다. 그 남자는 K의 이름조차 묻지 않았다. 그리고 K는 일을 얻은 것이었다.
이상이 K가 이 도시에서 직업을 갖게 되기까지의 과정이다.
제2부
여름이 되었다. 겨울은 태양광선과 냉기로 K의 몸을 온통 난도질하더니 어느새 가버리고 없었다. 봄은 확실한 경계선도 남기지 않고 순식간에 지나가 버렸다. 두 계절이 흐르는 동안 K가 겪은 일 중에서 특별하다고 할 만한 사건은 그리 많지 않았다. 기억나는 것이라고는, 우선 K가 첫 번째 일급을 받은 날의 일이다. 그날 일을 마치고 일당을 받으니 시간은 마침 늦은 저녁이었다. K는 일이 끝나기도 전부터 벼르고 있는 것이 있었다. 그는 수중에 돈이 생기면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사무실의 키 큰 남자에게서 삯을 받아들자마자 K는 건물을 빠져나와 뛰듯이 하며 집으로 돌아갔다. 그는 절룩거리며 계단을 올라 2층에 도착한 뒤, 전에 본 일이 있는 현관문을 미친 듯이 두드려댔다. K의 마음속은 희열로 뜨겁게 달궈져있었다. 그가 유난히도 요란하게 문을 두들기는 바람에 집주인은 놀란 표정으로 문을 열었다.
「맙소사,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문을 열고 나온 것은 전날 K에게 돈을 빌려준, 계단에 앉아 담배를 피우던 남자였다. 그의 얼굴을 보자 K는 통쾌함이 만발하다 못해 눈과 입으로 넘쳐흐르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 그는 자신만만한 표정을 하며 남자에게 지폐다발을 내밀었다. 그날 K가 일해서 번 돈 전부였다. 그는 그것이 얼마인지 세어보지도 않고 무작정 들고 와 남자에게 내놓은 것이었다. 담배 피우던 남자는 어리둥절하여 돈과 K의 얼굴을 번갈아가며 들여다보았다. 이 돈을 어쩌라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는 얼굴이었다.
「당신 돈입니다!」
K가 의기양양하여 외쳤다. 남자는 잠시 곤혹스러워하다가 ‘아!’하고 감탄사를 발하며 이제야 알겠다는 듯 K와 시선을 맞췄다. K는 돈을 갚으러 온 것이었다. 그리고 담배 피우던 남자는 고맙다며 그것을 받아들더니 지폐를 한 장 한 장 세기 시작했다. 그런데 한 번 센 것으로는 성에 안 찬다는 듯 그는 액수를 다시 세는 것이었다. 이내 남자는 고개를 기웃거리더니 K에게 말했다.
「많은데! 생각보다 많아요!」
사실 그 돈이 얼마가 되던 담배 피우던 남자의 생각보다 많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애당초 그는 K에게 돈을 내어주면서, 그 돈을 다시 받게 될 것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그저 선행이나 베푼다는 기분으로 K에게 돈을 주었던 것이다. 그런데 K가 별안간 찾아와 빚을 갚겠다고 내민 돈은 오히려 남자가 그에게 빌려준 액수보다 훨씬 많았다. 원금의 배는 넘는 금액이었다.
「제가 전에 그렇게 말했었지요.」K가 말했다.
「이자를 쳐서 배로 갚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K는 자신의 돈 씀씀이를 자랑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K는 그런 역할이 정말로 마음에 들었다. 자신이 남에게 꿀릴 것 없는 훌륭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담배 피우던 남자는 이자 같은 건 필요 없다며 원금을 제외한 돈을 K에게 돌려주려고 했지만, 물론 K는 받지 않았다. 그는 지폐를 내미는 남자의 손을 억지로 밀어내고 옥상을 향해 절뚝절뚝 걸어 오르며 마지막으로 외치는 것이었다.
「이제 내가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것입니다!」
이것은 K에게 있어 썩 기분 좋은 기억이었다. 하루 일급을 전부 써서, K는 매일 계단을 오르내릴 때마다 그 남자와 마주치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해야할 이유를 깨끗이 없애버린 것이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담배 피우던 남자에게 일당을 전부 줘버린 이유로 K는 그날도 굶어야했다. 하지만 이미 하루쯤 더 굶는 건 별일도 아니었다. 허기 따위보다도, K는 자신이 그 돈을 조금도 셈하지 않고 전부 남자에게 줘버린 일이 퍽 만족스러웠다. 2층에 사는 남자보다 자신이 더 궁색한 생활을 하고 있음이 분명했음에도 불구하고 K는 자신을 위해 지폐 몇 장을 빼내거나 하지도 않고 그 돈을 송두리째 남자에게 준 것이다. 하하! 그도 놀랐을 것이다! K는 흡족한 기분 때문에 흥분되어 그 후로도 한참이나 옥상 위를 이리저리 걸어 다녔다. 그날 그는 잠들 때까지 얼굴에서 웃음기를 거두지 못했다.
다른 기억으로는 보다 심각하다면 심각하달만한 사건이 한 건 있었다. 겨울이 거의 다 지나 날씨가 따뜻해질 무렵, K가 강도를 당했던 것이다. K는 아직까지도 그 사건이 정확히 무슨 일이었는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어느 날 저녁 K가 봄기운에 만취하여 구석진 골목을 걷고 있었는데, 웬 사내 두 놈이 뒤에서 달려와 K를 넘어뜨리고 꼼짝 못하게 붙잡더니 그의 외투를 벗겨서 가지고 도망쳐버린 것이었다. 그 일련의 행위들이 진행되는 동안 K는 그저 어리벙벙하여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다. 그 강도 두 놈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넋을 놓고 있다가 몸을 일으킨 K의 머릿속에는 그저 의문밖에 없었다. 내 외투를 훔쳐가다니. 도대체 뭣 때문에? 외투 주머니에 돈이 있긴 했지만, 그건 K가 음식을 사고 남은 잔돈을 넣어뒀을 뿐인 것으로 동전 몇 푼밖에 되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외투는 모두가 알다시피 K가 의류 수거함에서 꺼내온 것으로써, 무척 낡고 지저분하며 여기저기 실밥이 터져있는 쓰레기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K는 어쩌면 시간이 저녁이기도 하거니와, 어둠과 가로등 불빛 때문에 그 강도들이 외투의 품질까지는 확인하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하고 생각했다. 그 외의 가설로는 그들의 강도행위가 실은 초행으로, 몹시 긴장해 있던 바람에 K의 겉으로 빤히 드러나는 경제 사정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무작정 일을 저지른 것이라는 안도 있었다. 만약 후자라면 그들은 굉장히도 가난한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아마 K보다 더 말이다. 아무튼 K는 얼떨떨한 채로 자리에서 일어서 강도들이 사라진 골목 구석을 멍하니 지켜보다가 옷에 묻은 흙먼지를 털고 가던 길을 계속 걸었다. 하긴 이제 겨울도 다 갔고 하니 외투쯤은 없어도 괜찮은 일이었다. 게다가 전에 K가 다리를 절며 도시를 뒤지고 다녔을 적의 결과물인 외투가 아직도 두 벌이나 남아있는 것이다.
겨울과 봄이 다 지나가는 동안 K에게 일어난 일들 중 인상이 남을만한 일은 위의 두 가지가 전부였다. 그 외에는 모두 매일같이 엇비슷한 생활의 연속이었다. 그는 여전히 감정의 물결에 흔들리면서 하루하루를 우울로, 혹은 광적인 흥분으로 보내왔다. K가 맡은 직업이 책임자나 관리자 따위에게 감시를 당하며 해야 하는 일이 아님은 퍽 다행인 사실이었다. 덕분에 그는 전단지 다발을 들고 거리를 돌아다닐 때 얼마든지 ‘K처럼’ 행동할 수 있었던 것이다. K가 업무 중에 혼잣말을 지껄이거나 신경질적인 비명을 지른다고 언짢게 생각할 상사는 어디에도 없었다. 어떻게 보면 K는 자신에게 아주 적합한 직업을 찾은 것이었다. 특히 아무 때에나 어디로든 마구 걸어가고 싶어 하는 그의 충동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나가자! 밖으로 나가자! 그러나 K는 이미 하루의 반수 이상을 밖에 지낸다. 그는 어디로든 내키는 대로 걸어간 뒤 전봇대나 게시판 따위를 찾아서 전단을 붙여놓으면 그만이었다.
가끔 K는 중년남자에 대해 생각하기도 했다. 그 겨울밤 K에게 식사를 사준 이후로 K는 그 남자를 단 한 번도 만날 수 없었다. 아무래도 그는 K가 사는 건물을 소유하고 있을 뿐이지 그곳에서 사는 건 아닌 듯 했다. 분명 더 깨끗하고 고급스런 건물에서 살겠지. K는 멋대로 그 남자의 거주지를 상상하면서 한편으로는 자신의 친척 중에 부자가 있다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기도 했다. 그 중년남자를 제외하면 K가 아는 친척들은 전부 가난 속에서 근근이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모두가 궁핍 속에서 자신이 왜 사는지도 잊은 채 하루의 삶을 위해 하루의 노동을 하며 살고 있었다. 게다가 그들 모두에게는 가족이 있었으니, 그들의 인생은 가면 갈수록 맹목적이 되는 것 외에는 선택할 수 있는 길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렇다면 사람은 물질적으로 풍족해져야만 자기지각을 시작할 수 있는가? K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러한 감정이나 인지들은 태어날 때부터 선천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K는 생각했다. 몇몇 사람들이 기형이거나 괴상한 종양이 달린 몸을 갖고 태어나듯이 말이다. 눈이 없거나 혹은 팔다리가 하나씩 더 달려서 태어나는 새빨간 아기들. 그 아이들은 성장하면 성장할수록 자신의 괴이함을 더 잘 알게 된다. 남들에게 없는 것만큼 더 잘 보이는 것은 없다. 그들은 자신의 열한 번째 손가락이 점점 비대해지다가 결국엔 자기 자신을 먹어치워 버릴 것이라는 사실을 은연중의 예감으로 알고 있다. 비정상을 규정하는 것은 바로 다수에 다름 아니다. K는 정신에도 그러한 기형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정신의 종양이 항상 사고회로의 한가운데 버티고 앉아서 생각에 간섭하고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를 통증과 같은 감각으로 주장하고 있으리라고 말이다.
하여간에 요는, 저 혼자 옥상을 헤매다가 길바닥으로 뛰어내린 전과가 있는 K라는 남자는 근 반년 간을 별다른 문제없이, K답게 잘 흘려보냈다는 것이다. 그는 매일 일을 하여 먹고 살기에 충분한―집주인인 중년남자의 호의 없이는 성립될 수 없는 경제활동이었지만― 돈을 벌었지만 여전히 식사는 거르기를 습관처럼 하였다. K는 하루에 한 끼보다 더 먹는 일이 없었다. 그는 늘 아침 점심을 연이어 거르고, 일을 마치고 받은 일당으로 저녁을 먹었다. 그마저도 안 먹는 일이 다반사였지만 말이다. 남은 돈은 그저 주머니에 쑤셔 넣어두거나 가끔 생필품을 사는 데에 쓰곤 했다. K가 제일 먼저 산 생필품은 바로 비누였다. 그는 비누를 사서 수도 옆에 두고 씻을 때마다 쓰곤 했다. 비누만은 꼭 필요하다 싶어 사두긴 했지만 사실 그가 몸단장에 적극성을 보이는 것은 아니었다. K의 이는 오랜 방치로 이미 누렇게 변색된 지가 수년전의 일이었고, 머리는 부스스한 것이 늘 지저분했으며 새 면도칼을 구하지 못해 덜 잘린 수염이 언제나 거뭇거뭇했다. 그러나 그러한 사실들이 K에게 어떤 문제를 안겨주거나 하지는 않았다. 일을 하는 데에도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다. 저녁마다 K에게 봉급을 주는 사무실의 키 큰 남자도 K의 복장이나 행색에 대해 아무런 지적이 없었다. 즉 청결 같은 것은 K가 일하거나 먹고 사는 데에 있어 그다지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는 요소였던 것이다. 가끔 거울을 볼 때면 K는 아직도 알코올 중독 탓에 재활원에서 살고 있을 어느 친척의 얼굴을 떠올리곤 했다. 그도 늘 면도하지 않은 얼굴에 산발한 머리였다. K는 재활원에서 주는 약 때문에 살집이 올라 눈두덩 살에 파묻혀버린 그의 가는 눈동자를 인상 깊게 기억하고 있었다. 자신의 얼굴을 볼 적마다 그를 떠올린다는 건 그다지 기분 좋은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K는 거울을 볼 때마다 수염이나마 정리해보려고 낡아빠진 면도칼을 들었지만 이내 턱이나 윗입술 주변에 새빨간 상처를 내고 신경질적으로 면도칼을 집어던지는 일만 반복되었던 것이다.
사실은 그도 깨끗한 외견을 갖고 싶었다. 너무나 청결하고 완벽해서 그 누구도 트집 잡을 수 없는 껍질을 원했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사람들은 K를 얕잡아보거나 경멸하지도 않을 것이고, K는 자신이 원하는 존중이라는 것을 사람들로부터 받을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 점에 대해서, K는 여전히 욕망은 갖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자포자기해버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K가 깔끔하고 세련되게 차려입고 다닌다면 그것은 순전히 K가 만날 수 있는 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이유로 하리라. 하지만 그것은 너무 성가신 일이다. 거지같은 꼴로 다니더라도 사람들의 눈 밖으로만 피하면 되는 일 아니겠는가. K는 자신의 순결한 영혼을 증명할 방법이 없다는 사실에 대해서 늘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이 가능하기만 하다면 옷이고 얼굴이고 아무 것도 없이 살아도 좋을 텐데. 그렇지, 차라리 가죽을 벗어버리는 것이 더 낫다. 기준으로부터의 탈피…… K는 종종 그런 생각을 하면서 거울 속의 자신을 쳐다보곤 했다.
비교해보자면 근 반년은 퍽도 이렇다 할 것 없는 나날들이었다. 이제 하늘에서 쏟아지는 태양빛은 황금색의 농도 높은 액체 같았고 열기로 달구어진 포도에서는 콜타르 냄새가 늪처럼 끈적거렸다. K는 셔츠의 소매를 걷어붙인 채 전단지를 뿌리고 다녔다. 그는 항상 햇빛 때문에 어지러웠고 비틀거렸다. 햇살은 쏟아진 잼처럼 도시 위를 뒤덮었다. 어디를 가나 여름의 냄새가 농밀하게 골목 구석구석을 메우고 있었고, 그 공기를 흡입하고 다니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영혼을 조여 두는 나사 하나가 녹아 사라진 것 같았다.
K의 옥탑방. 그곳은 여름이 되자 햇빛에 점령당해 버렸다. 넓고 사방으로 나있는 창문들 때문에 방은 그야말로 태양이 통째로 흘러들어온 것 같았다. 방안에서는 어디로 가도 햇빛을 피할 수 없었다. 방을 송두리째 집어삼킨 태양빛 때문에 K는 숨도 쉬기 힘들었다. 겨울에는 사방팔방이 흰빛으로 번쩍거려 숨이 막히더니 이제는 마치 햇빛 속에서 익사해버릴 것 같았다.
그렇다. 한여름이 되었다. K는 아직도 살아있었다.
어느 여름날, K는 길에서 주은 가방에 전단지를 한 가득 넣고 온 도시의 화장실을 순회하는 중이었다. 그는 눈에 보이는 모든 건물에 설치되어있는 모든 화장실을 찾아 들어가 사람들의 시선이 닿을만한 곳에 전단을 붙이고 있었다. 전단지에는 ‘당신’의 건강과 아름다움을 생각한다면 반드시 본지에 표기되어있는 체육관의 회원이 되어야만 한다는 주장이 강렬한 원색 텍스트로 인쇄되어 있었다. K는 이런 체육관의 회원증과 자신의 인생이 얼마나 동떨어져있는지 따위의 상념을 초점 없는 시선으로 쫓으면서 접착테이프를 뜯었다. 이 도시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사는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 그들의 대다수는 K가 전혀 현실감을 느낄 수 없는 인생을 살고 있으리라. 혹은 K는 어떤 인생에 대해서도 현실감을 느낄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K 자신의 삶에 대해서도 말이다. 그는 지금까지 온갖 수모와 고통을 당해왔지만 묘하게도 늘 타인의 불행을 관조하는 것 같은 기분이 없지 않았다. 그 이유를 K는 자신이 스스로의 생명과 화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리라고, 다소 불분명한 관념으로 추측하곤 했다. 그에게는 ‘자신’을 구성하는 모든 것이 그대로 자신의 소유인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K는 변기들을 둘러싸고 있는 칸막이 안쪽에 전단을 붙이기 위하여 하나씩 문을 열며 들락거렸다. 이윽고 마지막 칸에 들어가려고 하는데, 손잡이를 당겨보니 잠겨있었다. 굳이 모든 칸에 전단을 붙여야만 하는 것은 아니었기에 안에 누가 있는가보다 싶어 발걸음을 돌리려던 순간, 안쪽에서 기괴한 신음소리가 들리는 것을 K는 들었다. 그리고 발밑에서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 고개를 숙여보니 칸막이 안쪽에서부터 은근한 핏빛을 띄는 혼탁한 액체가 스멀스멀 흘러나오고 있는 것이었다. 정체불명의 액체는 K가 발을 떼면 철벅거리는 소리가 날 정도로 흘러넘치고 있었다. 또 한 번 신음소리가 들렸다. 안에 사람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도대체 무얼 하고 있는 것일까? K는 통상적인 인간의 배변활동에 핏빛 액체를 한 바가지나 분비하는 과정이 포함되어있지는 않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무심코 문을 두드렸다. 호기심이라고 말할 수 있을 만한 감정이 K를 움직이고 있었다. K의 노크 때문인지 순간 신음소리가 멎었다. 그러나 이내 칸막이 안쪽에 있는 아무개는 다시 고통스러운 앓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K는 칸막이 너머로 짙은 피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아주 깊고 비린 냄새였다. 사람의 살점으로 만든 하수구가 있다면 그곳에서나 풍길법한 냄새였다. 그 냄새 때문에 K는 왠지 모르게 몹시도 감정이 동하는 것을 느꼈다. K는 넋 놓은 사람처럼 그 칸막이 앞에서 엉거주춤 서있었다. 안쪽에서는 신음과 철벅거리는 물소리, 그리고 불안한 침묵이 계속 반복되고 있었다. K는 계속 문을 두드릴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기다렸다. 칸막이 안쪽에서 끊임없이 부산스러운 소리들이 들려왔다. 가끔 신음소리 속에 흐느낌이 섞여 들리기도 했다. 혹은 급하게 숨을 내쉬면서 습관처럼 내뱉는 욕설도 들렸다.
부산한 소음들은 한참 뒤에야 멎었다. 이제 칸막이 안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한바탕 달린 뒤의 육상 선수가 내쉬는 것처럼 격렬한 심호흡 소리뿐이었다. 날씨는 퍽도 더웠다. 벽 높은 곳에 난 작은 창문에서는 직선으로 곧게 뻗은 황금빛 뱀이 화장실의 타일 위로 45도의 각도를 유지한 채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수명이 다 된 형광등 때문에 어둑어둑한 화장실에는 창문에서 흘러내려온 노란 빛이 얇은 막처럼 조용하게 덮여있었다. 그것은 아주 느리게 움직였고, 또 살아있는 것 같았다. 햇빛은 수도 없이 많은 황금색 환형동물들이 뭉쳐서 만들어진 것 같았고, K는 열기를 품은 그 벌레더미를 손으로 헤집어 볼 수도 있었던 것이다. 더위 때문에 사방이 고요했다. 여름은 그런 방식으로 유난히 침묵을 강조하곤 했다. 여름이 되면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잘못된 장소에 버려진 쓰레기 같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다. 모든 사물들이 태양색깔로 달궈진 땅 위에 혼자서 생각하며 서있다는 것은 정말로 이상한 일이다. 그래서 K는 늘 자신이 아직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의아하게 생각하곤 했다. 태양은 언제든지 K를 치워버릴 수 있었다. 청소를 하다가 바닥에 떨어진 휴지뭉치를 주워 들듯이, 아무렇지도 않게 K는 망가진 장난감처럼 쓰레기통에 처박힐 수도 있었다. 죽는 것과는 조금 다를지도 모른다. K는 완전무결하게 제거될 수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여전히 햇빛과는 다른 색깔을 유지한 채 포도 위의 아지랑이 사이를 걸어 다녔던 것이다. 그럴 때마다 그가 느끼던 것과 거의 비슷한 감정으로 K는 변기 칸막이 앞에 서있었다. 칸막이 안쪽에서 벌어지던 모종의 사건이 이제 매듭지어졌음을 K는 알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다시 한 번 문을 두드렸다. 잠깐의 정적이 흐르더니 곧 덜그럭하고 자물쇠가 풀리는 소리가 화장실 안에 울려 퍼졌다. 그리고 문이 열렸다.
K의 눈앞에는 여자가 한 명 서있었다. 젊은 여자였다. 정확한 나이를 짐작하기는 어려웠지만 그녀의 어떤 부분들은 학생의 것으로 생각될 정도로 젊고 앳된 느낌이 있었다. 그런데 그녀의 눈, 눈물과 땀 때문에 흉측하게 번진 검은색 마스카라 한가운데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그녀의 눈. 그것은 혼탁하고 흐릿했으며 핏발이 서고 부어올라서 붉게 보이기까지 했다. 그 눈망울을 보고 K는 또 누군가의 눈을 떠올렸다. 눈동자 깊숙한 곳에 가라앉은 원망과 불행의 색조. 곧 무너질 것처럼 불안하게 흔들리는 초점. 억울함을 억지로 참는 것 같은 눈빛. 그녀의 앳된 얼굴에 깊고 병든 눈이 두 개 박혀있는 광경은 가히 그로테스크를 말 할만 했다. 여자에게서는 피와 눈물의 냄새가 풍겼다. K는 말없이 여자를 바라보았다. 여자 또한 아무 말도 없었다.
그녀의 옷은 피와 점액 따위로 온통 범벅이 되어있었다. 여자가 안고 있는 고깃덩어리 때문이었다. 그렇다, 여자는 새빨간 고깃덩어리를 품에 안고 있었다. 고깃덩어리는 빨간 체액과 점액으로 번질거리고 있었고, 가끔 끈적이는 액체를 뚝뚝 흘리곤 했다. K는 그것을 좀 쳐다보다가 다시 여자의 얼굴로 눈길을 돌렸다. 흑연색 화장품을 함유하고 흘러내린 눈물의 길이 광대뼈와 볼 위에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그녀의 입술은 피로와 닳아빠진 감정 때문에 단단하게 닫혀 있었고 K도 입을 다물고 있었다. K는 왠지 모를 향수 같은 것을 느꼈다. 아마도 그의 코앞에 서있는 여자 때문인 것 같았다. 그는 여자와 악수를 하고 싶었다. 그녀에게 어떠한 종류의 친근감을 표현해보고 싶었다. 여자에게서는 병든 짐승 냄새가 났다.
「울지를 않아요.」
갑자기 여자가 말했다. 친밀함에 대해 온갖 생각을 하던 차에 뜬금없이 그런 말을 듣자 K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여자를 보았다.
「울지를 않아요. 죽었나 봐.」
여자는 반복해서 말하며 K에게 품에 안고 있던 고깃덩어리를 내밀었다. 여자의 옷과 고깃덩어리 사이에 들러붙어 있던 액체들이 질퍽거리며 길게 늘어졌다. K는 어정쩡한 자세로 서서 그 고깃덩어리를 받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그는 여전히 여자에게서 병든 짐승의 냄새가 난다고 머릿속으로 되뇌는 중이었다.
「당신을 보니까 내 어머니가 생각나.」
K는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말했다. K가 말했다기보다는, 생각이 무심결에 혀끝에서 흘러내린 것이었다. 「내 어머니.」K는 다시 한 번 읊조리듯이 말했다. 그녀에게서도 병든 짐승의 냄새가 났었다. 피곤에 찌든 표정 깊숙한 곳에 더 이상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눈을 가지고 있는, 한없이 가난한 늙은 여자였다. 모래에 쓸려 닳고 닳은 조약돌처럼. 늘 그랬지만 K는 죽은 어머니를 떠올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이미 생명조차 잃은 그녀였지만 어머니는 늘 K의 감정을 뒤죽박죽으로 섞어놓고 물고문을 하듯이 그의 머리를 상념의 욕조 속으로 처넣을 수 있었다. K에게 구걸을 하러 다가온 노파도, 흰빛으로 번쩍거리는 겨울의 대로에서 들리던 음악소리도 전부 마찬가지였다. 그것들은 그 어떤 언어보다도 분명하게 K의 어머니를, 더 정확하게는 어머니의 가난한 영혼을 연상시켰다. K는 차라리 자신의 입으로 「어머니」라고 껍질뿐인 문자의 나열을 늘어놓는 것이 더 참을만했다. 그러나 그 노파의 눈에 새겨진 감정들은, 그리고 눈부신 빛 속에서 환청처럼 들리던 새된 음악소리는 K가 갖고 있는 어머니에 대한 기억의 가장 깊은 부분을 찌르고 자극해 그를 견딜 수 없게 만들었다. 그리고 지금 K의 눈앞에서 피비린내를 풍기고 있는 여자. 그녀는 K로 하여금 ‘어머니’를 입으로 말하게 만들 정도로 K의 어머니와 닮아있었다. 특히나 그녀의 눈은 K 어머니의 눈만큼이나 인상적이었던 것이다. 어머니의 눈은, 그리고 그녀의 눈은 바라보고 있으면 한없이 깊은 무저갱을 내려다보는 것만 같았다. 그녀들의 눈은 그야말로 허무의 증명이었으며 아무런 목적도 없이 버려진 인간존재의 표현이라고 부를 만했다.
「당신은 아주 젊고 어린데.」
사실 K는 자신에게서도 병든 짐승의 냄새가 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필연적인 일이었다. 그는 알았다. K는 여자와 자신이 똑같은 체취를 풍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당신은 아주 젊고 어린데. 그녀가 자신의 동족이라는 것을 K는 처음 그녀의 눈과 마주쳤을 때부터 뭉뚱그려진 감각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K는 자신을 향해 내밀어진 고깃덩어리에게 팔을 벌렸다. 그는 그의 유일한 동족이 자신에게 내민 것을 받아들었다. 속이 꽉 찬 육질의 묵직한 무게감. 끈적거리고 은근한 온기. 체액으로 뒤덮인 그 추한 고기뭉치는 갓 태어난 인간이었다.
여자는 아이를 K에게 들려주고 지친 발걸음으로 그를 지나치더니 화장실 타일 위에 주저앉아버렸다. 화장실은 주기적으로 물 흐르는 소리만 들릴 뿐 굉장히 고요했다. 태양빛으로 달궈진 공기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여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희미하게 울고 있었다. K는 자기 손에 들린 갓난아이의 얼굴을 뒤덮은 체액 따위를 손으로 걷어냈다. 잘라낸 돼지고기의 단면처럼 새빨간 얼굴은 여기저기가 온통 부어있었다. 두 눈꺼풀이 들러붙은 듯이 닫혀있는 눈은 생고기에 새겨 넣은 조각 같았다. K는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울지도 않는 자그마한 고깃덩어리를 쳐다보고 있자니 채식주의자가 되고 싶다는 멍청한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K는 왜 여자가 자신에게 이런 것을 안겨줬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서 여자를 봤는데, 그녀는 여전히 바닥에 주저앉아 넋 나간 사람처럼 초점 없는 눈으로 허공을 향해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그냥 변기에 처넣고 물을 내려버릴까? K가 중얼거렸다. 그러나 칸막이 안쪽에 있는 양변기는 갓난아이만한 변을 흘려보낼 수 있도록 설계된 것 같지는 않았다. K는 어쩌지도 못하고 그저 엄지손가락으로 그 갓난애의 피부를 문지르고 있었다. 그런데 K는 아이의 연약한 갈비뼈 안에서 무언가가 박동하는 것을 손끝으로 느낄 수 있었다. 심장이 뛰고 있었다.
「살아있는 모양인데.」
그러면서 K는 아이의 뺨을 후려갈겼다. 철썩하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아이는 죽었다 살아난 것처럼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아기의 입에서는 비명과 함께 끈적거리는 점액 덩어리가 튀어나왔다. 앵앵. 고요하던 화장실에는 신경질적이고 삶에 대한 탐욕으로 속이 꽉 들어찬 비명이 울려 퍼진다. K는 짜증이 날 것 같았다. 아이의 여린 입술 가장자리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K의 따귀 때문에 살이 찢어진 것이다. 그는 고개를 돌려 여자를 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주저앉아 있었다. 죽은 줄 알았던 아이가 되살아나 울고 있는데도 여자의 표정은 바뀌지 않았다. K는 눈짓으로 여자에게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물었다. 여자는 흔들리는 초점으로 K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무감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 대신 죽여줄래요?」
K는 잠시 침묵한다. 그는 자신이 왜 여자를 보고 어머니를 떠올렸는지 점점 더 잘 알 것 같았다. 그녀는 희망을 완전히 거부하고 있었다. 그녀와 어머니, 두 여자에게는 미래에 대한 그 어떠한 기대도 없는 것이다. 심지어 그녀들에게 있어 미래란 악의로 만들어진 허구처럼 느껴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당신을? 아니면 이걸?」
손에 들린 아기를 들어 올리면서 K가 말했다. 어느 쪽이 죽던지 상황은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K는 생각했다. 이 좁고 뜨거운 화장실에서 벌어지는 살인극은 세계에게 있어 완전히 배제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여자가 죽으면 미래 없는 갓난아이가 남는다. 아이가 죽으면 미래를 거부하는 텅 빈 눈의 짐승만 남는다. 온몸의 털이 빠지고 가죽위로 앙상하게 뼈만 드러난 병든 암컷짐승. 여자는 대답하지 않고 그저 고개만 푹 숙인다. 다리를 모으고 앉은 그녀는 마치 자신의 뱃속으로 말려들어가려는 것 같다. K는 다시 아기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아이는 여전히 공포와 탐욕으로 만들어진 비명을 내지르고 있다. 그 새빨간 고깃덩어리는 화장실이 울릴 정도로 시끄러운 소리로 짖는다. 내놔. 내놔. 내놔. 아기는 무엇인가를 강렬하게 원하고 있었다. K가 말하기 시작한다.
「나는 집이 있어.」
그가 계속 말한다.
「남한테 빌린 것이지만 말이야. 좁기는 하지만 살만해. 사방팔방으로 창문이 나있어서 늘 태양에 가장 가까운 집이지.」
K는 말을 멈췄다. 그는 마치 라디오의 전원이 끊기듯이 갑작스럽게 말을 끊었다. 그의 눈은 귀청이 떨어져나가도록 공격적으로 울고 있는 아이의 벌려진 입 속에 시선을 두고 있다. 손톱만한 목젖이 떨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아기는 가죽부터 입 안까지 전부 새빨갛다. K는 한 손으로 아기의 목을 쥐었다. 울음소리가 더욱 새되어진다. K는 나머지 한 손도 아기의 목을 쥐는 데에 사용했다. 이제 아이는 울음소리도 내지 못한다. 그것은 콜록거리며 고통스럽게 숨을 삼키는 소리밖에 낼 수 없다. K는 양손에 힘을 주었다. 그의 두 엄지손가락은 아기의 목 한가운데를 깊숙이 누르고 있다. 이미 피처럼 새빨간 아기의 얼굴은 점점 더 짙은 색을 띄기 시작한다. K는 아이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눈도 뜨지 못하는 갓난아이는 팔다리를 허우적거리며 어떻게든 자신의 생명을 낚아채보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K는 자신이 화를 내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그는 정말로 화나 있었다. K는 아기의 몸짓이며 표정, 숨넘어가는 침묵으로 들어찬 입, 너무나 작아서 비현실적인 손발, 그리고 그것이 갖고 있는 체온 따위가 전부 미치도록 싫었다. 그는 양손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로 힘을 주어 아이의 목을 졸랐다. 「그 무엇도 태어나서는 안 돼.」 K가 흥분이 스며든 정신으로 뇌까린다. 입 밖으로 내지는 않고 그저 머릿속으로만 조용히 중얼거린다. 그는 입술도 뻥끗하지 않는다. 경련하는 근육의 떨림이 K의 엄지손가락에 전해져온다.
그리고 아기는 죽었다.
K는 자신의 손 안에서 축 늘어져있는 아기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았다. 이제 생명마저 잃어버린 그것은 시체라기보다는 차라리 고약한 취향을 가진 수집가의 태아 모양 밀랍인형 같았다. K는 곧 그것을 변기 안쪽에 떨어트렸다. 죽은 아기의 두개골이 쿵 하고 변기 내벽에 부딪히면서 가죽이 찢어진다. 시체는 붉은 등가죽을 드러내고 변기에 고인 물속으로 처박혔다. 찢어진 상처에서 스미어 나오는 피 때문에 빨간 잉크를 떨어뜨린 것처럼 변깃물의 빛깔이 점점 짙어진다.
이제 K는 몸을 돌려 여자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웅크리고 앉은 자세에서 멀건 눈만 위로 하여 K를 쳐다본다. 돌연 그녀가 먼저 입을 연다.
「간단하게 죽이네요.」
「그래.」
처음 해보는 일이 아니니까.
여자의 목소리는 마치 그르렁거리며 위협하는 야수의 목청 같았다. 목감기에 걸린 것처럼 그녀는 몹시 쉰 목소리로 말했다. K는 앳된 얼굴의 여자가 짐승의 울음소리 같은 목소리를 갖고 있는 것이 무척 인상적이라고 생각했다.
「이름이 뭐죠?」 그녀가 물었다.
「K.」
「나는 T예요.」
T. 그녀는 T다. T는 자기 이름을 밝히면서 또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그녀의 늘어진 머리카락과 모으고 앉은 다리 때문에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T는 고개를 숙인 채로 작게 몸을 들썩였다. 아마도 웃고 있는 것이리라고 K는 생각했다. K는 그녀 앞으로 다가가 쭈그리고 앉았다. 무릎 사이에 머리를 파묻고 있는 T는 터무니없이 작아보였다. 실제로도 그녀는 꽤 체구가 작은 편이었다. K는 모든 것으로부터 숨으려는 듯 작게 움츠리고 앉은 그녀를 보면서 생각에 빠져있다. 그의 어머니도 작고 마른 사람이었다. 조금만 힘을 주어 쥐어도 깨져버릴 것 같은 작은 유리세공품처럼 말이다. 그러나 그녀는 유리세공품이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의 전 인생에 걸쳐서 일어난 온갖 불행들 사이에서도 입술을 깨물고 살아남았던 악착같은 영혼이었다. 그리고 이 여자 T도 비슷한 영혼의 소유자이리라고 K는 생각했다. 너무나 닮았다. 그는 그 사실에 대해서 어떤 감정을 가져야할지 혼란스러웠다. K는 한참동안 말없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T도 몇 번인가 몸을 들썩인 뒤로는 움직이지 않았다.
「이봐.」
마침내 K가 입을 연다.
「만약 갈 곳이 없다면, 내 집으로 와.」
K의 말에 T는 고개를 든다. 그녀의 눈에는 K에 대한 의문 같은 것이 담겨있다. 사실 말을 내뱉고 가장 놀란 것은 K 자신이었다. 여전히 황금빛 햇살이 넘실거리고 있는 화장실에서는 뜨겁고 느리게 물결치는 정적이 흘렀다. K는 무어라고 해명을 해야만 하리라고 생각했지만, 어쩐지 그럴 마음이 나지 않았다. 자신이 내뱉은 말 때문에 T가 어떤 오해를 한다면, 그건 그것대로 사실인 것 아니겠는가. 늘 사람들 앞에 서면 변명하고 장광설을 늘어놓기 바쁜 K였지만 T를 앞에 두자 굳이 주절주절 변명을 떠들어댄다는 것이 무척 귀찮게만 여겨졌다. 그것은 아마도 냄새 때문일 것이라고 K는 생각했다. 그는 T의 영혼 역시 무척이나 피로하고, 닳을 대로 닳아 너덜너덜하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 점이 K에게는 위안이 되는 것이었다. 그는 그녀를 보고 있으면 안도할 수 있었다. K에게는 T가 이 세상에서 태어나 처음으로 만나는 동족처럼만 느껴졌다. 그녀도 K만큼이나 별 볼 일없고 외로우며 또한 존재 깊숙한 곳에서부터 골병이 들어있는, 병을 앓고 있는 짐승이라는 것을 K는 직감할 수 있었다―그것도 사실은 K가 제멋대로 그렇게 믿고 있는 것이지만 말이다. T에게는 퍽이나 실례인 직감이다―. 그러한 기분으로 타인을 대한다는 것은 K에게 있어 굉장히 익숙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한 번 자신의 생각을 돌아볼 틈도 없이 말을 내뱉어버린 것이다. 자신의 집으로 오지 않겠느냐고.
T는 빨갛게 부어오른 눈으로 K를 물끄러미 쳐다본다. 그녀의 눈매에서는 약간의 냉소가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K에 대한 냉소라기보다는 오히려 그녀의 오래된 습관 같은 것이었다. 자신에게 손을 내미는 모든 사람들에 대한 냉소. 그러나 그것도 그다지 선명한 것은 되지 못했다. K는 다시금 확신했다. 가진 것이라고는 결핍밖에 없는 여자다. 자신의 심장에 뚫려있는 구멍의 벽면으로 동맥혈이 흐르는 것을 항상 쓰라리도록 명백하게 느끼지만, 그렇다고 해서 누군가의 뜨거운 살덩어리가 그 구멍을 채워 주리라고 믿지도 않는다. 어쩌면 그녀도 과거에는 그녀의 결핍을 메워주겠다고 다가오는 사람들을 믿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T의 습관화된 냉소는 경험주의의 산물이리라. K는 마음속으로 자신의 상상력에 감탄했다. 마치 소설가 같군! K는 T와 시선을 맞췄다. 그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T의 존재라는 비극 때문에 가슴이 아릴 것 같았다. 특히 그녀의 냉소 역시 완전무결하지 못하다는 점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그 무엇도 태어나서는 안 돼.
「왜 마음에 틈이 있지?」
K가 대뜸 말한다. 그는 어리둥절한 기분이다.
「내가 어떤 사람으로 보이기에?」
K는 그것이 이상한 질문임을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의문을 그 외에 어떤 방식으로 말해야했을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K는 T도 K 자신을 동종으로 느끼고 있는 것이 아닐까하고 생각했다. K가 냄새를 맡았듯이, T도 냄새를 맡았을지도 모른다. 그러한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K는 아직 T가 느끼는 감정의 근거를 파악할 수가 없었다. 여자의 애매한 냉소. T는 아직 K를 경멸하거나 그를 향해 본격적인 비웃음을 던지지도 않았다. 그녀는 뭐라고 대답할까? K는 자신의 어머니가 인간을 사랑했던가, 혹은 사랑하지 않았던가에 대해서 돌이켜보고 싶었다. 수천 번의 불행과 거절 후에도 그녀는 인간에 대한 애정을 인정할 수 있었던가. 「심지어 당신은 그녀보다 훨씬 어리니까.」 K가 입속말로 중얼거린다.
T는 여전히 말이 없다. 그녀는 K가 혼자서 이러쿵저러쿵 지껄이는 것을 가만히 쳐다만 본다. T는 K의 어깨 너머로 시선을 던져 자신의 아이가 죽어있는 양변기를 흘깃거리며 쳐다보기도 한다. 하얀 유리로 되어있는 매끈한 모양의 공중화장실 양변기. 사람들이 대소변을 흘려보내는 그곳에 지금은 T가 배설한 생명이 죽어있다. 화장실 타일바닥에 앉아있는 T의 눈높이에서는 아기의 시체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다시 K에게로 눈길을 돌린다. 그는 불과 몇 분 전만해도 자신이 갓 태어난 아기 하나를 죽이고 있었다는 사실을 벌써 잊어버린 것처럼 보인다. K는 계속해서 맥락을 파악하기 힘든 문장의 단편들을 T에게 들려주려 애쓰고 있다. K의 말에는 전혀 귀 기울이지 않고 힘 빠진 시선으로 그의 동공만을 들여다보던 T가, 돌연 입을 연다.
「나 좀 일으켜줘요.」 그녀가 이어서 말한다. 「어디로든 가서 좀 자고 싶어요. 당신 집으로 데려가줘요.」
그녀의 말을 듣자 K는 곧 아무리 떠들어봤자 어느 누구에게도 의미를 가지지 못할 말들을 내뱉는 것을 집어치우고, 자리에서 일어난 뒤 T의 손을 잡았다. 그는 절뚝거리지 않는 한쪽 발에 체중을 싣고 T의 팔을 위로 잡아당긴다. 그녀가 비틀거리면서 일어난다. 아직도 T의 다리에 설마른 양수와 체액들이 엉겨붙어있는 것이 보였다. K는 그녀의 손을 놓지 않은 채로 절룩거리며 세면대로 다가가, 그녀가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수도꼭지를 열고 T의 몸을 어설프게 닦아주기 시작했다. T는 거부하거나 피하지 않고 K가 하는 짓을 그냥 내버려두었다. 대강의 세척을 끝내자 K가 <그래>하고 입을 열었다.
「집으로 가서 잠이나 한잠 자자고. 질릴 정도로 실컷.」
그야말로 영원히 깨어나지 않을 것처럼 말이다. 생명을 낳는다는 것은 너무 끔찍한 일이니까, 당신은 몹시 피로할 거야.
K와 T는 서로의 몸에 기댄 채 화장실 밖으로 나선다. 남자는 다리를 절고 여자는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한다. 두 사람은 서로를 부축하며 햇빛 넘치는 거리를 걷기 시작한다.
T는 어영부영 K의 집에 눌러앉게 되었다. 그녀는 그 뜨거운 방에서 하루 종일 거의 움직이지도 않았다. 늘 방 한구석 벽면에 등을 기대고서, K가 사온 새로운 매트리스 위에 앉아 창문 너머의 하늘을 힐끗거리다가 밤낮에 관계없이 소르르 잠드는 것이 그녀가 하는 일의 전부였다. T는 외출조차 하지 않았다. 매일 저녁 K가 집에 돌아와서 보면, 아침에 그가 문밖으로 나서며 보아두었던 자세 그대로 그녀는 앉아있었다. 그녀는 말도 많이 하지 않았다. K가 돌아와도 T는 소리를 내 반기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다만 그녀는 저녁노을에 잠긴 눈동자로 K를 지긋이 바라보며 <왔느냐>는 듯이 눈짓을 할 뿐이었다. 생각해보면 지금까지 K 앞에서 T가 가장 많이 말했던 것은 처음 만난 그날뿐이었다. K는 마치 인형 하나를 집에 들여놓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아침마다 K는 T의 식사를 위하여 잔돈푼을 그녀의 매트리스 위에 얹어놓고 나가곤 했다. 그러나 그 돈도 집에 돌아와서 보면 늘 고스란히 남아있는 것이다. K는 T에게 어째서 밥을 먹지 않느냐고 묻지 않았다. 그는 그냥 매트리스 위에 돈을 올려놓기만 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아무튼 간에 T가 식사를 거부한다면 거부하는 것이고, K 자신이 그런 거식행위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참견할 권리는 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무엇보다 K도 식사를 거부하는 것이 얼마나 원초적인 병폐인지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도 지금은 매일 저녁 한 끼씩 식사를 하긴 하지만, 일 년 내내 햇빛으로 넘쳐흐르고 하늘에 닿을 것처럼 한없이 고독하기만 한 자신의 방안에 앉아있노라면 도무지 음식을 씹어 삼킬 기분이 들지 않는 것이 사실이었다. 공기 중에 포화해있는 빛살은 사람의 본능과 삶에의 욕구를 마비시키고 육체와 영혼의 연계마저 흐릿하게 지워놓는 것이었다. K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안 그래도 건강한 체형으로는 보이지 않는 T가 급속도로 말라가는 것이 눈에 띄자 K는 가끔 빵과 우유 따위를 사들고 오곤 했다. 그것을 T에게 내밀면 그녀는 순순히 받아들었다. 그리고 결코 적극적인 모습은 아니었지만, 조금씩 그 식감 없는 빵 덩어리를 뜯어먹는 것이었다. T의 식사는 그런 식으로 성립되었다. 이틀이나 삼 일에 한 번. 효모 냄새가 나는 빵 몇 조각.
실리콘으로 만든 인형처럼, T는 시간이 가면 갈수록 행동과 말이 없어지고 그녀의 존재성 또한 건조하게 말라갔다. K가 눈이 아플 정도로 쨍쨍한 태양빛 아래서 전단지를 돌리기 위하여 거리를 걸어 다닐 때, T가 그 좁고 고요한 방 안에서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내는지 그는 알지 못했다. 그러나 추측은 할 수 있었다. 그녀는 분명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을 것>이다. 자기 자신을 잊어버리려는 것 마냥. 치명적인 태양의 열파 속에서 땀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가끔 K는 뭔가가 변해가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T가 K의 집에서 살게 된 이후부터, 그는 자신이 세계와 맺고 있던 관계가 서서히 바뀌어가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아니 바뀌었다기보다는 차라리, K와 세계의 관계 사이에 무언가가 끼어들어온 것 같았다. K는 이름도 붙이지 못할 무엇인가가 자신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것을 지각할 수 있었다. 그것은 아마도 T 때문이리라고 K는 생각했다. 확실하게 단언할 수는 없지만, 그녀는 K에게 은밀하면서도 치명적인 방법으로 영향력을 끼치고 있었다. K는 심지어 무언가를 잃어버린 것 같다는 생각까지 했다. 내가 무얼 잃어버렸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는 종종 그렇게 되뇌었다. 그의 생활자체는 T와 만나기 전이나 후나 별다를 게 없었다. K는 일거리를 갖게 된 날부터 그랬듯이 늘 아침에 일어나 거리로 나섰고, 사무실의 키 큰 남자에게서 이천 장 가량의 전단지를 받아 가방에 넣고서 온 도시를 돌며 그것들을 오만 가지 벽과 전봇대 따위에 붙이고 다녔다. 그리고 이른 저녁 무렵이 되면 아직 손에 남은 백 장 하고도 수십 장의 전단을 들고 사무실로 돌아가 남자에게서 품삯을 받고, 그 돈으로 저녁 끼니를 해결한 뒤 집으로 가는 것이다. 달라진 것이라고는 잠을 자기 위해 돌아가는 집에 인형 같은 여자 하나가 머무르고 있는 것뿐이었다. 대화조차 하지 않는 말 없는 두 사람. 그런데도 K에게는 그의 생활 심장부에 있는 가장 중요하고 무거운 것이 뒤바뀐 것처럼, 사라진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었다. K는 어리둥절한 기분으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집으로 돌아오면 깊디깊은 눈동자로 자신을 바라보는 T와 함께 말이다.
가끔 저녁 해가 긴 날이면 K는 자신의 매트리스 위에 앉아, 거의 쓰러져있다시피 하며 벽에 기대고 있는 T를 노곤한 눈동자로 뜯어보곤 했다. 그녀의 시선은 창문에 붙박여 있었다. 하기야 어디를 봐도 다 창문 아니면 벽이니 K를 정면으로 노려보지 않고서는 창문에 시선을 두는 수밖에 없었다. K는 새삼 그녀가 아주 조용하다고 생각했다. T를 옆에 두고 있으면 침묵마저도 일종의 백그라운드 뮤직처럼 느껴졌다. 공기가 침묵의 밀도로 가득 차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K는 혼잣말도 되뇌지 않고, 밤의 장막이 창문을 가리기도 전에 어느새 잠들어버리는 것이었다. 홀로 눈을 뜨고 있는 T는 새까만 밤에도 창문을 내다본다.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눈꺼풀 위에서 쏟아져 내리는 졸음 덕분에 희미해진 정신으로 K는 생각한다. 그녀는 무엇을 보고 있을까. 그리고 어머니는 무엇을 보고 있었을까. T의 존재는 K에게 있어 한없이 특별한 것이었다. 최초의 동족이자 어머니의 쌍둥이 영혼. 나는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K는 잠결 속에서 쏜살같이 지나가는 사고의 편린들을 힘겹게 쫓는다.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 나를 낳지 않은 어머니. 그가 울지 않는 것은 이미 잠들어버렸기 때문이다.
K가 잠들고 나면 이제 T가 그의 얼굴로 시선을 향한다. K의 잠든 얼굴은 납처럼 무거운 갖가지 감정들에 짓눌려 흉하게 일그러져있다. 창밖에는 하얀 달빛이 비친다. 유리창이 은색의 액체적인 광선을 발하고 있었다. T는 자신이 완전히 혼자라는 생각을 한다. 여름철의 축축한 밤공기 속에서 그녀는 K라는 남자에 대한 여러 가지 의구심을 떠올리며 그의 표정을 유심히 관찰한다. 그는 그녀의 아기를 죽였다. 왜냐하면 T 자신이 그것을 바랐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T의 몸을 씻겨주고, 자신의 집으로 데려와 주었으며, 그녀를 위해 매트리스도 사주었다. K는 T가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게 돈과 식사를 주고 잠자리까지 마련해주었다. 그리고 그는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대화조차 없이 그들의 동거는 성립되었던 것이다. 수동적이고 동시에 꿈같은 몸짓과 침묵으로. T는 생각했다. 생각하는 기척조차 내지 않으면서, 그녀는 자기 자신과 K에 대해서 생각했다. 이미 절벽 끝자락까지 내몰린 이야기가 어떻게 진행될 수 있을 것인가? 아무런 미래도 기대되지 않는 세상은 곧 멈추고 굳어져 영원히 그 순간의 그 모습 그대로 남을 것이다. 세상은 화석처럼 경화되어, 언제까지고 우주 한구석을 부유할 것이고, 영원히 어느 누구에게도 발견되지 못할 것이다. 모든 것이 포화되고 구름처럼 뭉게뭉게 피어올라, 비대해진 모습으로 세계는 정지할 것이다. 한여름의 태양처럼. 끓어오르는 연기처럼. 새빨갛게 녹아버린 금속처럼. 아, 이 공상들이 전부 진실이라면! 그녀는 미래가 그녀에게로 오는 것을 느낄 수 없었다. 쏟아지는 폭포수처럼 시간이 흘러간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T가 가진 것들은 전부 한계까지 부풀어 올라 딱딱하게 응고되어버렸다. 낮과 밤은 의미를 잃었고 ‘내일’이란 허구와 다름없었다. T는 자신의 내분비샘에서 임신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온갖 격정적인 호르몬이 분비되고 있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억눌린 심정으로 육체를 저주한다. 그녀는 정말이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어떻게 해야 좋을지 단 한 줄의 실마리조차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좋겠느냐>고? 이제 그녀는 <좋은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대답할 수 없다. 그래서 T는 말라죽어가는 짐승처럼 방 한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아 움직이지 않는다. 그녀는 웅크린 벌레처럼 몸을 둥글게 말고, 자신의 깊고 공허한 가슴속으로 잠수하는 것이다. 점점 더 깊이. 그녀가 세계를 잊어버릴 때까지. 혹은 세계가 그녀를 잊어버릴 때까지. 그렇게 T는 움츠러든 채로 눈을 감는다. 만약 이대로 잠든다면, 영원히 깨어나지 않게 해달라고 신께 기도하며.
아침이 되면 K가 가장 먼저 잠에서 깬다. 아마도 그는 이 도시의 누구보다도 일찍 일어나는 사람일 것이다. K는 비몽사몽간에 몸을 일으킨다. 아직 자신이 누구고 또 어디에 있는지 잘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다. 그는 흐리멍덩한 눈빛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해뜨기 직전의 새벽빛 때문에 방안은 짙푸른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매트리스 위에 주저앉은 채로 K는 조금씩 잠들기 전의 자신으로 되돌아간다. 자기 자신과 그 외 잡다한 것들에 대한 기억이 무작위하게 떠오른다. 기억해낼 수 있는 모든 것을 떠올리자 그는 약간 부어올라있는 자신의 양쪽 눈을 손바닥으로 짓누른다. K는 이제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하여 대부분 파악할 수 있었다. 그의 눈에서는 아직 완전히 털어내지 못한 잠기운과 눈물샘을 비벼대는 손바닥 때문에 눈물이 한두 방울 스미어 나온다. 「제기랄!」 K가 혀 꼬부라진 소리로 욕설을 내뱉는다. 거의 자포자기에 빠진 어조다. 그는 한참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말라붙은 눈물 때문에 눈가가 찐득거렸다. K는 손등으로 눈을 비비고 힘겹게 눈꺼풀을 열었다. 그의 눈에 잠든 T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녀는 마치 앓고 있는 어린아이처럼 웅크린 채로 잠자고 있다. K의 머릿속에는 무미건조한 상념이 흐른다. 그는 곧 자리에서 일어난다. 몸을 세우자 눈앞이 번쩍거리며 어지러운 것이 빈혈기가 있는 것 같았다. K는 생각했다. 그야 제대로 먹고 다니질 않으니 피가 부족할 만도 하다. 오늘 저녁으로는 철분이 많은 음식을 먹으면 어떨까? 그는 잠시 생각해 보았으나, 그런 잡념은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머릿속에서 깨끗이 사라졌다. 빈혈 따위 어찌 되든 상관없는 일인 것이다. 그의 육체는 구역질을 곁들인 하루 한 끼의 식사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허기는 늘 K에게 먹을 것을 더 내놓으라고 으르렁거리기만 한다. 허기는 K의 기분이나 취향 따위에 아무런 관심도 없다. 그것은 그저 사납게 식탐을 표현하기만하는 짐승처럼 단순하고, 또 탐욕스러웠다. 그래서 K는 자신의 허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반항심 때문에 일부러 허기의 목소리를 묵살하기까지 했다. 그러한 면에서, 말했다시피 K에게는 자신의 영양실조 상태를 만족스럽게 생각하는 부분도 있었다. 과잉의 시대에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서서히 아사해가는 남자. 심지어 무관심과 반항으로 말미암아. 하하하! K는 시답잖다는 듯이 웃었다. 나는 일종의 사회적 심벌이라도 되고 싶은 것인가? 그의 심장 속은 고통의 감정으로 파도치고 있었으나, K는 의식적으로 그것을 억누르며 웃었다. 이제 일을 하러 나가야 했다. K는 세수를 한 뒤, 헝클어지고 젖은 머리를 쓸어 넘기며 현관 밖으로 나섰다. 또 하루가 시작되었다. 잠이 덜 깨어 피로한 눈을 문질러대면서 K는 되뇐다. 그는 오늘도 T를 위해 먹을 것을 좀 사와야겠다고 결심했다. 물론 그녀는 그것을 기뻐하며 받아들지는 않을 것이다. 언제나와 같이, T는 무표정한 얼굴로 음식을 한두 조각 씹어 삼킨 뒤에 당연하다는 듯이 남은 음식―손대지도 않은 것이나 다름없는―을 한구석으로 밀어놓을 것이다. 그래도 K는 그녀를 위해 음식 따위를 사들고 오고 싶었다. 그것이 K가 T에게 느끼는 감정을 표출하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죽은 어머니의 앙상하던 팔을 떠올렸다. K는 그녀의 팔에 드러난 골격 때문에 생기는 음영과, 팔 거죽의 매끄럽지 못한 촉감, 파랗게 불거진 정맥 따위를 생생하게 기억해낼 수 있었다. 작은 체구와 비쩍 마른 팔다리를 가진 어머니는 보고만 있어도 생명이 지닌 선험적 비극을 지각하게 만드는 그런 사람이었다. K는 언제나 그것이 견딜 수 없었다. 어머니의 깊고 아득한 눈. 불행을 증명하는 살갗. 벽돌색의 생활 사이에서 마모되어버린 그녀의 입 꼬리. 그가 어머니를 생각할 때마다 떠올리는, 수백 수천 번도 더 보아온 이미지들. 수도 없이 보아왔고 또 느껴왔지만 그것들은 지치지도 않고 여전히 K의 정신에 치명적으로 작용했다. 그것들은 마치 낙인과도 같았다. 언제까지고 통증이 사라지지 않는 완벽한 낙인.
아침나절부터 어머니 생각이라니, 오늘도 일진 한번 좋겠군. K가 자기 자신을 향해 비아냥거리며 지껄인다. 그는 어머니의 얼굴과 함께 떠오른 죄악감을 지우려고 애를 쓰며 신경질적으로 발을 내딛는다.
「나는 죄 같은 것은 믿지 않아!」
아직 해가 완전히 뜨지 않은 탓에 그늘져있는 공기에다 대고 K는 그렇게 내뱉었다. 그는 자신이 지껄인 말이 참으로 마땅하다는 듯이 또 한 번 반복해서 말했다. 그렇다. 죄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스팔트가 깔린 포도 위로 쉼 없이 발걸음을 재촉하면서 그는 약간 유쾌한 기분이 되었다. K는 죄 따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걸핏하면 죄책감에 빠지는 자기 자신이 어리석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완전무결할 정도로 아무것도 믿지 않는데 말이다…… 양심이란 퍽도 멍청하다. 그것도 어머니가 남겨준 글러 먹은 유산 중 하나였다. 어머니가 남기고 간 발자국들 속에서 돋아나 K의 심장으로 스며든 뒤 혈액 속에 고통을 불어넣는, 제멋대로 작동하는 기계장치. 심지어 K는 그런 것을 원한 적도 없는데, 그것은 언제부터인가 당연하다는 듯이 K의 정신 깊숙한 곳에 뿌리박혀 있었던 것이다. K에게는 그것이 오로지 고통만을 목적으로 하여 존재하는 고약한 장치로만 생각되었다. 그래서 그는 늘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고자 노력하며 살았다. 거부. 도대체 몇 천 번이나 계속해서 반복되어온 거부였는가! K는 자유롭고 싶었고 또 자연스럽고 싶었던 것이다. 아아! 그는 돌연 나지막하게 신음소리를 냈다. 그의 발걸음은 점점 더 빨라지고 있었다. 이제 더 이상은 감당하지 못하겠다고 K는 생각했다. K는 거의 뜀박질하다시피 걸으며 양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부여잡고 있었다. K의 입에서는 맹렬한 웃음소리와 절망스러운 신음이 뒤죽박죽으로 혼돈되어 산발했다. 어느새 지평선에서는 태양이 빠끔히 머리를 내밀고 있었다. K는 이상한 눈으로 그를 곁눈질하는 통행인들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고 도무지 언어화되지 못하는 비명을 내지르며 자신의 얼굴을 그러쥐었다. 이제 그는 바로 사무실로 가지는 못할 것이다. 화산처럼 폭발하고 분출하는 감정을 웬만큼 추스를 수 있을 때까지 K는 사무실 주변의 거리를 맴돌며 심장에서부터 올라오는 분열된 문장들을 혼잣말로 지껄여대야 한다. 아마도 오늘 그는 평소보다 조금 늦게 업무를 시작할 것이다.
마침 K의 옥탑방에서는 T가 눈을 뜬 참이었다. 눈부신 태양빛 때문에 잠에서 깬 그녀는 미간을 찌푸린 채로 매트리스 위에 누워있었다. 그녀는 짜증스럽게 몸을 뒤척거리더니 방의 모퉁이를 향해 돌아눕는다. 그나마 태양빛을 등질 수 있는 위치였다. 곧 T는 찡그린 표정인 채로 다시 잠든다. 그녀는 아직 얼마든지 더 잘 수 있었다. 그녀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은 신을 원망하는 것은 앞으로 수 시간 뒤에나 일어날 일이다.
그래, T는 신을 믿었다. 그녀의 신은 잔혹하고 무관심하며 야만스러웠다. T가 신이란 마땅히 그래야만 하리라고 믿고 있는 덕분이었다. 그녀의 신은 인간들의 행복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는 그저 그 누구보다 강력하고 경외할만한 권능을 가졌을 따름이다. 그런데 T는 그러한 신을 당연하다는 듯이 따르고, 그의 존재를 확신하는 것이다. T는 이 세상이 어떤 곳인지 자신의 육체로 말미암아 알고 있었다. 인간이 손대는 곳에는 어디든 악의와 우둔함이 만개하고, 그 추악한 꽃봉오리들에게서는 불행의 꽃가루가 날린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 꽃가루들은 바람에 실려 허공을 떠돌다가 결국은 또 다른 악의와 우둔함의 꽃에 안착하여 슬프고도 역겨운 생식을 하고 씨를 만든다. 그리고 그 씨가 떨어진 땅에서는 또 하나의 절망적인 새싹이 돋는 것이다. T는 그것이 대단히 놀랍고 체계적인 순환이라고 생각했다. 세상의 모든 것은 더 깊은 고통만을 향하여 영원히 달음박질치고 있었다. 그것은 완벽한 사이클이었다. 어떤 사악하고 뛰어난 지성이 아니라면 그러한 순환 과정은 만들지 못할 것이라고 T는 생각했던 것이다. 그녀는 아주 강력하고 초월적인 힘을 가진 보이지 않는 손을 상상했다. 상상했을 뿐만 아니라, 그녀는 그 존재를 느낄 수도 있었다. 우주 어딘가에는 인간들을 불행의 쳇바퀴 속으로 밀어 넣은―아니, 인간 그 자체가 바로 불행의 쳇바퀴였다, 그러한 인간을 건축하고 생명과 의지를 불어넣어 대지와 천공 사이의 비좁은 틈에 끼워 넣은 누군가가 있었다. 그녀는 그의 취향이나 사고방식 따위는 조금도 이해할 없었지만, 아무튼 그에게 완전한 권력이 있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나의 머리 꼭대기 위에서, 모든 것을 창조하고 불행을 뿌려놓은 뒤에 무심한 얼굴로 관조만 하고 있는 주(主)여! T는 자신이 신을 발견했음을 알았다. 그녀는 신에게 기도를 드릴 수도 있었다. 비록 그가 T의 소망 따위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세상의 고통을 창조하는 일에만 몰두하고 있더라도 말이다. T는 온 누리에 신의 악의에 찬 숨결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신의 권능을 느낄 수 있었고, 세상 모든 일이 그의 잔악하고 심술궂은 마음에 따라 움직이는 것을 보고 경탄했다. T는 신을 원망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오히려 신에게 기도를 올리고 자신의 신앙으로 삼았다. 그는 절대로 내 행복을 위해 손가락 하나 까딱해주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통상적인 종교인들이 하듯이 신에게 자신의 소망을 읊고 그 절대자를 찬양했으며 자기 삶의 의지로 삼았다. 기묘하게도, 모든 불행의 근원이 저 하늘 위에 있고 그것이 절대적인 권력자라는 생각은 T에게 모종의 위안이 되는 것이었다. 신은 T에게 그 어떤 영광도 행복도 약속하지 않았다. 그 신이야말로 그녀의 아버지였고 상전이었으며 또한 세상이었던 것이다.
어떻게 보면 그녀는 너무나도 광막하고 구분지어지지 않는 문제를 단순화시킴과 동시에 절대화시킴으로서 눈을 감고 잠에 빠져들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녀 역시 여자였던 것이다. T는 아침 특유의 불안하게 흔들리는 공기의 냄새 때문에 몇 번이나 수면과 기상의 경계선에서 정신없이 눈을 뜨긴 했지만, 매번 잠기운에 휩쓸려 다시 잠들고 말았다. 자는 것이 가장 나았다. 통제조차 되지 않는 무의식의 한복판에 의식을 던져 넣는 것이 가장 마음 편한 일이었다. 맨 정신으로 세상과, 다시 말하자면 ‘T의 세상’과 마주보고 있는 것은 그녀에게 있어 그 무엇보다도 힘든 일이었다. 고통이 자신의 정신을 좀먹는 것을 느끼면서도 그녀는 눈을 뜨고 있고자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세상 앞에서 T가 할 수 있는 것은, 운명적이고 절대적인 패배를 똑똑히 알면서도 그저 버티고 서있는 것 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 점에 있어서 K와 T는 확실히 닮은꼴이었다. 이제는 모두가 알듯이 K 또한 너무나도 무거운 비극 밑에 내려눌린 사람인 것이다. 그 꽉 막히고 조금도 다리 펼 곳이 없는 관념 속에서 K가 찾을 수 있었던 유일한 숨구멍은 오직 광기뿐이었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T는 어떤가? 그녀는 잠을 자고 있다. 그녀는 꿈속에서 살고 있었다. 괴로운 기억도 적의로 가득한 세상도 꿈속에서는 전부 얇고 쉽게 부스러지는 비현실에 지나지 않았다. T는 꿈이 현실을 먹어 치워버리기를 바랐다. 그래서 그녀는 깨어나지 않게 해달라고 신에게 기도하고, 또 조금의 저항도 없이 수많은 시간을 뜨뜻미지근한 잠기운에 흘려보내는 것이었다.
그때 K는 자신의 얼굴 위로 흠뻑 쏟아져 내리는 액상의 태양광선 때문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안 그래도 그는 요즘 자신의 몸에 피가 모자란 것 같다고 느끼고 있었는데, 마치 납덩이로 내려치는 것 같은 햇빛이 K의 두 눈과 골통을 두들겨대자 도무지 견딜 수가 없는 것이었다. 까딱하면 쓰러져버릴 것 같다는 생각에 K는 비틀거리고 절룩거리면서 앉을 곳을 찾아 허공을 더듬으며 걸음을 옮겼다. 이미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농후한 햇빛이 그의 시야를 가로막아버린 것이다. K는 전단지가 가득 들어있는 가방 하나를 어깨에 메고 있었는데, 태양빛 때문에 몸에 힘이 빠져 그것마저도 놓쳐버릴 것만 같았다. 그의 눈에는 햇빛이 만들어낸 암적색 그늘 속에서 빨갛고 노란 별들이 사방팔방으로 폭발해대는 것만 보였다. K는 마침내 자신이 어디에 있는 것인지도 알 수 없게 되었다. 햇볕으로 된 쓰나미가 K의 정신을 송두리째 쓸어 가버린 것 같았다. 그는 당장이라도 주저앉아버릴 것 같았지만 시간감각조차 마비되어서 자신이 얼마나 서있었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폭염! 불에 달군 철판처럼 하얗게 백열하는 하늘과 열기로 아우성치는 돌들의 틈바구니에서 K는 그 무엇도 종잡을 수가 없었다. 여기가 도대체 어디란 말인가? K는 빛으로 틀어 막힌 어둠 속에서 손을 휘저으며 되뇌었다. 그러다가 그는 드디어 앉을만한 반석을 하나 찾아냈는데, 손으로 짚어보니 화상을 입을 정도로 뜨겁게 달궈져 있었다. 그래도 K는 그 위에 무너져 내리듯 주저앉았다. 바지를 투과해 올라오는 열기 때문에 엉덩이가 화끈거렸지만 일어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는 이제 가만히 앉아서 시야와 제정신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K의 귓바퀴에서는 햇빛이 발광하는 소리가 쨍쨍거리며 맴돌았다. 그는 비 오듯이 흘러내리는 땀들이 이마와 광대뼈, 그리고 입가를 거친 뒤 턱 끝자락에 모여서는 방울지며 마구 떨어지는 것을 촉감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가 입고 있는 옷은 이미 땀으로 흠뻑 젖어 피부 위에 찰싹 달라붙어있었다. 이러다가 미라처럼 수분이 전부 빠져나가버린 채로 말라죽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될 정도로 땀이 매섭게 흘렀다. K의 눈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그는 봉사가 된 기분이었다. 아니 실제로 그는 지금 봉사나 다름없었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는지 모른다. 이미 말했다시피 K는 열파의 소용돌이 속에서 시간감각마저 잃었던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K는 자신의 눈 안쪽에서 흰색과 붉은색의 빛이 깜빡거리며 점멸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머릿속을 울려대던 날카로운 소음들도 점점 기세가 약해지고 있었다. 그는 신선한 바람이 아주 잠깐 자신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땀으로 젖은 옷은 조금씩 식어가고 있었고, 열기 때문에 미친 듯이 튀어대던 땅바닥도 이제는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었다. K는 시야가 돌아온 것을 알 수 있었다. 그의 눈에는 짙은 주황빛으로 물든 세상이 보였다. 시간은 어느새 백열하던 정오를 지나 저녁으로 접어든 것이었다. 황혼이 도시의 지붕 위로 밀려들고 있었다.
K는 자신이 지금까지 어느 주택의 현관 앞에 깔린 두 단짜리 돌계단 위에 앉아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너무 오랫동안 딱딱한 곳에 앉아있었던 탓인지 둔부의 뼈들이 지끈거렸다. 그는 머쓱한 기분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간을 뛰어넘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K는 살인적으로 쏟아지는 햇빛 때문에 눈앞이 아뜩해지는 것을 느끼며 비틀대고 있었는데, 그 중간과정은 전부 잘려 나가버리고 어느새 자신은 저녁노을 속에서 멀거니 앉아만 있는 것이었다. 비척거리면서 일어서자 K는 한쪽 어깨에 묵직하게 무게가 실리는 것을 느꼈다. 어깨에 멘 가방 때문이었다. 그 안에는 본래 지금쯤이면 도시 곳곳에 붙어있어야 했을 전단지들이 한가득 들어있었다. K는 곤혹스러웠다. 그는 오늘 오전밖에 일을 하지 못한 것이다. 감시자가 없는 일이기 때문에 이런 일도 생길 수 있다. 그러나 내가 의도적으로 농땡이를 친 것은 아니지 않은가? K는 생각했다. 그렇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햇빛 때문에 눈 깜빡하는 사이 반나절이 지나가버린 게 어떻게 내 탓이 될 수 있겠는가. 불가항력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불가항력적이었든 아니었든 K는 상황을 해결해야만 했다. 그는 낡은 가방 안에서 전단을 전부 끄집어냈다. 약 천 부가 좀 덜 되는 양이었다. K는 그것을 전부 어딘가에 묻어버리거나 불태워버린 뒤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사무실의 키 큰 남자에게 갈 수도 있었다. 아니, 전부 없애지는 않고, 한 팔십 부 정도를 남겨서 그 남자에게 돌려주며 <오늘은 이만큼 남았습니다>라고 뻔뻔한 얼굴로 거짓말을 한 뒤 일당을 챙겨 나올 수도 있었다. 그러나 K는 그러고 싶지가 않았다. 도덕이라든가 양심이라든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그는 그저 돈 때문에 거짓말을 한다는 것이 내키지 않았다. 만일 K가 그러한 야비한 거짓말로 보수를 챙긴다면, 그는 필시 자기 자신을 고작 재물 따위에나 집착하는 노랑이로, 너절한 속물로 느끼게 될 것이었다. 그것은 불쾌한 일이다. 사실, K는 사무실에서 일당을 받고 나올 때도 늘 약간의 불쾌감이랄까 죄책감 같은 것을 미약하게, 윤곽이 있는 감정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뉘앙스만으로 만들어진 근거도 논리도 없는 감정으로 느끼곤 했던 것이다. 무엇이 마음에 덜 차는 것인지는 명확하게 말할 수 없었다. 다만 그는 자신이 돈을 챙겨 나올 때마다 <이것은 아니다>라고 막연하게 느낄 수만 있었다. 그 돈으로 음식을 사 먹을 때도, T를 위해 빵을 살 때도 그러한 감정은 끈질기게 K의 심장 한구석에서 꿈틀거리며 자기 존재를 의식시키는 것이었다. 하지만 돈을 벌고 또 그것을 써야만 했다! 모든 사람들이 살기 위해서 그렇게 한다. K는 자신이 대체 무엇에 대해 불만을 가진 것인지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는 고고해지고 싶은 것일까? 세상에서 벌어지는 온갖 사건들에 K가 그리 쉽게 가담하는 편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말할 수 있겠다. 그가 고독하다는 것 또한 명백한 사실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그것은 K 자신의 의지 때문은 아니었다. 그것은 생득적이고 선험적인 조건들 덕분에 강제로 조성된 상황이었다. K가 세상과 함께 할 수 없는 이유는 그가 세상으로 향할 때마다 결국에는 하릴없이 튕겨져 나와야만 했기 때문이고, 고독 또한 마찬가지였다. 말하자면 그는 부적격자인 것이다. 그는 달팽이처럼 자신의 추하고 부서지기 쉬운 껍질 속으로 움츠러드는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K는 그 속에서 더듬이처럼 예리한 시각을 얻을 수 있었지만, 그의 정신에 선 날이 날카로워지면 날카로워질수록 동시에 껍질의 두께도 두꺼워지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그것을 광기라고 부른다. 그가 ‘바깥으로부터 온’ 지폐를 손에 쥘 때마다 당혹스러워하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사람들이 그 종이 조각을 생명이라고 부르는 이유를 K는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주어진 규칙이 도대체 무엇에 근거하는지도 알지 못하고 강제로 게임에 참여하게 된 사람이나 마찬가지였다. 물론 그는 게임을 진행하기는 한다. 그러나 그것이 왜인지는 절대로 알지 못하는 것이다.
K는 꺼내든 전단지들을 짐짓 장수를 세는 척하며 팔락거리다가 다시 가방에 집어넣었다. 그는 묵직한 황혼의 파도가 넘실거리는 공기 중에서 소리도 내지 않고 입속말을 중얼거린다. 오늘, 빛의 장막 속에서 오후시간을 전부 잃어버린 오늘을 어떻게 끝맺어야 할 것인가? 내가 타인에게 받아야만 하는 것들이 유난히 귀찮고 진절머리 나게 느껴지는 날들이 있다. 나는 사실 빈손이라도 괜찮은데 말이다. 전부 억지로 이루어진 일이 아니던가? 그러고서 K는 사무실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발걸음을 뗄 때마다 절룩거리게 되는 오른쪽 다리가 유독 뻑적지근하니 아파왔다.
사무실에 도착하자 그곳에는 언제나처럼 키 큰 남자가 있었다. 그는 여느 때와 똑같이 사무실 구석에 놓인 책상에 달라붙어 서류 위에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끼적이고 있었는데, 인기척이 들리자 문 쪽으로 힐끗 시선만을 향했다. 사무실은 온통 천장에 닿을 듯 높게 쌓인 전단지와 광고지들로 가득했는데, 문간에 엉거주춤하게 서있는 K를 발견한 남자는 벌떡 일어나더니 그 사이를 위태위태하게 건너와 K 앞에 섰다. 그리고 그 키 큰 남자는 전날에도 그랬고 전전날에도 그랬듯이 재킷 속주머니에서 지폐 몇 장을 꺼내 무심한 태도로 K에게 건네는 것이었다. 전날에도 전전날에도 K는 고개를 꾸벅거리며 그것을 받았지만, 오늘은 달랐다. 그는 남자가 건네는 지폐다발에 눈길도 주지 않고 어깨에 메고 있던 가방을 벗어 남자에게로 내밀었다. 그리고 남자가 어리둥절하여 가방을 받아들자마자 K는 곧바로 몸을 돌려 도망치듯이 바쁜 잰걸음으로 사무실 밖으로 절뚝절뚝 걸어 나가는 것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등 뒤에서 K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그는 아무소리도 들리지 않는다는 듯 발걸음만 재촉할 뿐이었다. K는 건물에서 빠져나온 뒤에도 한동안 뛰듯이 걸었다. 키 큰 남자가 쫓아올 가능성이 있는 거리로부터 얼른 멀어지려는 것이었다. 그는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서 키 큰 남자에게 한마디쯤 변명을 할 수도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곧 그 생각을 깡그리 털어버리려는 듯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그에게 사람을 대하는 요령이 없다는 것은 K 자신도 동의하는 사실이었다. K는 어서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옥탑방의 현관은 일종의 국경이나 마찬가지라고 K는 어스름한 황혼 속에서 생각했다. 매일 아침 방에서 걸어 나올 때마다, 그는 자신이 공기의 냄새마저도 낯선 외국으로 내동댕이쳐지는 것 같다고 느꼈던 것이다. 도시의 대기는 마치 네온사인처럼 금속적인 빛으로 번쩍거렸고, 도무지 익숙해질 수 없는 불안한 냄새가 사방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언제는 안 그런 적이 있던가? 없었다. K가 거리에서 살 때에도 도시는 지금과 마찬가지였다. 단 한 순간도 마음을 놓을 수 없고, 무언가에 기대어 잠들 수도 없는 낯선 땅. 도로 위에 즐비하게 늘어선, 시멘트로 만들어진 얼굴들은 K를 향해 위협적인 무표정을 내보이고, 그들의 시선은 K를 영원한 이방인으로 만든다. 불투명한 유리로 덮어씌운 건물들은 사람들을 향해 메마른 빛을 마구 뿌려대며 이 도시를 지배하고 있는 멸망이라는 결말을 증명한다. 하루 종일 거리 곳곳을 맴도는 공허한 소음은 K에게 마치 버릇과도 같은 불안과 불신을 안겨준다. 그렇다, 도시는 아무것도 바뀐 것이 없었다. 이곳은 여전히 당장이라도 부서지고 무너져 사라질 것처럼 위태로웠으며, 소용돌이치는 용암처럼 혼탁하고 모든 것이 끈적끈적하게 뒤엉켜 있었다. 바뀐 것이 있다면 그건 바로 K 자신이었다. <어서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하는 K 말이다.
어서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니? K는 깜짝 놀라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것이 언제부터 나의 <집>이었던가? 그는 분수처럼 솟구칠 순간을 기다리고 있는 열광적인 감정을 심장의 그늘 밑에서 발견했다. 자칫하면 감정이 눈을 통해 뿜어져 나올 것이다. K는 자신의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의 뇌리에는 돌연 T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녀의 입술 속에 파묻혀있는 절망을 K는 사진처럼 명백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T가 나에게 집을 만들어 주었는가? K가 중얼거렸다. 태양으로부터 해방된 지면이 이제는 써늘하게 식은 공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저무는 햇빛과 푸르스름하게 빛나기 시작하는 어둑한 공기의 교차점에서 K는 문뜩 나지막하게 고함을 질렀다.
「T!」
이곳은 외국이다. 낯모르는 토지다. 휑뎅그렁한 세계다. K는 주문을 외우듯이 혼잣말을 중얼대며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발걸음이 향하는 곳은 집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그 어느 곳도 아니었다. K는 걸음에 취한 것처럼 걸었다. 그에게는 시간이 필요했고, 또한 충분한 공간도 필요했다. K는 계속 걸었다. 정말이지 영원히 멈추지 않을 것처럼 그는 광적으로 걸었다. 절뚝절뚝거리면서 미친 듯이 말이다. K의 눈은 무언가를 필사적으로 쫓듯이 뒤룩거렸다. 누구든 지금의 K와 마주친다면 단숨에 그를 미친 사람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 정도로 그는 열중해 있었다. K는 말로 다하지 못할 감정이 가슴 속에서 철장에 갇힌 맹수처럼 사납게 몸부림치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한 손으로 자신의 심장부를 움켜쥐었다. 할 수만 있다면 양손으로 늑골을 잡고 뜯어내어 문처럼 활짝 열어버리고 싶었다. K는 오직 감각하기만 할 뿐, 명백하게 형태 지어진 ‘말’을 내뱉지는 못했다. 그래서 그는 되다만 언어들만 계속 허공을 향하여 외쳐대는 것이다.
하늘은 이미 짙은 보랏빛이 되어 있었다. 황금빛 그늘 속에 숨어있던 햇살조각들도 자취를 감추었고, 이제 땅 위에 빛나는 것이라고는 울적한 빛살을 내뿜는 가로등의 필라멘트뿐이었다. 어지간히도 정신없이 걷는 바람에 자신이 도시의 어디쯤에 와 있는지도 알 수 없게 된 K였지만, 지금은 그따위 것에 신경 쓸 처지가 아니었다. 그는 폭발할 것 같은 마음을 끌어안고 걷느라 너무나도 바빴던 것이다. 만일 그가 발 디디고 있는 곳이 옥상이었다면 K는 또 한 번 전처럼 뛰어내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지금 딱딱한 포장도로 위를 걷고 있는 것이었다. 자해? 자해도 좋다. 나는 또 벽에 머리를 박아대거나 스스로의 가슴을 난도질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걷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양쪽 갈비뼈를 움켜쥔 열 개의 손톱들이 가죽을 파고들었지만 그런 하잘 것 없는 통증을 느낄 겨를조차 없었다. 밤바람에 가로수의 잎사귀들이 사락거리며 춤을 추고 있었다. 가로등의 노란 불빛은 나무 그늘의 틈새로 스며들어 녹진하게 빛살을 흘리고 있었다. K는 그림자와 빛을 밟으며 도시 속을 헤매었다. 광적인 감정과 지독한 피로가 칵테일처럼 뒤섞여 그의 몸속을 흘렀다. K는 도무지 발걸음을 멈출 수 없었지만 그와 동시에 당장이라도 다리가 풀려 쓰러질 것 같았다. 밤은 점점 깊어갔고, K의 내면에 새겨지고 있는 상처들도 점점 더 진한 피를 내뿜었다. 집으로, 집으로. 그가 되뇌었다. 집으로, 집으로. 피로 때문에 가라앉고 갈라진 목소리였다. 내 고향. 내 왕국. 내 피가 흐르는 땅. K는 갈구하듯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목마른 개처럼 헐떡거렸다.
공기 중에서는 여름밤 특유의 눅눅한 냄새가 풍겼다. 무척이나 사람을 우울하게 만드는 냄새였다. K는 여름밤의 냄새를 맡을 때마다 매번 자신의 어린 시절을 기억해낼 수 있었다. 이제는 죽어서 없어진 아버지와 어머니가 젊은 모습으로 살아있고, 자신은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였던 시절 말이다. 그것은 굉장히 오래된 과거였다. 그러나 그마저도 행복한 기억은 아니었다. 어린 시절에 대한 K의 기억은 전부 습기가 차고 모서리가 뭉개져 있어서 명료한 것이 되지 못했다. 하지만 그 시절을 지배하던 하나의 뉘앙스만은 지금도 느낄 수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우울이었다. 그토록 젊은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자신은 아직 아무런 죄악도 저지르지 않았던 때였는데, 그 시절도 K의 머릿속에서는 말 없는 슬픔으로만 기억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K는 여름밤을 좋아하지 않았다. 자신의 유년을 떠올리게 만드는 그 냄새는 동시에 절망의 불변성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어느새 K의 걸음걸이는 눈에 띄게 느려져있었다. 치명적인 피로가 그의 심신을 물에 젖은 솜처럼 무겁게 만들어놓은 것이었다. 게다가 그 울적한 여름밤의 냄새가 끊임없이 K의 입과 코를 통해 기어들어와 정신을 좀먹고 있었다. K는 <아아>하고 탄식하며 힘없이 고개를 휘저었다. 그의 영혼은 세상을 살아가기에는 너무도 예민했다. K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는 알고서 살아가는 것이었다. 이 더운 계절, 그는 매일을 그렇게도 고통스러워하면서 살아간다. 마침내 K는 어느 지저분한 골목 구석에 쓰러지고 말았다. 아직도 정신은 계속해서 어딘가를 향해 달음박질하고 싶어 안달이었지만 이제 K에게는 그럴 힘이 없었다. 그는 불만족하면서 쓰러졌다. 울퉁불퉁한 돌바닥이 K의 엉덩이에 배겨왔다. 그는 등 뒤에 벽을 두고 기대어 앉아있었는데 곧 상체마저 옆으로 넘어지며 누워버렸다. 땅에서는 돌멩이와 물의 냄새가 났다. K는 무표정한 채로 땅에 누워 초점 없는 눈을 껌뻑였다. 그는 아무런 생각도 하고 있지 않았다. 어떤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는 그저 불만족과 슬픔을 막연하게 느끼면서 눈만 껌뻑거렸다. 한마디의 욕지거리도, 한 방울의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K는 이내 눈을 감아버렸다.
T는 불안하게 방 안을 서성거리고 있었다. 그녀가 잠에서 깨어난 것은 얼마 되지 않은 일일이었다. 그녀는 밤이 깊어서야 드디어 잠에서 깬 것이다. 창문을 통해 어둠과 뒤섞인 도시의 불빛이 방 안으로 기어들어오고 있었다. 달빛은 보이지 않았다. 먹구름이 하늘을 가리고 있는 것이었다. 여하간 T는 잠에서 깨었을 때, 무엇인가가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K의 부재였다. 지금까지 K는 해가 지는 시간이면 늘 집 안에 있었다. 그는 자신의 매트리스 위에 앉아서 반쯤 감긴 눈으로 창밖의 노을을 내다보거나, 공허한 눈동자로 T를 스쳐보곤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미 밤이 깊은지 오래 되었는데도 K는 돌아오지 않은 것이었다. T는 불안한 기분이 되어 현관 주변을 서성거렸다. 그녀는 자신이 왜 이토록 불안한 감정에 빠져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다만 그녀는 자신이 이 밤에, 달도 별도 뜨지 않은 묵직한 심야에, 자신의 아기를 죽여준 남자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무척이나 마음에 걸렸다. 생각해보면 그녀는 매일 저녁마다 빵을 사들고 옥탑방으로 돌아오는 K를 보며 일종의 안도감 같은 것을 느끼고 있었던 것도 같았다. T는 자신이 임신을 하기에는 너무나도 어렸던 시절을 K와의 동거생활에서 어슴푸레하게나마 발견했던 것이다. K가 특이한 사람이라고 T는 생각하였다. 그는 결코 T에게 무언가를 캐묻는 일이 없었다. K는 오로지 T의 침묵을 긍정하고, 자신 또한 침묵으로 일관하면서 그녀가 그녀 좋을 대로 하도록 내버려두었다. 그는 임신에 대해서도, 자기 손으로 죽여야만 했던 아기에 대해서도, T가 왜 아무 말 없이 그의 집에 눌러앉아 살기로 결정했는지도 묻지 않았다. T가 말하지 않으면, 그것으로 된 것이었다. K는 거의 무관심이라고 불러도 좋을만한 태도로 T에게 그 어떠한 영향력도 끼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러한 태도는 T에게 굉장히 신선한 것이었다. 그녀가 알기로는, 모든 남자들은 여자를 자신의 조각물로 만들지 못해 안달이 난 사람뿐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K는 T에게 그 무엇도 요구하지 않았고 또 그녀에 대하여 알려고 애쓰지도 않았다. 그것은 T에게 있어 완전한 긍정이나 다름없게 느껴졌다. 그녀는 그 점이 감동적이라고 생각했다. T가 온종일 하는 일이라고는 침묵하는 것과 잠을 자는 것밖에 없었지만, K는 점차 확실하게 그녀의 생활 속 일부로 자리 잡아 왔던 것이다.
아무튼 T에게 있어 K의 존재란 그런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 K를 그녀는 잃어버린 것이다. T는 무턱대고 겁부터 집어먹었다. 또 주님의 장난질이다! 그런 것이 틀림없다. T는 산만한 발걸음으로 방 안을 헤매며 그렇게 생각했다. 그녀의 신은 늘 그것이 마치 취미라도 되는 듯이, T가 절망하도록 하거나 무언가를 상실하게 만들곤 했던 것이다. 한두 번 있는 일이 아니었으니 그녀는 무슨 사건만 생기면 버릇처럼 신의 이름을 공포와 함께 부르곤 했다. 아무래도 신은 T를 훼손하고 절망적인 구렁텅이 속으로 밀어 넣는 짓에 재미를 붙인 것 같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늘 그랬던 것이다. T는 이미 잃어버리고 빼앗긴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생각이 거기까지 이르자 T의 가슴은 답답하게 죄어오고 눈에서는 금방이라도 눈물이 흘러나올 것 같았다. 그녀는 조급해진 마음으로 손톱을 물어뜯으며 발을 동동 구를 뿐이었다.
T는 혼잡한 머릿속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필사적으로 생각했다. 그저 앉아서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럴 수 있을 만큼 차분하다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렇다면 직접 찾아 나서는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것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T는 그렇게 쉽게 문을 박차고 나가지 못하고 있었다. 맡길 수 있는 모든 것을 K에게 맡겨버리고 인형처럼 살아온 그 짧은 기간 새에 그녀의 마음에는 두려움이 피어버린 것이다. 저 바깥세상이란! K가 만들어준 울타리 속에서 T는 굳이 바깥으로 나갈 필요가 없었다. 그녀는 살 필요조차 없었다. 그래, 그것이 K가 해준 일이었다. T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었다. 살기위해 발버둥치거나 사방팔방에서 화살처럼 쏟아져 내리는 고통들 사이에서 이를 악물고 견디지 않아도 되었다. K는 T에게 햇살로 된 정신의 마비를 제공했고 한계 없이 나태할 공간을 주었다. 그렇다. 그녀는 생각했다. K는 T를 그녀의 신으로부터 빼돌려준 것이었다. 그런데 이제 T는 K를 잃어버리고 심지어 자신의 발로 현관문 밖으로 나서야만 했다. 그녀의 눈에는 창문 밖에 드리운 어둠 속에 온갖 위협과 날을 세운 악의들이 우글우글하게 도사리고 있는 것처럼만 보였다. T는 신경질 가득한 목소리로 째지듯이 외치고 싶었다. 도대체 내게 뭘 바라는 것이냐고. 그녀는 발전도 진보도 변화도 다 필요 없었다. 그녀는 다만 쉬고 싶었다. 자신의 그늘진 눈을 감고 언제까지고 쉬고 싶었다. 그러나 도무지 내버려두지를 않는 것이었다. 그녀의 신이, 세상이, 온갖 조건들이 말이다.
경계선 한복판에 내던져진 시점에서 이미 고통은 찾아온 셈이다. T는 이제 울어야할지 화내야할지 곤혹스러운 기분으로 현관 앞에 서있었다. 다시 바깥세상으로 발을 들이는 것은 죽기보다 두려웠다. 죽음? 그래, 차라리 죽음이 더 나았다. 그것이 참으로 종언이라는 확신만 있었다면 이미 오래전에 흔쾌한 마음으로 죽었을 것이다.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목을 매달고 건물 꼭대기에서 뛰어내렸을 것이다. 그러나 언제나, 무슨 일에나 그녀의 신이 능청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자리 잡고 있었다. 그래서 죽음도 믿을 수 없었다. 그것도 신의 악의 가득한 함정이 아니리라고 누가 확언할 수 있으랴? 정말이지 T는 어쩔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하여간 그녀는 이제 선택을 해야 했다. 아니, 선택을 해야만 하도록 강제당하고 있었다. 비참. 그러한 한마디의 단어가 그녀의 가슴 속을 가득 메웠다. T는 손을 내뻗어 철제 현관문을 열어젖혔다.
까맣게 물든 하늘에서는 이따금 철판이 우그러질 때나 날법한 소음이 나직하게 울려 퍼지곤 했다. 비가 오려는 것이었다. 중량감이 느껴지는 먹구름들은 곧 쏟아져 내릴 듯이 머리 위에서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T는 겁먹은 발걸음으로 한 발짝 한 발짝 어두운 거리 위를 걷고 있었다. 어디로 가야할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오로지 걷는 수밖에는 없는 것이었다. 도시를 전부 이 잡듯이 뒤져서라도 K를 찾아내야 했다. 그런데 그 뒤에는 어쩔 것인가? 그것도 알 수 없었다. 그래도 T는 계속 발걸음을 옮기는 수밖에 없었다.
T가 한참을 걷고 있자 새까만 하늘에서 천둥소리가 몇 번 나더니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비가 오는가 하고 생각할 틈도 없이 날씨는 순식간에 폭우의 기세로 변했다. 마치 누군가가 하늘 위에서 양동이로 물을 쏟아 붓는 것처럼 비는 거세게 내렸다. T는 눈 깜짝할 새에 머리고 몸이고 할 것 없이 흠뻑 젖어버렸다. 여름인데도 오한이 들고 살점이 떨어져나갈 듯이 추웠다. 차갑게 식은 피부를 빗방울이 때려댈 때마다 망치로 얻어맞는 것처럼 통증이 느껴졌다. 그런데도 T는 발을 땔 적마다 철벅거리는 물소리를 내면서 계속 걸었다. 땅과 건물 위에 쏟아져 내리는 빗소리 때문에 다른 소리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고 어둠과 뒤섞여 내리는 비가 시야를 답답하게 틀어막고 있었다. 비의 장막 너머로 가로등의 노란 불빛만이 아득하게 눈에 비쳤는데, 그마저도 곧 사라질 듯 불안하게 흔들렸다. T는 이제 방향감각마저 잃고 말았다. 그녀는 자신이 어디로 걷고 있는 것인지도 알 수가 없었다. 시각과 청각이 전부 차단당해버린 것이었다. 사방이 까맣게 막혀, 비와 밤으로 된 입방체의 상자 속에 갇혀서 걷는 것 같았다. 이제 T의 걸음은 목적하는 곳조차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K를 찾아낸다는 것은 그야말로 드넓은 사막에서 한 알의 조약돌을 찾는 것이나 다름없는 짓이었다. 물소리만이 가득한 밤거리에는 인적도 없었다. T는 혼자서 고개를 푹 숙인 채로 땅만 보며 걸었다. 그녀의 볼과 턱에서는 끊임없이 차가운 물줄기가 흘렀다. 가끔 가로등 밑을 걸을 때면 도로 위에서 마구 튀어대는 노란 빛살을 볼 수 있었다. 땅바닥에는 꽤 두께가 있는 수면이 형성되어 있었다. 폭우로 거리의 골목골목마다 작은 하천들이 생겨난 것이었다. 그것들은 T의 발치에서 하얀 물살을 일으키며 마구 흘러넘쳤다. T는 자신이 도시규모의 거대한 소용돌이 속에 잠겨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 그래도 그녀는 빗줄기 사이로 보이는 저 길모퉁이를 아까도 본 것 같았던 것이다. 거리 곳곳을 핥으며 도시를 휘감는 물줄기와 빗살에 이끌려 T는 계속 같은 자리를 맴도는 기분이었다. 흙탕물과 역류하는 하수도의 오물이 그녀의 발길을 잡아끌며 점점 더 오리무중의 골목으로 향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절망하고 있었다. 이제 그녀의 머릿속에는 K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도 없어진지 오래였다. 그래도 T는 계속 걷는 것이었다.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게 뭐란 말인가? 이것이 삶의 본모습이다. T는 빗물에 흠뻑 젖은 정신으로 자포자기해서 그렇게 생각했다. K는 어디에 있을까? 그리고 나는 왜 그를 찾아 헤매고 있는가? 비오는 여름밤의 습기 찬 추위 때문인지 몹시 혼미해진 머리로 T는 방황했다. 세찬 물살이 그녀의 맨발을 훑으며 더 낮은 지역으로 쓸려 내려가고 있었다.
그랬기에 길거리에 쓰러져있는 K를 발견했을 때 누구보다 놀란 것은 다름 아닌 바로 T 자신이었다. 이것이 최초의 기적이로구나. 그녀는 놀라서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내어 말했다. K는 빗물이 흐르는 콘크리트 바닥에 한쪽 볼을 묻고 누워있었다. 지저분한 물결이 하얀 거품을 일으키며 그의 반신을 계속해서 씻어내고 있었다. 빗물은 반쯤 벌려진 K의 입속으로 소용돌이치며 드나들고 있기도 했다. 그는 옆으로 쓰러진 탓에 간신히 익사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계속되는 폭우로 포장도로 위에 형성된 하천의 수위가 점점 높아지고 있었기 때문에 언제 K의 콧구멍 속으로 빗물이 내리 닥칠지 모르는 일이었다. T는 어둠과 물의 홍수 속에서 불안한 얼굴로 K를 향해 급히 달려왔다. 그녀는 차갑게 식은 손으로 마찬가지로 파랗게 얼어붙은 K의 얼굴을 받쳐 들었다. 빗물로 번질거리는 그의 얼굴은 오랫동안 물속에 잠겨있던 탓으로 당장이라도 뼈에서 살점이 떨어져나갈 듯 냉랭했다. 그 꼴이 되도록 깨어나지 않은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T가 보기에 K는 가늘게 눈을 뜨고 있는 듯도 싶었으나 실제 그는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았다. K의 심장이 있는 곳은 벌써 돌처럼 단단하게 얼어붙어 있었다. T는 바닥에 주저앉아 그의 상체를 안아들었다. K의 몸과 옷이 머금고 있던 빗물들이 일제히 T에게로 흘려내려 스며들어왔다. 그녀는 힘없는, 그러나 추위 때문에 단단하게 오그라든 K의 몸이 무엇인가를 거의 완전히 포기해버렸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T는 조급한 마음이 들었다. 깜깜한 밤, 어둠 속에서 비는 계속해서 후둑후둑 떨어지는데 그들은 완전히 격리되어 있었다. 마침내 T는 정신없이 K를 껴안았다. 차디찬 살들이 맞부딪히고 부대꼈다.
「뛰어라, 뛰어라, 박동해라. 다시 한 번 한여름 폭염처럼 울려 퍼져라.」
그녀가 중얼거렸다. 세게 휘둘러 친 징처럼, 새빨갛게 달궈진 철판처럼 울려라. 그대의 심장은 항상 미치광이처럼 펄떡거리지 않았는가? 늘 광증으로 가득하여 주체할 수 없이 사방으로 내달리지 않았는가 말이다. 그런데 지금 K의 가슴은 너무도 딱딱하게 잠들어 있었다. 그는 죽었는가? 그것은 아니다. 그러나 K의 생명은 틀림없이 좌절해있었다. T는 그저 하릴없이 그를 안고 있는 수밖에 없었다. K의 가슴 속에 매듭지어진 돌로 된 밧줄이 풀릴 때까지 말이다.
어느새 빗발이 약해지고 있었다. 여름의 소나기가 그러하듯 갑자기 시작된 폭우는 기세를 잃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이제 하늘에서 내리는 것은 엷은 안개처럼 미세한 빗방울뿐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포도 위에는 급류가 휘몰아치고 있었고, 또 혼란스러운 물소리가 사방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아직 밤이었다. 비 내린 후의 구름 때문에 하늘에는 별도 보이지 않았다.
「무얼 하고 있어?」
그 와중에 가느다란,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미약한 목소리가 피어올랐다. K의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를 들은 T는 잠에서 깨듯 퍼뜩 고개를 쳐들고 감탄이 담긴 눈빛으로 K의 두 눈을 쳐다보았다. K는 여전히 T의 두 팔 안에 안겨 있었고 몸에 힘이 없었다. 그러나 그의 가슴은 다시 박동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나는 당신이 죽는 줄 알았어요.」
T의 말에 K는 다소 느린 템포로 웃더니 읊조리듯이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미치광이의 장점은 죽지 않는다는 것이지.」
그리고 그들은 침묵한 채로 가만히 있었다. 가랑비가 그들의 옷소매를 계속해서 적셨다. 흠뻑 젖어서 무겁게 흘러내려있는 K의 머리칼을 문뜩 T가 한손으로 쓸어 넘겼다.
「우리, 이야기를 해야겠군.」
K가 침묵을 깨며 다시 입을 열었다. 「당신 체온이 느껴지거든.」
그러면서 그는 T의 눈동자를 보았다. 깊은 좌절과 절망적인 애정이 끊임없이 흘러나오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K의 가슴 속에서 애잔한 감정이 솟구쳐 올랐다. 결국에는 파멸하고 말 것이다. 그는 그녀가 무언가를 착각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줘야만 했다. 그러나 K의 표정은 아직 굳건하고 미동도 하지 않았다. 어디서부터 시작할까. 이윽고 그는 입술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중년남자가 있어.」
「네?」
「중년남자. 당신은 보지 못했던가? 내 친척이야. 내게 집을 빌려준 사람. 좋은 사람이지. 친절한 사람이야. 친척이라는 이유만으로 돈 한 푼 없는 내게 집을 주었거든.」
T는 K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 것인지 짐작할 수 없었지만 조용히 듣고 있었다. 그들은 여전히 땅바닥에 주저앉아 있었고, 그 위를 흐르는 물살 덕분에 발과 무릎 따위가 시렸다. 그 때문인지 K는 사이사이 나직한 기침을 내뱉으면서 말하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그 남자에게 거짓말을 했어. 그가 내게 어머니에 대해 물어봤는데, 거짓말을 했지. 겁이 나서 그랬을까? 나도 잘 모르겠어. 당시에는 무척 담담하게 말했거든. 사실, 내가 한 말만 두고 보자면 거짓말은 아니었지. 다만 나는 가장 중요한 사실을 숨긴 채로 말했고, 그는 그게 무엇인지 상상조차 하지 못했겠지. 그러니까 거짓말을 한거나 다름없는 거야.」
「당신 어머니가 어떻게 되었는데요?」
곧이어 K가 몇 번인가 입술을 뻐끔거리다가 마침내 내뱉었다.
「내가 죽였어.」
두 사람은 입을 다물었다. 적막 속에서 철썩거리는 물소리만 흘렀다. 그리고 이번에 침묵을 깬 것은 T 쪽이었다.
「왜요?」
그녀의 질문에 K는 약간의 간격을 두고 대답했다. 어떻게 대답해야할지 고민하다가 억지로 말을 내뱉는 어조였다.
「그때도 동네 사람들은 나를 미치광이라고 불렀지. 무슨 짓을 할지 알 수 없는 놈이라고.」
「어머니를 증오했나요?」
「사랑했던 만큼이나.」
「어떻게 죽였죠?」
「목을 졸라 죽였지. 당신 아이를 죽였을 때처럼. 그리고 되는대로 집안에 시체를 숨기고 도망쳤어. 무작정 도망쳤지. 그리고 이 도시에 왔어.」
K는 추위 속에서 한숨을 쉬었다. T의 눈동자는 여전히 부드러움을 품고 K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당신은 내 어머니를 닮았어. 특히 눈동자 속에 뿌리 깊게 박힌 원망의 감정이.」
「그 이야기는 처음 만났을 때도 들었어요.」
「그래. 그리고 그날 나는 당신의 아이를 죽였고.」
「왜 그랬죠?」
「기회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야. 나 자신을 목 졸라 죽일 유일한 기회. 그리고 어머니인 당신이 그것을 원하기도 했고. 그 아이는 어머니를 퍽 잘 만난 셈이지.」
말하면서 K는 바지 위로 자신의 다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거품을 일으키며 하수도 속으로 쏟아져 들어가고 또 역류해 올라오기도 하는 차가운 빗물 속에 오랫동안 잠겨있던 탓으로 그의 다리에서는 감각이 거의 느껴지지를 않았다.
「당신에게는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K가 혼잣말을 하듯이 중얼거렸다. 그의 눈은 여전히 철썩이며 휘몰아치는 거리 위의 급류에 붙박여 있었다. 그는 한 가지 생각에 빠져있었다. 그것은 K가 아이를 목 졸라 죽일 때에 그의 손끝에서 펄떡거리던 생명의 박동에 대한 것이었다. K는 그것을, 죽고 싶지 않아서 세차게 반항하는 어린아이의 생명을 온전히 감각할 수 있었다. 그 감각은 퍽 감동적이기도 하고 절망스럽기도 한 것이었다. 그것은 과연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겠는가. K는 쓸쓸한 마음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아무것도 모를 때 죽는다는 것은 축복이다. 삶에 대해서, 그리고 세상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 뒤부터는 좌절하더라도 쉬이 죽을 수가 없게 되는 것이었다. 그것은 일종의 고집 때문일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한 가지 물어볼 것이 있어요.」
T가 말했다. 「왜 나와 섹스하려고 하지 않았죠?」
K의 눈은 이제 T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는 조금 당황한 듯이 보였다.
「그런 것은 생각도 하지 못했는데.」
K는 그녀가 무엇을 바라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있었다. T는 관계와 합일이라는 환상을 보고 있었다. K는 그녀를 충족시켜줄 방법을 알지 못했다. 그 누구도 알지 못할 것이었다. 그는 T에게 해야 할 말이 있었다.
「T.」
「네?」
「당신과 나는 같은 사람이 아니야.」
K의 말이 끝나자 T의 무표정한 얼굴에 하나의 표정이 퍼져갔다. 그녀는 울음을 참듯이 웃었다.
제3부
K는 사흘 밤낮을 앓았다. 그는 심한 열과 환상 속에서 자신의 몸이 헬륨풍선처럼 부풀어 방안을 둥둥 떠다니는 것을 보았다. K는 어두운 방안을 부유하며 천장에 등을 댄 채, 하늘로 날아가지도 못하고 방 속에 갇혀 초점 없는 눈으로 옥탑방 구석의 그늘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끔씩 두통 때문에 눈을 떠서 그것이 꿈이었다는 것을 깨닫기도 했지만 그 사실을 재차 생각해볼 틈도 없이 그는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방안은 텅 비어 있었다. K에게는 그것이 이상하게 생각되었다. 방에는 K 이외에 아무도 없었다. 그는 열 때문에 부글부글 끓는 머리로 이 고독이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하려고 애썼으나 도무지 알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것은 폭우가 그친 밤 T의 어깨에 기대어 비틀거리며 옥탑방까지 부축되어 온 것이었다. 차갑게 젖은 몸을 먼지구덩이의 매트리스에 뉘이자 마자 뒤늦은 한기가 몸속을 얼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K는 어지럼증을 느끼며 흐릿한 시야로 T의 얼굴을 바라보다 맥없이 잠에 빠져든 것이었다. 다음에 눈을 떴을 때―또 천장에서 내려다보았을 때― K의 눈에 들어온 또 하나의 매트리스에는 아무도 누워있지 않았다. 그 하얀 시트 위에는 먼지와 말없는 공허만이 묵묵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창문은 내내 어두컴컴했다. K는 사지에 힘이 빠져서 일어나 앉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고개만을 틀어서 창문 밖을 내다보았는데, 하늘은 회색조였고 그 아래도 마찬가지였다. 열에 들뜬 머리로 그는 가끔 이유도 없이 소리 내서 웃었다. 웃음소리와 함께 내쉬어진 숨결이 얼굴 위로 쏟아지면 그 이상할 정도로 뜨거운 열기를 느낄 수도 있었다. 그러다가 또 잠이 들었다. 꿈속에서는 여전히 어디로도 가지 못하는 몸뚱이가 천장에 부딪히면서 부유하고 있었다. 환각과 오한, 그리고 열병으로 뒤범벅이 된 사흘 밤낮은 그렇게 흘렀다.
마침내 자연히 열이 내리고 정신을 차렸을 때 K가 처음으로 생각한 것은 몹시 목이 마르다는 것이었다. 그는 벽면에 튀어나온 수도꼭지를 틀어 흘러나오는 냉수를 냅다 들이마시고 그대로 세수까지 했다. 여전히 어지럼증이 남아있었고 뱃속에서는 깊이를 알 수 없는 공허가 느껴졌다. 목에서 위장으로 이어지는 장기가 뭉텅 잘려나가고 하얀 공백이 대신 그곳에 틀어 앉은 것 같았다. 배가 고프기도 했다. 틀림없이 그는 처참한 몰골이었다. 사흘 동안 열병을 앓는데 간병해주는 사람도 물을 떠다주는 사람도 없었고 음식이라고는 쌀 한 톨도 먹지 못했다. 살아있는 것이 용할 지경이었다. 그래도 K는 자신이 살아남았다는 것이 신기하게 여겨지지는 않았다. 그것은 정해져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생각하니 그는 조금 서글퍼졌다.
그 뒤 K는 몇 번이나 엉덩방아를 찧거나 앞으로 고꾸라지다가 드디어 두 다리로 일어서는 데에 성공했다. 걸음걸이가 꼬이고 보이는 것이 온통 뒤죽박죽이었지만 그는 밖에 나가고 싶었다. K는 현관문을 젖히고 바깥으로 나섰다.
하늘은 여전히 회색이었다. 먹구름이 잔뜩 끼어있었다. 그래도 물기 먹은 공기는 후덥지근하고 열기가 있었다. 그날 이후로, 비는 그쳤고 공기는 또 다시 여름의 뜨거운 열기로 달구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하늘에는 여전히 두터운 구름이 남아서 태양의 모습을 가리고 있었다. 답답한 더위가 온 도시를 짓누르고 있었다. 숨을 내쉬는 일도 어쩐지 하늘의 방해를 받고 있는 것 같았다. K는 하늘을 바라보며 옥상을 조금 서성거리다가 계단을 내려갔다. 먹을 것을 좀 구하고 싶었다.
그는 건물을 나오며 바지주머니를 뒤적였다. 기억으로는 잔돈이 몇 푼 남아있었을 터인데 손에 잡히는 것은 온통 축축한 실뭉치들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니 유난히 옷이 무겁게 느껴졌다. 비에 흠뻑 젖은 뒤로 제대로 말리지 않아 습기가 차있는 탓이었다. 게다가 빗물에 젖은 것을 세탁도 하지 않고 그대로 입고 있었던 덕분에 몸에서는 끔찍한 냄새가 났다. 며칠은 상한 채로 내버려둔 음식에서나 날법한 냄새였다. 자신에게서 지독한 악취가 난다는 것을 자각하자 K의 기분은 더욱 처졌다. 이대로는 길거리에서 누군가와 마주치는 것도 두려웠다. 하긴 언제는 깨끗하게 입고 다닐 수 있었느냐만, 적어도 겨울에는 옷에서 뭔가가 썩는 냄새가 날 일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건물 안에만 틀어박혀 있을 수도 없었다. 뱃속에서 계속 무언가를 먹어야만 한다고 아우성을 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돈이 한 푼도 없는데 어떻게? 도둑질이라도 하란 말인가? 그러고 보면 사흘 굶고서 담 못 넘을 놈 없다는 말도 있기는 하다. 마침 K도 딱 사흘을 굶었던 것이다. 그러나 K에게는 자기 자신을 위해 도둑질을 할 정도의 결단력이 없었다. 그렇게 필사적일만한 의지도 갖지 못하는 인간이 바로 그였던 것이다. 또한 죽는 편이 낫다 싶을 정도의 굶주림은 지금까지도 몇 번이나 겪어왔던 일 아니겠는가? 지금껏 그래왔듯이 이번에도 또 어떻게든 목숨을 부지할 수 있게 될 것이다. K는 그렇게 생각하며 그늘진 거리로 발걸음을 내딛었다.
K는 한동안을 목적 없이 걸었다. 하늘은 어두웠지만 시간은 아침이었다. 사람들이 하나둘씩 깨어나서 거리로 나오고 있었고, 건물과 점포들에 불이 밝혀졌다. K가 자주 들리던 빵집을 스쳐지나갈 때는 뜨겁게 익은 효모의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그는 재차 배가 고프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별 도리가 없는 노릇이었다. K는 그저 길을 걸었다. 축축하고 더운 공기가 젖은 길바닥 위에 눌러앉아있는 것을 촉감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문뜩 T에 대한 생각을 했다. 그녀는 어디로 갔을까? 그리고 다시 돌아오기나 할까? 기대하기 힘들 것이라고 K는 생각했다. 자신이 밀어낸 것이나 다름없었다. T는 영리한 여자니까 자신의 의도를 전부 이해했을 것이라고 K는 막연히 추측해보았다. 그렇다, 그런 종류의 여성들은 불행한 만큼 영리하다. 비록 그녀들이 자신의 영리함을 불행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에 사용하지는 못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의 이해력과 절망적인 통찰력까지 무시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런 것을 머릿속으로 중얼거리며 길을 걷는 K의 표정은 완벽하게 무표정했다. 그의 얼굴은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실제로 K의 사고는 유별나게 무감각했고, 자신의 생각이 아무 의미도 없다는 또 하나의 생각으로 덧씌워져 있었다. 그는 스스로로부터 한 발짝, 혹은 두 발짝 내지 세 발짝은 떨어져서 어쩔 수 없는 일에 대해서 은근히 아쉬워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그렇게도 무표정할 수 있는 것이었다.
길을 가다보니 한명의 노인이 보였다. 머리가 온통 하얗게 새고 얼굴에 검버섯이 핀 그 늙은이는 작고 말라빠진 개를 한 마리 안고 서있었다. 개는 자신의 체중을 온전히 노인의 팔에 맡긴 채 무관심한 시선만 멀리로 던지고 있었다. 노인은 절대로 개를 놓치지 않았다. 자신의 두 팔로 개를 들어 안고서, 그는 지나가는 사람들이나 자동차 따위를 다소 경계심이 깃든 눈빛으로 지켜보면서 이따금 눈길도 주지 않은 채 한 손을 들어 개의 머리통을 쓰다듬곤 했다. 서로 들러붙어 있는 그 두 생물을 한참동안 바라보다가 K는 발길을 돌렸다. 집으로 돌아가자는 생각이 들었다.
옥탑방으로 돌아가던 K는 건물 계단에서 담배 피우는 남자를 만났다. 그는 이번에도 계단에 걸터앉아 연초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돌바닥에 시선을 내리깔고 담배연기를 뿜고 있던 그는 인기척에 고개를 들더니 K를 발견하고 눈을 크게 뜨며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십니까! 오랜만이군요.」
K는 그의 그러한 호의적인 행동에 꽤 놀란 표정이었다. 늘 불쑥 찾아가기만 하는 입장이라서 먼저 인사를 받기는 처음이었던 것이다. 그는 얼떨떨해서 인사를 받았다.
「이제 이마는 괜찮습니까?」
「이마요?」
「네. 지난번에…… 큰 상처가 났었죠.」
「아, 그 상처 말이군요. 괜찮습니다. 이제는 전혀 신경도 안 쓰고 있어요.」
「그거 다행이로군요. 그런데, 신문 보셨습니까?」
담배 피우던 남자는 갑자기 화제를 돌리며 그렇게 말했다. 마치 처음부터 그 얘기를 하려고 말을 건 것 같았다. 신문이요? K는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러면서 그는 혹시라도 자신의 악취가 상대에게 들킬까봐 몰래 한걸음 뒷걸음질을 쳤다.
「예에. 지난번에 이 동네 공중화장실에 아기 시체가 버려져서 크게 기사가 났었는데.」
「아!」
「무서운 일이죠.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전부 미쳐버린 것 같은 시대입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K가 중얼거리듯이 대답했다.
「그런데 그 화장실에 시체가 또 하나 생겼다는군요.」
「그래요? 어떤 시체가요?」
「어느 여자가 손목을 긋고 죽어있었더랍니다. 이렇게 변기를 얼싸안고…….」
담배 피우던 남자는 말하면서 두 팔을 벌려 허공에서 무언가를 껴안는 동작을 해보였다. K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그는 그 시체가 누구의 것일지 바로 짐작할 수 있었다.
「저런.」
K가 말했다.
그 뒤로도 담배 피우던 남자는 계속해서 신문 기사나 가십 따위를 떠들어댔지만 K는 거의 듣고 있지 않았다. 그는 남모르게 약간의 정신적 마비 같은 것을 느꼈다. 생각할 것이 수도 없이 많았지만 잘 생각이 되질 않았다. <흠>하고 일부러 소리를 내보았지만 그다지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정신이 멀리 떨쳐진 듯이 사고가 둔감했다.
마침내 담배 피우던 남자는 말을 마치고 사람 좋은 얼굴로 K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아무래도 그는 지난번 K가 이자를 듬뿍 올려서 돈을 갚은 이후로 그에게 호감을 갖게 된 것 같았다. 나쁘지 않은 일이라고 K는 생각했다. 그리고서 그는 야트막하고 이상한 우울을 느끼면서 옥상으로 걸어 올라갔다.
집에 당도한 K는 자신의 매트리스 위에 올라앉아 잠시 동안 멍하니 넋을 잃고 있었다. 이제 누구의 것도 아니게 된 또 하나의 매트리스가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저것을 어떻게 처리해야하나 싶었지만 곧 그에 대해 생각하는 것도 그만 두었다.
생각해보니 K는 자신이 배가 고프다는 것을 어느 사이엔가 잊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다지 배가 고프지 않았다. 하지만 곧, 또 한 번 뱃속에서 사납게 먹을 것을 요구해댈 것이다. 지금은 잠깐의 소강상태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K는 알고 있었다. K는 조금 뒤에 층계를 내려가 담배 피우는 남자에게 돈을 약간 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그는 흔쾌히 돈을 빌려줄 것이다. 그리고 내일이나 혹은 그 다음날 쯤, 새로운 일자리를 구해봐야겠다고 K는 결심했다.
다 썼다.
4개월이 좀 넘는 시간을 들여서 A4용지 51페이지, 200자 원고지 456 매 분량의 초고 완성. 이제 다듬고 깎아내는 작업만 남았다. 제목은 아직 고민중이다. 가제를 붙여놓기는 했는데 완벽하게 마음에 들지는 않는다. 하지만 머릿속에 떠돌아다니는 다른 단어의 조합들도 마찬가지로 내용에 비하여 조잡하게만 느껴진다. 수정을 마치고 나면 공모전이나 출판사 따위를 좀 돌아다녀 보아야겠다. 이것이 내 개인의 역사에 있어서 어떤 작품이 될지 아직은 그저 불투명하기만 하다. 약간의 기대만 있을 뿐. 하기사 언제나 그랬다. 무엇이 과정이고 무엇이 결과일지 현재로서는 전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블로그에 게재하는 것은 발표 과정이 일단락 된 뒤에 생각해봐야겠다. 우선은 지금의 탈력감과 만족감을 충분히 만끽한 뒤에 말이다.
2011/3/22 완성.
1. 내가 뭘 쓰려고 했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리고 내가 뭘 써놓은 건지도 파악이 안 된다. 만약 자신의 글이 쓰던 와중에 제멋대로 살아움직이며 깽판을 놓는 것을 보고 싶지 않다면 같은 글에 6개월 이상 붙어있지 말아야만 할 것이다.
2. 언제쯤에야 스스로 만족할만한 소설을 쓸 수 있을까? 감정을 좀 더 미니멀리즘하게 깎아내야한다. 나는 아직도 너무 과도한 충동의 덩어리다. 오늘 뿐만이 아니라 내일도 만족할 수 있을 글을 쓴다는 것이 가장 어렵다.
3. 수정할 곳이 분명히 있긴 있는데 될대로 되라는 기분이 되어버려서 도무지 손을 못 대겠다. 수정을 해야할지 말아야할지 고민하면서 곤란해하고 있느니 차라리 어서 이후에 쓸 소설의 구상에 들어가는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4. 혹은 조금 더 시간이 지난 뒤에 다시 읽어보면 무언가가 보일지도 모른다.
질식
혹은 죄와 악
얼마 전 나는 관리에게 부탁하여 종이뭉치와 펜을 한 자루 얻었다. 그것은 지금 내가 쓰고 있는 이 기록을 위하여 필요한 것들이었다. 사실 지금에서야 무언가를 기록한다는 행위가 무슨 의미를 가지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지만, 그래도 내 정신이 온전히―확신하지는 못하더라도― 남아 있는 지금 나는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앞서 말한 것처럼 나의 이 수기가 어떠한 가치를 가지게 되는 일은 영원히 없을 것이다. 이곳의 공기는 너무 뜨겁고 내 마음은 비탄으로 가득하다. 또 울다 지쳐 쓰러지기 전에 본문을 시작해야 할 것이다.
탄생과 실패.
지형이 평탄하지 못하고 건물들로 둘러싸여 햇빛조차 잘 들지 않는 주택밀집지역의 반지하층에서 내 인생의 전반기를 보냈다. 이미 그때부터 나는 도무지 즐거움이라는 것을 알 수 없었던 것 같다. 내가 태어난 도시 빈민층 가정과 그 주변의 이웃들에게서 나는 인생이 얼마나 기쁘지 못하고 메마른 것이며 또 신경질적인 것인지를 배웠다. 그들은 모두 가난 속에서 허덕이며 해가 지날수록 늘어가는 온갖 고통과 부담들 아래에서 하루하루를 보낼 것을 강요당하고 있었고, 항상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주어진 책임으로 말미암아 삶을 그만둘 수도 없는 그런 상황에 처해 있었다. 그것은 마치 고문과도 같은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리고 나 또한 당연히 고문을 당하는 입장에 있었다. 나 역시 그들의 자손이었던 것이다. 우리들의 삶이란 것에서 즐거움이나 행복은 찾기 어렵기 때문에,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모든 것을 그만두거나 혹은 덜 고통스럽기 위한 길을 찾는 것뿐이다, 그러한 <법칙>이 어린 내 머릿속에는 일찍부터 들어서 있었다.
그리고 내게 그 법칙을 가르쳐준 사람들 또한 그 법칙에 의지하여 살아가고 있었다. 대다수의 어른들은 죽는 것보단 덜 고통스러워지는 것을 택했고, 그들은 그 방법으로 돈을 버는 일에만 몰두하거나 혹은 술로 정신을 마비시켰다. 알코올에 대한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나는 내 조부가 만취상태에서 넘어지는 바람에 골반 뼈가 부서져 죽는 장면과 외삼촌이 알코올 중독으로 병원에 강제입원 당하는 것을 보았고, 외조부가 가족조차 알아보지 못하는 지독한 알코올 중독자였다는 이야기를 어머니의 불행한 얼굴로부터 들었다. 구차한 변명으로밖에는 들리지 않을 테지만, 어쩌면 후에 나타나게 된 나의 알코올 의존은 내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정해져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어머니의 불행한 얼굴. 어머니는 내게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심하게 술에 취한 그가 지저분한 골목에서 넋을 놓고 앉아있는 것을 자주 볼 수 있었다는 것이나, 자신의 딸조차 알아보지 못하고 어머니에게 술값을 빌려달라고 했다는 것도 덩달아 어린 내게 말해주었다. 어째서 어머니가 그런 이야기를 나에게 들려주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잘 알 수 없다. 다만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런 일련의 비극들을 이야기하는 어머니의 표정이 더없이 담담했다는 것이다. 아니, 담담한 표정이기는 했으나 거기에는 이미 말했듯 깊은 불행이 초석처럼 깔려있었다. 그것은 주름처럼 깊이 새겨진 불행 위에 쌓아올려진 담담함이었다. 그리고 내 탄생과 삶의 근원인 그 표정은 나에게 있어 모든 가난한 이들의 표본이 되어버렸다. 가난한 이들에게는 사소한 불행에 하나하나 슬퍼할 여유가 없다. 그들에게 있어 불행과 절망이란 그야말로 일상과도 같은 것이자 존재의 핵심처럼 당연하고 필연적인 것이었기에, 인생을 짓누르는 대부분의 불행에 대한 그들의 반응이란 무뚝뚝한 얼굴과 물기조차 없는 슬픈 눈을 들어 올리는 것뿐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내 어머니의 표정이었다.
백지상태의 어린아이들이 모두 그렇듯이 나는 내 주변의 공기를 여과 없이 전부 받아들였다. 가난과 그로 말미암은 불행. 언제 덮칠지 모르는 더 큰 절망에 대한 불안으로 긴장된 하루하루. 그리고 공포. 그렇다, 공포. 공포 또한 삶 그 자체였던 것이다. 우리들의―어쩌면 나의― 생활에는 안정이라는 것이 없었다. 잦은 이사와 잦은 다툼, 잦은 경제적 실패와 잦은 히스테리. 자기 신체의 일부와도 같은 가족들에 대한 말없는 원망과 눈물. 머리 위에 짊어진 수많은 빚으로 인한 위태로운 생활. 심지어 지금의 가난조차도 안정되지 않는다는 사실이야말로 공포였으며, 그 공포는 현상에 대한 불신을 내 정신 속에 깊숙이 박아 넣었다. 지금의 생활은 유지되지 않는다. 가족 간의 관계도 유지되지 않는다. 내 건강 또한 유지되지 않는다. 언젠가 또 문제가 일어날 것이다. 큰일이 나고야 만다. 그것이 필연이다. 모든 일들은 은근슬쩍 점점 나쁜 방향으로만 흘러갈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항상 그래왔기 때문이다. 불쾌한 일이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이야말로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어린 시절의 내가 자연히 알게 된 믿음이었고 내 정신의 근간을 이루게 될 사고방식이었다.
그래서 그 시절의 내 꿈은 과학자가 되는 것이었다. 그것도 특히 무기를 만드는 과학자 말이다. 책에서 읽은 얄팍한 지식으로 만들어낸 물리학자와 병기공학자에 대한 이미지는 내 어린 시절을 완전히 휘어잡았다. 순진한 지적열정으로 원자폭탄을 만들고 <적>들의 머리 위에 그것을 떨어트린 그들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리하여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이 행성을, 할 수 있다면 이 세계를―세계라! 이때의 내게 세계란 물리적인 의미의 세계였을 것이다― 송두리째 없애버릴 폭탄을 만들고 말리라고 결심했다. 그 위대한 폭탄에 불을 붙여 가면 갈수록 심해지는 불행과 공포의 연쇄를 영원히 끊어버리는 것이다. 아마 열 살 즈음이나 혹은 열 살도 되기 전에 나는 그렇게 결심했던 것 같다. 그때까지만 해도 내게 있어서의 적(敵)은 세계라는 분명한 대상이었고, 나의 적개심은 순수했었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마치 불행한 환경 때문에 내가 어린 시절부터 세계에 대한 병적인 적개심을 갖게 되었다는 듯이 서술하고 있지만, 조금만 깊이 생각해보면 그것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나는 그저 지극히 평범한 빈민가정의 비극을 겪으며 자랐을 뿐이다. 밤이면 밤마다 이웃의 부부가 싸우며 질러대는 새된 분노의 목소리들과 사기그릇 따위가 깨지며 나는 소음, 그리고 어린아이의 신경질적인 울음소리가 울려 퍼지는 메마른 빈민촌에서 태어나 자란 이가 비단 나 뿐만은 아닌 것이다. 그런 곳에서 자랐다는 이유만으로는 항상 마음속이 원망으로만 들끓고 쾌락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인간이 되지는 않는다. 차라리 내가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사물에서 불행밖에 발견하지 못하는 끔찍한 눈을 가지고 있었고 심장에서는 피와 함께 새까만 비관이 뿜어져 나와 온몸의 혈관을 순환하는, 천성적으로 저주받은 인간이라고 하는 편이 더 합당할 것으로 생각된다.
영혼의 부품 하나가 썩어버린 채로 태어난 인간. 나 자신의 이상성을 조금씩 객관화 시킬 수 있게 된 시점부터 나는 스스로를 그렇게 느끼기 시작한 것 같다. 내 첫사랑의 대상인 소녀가 차에 치여 산산조각 나는 장면을 상상하며 발기했던 일, 가족들의 귀가가 늦어지는 날 그들이 전부 길거리에서 죽어버렸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절반은 기쁨으로, 절반은 불안으로 흥분된 채 홀로 거실을 뱅뱅 돌던 일,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에 가면 괴로워하며 구토하던 일, 낯모르는 행인들의 목을 잡아 비틀고 돌 벽에 그 얼굴들을 짓이기고 싶어도 그럴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서글피 울던 일, 칼과 가위로 내 배꼽을 도려내려던 일, 매일 밤 내 갈비뼈를 잡아 열어젖히면 새빨간 금속덩어리―아마도 어떤 종류의 독극물에 물들여진 것으로 보이는―들이 허파 속에서부터 쏟아져 내리는 꿈을 꾸던 일, 기타 등등, 기타 등등. 내 비일반적인 면모들을, 혹은 선험적인 괴물성을 자각하면서 나는 청소년이 되었다. 내 가슴 속에 죄책감과 불안을 차곡차곡 쌓아 올리며 나는 성장했다. 그리고 나는 이 모든 것이 적의에 기인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어머니의 불행한 얼굴. 그리고 내가 마주친 모든 이들의 얼굴에 덧씌워져있는 기만어린 표정들. 나는 그것들을 전부 다 증오했다. 그래서 나는 학교도 제대로 다닐 수 없었으며 마음 편히 거리를 돌아다닐 수도 없었다. 아무도 내 욕망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나는 내가 고립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고립을 자각하는 이들이 모두 그렇게 되듯 자연히 개인의 힘이 터무니없이 약하고 공허하다는 것도 깨달았다. 나에게는 이 세계는커녕 내가 속한 작은 조직체들을 파괴할 능력도 없었던 것이다. 모든 것을 깡그리 없애버리리라는 유치한 장래희망은 일보도 내딛기 전에 좌절당했다. 나는 거울을 보았다. 나는 내 얼굴마저도 증오했다.
이단자.
학창시절을 떠올려보자. 나는 학업에 그다지 열정적이지 못했다. 수업도 제대로 듣지 않았다. 신경증을 핑계로 거의 매일 조퇴와 결석을 반복했다. 사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돌이켜보면 나는 오랜 시간을 모범생으로 지내왔었던 것이다. 항상 좋은 성적을 냈으며 행실도 나쁘지 않았고, 무엇보다도 모든 일에 성실하게 임하는 척하며 모범생으로서의 입지를 다졌다. 그렇다고 해서 내 이상성이 완전히 감춰진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나는 성적이 좋고 예의가 바른 학생이었기 때문에 가끔씩 나도 모르게 새어나오는 괴상한 언행들은 교사에게나 학생에게나 좋은 의미의 개성으로만 비춰졌던 것 같다. 그러나 내가 소위 ‘멀쩡한 사람’처럼 보이기 위하여 모범생을 연기했던 것은 아니다. 아마도 그것은 타성과 공포 때문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나는 좋은 성적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만약 내가 학업에서 성공적인 모습을 보이지 못한다면 어머니는 나를 자신의 그 원망 깊은 눈으로 바라볼 것인데, 그것은 정말이지 두려운 일이었던 것이다. 어머니는 거의 모든 가난한 부모들이 그렇듯이 교육만이 자신의 아들을 가난의 연쇄로부터 구해줄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언제나 억지로 화를 참는 것처럼 보이는 그녀의 눈빛은 늘 나에게 스스로에 대한 경멸감을 가지게 만들었다. 내가 완벽하지 않다는 사실은 어머니 앞에서는―설령 그녀가 아무 말도 하지 않더라도 죄악이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그러한 그녀의 무자비한 시선 앞에 내던져지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분명 그 시절의 나는 학업에 성실히 임하는 것밖에는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삶의 방식이 없다고 생각했었던 것이다!― 나는 좋은 성적을 받기 위해 노력했으며 매일같이 학교에 나가 수업을 들었다. 그것은 내가 바꿀 수 없는 상황에 대한 굴종이자 어머니에 대한 나의 수동적인 애증의 잔재였다. 그러나 나는 세상을 지워버릴 폭탄을 만들 수가 없다. 나는 어머니의 눈에서 원망을 지워버릴 수 없다. 인생은 죽거나 불행해지거나 둘 중 하나. 모든 것은 점점 나쁜 방향으로만 흐른다. 나이를 먹을수록 절망과 수치는 늘어나기만 할 것이다. 어머니의 꽉 다문 입술을 닮아가며 나도 나이를 먹을 것이다. 나는 포기를 알게 되었다. 가장 간결한 형태의 허무주의가 내 내면에서 파도치기 시작한 것이다. 기껏 좋은 성적을 받아 어머니의 시선으로부터 잠시나마 안전해진다고 해봤자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아니 오히려 삶에게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인가. 내 부모도 열심히 살았다. 그들은 불행한 태생 속에서 정말로 열심히 살았다. 그들은 최선을 다해 살며 서로를 만나 결혼하고, 그리고 나를 낳았다. 아마도 그들은 열심히 살아서 나쁠 것이 없다고 생각해 그렇게도 오랫동안 살아왔거나, 혹은 별 생각 없이 관성에 의하여 살아왔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간에, 내가 태어났다. 어머니의 눈은 여전히 육중한 감정들로 말미암아 도저히 마주볼 수 없다. 그러면 나는 어쩔 것인가? 학업에 매진하고, 먹고 살기 위해 일하다가 누군가를 만나 결혼하고 생식한 뒤에 늙어갈 것인가? 아니다. 고작 그런 기대를 위해 수십 년이나 불행을 씹어 삼켜가며 살아갈 수는 없다. 누군가는 내게 인생에는 그래도 살아갈만한 가치가 있으며 행복이나 즐거움 또한 삶에서 찾을 수 있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내게 있어 그러한 주장들은 단 한 번도 꿈을 꿔본 적이 없는 이에게 꿈에 대해 설명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느껴졌다. 나는 그러한 근거 없고 막막하기만 한 희망들을 조금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사실 이제 와서 감상적인 어조로 내가 비극적일 수밖에 없었다고 역설하는 것은 그리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이 글이 보다 객관적인 수기가 되기를 원한다―내가 ‘객관’이라는 것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던 기회가 일생 단 한 번도 없었다 하더라도 말이다―. 어쨌든, 나는 지독한 비관주의로 정신을 잠그고 삶에서 또 다른 가능성을 발견하려는 노력마저도 하지 않게 된 것이었다. 나도 쾌락을 피상적으로나마 알고 있기는 하다. 그것은 상쾌함도 없고 만족감도 주지 않지만 자연히 마음이 기울어지는 것이었다. 그것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고 본성이었다. ‘폭탄’을 만들 수도 없었고 긍정을 믿을 수도 없었으며 아이를 낳을 수도 없었던 나는 이미 말했듯 점점 학업과는 거리가 멀어졌다. 나는 어머니의 눈을 감기는 대신 그녀와 마주보지 않는 것을 선택했다.
나는 친구도 만들지 못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내가 학교에서 주로 고립되어있거나 혹은 적대적인 관계들만을 만들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나는 내가 만날 수 있었던 모든 종류의 집단에게서 미지근한 호의를 받았다. 나를 미워하는 사람은 쉽게 생기지 않았다. 그것은 아마도 내가 그들을 미워하는 것을 그들에게 들키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 나는 그들을 미워했다. 왜냐하면 내가 그들을 미워하는 것을 그들이 알아차려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혹은 알아차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내가 그저 조용하고 조금 별난 구석이 있으며 잘 웃지는 않지만 기본적으로 친절한 성향을 가진 괜찮은 친구라고 생각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들은 완전히 잘못 알고 있었다. 그들 앞에서의 내 침묵과 친절과 조심스런 언행들은 순전히 공포심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공포심! 나는 도저히 그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들을 두려워하고 또 동시에 미워했다. 그들의 유동적인 감정과 쉽게 변하는 표정, 무리지어 다니는 습성과 쾌락에 대한 순진무구한 열망 따위에 대해 전부 그런 감정을 느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나는 만약 그들이 조금만 더 예리한 직관과 타인에 대한 의심어린 눈초리, 또 진지한 관찰력을 가지고 있다면 순식간에 내 이상성이 발각당해 내가 혐오스러운 정신의 소유자라는 것이 그들 사이에 소문처럼 퍼지고, 곧 나는 다시는 살아갈 수 없을 만큼 처참하게 짓밟혀 사라지리라고 생각했다. 항상 말이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 그들 사이에서 불안을 느끼고 두려워했다. 그리고 이미 말했듯이, 불량품인 채로 출하된 나의 영혼을 그들에게 들킨 일이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나는 또한 한없이 그들을 증오했다. 나의 친절하고 조심스러운 얼굴로.
차라리 그들이 나에게 돌을 던졌더라면! 나는 그들 앞에서 굳이 연기를 하지도 않았다. 할 수만 있다면 내 기분 나쁜 진실과 거무죽죽한 욕망들을 그들 눈앞에 내보이고 혐오의 대상으로 사형당하고 싶었다. 그러나 나에게는 용기도 행동력도 없었다. 나는 활동하지 않았다. 내가 능동적으로 하는 일이라고는 곰팡이 냄새가 나는 좁고 어두운 집에 틀어박혀 가끔 웃거나 혹은 가끔 우는 것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마땅히 내가 언제까지고 그런 삶만을 살아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출구가 없는 한계상황에 걸려들었으니 나는 곰팡이의 운명에 종속되어버렸다고 말이다.
그러나 나의 구역질나는 유전자에는 이미 오래전부터 알코올과 약물에 대한 열망이 새겨져있었던 것이다.
의존과 중독.
언제부터인가 나는 슬그머니 알코올로 시간을 지우기 시작했다. 나는 술에 심하게 취하면 으레 울곤 했다. 술에 취하지 않았을 때에는 수 시간 내지는 수일에 걸쳐 진행되며 나를 괴롭혔을 것들이 알코올에 반응하면 무질서하게 뒤섞인 하나의 커다란 덩어리로 뭉쳐진 채 내게로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동시에 시간을 압축해버리기도 했다. 나는 오랜 시간동안 씹어 삼켜야만 했을 감정들을 한 번에 분출하며 시간 역시 같은 비율로 지나쳐버리는 것이었다. 나는 아직 성인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은 별 문제가 되지 않았고, 오히려 내가 사람을 사귀는 데에 도움을 주기까지 했다. 알코올이 혈관을 타고 온몸을 돌기 시작하면 나는 평소보다 덜한 겁쟁이가 될 수 있었다. 한층 대담해졌으며, 그 대담성으로 인하여 인간에 대한 공포도 무책임한 퇴폐적 감각에 가려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이었다. 나에게는 의무적으로 만나야할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걸핏하면 그들과 함께 술을 마셨다. 울지는 않을 정도로. 그러나 두려움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게 될 정도로 마셨다. 그들은 나를 친구라고 불렀다. 나의 괴이하고 정직한 말들이 술기운 탓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기만, 기만이라! 그때서야 나는 기만이니 정직이니 하는 것들이 나의 의도와는 아무런 상관관계도 없이 벌어지는 현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수도 없이 많은 주체들로 이루어진 이 세상―인간군집―에서는 그 어떤 개인의 의지도 손상 없이는 표출되지 않는 것이다. 소위 예술가나 정신병자라고 불리우는 결벽증 걸린 정신의 소유자들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혹은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신의 양심을 세계 전체에 적용하려고 날뛰지만 결국에는 모조리 실패하여 불행하게 죽어버린다. 아무도 양심과 정직을 요구하지 않았는데도 그들은 양심에 짓눌려 산산조각이 나고 마는 것이다. 나도 그들과 닮은 구석이 있었다. 아니 그렇다기보다는 닮아 ‘있었다.’ 만일 내가 계속해서 그들과 닮을 것이었다면 나는 혼자 방구석에 앉아 고독하고 망가져가는 예술가처럼 술을 들이부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두려움을 묻어버린 채로 나를 이해하지 못하고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인간들의 한가운데로 뛰어들었고, 알코올에 절여진 채 소통의 진실을 보았다. 소통이란 실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환각이다.
나는 이러한 생각을 하였다. 누가 나에게 ‘소통’이라는 개념을 가르쳤을까? 나는 내 어머니의 자궁 속에서 기어 나왔다. 누군가가 나에게 소통이라는 것을 가르쳤다.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 내게는 소통이라는 것을 이해하고 느낀 기억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조차 알 수 없다.
소통[疏通]. 명사. 막히지 아니하고 잘 통함. 혹은 뜻이 서로 통하여 오해가 없음.
국어사전에는 그렇게 쓰여 있었다. 뜻이 서로 통하여 오해가 없음. 그렇다면 소통의 단수는 정직이다. 그런데 나는 정직이라는 것이 성립되지 않는 개념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알코올로 감각을 죽이고 사람과 말[言]들의 한복판에서, 아무도 정직이니 기만이니 하는 것은 신경 쓰지 않고, 모두들 관계의 표면에서만 쾌감을 좇는 것을 나는 보았다. 단언컨대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정직에 목이 졸려 질식해가는 사람들은 타인과 대화를 나누지 않는다. 그렇다면 내게 ‘소통’이라는 두 글자를 가르친 것은 누굴까? 누가 사람들은 서로 소통하고 공감할 수 있으며 이해할 수 있다고 말했을까. 나는 알았다. 그런 가상의 것을 마치 실존하는 것인 마냥 내게 가르친 건 바로 내 불행을 바라는 어떤 의도였던 것이다.
생각해보라. 소통의 근거는 모든 인간이 동종이라는 전제에 세워져있다. 단 하나의 설계도면으로 건축된 같은 종족들이니 서로를 이해할 수 있고 공감할 수 있으리라는 전제 말이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내게 죄책감과 불행한 태생을 박아 넣은 종교적 기만이었다. 이 사회에서 아무런 의심도 받지 않고 당연시되는 그 전제들은 나를 죄인으로 만들어놓았다. 불량품이라는 것은 완성품이 있을 때에만 성립되는 개념인 것이다. 누군가가 나에게, 이 사회에 살고 있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완성품이기 때문에 서로를 이해하고 정답게 지낼 수 있으며 소통 또한 가능하다고 말했던 것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그는 내가 소녀의 처참한 죽음에 정욕하고 어느 누구의 호의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없으며 음산한 적의로만 가득한 인간이 되리라는 것을 미리부터 알고 있었던 것이리라. 그는―그것은― 내가 나 자신에 대해서 죄책감과 이질감을 느끼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것은 사회일 수도 있고 도덕일 수도 있으며 부모일 수도 있다. 그리고 심지어는 수천 년간 유전자 속에 쌓여온 사회성일지도 모를 일이다.
소통이란 없다. 그것은 환각이다. 그것은 오직 내가 그들의 설계도면에 맞추어 만들어지지 않았다고 넌지시 알려주는 것만을 위해서 짜여 진 가상의 개념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엇이 변하겠는가. 나는 여전히 친절하고 겁에 질려있었다. 여전히 사람들은 언어의 껍질 위에서 뛰놀며 탐욕적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그 사실을 알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어떤 사람들은 전혀 눈치도 못 채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하여간에 그들은 계속해서 대화를 나누었다. 사람과 개인들의 언어를 이해할 수 있든 없든, 코앞에서 36.9도의 열기를 내뿜고 있는 누군가가 자신과 같은 인간이라는 것을 조금이라도 더 확신하고 싶어서 말이다. 자기 자신과 그 주변을 뒤덮은 이해할 수 없는 사물들로만 가득한, 황량한 세상에서 외롭지 않다고 느끼기 위하여. 그러나 그것도 결국에는 눈속임에 지나지 않는다. 사실 마지막 순간까지 그 눈속임에 속아 넘어가는 사람들의 수가 적은 것은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이 어느 순간 자신이 살과 뼈로 된 벽 안에 갇혀있으며 단 한 번도 아내의 살갗을 만져보거나 친구의 슬픔에 공감해본 일이 없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닫게 된다. 하지만 천만다행으로도 그들은 곧 자신이 본 날카롭고 새하얗게 빛나는 진실을 잊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망각이야말로 생존에 필수적인 특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처음>부터 그것을 보아왔고, 잊어버리지도 못하도록 모든 인간과 사물들이 내게 그 진실을 강요하고 각인시켜왔다. 나는 외롭다. 그래서 나는 항상 구역질이 날 때까지 끊임없이 술을 마시고 뼈와 살에 갇힌 허상들 사이로 기어들어갔던 것이다.
분류작업.
어느 날 나는 자살을 시도했다. 어머니의 장례식이 끝난 다음날이었다. 그때 즈음엔 이미 단 하루도 술에 절어있지 않은 날이 없는 생활을 영위 중이었으나 죽음을 결정할 때만은 정말이지 그 누구보다 명징한 정신이었다고 자신할 수 있다. 어머니의 죽음에 어떤 유별난 감상이나 자극을 받았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당신의 죽음으로 인해 어머니는 더 이상 불행한 얼굴을 갖고서 살아가지 않아도 되었고, 그로 말미암아 당연한 사실이 더욱 당연하고 명백해진 것이었다. 나는 죽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굉장히 이성적인 귀결이었다. 보다 덜 고통스러워지는 것. 도대체 누가 나에게 비겁을 말하겠는가? 나는 그런 것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살아있는 사람에게 물어볼 수 있는 단 하나의 가치 있는 질문은 어째서 자살하지 않느냐는 것이고, 이미 죽은 자에게는 아무것도 질문할 수 없다.
어머니의 서랍 안에는 이제는 유산이 된 진통제와 수면제 따위가 들어있었다. 그녀는 아주 오랫동안이나 불면증과 편두통으로 고생해왔었던 것이다―어머니는 해방되었다!―. 나는 주저하지 않고 그것들을 사용했다.
정신을 차리자 병원침대의 하얀 시트 위였다. 복용량이 부족했던 것이다. 내 곁에는 바로 며칠 전에 아내를 잃은 늙은 남자가 앉아있었다. 아버지의 얼굴은 아주 끔찍했다. 세상 모든 고통과 당혹감이 아교처럼 끈적끈적하게 뒤섞여 그의 표정을 이루고 있는 것만 같았다. 흠, 이젠 아버지 차례로군. 나는 잠이 덜 깬 채 그런 생각을 하며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혀가 갈라지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입안이 쩍쩍 말라붙어있었다. 나는 무언가를 말해야만했다. 아버지의 그 비참한 얼굴에게, 하지 않으면 안 될 말이 있었다. 그것은 나의 충혈 된 심장에서 터지기 직전의 거품덩어리처럼 부풀어 오르고 있었으나, 구체적인 언어의 모양으로 형태지어지지도 않았고 게다가 내 혀는 너무 건조해져있었다. 나는 소화된 수면제의 냄새가 나는 숨들을 짧고 연속적으로 내쉬며 무언가를 말해내려고 애썼다. 나는 죽으려고 했지만 실패하였고 시간은 계속 흐른다. 누구의 동의도 얻지 않고 내일은 뻔뻔스럽게 또 한 번 찾아올 것이다.
마르고 갈라진 목소리로, 나는 아버지에게 ‘도와 달라’고 말했다.
아버지는 나를 도와주었다. 그는 내가 오래 전부터 술독에 빠져 살고 있던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아버지는 나를 병원에 집어넣었다. 나로서도 그것은 잘된 일이라고 생각되었다. 왜냐하면 그곳에서는 내가 노력해서 이루어야할 일이 단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미치광이에게는 권리가 없었고, 또 그렇기 때문에 책임 또한 없었다. 나는 아무도 내게 무언가를 요구하지 않는다면 내게는 권리가 필요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 늙은 아버지가 그들에게 계속해서 병원비를 지급하는 한 나는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나는 그곳에서 한명의 의사와 여러 명의 간호사들을 만났고, 그들에게는 ‘밖’에서 누구에게나 으레 그랬던 것처럼 친절하게 굴 필요가 없었다. 내가 하루 종일 한마디도 하지 않고 병실 구석에 앉아 움직이지 않더라도 그들은 나에게 행동을 요구하지 않았다. 나는 바깥 생활보다 병원에서의 생활이 더 마음에 들었다. 병동의 비일상적인 공기는 약간 들뜬 듯 하면서도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처럼 가라앉아 있었다. 바깥세상의 선정적이고 강렬하며 신경계를 온통 휘저어놓는 듯 자극적인 공기는 병실의 창문까지 다가오지도 못했다.
의사는 거의 일주일에서 이주일 간격으로 나를 자신의 사무실로 불렀다. 나는 그 늙은 남자에게서 그가 항상 인공적인 침착성 뒤에 숨어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안경알 너머 그의 눈에서는 서슬 퍼런 통찰력이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내가 사무실로 들어서면 그는 친절한 목소리로 자기 앞에 놓인 의자를 가리키며 앉으라고 권하곤 했다. 그 뒤부터는 내 차례인 것이다. 의사는 내가 무언가를 말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히 대화의 형식은 아니었다. 그것은 차라리 말상대를 두고 하는 혼잣말이나 다름없었다. 의사가 ‘혼잣말’의 주제가 될 만한 화두를 내놓으면 나는 그에 맞춰 끊임없이 내 얘기만을 하는 것이다. 사실 그것은 ‘바깥’에서 통용되는 대화방식보다는 훨씬 편안하고 쉬운 것이었다. 나는 내 어린 시절에 대한 이야기, 혹은 내가 온갖 사물들에게서 느끼는 감정 따위를 떠벌리며 ‘이제 이 방에서 의사만 사라져준다면 정말 완벽한 <대화>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곤 했다. 그에게 사적인 이야기들을 하는 것에 대해서는 별다른 거부감이 없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것은 다소 재미있기까지 했다. 의사는 내가 혀를 놀리는 내내 자신의 차트에 무언가를 계속해서 적고는 했던 것이다. 그는 분명 내 말과 행동들을 분석하고 정리해서 ‘나’라는 인간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하고 있다! 그것을 읽을 기회는 없었지만 나는 내가 말을 더 많이 하면 할수록 보고서의 완성도가 높아지고 있다는 것을 어림짐작으로 알 수 있었다. 자신이 심리학적으로 혹은 정신분석학적인 공식에 대입되어 정리되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현재진행형으로 느끼는 것은 꽤나 흥미로운 일이었다. 심지어 나는 가끔 사소한 거짓말로 보고서의 방향성을 조금씩 조작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악의나 목적이 있는 행위는 아니었다. 나는 단순히 흥미와 호기심으로 말미암아 의사의 보고서 위에서 건설되고 있는 ‘나’에게 특정한 요소들을 가감했던 것이다. 소재가 부족해지는 일은 없었다. 나는 아무 할 일도 없는 병동에서 십 수 명의 미치광이들과 함께 생활하는 중이었던 것이다.
하여간에 의사는 직업적 소명에 근거하여 나를 분석하고 규정짓는 데에 시간을 쏟고 있었지만 내게는 그것이 그다지 중요한 일로는 여겨지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감명을 느낀 것은 일정시간마다 간호사가 내게 물 한 컵과 함께 쥐어주는 알약 쪽이었다. 그것이 내 정신에 미치는 영향을 경험하는 것은 확실히 유물론적 감명을 받을 만한 일이었다. 작지만 위력적인 온갖 색깔의 정제들은 내 감각과 의식에 작용하여 하루의 대부분을 잠을 자는 데에만 사용하게 만들거나 우울조차 느끼지 않을 정도로 나를 둔감하게 만들었다. 매일 아침과 저녁에 배급되는 그 약들은 일단 집어삼키면 최소한 여섯 시간 정도는 내 정신과 감각을 지배했다. 모든 관념과 감정들이 평면으로 보이게 되는 느낌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하여간에 나는 약기운에 취하면 마치 카펫처럼 깔린 그 평면에 주저앉아 머릿속을 느릿느릿 기어 다니는 유쾌함과 조심스러운 혼돈들을 즐기곤 했다. 그것들은 마치 어떠한 종류의 환형동물처럼 매끄럽게 서로 뒤섞이다가 어느 순간부터인가 슬그머니, 조금씩 아래로 향하는 것이었다. 그 털 없는 짐승덩어리가 마침내 심장부근에 도달할 때 즈음이면 이미 나는 나의 하얀 침대시트 위에 너부러져있었다. 그 버러지들! 잠에서 깨어나고 나면 나는 항상 그것들이 파먹은 가슴 속의 공간을 느낄 수 있었다. 내 심장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그야말로 주먹만 한 크기의, 갉아 먹힌 공허가 남아있는 것이었다. 그 속에서는 양약(洋藥) 색깔의 거품이 인다. 마치 태어난 지 몇 분도 되지 않은, 세상의 온갖 냄새와 바람들을 생애 처음으로 느껴보는 신선한 살덩어리처럼 그 거품들은 예민하고 어리둥절해있다. 나는 그 거품을 담은 가슴속 공허의 한 구석을 손으로 움켜쥐어보면서 느릿느릿 침대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한 수면과 기상의 반복들. 그 사이에서 나는 간호사들이 내게 약을 주는 의미를 알아차렸다. 그것은 놀라울 정도로 실용적인 메커니즘이었다. 사고의 마비. 미치광이들에 대한 최선의 처방은 다름 아닌 그들의 사고를 정지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모두에게 좋은 일이었다. 길고 연속되는 수면들로 인하여 내 머릿속의 난해한 관념들은 어느새 걸쭉한 죽처럼 풀어져 아무런 지각도 일으키지 못하는 혼돈된 무정부상태를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내 안의 쾌락주의는 그것을 매우 기쁘게 받아들이고 또 취했다. 사고의 정지. 사고의 정지. 내 정신을 위협하여 막다른 골목 안으로 밀어 넣는 칼끝처럼 날카롭고 공격적인 의식(意識)들은 관념의 무정부상태 속에서 완전히 녹이 슬어버렸고, 덕분에 그것들은 더 이상 나를 위협하지 못했다. 나는 자살을 향해 끊임없이 돌진하기만 하는 사고로부터 해방된 것이다. 언제고간에 그것이 다시 날을 세우려고 하는 기미만 보이면 나는 그저 약의 힘을 빌어 잠 속으로 뛰어들기만 하면 되었다. 나는 고뇌하지 않아도 되었다. 나는 고통스럽지 않았다. 나태의 극단으로 인하여 말이다. 세계를 이루는 온갖 사물들의 표피 안쪽에 내제되어있는 적의와 부조리, 자살과 파멸을 가리키는 화살표들은 더 이상 내 눈에 보이지 않았다. 병실의 하얀 벽은 아무런 관념도 숨기고 있지 않았다. 그것은 그저 벽에 지나지 않았다. 아니, 그것은 심지어 벽조차 아니었다. 그것은 ‘벽’이라는 관념조차도 가지지 못했고, 존재도 하지 않았다. 모든 현상들은 존재성과 형태를 잃어버리고 권태롭게 녹아 흐르고 있었다. 내 의식은 이제 살아갈 수 있을 정도로 둔마되어있었다. 이렇게나 멍청하기에 사람들은 자살하지 않는 것이로구나. 나는 약기운 속에서 작은 깨달음을 얻었다.
시간은 계속 흘렀다. 나는 강제된 안정―혹은 침체― 속에서 점점 몸이 약해지는 것을 느꼈다. 약기운은 이미 근육에까지 퍼져있었다. 정신뿐만이 아니라 육체도 날이 가면 갈수록 행동력을 잃고 있었다. 병동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하루 종일 ‘보는’ 것뿐이었다. 창문을 넘어 들어온 차가운 태양 광선들이 침대 시트와 라디에이터 위에서 하얗게 부서지는 것을 보거나, 같은 병동에서 생활하고 있는 환자들의 걸음걸이나 경련처럼 흔들리는 그들의 표정을 보는 것. 그것이 내 하루일과의 전부였다. 입원초기에는 알코올에 대한 욕망 때문에 작은 사고를 저지른 일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러한 욕망도 전부 잃어버린 뒤였다. 내가 단 하나 한결같이 주시하고 있는 것은, 매일 밤 잠들고 깨어날 때마다 점점 깊어지는 가슴 속의 공허였다. 이것은 수사적인 표현이 아니다. 나는 실제로 그 텅 빈 공간 속에서 무엇인가가 당장이라도 깨질 듯이 조용하고 차갑게 진동하고 있는 것을 느꼈다. 의사에게는 그것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다. 의사와 말장난을 하는 것은 이미 오래전에 질린 참이었다. 간호사는 내게 모든 것이 점점 나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별다른 생각 없이 그녀에게 동의했다. 실제로도 나는 점점 덜 히스테릭하게 되어가고 있는 듯도 싶었다. 의사는 내가 긍정적인 과정을 진행하는 중이라고 말했다. 나는 의사에게도 간호사 때와 마찬가지로 심드렁하게 동의했다. 그리고 약 석 달 뒤, 의사는 내가 그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단 한 번도 보여준 적이 없는 기쁜 낯으로 내게 악수를 청했고 나는 퇴원했다. 병원 문 앞에서는 아버지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일까? 스스로에게 하는 질문에 나는 대답할 수가 없다. 지금까지 단 한 번이라도 그 질문에 대답할 수 있었던 적이 없었다. 나는 다시 병실의 침대 위에 누워있었다. 등과 엉덩이로 하얀 시트를 깔아뭉개면서. 울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옛날에는 툭하면 아무도 없는 곳에서 울곤 하던 내가 지금은 눈물을 흘릴 수가 없었다. 지난번에는 아버지가 앉아있던 자리에 지금은 의사가 앉아있었다. 병동에서 나와 일주일 간격으로 대화를 하던 그 의사 말이다. 안경알 너머에서 나를 쏘아보고 있는 눈은 내게 이렇게 묻는 것 같았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입니까? 나는 나도 모르게 소리를 내어 대답해버렸다. 나도 모르겠습니다. 그의 말없는 눈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나는 왠지 내 마음 깊숙한 곳에서부터 의사에 대한 호의가 울컥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당장이라도 그의 손을 단단히 잡고 인간에 대한 내 모든 믿음과 애정을 그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내가 다음으로 어렵사리 입에서 꺼낸 말이라고는 이런 것이었다. 선생님께는 잘못이 없습니다. 당신은 좋은 의사입니다. 내가 좋은 환자가 아니었을 뿐입니다.
문뜩 내 상황이 몹시 우습게 느껴졌다. 마음속은 마치 사막에 열풍이 부는 듯이 황량하게 말라붙어가고 있는데, 몸은 제멋대로 희극이라도 연기하고 있는 것 같았다. 두 번씩이나 실패하다니, 바보 같은 놈. 그렇게도 내일로부터 벗어나려고 몸부림을 쳤는데, 나는 또 오늘을 살고 있었다. 가엾은 광대 같으니. 폐 깊숙한 곳에서부터 깔깔거리며 웃음이 기어 나오려는 것 같았다. 그것이 기도를 타고 올라와 목의 입구에서 가래처럼 칵하고 걸리는 것이 느껴졌다. 의사에게 쟁반이나 그 비슷한 것을 좀 건네 달라고 손짓을 했다. 그가 손짓만으로는 내 의도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아 나는 직접 고개를 돌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침 침대 옆의 탁상에 U자 모양의 철 쟁반이 놓여 있기에 거기에 뱉고 보니, 내 웃음은 새빨간 핏덩어리 같았다.
난폭한 세상. 아이러니한 세상. 적의, 혹은 무관심. 의사가 불러온 또 다른 의사는 내 피부 아래로 침을 찔러 이런저런 내장 조직들을 뜯어가더니 내게 ‘간이 망가졌다’는 결과를 들고 왔다. 얘기는 대강 이랬다. 병동입원 전부터 포악하게 마셔댔던 알코올과 또 죽기 위해 들이 삼켰던 약들의 악영향이 결국 한계치를 넘어섰다는 것이었다. 그렇다, 순 자업자득인 것이다. 하얀 가운을 입은 의사는―입원한 병원에서 새로 만난 의사 말이다― 간 이식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런 것이 가능할 리가 없었다. 나는 알코올중독 경력이 있는, 벌써 두 차례 째인 자살시도 현행범이었던 것이다. 그런 인간쓰레기에게 주기에 간은 너무도 소중하다. 훨씬 희망적이고, 또 삶을 열망하는 선량하지만 병든 시민들은 이 양민들의 사회에 수도 없이 많은 것이다. 나는 내 케이스를 장기이식심사위원회에게까지 올릴 필요도 없다고 판단 내리고 그대로 의사에게 내 결론을 전했다. 의사는 내가 죽을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이미 알고 있다고 대답했다. 최대한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하려 노력했지만, 분명 내 체념에서는 엉망진창으로 뒤섞인 자멸적 감정의 역겨운 냄새가 노골적으로 풍기고 있었을 것이다.
일단락.
이렇게 된 것 병원 따위가 다 무엇이냐 싶어 나는 만류하는 의사에게 침묵으로 응대하고 퇴원했다. 얼마 안 되는 짐을 싸들고 병원 건물 밖으로 나온 나는 현관에 멈춰 서서 생각했다. 이제 어디로 간다? 누구 만날 사람이라도 있었던가? 아무리 생각해도 만나도 그만이고 안 만나도 그만인 값싼 술친구들 외에는 생각나는 사람이 한명밖에 없었다. 그렇지, 아버지가 계셨지. 별 수 있나, 겨우 하나 남은 혈육인데. 병실에 얼굴 한 번 안 비친 것을 생각하면 분명 나 따위는 꼴도 보기 싫다는 뜻임에 틀림이 없겠으나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몇 마디 대화라도 나누러 가야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발걸음을 옮기려는데 등 뒤에서 누군가가 내 어깨를 턱하고 잡는 것이었다. 뒤돌아보니 경찰 제복을 입은 장년 남자다. 이것 봐, 안색이 창백한데. 그의 말이다. 그야 요 며칠간 몇 번이나 피를 토했으니 창백할 만도 하다. 그렇게 대답할까 생각하다 그만두고 찬찬히 보니 이 사람도 구면이다. 이 경찰은 내가 자살을 시도했다는 신고를 의사로부터 받고 내게 찾아온 사람이다. 그는 내가 병원 침대 위에서 눈을 뜨자마자 온갖 질문을 퍼부어댔다. 그 질문이란 것들이 하나같이 너무나도 사소한 것뿐이어서 자세히 기억하고 있지는 않으나, 그가 마지막으로 내뱉었던 말만은 인상 깊게 기억하고 있다. 그는 내게 다른 사람들을 성가시게 하는 짓은 이제 그만두라고 말했었다. 성가심. 그렇다, 나는 주변 사람들을 성가시게 하고 있었던 것이다. 경찰에게서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약간의 죄책감과 함께 내 자살행위가 성공하지 못했다는 점에 대해서 창피함을 느꼈다. 성공하지도 못하는 자살행위로 나는 도대체 얼마나 사람들에게 성가시게 굴어온 것일까.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누군가에게 사죄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아니 애당초 사죄할 대상이 없다. 오히려 나는 누군가로부터 사죄 받고 싶다는 생각을 은연중에 떠올렸다. 누가 나에게 사죄를 해야 할까? 누가 나에게 미안해해야 할까. 근거를 알 수 없는 억울함으로 목이 매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문뜩 공격적인 감정이 가슴 속에서 파도치기 시작했다. 나는 내 눈앞에 서있는 경찰의 따귀를 때리고 넘어뜨려 마구 걷어차고 싶다는 생각으로 머릿속이 하얗게 되었다. 원망이 서린 눈으로 나는 그의 파란 제복을 말없이 쏘아보았다. 그는 당당하게 땅위에 두 발을 딛고 서있었다. 그의 근육과 뼈들은 아무런 의심도 없이 덜거덕거리며 살아 있었다. 자살이 범죄인 건 알고 있어? 그가 말했다. 나는 알고 있다고 대답했다. 그러면 어지간히 하고 그만두라고. 그의 말에 나는 잠깐 침묵하다가 담담한 어조로 알았다고 말했다. 알겠다. 아무래도 이 세상에서는 내가 성공할 수 있는 일이 그다지 많지 않은 것 같다. 나는 경찰에게 이제 그만 집으로 돌아가 봐야겠다고 말하고 발길을 돌렸다. 집으로. 그렇다, 집으로. 내 고향, 내 혈육, 내 땅. 아버지를 만나면 무슨 얘기를 해야 좋을까.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에 대해서 대화를 나눌까. 어느 골목으로 들어가야 나는 내 <집>에 도착할 수 있을까. 나는 이미 한번 아버지에게 도와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다. 아버지는 내게 나름대로의 도움을 주었으나 결과적으로 그것은 실패했다. 그리고 나는 내 발로 삶으로부터 도망치려고도 했었다. 무려 두 번이나. 그러나 그것도 실패했다. 어느 골목으로 들어가야 나는 내 집에 도착할 수 있을까. 지금 나는 한손에 옷가지 따위가 들어있는 가방을 들고 길을 걷고 있다. 그리고 실패뿐인 내 인생을 어떻게 해야 돌이킬 수 있을지에 대해서 누군가와―그 ‘누군가’는 아버지 밖에 없을 테지만― 대화해야할 것이다.
길 건너에 있는 버스정류장으로 가기 위해 나는 건널목으로 발을 내딛었다. 그런데 길을 건너던 와중 날카로운 마찰음이 귓속으로 파고들었고, 그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서는 집채만 한 트럭이 내 안면을 향해 정면으로 돌진해오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산산조각이 나서 죽었다.
존재의 굴레.
순간 나는 뭔가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아니 이상하다기보다는 오히려 잘못되어있었다. 시간은 정오였다. 하늘 높이 뜬 태양은 겨울의 차가운 공기 사이로 새하얀 빛살을 내리쬐고 있었다. 그 태양빛이 너무나도 선명했다. 나는 회색 콘크리트와 철근들로 세워진 도시의 한 가운데에 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물들이 너무나 밝은 흰색으로 번쩍이고 있어 눈이 부셨다. 그 노골적인 겨울의 빛은 마치 수술용 메스처럼 태양 밑의 세계를 가르고 해체하여 모든 것의 진면목을 드러내기 위한 것 같았다. 빛, 빛, 빛. 모든 것이 빛으로만 가득했다. 나는 무심결에 눈을 감았다. 그래도 태양광선은 눈꺼풀을 투과하여 내 영혼의 가장 깊은 부분까지 가차 없이 비치는 것이었다. 그로 인하여 나는 내 영혼의 어두컴컴한 부분들이 유난히 강조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썩고 악취가 나는 것일수록 깨끗한 공기 중에서는 더 눈에 띄는 법이다. 아무튼 간에, 나는 그 강렬한 빛줄기들에 의하여 약간 어리둥절해진 머리로 내가 느낀 이질감의 뒤꽁무니를 쫓고 있었다. 무언가가 잘못 되었다. 문제가 있다. 그 문제가 바로 무엇인가 하면, 내가 인지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나에게는 빛을 감지할 시력이 있었고 숨을 삼킬 때마다 기도를 스치고 지나가는 공기의 존재를 느낄 촉각이 있었다. 발밑에서부터 기어 올라오는 비릿한 피 냄새를 맡을 후각과 요란한 군중 사이에서 들려오는 나지막한 비명소리를 들을 청각 또한 있었다. 당장 뭔가를 집어먹어 볼 수는 없지만 미각 역시 있을 것 같았다. 이것은 커다란 문제였다. 새삼 나는 내가 평생 종교적인 문제에 대해 단 한 번도 고민한 적이 없는 채로 살아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심지어 무신론자라고 불리우기도 민망할 정도로 <그런> 것들에 대해서 아무런 관심도 없었던 것이다. 참으로 나는 삶 이외의 것에 대해 생각할 이유가 없었다. 고통과 빈곤은 천상계나 초경험적 세계에서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단단한 대지에서 실물로서 피어오르고 정수리를 빛 조각으로 온통 적셔놓는 태양 광선처럼 강렬한 실재에서 쏟아져 내리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어머니에게는 종교가 있었다. 그녀는 신을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정말로 어머니가 신을 믿었는지 어땠는지에 대해서는 확언할 수 없다. 빈민가에서 생활하는 이들에게 종교란 희망이 아니라 습관과 같은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녀의―그리고 그들의― 기도에서는 절대자에 대한 경의나 은총에 대한 욕망보다는 조각조각 분열되고 메마른 일상을 하나로 이어붙이기 위한 조임쇠나 나사못과도 같은 성격이 더 선명하게 보이는 것이다. 사실 그것이야말로 도시의 빈민이 할 수 있는 삶에 대한 최대한의 긍정일지도 모른다. 참으로 빛나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찾을 수 없는 이 희뿌연 인공물의 늪지대에서 사람은 그러한 열정도 없는 희망에 목까지 잠겨버리는 것이다. 나는 문뜩, 항상 매캐한 연기에 가려진 것 같던 어머니의 까만 눈동자를 떠올렸다. 나는 그녀의 영혼이 터무니없을 정도로 가난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어머니는 임종에 들 때마저도 그녀 특유의, 부정의 뉘앙스가 흐르는 입꼬리를 단단하게 닫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누구의 손도 잡지 않은 채로 죽었다. 단 그녀의 손 안에는 십자가 한 개가 고고하게 쥐여져있었지만, 글쎄, 나는 그만큼이나 비종교적인 표정으로 죽는 사람을 본적이 없다. 말하자면 빈민의 종교란 그런 것이다. 특히나 가난의 화신과도 같던 어머니는……
나 또한 그녀의 살점에서 태어났다. 그 점이 지금 내가 느끼고 있는 당황의 상당부분을 설명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나는 우선 피와 내장 따위가 어지러이 흩어져있는 콘크리트 바닥을 중심으로 작은 원을 그리면서 걸어보았다. 땅을 밟는 느낌이 어쩐지 어색했다. 내 발바닥을 마땅히 짓눌러야할 자신의 질량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무심결에 잃어버린 내 질량들을 찾아 새빨갛게 얼룩진 거리 위로 시선을 향했다. 내가 놓쳐버린 질량들은 터지고 찢어진 가죽 사이에서 끈적끈적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나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계속 원을 따라 돌면서 그 살덩어리들에 눈을 박고 있었다. 한 발짝 한 발짝 발을 옮길 때마다 내 머릿속에서는 관념의 기계장치들이 철컥거리며 바쁘게 돌아갔다. 이 상황을 어쩌면 좋은가? 나는 내 곤란 속에서 작지만 치명적인 절망이 박동하며 한숨과 함께 통증을 흘리고 있는 것을 느꼈다. 이것은 삶보다 더 나쁘다. 이건 도무지 상상조차 해본 적 없는 상황이다. 내가 세상에게 합리를 기대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정도로 엉망진창이라니? 마침내 나는 내가 어떤 초월적일 정도로 사악한 장난에 말려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거의―아니, 확실히!― 고의적인 수준이다. 문뜩 나는 수학자 파스칼이 익살스러운 어조로 늘어놓았던, 한 가지 내기에 대한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러나 내기에 걸 판돈을 단 한조각도 가지지 못한 사람을 억지로 노름에 참여시켜도 되는 것인가? 이런 말도 안 되는 게임의 룰을 정한 건 대체 누구냐. 부조리에게 있는 힘껏 얻어맞는 바람에 일종의 탈력상태에 빠져있던 관념 속에서 돌연 짜증이 솟구치는 것이 느껴졌다. 그렇다, 내가 가진 것이라고는 이것 밖에 없다. 세상의 구조와 맞대면할 때마다 가슴 밑바닥에서 울컥거리며 솟아오르는 가장 단순한 감정, 신경질이나 짜증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가시 돋친 부정의 감정뿐이란 말이다. 나로 하여금 ‘이건 아니다!’라고 외치게 만드는, 그 아우성치는 감정밖에 나는 세상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것이 없다.
꽤나 거창하게 말했지만 사실 이것은 내가 세상에 대해 취할 수 있는 행위가 신경질적인 감정을 불태우는 것 정도밖에 없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종말에 대한 욕망마저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그 어린 시절부터 주욱, 나는 너무나도 거대하고 막막한 세상에 대하여 아무런 영향력도 끼칠 수 없었던 것이다. 덕분에 그러한 반항의 감정 뒤에는 으레 지독한 무력감이 몸을 지배하곤 하는 법이다. 나는 은근히 요동치고 있는 짜증을 어금니로 씹으며 사지의 관절들을 축 늘어뜨렸다. 나는 한손을 들어 심장박동이 울리고 있을 터인 왼쪽 가슴에 가져다 댔다. 아니, 심장박동은 더 이상 뛰지 않았다. 심장은 질량들과 함께 내버려두고 온 것이다. 그러나 그 가슴속에는 여전히 깊은 구렁텅이가 파여 있었다. 오래전부터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깊어가는 것을 느끼고 있었던 그 예리한, 마치 통증과도 같은 깊고 깊은 공허가 말이다. 그것은 사라지지 않고 당연하다는 듯이 그 자리에 있었다. 그야말로 영혼에 새겨진 흉터처럼. 언젠가 병원의 침대 위에서도 이 공허에 대하여 새삼스럽게 생각해본 일이 있었다는 것을 떠올렸다. 애초부터 짊어지고 있었던 십자가인 것 마냥 그것은 죽음에도 불구하고 내 존재에 뿌리 깊게 박혀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참으로 병원이고 의사고 어머니의 수면제고 아버지의 손이고 모든 것이 아무런 소용도 없었던 것이다. 나는 한동안 내 텅 빈 왼쪽 가슴을 한손으로 꽉 붙들고 서있었다.
별달리 도리가 없었기 때문에 나는 아스팔트 위에 주저앉아 맞은편에 서있는 건물에 멍하니 시선을 꽂고 있었다. 시간에 대한 감각이 몹시 혼탁하게 어그러져있었기 때문에 얼마나 그러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여간에 꽤나 오랜 시간동안 넋을 놓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동시에 아주 짧은 시간만을 졸음에 빠져있었던 것 같기도 하였다. 흉측하게 뭉그러진 내 시체 주변에는 어느새 경찰이 쳐놓은 접근금지 표지가 서있었고, 그것을 중심으로 스무 명은 될법한 군중들이 몰려들어 있었다. 그들 중 어떤 사람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몹시 집중하여 한때 내 것이었던 살 더미들을 관찰하고 있었고, 어떤 사람은 욕지기가 난다는 듯이 한손을 입에 가져다 댄 채 미간을 찡그리고 있었다. 혹은 연민어린 눈길로 이미 반쯤 굳어버린 피 웅덩이에 시선을 내리까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지금 서술하였듯이 내 시체를 위한 관객들을 하나하나 뜯어보고 있었다. 그러고 있자니 한 가지 연상되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차에 치여 죽은 비둘기나 시궁쥐 따위의 시체가 거리에 내버려져있는 것을 발견한 행인들의 표정이었다. 부러진 날개에 싸인 눈구멍과 코에서 흘러나온 핏덩이들이 부리 주변에 걸쭉하게 엉겨 붙고, 부패해 부풀어 오른 새빨간 안구가 초점 없는 시선을 허공에 던지고 있는 그런 사체들 말이다. 행인은 그것들을 혐오하거나 혹은 동정한다. 참으로 값싼 감정으로 말이다. 그들은 한때 그 지저분한 시체들의 근육 하나하나에 짐승적인 열기가 흘렀다는 것을 상상하지 못한다. 그 열광적인 열파가 하늘을 날고 땅위를 기었으리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아니, 그들은 그것을 알기 위한 의욕조차 갖지 못하는 것이다!
아아, 하지만 그런 것들이 전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돌연 초연한 회의가 일어나 머릿속의 상념들을 전부 쓸어버렸다. 그리고 백짓장 같이 되어버린 사고가 정신의 오감으로 퍼져나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하늘 높은 곳에서부터 떨어지는 화살촉 같은 빛살들을 머리와 어깨가 흠뻑 젖을 정도로 받으며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내 입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내 귀 또한 아무것도 듣지 않았다. 새하얀 빛으로 가득 찬 공기의 밀도가 너무 높아서 나는 그 어떠한 행동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광휘! 나는 시각뿐만이 아니라 청각과 후각, 그리고 촉각까지 번뜩이는 광휘로 눈이 부셔오는 것을 느꼈다. 무언가가 변하려고 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상황이 말이다. 나는 내 영혼이 격렬하게 진동하며 어떤 절정점에 닿으려고 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내가 한계선 위에서 새하얗게 폭발하려는 순간, 나는 내 눈앞에 천사가 강림하는 것을 보았다.
은유나 암시가 아니라, 진짜 천사를 말이다.
허구와 실재에 대하여.
그것은 정말로 천사였다. 두부 전체에서 끊임없이 성스러운 후광이 뿜어져 나오고, 등 뒤에는 몸통을 감싸듯이 커다란 날개가 펼쳐져있는, 새하얀 옷을 걸친 불꽃처럼 아름다운 인형이었다. 그 모습이 너무도 ‘천사’ 같았기 때문에 나는 오히려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내가 어떠한 종류의 종교적 희곡에 참여하고 있다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여하튼 그것은 정말로 성스럽고 아름다워서, 나는 그것이 세간에서 말하는 천사라는 것임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하기야 천사가 정말로 존재한다면, 그 수많은 화가들이 그린 천사의 이미지가 진짜 천사와 닮아야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나는 앉아있던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천사가 내려오는 것을 본 뒤부터 내 머릿속에는 그의 얼굴을 좀 더 자세히 보고 싶다는 욕망이 파이프의 균열에서 새어나오는 액체처럼 느릿느릿 쌓이며 점점 수위를 높이고 있었다. 나는 홀린 듯이 천사의 눈부신 안면에 시선을 꽂고 마침내 손까지 들어 조심스럽게 그의 얼굴을 향해 들어올렸다. 그 아름다운 빛 덩어리 같은 얼굴에 손끝을 조금씩 가까이 할수록 내 마음속에서는 일종의 희열 같은 감정의 파도가 점점 거세어지고 있었다. 천사! 천사다! 비록 내가 죽어서도 사라지지는 못했지만, 내 앞에 천사가 있지 않은가? 어쩌면 나는 도무지 상상도 할 수 없는 형태의 구원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 병원의 하얀 침대시트도 의사의 목소리도 어머니의 죽음도 아버지의 거친 손도 내게 주지 못했던 구원을 이 천사가 내게 주려는 것은 아닐까? 정말이지 염치없는 소리지만 마지막에는 종교와 신비주의가 내 공허한 영혼을 구해줄지도 모른다. 나는 무심결에 그런 기대를 떠올리고, 그 덕분에 흥분하고 있었다. 내 정신과 감정이 마구 튀어 오르고 진동하며 주변을 둘러싼 공기처럼 하얗게 탈색되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런데 황홀한 광채로 인하여 이목구비도 잘 구별되지 않던 그의 안면에서 순간 눈의 윤곽이 보였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나는 천사의 시선과 확실히 마주볼 수 있었다. 새하얀 동공이 가차 없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희디희다 못해 창백하고 투명해보일 정도로 깨끗한 눈빛은 무감정한 수준을 뛰어넘어 차라리 광물에서 뿜어져 나오는 무기질의 빛살처럼 차갑게만 느껴졌다. 죽은 개미의 사체를 내려다보는 인간의 눈빛도 그보다 무뚝뚝하지는 않으리라. 천사의 얼굴을 쓰다듬을 듯이 뻗어나가던 내 한쪽 손은 그의 눈 아래에서 우뚝 멈추었고, 당장이라도 터질 듯 날뛰던 내 감정은 냉각수라도 끼얹은 듯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천사란 모두 이런 눈으로 인간을 내려다보는 것일까? 그리고 어떻게 움직일 엄두도 내지 못하고 멈춰서있던 내 가슴 한복판에 어느새 천사의 손끝이 닿아있었다. 양옆으로 갈비뼈가 솟아나있는, 단단하게 맞물린 복장뼈 한가운데에 말이다. 나는 이제부터 무슨 일이 벌어질지 도무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다만 그 상황에서 내가 직감적으로 알아차린 것은, 일이 어찌되건 내게 구원 같은 것은 없으리라는 사실이었다.
그러한 생각으로 머리가 꽉 차서 말 한마디도 입 밖으로 내지 못하고 얼어있던 와중에, 천사는 참으로 한 점의 망설임도 없이 자신의 손끝으로 나를 밀쳤다. 나는 그 무자비한 힘에 저항하지도 못하고 몸체 째로 뒤로 넘어졌다. 곧 방금 전까지 앉아있던 콘크리트 바닥에 하릴없이 부딪히리라는 생각에 순간 나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런데 충분히 바닥에 내동댕이쳐져 등과 엉덩이에 아픔을 느끼고 있어야 할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어느 것에도 충돌하지 않고 계속 넘어지고 있었다. 이상하다는 생각에 눈을 뜨자, 천사와 나 사이에는 이미 수직으로 5미터 정도의 거리가 벌어져있었고 나는 계속해서 등 뒤로 추락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건 넘어지는 것이 아니다. 나는 지금 떨어지고 있는 것이다. 내 뒤에 절벽이나 깊은 구멍 같은 것은 없었는데. 그런데 절벽 같은 것이 있었든 없었든 하여간에 나는 계속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천사의 모습은 시야 저편으로 점점 멀어지고, 나는 도대체 어디로 향하는 건지도 알지 못한 채 끊임없이 추락하고, 추락하고, 또 추락하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토끼 굴에 빠진 앨리스처럼, 나는 정말로 오랫동안 떨어져 내렸다. 그 시간이 너무나도 길었기 때문에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것이 정말 오랜 시간이었는지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는지도 단언할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시선 저 끝에 남아있던 하늘색 파편이 계속해서 작아지다 결국엔 점이 되어 사라진 후에도 나는 새까만 어둠 속에서 시간감각도 잊어버리고 한참을 추락했다. 나는 어둠 때문에 시각도 차단당한 채, 오직 내 몸―아니 영혼을 잡아당기는 불가사의한 중력의 힘만을 느끼면서 온갖 생각을 다 했었다. 그러나 그 생각이라는 것들이 하나같이 추락 중인 내 자신보다 부피가 컸던 탓인지 결국에는 단 하나의 사유도 결말을 짓지 못한 채 전부 생각 중에 놓쳐버렸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수십 수백 개의 생각들을 캄캄한 허공에 놓아버린 뒤에야 나는 땅바닥에 발을 디딜 수 있었다.
나는 이미 어느 정도 짐작을 하고 있었다. 이야기의 흐름상 나는 필시 지옥에 떨어진 것이리라고 말이다. 말하자면 나는 계속 내 머리를 깨부술 듯이 파도쳐오는 세상의 구조 덕분에 반쯤 넋을 놓고 있었다. 나는 그야말로 거의 포기상태였던 것이다. 내가 반항의 감정에 대해서 이야기한 적이 있던가? 세상에 대하여 내가 보일 수 있는 단 하나의 행위라고 말했던 그것 말이다. 내 심장을 구성하는 성분들 중 가장 뜨거운 것이었던 그 감정마저도 천사를 만난 뒤로는 점점 차갑게 식어가고만 있다고 나는 고백해야겠다. 정말이지 나는 그 뒤로부터 계속 웃기지도 않은 코미디 무대에 끌려올라와 연극에 동참하고 있는 기분인 것이다. 파스칼의 내기라고? 그것이 도대체 무슨 상관인가! 지금 나는 내가 필사적으로 거부하고 부정했던 것에 <포함되어> 있다. 이것이야말로 내 체념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필요한 사실들 중 가장 효과적인 것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그렇다, 나는 체념하는 중이었다. 이 미쳐 돌아가는 희극무대에서 약간의 우울을 혼자 품에 안고, 도대체 이 극이 어떻게 흘러갈지, 내가 알지 못했던 무대장치의 구조는 어떻게 되어있는지. 체념의 기분으로 그저 시선만을 굴리고 있는 것이다.
나는 손을 뻗어 땅을 쓰다듬어 보았다. 후끈한 열기가 마른 모래들 사이에서 손바닥으로 흘러들었다. 고개를 들자 어둠은 어느새 어느 정도 걷혀있었다. 주변의 공기에는 약간의 붉은색이 산란한 빛살처럼 어지러이 헤매고 있었고, 사막처럼 넓게 펼쳐진 대지의 지평선 한구석에서는 다른 곳보다 더 뜨겁고 육중해 보이는 빛이 감돌고 있었다. ‘지평선’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는 했지만 내게 보이는 광경이란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내 눈앞에 펼쳐진 풍경에는 하늘이 없었던 것이다. 빛은 머리 위가 아니라 발밑에 놓인 모래사막의 안쪽에서부터 붉은 기운을 머금고 춤추듯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지평선이라고 부를만한 것은, 붉은 사막과 그 위의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새까만 어둠 사이의 불분명한 경계선뿐이었던 것이다. 하늘이 있어야 할 곳에서는 텅 빈 암흑이 공기를 짓누르듯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그래서 내 눈에는 마치 이 세계의 풍경이 캄캄한 밤에 지펴놓은 모닥불과 어둠 간의 은밀한 애무처럼 보여 졌던 것이다. 그리하여 내가 발견한 ‘더 뜨겁고 육중해 보이는 빛’은 하늘거리는 불꽃의 정상(頂上)처럼 시야에 꽂혀 들어왔다. 그리고 나는 내가 그리로 가야만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나는 내가 밟고 있는 불꽃의 꼭대기를 향하여 한 발짝씩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한 것이다.
불꽃의 정상으로 향하는 길은 가면 갈수록 덥고 뜨거웠다. 모래는 빨갛게 달아올라 맨발로 철판을 밟는 것 같았고, 코와 입으로 들락거리는 공기는 흡사 끓는 기름을 들이마시는 듯 했다. 이 땅은 말 그대로 불지옥이었다. 열기는 묵직한 중유처럼 출렁거리며 사방으로 파도치고 있었고, 나는 파도의 흐름에 반항하는 것처럼 힘겹게 한발 한발을 앞으로 내딛었다. 땅 위의 모든 것이 무자비한 열파에 수천수만 번씩 씻겨나가고 있었다.
나는 내 영혼의 살갗이 불타고 내장까지 소각되는 듯한 통증을 느끼며 계속 걸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으나 나는 울고 있었다. 열파와 정면으로 맞대면 하고 있는 얼굴은 눈물범벅이 된 채로, 있는 힘을 다해 이를 악물고, 입 꼬리를 얼굴 양쪽으로 찢어 당겼다. 그리고 나는 나 자신에게 신신당부하듯이 끊임없이 입속말을 중얼거렸던 것이다. 불꽃이 내 영혼을 씻어내고 있다. 불꽃이 내 영혼을 씻어내고 있다. 불꽃이 내 영혼을 씻어내고 있다. 나는 눈알이 증발할 듯이 뜨거운 공기 중에서 눈을 번쩍 뜨고 울면서, 도무지 형언하지 못할 고통 속에서 기묘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있었다. 불길이 내 정신의 가장 깊숙한 구석까지 핥고 들어가 사고의 관절과 영혼의 뿌리에 덕지덕지 끼어있는 죄악과 패배주의의 찌꺼기들을 불사르는 이미지가 마치 꿈처럼 눈앞에서 아른거리고 비대하게 부풀어 요동쳤다. 마침내 그러한 상상과 온몸을 지지는 고통이 절정에 닿을 무렵, 나는 내가 완전히 깨끗해졌으리라는 근거 없는 믿음에 감격하여 비명까지 지르며 오열하는 것이었다.
오히려 이것이야말로 구원이 아닌가? 나는 열파 속에서 외마디 소리를 치며 그렇게 생각했다. 어릴 적부터 머릿속 한구석에 단단하게 웅크리고 있던, 내가 끔찍한 괴물이고 야수의 새끼이리라는 믿음 때문에 나는 단 한 번도 내 영혼이 깨끗하다고 생각해본 일이 없다. 내게는 곰팡이가 피어있었고, 구석구석이 썩어 문드러져 있었으며, 내 정신은 불량품이었고 악취가 풍겼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죄인이었기 때문에 멸시받고 사형당해야 함이 마땅했다. 그리고 세계는 참으로 지당하게도 나를 죽이고, 지옥에 떨어뜨린 것이다. 그런데 나는 지금 지옥불 속에서 구원과 흡사한, 어떤 지고지순한 악의를 느낀다. 내 병든 영혼에 대한 악의, 뿌리부터 썩어있는 내 인간존재에 대한 악의를 말이다. 불꽃은 자신의 아름답고 무자비한 혀를 날름거리며 내 심장을 깡그리 불태우고 재조차 남기지 않았다. 나는 고통이 필요했던 것이다! 내가 삶과 존재에게서 받았던 진흙처럼 질척거리고 비열한 고통들을 송두리째 깨뜨리고 없애버릴, 가장 절대적이고 무작위한 고통이 나는 필요했던 것이다.
이것으로 모든 일이 끝난 것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나 내 의식은 여전히 존재했고, 죄와 악으로 얼룩진 내 영혼은 여전히 지저분했다. 내가 느꼈던 완전무결하고 결정적인 구원은 고작해야 환상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사정(射精)의 순간은 쾌락과 희열로 가득하지만 사정이 끝난 뒤에는 누추한 육체와 진저리나는 존재의 염증이 남는다. ‘끝’이라는 것은 아름답고 유혹적이지만 결코 쉬이 손에 들어오지 않는 것이다.
심지어 나는 그날 이후로 불꽃의 정상을 발견한 일이 한 번도 없다. 그것은 단 한번 내 영혼을 불살라준 뒤 그대로 사라져버린 것이다. 내게 주어진 것은 그저 끊임없이 펼쳐져있는 모래사막과 열파의 미지근한 잔해들뿐이었다. 어쩌면 다시 그 불꽃과 만나, 이번에야말로 완전히 불타 증발해버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만을 갖고서 몇 번이고 반복하여 사막의 지평선을 넘었지만 그것은 나타나지 않았다.
모래들은 붉게 달아올라있었지만 충분히 뜨겁지 못했다. 공기 또한 열기로 들떠있었으나 그것도 충분하지는 못했다. 나는 그 더운 사막을 그저 헤매기만 했다. 어떻게 해야 증기처럼 산산이 흩어질 수 있을지 골몰하면서. 그렇게 맥없이 사막 위를 걷다보면 가끔 눈물이 흐르곤 했다. 그러나 그것은 그때의 그 열파 속에서 흘렸던 눈물과는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눈물이었다. 내 울음소리로 말미암아 나는 자신이 지쳐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도 나는 계속 걸었다. 별다른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정장을 입고 한 손에 서류가방을 든 남자를 만났다. 내가 그에게 누구냐고 묻자 그는 자신을 ‘관리’라고 소개했다.
마지막 장.
나는 그가 어떤 ‘관리’인지 궁금했다. 그래서 어떤 관직에 있으며 무엇을 하는지에 대해 물었다. 그는 이 사막을, 그러니까 지옥을 관리하는 게 자신의 일이라고 말했다. 아하, 그러니까 당신은 그 천사와 비슷한 것이로군. 그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나는 관리에게 무언가를 물어보고 싶었지만 딱히 궁금한 것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할 말을 고르고 있던 와중에 문뜩 그의 서류가방이 눈에 들어오는 것이었다. 나는 괜한 호기심이 동하여 그에게 가방 안을 좀 보여줄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관리는 어려운 일도 아니라는 듯이 서류가방을 열어 내 눈앞에 들이밀었다. 가방 안은 종이뭉치들로 꽉꽉 들어차있었다. 어떤 것들은 무어라고 문자로 빼곡했지만 대부분의 종이들은 하얗게 비어있는 상태였다. 별 생각 없이 그것들을 보고 있었는데 돌연 심중에 떠오르는 생각이 하나 있었다. 나타나지도 않는 무언가를 찾아서 계속 후덥지근한 사막 위를 헤매느니 차라리 방금 떠올린 생각대로 행동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싶어 나는 곧바로 관리에게 입을 열었다. 종이 몇 장과 펜 한 자루를 좀 얻을 수 없겠느냐고 말이다.
그는 다소 당황했지만 내가 줄곧 부탁하자 처음 있는 일이지만 안 될 것도 없다며 그것들을 내주었다. 나는 그에게 성심껏 감사를 표하고 종이뭉치와 펜을 받아들었다.
얼마 뒤 관리는 가야할 곳이 있다며 자리를 떠났다. 작별인사를 하고 그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나는 모래바닥에 주저앉아 텅 빈 지면(紙面)을 쳐다보며 한참을 생각에 빠져있었다. 곧 나는 수기를 한편 쓰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첫 문장을 어떻게 시작할지에 대해 한동안 고민하다가, 첫 문장부터 쓰기보다는 맨 마지막 문단부터 쓰는 것이 더 내 상황에 합당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나의 수기는 다음과 같이 끝난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죽을 수도 없다. 회한은 영원하고 고통 또한 끝나지 않는다. 존재. 내가 존재하기 시작했던 시점에서부터 이미 모든 것은 실패했었던 것이다. 나는 이곳의 뜨거운 공기를 마시면서 펜을 긁는다. 아무것도 끝나지 않을 것이다. 결말 또한 없다. 종언은 꿈이고 한낱 환각이다. 태양조차 없는 이 불길 속에서 나는 눈을 뜨고 있다.
각 장과 문장들의 호흡이 매우 짧고 읽기에 편리하다. 내용 자체는 이렇다할 특이성이 없지만 사건들을 엮고 적절한 대목에 등장시켜 역겨운 불행과 끔찍한 고통들을 한낱 우스개소리로 만들어버리는 풍자 기술은 몹시 교묘하고 참고할만 하다. 본문이 진행되는 내내 활자들 속에서 끊임없이 벌어지는 추악하고 소름끼치는 사건들은 그것이 전혀 대수로운 일이 아니라는 듯이 늘어놓는 미니멀리즘한 문장에 의하여 희화화 되어버린다. 그것이 다소 과도한 경향이 없잖아 있기도 하지만, 과도한 미니멀리즘이라는 것부터가 이미 아이러니한 코미디와 다름 없는 것이다. <이야기>의 측면에서 보면 이것은 그저 삶에 대한 순진한 긍정을 갖고 있는 인간이 노골적인 경험주의로 말미암아 회의에 빠져버리는─그 회의마저도 마지막에는 맹목적인 노동으로 억지로 잊어야만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회의에 대한 회의'로 내버려지고 말지만 말이다─ 내용에 지나지 않지만, 이 책 자체가 이야기의 진행에 무게를 두고 있다고 말하는 것부터가 무리한 일일 것이다. 오히려 이것은 체념을 학습한 인간이 때때로 느끼는 의문과 흡사한 면이 있다. 그런 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쓰여졌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처음부터 짐작 했듯이, 결국 결론은 나오지 않는다. 전 세계의 불행들을 일주한 캉디드와 그의 일행들은 더 이상 행복이라는 환상을 좇지도 않는다. 그들은 이제 지독한 불행에 빠지지 않는 대가로 권태를 얻었고, 권태를 잊기 위해 노동을 하며 존재의 목을 가까스로 축이기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캉디드의 머릿속에서는 그 치명적인 믿음과 기대의 이름인 '낙관주의'가 가끔씩 발작하는 의문처럼 고개를 들기도 하지만, 그는 설탕에 절인 레몬을 입에 넣고 밭을 갈러 나가야 한다.
<마르틴은 인간이란 원래 그런 것이라고, 걱정과 번민 속에서 허우적거리거나 그렇지 않으면 권태에 빠질 수밖에 없도록 생겨 먹었다고 한마디로 잘라 말했다. 캉디드의 생각은 달랐다. 그렇지만 잠자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빌려온 첫날과 이튿날 쉴 새 없이 400쪽 가량을 읽어냈는데 잠시 덮어놓고 보니 어느새 일주일이 지나있었다. 아차 싶어서 일주일만에 나머지 100쪽 가량을 읽고 보니 독후의 감상이라는 것이 머릿속에서 몸통이 썩뚝 잘려나간 느낌이다. 처음에는 살고 싶다고 야옹야옹 울어대던 고양이가 2년이 지나고 나서는 물독에 빠져 몇 번 헛발질을 해보다가 체념하여 <죽어서 태평을 얻는다> 운운하다 담담하게 죽는다. 이것은 근대의 인간에게서 죽음을 의식하는 방법을 배워서 그런 것임에 틀림이 없다. 짐승마저도 인간에게 물이 배면 자살을 본다. 책 맨 뒷장의 작가연보를 읽어보니 이 사람도 퍽이나 아픈 인생을 살았다. 비록 병으로 죽었으나 자살을 생각해본 일이 분명 한두번은 아닐 것이다. 근대 이후부터는 개인의 죽음이 어떤 형식이든 반드시 자살의 냄새가 나기 마련이다. 어쩌면 학자나 지식인, 혹은 작가나 예술가라는 족속들만 그런걸지도 모르겠다. 생물 실격.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가장 먼 짐승이 된 이유는 자신의 죽음을 상상하는 능력에 있을는지도 모른다. 인간을 닮은 짐승이란 보고 있으면 너나 나나 처량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까뮈의 이방인을 읽은 것이 먼저인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은 것이 먼저인지는 모르겠으나, 이 책은 이방인과 더불어 내 문학체험의 가장 오래되고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책들 중의 하나이다. 그것은 즉 그리스인 조르바가 내게 문학적 감명을 준 '첫번째 작품들 중 하나'라는 뜻이기도 하다.
본 작품에서는 작가의 분신격인 '나(이름이 나온 적이 있던가? 마지막으로 읽은 것도 워낙에 오래된 일이라 기억하지 못하겠다)'가 어느 해안도시 주점에서 늙은이 알렉시스 조르바를 만나 그를 고용하고, 그와 함께 크레타에서 갈탄광 사업을 해나가며 겪는 일들이 현재진행형으로 쓰여진다. '크레타에서 갈탄광 사업을 해나가며 겪는 일들'이라고는 하나, 결국 이 책에서 주안점으로 삼는 것은 '나'와 조르바의 일이다. 더 정확히는 책벌레에 작가 나부랭이인 '나'가 자신과는 전혀 다른 성질을 가진 조르바에게서 '대지에 붙어 사는 자의 위대함'을 발견하는 이야기다.
'대지에 붙어 사는 자' 조르바는 술과 음식과 여자를 좋아하며 땀을 흘리며 일을 하고 춤으로 감정을 표현할 줄 알며 산투리를 연주하는 것을 자랑으로 여긴다. 그는 인생을 최선을 다해 향유한다. 억지로 자유로워지려고 하지 않음으로 인하여 그는 그 어떤 작중인물보다도 자유롭고 자기자신에게 충실한 개인으로 표현된다. 조르바는 해수욕 중인 뫼르소와도 닮았다. 다만 뫼르소보다 훨씬 단단한 촉감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 그를 더 다부진 인간으로 상상되게 한다.
'나'는 어떤가? 그는 조르바를 만나면서 관념으로만 가득 찬 자신의 머리를 슬프게 여기게 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을 쓰며 진리를 탐하는 천성을 마지막까지 어찌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것은 또 그것 대로 어쩔 수도 없는 일이고, 굳이 개탄할 일인 것만도 아닌 것이다. '나'의 추상적인 탐욕 역시 본질적으로는 조르바의 삶에 대한 갈망과 크게 다를 바는 없다. 그러나 '나'는 자기 자신의 관념으로 말미암아 너무도 불안한 인간이 되어버렸다는 점으로 인하여, 필연적으로 조르바 같은 자유로운 인간에게 강렬한 감명을 받고 자기자신에 대해 회의하게 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는 조르바를 영혼의 스승으로 삼는다(사제관계가 아닌 사제관계야말로 진실한 가르침과 배움의 관계다).
이 책을 처음 읽던 당시의 나 역시 굳이 비유를 하자면 조르바보다는 '나'쪽에 한없이 가까운 인물이었기에, 조르바의 인생의 모든 것을 육감적으로 씹어삼키는 듯한 삶의 방식에는 굉장한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상상도 해보지 않은 방식의 위대함이 그에게는 있었던 것이다. 수많은 지식인과 철학자들이 인간의 인간적인 부분을 끊어냄으로서 찾으려고 했던 진리를 그는 완전히 인간으로서, 욕심많고 감정적인 인간의 손과 입으로 집어삼켰다. '그리스인 조르바'는 내게 어떠한 방식의 강렬한 계몽이었다.
거울 앞에 서기만 해도 알 수 있는 사실이지만 나는 조르바에게 그토록 감명을 받았다고 말하면서도 조르바처럼 되지는 못했다. 나는 여전히 관념과 추상에 뒤덮혀 살가죽이 부풀어오른, 자신의 추악함을 견디지 못하는 인간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내게 있어 그리스인 조르바와의 만남이 순 허무한 것만은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적어도 내가 나의 소설, 글 속에서 조르바에게서 발견한 것과 같은 빛나는 자유와 상쾌한 위대함을 찾기 위해, <그리스인 조르바>를 몇 번이나 되풀이하여 읽은 그 날 이후부터 계속해서 애를 쓰고 있다는 사실 덕분이리라.
1. 수정의 여지가 많다. 특히 전~중반부. 그러나 한동안은 건드릴 의욕이 나지 않을 것 같다.
2. 오래전부터 내 소설은 조작된 고백록의 성격을 가지는 경우가 잦다.
이런 경향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지금으로서는 판단이 서지 않는다.
3. 어쩌면 <전락>의 패러디 수준밖에 되지 않는 글인 것은 아닐까? 이미 작품 내에서도 그 점을 고백하고 있다..
어느 병자의 하루
어느 현대인의 하루
어느 반항인의 하루
어느 범죄자의 하루
어느 연극배우의 하루
어느 불특정인의 하루
어느 하루
언제든지 세상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어 말을 내뱉을 수 있게 만드는 그 작은 기계는 그의 외로움에 가장 효과적으로 불을 붙였다. 그는 매일같이 가슴 속에서 들끓어 오르는 소통에 대한 열망과 표현에 대한 미치광이 같은 욕망을, 이전까지는 펄떡거리는 관자놀이를 압박하며 가라앉힐 수밖에 없었으나 이제 그는 그 기계장치를 손에 쥐고 통화버튼을 누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날도 그는 창문틈새로 들어온 햇빛이 눈꺼풀을 가차 없이 찔러대는 시간이 돼서야 눈을 떴다. 그는 자기 머리맡에 놓여있던 휴대폰을 집어 들고 시간을 확인했다. 액정화면의 디지털시계는 12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12시 30분. 그는 통화버튼을 눌러 통화기록을 불러온 뒤 가장 최근에 기록을 남긴 상대에게―그게 누구인지 확인하지도 않고― 전화를 걸었다. 규칙적인 전자음으로 이루어진 신호가 가고, 상대가 전화를 받는다. 여보세요. 자살하기엔 너무 늦은 시간이야. 네? 그리고 그는 비몽사몽간에 전화를 끊었다.
해가 중천이었다. 그는 잠이 덜 깬 정신으로 천장을 쳐다보았다. 커다랗고 넓적한 물고기 한 마리가 뇌 속을 헤집으며 헤엄치는 것이 느껴졌다. 물고기는 뇌의 주름 사이에서 몸부림치며 매끄럽고 관능적으로 미끄러지고 있었다. 그는 그것의 지느러미가 대뇌피질에 밀도 높은 물결을 일으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머릿속은 엉망진창이었고, 시야는 그 생선의 움직임을 따라 어그러졌다. 태양. 태양빛이 천장에 발린 벽지를 하얗게 빛나게 하고 있었다. 그는 손바닥으로 안구를 압박하며 천천히 일어섰다. 커다랗고 넓적한 물고기의 비늘 사이로 스며드는 태양광선. 덮고 있던 이불을 걷자 무방비한 몸에 한기가 몰려들었다. 그는 몸을 움찔하며 무어라고 입속말을 중얼대더니 벽을 짚고 일어섰다. 한손에는 여전히 휴대폰이 들려있었다.
남자는 눈꺼풀의 무게를 감당하기가 굉장히 힘겹다는 듯, 느린 동작으로 두어 번 눈을 깜빡였다. 새삼 어지간히 채광이 좋은 방이라고 생각하며 그는 거실로 나섰다. 방바닥이 냉골이었다.
거실 벽에 걸려있는 시계는 어느새 12시 42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다시 한 번 내일이 올 때까지 11시간하고도 18분이 남아있다. 어제 같은 내일. 오늘 같은 내일. 남자는 여전히 손에 들린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어제 같은 내일. 오늘 같은 내일. 세수가 하고 싶다. 그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화장실 바닥을 덮고 있는 파란 타일은 밤새 보일러를 틀어놓지 않은 방보다도 훨씬 차가웠다. 파란 타일은 발바닥이 아플 정도로 차가웠다. 지금은 겨울인데, 지금은 한겨울인데 넌 자해를 즐기는군. 비참한 나르시시스트 같으니라고. 세면대 앞에 서자 거울이 정면에서 그를 반기며 그렇게 말했다.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수도꼭지를 돌렸다. 파란 타일만큼이나 시리고 투명한 물이 쏟아져 나왔다. 그는 세수를 했다. 거울은 더 이상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얼굴에 찬물을 끼얹자 남아있던 졸음도 달아났다. 그러나 피로는 사라지지도 가벼워지지도 않았다. 그의 피로는 몹시도 오래되고 무거운 것이었다. 그것은 잘 때나 깨어있을 때나, 아침에나 저녁에나 끈질기게 남자의 눈 안쪽 깊은 곳에 또아리를 틀고 앉아있었다.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물이 뚝뚝 떨어지는 거울 속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다가 곧 물기를 닦고 나갔다. 그리고는 덜 마른 손으로 전화기를 주워들고 거실 바닥에 주저앉았다. 눈의 흰자에 박힌 실핏줄들이 따끔거렸다. 거실창문을 통해 들어온, 칼날 같은 한낮의, 한겨울의 태양광선이 주변의 공기를 투명하면서도 선명하게 꿰뚫고 있었다. 남자의 눈에 들어오는 모든 사물들도 마찬가지로 겨울 해를 따라 깨끗하고 새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대기는 깨진 유리처럼 자극적이고 무결했다. 그리고 그런 살풍경 속에서 남자의 시선과 정신만이 혼탁하게 어그러져있었다. 시간은 벌써 한시를 넘어 있었다.
곧이어 남자는 쥐고 있던 휴대폰의 뚜껑을 열더니 조심스럽게 그것의 액정화면을 검지 끝으로 쓰다듬기 시작했다. 한참을 그러다가 마침내 무슨 번호를 누르려는 듯 다이얼 위로 손가락을 옮기더니, 얼마간 망설이다 결국에는 그 어떤 버튼도 누르지 않고 휴대폰의 송화기를 자기 입 앞으로 가져가는 것이었다. 여보세요, 밖은 추운가요? 햇볕이 얼마나 차갑습니까? 난 지금 굉장히 머리가 아파요. 밖으로 나가면 머리가 덜 아프게 될까요? 휴대폰의 대기화면을 밝히고 있던 조명이 꺼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무슨 은밀한 비밀이라도 얘기하는 것처럼 계속해서 무엇인가를 속삭였다. 알겠습니다, 선생님. 오늘이 예정일인건 기억하고 있어요. 그래서……
갑자기 말을 멈춘 남자는 휴대폰의 뚜껑을 닫고 떨어트리듯이 그것을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돌연 노기가 섞인 목소리로, 음절 하나하나를 끊어 재차 말하는 것이다. 굉장히 머리가 아프다. 굉장히.
시계는 1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남자는 선반 위에 놓여있던 약병에서 알약을 한 알 꺼내먹었다. 그러고는 오른손에 들려있는, 물이 반 정도 담긴 투명한 유리컵을 무심하게 좌우로 살짝 흔들더니 성에 차지 않는다는 듯 다시 약병을 집어 들고 하얗게 정제된 알약 두 개를 물과 함께 삼켰다. 그는 약병을 선반위에 올려놓고 이제는 텅 빈 유리컵을 무표정하게 응시하더니 이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내 정신은 혼탁한가? 내 정신은 혼탁한가? 내 정신은 혼탁한가? 내 정신은 명징하지 않은가? 무엇 때문에, 무엇에 의하여? 약. 내 정신을 재구성하는 화학물질은 어떤 의미로 둘러싸여있나? 너는 자포자기에 빠진 병자다. 그리고 유리컵의 표면에 비친 반투명한 입이 지껄이기 시작했다. 너는 두통 때문에 약을 먹는 게 아니지. 너는 자해를 즐기는군. 그것은 이제 휴대폰의 송화기를 입에 가져다댄 채 계속해서 떠들어대고 있었다. 통증은 증명이야. 나는 약을 처먹거나 보일러가 꺼진 방안에서 겨울을 보내거나 둘 중 하나만을 골라야한다. 내 정신은 혼탁하다. 새까맣게 가라앉은 미련덩어리. 어설픈 퇴폐주의자. 너는 추위처럼 선명하고 고통처럼 날카로운 순수를 꿈꾼다. 그러나 또한 너는 유물론과 신경학에게 네 몸을 바치려한다. 너는 눌어붙은 살덩어리와 정신을 한데 묶어 뒤섞고 싶어 한다. 약으로. 현대적으로 깎여나가고 병리학의 자궁에서 태어난 인공의 진실로. 스스로의 뇌를 찢어발겨라. 명징에의 욕구를 강간하고 그 속에 하얗게 정제된 정액을 흘려 넣어라. 무감각한 정액을.
그는 휴대폰을 닫고 유리컵 속의 선홍색 입술을 조용히 내려다보았다. 컵의 외면은 태양빛을 받아 희게 번쩍거리고 있었다. 흰색 알약. 반복되는 수사. 남자는 개수대 위에 그것을 올려놓고 시계를 보았다. 두 시. 그는 외출복으로 갈아입기 위해 방으로 향했다.
머리가 어찔할 정도로 공격적인 태양빛에 남자는 잠시 넋을 놓고 있었다. 공기는 얼음장 같았고 땅에는 밟히고 녹아 지저분하게 굳은 눈들이 쌓여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양빛은 마치 날카로운 창처럼 온천지에 자신의 얇고 뾰족한 촉을 박아 넣는 것이었다. 남자는 난자된 몸과 머리를 붙잡고 그제야 걷기 시작했다. 태어난 것이 고마워서 눈물이 날 지경이다. 주머니속의 휴대폰을 손끝으로 문지르며 그가 중얼댔다.
그는 지하철역을 향해 걸었다. 그의 집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역까지 도보로 20분이 걸리는 위치에 있었다. 채광이 좋고 전철역까지는 걸어서 20분이면 도착할 수 있으며 거실과 방, 그리고 화장실이 있는 집. 남자는 항상 그 집이 자신에게는 너무 과분한 것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집을 팔고 더 어둡고 후질구레한, 좁고 불편한 집으로 이사를 가진 않았다. 그저 그런 생각을 아무도 없는 방 안에서 두어 번 조용하게 지껄였을 뿐이다.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사실이지만, 그는 행동주의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라고 해서 날 때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겠으나 실상 그에게서는 행동력이라는 것을 찾기가 어려웠고, 덕분에 남자는 자기 주변이나, 거창하게 말하자면 세상에 대해서 끼칠 수 있는 영향력 또한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아무튼 그렇게나 미약한 존재성을 소유한 그는 건조하게 얼어붙은 거리 위를 경직된 시선으로 걷고 있었다. 두 시에서 십여 분 정도 지난 시간. 한겨울이기도 하거니와 원체 행인이 없을 때였지만 당연한 예외로 거리 위에는 두꺼운 옷으로 몸을 둘러싸고 넋 나간 눈빛을 가진 사람들이―주로 노인네들이― 점점이 세워져있었다. 남자는 그들과 눈을 마주치거나 혹은 옷깃이라도 스칠까봐 몹시 걱정하는 것처럼 걸었고, 실제로 걱정하고 있었다. 평일의 화창한 대낮에 길거리를 돌아다니다보면 누구나 알게 되는 사실이 있다. 그것은 흐리멍덩한 동공으로 죽을 날만 기다리는 늙은이들이 세상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회색으로 칠해진 골목 구석구석에 늘어앉아 처참하게 시간을 증명한다. 남자는 그들의 무기력한 눈과 잇몸 안쪽으로 말려들어간 입술에서, 눈앞을 지나가는 젊음에 대한 은밀한 악의가 빛나고 있는 것을 느꼈다. 자글자글한 주름들 사이에서 조용히, 그리고 불확실하지만 틀림없는 감정으로 그것은 남자를 향해 뻗어 나오고 있었다. 정당하고 맹목적인 적의. 불행한 사람들. 그들의 시선을 피해 한층 더 단단하게 옷매무새를 바로잡으며 남자는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게 그렇게 말했다. 그는 그들의 아들과 딸을 상상했다. 그리고는 시간을 돌려 그 노인들의 젊음을 상상했다. 탄생과 노동과 생존과 생식. 생식. 단편적인 이미지와 그 이미지에 섞인 어슴푸레한 절망적 뉘앙스들이 남자의 정신을 까맣게 뒤덮었다. 곧이어 울먹거리기 시작한 자신의 심장을 부여잡고 그는 지나치게 비대해지려하는 진실로부터 잰걸음으로 도망친 것이다. 목적지에는 역이 있었고, 그는 현명했다.
남자가 탄 전철은 도시 중심에 있는 번화가를 향해 달린다. 아침부터 끊임없이 틀어댔을 것이 분명한, 좌석 밑에 숨겨져 있는 난방기와 빼곡히 들어찬 사람들의 입김 덕에 그 직방체의 공간은 그다지 따뜻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눅눅하게 습기가 차있었다. 양복을 차려입은 회사원들과 무리지어 떠드는 대학생들, 그리고 등산용 가방을 맨 몇몇 늙은이들이 남자와 같은 칸에 있었고, 인공적인 전등불빛 아래 그들의 얼굴에서는 햇빛의 흔적이 사금파리처럼 빛나고 있었다. 그 사이에서 남자는 창문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손잡이를 붙잡고 서있었다. 두꺼운 유리창에는 어둠속에서 반사광을 번쩍이는 맞은편 레일과 함께 침울한 표정으로 자신과 마주보고 있는 남자의 모습이 겹쳐보였다. 그는 사람으로 가득 찬 전철 안에서 어느 누구와도 부딪히지 않고 어느 누구의 말소리도 듣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그리고 차창에 고정된 그의 시선은 그 누구의 얼굴도 보지 않기 위해 뻣뻣하게 긴장되어 있었다. 그는 머리에 열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주머니에 넣은 한쪽 손은 땀이 나도록 단단하게 휴대폰을 붙들고 있었다.
그대로 얼마쯤 시간이 흐르자 돌연 차량 안이 소란스러워졌다. 대낮부터 얼굴이 벌게지도록 술에 취한 어느 중년 남자가 전철에 타면서 무엇이라고 고함을 지르기 시작한 것이다. 키가 크고 이마가 정수리까지 올라온 그 남자는 승객들에게 문화생활의 중요성에 대해 화난 목소리로 지껄이고 있었다. 이거 봐, 뮤지컬, 뮤지컬 좋지 않아? 그는 전철 벽에 붙은 어느 극단의 광고지를 손가락으로 두들기며 말했다. 당신들은 이런 데에 돈을 써야해. 텔레비전을 사고 휴대폰 통신사에 요금을 내기 위해 돈을, 지폐들을 쓰는 게 아니라, 예술인들한테 보답해줘야 하지 않겠어? 그래야 문화예술 시장이 성장하지―그는 ‘성장’이라고 말하면서 코웃음을 쳤다―. 성형수술과 콘돔에 쓰인 돈들은 이미 충분해. 뮤지컬을 보고, 표를 사고, 그렇게라도 예술가들을 지원하면서 인생을 용서 받아야지. 응? 사람들은 취객의 헛소리에 아무 관심도 없다는 표정을 짓기 위해 입술을 단단히 다물고 있었다. 누구도 그에게 대답하거나 혹은 제지하려고 들지도 않고, 승객들은 그저 다소 성가시다는 얼굴로, 얼른 자신의 목적지에 도착해 술 취한 중년 남자와 뮤지컬 광고지를 뒤로 하고 전철에서 내릴 수 있기만을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그 사이에서 우리의 주인공만이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방어적으로 움켜잡은 그의 양 주먹은 이미 비라도 내리듯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지나친 의도와 가식적인 프로파간다의 색깔을 띤 문장들은 오히려 현실에 넘쳐난다. 절묘한 균형으로 이루어진, 관념으로 기울지 않은 현상과 받아들이기에 부담이 없는 정갈한 의미들은, 말하자면 <현실적인 상황>이라는 것들은 가상의 이야기에서나 나타나는 다듬어진 형태들인 것이다. 소설이 되지 못하는 현실들은 그야말로 소화할 수 없는 의도와 선전의 덩어리들이다. 프로파간다. 선전. 프로파간다. 선전. 프로파간다. 머리가 벗겨진 남자는 병적인 분노와 조소로 일반대중을 질책한다. 직방체로 잘려나간 무대 위에서, 연극적으로. 진심을 담은 연극성으로. 어딘가에서 자극받은 감정이 술기운에 떠밀려, 그의 고결하고 예측할 수 없는 정신의 근간을 이루는 연극배우 기질을 이끌어낸 것이다. 연극…… 그렇게 단언할 수 있을까? 진심을 객관화시키고 있는 것은 나뿐일지도 모른다.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도록 그런 독백을 읊고 있던 남자는 문장 끝에 구두점을 찍음과 동시에 열린 지하철 문으로 자기도 모르게 뛰쳐나간 것이다. 아아, 앞으로 다섯 정거장은 더 가야했는데. 하지만 그는 아직 닫히지 않은 문으로 되돌아가지 않았다. 아무튼 간에, 남자는 그 의도로 덕지덕지 덧발라진 부담스러운 공간으로부터 도망친 것이다. 그는 플랫폼에서 다음 열차가 오기를 기다렸다. 기다리는 동안 그의 입은 ‘선생님’에게 조금 늦을지도 모르겠다고 말을 전하고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전화를 걸었다면 남자가 통화해야하는 상대는 ‘선생님’이 아니라 그가 고용한 간호사였을 것이다. 그녀는 특유의 상냥하고도 기계적인 어투로 남자의 말을 들어줄 것이며, 어떤 질책이나 유감의 말도 하지 않을 것이다. 자신이 상대해야하는 사람들의 특성을―자신의 직무를― 잘 파악하고 있는 그녀는 설령 남자가 약속시간으로부터 한 시간이나 늦게 되리라고 전화를 걸더라도 아무런 감정적 반응도 보이지 않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알았다’고만 대답할 것이다. 그로 말미암아 남자는 무어라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비참해질 것이며, 자신이 실제로 전화를 걸지 않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는 것이라고 남자는 생각했다. 그렇게 혼잣말을 씹었다.
선생님, 선생님, 연극을 아십니까? 연극과 기만과 위선의 차이점을 아십니까? 무대 위에서 조명이 자신을 비출 때, 배우의 눈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 지 아십니까? 자신이 주인공이라는 것에 대하여, 자신의 미약하고 사소한 손동작 하나에 마저도 사람들이 시선을 집중하고 그것이 뜻하는 바를 고민한다는 사실에 대하여 그들이 얼마나 커다란 안락과 쾌감을 느끼고 있을지 생각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그들이 숭배하기위해 찾아다니는 <관객>을 정신의학에서는 무어라고 부릅니까? 그 배우들은 사실 마음만 같아서는 오히려 돈을 쥐여 주고 관객들을 모셔오고 싶을 겁니다. 그리고, 그리고 선생님, 선생님께서는 그들의 무대가 얼마나 넓은지에 대해 생각해보셨습니까? 관객이라는 자리조차도 사실은 하나의 역할인 것입니다. <관객>이라는 이름의 역할입니다. 조용히, 그리고 최선을 다해서 무대 위 배우들의 손짓과 발짓, 또 어조와 목소리의 톤 하나하나에까지 골몰하여 마치 지상의 인간에게 석판을 내리는 신처럼, 관객들은 배우에게 의미라는 복음을 부여하는 것입니다. 선생님, 관객 앞에서 배우의 눈은 어디를 향하고 있을 것 같습니까?
「들어오세요. 2주 만이군요.」
「네.」
공포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무대 위에 올려져있는 모든 것들을 통제하는 공포에 대해서요. 선생님께서는 무대에서 벌어지는 <실수>들에 대해 상상해보신적이 있으십니까? 배우가 대사를 잊어버리거나, 소품을 떨어트리거나, 무대장치가 고장 나거나, 배경이 쓰러지거나, 혹은 어느 <관객>이 난동을 부릴 수도 있지요. 연극무대가 무너지는 겁니다. 연극은 사소한 실수나 혼란만으로도 쉬이 무너집니다. 조명과 어둠은 벗겨지고, 배우고 관객이고 할 것 없이 사람들은 갑자기 들이닥친 <적나라한 괴리>에 당황합니다. 공기는 얼어붙고 사람들은 경직됩니다. 순식간에 연극은 중지됩니다. 무대장치가 파괴된 시점에서 사람들은 자신이 어떤 역할을 맡아야할지 알지 못하고 곤혹스러워합니다. 그것이 바로 공황상태입니다. 공포의 본질입니다. 배역配役의 실종이야말로 공포의 뿌리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 연극에 포함되어있던 모든 사람들은 공황의 원인을 증오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대사를 잊어버린 배우를, 장치를 느슨하게 묶은 무대감독을, 휴대폰의 전원을 꺼놓지 않은 관객을, 그것이 누가 되었든 간에 사람들은 넘치는 원한과 분노로 치열하게 공황의 책임자를 찾을 것입니다. 그리고 가엾은 <실수>는 입을 다문 채 고함을 지르는, 격분한 군중에게 처참하게 산산조각이 나겠지요.
「그래, 그동안 어떠셨습니까?」
「글쎄요. 항상 엇비슷하지요.」
어디에 기만이 있는지 아시겠습니까? 어디에 이중심리가 숨어있는지 아시겠습니까? 아니, 이중심리라는 말조차 아까운 난해한 기만과 의식간의 지독한 불일치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선생님, 나는 생전 연극을 보러간 일이 단 한 번밖에 없습니다. 그마저도 끝까지 보지 못했습니다. 좌석에 앉아있는 내내 그놈의 <실수>가 벌어지지나 않을까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저 배우가 독백을 하던 도중 갑자기 난감한 얼굴로 입을 멈추지는 않을까, 저기 불안하게 놓여있는 소품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지지는 않을까, 진지한 장면이 진행 중일 때 관객석의 누군가가 돌연 웃음을 터트리지는 않을까. 나는 그러한 온갖 불안들 때문에 한시라도 안심하고 극에 집중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모르게 벌벌 떨다가, 결국에는 벌떡 일어나서 뒤도 안 돌아보고 극장 밖으로 도망쳐버린 것이었습니다. 그렇게나 두려워하던 <적나라한 괴리>를 일으키고 무책임하게 도망친 것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이었던 겁니다! 나는 연극이 어떻게 끝났는지, 내가 소란스럽게 도망쳐 나온 뒤 일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도 알지 못합니다. 그러니만큼, 내가 말한 공황이니 공포의 본질이니 하는 것은 사실 왜곡된 믿음과 신경증이 낳은 과격한 망상일 뿐일는지도 모릅니다.
「좋습니다. 저번에 드린 약은 어떻던가요?」
「긍정적이에요. 차분해지는 것 같고…… 하여간 긍정적입니다.」
선생님, 내가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지 아시겠습니까? 굉장한 일입니다. 나는 자신만만하게 주장하고, 말을 마치자마자 방금 내가 주장했던 것을 자신만만하게 부정합니다. 그렇다고 날 거짓말쟁이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나는 그저 확정적으로 확정적이지 않은 것뿐입니다. 특히나 내가 단단한 관념과 스스로의 지성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불구하고 제 발로 이런 곳까지 찾아오며, 자발적으로 신경약물들을 집어삼키는 한 말입니다. 사실 나는 그 약들을 먹고 싶지 않아요. 그런 종류의 약들을 먹는 것은 <강제적인 포기>의 뉘앙스가 너무 강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는 기꺼이 그 약들을 먹습니다. 심지어 과용하기까지 합니다. 선생님, 어떻게 보면 이것은, 이런 문제들은 필연적인 구석이 있습니다. 어떤 점에서 그러한가하면 시대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 유난히 그렇습니다. 세상 어디에 있든 손안에 쥐여진 작은 기계의 번호판을 누르기만 하면 <관객>을 불러낼 수 있는 시대란 말입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하시리라 믿습니다. 그러나 어쩌면 내가 자행하는 행위들에 시대적인 문제 따위는 손톱만치도 관계가 없을뿐더러, 실제로는 그런 행위와 이율배반성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선생님과 만나야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어쩌면. 그러나 어쩌면. 그러나 어쩌면.
「잘됐군요.」
「네. 긍정적입니다.」
그러나 선생님, 내가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지 아시겠습니까? 나는 돈만 주면 살 수 있는, 이미 짐승의 사체로는 보이지 않도록 세련되게 다듬어진 정육을 보면 참기 힘든 분노와 당혹감을 느낍니다. 사형수의 목을 부러뜨리기 위한 버튼이 세 개씩이나 되며 그 버튼들을 누르는 것 또한 세 명의 각기 다른 사람이라는 사실을 생각할 때마다 혁명주의자적인 증오를 불태웁니다. 매일 밤마다 살맛마저 잃어버릴 정도의 고뇌 속에서 잠이 들지만 다음날 아침이면 모조리 잊어버린 듯한 얼굴로 깨어난 것을 자각할 적마다 나는 치명적인 자살을 갈망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끊임없는 타성으로, 내 손에 피를 묻히지도 않은 채 먹고 마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혁명주의자는커녕 정치적인 행동가가 되지도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매일 밤 졸음과 약기운을 견디지 못하고 잠들어버립니다. 아시겠습니까? 나는 모순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결백해질 수 없는 것입니다. 또 다른 모순이 발생하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에 현재의 모순을 묵묵히 씹어 삼키는 것입니다. 아니, 아닙니다. 사실은 전부 알고 있을 것입니다. 나에게 모순 같은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으며, 나는 모순 따위의 것에 신경조차 쓰지 않습니다! 아아, 선생님, 선생님. 내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자하는 것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럼 이번에는 약의 용량을 조금 늘려보도록 합시다.」
나는 정직을 찾아 헤매는 것입니다. 가능한 한 최고의 정직을 말입니다. 나는 최후의 문장을 찾고 있습니다. 그 마지막 문장을 말하기 위해 나는 방금 뱉은 말을 부정하고, 또 그것을 부정하기 위해 새로운 문장을 끄집어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새로운 문장을 부정하기 위해 또 한 번 입장을 걸러냅니다. 나는 누구보다 진실을 말하고 싶어하며 정직을 열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 입에서 나오는 문장들 중 어느 무엇 하나 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약은 2주 분을 드리겠습니다. 그럼 2주 뒤에 다시 뵙죠.」
그 누구보다도 정직과 진실을 갈망하는 나는 그 누구보다도 거짓말쟁이와 닮았습니다. 그야말로 거짓말쟁이처럼 산만한 주장을 정신없이 늘어놓기만 하는 것입니다.
「네, 2주 뒤에 뵙겠습니다.」
보십시오. 선생님, 이게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그리고 정말로 내가 <이것이 무슨 일>인지 궁금해 하기나 한단 말입니까―
남자는 침묵을 지켰다. 그가 바라는 단도직입적이고 명백한 그 무엇을 위해서, 상대도 없는 곳에서 끊임없이 떠들기만 하던 그가 귀와 입을 앞에 두고서는 치열하게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선생님’을 뒤로 하고 병실 문고리를 돌리며, 남자는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하게 자살을 꿈꿨다. 아무튼지 그 짧은 시간 동안 그는 공상 속에서 수십 번도 더 자신의 머리를 작살냈던 것이다.
시간은 오후 5시를 막 넘어있었다. 결국 달리는 전철 앞으로 뛰어들지도, 3층 건물에서 창문을 깨고 뛰어내리지도 않은 남자는 집으로 돌아가는 전철에 몸을 싣고 황혼으로 물든 차창에 무기력한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전철은 마침 지상을 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한겨울답게 빨리도 찾아온 저녁은 냉랭한 공기에 어스름한 노을빛을 뒤섞으며 창밖으로 이질적인 광경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 눅지근한 빛과 유리조각 같은 냉기의 틈바구니에서 남자는 금빛으로 빛나며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솟은 빌딩을 보았다. 그것은 마치 테러리스트들에게 ‘나를 무너트리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혹은 끝장난다―’고 말하는 듯 도발적으로 서있는 것이었다. 남자는 그것이 비참한 고뇌와 현실의 복잡성에 부딪혀 고통스럽게 마모되어가고 있는 혁명주의자들의 정신에 내려진 희망의 상징 같다고 생각했다. 내일까지는 여섯 시간하고도 삼십분이 더 남아있었다.
집에 도착한 남자는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하늘은 어느새 완전히 어두워져있었다. 일없이 거실을 헤매다보니 지독히 배가 고픈 것이 느껴졌다. 남자는 그제야 자신이 오늘 하루 종일 한 끼도 먹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그는 반사적으로 냉장고 앞으로 걸어가 문을 열다가, 돌연 깜짝 놀라며 발작하듯이 문을 닫아버린 것이다.
타성! 육식. 채식.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끊임없는 타성으로 먹고 마십니다. 자각을 자각하고 또 그 자각을 자각한다. 내가 견딜 수 없는 것은 동물의 피나 사상가적 소명에 부합하지 않는 식품유통과정이 아니다. 나는 순전히 자아주의자이며 극단적인 개인주의자인 것이다. 아니, 그것도 아니다. 주의, 주의, 주의(ism)! 무엇을 천명해야 좋을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냉장고 앞에서 내뱉듯이 입속말을 중얼거리던 그는 신경질적으로 발걸음을 옮겨 책상 위에 있던 휴대폰을 집어오더니, 벌컥 냉장고문을 열고 손에 쥐여져있던 것을 그 속에 던져버린 것이다. 그리고는 다소 흥분한 기색으로 닫은 문을 주먹으로 두어 번 탕탕 두드리다가 홱 몸을 돌려 방으로 향했다.
남자는 방에서 오늘 받아온 약봉지를 들고 나왔다. 그리고 그것을 하나씩 뜯어 유리컵 안에 담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의 손은 히스테릭하게, 그리고 반항적으로 반투명한 기름종이를 하나하나 찢어갔다. 일 일치, 이 일치, 삼 일치, 마지막으로 십사 일치. 어느새 유리컵은 온갖 색깔의 알약과 캡슐들로 수북이 채워져 있었다. 남자는 유리컵을 들어 올려 달그락달그락 소리가 나도록 흔들다가 컵에 물을 붓고 송두리째 집어삼킨다. 내일이 오기까지는 다섯 시간 정도가 남아있었다.
곧 약기운이 두개골 내부를 휘젓기 시작했다. 울증인지 유쾌함인지 분간할 수 없는 무거운 감정이 성대에서부터 정수리까지의 노선을 빙글거리는 웃음기를 띄고 느릿느릿 순환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새하얗게 뒤집힌 얼굴로 거실바닥에 주저앉아, 골똘히 무언가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약물이 만들어낸 조용한 유쾌감과 바닥없는 우울의 한가운데에서 남자는 진지하게 단어들을 골라낸다. 악순환. 기만. 소통에의 욕구. 언어에 대한 불신. 시선공포증. <클라망스: 거짓말은 아름다운 황혼과 같아서 물건 하나하나가 뚜렷하게 보이도록 합니다.> 변명. 또 그에 대한 변명. 적나라하게 드러난 진실에 대한 열망. 남자는 싱글거리며 웃는다. 진실을 고백해야지. 입을 열고 혀를 움직여야한다. 내 진심이 모두 계획된 것이고 꼴같잖은 논리에 맞춰 짜여 진 것이라는 사실은 지각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알아채고 있을 것이다. 설령 상대를 앞에 두고 입술 한 번 뻥긋거리지 않더라도, 나는 단단하게 물린 살과 뼈의 벽 안쪽에서 허구의 관객이 이해하기 쉽도록 행위의 인과관계와 관념의 동기에 대해 친절하게 설명한다. 감정과 진심을 담아서. 관객이자 배우. 배우이자 관객. 나는 관객이자 배우다! 배우이며 관객이고 내 안에서 나만을 위한 연극을 구상하여 각본을 짜고 무대를 찾아 정력을 다해 연기하는 가엾은 연극배우다. 가엾은? 아니다! 아무도 날 가엾게 여기지 않는다. 나 자신조차도 그러하다. 여러분―‘여러분’이라니!―, <배우이자 관객>이라는 말이 현대에 와서는 어떤 의미를 지니게 되었는지 아시는가? 그것은 자가당착과 자기합리에 빠져 오만해야할지 좌절해야할지조차 선택하지 못하는 예술가들을 위해 준비된 최악의 비난이다. <스스로 배우이자 관객>이라는 비난을 받은 예술가들은 이제 자살하는 수밖에는 없다. 어떤 통찰력 높은 비평가나 너무 위대해지는 바람에 더는 아무것도 주장할 수 없게 된 위인들로부터 그런 비난을 받은 예술가는 순식간에 값싼 감상주의자로, 그야말로 자살해야 마땅한 존재로 변해버리는 것이다. 그들에게 남은 길은 자살밖에 없다. 자살! 자살! 자살! 그러나 그마저도 완벽하게 실행하기란 너무나 어려운 일이다. 까딱 잘못했다가는 목숨까지 내던졌음에도 불구하고 <배우이자 관객>이라는 오명을 벗을 수 없게 된다. 그렇기에 관객을 잘 골라야하는 것이다. 더 무결한 절망을 표현하기 위해 더 무결한 각본을 써야만 하는 것이다. 모든 상황과 뉘앙스가 자신의 자살에게 유리하게만 작용할 완벽한 무대를 만들어야하는 것이다. 무대장치와 소품들을 철저하고 까다로운 눈으로 선택해야하는 것이다. 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이 얼마나 끔찍한 일이란 말인가. 아아, 그러나, 그러나 나는 괜찮다. 왜냐하면 나는 이미 자신이 <배우이자 관객>이라는 사실을 스스로의 입으로 폭로했고, 또 폭로할 것이기 때문이다. 내 손으로 내 등에 칼을 꽂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끊임없이 고백을 독백할 것이고, 아무에게도 그 역할을 넘겨주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거듭 말하지만 나는 모순마저도 씹어 삼켰다!
그러면서 그는 벌떡 일어나 냉장고로 향한다. 그는 다소 흥분한 발걸음으로 냉장고 앞에 도달해 마찬가지로 흥분된 손짓으로 냉장고의 문을 연다. 그리고 차갑게 식은 휴대폰을 끄집어내 뚜껑을 열고 전화번호부를 뒤져 병원의 전화번호를 찾아낸 뒤 당당하게 통화버튼을 누른다. 서리 낀 송화기가 남자의 입술에 들러붙었다. 그리고 남자는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사정없이 지껄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는 이미 수없이 많은 말들을 내보였다. 그리고 그가 이제부터 떠들어댈, 또 한 번의 똑같은 좌절과 기만들을 침착하고 들어줄만할 인내심을 ‘여러분’께 바라는 것은 아마도 무리한 일일 것이다. 지금 남자는 약기운과 자기기만에 힘입어 하루의 끝자락에서 자신만만한 채 목소리를 높이고 있으나, 그의 마지막 말들이 다시 후회와 자살에 대한 갈증으로 장식되게 될 것은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자명한 일이다. 무엇보다도, 지금 전화기를 붙들고 신나게 지껄여대고 있는 남자 자신부터가 사실 병원의 업무시간은 오후 7시까지이며, 자신이 현재 열정을 다해서 꺼내놓고 있는 ‘말’들은 아무도 듣지 않은 채 전파 사이로 사라질 것이고, 곧 휴대폰의 수화기에서는 ‘금일업무가 종료되어……’ 운운하는 목소리가 조용한 뉴에이지 음악과 함께 흘러나올 것임을 머리 한 구석에서 눈치 채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또 다시 자기 자신의 연극배우 기질에 대한 장황한 좌절의 말들을 늘어놓고, 그 뒤에는 수화기에서 울리는 뉴에이지 음악이 과민하고 노이로제적인 자기 자신의 감정에 대한 정신병리학적 제제일지도 모른다며 터무니없는 피해망상에 시달릴 것이다―더 지독한 것은 남자 자신이 그런 사고방식이 병적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로 말미암아 남자는 매일같이 반복되는 탈력감과 비애에 빠져 공허하고도 열렬한 목소리로, 연결되지도 않은 휴대전화 너머에 도움을 청할 것이 틀림없다. 그는 어디에도 없는 ‘선생님’에게 이제 그만 모든 것을 끝마칠 수 있게 해달라며 도움을 청할 것이다. 그리고 남자는 매일 밤 그랬듯이 본적도 없는 커트 코베인의 시체를 상상할 것이다. 엽총을 입에 물고 방아쇠를 당기는 장면을 꿈꿀 것이다. 두개골의 절반이 부서지고 사방에 피와 뇌수가 튀는 파괴적인 자살을 수천 번도 더 소망하다가, 어느새 약기운에 떠밀려 쓰러지듯 잠에 들 것이다. 그리고는 다음날 아침 잠에서 깨어, 더없이 절망적인 심상으로 또 한 번 결의할 것이다. 오늘에야말로 내일 같은 내일이 오기 전에 자살할 수 있기를 말이다.